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의 저 책(The World As I See It)에 

1902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했다는 네덜란드 물리학자 H. A. 로렌츠를 칭송하는 글이 있다. 


"로렌츠의 인격이 행사한 경이로운 힘은 이런 것이다. 

독립적이며 고집센 사람들 -- 학자들 사이에서 특히 흔한 -- 은 타인의 의지에 쉽게 순응하지 않는다. 

그들은 타인의 리더쉽에 오직 마지못해 따를 뿐이다. 그러나 로렌츠가 조직의 수장일 때, 예외없이 행복한 협력의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사고의 목적과 습관이 극단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다 그와 뜻을 같이 했다. 로렌츠가 거두었던 이같은 성공의 비결? 그것은 그의 비범한 이해력에만 있지 않았다. 그는 사물들과 사람들을 빠르게 이해했을 뿐 아니라 언어의 소통에서도 경이로웠다. 그러나 그의 이해력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그는 어떤 사안이든 자기 전부와 함께 했다. 그가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그의 정신에 그 일과 무관한 무엇도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타인과 쉽게 협력하지 않는 이들도 그의 이런 면모 앞에서는 바로 무장해제되었다. (......)" 




어쩌다 새벽에 저 책 오디오북이 audible에 있는 걸 알고, 가격도 저렴해서 credit 쓰지 않고 구입했다. 

나가서 걷던 동안 조금 들었는데 특히 밑줄 부분, 저 부분에 밑줄 긋고 형광펜도 칠해 두는 심정 되었다.  


The secret of his success lies not only in his swift comprehension of things and people. 


나는 이 "swift comprehension" 이것도 우리들 사이에선 극히 드물게만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빠른 이해를 못해서가 아니라, 안하게끔 단련되었기 때문에. 거의 예외 없지 않나? 누가 누굴 만나든 

거기 권력 투쟁 있다는 것 (누가 우위를 점하냐의). 이건 어쩌면 40세 정도가 기점일수도. 그 전에는 

그게 없는 경우도 있고 일어나도 모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 후에는, 더 이상 그게 그렇지 않은 척 할 수 없음. 

어쨌든 누가 우위를 점하냐가 적어도 표면 아래에서 언제나 위협 중일 때, "이해"는 누구의 관심도 아니게 될 것임. 


내가 상대를 이해함은 

내가 상대에게 양보함이고 상대에게 내 약점을 보이고 내줌이 되는 곳. 이곳이 그런 곳 아닌가? 


강하게 그런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해는 "연애" 하는 사이에서나 하는 걸로 여겨지지 않나. 

이해 = 내가 자진하여 약점을 내보임 (너도 약점을 내보이라 요구함) = 플러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