저글링

 

 

 

 

 

     내 손은 두개뿐인데

     잡아야 할 손은 여러개이다.

     애써 친절을 베풀면서

     쉬운 사람은 아니라고 강조하는 사람처럼

     내가 잡아야 할 손들은 뚱한 표정을 하고 있다

 

 

     너무 빨리 돌아가는 회전문 안에서

     우리의 스텝은 배배 꼬이고 뒤엉킨다.

     회전과 와류를 빠져나가지 못해

     우리는 빨래처럼 잔뜩 뒤엉키며 물이 빠진다.

     아무나 막 목을 조르고 싶다.

 

 

     남을 웃길수 있는 능력을

     남에게 웃음거리가 됐다로 번역하면서

     우리는 자존심이 상한다.

     슬픔을 팔고 있다는 수치의 감정이

     우리를 화나게 한다.

 

 

     손안에 쥐고 있는 얼음처럼

     차가움에서 시작해 뜨거움으로 가는 악수.

     내 손은 두 개뿐이지만

     여러개의 손을 잡고 있다.  (P.10 )

 

 

 

 

 

 

          부끄러움을 찾아서 2

 

 

 

 

 

        고향 친구 빙부상에서 제수씨에게 습관적으로

        안녕하시냐고 물었던 나도 안된 인간이지만

        이즈음의 삶이라는 것도 부황자국 같다.

        살겠다고 제 피를 뽑은 자리의 피멍처럼

        죽을 힘으로 살고 사는 힘으로 죽는다는 생각.

 

 

        생각이 있었지만 말하지 않았을 뿐인데

        결국은 생각이 없어지는 방식으로,

        꽃이 피고 바람이 불고 비가 왔다.

        지지도 못하고 매달린 목련의 부황 자국 같은 얼굴.

 

 

        물에 빠져 죽은 나비를 애도하며 이옥(李鈺)은 썼다.

        산꽃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나니, 누구를 위하여 어지럽

        게 붉은가?

        꽃놀이 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일가족의 뉴스

        흩날리는 꽃잎들 사이로 차와 함께 찌그러진 사람들 멀리

        아직 꽃들은 울긋불긋하다.

 

 

        한주에 세번 문상을 하고 나서

        죽음이 얼마나 가까운지 깨닫는 일은 공교롭고 새삼스

        럽다.

        죽음은 너무나 당연해서 생략 가능한 문장 같지만

        생략된 것을 더듬을 때마다 가슴이 눌린다,  (P.30 )

 

 

 

 

 

 

 

            천국의 아이들 2

                 이영광 형께

 

 

 

 

 

 

          자기가 제일 아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 모인 곳이 지

          옥일 테지.

          세상에 안 아픈 사람은 없고

          아픈 사람들도 가끔은 아프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가르르 호호호 꽁지 빠진 새들처럼 웃고 난리다.

 

 

          점잖게 앉아서 염치를 만들어내는 이 능력자들이

          아무도 안 아픈데 혼자 다 아픈 이 능력자들이

          어젯밤에 다녀온 곳은 차마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곳

          이라서

          비록 마음 한 자리 불탄 비닐처럼 흉칙하게 얽었어도

          한세상 장난처럼 농담처럼 지나갈 수는 없는가.

 

 

          세상엔 상처 잘 만들어서 상 받는 사람도 있고

          덕분에 이렇게 술추렴하면서 울혈을 푸는 사람도 있다.

          상처는 상처로만 열린다.

          잔뜩 풀어 헤쳐논 이 상처들은 다 뭔가.

          요즘은 아무도 시를 읽으면서 울지 않고 격앙되지도 않

          는데

          아무도 안 보는 시를 명을 줄여가면서 쓰고,

          조금 웃고, 조금 끄덕이고, 들렸다 가라앉앗다 하면서

 

 

          뚫어지게 보고 있는 사람은 역시 쓰는 사람이다.

          여기 통증은 조금 안다는 사람들은 다 모였는데

          봉인된 저 상자는 누가 무엇으로 열었는가.

          하긴 아픈 사람만 봐도 같이 아픈 곳이 천국일 테지.  (P.68 )

 

 

 

 

 

 

 

           이것도 없으면 너무 가난하다는 말

 

 

 

 

 

           가족이라는 게 뭔가.

           젊은 시절 남편을 떠나 보내고

           하나 있는 아들은 감옥으로 보내고

           할머니는 독방을 차고앉아서

 

 

           한글공부를 시작했다.

           삼인 가족인 할머니네는 인생의 대부분을 따로 있고

           게다가 모두 만학도에 독방 차지다.

           하지만 깨칠 때까지 배우는 것이 삶이다.

           아들과 남편에게 편지를 쓸 계획이다.

 

 

           나이 육십에 그런 건 배워 뭐에 쓰려고 그러느냐고 묻자

           꿈조차 없다면 너무 가난한 것 같다고

           지그시 웃는다. 할머니의 그 말을

           절망조차 없다면 삶이 너무 초라한 것 같다로 듣는다,  (P.102 )

 

 

 

 

 

 

             -이현승 詩集, <생활이라는 생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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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2 20: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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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2 21: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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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2 20: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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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2 21: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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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3 01: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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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3 09: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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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5-10-03 06:46   좋아요 0 | URL
언제나 웃고 노래할 수 있는 하루가 되기를 꿈꾸며
오늘 아침도 엽니다. 고맙습니다.

appletreeje 2015-10-03 09:21   좋아요 1 | URL
예~저도 언제나 웃고 노래할 수 있는 하루가 되고 싶습니다~~
저도, 고맙습니다~*^^*

2015-10-03 11: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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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0-03 1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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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원 가는 길

 

 

 

 

 

         먹고 웃고 떠든 동창회는 두 시에 끝나고

         세 시에 호텔을 나와 택시를 탔다

         "을지로 입구로 가 주세요."

         세운상가를 지날 때

         "세운 상가가 그대로 있네요." 했더니

         그때부터 기사 양반 말이 많아졌다

         대형상가가 생기면서 세운상가가 죽었다면서

         나라의 경제 문제까지 이어졌다

         "기사 양반 고향이 어디세요?"

         "부산입니다"

         내 고향은 대구

         지역감정 아닌 향수 같은 것

         친밀감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목적지가 가까워지자

         "여기는 왜 가시는데요?"

         "문화원에 공부하러 가요."

         "연세가 얼마신데요?"

         "여든 셋이요."

         "일흔 남짓밖에 안 보이시는데요."

         택시비 사천삼백 원

         호기롭게 오천 원을 내어주고

         십 년 젊어진 할마씨

         발걸음이 가볍다  (P.16 )

 

 

 

 

 

 

             4.19 민주공원의 아침

 

 

 

 

 

 

           "여러분 몇 살이지요?"

           "다섯 살."

           "맞았어요. 여기는 다섯 살 이상은 못 오는 곳이예요."

           아침 여섯 시는 어둡고 쌀쌀하다

           육십 칠십 팔십대가 다섯 살 아이가 되어

           선생님 구호에 맞추어 국악기공 체조를 한다

           일곱 시 운동이 끝날 무렵이면

           진달래 능선 뒤로 파아란 하늘 아래

           그림같이 고운 삼각산 인수봉

           영령들 무덤 앞을 지나며

           건강히 잘 지낸다고 고개 숙이고

           단풍이 시작한 연못가 벤치에 앉으면

           일찍 잠이 깬 수련

           인사를 한다  (P.28 )

 

 

 

 

 

 

            추석

 

 

 

 

 

            나무 위에 사과는 빨갛게 살찌고

            추석 음식 장만하느라고 어머니는

            밤 새우고도 고단한 줄 모르시던 시절

 

 

            빨간 원피스에 새 구두 신고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시골 마을 뛰어다니던 단발머리

            어른 몰래 사과 따다 동네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면

            빙그레 웃으면서 아버지 하시던 말씀

            "우리 종아는 장가나 보내야지."

 

 

            아들 식구들 제사 모시고 간 후

            막내딸 내외 와서 자 주고 가고

            오늘 밤은 외손자가 저 방에서 자고 있는데

            그리움은 강물 되어 흐르는 밤  (P.29 )

 

 

 

 

 

 

             부모의 마음

 

 

 

 

 

 

            막내딸이 이사를 하며

            소용이 없다며 에어컨을 보내 왔다

            설치해 주러 온 기사

            "할머니, 어떻게 해드릴까요?"

            "내 부모 일이라 생각하고 알아서 잘해 주세요."

            두어 시간 넘게 걸려 깔끔하게 끝냈다

            전기세 아까워 별로 사용할 것 같지는 않다

            "기사 양반, 우리 앞집 식당 음식이 맛있는데 저녁 먹

            고 가요."

            "너무 늦어 마음만 고맙게 받고 가겠습니다."

            "아무래도 저녁은 먹어야 할 테니 먹고 가요."

            정말 맛있게 잘 먹었다면서

            커피잔 들고 식당에서 나오는

            얼굴 불그레한 두 기사

            오늘 아들 노릇 해 주었으니

            밥을 먹인 나도 즐겁답니다  (P.30 )

 

 

 

 

 

 

             집 없는 달팽이

 

 

 

 

 

             겨울밤 마루에 나오다

             발바닥 뭉클

             기겁하고 불을 켠다

             발가벗고 기어다니는

             보기 민망한 달팽이

 

 

             우리가 친숙한 달팽이는 집이 있다

             그리고 예쁘다

             그러나 평생 집을 업고 다닌다

 

 

             너는 업고 다녀야 할 집은 없구나

             집 없는 노숙자

             쓰레받이로 쓸어 담아

             화분에 넣어준다  (P.44 )

 

 

 

 

 

 

 

             마당에서 2

 

 

 

 

 

             등꽃이 지기 전에 찔레꽃 피고

             달맞이꽃 초롱꽃 매발톱 금낭화

             애기똥풀 흑장미 넝쿨장미

             물망초는 저를 잊지 말라 하고

 

 

             여보

             가우디가 설계한 건축물에

             가우디 얼굴이 있듯이

             이 마당도 설계한 당신 얼굴이 있어

             오늘 아침 뻐꾸기 소리  (P.48 )

 

 

 

 

 

 

             계단

 

 

 

 

 

             수유 전철역 1번 출구 계단

             나이든 부부 싸우고 있다

             대구 딸네에서 받아온 사과 상자

             남편은 혼자 들고 가겠다 하고

             마누라는 무거우니 같이 들자 하고

             보고 있던 한 학생

             번쩍 들어 계단 위에 가져다 두고 가버렸다

 

 

             다투던 이 없는 지금도

             그 계단 밑에 서면

             흐르는

             잔잔한 물결  (P.66 )

 

 

 

 

 

 

 

             떡과 까마귀

 

 

 

 

 

             동네 떡집 앞 은행나무에

             까마귀 소리가 시끄럽다

             떡집 주인의 말씀

             떡판 앞에 손님이 많아 떡이 가려지면

             저렇게 야단이라구

             하루에 떡 여남은 개씩은 물고 간다구

             떡집 주인 싱글벙글

             아까워하지 않네  (P.71 )

 

 

 

 

 

 

              -박순희 詩集, <마당에서>-에서

 

 

 

 

 

 

 

 

 

 

보통은 정오 안팎으로 오시는 택배아저씨가 오늘은 9시쯤

일찍 오셨다. 가시면서 "명절 잘 쉬세요!"하신다. 아이쿠나,

내가 먼저 인사를 드렸어야 할 말씀을.^^

지난 3,4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 번도 배달약속을

어긴 적 없는 이 60대의 기사님께선 평소에는 꼭

"수고하세요.~" 인사를 하고 가시는데, 그때마다 수고는 아저씨가

하시지...가만히 앉아서 책배달을 편안히 받는 내가 무슨 수고인가,

벌쭘하기도 하고 늘 고맙고 따듯했다.

 이 시집은 2013년 봄부터, 일주일에 한 번 유자효 시인께서 시 창작 강의를 하시는, 중구 문화원을 다니신 85세의 박순희 님께서 2년이란 한정된 시간 속에서, 합평을 통과한 작품들로 엮은 시집인데, 시인의 삶과 사고의 세계를 만날 수 있는 아주 따뜻하면서도 정제된 시들이 즐거운 시집이었다.

 어느덧 한가위가 내일 모레다. 어려운 세상일지라도, 에어컨을 설치해 준 기사들에게 부모마음으로 맛있는 밥을 먹이신 마음이나, 집 없는 민달팽이에게 화분집을 내어준 마음이나, 전철 역 계단에서 노부부의 옥신각신을 바라보다 냉큼 사과 상자를 번쩍 들어 계단 위로 가져다주고 가 버린 학생의 마음이나, 하루에 까마귀가 떡 여남은 개씩을 물고 가도 싱글벙글 아까워 하지 않는 떡집 주인의 마음처럼... 그렇게 다 우리의 마음이 넉넉한 기쁜 추석을 맞으면 참 좋겠다. 택배 아저씨를 비롯해 모든분들, 넉넉하고 좋은 보름달같은 그런 한가위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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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5 16: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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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5 17: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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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5 17: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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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5 17: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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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esar 2015-09-25 17:39   좋아요 0 | URL
저도 오늘 택배기사님과 인사를 나눠 따듯한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풍성한 한가위 되시길 바랍니다^^

appletreeje 2015-09-25 17:59   좋아요 1 | URL
예~비록 택배기사님께 먼저 말씀해주셔서 무척 송구했지만, 서로서로 명절인사를
나눌 수 있어서 저도 참 따듯하고 즐거웠습니다~
caesar님께서도~ 풍성하고 기쁜 한가위 되세요~^^

책읽는나무 2015-09-25 17:41   좋아요 0 | URL
추석 잘 보내세요
멋지게요^^

appletreeje 2015-09-25 18:0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책 읽는 나무님께서도, 풍성하고 멋진 추석 잘 보내세요~~*^^*

hnine 2015-09-25 17:57   좋아요 0 | URL
신작 시집의 전령사 appletreeje 님, 이 시집은 나온지 얼마 안되어 따끈따끈하기도 하려니와 소개해주신 시도, 시집이 나오기까지의 사연도 따끈따끈하군요.
제 친정어머니께 보내드릴까, 잠시 생각 좀 해봐야겠습니다.
제 책상 위치가 그러하여 거의 매일 하는 달구경이지만 이번 추석 보름달 보며 appletreeje님 생각도 잠시 할 것만 같아요 ^^

appletreeje 2015-09-25 18:14   좋아요 1 | URL
ㅎㅎㅎ 제 직업상 신작 시집이 나올 때마다 보내주시는 곳이 많아서~ 본의아니게
신작 시집의 전령사가 되었습니다~^^
이 시집은 `살아보아야 아는 인생`의 넉넉함과 따듯함, 편안함이 깃들어 있어
아마 친정어머님께서 읽으셔도 편안하실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저도 추석 보름달 보며 나인님 생각 많이 할께요~~
아버님 첫 차례를 드리려 가실텐데, 어머님과 가족분들 정답고 따듯한 시간 되시길 빌겠습니다~*^^*

2015-09-25 21: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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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5 22: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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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5-09-25 22:22   좋아요 0 | URL
4.19 민주공원과 수유역 1번 출구에서 가까운 곳에 살아서 그런가요? 올려주신 시가 더 정감있게 느껴져요~ 풍성한 한가위 되시길...

appletreeje 2015-09-25 22:54   좋아요 3 | URL
저도 중학교 때부터 결혼할 때까지, 화계사 근처에 살아서 더욱 정감있고
아련한 마음으로 시들을 읽었습니다~
눈오는 날이면 4.19 민주공원에 가서 지금은 한집사는 男이랑, 연못가에서
노래도 부르고 인근 카페에 들어가 진토닉이나 진오렌지를 마시고 왔어요.ㅎㅎ

시인의 `우리 마을`이라는 詩엔 앞집 식당 이름은 샘터마루
한 집 건너 윗집은 산마루 쉼터가 나오는데~이곳 역시 즐겨 갔던 곳이라
더욱 마음에 닿았습니다~
수유리(水流里)는 참 아름다운 동네인데, 그곳에 사시니 부럽습니다~^^
단발머리님께서도~풍성한 한가위 되세요~~*^^*

숲노래 2015-09-26 00:06   좋아요 0 | URL
할머니 마음이 고이 담긴 노래는
할머니 사랑이 함께 울리면서
즐겁게 꽃으로 피어났네요

appletreeje 2015-09-26 20:31   좋아요 1 | URL
예~ 할머님 마음과 사랑이 함께 울리면서
즐겁게 꽃으로 피어났습니다.^^
보름달 같이 환한 추석 되세요~~

2015-09-26 08: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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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6 20: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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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6 14: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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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6 20: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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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6 22: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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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7 13: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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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8 18: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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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간다는 것

 

 

 

 

 

     그냥 지나간다고 잊히는 것은 없다.

 

     가을이 지나간 들판 황금 낱알 몇 알 숨어 숨쉬고

     무서리 지나간 고샅길 남새밭에 푸른 문장들 남았다

 

     젊은 시절 잠시 스쳐 개여울처럼 흘러간 사람

     내 피에 깊이 새긴 물무늬 여전히 붉고 뜨겁다.  (P.25 )

 

 

 

 

 

 

 

       수세미꽃이 있는 풍경

 

 

 

 

 

      쇠숟가락으로 온기 먼저 담겨 오는 민물새우뭇국 받아

      들고

      남루한 가족 모여 따뜻하게 먹는 저녁이 있었다

 

      여흘여흘 흘러가던 저녁강 깊어지며 비로소 잠드는데

 

      기다릴 사람 돌아올 사람 없지만

      바람길 따라 에두른 돌담 위로 노란 등불 맑게 켜지는 밤

      이 있었다.  (P.11 )

 

 

 

 

 

 

        꽃밥

 

 

 

 

 

       양산 상북면 신전리 천연기념물 이팝나무 꽃가지가 그

       득그득 피우시는 이유는

 

       내가 올해 꽃 피웠으니 자네 부부 한 번 다녀가시라는 것.

       와서 꽃밥 배부르게 자시고 가시라는 것

 

       노거수 꽃피워 청하는 오래된, 아름다운 약속.  (P.16 )

 

 

 

 

       -정일근 詩集, <소금 성자>-에서

 

 

 

 

 

 

 

 

 

술 먹고 돌아온 男,이 가방에서 부시럭 쑥스럽게 꺼내준

망개떡 먹다 쫄깃함에 목이 메어, 시인의 '물의 뺨을 쳤다'

처럼 산사의 돌확에 고인 맑은 물 한바가지, 공손히 떠 마시고 싶다.

 

 

물의 뺨을 쳤다

 

 

산사서 자다 일어나 물 한 잔 떠먹었다

 

산에서 흘러 돌확에 고이는 맑은 물이었다

 

물 마시고 무심코 물바가지 툭, 던졌는데

 

찰싹, 물의 뺨치는 소리 요란하게 울렸다

 

돌확에 함께 고인 밤하늘의 정법과

 

수많은 별이 제자리를 지키던 율이 사라졌다

 

죄였다, 큰 죄였다

 

법당에서 백여덟 번 절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물의 뺨은 퉁퉁 부어 식지 않았다. (P.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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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0 00: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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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0 00: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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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5-09-20 06:40   좋아요 0 | URL
망개떡도 맑은 물도
따스한 손길이 어리는
고운 노래와 같네요

appletreeje 2015-09-20 10:09   좋아요 1 | URL
망개떡의 유래를 읽어보니, 민가에서는 어린 잎은 나물로 먹기도 하고
큰잎은 떡을 싸면 오랫동안 쉬지 않고 향기가 배어 나온다, 실제로 우리 조상들은 5월 단오때부터 한 겨울내 만들어 먹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고 하더군요 ^^
망개나무 잎으로 싼 쫀득하고 달달한 망개떡과 시의 마음으로 뜻밖의 즐거움을
만난 시간이었습니다. ^^

2015-09-20 10: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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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0 12: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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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0 12: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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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0 13: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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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과등

 

 

 

 

 

            부석사 언덕배기 사과나무 가지가 산길로 휘어진다 열매의

            그늘 아래 손님을 기다리는 노인 땅에도 어깨가 있는 듯 알갱

            이들 그늘 쪽으로 몸이 기운다 은빛 머리카락 파헤치며 졸

            음 위로 행인들 지나가고 억겹의 생이 무릎에서 감겼다가 풀

            리기를 반복한다

 

 

            노인은 몽유에 의지한 채 실눈을 뜨고 방전되어 간다 목덜

            미가 사과처럼 붉어지는 노인 태양광을 정수리에 달고 열매들

            을 충전시키고 있는 중이다 노인은 불을 끌어안듯 가을의 심

            장을 가만히 무릎 사이에 모은다

 

            사과궤짝마다 붉은 등이 가득 찬다 작은 등 큰 등을 골라

            내는 노인의 손등이 환하게 빛난다 여기저기 설법의 자리로 흩

            어지는 알갱이들 소우주의 어둠에 사과등을 내건다 천 년의

            빛에서 향긋한 냄새가 잡힌다  (P.43 )

 

 

 

 

 

                    -한성희 詩集, <푸른숲우체국장>-에서

 

 

 

 

 

 

 

 

 

 

 

 

 

현대시학시인선 16권. 2009년 「시평」으로 등단한 한성희 시인의 첫시집. 흘림체로 쓴 풍경의 보고서다. 수많은 꽃과 나무로 전개된 그의 숲 앞에 서면, '싱싱한 잎맥'으로 채색한 '푸른 그늘'이 은은한 메아리처럼 생(生)의 혈맥들을 들춰 보인다.

직립의 생애를 나이테로 새길 수밖에 없는 나무들의 수직은 '유전하는 척추'를 가졌다. 제 터전을 벗어나지 못하는 일생은 비루하지만, 그건 아버지가 물려받았고 또 그가 물려받은 삶, 그러므로 시인은 저도 모르게 자꾸만 직립의 나무 밑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의 시가 물어 나르는 풍경에는 이처럼 전생을 옮기던 부리의 기억이 스며 있다.

시인에 의하면 우리 모두는 무엇으로 변신하는 자연, 윤회의 운명을 지닌다. 그 끝이 비록 소멸이라 하더라도 "비는 빗방울이기 전에 구름이었으며 / 구름이기 전에 강이었고 / 강이기 전에 길"이었던 까닭에, 숲을 일으켜 세우는 궁극의 사념은 우리의 의지에도 이미 뿌리처럼 깊숙이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산벚나무의 그림자를 모아 편지를 썼다 흘림체의 그늘에 말린 첫인사는 푸른색이었다 흔들리는 숲의 잎맥으로 바람의 안부를 물었다 봄바람은 꽃을 들고 학생부군청주한씨영준지묘를 기웃거리며 서찰의 서두를 생각 중이었다 문맥의 파동에 떠밀려 꽃잎들이 순하게 하늘로 풀렸다

평생 나무 그림자로 가계를 키워낸 아버지 스물세 살 맨주먹을 나무뿌리 밑에 숨기고 산맥을 오르내렸다 잎사귀를 뜯어내며 나뭇가지를 분지르며 바람에 떠밀려 가는 민둥산을 따라다녔다 삼림청 산림계 말단직원으로 박봉의 자리마다 푸른 그늘이 채워졌다 그때마다 나무들은 허공에다 아버지의 편지를 썼다

넓은 잎사귀의 사연들이 도봉산 발치 아래로 모여들었다 고향집 목련나무가 봄의 겉봉을 뜯기 시작하면 새들의 노랫소리 낮아졌다 성황당 기억 너머 무위의 땅 그린벨트에 낮게 엎드린 당신의 안부를 만났다 골필로 써내려간 문장들이 흘림체로 날렸다

봄날 우편함을 열면 숲에서 보낸 싱싱한 잎맥의 글씨체가 가득했다 푸른숲 공무원으로 아버지는 죽어서도 푸른숲우체국장이 되었다 발신자 없이 배달되는 봄편지에서 꽃잎우표를 붙였다가 떼어낸 산벚나무가 올해는 꽃편지를 풍경 밖으로 서둘러 밀어내고 있었다
―「푸른숲우체국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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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9 03: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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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9 12: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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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9 04: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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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9 12: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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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15-09-19 06:31   좋아요 0 | URL
부석사 가는 길에 사과나무 과수원이 즐비하던 모습 문득 떠오르네요!
봄에 사과나무 꽃이 핀 모습을 보았다면, 동구밖 과수원길 아카시아꽃이 활짝 폈네~~동요의 한 자락 였겠다 싶어 봄에 한 번 가보고 싶더라구요^^
저희 친정동네는 배밭이 많았거든요 봄에 배꽃이 흐드러지게 핀 모습이 장관이었지요!

시는 가을의 모습을 노래하군요

appletreeje 2015-09-19 12:49   좋아요 1 | URL
저도 부석사는 가을에만 갔어서
하얀 사과나무 꽃이 피는 봄에도 한 번 가보고 싶어요~~
저 시를 읽는데, 부석사 아래 크고 작은 사과들을 쭉 늘어놓고 파는
정경이 떠올랐어요^^
아 봄에 배꽃이 흐드러지게 핀 장관이라니요!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셔서 부럽습니다~

사과 등불 사과 냄새 가득한 가을입니다~~*^^*

2015-09-19 11: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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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9 13: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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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9 13: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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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9 13: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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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고받기

 

               크메르(캄보디아)

 

 

 

 

          -그대가 나를 부르니, 나는 기꺼이 가리.

            -하지만, 그대는 나의 입맞춤에 뭘 주나요?

            -그대의 입맞춤에 내 입맞춤으로 보답하지요.

            -그럼, 내가 주는 마음에 그대는 뭘 주나요?

            -그 보답으로 내 마음을 주겠어요.

            -그럼, 내 사랑엔 그대는 뭘 주나요?

            -보답으로 그대에게 내 사랑 드리리. (P.67 )

 

 

 

 

               -<세계 민족시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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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09-17 22:34   좋아요 1 | URL
마지막 사진에 ㅎㅎㅎㅎ아 소주가 땡기네요 ㅋ

appletreeje 2015-09-17 22:38   좋아요 1 | URL
그래서 소주 마셨어영~ㅋㅋㅋ

2015-09-17 22: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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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7 23: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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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8 00: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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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8 00: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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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5-09-18 04:19   좋아요 1 | URL
새로운 번역으로 다시 나온 시집일까요.
구월이 깊게 물드는 하루입니다.

appletreeje 2015-09-18 08:49   좋아요 1 | URL
이 시집은 실천문학사가 1981년 <팔레스티나 민족시집> <아프리카 민요시집> <폴란드 민족시집>을 펴낸 후, 이제 다시 [실천세계시선] 시리즈로 나온 첫 번째 시집이에요.^^

여행가, 작가, 언론인, 기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던 이 책의 엮은이 티보르 세켈리가 평생 세계의 오지를 누비면서 만난 민족구성원들이 하던 말을 채록해 생생하게 전해줍니다.
에스페란토어로 쓰인 시집을, 이번에 장정렬 님이 번역해 나온 시집입니다~

다락방 2015-09-18 10:37   좋아요 1 | URL
아아 꽃 예쁘구나 생각하다가 저는 그만 마지막, 고기 사진에 무너집니다. 역시 저는 고기가... 소주도... 고기랑 소주는 진리 ♡

appletreeje 2015-09-18 11:14   좋아요 1 | URL
ㅎㅎ 꽃도 예쁘고 고기랑 소주도 진리옵지요~~
오늘 불금인데~ 저녁때 맛난 고기와 소주 드세요~!!!^^

2015-09-18 11: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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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8 11: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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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8 14: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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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8 16: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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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5-09-18 11:52   좋아요 1 | URL
캬~~꽃도 너무이쁘고 쌓인 책탑 실루엣에 엄마미소처럼 흐믓해지는 이기분은 뭘까요ㅋ 키우던 꽃에 진딧물이 생겨서 이후로 꽃을 키운적이 없는데 이런 이쁜꽃보면 다시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예뻐요~ 그리구 보쌈! 정말 맛있어보여요 ㅋㅂㅋ,,

appletreeje 2015-09-18 13:05   좋아요 1 | URL
하이드님 꽃구독 하며~~매달 내내 예쁜 꽃 만나서 행복해욤~~
책탑 실루엣을 보면 엄마미소가 지어지는 것은~ 알라디너님들의
공통된 미소~? ㅎㅎㅎ
해피북님께서는, 그린 베란다도 잘 가꾸시고 맛있는 요리도 잘 하시고~
글도 잘 쓰시고~~ 다시 이쁜 꽃 키워보세요~~*^^*
오늘 저녁은, 신랑님이랑 보쌈~?^^
저는 오늘 저녁은 돼지갈비로 정했습니다~ㅎㅎㅎ

2015-09-18 14: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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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18 16: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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