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드로의 고향 마을 랑그르(Langres)에 세워진 디드로 상. 





<디드로와 자유롭게 생각하기의 기예> 이 책의 1장에

랑그르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있는데 


랑그르라는 지명을 디드로의 고향으로 (그의 고향이라서) 처음 알게 되기도 했지만 

디드로가 거기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이 곳은, 그러니까 오산 정도도 아니고 

장성 정도? 영암 정도? 셋 사이 차이가 없습니까. 중심에 작은 읍내 있는, 걸어서 마을 끝에서 끝까지가 

가장 멀어도 두시간인 그런 곳인가 보았다. 저자가 그 점을 은근히 강조한다. 


그리고 

디드로를 아주 그냥 뽕을 뽑는 마을이라는 것도 강조한다. 

"이 마을의 가장 유명한 아들" "그들의 가장 유명한 아들" 이런 구절 계속 쓰고 

읍내 광장에서 오른쪽을 보면 디드로 빵집이 있고 한 블록 옆에 디드로 양복점이 있는가 하면 

디드로 안경점과 디드로 철물점도 있어.......... 


굉장히 그 마을에 가보고 싶어졌다. 

더 늦기 전에 프랑스엔 한 번 가보아야 할텐데 

프랑스 가면 디드로 고향 랑그르, 바슐라르 고향 바르-쉬르-오브, 이런 데만 

찾아다니다 온다 해도 아무 불만 없을 거 같았다. 물론 실제 가게 되면 

파리..... 중심이 되긴 하겠지. 그런다 해도 


랑그르, 바르-쉬르-오브는 꼭 가봐야할테고 

운전 초능력이 있다면 이런 벽지들(로 지금 상상되는) 

찾아가기도 어려움 없을 거라 공상하게 됨. 운전 초능력. 서울에서 운전 오래 한다면 

생기는 거 아닌가. 오래 해야만 한다면. 


그런데 오래라면 한 10년 아닌가. 

그러면 ...... 나이 장벽은. 

.... 이렇게 저녁 시간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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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드로 전기로 사둔 것이 두 종류 있다. 

둘 중 더 얇고 더 대중적인 쪽이 이것. 


더 두껍고 더 전문적인 쪽은 이것. 책 이미지로 적당한 게 찾아지지 않아서 

제목 내지 이미지로다. 다트머스 대학 교수였던 아서 윌슨이 쓴 1957년의 전기. 지금까지 결정본이라는. 

P. N. 퍼뱅크의 저 얇고 대중적인 전기를 보면, 시작하면서 "아서 윌슨의 책과 

경쟁하겠다..... 같은 건 언감생심이고 (윌슨에게 영원한 영광을...)" 같은 대목이 있다. 





아서 윌슨의 전기는 

.... 그 분위기가 건강하고 유복한 은퇴자를 위한 책. 

감히 지금 내가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해서 P. N. 퍼뱅크의 책부터 

가까이 놓았는데 


20대에 만난 루소와 디드로의 얘기가 1장에 나온다. 

루소는 12년생. 디드로는 13년생. 둘 다를 알던 친구의 소개로 만남. 


둘의 만남을 말하고 바로 

둘의 절연으로 넘어가는데 

둘의 관계에 대해 루소가 남긴 기록 중엔 이런 게 있다고 한다. (<고백록>이 출전). 


"우리는 영원히 친구였을 수도 있다. 디드로가 내게 

철학자가 되라는 멍청한 조언을 하지 않았다면. 그의 그 조언은 

라이벌이 되어 달라는 조언이었다." 


디드로가 남긴 기록엔 이런 게 있다고 한다. (출전은 그가 쓴 어느 예술 비평). 

"인간은 가장 사소한 것에서도 자기가 우월하다는 증거를 갖고 싶어한다. 

장-자크 루소는 언제나 체스에서 나를 이겼다. 그럼에도 게임이 더 평등해지게 내게 말을 깔아주는 일이 

한 번도 없었다. "지는 게 싫어?" 그가 물었다. "아니." 나는 말했다. "그게 아니라 게임이 네게 더 재미있기를 

원하는 거야." 그는 "그럴 수도 있겠지"라고 답했다. "그래도 싫어."" 




너무나 즉각 

루소와 디드로 두 사람 모두에게 

선입견 갖게 하는 회고들이다. 레오 담로시의 루소 전기도 집에 있은지 오래된 책이라 

이 전기도 일단 곁에 두긴 했다. 이 전기 읽으면, 루소는 어떤 인물이 되기 시작할까 궁금하긴 한데 

(아마 담로시의 전기가, 깊이 루소에게 공감하는 편의 전기일 것이다. 깊이 공감하는 전기 작가가 

깊이 훼손된 영혼의 전기 대상을 다룰 때, 어떤 일이 가능할까....) 체스를 재미있게 하기 보다는 

반드시 체스에서 이겨야만 했던 루소로 일단 계속 알고 있겠지. 


P. N. 퍼뱅크는 

디드로에게 깊이 공감 정도가 아니라 열광하고 

그를 사랑, 우상시하는 정도. 디드로, 그는 이토록 경악스럽게 현대적이고 경악스럽게 천재적이다. 이런 말을 

별로 망설이지 않고 막 한다. 그런데 과장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가 인용하는 디드로 문장들이 정말 


경악스럽게 현대적이고 천재적이다. 

................ 어쩌면 정말 하도 현대적이어서 

평범한 볼테르에 비해 디드로가 덜 유명한 걸수도! 

현대인인 우리 시대 인간들의 질투가 여기서 작동하는 걸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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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게이가 쓴 책들 중 

19세기 문화사 5부작 "부르주아의 경험"은 

특별한 감흥 없이 몇 군데 보다 말았던 책들이다. 

굉장히 박식한데 어디에도 임팩트 없음. 이런 느낌이었던 거 같다. 

그래도 그 다섯 권이 다 지금 집에 있어서, 시간 낸다면 확인해볼 수 있다. 


<계몽시대>엔 끝없이 찬탄하게 되고 

게이 책들 나온 건 다 구해야겠다 쪽이 되어서 

수시로 찾아봄. 어떤 책들이 있나는 파악 끝났다고 생각해도 

또 새로운 책이 나온다. 이 책도 그렇다. 지금 알았다, 이런 책도 있는 줄. 

Freud for Historians. 


유명한 문학 책들이 갖게 되는 전설들. 

너는 그 책에서 너를, 너의 얼굴을 볼 것이다. 방향의 전설들. 

그 책이 그리는 삶과 네 삶 사이에, 설명할 수 없겠지만 기이한 공명, 기적적인 연결이 생기는 걸 볼 것이다. 

책이 끝날 때 너의 삶이 그와 함께 달라졌음 앞에서 전율할 것이다. 

.... 이런 등등의. 


레슬리 피들러가 <율리시스>를 가리켜 "구원의 가이드"라 말하면서 

하고 싶었을 그 모든 말들. 


이상하게도, 역사서인데도 

<계몽시대>가 그런 책이다. 


인간에 대한 이해, 역사에 대한 (슬픔을 아는) 이해. 

이런 게 최고 수준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책의 어떤 문단들은 

멍하게, 충격 때문에 혹은 분노나 경멸 때문에, 당시엔 알거나 살지 못했던 순간들을 

다시 선명하게 볼 눈, 다시 정신 차리고 만져볼 손..... 이런 걸 준다. 시각의 교정. 감각의 회복. 

이런 게 일어난다고 진짜로 느껴진다. 물론 느껴짐만 진짜일 뿐, 일어남은 진짜가 아닐 수도 ㅎㅎㅎㅎ. 

놀라 찬탄하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다루는 사료들의 범위와 깊이. 

이것도 놀라 쓰러질 지경. 놀라 "구원 받으며" 쓰러질 지경. 

경이롭도록 박식한 저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그들 중 어떤 이들은 

그 경이롭도록 박식함 그 자체로, 독자를 교화하지 않느냐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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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천년




중세는 어떤 암흑시대였는지. 

어떻게 고대인들이 일구었던, 인간 중심, 이성 중심의 세계관과 

사회질서가 기독교의 승리와 함께 파괴되었는지. 어떻게 학문의 빛이 기독교의 광신에 의해 

전세계에서 꺼지게 되었는지. 어떻게 기독교는 무지하고 사악하고 절망에 찬 인간들에게 호소하는 종교인지. 

어떻게 가장 사소한 것에 가장 격분하며 갈등하는 종교인지. 물론 완전한 암흑이었던 것은 아니라서, 읽을 만한 

책을 쓴 소수 저자들이 있기는 했다. 어쩌면 더 나은 시대가 올 수 있다는 희망은 이 소수 위대한 인간들에게 

있었다. 




저런 얘기를 3페이지에 걸쳐 하고 나서 

"이게 계몽시대 사상가들이 중세에 대해 갖고 있던 흔한 생각이다." 

"두 세기에 걸친 연구가, 이 사상가들이 기독교 천년이 가진 아름다움, 학문, 그리고 다양성에 

얼마나 무지했는지 우리에게 알게 했다" : 이런 말로 계몽 사상가들과 기독교의 관계 탐구하는 장을 

시작한다. 


기독교 천년의 아름다움, 학문, 다양성. 

the beauty, the learning, and the variety of the Christian millennium. 

이 구절에 밑줄 긋지 않을 수 없음. 


인간은, 인류는 얼마나 오묘한 존재인가 말이다. 

아래 포스팅한 유럽사 교수는 홀로코스트 주제로 말하면서 

"솔직히 말하면 나는 홀로코스트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모르겠어. 

나는 이 정도까지만 확신해. 문명이란 아주 깨어지기 쉬운 거라는 것. 

그리고 문명이란 우리 삶의 매순간 지키고 옹호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 

우리가 밥을 먹을 때, 아이를 재울 때, 차를 탈 때, 그 모두가 그 허약한 문명이라는 것.

그것을 잊을 때 그것은 순간 붕괴할 수 있다는 것. (.....)"이라 전한다. 


기독교 천년의 아름다움, 학문, 다양성. 

그것이 얼마나 한순간에 그것의 정반대가 될 수 있는지. 그 둘이 어떻게 분리불가인지. 

그러나 어쨌든 그 아름다움, 학문, 다양성을 지켜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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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듣는 강의 중 

르네상스부터 지금까지 유럽사 과목이 있는데 

교수가 참 개성이 있고 현실웃음 터지게 웃기기도 하다. 

아주 많이 노인이신데 굉장히 발랄하다. alert mind. hyper-alert mind. 


삶에 패배했음. 이게 없다는 것. 

무엇이든 우기고 본다. 이게 없다는 것.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거냐.... 

며 감탄하기도 했다.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서 

우드로우 윌슨을 만나려고 그가 할 수 있는 모두를 했던 호치민. 

그가 그런다는 게 윌슨의 귀까지 들어갔는지, 아니면 윌슨은 그런 일이 있는 줄 몰랐고 

그의 비서들이 알아서 처리한 건지는 불분명해. 그런데 어쨌든 그는 윌슨을 만나지 못했어. 

아시아에 있는 작은 나라, 미국인들 중 그 나라 이름을 아는 사람도 없는 나라에서 온 

작고 초라한 남자. 그 남자는 미국 대표들에게 아무도 아니었고 아무 관심도 끌지 못했어. 

그런데 우리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던 게 아닐까? 우리는 그에게 친절하고 그의 말을 들었어야 하지 않을까? 

호치민은 강화회의에서 미국인들에게 받은 푸대접을 결코 잊지 않았어. 



파리 강화회의 주제일 때 

저런 대목이 있다. "우리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던 게 아닐까?" 이건 

앞서 1차대전 주제일 때 반복해서 나왔던 "1차대전은 유럽의 베트남이다, 다만 훨씬 더 끔찍했을 뿐" 이 말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이런 강의를 할 때 

학생 중 베트남 학생이 있다면 어떨까. 

그러니까 이 시대의 호치민이 어디 있어서 

그가 이런 말을 듣는다면. (.....) 


그러니까 

베트남 출신 사학자가 

유럽사도 하고 

전쟁사도 하고 

그래야 한다고 

결론 지음. 더 많은 베트남 출신 사학자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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