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먼 두난. 

패션도 화려하고 말투도 화려하신 이 분. 

Slate의 패션 주제 필진이기도 하다. Slate 팟캐스트에 자주 출연하는데 

15년엔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함께 "charm"이 죽었다" 주제로 얘기하기 위해 

culture gabfest 출연. 부머 세대에게 "charm"이 있었다. 그들은 개인적 매력으로, 기벽으로, 위트로 

사람을 사로잡고 모임을 눈부시게 하는 사람이 되고자 했고 그들 중엔 "charm"의 대가들도 있었다. 부머 이후 세대부터, "charm"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편지 대신 이메일을 쓰면서 매혹적인 인사말을 궁리하는 수고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다. 이제 모두가 너무 빠르고 즉각적인 목적에 봉사하는 걸 목적으로 한다. 한때 우릴 들뜨게 하고 삶이 매혹적인 것이 되게 했던 "charm"이 이제 거의 죽었다. 


대강 이런 얘기 한다. 

사실 여기서 "charm" 이 단어부터, 번역이 잘 안되고 

번역이 안되는 건 사이먼 두난이 들려주는 ""charm"의 짧은 역사" 같은 것이 한국에선 없었기 때문일 텐데 

이 단어 외에도, 번역이 안되고 억지로 한다면 억지스럽게만 들릴 많은 말들을 (매력적인 인간들을 묘사하는 거의 의성어, 의태어에 가까운 말들. 그리고 속어들) 쓰고 있어서, 이 주제에 대한 그들 논의를 대략 위처럼 요약하긴 하지만 그에 덧붙여 


"charm"의 죽음에 대한 그들 논의가 자체로 

"charm"의 실행이기도 했다. 이렇게 적어 두자. 


사이먼 두난을 게스트로 소개하면서 멧캐프가 

"당신은 내게 "charm"의 시체가 약지에 끼고 있는 보석반지로 남아 있다 (You remain, at least for me, the jewel on the ring finger of the corpse of charm)" 이런 말로 사이먼 두난은 항의의 외침을, 줄리아 터너와 대나 스티븐스는 폭소를 하게 하는데 


(실제 많이 웃기다. 내용과 형식의 조화. 웃긴 말을 웃기게 할 줄 아는 사람....) 

언어 사용에서 이런 과잉, 이런 호사. 이런 낭비. 이것이 "charm"의 가능성의 조건. 



(두난은 이런 책도 쓰심). 



<아침놀>의 238번 단장이 

제목은 ""charm"을 향한 노고(The striving for charm)"고 

내용은 이렇다. 


"만일 강한 본성이 잔혹성의 성향을 갖지 않으며 늘 자기에만 몰두하는 게 아니라면, 그 본성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charm"을 향한 노고를 시작한다. 이것이 강한 본성의 전형적 특징이기도 하다. 반면에 약한 본성은, 가혹한 판단들을 사랑한다. 약한 본성들은 인간혐오주의의 영웅들과, 종교적 혹은 철학적 이유에서 존재를 오명이 되게 한 이들과 연합한다. 아니면 이들은, 완고한 관습과 '생애의 과업'이 제시하는 요구 뒤로 숨는다. 이것이 이들이, 그들 자신을 위해 성격과 힘을 창조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이 역시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난다." 


지금 우리 삶의 한 곤경을 

이보다 더 잘 말할 수 없다며 경탄했던 단장인데 

번역해 보려니 (.....) 머리 뜯음. 책세상판 니체 전집을 다수 구입했다가 거의 다 팔고 난 뒤라서 

한국어판이 집에 없다. 책이 무겁고 커서 자리를 많이 차지하기 때문에 팔았던 니체 전집. 


니체는 강한 본성이든 약한 본성이든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involuntarily")" 

그들의 본성에 따라 선택하는 삶의 방식, 성격과 힘이 있다고 말하지만 


지금 한국에서는, 어떤 강한 본성이 태어나도 

사회에 의해 약한 본성으로 만들어지지 않는가. 사회가 약하게 만든 이들은, 그래서 오히려 더 거침없이 

가혹한 판단들을 사랑하고, 완고한 관습과 '생애의 과업'이 제시하는 요구 뒤로 숨지 않는가. 이들이 

인간혐오주의자들과 연합해 존재를 오명이 되게 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지 않은가. : 이게 지금 우리 삶의 곤경이라 생각했다. 여러 사람들을 (현실 사람들을) 기억함. name names는 못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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