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은 진짜 시작이 아니다, 구정이 진짜다, 라고 멋대로 시작을 미뤄두었는데, 이젠 3월 새학기가 진짜 시작인 거시다, 라며 다시 미루고 있다. 무엇을, 시작을. 무슨 시작을, 모르겠으니 일단 커피 한 잔.

 

책 읽기가 더디고 힘들고 귀찮게 느껴지는 1월이었다. 커피책을 한 권 읽었는데 곧 번역서가 나올 예정이란다. 하지만 그때 가서 역서 읽고 리뷰 쓰자면 (늘 그렇듯) 까먹을테니 지금 짧게 남겨놓아야겠다.

 

커피. 드립커피. 커피콩 이야기. 에디오피아나 브라질이 아닌 예멘 커피. 모카, 라는 진짜 지명을 가진 나라 이야기. 그곳의 산악지역에서 재배되는 커피 나무와 그 나무를 몰래 몰래 문익점 방식으로 빼돌려 자기 땅에 옮겨 심은 사람들에서 블루보틀 까지.

 

미국 이민 삼세대의 한 사나이, 커피를 마시지도 않던 이십대 중반 목타르가 자신의 문화적 뿌리와 911 이후 짓밟힌 중동 자존감을 붙들며 커피를 만났다. 그가 조부의 고향 나라 여러 농장에서 커피 열매 포대들로 모으고 니캅을 쓴 예멘 여인들이 콩을 한알씩 분류한다. 예멘은 시리아를 따르는 듯한 내전 상태. 후티는 이란을 등에 업고 수도로 진격해 항구와 공항을 봉쇄하고 흔들리는 정부군은 안밖으로 혼란스럽다. 총성 사이를 피해 다니며 만나는 중동 싸나이들의 '우리가 남이가' 스피릿. 이제 주인공 목타르에게 정의란 커피콩 뿐이다. 이게 나라를 살릴겁니다! 라지만 그는 어메리칸 시티즌이고요. 책의 마무리는 타워팰리스, 아니 인피니티 옥상에 오르는 그를 보여주는데 (너무 계산한 티가 나서 읽으면서 웃었음) 내가 이 맛에 성공했지, 라는 뿌듯해 하는 그의 미소가 어째 우리나라 아자씨 같다. 그의 부탁을 거절 못했던 예멘 동포들 둘은 이 책의 출간 이후 일자리를 잃었을지도 모르겠다.

 

초반, 주인공의 좌충우돌 이야기는 흔한 슬럼가 이민 가정의 청소년을 그린다. 그러다 그가 '운명적'으로 만나는 예멘 커피. 그는 무대뽀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뭉개고 들이댄다. 90년대 책이 아니란 게 이상할 정도. 한편 그를 대하는 많은 이들의 믿음과 애정에 감탄할 수 밖에 없다. 예멘 고향의 '사나이들' 끼리의 신뢰는 더 대단하다. 내전은 내전, 하지만 일단 말을 하면 그 앞에서는 믿는다. 늘 상대의 술수를 몇 수는 계산하며 함께 (약한 마약 정도의) 카트를 씹고 취하는 이들. 커피의 종류와 역사에 대한 챕터는 이 젊은 예멘 사나이의 성공 자서전일 뻔한 책에 향을 더한다. 영어문장이 단순하고 투박해서 자꾸 미셸 오바마의 문장이 그리워졌다. 그래도 피할 수 없는 커피. 향긋한 커피를 마시러 삼성역 근처의 테라 로사에 가서 핸드 드립 커피를 마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