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확인한 수치.
차라리 너의 눈을 믿으라고들도 하던데
우리집의 내 눈 척도인 (창으로 보이는 신촌의 고층) 건물이 지금 꽤 보이는 편이라
어젠 아예 안 보였던 걸 생각하면 조금 낮아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수치는 어제보다 높음.
<불의 정신분석>에서 많이 인용되는 대목 중 이런 것이 있다.
부엌의 불이 그에게 주었던 특별한 음식에 대하여, 평소 먹던 음식으로는 투정을 부렸지만
불이 불의 힘으로 "잉여의 즐거움"을 부여했던, 특별한 날의 맛있었던 음식에 대하여.
"내가 반듯하게 행동하는 날이면, 할머니는 와플 아이언을 꺼냈다. 네모난 아이언이, 글라디올러스처럼 타던 잔가지 불꽃 위에 올려졌고, 가지들이 바스락거리며 부서졌다. 곧 와플이 내 앞치마 안에 던져지면, 그건 내 입술보다 손가락에 더 뜨거웠다. 그렇다, 그러면 나는 불을, 불의 황금을, 불의 냄새와 불의 바스락거림까지, 뜨거운 와플이 내 이 아래에서 바스라질 때, 먹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정은 언제나 마찬가지다. 어떤 잉여의 즐거움 -- 디저트처럼 -- 을 통해 불은 자신이 인간의 친구임을 보여준다. 불은 단지 음식을 익히기만 하는 게 아니다. 불은 음식을 바삭하게 한다. 불은 팬케익에 황금빛 껍질을 준다. 불은, 인간의 축제에 물질적 형식을 준다. 우리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그 어떤 시대에든, 미식의 가치가 영양의 가치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졌으며, 인간이 그의 지성을 발견한 건 슬픔이 아니라 기쁨에서였다. 잉여의 정복이 우리에게, 필요의 정복보다 더 큰 영적 흥분을 준다. 필요가 아니라 욕망이 인간을 창조한다."
필요의 정복보다 잉여의 정복이 더 큰 만족, 흥분을 주는 건
생각하기 그리고 말하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지 않나. 아기 시절의 슈로딩어가
막내 이모와 저녁 먹고 "세상 전부"를 얘기했던 일. We talked all about the world. 이모에게 구술로
기록할 가치가 있었던 (밥만큼, 밥보다 충만감을 준)그 날 저녁의 대화. 이런 체험이 우리에게는, 아주 드물지 않나.
나로 말하면 가족 중 누군가와 그래본 일은 없는 것이다. 세상 전부를 얘기할 뻔한, 얘기할 수도 있었던 적(순간)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지속'의 체험으로는 없고, 그 비슷한 건 나중 친구들 사이에서.
'그래서 하려던 말이 뭔데?'
'할 말만 하세요.' '복잡하게 말할 것 없고.'
혹은 "3줄 요약." 특히 "3줄 요약"이 우리에게는 강력한 밈이 될 수 있지만
영어권에서 그럴 수 없을 것임을 상상하면, "잉여의 정복"이란 우리에게 ㅋㅋㅋ 허락되지 않은;;
우리가 즐기지 못하는 사치.
정확하고 아름답게 말한다는 건
"잉여의 정복"이 소중하게 여겨질 때 일어나는 일.
영어 쓰는 지식인들의 언어와 한국의 지식인들 언어를 비교할 때
드러날 여러 차이 중 이것도 있을 것이다. 영어 쓰는 지식인들의 언어엔
반드시 "잉여의 정복"이 있다는 것. 그런가 하면 우리의 언어에서는 심지어 "필요의 정복"도
흔한 일이 아니라는 것. 잉여의 정복 없이는 필요의 정복도 어려운 거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