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생빅투아르산을 보게. 그것이 어떻게 솟구치는지, 그것이 얼마나 초지일관 태양을 갈망하는지 말일세. 그리고 그것의 모든 무게가 푹 가라앉는 저녁이면 그것이 얼마나 구슬픈지도...이 덩어리들은 불로 만들어졌고 여전히 내부에 불을 간직하고 있지...그게 바로 묘사할 필요가 있는 것이네.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네. 


말하자면 그건 경험의 용기라서 감광판을 담가야하는 곳이 바로 거기지. 하나의 풍경을 잘 그리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의 지질학적 구조를 발견할 필요가 있네. 대지의 역사란 두 개의 원자들이 만났던 때로부터, 두 개의 소용돌이가, 두 개의 화학적 춤이 한데 모였던 때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해보게. 


루크레티우스를 읽을 때, 나는 그 최초의 커다란 무지개들에, 그 우주적 프리즘들에, 공허 위로 떠오르는 인류의 새벽에 흠뻑 젖는다네. 옅은 안개 속에서, 나는 새로 태어난 세계를 들이마시지. 나는 색의 차이를 극도로 예민하게 알아차리게 되었네. 나의 무한의 모든 색조에 흠뻑 젖어 있는 것처럼 느끼는 바로 그 순간, 나와 그림은 하나가 되지. 


우리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푸른 색을 함께 만들어내지. 나는 모티프와 대면하고 그 속에서 나를 잃는다네...나는 이런 관념을, 이 분출하는 감정을, 보편의 불 위를 맴도는 이 삶의 증기를 붙들고 싶어. 


내 캔버스가 묵직해지기 시작해. 내 붓에 무게가 가해지고 있어. 모든 것이 떨어지고 있어. 모든 것이 지평선 아래로 떨어지고 있어. 내 두뇌에서 캔버스로. 내 캔버스에서 땅으로. 무겁게. 공기는 어디에 있으며, 그 농밀한 가벼움은 어디에 있는가? 천재적인 솜씨가 있어야 이 모든 요소들이 공중에서, 똑같은 솟구침으로, 똑같은 욕망으로 만나는 걸 환기할 수 있으리. 548-549 주)142 <<지각의 정지>>







볕뉘.


1. 


생에 말년의 세잔이 종종 자신을 "감광판"이라고 불렀으며 그는 "기록하는 기계"가, 그것도 "빌어먹게 좋은 기계"가 되기를 열망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기관은 사실 눈이 아니라 뇌다. 인간-기계 이분법의 분명한 조건들을 넘어서는 자동적 작동 양식의 가능성이다. 이런 면에서 세잔은 역사적,개인적 흔적들의 저장소이면서 부동의 기능성을 지닌 무덤덤한 기계 장치로 상상할 수 있던 세잔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질질 끄는 작업, 숙고, 연구, 고통과 기쁨...옛 거장들이 활용했던 방법들에 대한 끊임없는 숙고"를 통해 "기록하는 기계"가 되는 데 필요한 온갖 수련을 다했다고 단박에 주장할 수 있었던 세잔 말이다. 547


2.


이 것은 인간적 지각의 근간이 되는 조건들로부터 해방을 추구하고 있다는 걸 말한다. 다시 말해 형상/배경, 중심/주변, 근경/원경이라는 조건들을 벗어나 세계를 확고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장치가 되기를 추구하는 것이다. 548


3.


말년의 세잔과 관련해 널리 회자되었던 '고립'(계급적 고립, 지리적 고립, 공동체로부터 고립, 노련으로 인한 고립)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선연히 빛나는 그의 선캄브리아기적 무정형의 이미지들은 사실 자본주의의 탈영토화 과정 및 그 지각적 쇄신의 원칙들에 상응하고, 그 흐름에 부합하는 뿌리 뽑힌 '방향성 없는'주체에 상응했다. 549


4.


세잔은 "사물 속에 있을 " 눈을, "보편적인 변화, 보편적 상호작용"을 기록할 수 있는 눈을 구성하기를 꿈꿨던 첫 인물이다. 556


5.


세계란 본질적으로 관계들의 세계다. 어떤 조건에서 그것은 어디서든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 존재는 본질적으로 어디서든 다르다고 한 니체. 세잔에게서도 관건이 되는 것은 관점의 복수성이 아니라 각각의 관점을 이루는 힘들과 강도들의 특별하고 생생한 관계를 경험하는 일이다. 567


세기 전환기의 세잔은 자기-변형, 자기-갱신이라는 모순적 기획의 화신이다. 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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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밭은 이렇게 객토하는 이가 늘어야 한다. 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던 자리를 바로 잡아주어야 하고, 그런 과거를 안고 새롭게 밀려갈 때만 미래는 하나로 갇히지 않고 여러 갈래로 분기할 수 있다. 단 하나의 미래가 아니라 천 갈래의 미래를 우리는 셈하고 고를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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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시말미, 남시인님이 오셔서 철수까지 지켜봐주신다. 시의 이력과 힘, 최근 시리즈 작업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단출한 짐을 옮기고 배웅까지 해주신다. 


-3


 예정된 전시기간은 하루 더, 토요일까지였다. 돌아가신 날, 생신에 마음을 다독이며 서로를 챙기기로 한 날이 마침 토요일이어서 금요일 기차표를 예약하고 조금 더 당기려하지만 매진된 열차는 당길 수 없다.


-2


동생과 누님이 음식를 사고 준비를 하고 늦은 밤까지 매형과 밀린 이야기들을 나눈다. 봄날처럼 따뜻한 생신날. 묘소도 편안한 봄날이다. 그렇게 한참을 머물다 또 대전에 머문다. 아이들과 밀리고밀린 이야기를 한참 나누다나니 물음이 나에게로 향한다. 아빠는 어떠신가. 어머님이 걱정이었는데 하룻밤 자면서 나눈 이야기로 꿈에는 나타나지 않으신데..나두 정신없이 전시준비하고 황망하기로 했지만 이젠 마음의 딱지가 생긴 것 같다고 한다.  밀린 축하도 받는다.


-1


일요일, 일찍 내려와 철수 짐들을 정리한다. 간이열풍기로 양면테이프 흔적을 덜어내고, 분류해서 단정하게 놓는다. 사무실에 건너와 소포들도 열고 닫고 하다보니 오후도 시간이 제법 지나 출출해진다. 막 생긴 넓디 넓은 부산밀면집이라기보단 빌딩이다. 책을 챙겨간 것이 화근이다.


0


여는 말을 읽다. 마음과 가슴의 상처는 마침표에 찔린 듯 아프다. 문자가 이리 아픈 건 처음이다. 눈물이 밀려나온다. 글 사이를 보지 못하고 무심하고 허술했던 내가 밉다. 그렇게 큰 일이 일어난 줄 조차 몰랐다니 부끄럽다. 아픈 마음들을 챙기는 말조차 건네지 못한 것에 머쓱해졌다. 지난한 일년이었다니.


1


여기에는 문학영화가 많이 소개된다. 그것도 최신버전이다. 혼자 미디어를 끊은지는 몇년 째다. 몰아보기, 천만영화 쫓아보기가 그저 분노를 삭히고 가라앉히는 용도로 쓰이는 것이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책에서는 문학과, 다시 영화화된 영상을 쫓는다. 생소한 영화들이 많이 소개되지만 충분히 쫓아갈 수 있다. 소모되고 냉소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뜨거워지게되는 다른 독법들이 숨겨져 있다. 이런 문학-영화 리터러시라면 십분 이해할 수 있겠다싶다.


2


저자와 부친 간의 관계. 변곡점이 되는 몇 편의 편지를 슬몃 소개한다. 지역과 남성상이 겹친다. 그 하늘은 무겁고도 짙다. 회색빛 먹구름들이 드리워져 있다.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밀려나가 하는 힘들이다. 글들의 많은 부분들이 책읽기와 삶읽기에 겹쳐있다. 응원한다. 여전히 지금을 짓누르는 삶들. 가장 끈질긴 족쇄다.


3


책속의 책들. 인물들. 부분부분 겹치기도 하지만 부분부분 겹치지 않기도 하다. 연륜이나 삶의 흔적들에 책을 읽고 주변을 살피는 저자는 늘 깊은 곳을 보려한다. 그 이면들을 관찰한다. 그래서 시종일관 따스하다. 그 온기들이라면 저자가 가르키는 삶의 방향을 알 듯도 하다.  모처럼 깊이 있는 글과 책, 그림과 문학-영화 소개, 몸을 끄을면서 쓴 흔적들은 경이롭기도 하다.


볕뉘


1. 쾌차와 안녕을 빈다.


2. 미래란 과거을 안고 밀려가는 것이란 말. 

혼잣말의 근거를 여기서 찾다. 반가운 일이다.


3. 마지막 장도 시인으로 끝이 난다. 

정말 좋아하는 <패터슨>과 영화. 일상을 길어내고 세상을 건져올리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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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스칼라와 벡터. 크기만 있는 것과 크기와 방향이 있는 것. 흔히 쓰이는 말이지만 그렇게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정역학과 동역학. 물리시간에 앞부분만 배우다 보면 정작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많은 과학자들이 있지만 동역학으로 진도를 나가지 못한다. (나도 그러하다) 알튀세르와 들뢰즈의 사유는 마르크스에서 시작한다. 거기에 왜 사람들이 변하지 않은가에 물음표를 찍고 무의식과 결합한다. 거기에 덧붙여 현재의 과학혁명을 사유에 접목시킨다. 그러니 알퀴세로와 들뢰즈를 읽으려면 이런 인식론의 단절과정을 유심히 지켜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산을 넘을 수 없다. 우연성, 사건, 마주침 등등 프랑스철학의 바탕에는 기본적으로 이런 인식이 있다.


-2


폴비릴리오, 베르나르 스티글러, 허욱(육휘): 


이 세 사람은 지금 관심을 갖고 읽는, 읽어나가는, 읽어야할 책저자들이다. 개인적으로 고령의 폴비릴리오를 높게 평가한다. '기술이 사고를 발명한다.' 이전까지는 세상을 해석하였다. 크기만 밝히려 무진장 노력을 하였다. 그래서 개인적인 평을 하자면 이 저자를 통해 크기와 방향을 갖는 인문학의 벡터사유가 가능해졌다고 본다. 이어서 훨씬 젊은 베르나르 스티글러를 읽고 있는데 심박하다. 레저, 노동의 가치가 아니라 기본소득의 방편을 넘어서 놀면서 가치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발랄함이 있다. 그 사유를 전개해나가는 듯도 하다.(아직 초반이라서....이러길 바란다. 더 읽어내야 한다.) 


-1


그러는 와중 발견한 사람이 홍콩출신이지만 독일에서 교수를 하고있는 유휘, 허욱으로 출간된 책들이 눈이 들어와 무릅쓰고 구매하였다.


재귀성과 우연성


 이 책에서 반복되던 글귀인데, 기술과 우연이 겹치니, 분명 다른 뭔가가 있을 듯싶다. 어제 전시실에서 문화재단 기자들의 취재가 있기전 슬몃슬몃 읽기도 했는데, 그래그래 이런 학자가 분명있을 거야. 있어야지 한다. 박사학위논문이기도 하다는데 밤샘해서 읽고 싶은 충동도 느낄 정도이다.  



0


대전 친구와 하룻밤 깊은 책이야기와 여러 이야기를 하다보니 피로가 겹쳐 일찍 자고 일어나 새벽 책을 펼치려고 하니, 건물이 흔들린다. 어쩌지 못하는 너울위에 서있는 느낌이 잠시 든다.


-4.


그래도 괜찮다. 괜찮은 저자들을 발견했으니,

제목은 들뢰즈의 말이기도 하다.


이제는 인식에 있어 진도도 나가야할 때다.

전혀 다른 지반위에 서있어야 한다. 학문도..기술도 그러하다.

동역학처럼 벡터사유가 가능한 시대다. 책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잘 가려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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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토요일 저녁이 되어서야 이 책이 손에 집힌다. 간단한 점심으로 약간은 허기진 상황이어서 단골집에 주문을 넣고 따뜻한 물을 맥주컵에 챙겨주신다. 한모금 마시다가 그만 엎질러버린다. 어떡해. 이런. 사근사근한 베트남분 직원은 싹싹하게도 마무리해주신다. 고마워요.  그렇게 목차를 다시 살펴본다.


-2


앞부분에는 그림과 간단한 설명이 요약 겸해서 나온다. <항상 똑같다>는 1930년 대공황이 발생했을 때 당시 상황을 풍자하는 그림이다. 황소모습을 한 이가 안짱다리를 하며 입으로는 연신 비누거품을 만들어서 날리고 대중-개인들은 그 비눗방울 거품을 쫓아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1 (춥다싶어 보니, 송풍만 해두고 히팅버튼을 누르지 않았다는)


7장 21세기의 에너지와 퍼텐셜 - 신의 죽음 이후의 에너지와 힘(권력) 8장 시장을 넘어, 시장 밖에서 등등 끌리는 장들이다 싶다.


0


부산스런 준비들을 마치고 도입부를 읽는다. 번역자가 격앙되어 있다. 무언가 전달하고야 말리라는 모습으로 분주하다. 몇 꼭지가 걸린다.


인간은 지적 존재지만 동물처럼 그 자체로, 즉자적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비극적인 결함적 존재이다. 이 비극을 인간은 '기술'과 '도구'를 중심으로 극복해왔지만 주류 철학은 오직 '주체'와 '인식'과 '이념'만 철학적 대상으로 사유해왔다. 거기서 고대 사회에서는 주로 노예가 담당해온 '노동'과 '기술'은 무의식적으로 사유의 대상으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되어 왔다. 즉 '주체'와 '인식'과 '이념'은 인간 주체로의 내부화 못지않게 '외부화'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 외부화가 인류 문명의 진정한 힘이라는 사실은 철저하게 무의식화되어 왔다. 저자는 이에 대해 서구 형이상학의 역사는 존재-망각의 역사라는 하이데거의 명제를 빌려 서구 사유의 역사는 기술-망각의 역사라고 주장한다. 45


<<프로타고라스>>에 따르면, 제우스는 인간과 동물에게 가각의 재주를 나누어줄 것을 프로메테우스에게 명하는데, 이를 대신 떠맡은 동생 에피메테우스(뒤늦게 깨닫는 자)가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 어떤 재주도 나눠주지 않고 망각하는 '실수'를 하고 만다. 이에 짐승들과 함께 거친 자연 환경 속에 내던져진 인간을 불쌍히 여긴 '미리-생각하는 자' 프로메테우스가 절름발이 대장장이 헤파이토스에게서 (특정한 재주가 아니라) 불을 훔쳐 인간에게 선물로 줁다. 그러자 제우스는 불이라는 신의 '기술'을 훔친 프로메테우스에게 낮에는 코카서스 산에서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형벌을 내리고, 에피메테우스에게는 이후 기독교의 선악과와 관련된 이브와 비슷한 판도라(모든 선물)를 선물=독으로 준다. 이렇게 요약된 신화에서 인간은 기원에서부터 만물의 영장이기는커녕 본원적으로 결함, 결핍의 존재이다.


















1


안타깝게도 지금 여기, 섬나라인 우리는 과학기술을 신주단지 모시듯한다고 지금하면 백번을 넘는다 싶다. 지금도 연장선상인데, '인식론의 단절'을 선언하고 과감히 타 분야에서 이를 흡수한 곳과 달리 여전히 갈팡질팡이다.  국뽕 무슨 뽕, 많고 많지만 과학(기술)뽕도 그 가운데 하나인 듯 싶다. 


2


이 책들의 시리즈들이 요긴할 것 같아 주문을 넣는다. 육휘(허욱) 책들도 말이다. 어서 보고 싶구나. 어떤 이야기들을 하는지. 기술-망각의 역사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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