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ch piece of culture, when someone tells you it's their favorite, makes you love them instantly? 


조금 전 나가서 culture gabfest의 세 사람이 저 주제로 얘기하는 걸 들었다. 

10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음악, 문학, 영화에서 적지 않은 제목들, 사람들이 논의되었는데  


스티븐 멧캐프가 책 중에서는 <롤리타>와 <미들마치>를 선택하겠다고 하자 

대나 스티븐스가 <미들마치>는 몰라도 <롤리타>는 그 책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므로 

누가 그 책을 사랑한다 함이 그 누구에 대해 말해주는 바 특별히 있는 책 아니지 않느냐 이의를 제기했고 

멧캐프는 이 책들을 알아보고 사랑하는 드문 방식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나가기 전 멍하고 피곤해서 무력한 상태였다가 

그의 열띤 (정말 그에게, 대나 스티븐스의 어휘 선택을 따르면 "ferocity"가 있다. 맹렬하게 문제에 접근함) 

논의 들으면서 갑자기, 또, 다시, 감사히, 인생이 살만해짐. 


"좋은 사람 vs. 나쁜 사람" 

이 주제로 생각한다면, 반드시 포함해야 할 사항 하나가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상대에게 상대의 최선인 모습이 되게 하는가. 그러기를 원하는가. 

그리고, 그 자신 자신의 최선인 모습이 될 수 있는가. 


상대에게 그의 최선인 모습이 되게 한다. 이건 상대에게 위선이나 하여튼 억지를 요구하는 게 아니고 

그가 가장 자연스럽게 자기자신일 수 있게 하기. 누구든 가장 자연스럽게 자기자신일 때, 거기서 출발하여 최선인 자기가 되는 거라고 알고 있으며 믿기 때문에. 


이게 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그가 사랑한다면 그를 사랑하게 되는 것들" 이런 주제로 

맹렬한, 맹렬하게 진지한 (그리고 웃긴) 논의가 진행될 수 있는 거 아닌가 생각한다. 


나를 나이게 해 줘. 나를 나로 존재하게 해. 영어권에서도 특히 미국에선 이걸 원하지 않는 사람 없을 것이다. Six Feet Under에서 막내딸 클레어도 "Just let me be!" 이 말로 엄마던가 오빠던가에게 화냄. 그 한 마디로 그녀가 바로 이김. 


어른이 된다는 것. "성장"이라는 것이 

사실 이 자신의 "베스트 버전"되기의 축적과 함께 일어나는 거 아닌가? 

어디서든 자신의 "베스트 버전"으로 행동함이 어색하지 않고 누구에게서든 그의 "베스트 버전"을 기대함이 제2의 본성인 사람. 그런 사람이 어른 아닌가. 혹은, 그런 사람이 어른이어야 마땅하지 않나. 


우리의 경우, 특히 가까운 사이일수록 상대에게 

그를 그이게, 그가 그로 존재하게, 하지 않는 거 같다. 

어쨌든 나의 경험은 그렇다. 너를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아. 이런 ㅎㅎㅎㅎ 사람들이 가족이고 그러면 

그게 또 오래 지속되면, 그들은 그들의 이미지로 나를 만들기 시작하고. 


하여튼. 사소한 주제에 대해서든 심오한 주제에 대해서든 

오래 진지하게 얘기하지 못함. 흔히 보는 이 무능함이, 아마 저 경향과 직접 닿지 않는가 생각한다. 누구도 누구에게도 "베스트 버전"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심지어 중년 이후 세속적 성공한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유아적이면서 그러나 순진하지는 않다는 점도. 안철수가 매우 잘 보여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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