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기를 치켜세움
폴 오스터 지음, 샘 메서 그림,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얇은 책이다. 게다가 글보다 여백이, 여백보다 그림이 많다. 일단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면 10여 분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The Story of My Typewriter’라는 이 책의 글을 쓴 시점을 기준으로, 26년 동안 자신의 작가 인생을 함께해 온 타자기에 대한 폴 오스터의 애틋한 감성과, 폴 오스터의 타자기에 반한 샘 메서의 질박하고 감각적인 그림들은 그 여운을 오래도록 끌어준다.

폴 오스터의 ‘나의 타자기 이야기’는 그가 그때껏 쓰던 소형 헤르메스 타자기가 고장 나는 바람에, 게다가 새 타자기를 살 돈이 모자라는 바람에, 구하게 된 중고 독일제 올림피아 포터블 타자기와의 첫 만남부터 담담하게 술회한다. 첫눈에 운명적인 이끌림을 느꼈다든가, 왠지 끊임없는 영감을 불러일으킬 것 같다든가 하는 예술가 특유의 감성적인 이유가 아니라, 그저 이전 타자기의 고장과 넉넉하지 못했던 주머니 사정이라는 단순하고도 명쾌한 이유로 올림피아 타자기는 폴 오스터에게로 왔다. 그리고 사반세기가 지나도록 폴 오스터의 손가락들이 이리저리 힘을 주는 대로 알파벳을 한 자 한 자 찍어 단어를 조합하고 문장을 이루어 소설을 한 권씩 탈고해 냈다. 최소한 『뉴욕 3부작』(1987), 『폐허의 도시』(1987), 『달의 궁전』(1989), 『우연의 음악』(1990), 『거대한 괴물』(1992),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1992), 『공중곡예사』(1994), 『빵 굽는 타자기』(1997), 『동행』(1999) 등이 모두 올림피아 타자기의 키들을 탁탁, 두드려 얻어낸 소중한 결실들이다.

폴 오스터는 그저 글쓰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었다고 말하지만, 더 편리한 컴퓨터와 워드프로세서가 개발되어 타자기의 종말을 알렸음에도 올림피아 타자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단종 위기에 처한 타자기 리본을 대량으로 사들였을 뿐이다. “좋건 싫건, 나는 올림피아 타자기와 나의 과거가 같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미래 또한 같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 모든 것이 부서지고 낡아 못쓰게 되어서 결국에는 그 용도를 잃게 되지만, 내 타자기는 지금도 여전히 나와 함께 있다. 내가 26년 전에 소유했고, 지금도 소유하고 있는 유일한 물건은 그것 하나뿐이다. 몇 달만 더 지나면 그것은 정확히 나와 반평생을 함께한 셈이 될 것이다.”

‘지금도 충분히 편하고 행복한데 뭐 하러 바꿔’라고 올림피아 타자기를 더 편리한 글쓰기 도구로 바꾸지 않은 이유를 건조하게 들지만, 그건 작가로 살아오는 내내 늘 튼튼하게 자기 곁을 지켜준 평생의 동료에 대한 짙은 애정을 드러내는 최고의 찬사다. ‘그래도 네가 제일 좋아’라는.

폴 오스터는 따갑고 푸르고 아름다운 아침, 지금도 올림피아 타자기를 탁탁, 두드리며 글을 쓰고 있을까. 그때 사들인 리본은 아직도 남아 있을까. 문득 내 주위를 돌아보게 된다. 폴 오스터의 타자기처럼 모든 것이 잠시 쓰였다가 사라져도 끝내 남아 있는 무엇이 없을까. 내가 인식하는 순간 심장을 가진, 영혼이 깃든 무생물로 살아 있게 될 무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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