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예전에 <레바논 감정>이라는 영화가 개봉했을 때, 뒤늦게 최정례 시인의 <레바논 감정>을 알게 됐고, 읽어봤지만 당시의 내게 퍽 어려웠다는 인상을 남겼다. 어쩌면 교과서적 시 해석과 쉬운 교훈시에만 익숙해져 있는 이라면 그런 낯섦과 모호함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시인의 말대로 '말하지 않고, 말 할 수 없는' 어떤 감정들을 레바논 감정이라고 부를까. 현실이 꿈만 같고, 또 꿈이 현실처럼 생생한 이런 장자적(莊子的) 경계를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 하루종일 비가 오는 우중충한 하늘을 레바논 감정이라 할까. 그런 모호함이 더는 '완전한 모호함'으로 다가오지 않고  모종의 '친숙한 모호함', '동거동락하는 모호함'으로 다가올 때, 레바논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거의 모든 시를 관류하는 법칙(?), 혹은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세계와 내가 독립적이고 분절된 각각의 개별자가 아니라 서로 이어지며 뒤엉키는 상호존재 또는 동시존재임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시는 분명 나로부터 촉발되고 나와 가장 가까운 것에서 발생하지만 어느새 내가 알지 못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장소에 가닿고,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사물과 혼효되어 내가 그를 위해 애도하고 있고, 또 그가 나를 위해 웃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한다. 



이 시집의 제목은 분명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라는' 부정할 수 없는 명징한 인식론에서 출발하는 듯 하지만, 시집의 여러 시편을 관통하는 생각들은 그럼에도 불고하고, 캥거루와 나 사이의 어떤 통점을, 어떤 레바논 감정을 건드린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히 사물과 나 사이의 공통점을 찾자는 유치한 발상이나 놀이라기보다는, '나'가 '나'라고 여기는 어떤 경계의 허물어짐, '너'가 '너'라고 확신하는 부인할 수 없는 벽에 생기는 어떤 균열을 말하고 있다. 분명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말이다. 분명 <너는 내가 아니다>(101) '너는 나를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내가 너라도 되듯이' 머뭇거리는 이유. 이런 감정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각설하고, 시집에 대해 분석하고픈 생각은 없다. 다만 <로데오 구경>이라는 시와 연이은  <있었다>라는 시를 보고 허락없이 옮겨적는다. 




로데오 구경


  



지나가는 빛을 향해 손을 뻗으면서

저게 희망이야, 라고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었다

희망은 혼자 몰래 키우는 무지한 짐승

무지한 짐승 잡기 놀이



로데오 선수가 소의 잔등에서 30초도 못 버티고

내동댕이쳐지고 만다

진흙 밭에서 돼지 등에 올라타려고 기를 쓴다



미국 국가가 울려 퍼지고

카메라의 셔터가 터지는 것이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걸 안다

너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안다



북극의 얼음이 녹아내린다고 한다

남극의 빙하도

내 속에 너도 언젠가는 녹아내릴 것이다

언젠가는 이 땅이 몽땅

 


희망 나라의 부동산에 투자라도 한 것처럼

진흙 밭에 나뒹구는 선수에게 잠깐의 내기를 건다

나팔 불고 북을 친다

사실 난 희망 나라와 체결한 계약서 따위는 없었다


 

조용히 돌아와

기다리며 차려놓았던 식탁보를 벗기고

손도 대지 않은 접시를 하나하나 깨버려야 할

시간이 닥쳐온다





있었다


 

                           


지금껏 이것들

쓰려고 했지만 써지지 않았던 것

그에게 가닿기를 바랐지만 닿지 못했던 것

이것들 어떡하나

 


그는 시 따위를 읽으며

시간을 허비할 사람이 아니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는 나는 누구란 말인가?

내 육체 속에 숙박하고 있는 이 말들은

터무니없이 귀찮게 구는 이것들은


 

그는 물결 따라 흐르다 발목에 와 걸리적거리는

지푸라기 같은 것을 걷어내듯이

혀를 차겠지

다시 한 번

나를 수치의 화염에 휩싸이게 하겠지

 


엎치락뒤치락 둔갑하는 그림자처럼

터벅터벅 뒤쫓아 걷는 사람들도 있겠지

황하의 뱃사공, 라스베이거스의 곡예사,

늙은 피카소의 젊은 애인들처럼

 


그래 그래

이것은 있었다

빚보증 섰다가 파산한 삼촌의 울화병처럼

숨어다니며 구시렁대는 금치산자의 한숨처럼

 


대책 없이 무거워져서

떨어져 내릴 비구름의 형상으로

 


뭐라고 시작해야 할까

그에게 그에게 너에게

 


무수한 별들이 높은 데서 폭발하고 있는 동안에

오늘은 이렇게 초라했었다 전전긍긍했었다

속수무책으로 있었다

 


네가 있기 때문에 있었다

그러나 끝내 이 말은

가닿기도 전에 얼굴을 붉히리라

 


이 생각의 불, 불, 불은

흘러가던 붉은 구름 한 점처럼

저녁 빌딩 유리창에 걸려서

있었다 덧없이



시인에게 희망은 짐승을 잡는 놀이와도 같다. 그러나 이 희망이라는 짐승은 무지하다. 그것은 30초도 제대로 버티기 버거운 위험한 놀이다. 시의 중간에서 희망은 '너'와 겹치기도 한다. 그러나 너는 곧 녹아버릴 북극의 얼음같다. 제아무리 견고한 남극의 빙하라하더라고 그것은 끝내 녹아버릴 것이다. 마치 녹기 위해 얼어붙은 것처럼. 너는 결국 내 안에서 녹아 사라질까. 그러나 시인은 이런 아직 다 흘러내리지 않은 얼음, 그 얼음에 대한 희망, 소의 잔등에서 누리는 몇 초의 희망을 이제 과감하게 잘라버리기로 한다. 너를 기다리며 차렸던 식탁의 식탁보와 접시를 하나하나 깨려한다. 그렇다면 희망은 과연 무가치한 것인가. 들뜨고 기다렸던 모든 일들은 끝내 깨버리고 치워버려할 무지일까. 


연이은 시 <있었다>는 그런 가치판단을 중지하고 다만 '있었다'는 존재론적 의미를 다시 되짚게 한다. 너에게 다 쓰지 못했던 부치지 못했던 그런 감정이 있었다. 여기. 울화병처럼, 한숨처럼. 허나 동시에 나는 "네가 있기 때문에 있었다". 치솟는 불같은 내가, 아무 의미 없이 유리창에 걸려있는 붉은 구름일지라도 그것은 홀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또 덧없지만 아주 덧없지는 않지 않던가. 


최정례 시인의 시와는 직접 상관없지만, 최근 이창동 감독의 <버닝>을 보고 페이퍼와 엮어 몇자 적어 본다면, 영화 속 종수(유아인)의 집에서 종수와 (스티븐 연)이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종수의 상황과 배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밴과 마찬가지로, 종수는 벤의 생각과 생활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대화는 철저하게 평행선을 달리며 자신들의 말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은 동시존재라는 개념을 들먹이며 타인과 자신의 경계 허물기에 대해 말하지만, 바로 곁에 있는 종수를 이해하지도 또 이해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에게 종수나 해미(전종서)는 흥미롭거나 신기한 낯선 놀잇감이고, 종수에게 벤은 재수없으면서도 부러운 존재이다. 


영화 속 하우스라는 메타포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겠지만, 나는 세 주인공 모두가 서로가 서로에게 있어 찢어지기 쉽고 불타기 쉬우면서도 불투명한 비닐하우스라고 생각한다. 상대를 잘 알지못하고 그저 모호하게만 아는 한에서 그들은 모두 유약하고 상처받기 쉽다. 밴은 해미를 단순히 버려져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하우스 정도로 여기고, 불태우거나 찢어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밴 또한 종수에게는 하나의 찢어지기 쉬운 하우스가 아니었을까, 포르쉐를 타고 견고한 펜트하우스에 살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영화를 보고, 또 최정례 시인의 시를 보면서 시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에 치닫는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때 불이 되는 것이 아닐까. 당신이 나를 잘 알지 못할 때 나는 쉽게 찢어지거나 타버릴 그러나 여전히 모호한 비닐하우스이고 당신은 불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당신이 아닐 때, 나는 당신이라는 하우스에 당기는 불이 된다. 시 또한 분명한 불이다. "이 생각의 불, 불, 불"! 그러나 시는 상대를 버닝하는가? 상대를 처참하게 전소시키는가? 그렇지 않음에, 어쩌면 태워도 태워도 타버리지 못한 하우스로 있는 것, 그것을 시는 말하고 있는게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상하다 개가 짖지 않는다 앞집 개가 짖지를 않는다

한번 짖기 시작하면 일 분 간격을 두고 두세 시간을

내리 짖던 녀석이 짖지를 않는다 손님 온 것도 아니고

도둑놈 온 것도 아닌데 무슨 외상(外傷)이 있어서가 아니면

그렇게 짖을 이유가 없는 놈이 설 쇠고 며칠 사무실을

나오지 않다가 나와보니 딱 짖지를 않는다 며칠 전

들른 내 친구가 저 녀석은 아무래도 동물병원 가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될 것 같다고 했었는데 정말

정신과 치료를 받았는지 짖지를 않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간혹 짖기도 한다 짖기는 짖지만 한두 번

컹컹거리다가 딱 그치고 만다 아무래도 저 녀석이

달라진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제 주인이 정신병원에

데리고 갔거나 아니면 제가 그토록 못 잊어하거나

아파하던 문제가 해결되었거나, 해결은 안 되었어도

제 스스로 마음을 고쳐먹었거나 어떻든 달라졌다

달라진 건 좋으나 나는 왠지 마음이 불편하다 조금

편하기도 하지만 어딘가 불편하다 제가 한참 짖어

댈 때 내가 저를 많이 미워했기 때문이다 저렇게

짖자면 저는 얼마나 괴로울까,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아휴, 저놈의 개 어디 나가 죽었으면,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건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남들 괴로워하는 모습 보면 당연히

같이 힘들어야 할 텐데, 자꾸 미운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미운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어졌으면, 아니

당장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문제는

그런 마음이 들고 나면 그런 마음을 가졌다는 것

때문에 또 괴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미워하는

것은 미워한 것에 대한 죄책감도 포함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저 개가 짖기 시작한다면 나는 녀석을

사정없이 미워하리라 혼신의 힘을 다해 미워하리라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미워하리라 젖 먹던 힘을 다해

미워하리라 그리고 후회의 구렁텅이에서 주님, 나의

주님을 부르리라 그분은 나를 미워하지 않으리라

                         

                        -<문학과 사회(27)>,2014.



*

"그러니까 미워하는 것은 미워한 것에 대한 죄책감도 포함하는 것이다"

어쩜 이렇게 평이한 문체로 인간의 문제를 적확하게 꼬집을 수 있을까.

모순된 감정들, 인간과 사물, 인간과 인간 사이사이에 놓인 그 모든 애증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안 뒤푸르망텔의 <초대>

첫 장에서는 뒤푸르망텔이 데리다의 환대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한다. 

광기와 언어/어머니, 모국어와 광기의 관계에 대하여(34-37)

모성적 광기가 광기 본질의 어떤 것을 엿보게 해준다. 폭력의 확대는 근접한 것에 대체될 때, 폭력은 광기를 모성적인 것으로부터 이어받는다. 다시 말해, 가장 환대받아야할 장소에서 오히려 가작 적대적 행위가 벌어지는 따위.

데리다의 환대는 동식물과 신에게까지 그 대상이 확대되고, 또 죽음에 대한 환대에 대해서도 다룬다. 


적의와 환대, 주인과 이방인

경계짓기, 획정 가능성의 모호함, 또는 침해받음

자기-집에 대한 자기의 지상권이 없으면 고전적 의미에서의 환대란 있을 수 없다.(89)

지상권은 배제하고 선별하고 선택함으로써만, 즉 폭력을 행사면서 발동된다. 국가의 사찰이가 감시도 같은 의미에서 고전적 국가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요구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칸트의 진실만을 말하기는, 자기만을 위해 은폐하고 자기만을 위해 간직할 모든 권리를 근본적으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쏘, 자기-집에의 권리를 이차적이고 부수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순수한 도덕성의 이름으로 그는 국가의 사찰과 경찰의 폭력적 무제한적 감시를 묵인하게 된다. 


이방인은 외국인이 아니며, 또 타자가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인의 말대로, 유계영의 시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들 앞이라면

한마디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전작의 예민함과 감수성을 이어가면서도 

짧아서 더 집중하기 좋다. 시시한 해설 대신 시인의 에세이 한 편 덤으로 있어

좋다.



문은 계속 바라보아도 문이다

여기까지는 내가 말할 수 있는 슬픔이다

                               -<횡단>中



울기도 지친 망막들이 태양을 노려봅니다

켜지기 전에 여러 번 깜빡이는 형광등

                             -<환상종>中



삶은 길고 지루한데 축하는 너무도 짧아서

누군가 꽃다발을 발명했다고 전해진다

죽음을 예감하는 순간이 컴컴하지 않도록

                           -<인그로운>中



길을 놓친 발목들을 다 주워 먹고

사거리는 배가 부르다

                             -<잘 도착>中


그리고 자신이 골라낸 불량품들의 하나뿐인 아름다움을 떠올린다.

                                             -<공장 지나도 공장>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술라르는 사유, 뇌의 이성적 활동이 전개하는 합리적(?) 생각말고, 상상, 몽상, 바슐라르의 언어로 풀자면 시적 몽상을 경험하고자 한다. 그의 가장 만년작인 이 촛불은 촛불이라는, 혹은 촛불이 타오른다는 객관적 현상이나 사실 말고, 촛불이 인간에게 어떤 몽상의 가능성을 여는지, 또 이 가능성을 따라 추적한 느낌들은 어떤 것인지 열거한다.


바슐라르는 정신의 키아로스쿠로(명암 배분, 대비)가 몽상이라 뜻매김한다. 회화에서 때로 빛과 어둠움의 대조가 극대화되듯, 몽상가는 몽상이라는 빛과 어두움의 경계를 지긋이 바라보고 빠진다. 


주베르의 "불꽃은 축축한 불이다"라는 표현은 우리에게 어떤 몽상의 장을 마련해준다. 그것이 사유라면 하나의 역설에 불과할 것이고, 이미자라면 덧없이 금새 사라지고 말 것이지만.(35)


불꽃은 위로 흐르는 모래시계다.(36)


비주네르의 불빛과 흰빛 그리고 불의 도덕성, 더럽고 불순한 다른 색의 불들 사이로 수직상승하는 흰빛은 정화된 인간의 어떤 정신을 말한다. (41-43)


불꽃은 미미한 소리를 낸다. 불꽃은 괴로워하는 존재다. 모든 작은 고통은 세계의 고통을 나타내는 기호다.(55)


제3장과 제4장은 수직 상승하는 불과 식물의 생장 사이의 유비적 관계를 문학작품들 속에서 더듬는다. 활짝 피는 꽃이 불이라는 문학적 상상들은 단순히 몇 명의 작가들에게만 나타나는 특징은 아니고 비교적 보편적 유비이해인 것 같은데 이를 종교적 영역으로까지 확장하여 이해하는 앙리 코르뱅Henry Corbin의 관점이 독특하다.


제5장에서 바슐라르는 몽상을 불러일으키는 램프와 각각의 램프들이 개인의 삶과 연결되는 지점에 주목한다. 재밌는 점은 램프와 달리 전구가 가진 모종의 삭막함,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이행 속에서 기술이 몽상을 억압하는 양상을 잘 캐치한 대목에서 보인다. 장의 마지막에 앙리 보스코의 <히아신스>라는 작품을 예로 들며, 타인의 램프에 대해 말하는데 이를 빌려 작가는 상상의 연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좁혀지지 않는 어떤 고독에 대해 말하는 것일까.





이가림 시인이 75년도에 초판 번역한 것을 재판한 책, 

김병욱씨의 번역본과 같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