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 11월에 

니체가 프란츠 오버벡에게 보낸 길고 감동적인 편지가 있다. 


"지금 자네는 자네의 작업에 깊이 몰두해 있겠지. 

하지만 내가 보내는 몇 줄이 자네를 방해하진 않을 거야. 

일하고 있는 자네를 생각함이 언제나 내게 큰 도움이 되네. 

어떤 건강한 자연의 힘이 자네를 통해 (자신의 정체를 알리지 않으면서) 작용하는 것 같아. 

(..........) 친구여, 자네가 그토록 가까이에서 자네 삶의 스펙터클을 보도록 내게 허락했음에 

나는 큰 빚을 졌네. 자네와, 그리고 야콥 부르크하르트의 이미지를 보게 한 것, 그것이 바젤 시절이 

내게 준 선물이야. 이 두 이미지가 내게 준 도움은 인식에만 제한되지 않는다 생각하네. 삶과 인식에서 

독창적이며 또한 고독한 하나의 방식, 그 방식의 "품위"와 "은총" -- 내 운명이 내게 베푼 후의 덕분에 

내 문 앞으로 배달된 스펙터클이 바로 이것이었네. 그 후의를 나는 과대평가할 수 없어. 그 후 나는 그 집을 

들어갈 때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그 집을 나왔으니까." 





다행히도 영어판 편지 선집에도 실려 있다. 

"이제 나는 이상적인 다락방 생활자의 고독을 실현하는데 헌신하고자 해..." 

ㅋㅋㅋㅋㅋㅋㅋ 정말, 한국어든 영어든 독어든 불어든, 이제 누구도 이런 문장을 

ridiculous하게 들리지 않으면서 쓸 수는 없을 것 같긴 하다. 아닌가. 쓸 수 있나. 


여하튼 어제 오늘

어쩌면 이런 문장들을 친구에게 편지로 썼을까.. 감탄하며 읽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미세먼지 걷혀서 나가 걷다 옴. 

Philosopher's Zone에서 노엄 촘스키 출연 에피소드를 들었는데 

언어의 기원에 대하여, 진행자가 "언어는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협력의 필요에 따른 적응의 결과, 무엇보다 

소통을 위해 생겨나고 발전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당신 생각은?" 질문하고 촘스키가 


그런 관점이 틀렸다는 증거가 계속 나오고 있다. 

고 답한다. 그에 따르면: 언어는 소통의 수단이 아니고 사고의 도구다 (not means of communication but an instrument of thinking). 인간 정신의 내적인 무엇으로 보는 것이 옳다. 


촘스키의 이런 생각은 판을 거듭한 위의 책에 나오는 얘기인가. 

혹시, 촘스키에 관심 가지면 바로 알게 되는 얘기인가. 나는 촘스키 알못이고 

하여튼 처음 듣는 얘기. 그리고 바로, 이게 훨씬 옳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필요의 정복"보다는 "잉여의 정복"이 인간에게 더 큰 영적 흥분(만족)을 주었다는 바슐라르의 통찰은 심지어 언어의 기원과 발전에도 적용되는 거였다면서. 


소통 vs 사고. 

소통에 윗점 찍을 때 이상하게도, 인간이 도구화되지 않나. 지배의 대상 되지 않나. 

소통을 강조하는 이들보다 사고... 를 택하는 이들이, (그들의 기질만이 아니라 방향에서, 지향에서) 평등주의적, 민주주의적이지 않나. 특히 외국어(영어) 교육과 관련해, 소통... 이거 우선 내세우는 사람들 중, 무사고가 아닌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말이 통하는 사람"

"결혼은 말이 통하는 사람이랑 해야 돼." : 이런 말들에서도 말이 통함이 실은, 지배의 다른 이름 아닌가? 


가장 좋은 소통은 

그의 생각이 나의 생각으로 이어지고, 혹은 그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공명하고. 그런 거 아닐까. 

이해는 일어나면 좋지만, 이해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그는 그의 생각에서 나는 나의 생각에서, 그러나 강력하게 공존할 수 있지 않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쓰기를 흡수해 쓰기를 초월하는 말하기만이, 

인간의 언어를, 그것이 이미 인간적이라는 거짓말로부터 해방할 것이다. 

Only a speaking that transcends writing by absorbing it, can deliver 

human speech from the lie that it is already human." 


이런 매혹적인 (어렵고 매혹적인) 말이 

<미니마 모랄리아>의 한 단장에 있다. 그러고 보니 그 단장 읽으면서 전체를 내가 번역해 둔 것이 있는데 

65번 단장이고 영어판에서 내 번역은: 


노동자들의 일상 언어를 문어에 맞서 부각시킴은 반동적이다. 여가가, 심지어 자긍심과 오만도, 독립성과 자기-단련이라고 할 수 있는 무엇을 상류층의 언어에 부여한다. 그래서 상류층의 언어는 그 자신의 사회적 영역과 대립하게 된다. 명령을 위해 이 언어를 오용하는 주인에게, 도리어 그 주인들을 명령하고자 하고 그들의 이득에 봉사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이 언어는 자기 주인을 배반한다. 반면 피지배층의 언어에는 지배의 인장만이 찍혀 있으며, 따라서 불구화되지 않은 자율적 언어가 그것을 원한 없이 쓸만큼 자유로운 이들에게 약속하는 정의를, 피지배층에게서 박탈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언어는 허기에 의해 씌어진다. 가난한 자는 말을 씹어 배를 채운다. 언어가 가진 객관적 정신으로부터, 그는 사회가 그에게 거부한 자양(지원)을 취하고자 한다. 깨물어 먹을 무엇도 없기 때문에 그는 자기 입을 말로 가득 채운다. 그렇게 그는 언어에 복수한다. 그에게 언어를 향한 사랑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그는 언어의 육체를 훼손하고, 자신의 무력한 힘 속에서 언어에 가해진 왜곡을 반복한다. 북베를린이나 런던의 방언들이 가진 최선의 특징들, 준비된 재담이나 타고난 위트마저도, 절망적인 상황을 절망하지 않고 견디기 위하여 적과 함께 자신을 조롱해야 하는, 그리하여 세상의 이치를 인정해야하는, 필요에 의해 병들어 있다. 만일 씌어진 언어가 계급들의 소외를 성문화한다면, 이 언어의 시정(폐지)은 구어로의 퇴행에 있지 않으며, 가장 엄격한 언어적 객관성의 일관된 실천 속에만 있을 수 있다. 글쓰기를 자기 안에 흡수하여 그것을 초월하는 말하기만이, 인간의 언어를, 그것이 이미 인간적이라는 허위로부터, 해방할 것이다.

 

- Minima Moralia, 65, "Not half hungry, 배가 고픈가"



이 단장도 문장 단위로 질문들을 작성하고 

문장 단위로 확장, 심화하면서 읽을 가치가 있는 단장이란 생각 새삼 든다. 


여기서 아도르노가 말하는 상류층의 언어, 자신이 가진 객관적 정신을 잃지 않으며 그래서 자기 주인을 도리어 명령하는 언어........ 그런 언어를 쓰는 상류층은 한국에는, 정말 극히 드문 것 같다. 어제 jtbc 신년특집토론에서 유승민. 그의 언어가 한국에서는 지배계급의 언어도 지배의 인장이 찍힌 언어, 언어의 객관정신이 말살된 언어, 품위의 가상을 간신히 가질 뿐인 언어.. 라고 알게 하지 않나는 생각도 드는데, 사실 듣고 있기 힘들었고 잘 듣지 않았으니 잘 들어본 다음에야 판단할 일. 


그런가 하면 

어쨌든 영어 쓰는 사람들 중에서는 

여기서 아도르노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분명히 알게 하는 예를 줄 사람들이 많다. 

다름 아닌 그가 쓰는 언어의 힘 때문에 타락하지 못하는 사람들. 더는 타락하지 못하는 사람들. 


"지배" 이것의 한국적인 현실이 있고 (당연하....) 

그것을 보는 하나의 길이, 우리의 언어긴 하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갈리마르 니체 서한 전집 중 4권. 전집도 엄청나고 그 중 4권도 엄청난 책. 

가격도 (특히 가격이.. 는 아니지만) 엄청난 책. 그런데 가격도 가격이지만 

(가격은, 내가 가난해서지 적당한 가격일 듯. 40유로) 지금 내 눈에는 지나치게, 

과하게, 꼼꼼하고 잘 만든(?) 책으로 보인다. 니체 서한 선집 영어판에서는 전혀 포함되지 않은, 이것은 엽서로 보낸 것인가 편지로 보낸 것인가, 이 편지는 답장으로 쓰여졌는가 아닌가, 답장으로 쓰여졌다면 답장 대상 편지는 언제 쓰여진 (혹은, 받은) 것인가. 답장 대상 편지는 보존됐는가 아닌가. 이에 관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편지 전부에 번호를 붙이고 번호 다음 수신인과 수신인의 수신처도 표시. "58. 바젤의 프란츠 오버벡에게" 이렇게. 무진장 꼼꼼한 프랑스 인들. 


도서관 책인데 

거의 영구 대출한 셈치고 옆에 두고 조금씩 본다. 

하루 2-3편. 잘 만든 책이라, 그냥 그 존재가 자체로 주는 진정 효과도 있다. 





1880년 10월 31일 프란츠 오버벡에게 보낸 편지. 

"나의 약함을 나의 강함과 어떻게 화해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네."

이어서, Ma solitude est inouïe. 


inouï. 이상하게 생긴 이 단어는 처음 보는 단어였고 

사전을 찾아보니 "놀라운" "상상을 초월하는" "들어본 바 없는" 등의 뜻이라 나왔다. 

영어로라면 extraordinary, incredible, unprecedented, 이런 단어들이 뜻으로 제시될 단어. 


불어를 배우면서 (배우느라) 읽고 있는 처지임에도 

불어와 니체는 사실 어울리지 않는다........ 같은 생각 계속 드는데 

(니체가 이렇게 말할 리 없지, 이렇게 말하는 니체는 ridiculous하다) 그럼에도 

이 문장에서 inouï, 이 단어는 (생전 처음 보는 단어든 아니든) 아주 꼭 맞는 단어처럼 느껴졌고 

나는, "내 고독은 전대미문이다" "내 고독은 유례 없다" "내 고독은 엄청나다" 등등 우리말로 해본다면 

"고독"과는 억지로 만나는 게 될 뒤의 단어들이, 불어의 이 단어 경우엔 전혀 아니라고 결정했다. 


한국어는 정신을, 정신의 체험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 이렇게 말할 기회로 보이는 무엇이든 놓치지 않는 듯. 

흐으. 흐으으으으으으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늘 아침 확인한 수치. 

차라리 너의 눈을 믿으라고들도 하던데 

우리집의 내 눈 척도인 (창으로 보이는 신촌의 고층) 건물이 지금 꽤 보이는 편이라 

어젠 아예 안 보였던 걸 생각하면 조금 낮아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수치는 어제보다 높음. 


<불의 정신분석>에서 많이 인용되는 대목 중 이런 것이 있다. 

부엌의 불이 그에게 주었던 특별한 음식에 대하여, 평소 먹던 음식으로는 투정을 부렸지만 

불이 불의 힘으로 "잉여의 즐거움"을 부여했던, 특별한 날의 맛있었던 음식에 대하여. 


"내가 반듯하게 행동하는 날이면, 할머니는 와플 아이언을 꺼냈다. 네모난 아이언이, 글라디올러스처럼 타던 잔가지 불꽃 위에 올려졌고, 가지들이 바스락거리며 부서졌다. 곧 와플이 내 앞치마 안에 던져지면, 그건 내 입술보다 손가락에 더 뜨거웠다. 그렇다, 그러면 나는 불을, 불의 황금을, 불의 냄새와 불의 바스락거림까지, 뜨거운 와플이 내 이 아래에서 바스라질 때, 먹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정은 언제나 마찬가지다. 어떤 잉여의 즐거움 -- 디저트처럼 -- 을 통해 불은 자신이 인간의 친구임을 보여준다. 불은 단지 음식을 익히기만 하는 게 아니다. 불은 음식을 바삭하게 한다. 불은 팬케익에 황금빛 껍질을 준다. 불은, 인간의 축제에 물질적 형식을 준다. 우리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그 어떤 시대에든, 미식의 가치가 영양의 가치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졌으며, 인간이 그의 지성을 발견한 건 슬픔이 아니라 기쁨에서였다. 잉여의 정복이 우리에게, 필요의 정복보다 더 큰 영적 흥분을 준다. 필요가 아니라 욕망이 인간을 창조한다." 


필요의 정복보다 잉여의 정복이 더 큰 만족, 흥분을 주는 건 

생각하기 그리고 말하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지 않나. 아기 시절의 슈로딩어가 

막내 이모와 저녁 먹고 "세상 전부"를 얘기했던 일. We talked all about the world. 이모에게 구술로 

기록할 가치가 있었던 (밥만큼, 밥보다 충만감을 준)그 날 저녁의 대화. 이런 체험이 우리에게는, 아주 드물지 않나. 

나로 말하면 가족 중 누군가와 그래본 일은 없는 것이다. 세상 전부를 얘기할 뻔한, 얘기할 수도 있었던 적(순간)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지속'의 체험으로는 없고, 그 비슷한 건 나중 친구들 사이에서. 


'그래서 하려던 말이 뭔데?'

'할 말만 하세요.' '복잡하게 말할 것 없고.' 

혹은 "3줄 요약." 특히 "3줄 요약"이 우리에게는 강력한 밈이 될 수 있지만 

영어권에서 그럴 수 없을 것임을 상상하면, "잉여의 정복"이란 우리에게 ㅋㅋㅋ 허락되지 않은;; 

우리가 즐기지 못하는 사치. 


정확하고 아름답게 말한다는 건 

"잉여의 정복"이 소중하게 여겨질 때 일어나는 일. 

영어 쓰는 지식인들의 언어와 한국의 지식인들 언어를 비교할 때 

드러날 여러 차이 중 이것도 있을 것이다. 영어 쓰는 지식인들의 언어엔 

반드시 "잉여의 정복"이 있다는 것. 그런가 하면 우리의 언어에서는 심지어 "필요의 정복"도 

흔한 일이 아니라는 것. 잉여의 정복 없이는 필요의 정복도 어려운 거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