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시간이라는 캔버스: 잿빛 숲, 아늑하다/잿빛 숲, 은은하다/숲은 말하지 않는다: 6개월이라는 시간, 아니면 이백일이라는 시간. 그 시공간에 한 점, 한 점, 내 작품을 건다. 글일 수도, 관계일 수도, 그림일 수도, 시일수도, 요리일 수도, 이벤트일 수도...그 여백을 챙기고, 작품을 모시고, 피어난 꽃들이 그 시간들을 서로 맞물리면서, 음을 달리할 수 있다면 그럴 듯하다고 여겨본다. 오늘 한 작가의 작품전시회 전 프롤로그책(물론 혼자만든)을 보며 이런 마음꼬리가 슬며시 잡혔다. [개인전을 열다]

[2 ] 절벽 끝에 서 있는 사람을 잠깐 뒤돌아보게 하는 것, 다만 반걸음이라도 뒤로 물러서게 하는 것, 그것이 시일 것이라고 오래 생각했다는 구절을 읽었다. 시인의 말이었다. 문득 내가 불편한 글이 그렇다고 생각했다. 절벽 끝에 있는 사람을 잠깐 뒤돌아보게하는 것도 글이라고, 가만 있지 않고 춤추게 하는 것도 글이자 시라는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쓴다는 것은 그리 더딘 일이지만, 더디지 않는다는 걸. 손잡아주는 이가 어디쯤있다는 걸. 그렇게 써야한다는 것을. 가을햇살이 반틈 고개를 쭉 내밀었다. -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네 꿈 속의 유일한 등장인물은 나. 우리는 마주보며 서로의 지나간 죄에 밑줄을 긋는다. ‘소행성‘ /눈에 뵈지 않는 것들은 멀리 있고 멀리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다 너는 너무 멀리 있고 또 너무 가까이 있다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내가 너무 멀리 있기 때문이다 ‘플랫폼‘

[3 ] (˝인간은 추구하는 존재여야 한다.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추구하는 존재로 살아야 한다.˝ - 하찮은 것에 간절해지지 말자는 말을 하찮은 것에 간절해지는 나를 향해 주문처럼 하곤 했다. )‘정작 자신은 그리워할 다른 삶이 없었던, 그래서 자기가 붙어 있는 곳에서 자기를 떼어낼 생각을 할 수 없었던, 그래서 허전하고 화나고 숨막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데도 어떻게든 붙어 있으려고 버둥거렸을 어머니의 삶이 손에 잡히는 듯했다.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은 가장 모르는 사람이다 ‘모르는 사람‘‘ [모르는 사람들]

[4 ] ‘페미니즘은 내가 아버지를 잊을 수 있다고, 아버지를 거부할 수 있다고 가르쳐줫다. 아버지를 외면하면서 나는 나 자신의 일부를 외면했다. 남자들이 없는 세상, 여성과 남성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 여성들이 부정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우리의 힘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잘못된 페미니즘이 만든 허구다... 남성은 여성의 삶에 존재한다는 진실, 여성들에게는 남성들이 가부장제에 도전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진실, 여성들에게는 남성이 변화할 필요가 있다는 진실을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 여성들은 자신의 힘을 온전히 주장할 수 있다. 17 감정의 박탈: 가부장제에서 남성들에게는 분노라는 감정만을 표현하는 것이 허용되기 때문에 남성들은 사랑을 느끼지도 표현하지도 못한다. 여성과 아이들은 남성들에게 사랑을 갈구하거나 남성들을 두려워하거나 증오할 뿐이다.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스스로 소외되고, 사람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지 못하기 때문에 남성의 내면 깊은 곳에 고통이 자리 잡고 있다.‘ 벨 훅스는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남성들이 가면을 쓰고 있다고 말한다. 사랑을 갈망하고 거짓에서 구조되기를 바라며 진실을 그리워하지만 이를 인지하지도, 드러내지도 못한 채 가부장제에 복종하고 있다는 것이다. 316 페미니즘 남성성의 구성요소는 상대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자주적으로 행동하며 상대와 감정적으로 연결되는 능력을 비롯해 온전함, 자기애, 감정인식, 자기주장, 관계의 기술이다. 318 [남자다움이 만드는 이상한 거리감]

볕뉘.

0. 네비를 업그레이드한다고 했는데 포맷이 되어버렸다. 아니면 사양을 확인하지 않아 엉뚱한 버전이 되어 맞지 않는게다. 공들인 시간이 아까운 것일까? 아까울 것일까? 유사한 일이 반복된다면 수월함을 익힌 것인지도 모르겠지? 그럴까?!

1. 대학에 입학한 뒤, 대부분의 가족과 그렇듯이 불화를 겪었다. 알량한 앎이 가족은 아무 쓸모도 없다고 부추겼다. 어쩌면 삶들이 더 그러한지도 모르겠다. 그때 생각을 더 밀고나갔더라면 하는 가정을 해보면 더 극적으로 일상의 주변이 나아졌을까? 그건 장담할 수 없을 것 같다. 살아가는 것과 살아지는 차이가 별반 표가 나지 않는 것이다. 아니면 더 그 간극이 더 좁혀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집은 시인에게 추천을 받았고, 다른 책은 손에 끌려골랐다. 맛보다나니 많이 겹쳤다.

2. 보이지 않는 것이 너무 많았다는 사실. 스스로도 가까운 지인도 그러하다. 애써 돌아보려 돌아보고 서성인다는 것만 말곳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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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 ] 자기만족으로서의 자아라는 개념은 부르주아 정신과 부르주아 철학의 본질적인 표현 가운데 하나다. 프티 부르주아의 자기만족과 같이, 자아라는 개념은, 불안하면서도 진취적인 자본주의가 지닌 뻔뻔 스러운 꿈에 자양분을 공급해 준다. 이 개념은 인간을 자기 자신과 화해시키기보다는, 알려지지 않은 시간과 사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일을 지향하는 자본주의의 노력, 결정권과 발견에 대한 숭배를 주재한다. 부르주아는 내적인 분열과 자기 신념의 결여에 대한 수치심을 표현하지 않는다. 단지 현실과 미래를 염려할 뿐이다. 왜냐하면 분열과 결여는 바로 부르주아가 소유한 현재의 확정된 균형 관계를 끊어 버리도록 위협하기 때문이다. 6

[ ] 존재에 대한 긍정이 지닌 잔인성은 절대적인 만족이며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을 지시하지 않는다. 7
[ ] 동일성은 사람들이 그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성격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 사실의 충만함의 표현이다. 8
[ ] 서양철학의 평화와 안전성에 대한 이상은 존재의 충만함을 전제했다. 인간의 조건이 지닌 불충분성은 심지어 ‘유한한 존재‘라는 의미를 직시한 것 외에, 단 한 번도 다른 어떤 존재의 한계와 같은 것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9
[ ] 탈출이라는 표현 자체만으로 현대적 삶의 모든 상황에 대한 목록 전체를 도출하기는 쉽지 않다. 그 목록은 삶의 여백 속에 아무것도 남겨두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자각할 힘조차도 지니지 못한 세대 속에서 만들어진다. 10

[3 ] 생명의 약동이라는 창조의 철학은, 고전적인 존재의 엄격성에서는 탈출하는 반면 존재의 마력에서는 벗어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창조의 철학은 실재 저편에서 새로움을 창조하는 활동만을 식별하기 때문이다. 13

[4 ] 근본적으로 생성은 존재의 반대가 아니다. 미래를 향하는 경향, ‘자기의 앞으로‘ 향하는 경향은 약동 속에 포함되어 있고, 하나의 과정에 운명을 바치는 존재를 표기한다. 약동은 창조적이지만 저항할 수 없는 것이다. 운명의 성취는 존재의 흔적이다. 모든 운명이 전부 존재의 흔적은 아니지만, 운명의 성취는 치명적이다. 우리는 갈림길에 있지만, 운명을 선택해야만 한다. 우리는 시작한다. 생명의 약동 속에서 우리는 낯선 것을 향하게 되지만, 우리는 어떤 부분에 불과하다. 반면에 우리는 탈출 속에서 벗어남에 관한 감화를 받게 된다. 이것은 혁신이나 창조와는 동화될 수 없는, 그 순수성 안에서 포착되어야만 하는 출구라는 범주다.이 독특한 주제는 존재로부터의 벗어남을 우리에게 제안한다. 14

[ ] 탈출은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날 것을, 다시 말해 가장 근원적이면서도 용서할 수 없는 결박상태, 자아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의 결박상태를 깨트릴 것을 요구한다.....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길 원하는 자아는 제한된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벗어나지 못한다. 15

[ ] 반대로 탈출은, 자기와의 평화라는 주장에 문제를 제기한다. 왜냐하면 탈출은 자기에 대한 자아의 결박상태를 깨트리는 것을 동경하기 때문이다....탈출에 있어서 자아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거나 자아가 존재하거나 자아가 됨이라는 사실 자체에 기인해서 그 스스로 자기로부터 벗어난다. 16 이상 1장


2.

[ ] 우리가 탈출에 대한 분석이 완결될 때까지는 기원과 죽음의 문제가 적절하게 정립되지 않는다고 간주하는 이유다.....탈출은 우리에게 죽음으로의 도주나 시간 바깥의 출구로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상 2장

3.

[ ] 욕구는 오직 고통이 될 때 강압적인 것이 된다. 또한 욕구를 특징짓는 특정한 고통의 양상, 그것은 불안감이다. 불안감은 순수하게 수동적인 상태, 자기 자신에게 의존하는 그런 상태가 아니다. 불펴하다는 사실은 본질적으로 역동적이다. 이는 그저 그대로 있음에 대한 거부, 참을 수 없는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노력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것의 특별한 성격을 이루고 있는 것은, 이 나가는 순간을 계획하는 목적, 하나의 적극적 특징으로 부각되어야 하는 목표점에 관한 무규정성이다. 그것은 우리가 가는 곳이 어디인지 알지 못한 채 벗어나려는 시도이며, 또한 이러한 무지가 이러한 시도의 본질 자체를 규정짓는다. 23
[ ] 욕구에 관한 근본적인 편견들이 이를 통해 설명되건, 욕구 충족이 곧 불안감의 동요에 대한 응답이건 간에 모든 문제는 앎으로 나타난다. 24
[ ] 우리는 다양한 불안감의 현상 속에서 다음과 같은 한 가지 다른 최상의 요구에 주목한다. 충족이 치워 버리는 데 성공하지 못하는 짐, 고도 우리 존재의 심연 속에 있는 죽음이라는 일종의 짐이 바로 그것이다......금식이라는 고행은 신에게 흡족한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 존재의 근본 사건이라는 상황에 우리를 더욱 밀착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그 근본 사건이란 바로 탈출에 대한 욕구다. 25 이상 3장

4.

[ ] 우리 존재의 실신으로, 졸도로 존재하는 자기의 진폭의 확장 속에 전적으로 존재한다. 이제 막 시작된 쾌락의 극단에서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미친 듯이 정신을 잃고 추락하는, 우리 존재의, 보다 더 깊은 심연, 깊은 수렁과 같은 것이 열린다. 28
[ ] 우리는 쾌락 속에서 한 가지 폭, 자기 자신의 상실, 자신으로부터 벗어남, 황홀경을 확인한다. 탈출의 약속을 묘사해 주는 수많은 특성들은 쾌락의 본질 속에 포함된다. 29
[ ] 쾌락은 과정, 곧 존재를 벗어나는 과정이다. 쾌락의 정서적 본성 이러한 벗어남의 표현 내지는 기호일 뿐만 아니라 벗어남 그 자체다. 쾌락은 촉발성이다. 왜냐하면 바로 쾌락이 존재의 형태를 채택하지 않고 이 형태를 깨트리고자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기만적 탈출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패한 탈출이기 때문이다. 30
[ ] 쾌락은 욕구의 요구들에 순응하지만 욕구의 요구들과 등치될 수는 없다. 또한, 반드시 승리했어야 하는 이 기만의 순간에, 그 실패의 의미가 수치심을 통해서 부각된다. 31 이상 4장

5.

[ 1] 수치심은 우리가 겪는 고통을 확인하면서 우리 자신을 그 위신이 땅에 떨어진 존재로 형상화하는 표상이다...수치심이 우리의 유한함에 있다기보다는 우리의 자아라는 존재에 보다 밀착되어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수치심은 우리 자신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기 위해 강제성을 부과하는 우리 존재의 연대책임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수치심은 우리의 벌거벗음을 망각하는 데 이르지 못할 때마다 나타난다. 수치심은 우리가 숨기고 싶어 하지만 묻어 버릴 수는 업는 모든 것과 관계한다.....가난은 악이 아니다. 하지만 가난은 걸인의 누더기 옷과 같이 수치스러운 것이다. 32, 33 수치스런 벌거벗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타자로부터 감추고 싶어 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감추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이다. 수치심의 이러한 양상은 자주 무시된다. 우리는 수치심 속에서 그 사회적 양상을 본다. 34 우리의 수치스런 내밀함, 다시 말해 수치스러운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현전이다. 그것은 우리의 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존의 전체성을 드러낸다. 벌거벗음은 그 현존을 변호하고자 하는 욕구다. 결국 수치심은 스스로 변명을 모색하는 현존이다. 수치심이 발견하는 것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존재다. 36 이상 5장

6.

[ ] 구역질, 구토: 우리는 ‘속이 너무 울렁거린다‘ 39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존재 불가능성인 구역질 속에서, 동시에 우리는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로 고정하게 되며, 숨 막히는 협소한 순환 속에 가두게 된다. 우리는 그저 거기에 있으며, 있는 것 이상의 아무것도 행하지 못하다.......즉 순수한 존재에 대한 경험 자체다. 40
[2 ] 구역질이 고독 속에서 경험될 때, 그것의 해로운 특징은, 자기 자신을 말살하는 것과 거리가 먼 그 구역질의 근원성 속에서 나타난다. ‘중병을 앓고‘ 있으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구토를 하는 외로운 병자는 여전히 자기 자신이 ‘걸림돌이 된다‘. 특정한 차원에서는, 심지어 타인의 현전을 소망한다. 왜냐하면 타인의 현전은 ‘질병‘의 구역질이라는 걸림돌을 질병의 수준으로 내려가게 해 주고, 사회적으로 우리가 다룰 수 있는 정상 상태라는 사시로 만들어 주기 때문에,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결과적으로 객관적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위에서 논의된 자기 자신과 마주하게 되는 자기의 수치라는 현상은 구역질과 같은 것이다. 42
[ ] 우리는 구역질이 존재의 현전을 그러한 현전으로 구성하는 그 모든 무능함 속에서 드러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 모든 벌거벗음 속에서의 순수 존재의 무능함이다. 결국, 이를 통해서, 구역질은 ‘예외적인‘ 의식의 사실로도 나타난다. 43 이상 6장

7.

[ ] 욕구는 한정된 존재의 완전한 성취와 만족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지 모사며, 단지 해방과 탈출로 인도해 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욕구를 가지지 않는 무한한 존재에 관한 가정은 형용모순이다. 이와 같은 존재의 현전, 존재의 순수한 현존이 드러나는 경험은, 존재의 무능함의 경험이며, 모든 욕구의 원천이다. 45
[ ]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사실은 불가피성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불가피성이란 이미 존재를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로의 진입은 의지와 대립하지 않는다. 46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가? 존재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무에서 유래하는 문제가 아니라 충족 혹은 불충족의 문제다. 이 문제는 존재 정립의 역설을 통해서 진술된다. 더 나아가 존재의 역설은 시간에 관하여 우리 스스로가 자유로워지고 우리 자신이 영원성을 부여할 때 완전하게 되는 것으로 남게 된다. 48,49 이상 7장

8.

[6 ] 존재론은 오직 존재하거나 존재하는 것으로 가정되는 것만을 생각하고 느낄 수 있다는 편견에서 비롯된, 초보적이면서도 단순한 편견의 감옥에 갇혀 있게된다. 비모순의 원리보다 더 오만한 원리는, 무 자체인데, 사유가 무를 마주하게 되는 차원에서, 이것은 존재의 덮개를 두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파르메니데스에 대항해서 어떤 제한도 없이 비존재가 있음을 진술해야만 한다. 50

[7 ] 더 나아가 관조적 사유와 이론은 존재의 흔적을 운반하는 자의 행동 토대가 된다. 이론은 본질적으로 존재자에 굴복하고, 이론이 존재에서 출발하지 않을 때조차도 존재를 기대한다. 이러한 기정사실 앞에 무력함이 있다. 인식은 정확히 모든 것이 완성되었을 때 실행되는 것으로 남아 있게 된다. 51

[8 ] 관념론의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고서 관념론의 적법한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열려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두려움을 떨쳐버리고서 존재의 무거운 짐과 보편성을 측량하는 데서 나올 수 있다. 이 길은 존재의 성취 속에서 그 자체로 존재를 깨트리는 사건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든 행위와 사유가 안고 있는 어리석음을 우리 스스로 인식하게 만드는 길이다. 그러한 실천과 사유, 탈출의 근원성이 우리에게서 은폐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공통감각과 격언이 가장 자명하다고 여기는 관념을 전복하는 위험한 시도를 무릅쓰는 가운데, 새로운 길을 통해서 존재를 벗어나는 일에 관한 문제다. 53,54

볕뉘.

0. [레비나스 철학의 맥락들]의 버틀러편(정치윤리학)을 읽고, 잠을 청하기 전 읽다. 도입부가 강력해서 내친 김에 보아삼켰다. 레비나스 사상은 전기,중기,후기로 나뉘는데 이 책은 전기 이전에 쓰인 것이다. 1981에야 이 글을 출판해도 좋다는 허락을 한 글이다.

1.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자아는 제한된 존재를 벗어나지 못한다‘: 발버둥은 어디에 걸쳐있을까 싶다. 결국 못벗어난다고 하니 말이다. 죽음을 전제로 사유하는 존재론은 자아에 갇혀 버릴 수밖에 없다. 너란 없다. 탄생에서 출발하는 존재론. 아렌트로부터 베르그송의 생명의 도약에 대해서도 말미 토를 단다. 존재의 엄격성에서는 탈출하나, 새로움을 창조하는 활동만 식별하기에 존재의 마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고 못을 박는다.(1.3)

2. 그는 쾌락이 존재로부터 탈출한다고 말한다.하지만 벗어남 그 자체이기에 존재의 형태를 취하지 않는다고 역시 마무리한다. 그는 수치심을 꺼내든다. 그리고 구역질, 구토하는 존재를 살피하고 말한다. 존재의 영점, 영도는 여기에 있다고 말이다. 충만함이 아니라 짐과 무게를 느낄 때만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5.1, 6.2)

3. 무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충족과 불충족의 선상에서 존재는 시작하는 것이라고 되묻는다. 존재론과 관념론, 관조적 사유의 어리석음에 대해서도 말을 아끼지 않는다.(8.6 8.7 8.8)

0.1 다른 사유가 들어오면, 기존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생각말들이 덜컥덜컥 들뜬다. 밀리고 밀려 말을 바꾸어야 되는지도 모른다. 반음 뒤틀어지거나, 또 다른 말때문에 전부 말의 위치를 바꾸어야 되는지도 모르겠다. 덜컥거린다. 지난 말들을 부여잡는다. 그래도 울렁거린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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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의 상업화는 성적 욕망의 과잉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다. 성적 욕망이 전반적으로 억압되었을 때 나타나는 비정상적 현상이다. 안으로부터 분출되어야 할 성적 에너지가 현실에서 자연스럽게 영위되고 충족되지 못하는 사회에서 나타나는 왜곡이다. 자율적 판단이 ㅇㅏ니라 사회에 의해서 관리된 행동으로 변질된다. 관리되면서도 자율적으로 느끼게 한다는 점에서 자발적 복종이다. 223 성적 욕망은 상호간 향유라는 본질을 잃고, 구매자와 상품의 관계에서 소비로 전락한다. 224

식욕.수면욕.성욕이 대표적인 인간 본능임을 부인할 ㅅㅏ람은 아무도 없다....빵을 달라는 요구.생존권 보장이 깔려있는 식욕이라는 본능을 ㅅㅏ회를 통해 안정적으로 보장받기 위한 욕구가 각종 사상적, 정치적, 법적 이념과 요구로 정식화된 것이다.....수면욕도 단순히 자ㅁ만 자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휴식을 취해 몸을 정상적인 상태로 유지하려는 욕구를 반영한다....노동 시간을 제한하고 노동 강도를 완화하려는 오랜 노력은 수면욕을 ㄱㅣ본 동기로 한다. 또한 편하게 쉴 수 있는 주거환경과 만족할만한 여가 역시 연관을 갖는다./동일하게 본능에서 출발한 생존 욕구임에도 시민권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바로 성욕이다. 식욕과 수면욕, 즉 식사를 하거나 잠을 ㅈㅏ는 행위에 대해 그 누구도 부끄럽다거나 타락이라고 규정하지 안ㅎ는다. 하지만 여전히 성욕에 대해서는 은밀하게 숨겨야 한다고 여긴다. 성적욕망을 정신보다 중시하는 순간 ㅂㅣ정상적 충동으로 분류된다. 225 이상 생각의 미술관 chapter 7 욕망을 생각하는 사람에서

 

  볕뉘.

 

  0. 문득 이 글이 생각이 났다. 그리고 지난 강연이 생각도 났다. 윤수종교수의 빌헬름 라이히 강의 였다. 그리고 또 다시 샤를 푸리에의 열정적 인력으로서 네 번째 사과에 대한 이야기다. 라이히는 파시즘의 대중심리로서  갑옷을 입은 일상인의 삶들을 다루었다. 물론 노동과 정치에 대해서도 사유를 길게 전개하기도 했다.

 

 1. 68혁명으로 치기어린? 관계의 시도가 실험으로 나타났고, 아나키스트의 삶 속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그 관계 역시 질투의 장벽을 넘지 못했다.  이런 사실들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사회마다, 그 사회의 벽은 교묘히 결합되어 있다. 하이틴 로맨스 소설에 불과한 것을 대학교수가 썼다고 해서 가두는 일과 사회적 매장을 시키는 일도 엄연히 벌어졌다고 하겠다. 위계와 처신을 중요시하는 관행들 속에 하루하루가  엇박자로 이루어지고, 담론의 전개나 진화하는 양태를 찾아볼 수 없다.

 

 2. 고인의 책은 읽지 못했다. 다만 윤수종교수의 뒷얘기를 통해서 여러 문제의 꼬리를 물고 있는 성의 공적담화가 잇따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교수의 연구도 그의 맥락과 닿아 있었다.

 

3. 잘 모르겠다. 사회적 자장이 열리거나 틈이 보이지 않으면, 늘 사회적 희생이 따른다. 얼마나 질식할 삶들이 여기에 매여 매장되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매일매일....

 

4. 모임의 활성화는 성비율에서 시작한다는 우스개아닌 현실처럼, 우리들의 관계는 어떻게 확장되고 나아갈 수 있을까? 지난 여러 역사적 경험들이 다시 우러나오면 좀더 나아질까? 이는 모두의 글처럼 비단 성에 국한 되는 문제가 아니다. 삶의 질에 관계되는 것이고, 우리의 일상의 농도에 관계되는 질문이기도 하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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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7-09-06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여울 2017-09-06 15:01   좋아요 1 | URL
안타깝습니다 ㅜㅜ
 

테스트 씨

[ 1 ] 나의 단일성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의 동일성이 무너지고 ‘나는 나와 나 사이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제 그가 한 인간으로 믿어왔던 것들은 모두 의심해야 할 것으로 변모한다./˝나는 내 모든 첫 번째 생각과 우상을 무너뜨려야 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줄 몰랐던 나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원할 줄 몰랐던 나와 결별해야만 했다.˝ 144, 145


[ ] 테스트 씨의 끝 - 사물들을 바라보는 기이한 시선, 알아보는 법 없고 이 세계 바깥에 있는 어떤 인간의 이러한 시선은,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 자리한 눈으로, 이는 생각하는 자에게 속한 것이다. 그리고 또 이것은 번민의 시선, 알아보는 법을 잊어버린 인간의 시선이다. 138

[ ] 테스트 씨의 몇몇 생각 - 내가 세계에서 빌리고 싶은 것이라고는 오직 힘뿐이다.....바위. 공기. 물. 식물성 재료 같은 재료 자체에 대한 느낌이다. 그것들의 기본적인 특성이다. 그리고 행위와 국면이다. 125/ 나는 말하니, 원천이다. 하지만 우리가 고통이나 관능의 원천인 것과도 같다. 우리는 ˝우리에서 왔다고...˝. 이로부터 변화가, 값이, 크기가, ‘감지‘가, 더욱 우리의 것임과 동시에 더욱 기이한 ‘가속‘이, 우리의 주인이, 순간과 또 도래하는 순간에서 비롯한 우리의 우리가 기인한다고 느끼고 있다. 126/ 나는 내가 아는 바를 멸시한다. 내가 가능한 바를 멸시한다....내 ‘영혼‘은 바로 내게 더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지점에서, 더는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은 지점에서, 내 정신이 제 앞에 펼쳐진 길을 폐쇄하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128 / 수단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제 감수성에다가, 그 감수성에 영향을 미치며, 또한 그 감수성에 의거하여 작동할 무언가를 부여한다. 여기, 이러한 의미로 실행한 것에 대한 결산이 있다. 감수성이 전부다. 전부를 감당하고, 전부를 평가한다. 129 / 나는 세상 쪽을 향해 있지 않다. 내 얼굴은 벽을 향한다. 벽의 표면 중 그 어떤 부분도 내게 미지로 남은 것은 없다. 131 / 본질은 삶과 맞서 존재한다. 132

[ ] 테스트 씨의 초상 - 우리 안에 있는 것은 전체의 기원이며, 따라서 전무의 기원이다. 반응 그 자체다. 저 안으로의 후퇴다....가능한 것의 소모와 충전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113/ 분명, 언제나 더욱 풍부해져 돌아왔으므로, 뭇 분열과 대체와 극도의 유사성을 지니고서, 그럼에도 회귀와 어김없는 역산을 보장받은 채로 114 / 그는 자신이 상당히 자주 가장 강한 자들보다도 강한 자임을, 가장 약한 자들보다도 약한 자임을 알아차렸다. 이는 기이하게 분배된 과도와 양보의 정치학으로 인도할 매우 중대한 발견이었다. 118

[ ] 단어들을 혼동하지 말아야 하지요. 바라는 대로 단어를 배열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해서 만들어낸 배합에 언제나 꼭 다른 어떤 사물이 대응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껴야만 합니다. 잊어버려야 할 단어가 200개 있는데, 그것을 들으면 번역하게 마련이지요. 이를테면 ‘법‘이라는 단어는 어디를 막론하고 정신에서부터 지워내야 합니다. 아무도 안주하지 않게 하려면 말입니다. ˝ 108 / 저 스스로 체득한 그것은, 자신에 대해 잘 들어맞는 관념을 갖는 일이었다.... 사물 전체와 양립 가능한 것이, 인간과도 같은 저 자신이 자리매김했던 것이다....그는 제 시간을 불가능 속에서도 용이함 속에서도 잃지 않았다. 104

[ ] 테스트 씨와 함께 한 산책 - 시작과 끝의 계속적인 힘이 존재들을, 존재의 조각들을, 의혹들을, 걸어가는 문장들을, 처녀들을 소진시킨다. 99


[ ] 테스트 씨의 항해일지 발췌 - 나는 어리석지 않다. 왜인가? 내가 나를 어리석다고 여길 때마다 내가 나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죽이기 때문이다. 73 / 반목 없는 삶은 삶이 아니다. 생생한 저항이나 먹잇감이, 타자가, 즉 적수요 세계에 개개로 남아 있는 자, 나의 장애이자 어둠, 또 다른 나, 억누를 수 없는 필적할 만한 지성이, 가장 좋은 친구인 적이, 신성하고 숙명적인 내밀한 적대가 없어서는 안 된다. 71/ 타자, 그를 나는 침묵 속에서 정당히 제물로 바치며, 또한 그를 불태운다. 내 영혼의 코밑에서! 그리고 나! 이자를 나는 물어뜯고, 그에게 언제나 꼭-꼭-되-씹-은 제 고유의 실체를, 그를 성장하게 할 유일한 먹이를 제공한다! 66/ 내가 지닌 미지가 나를 나로 만든다. 내게 있는 서투름이, 불확실함이, 바로 나 자신이다. 나의 나약함, 나의 연약함.... 결함이 내 시작의 바탕이 된다. 불능이 내 기원이다.....내가 처한 현실의 궁핍으로 말미암아 상상의 풍요로움이 태어난다. 62/ 제 안에 저로 인한 궁극의 생각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 생각을 반성 또는 우연한 기회로 인해 발견할테고, 또 발견한 후에는 마땅히 죽음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는 특정 생각으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는, 그저 어떤 생각도 뒤를 잇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도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57

[ ] 에밀리 테스트 부인의 편지 - 그의 영혼은 분명 독특한 식물로 이루어졌기에 잎이 아니라 뿌리가 본성을 거슬러 명료함을 향해 뻗어나갈테지요! 이것이 바로 이 세계 밖을 향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43/ 인간의 정신이 어린아이나 개의 정신을 담듯, 그의 정신이 제 정신을 담습니다. 46 / 보편 존재 안에 모든 영혼이 존재하듯이, 저는 개인적으로 한 존재의 친구 속에 존재하는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48 / 그는 매일같이 제게 원하는 것이 무어냐에 따라 저를 지칭합니다. 그가 제게 붙이는 이름만으로도 저는 닥칠 일이나 해야 할 것을 알게 됩니다. 특별한 무언가를 바라지 않을 때에는 그는 저를 존재 또는 사물이라 이릅니다. 그리고 가끔은 저를 두고 오아시스라고도 부르는데, 저는 그것이 참 마음에 듭니다. 49

[2 ] 테스트 씨와 함께한 저녁 - 결국 테스트 씨가 우리의 안목으로는 알 수 없는 정신의 법칙을 발견하는 데 이르렀다고 믿게 되었다. 확신컨대 이러한 탐구에 수년의 시간을 바쳤으리라. 그리고 더욱 확신컨대 발명이 무르익고 그 발명을 본능으로 삼는 데에는 더 많은 나날, 수년의 세월이 필요했으리라. 발견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려움은 발견을 자신에게 합하는 데 있다. 19/인간에게 무엇이 가능합디까? 모든 것에 맞서 사우는 나이건만, 육체의 고통 밖으로, 어떤 정도를 넘어서건만. 그러나 나는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고통을 겪는 것은 바로 무언가에 극도로 집중하는 일일 테며...32

볕뉘.

0. 궁금하여 마저 읽다. 그 역시 보들레르, 말라르메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오히려 삶을 뚫고나간다는 점에서는 그 이상인 듯 싶다.

1. 지금 가지고 있는 여러 생각들과 맞물려 흥미진진하게 읽다. 가을이 곁에 들어와 얇은 이불을 몸에 꽁꽁 묶어보았다. 가을 맛이다.

2. 길은 밖으로 난 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길은 그 깊이와 넓이, 크기로 안으로도 나 있는 것이다. 밖으로 난 길은 그저 같아지는 길이다. 밋밋한 사막같은 황량함을 남길지도 모른다. 외려 제 안으로 난 길이 이런 동일함을 주저하게 하고, 다양한 길을 다그칠 것이다. 그렇게 길이 만날 때만이 풍요로움과 다른 삶, 다른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첫걸음이 될는지도 모른다.

3. 모두의 말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줄 몰랐던 나‘ 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원할줄 몰랐던 나‘와 결별할 때만이 안밖의 길은 교묘히 섞이기 시작할는지 말이다. 하지만 발견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테스트는 말한다. 어려움은 발견을 자신에게 합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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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 밖의 전복의 서

0.

[ ] ˝우주란 한 권의 책으로, 한 장 한 장이 매일이다. 네가 그곳에서 읽는 것이란 한 장의 빛이요 - 각성이요 - 그리고 어둠이요 - 잠이요, -여명과 망각의 단어다.˝ 사막은 결코 책을 갖지 못한다. 14

[1 ] 제 안의로의 입장, 그것이 곧 전복의 발견이다. 일지 15

1.

[ ] ˝내게는 못난 제자들밖에 없습니다. 나를 흉내 내려 하면서 나를 왜곡하고, 나와 닮았다고 믿으며 제 신뢰를 깎아내립니다.˝...˝나는 질문하고자 나의 삶을 사용하였기에, 내게는 어떠한 제자도 없기 때문입니다.˝...˝매듭으로, 다른 매듭을 만들어낼 수는 없겠으나, 반면, 어떤 줄로든, 그것으로 매듭지을 수는 있다. 모든 매듭은, 그러므로, 유일하다. 전복의 질문 19,20
[ ] 사유는 집착 없이 존재한다. 사유는 만남으로 살고 고독으로 죽는다. 20
[ ] 눈이 먼 자가 시선을, 귀가 먼 자가 언어를 간직하고 있다. - 그들은 각각, 보이지 않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위탁받은 자들이다. 21
[1 ] 생각은 공허를 짓뜯는 섬광이다. 망각은 한순간 생각의 공간이다. 우리가 망각으로부터 지켜내는 혼잡한 추억이란, 이 경우, 새로운 공간 덕에 생각을 되찾는 장본인이요, 또 열정적으로 생각을 자신의 과거와 미래에 충돌시키려는 자이니, 최종적으로 후견을 받는 상태에 놓이는 책임은 저 자신에게 있다. 22
[ ] 모든 생각에는 저마다의 기쁨과 상처가 있다./생각은 생각의 반응들에만 주의할 따름이다. 25

2.

[ 1] ˝책의 상속자인 우리, 건네받은 약간의 어둠과 약간의 밝음만이 우리의 전 재산일 따름이다. 아! 우리의 모든 단어가 오직 어둠의 창조요, 우리를 파헤치는 결핍의 형상들이라니.˝ 무한의 작은 한계 30
[ ] 공허를, 무를, 여백을 인정하기. 우리가 창조하는 것은 모두 우리 뒤에 있다. 33
[ ] 가능만을 물을 수 있다. 불능은 그 자체가 질문이다./질문은 어둠이다. 답은, 간결한 맑음이다. 34

3.

[ ] 전복적인 책이란 어쩌면, 드러내는 책이리라. 공격받은 생각이 남긴 흔적에 머무르며, 지면에 대한 단어의 전복과 단어에 대한 지면의 전복을 뒤섞는 책인 것이다. 지면, 단어와 여백의 전복의 장소 37

4.

[1 ] ˝죽이는 것은 죽음이 아니다. 우리가, 매 순간, 죽음을 위해 죽이고 있다.˝ 시간의 바깥, 책의 꿈 40
[2 ] ˝책을 쓰면서 너는 단어의 모습만이 아니라, 네가 경계 짓는 한순간 네 삶의 모습 또한 만들어낸다.˝ 43
[ 3 ] 고독의 끝은 글을 위한 고독한 모험의 전주곡이다./고독과 글에는 따라서 우리가 펜을 쥐고 나아갈 흔들리는 경계가 있으리라. 우리로 인해, 우리 덕에 인식되는 경계가. 고독, 문체의 공간 45/작가는 여전히 작품이라는 건물의 건축가이자 벽돌공이며, 지칠 줄 모르는 장인이다. 46
[ 4 ] 책을 쓰려면, 아마도 여기 우리가 책에서 얻은 직감에 지나지 않을 계획에 간접적으로나마 참여했어야 하며, 그 직감으로부터야 비로소 책은 기술된다. 48
[ ] 책은 220쪽으로 이루어진 평면의 고독이오. 한쪽이 다른 한쪽 아래 놓여 있소. 첫 장이 정상이고 끝 장이 그 기저라오. 문체의 도정이 이러하오. 49
[ ] ˝나를 궁금케 하는 것은, 애초에 어떻게 내가 가장 높이 위치한, 맨 첫 장에 이르렀느냐는 점이오.˝ 50


[ ] 거룩한 책이란 오직 말에 부합하며, 말 자체일 뿐으로, 시간을 벗어남과 동시에 시간 속에 정박해 있다. 재현 금지 67


[ 5 ] 새로운 질문의 책은...줄곧 자신의 불확실한 외양 뒤로 숨다가, 제 차례가 오면, 제 모두를 걸고 질문을 되던진다. 닮음의 책 79

5.

[ ] ˝생각은 우주를 뒤덮는 두터운 너울을 벗겨내서는 우리가 알아차리기도 힘든 가벼운 것으로 갈음한다. 우리는 세계를 오직 이 너울의 투명함을 통해서만 인지한다.˝ 생각, 단어를 통한 존재의 창조와 파괴 84
[ ] 사유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제 길들을 트도록 허가하는 일이리라. 85
[ ] 생각은 생각된 것 - 제 끓어오르는 과거가 - 그리고 생각되지 않은 것 - 제 문제적 장래가 - 한데 얽혀 형성되었다. 평범하거나 구분되는 매듭이다. 86
[ ] 장미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감탄한 몸짓으로, 우리는 장미의 삶을 앗아간다. 쓰기란 자신에게 이러한 몸짓을 새로 되풀이하는 일이다. 우리 안에서 죽는 것은 우리와 함께 죽을 수밖에 없다. 책이란 그저 이 모든 죽음을 알리는 일상의 부고일 따름이다. 88

6.

[ ] 열쇠란 모름지기 자물쇠를 작동시키고자 고안되었으며, 그리하여 우리의 시선에서 사라지는 것을 목적한다. 열쇠-말, 생각을 통한 존재의 창조와 파괴 89
[ ] 열쇠-말이란, 그 단어를 포함하고 있는 텍스트 속 모든 단어가, 서로 동조하고 그토록 나지막이 발음하여 누고도 듣지 못하는 단어다. 비의적인 통과의 단어, 그 뒤로 책이 서 있다.˝ 90
[ ] 열쇠란 분명 결핍이리라. 그리고 이 결핍은, 책 속에서, 스스로 까마득한 부재를 담고 있는 몇몇 어휘를 통하여 드러나고야 만다. 결핍의 무한 속의 결핍이다. 91
[ ] 상상은 아마도 제 기원들의 무게를 줄인 어떤 생각인지도 모른다. 92

7.

[ ] 열여섯 개는 삶의 질문이요, 열여섯 개는 죽음의 질문이다. 기원으로서의 부재, 혹은 인내하는 최후의 질문 93
[ ] 가까이서 우리를 건드리는 것만이 우리를 전념케 한다. 고독 속에서, 우리는 그것을 마주하고자 한다. 95
[ ] 정체성은 얼굴에 대한 파악이라기보다는 그것에 대한 정복이다. 96

8.

[ ] 죽음을, 공허를, 무를, 전무를 사유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것들의 무수한 은유를 사유할 수는 있다. 그것은 생각할 길 없는 것의 윤곽을 그리는 방식이다. 모래 103
[ ] ˝쓰기는 침묵과 맞서 나아간 침묵의 행위다. 죽음과 맞선 죽음이 처음으로 행하는 긍정적 행위다.˝/˝내가 여전히 말할 수 있는 것 너머. 읽기는 네 몫이다. 소멸이 내 몫이듯. 불청객들.˝ 107
[ ] 글이 우리를 참여시킨다. 우리가 글을 쓰는 것은 아마도, 자신을 내빼기 위해서이리라. 그러한 내뺌이 우리에게는 그저 끝까지 참여를 시키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라는 것은 알지도 못한 채. ..끝까지, 즉 시작된 참여가 자신의 끝에 다다라, 하나의 새로운 모습의 참여로 우리 앞에 나타날 때까지. 108
[ ] 여전히 읽을 여지가 있다는 것이 바로 글의 유일한 생존 기회다. 110
[ ] 그는 타자를 발견했다. 그는 일찍이 알았다. 이 타자로 인하여 자신이 스러질 것임을.....이 안에서 살아간다. 언제나 저 너머에서 죽는다. 하지만 경계란 마음의 일이다. 115
[ ] ˝생각하는 자는 노련한 어부다. 그는 생각할 길 없는 것의 바다에서 빛나는 생각들을 끄집어낸다. 미끼를 문 생각, 하늘의 푸름과 바다의 푸름 사이, 들뜬 순간, 경직되어, 외계의 것으로, 땅 위에 놓이기 전.˝ 117
[ ] 상처받지 않은 상처는 없다. 120

볕뉘.

0. 이동하는 길에 릴케의 두이노 비가를 건네들었다. 읽다보니 생각지 않은 느낌이 흘러들었다. 십년동안 짓고, 오년동안 번역하고.....

1. 그 책을 선물했다. 그리고 내려와 그 책과 번역자의 번역서 두권을 건네들었다. 위의 예상 밖의 전복의 서와 폴 발레리의 테스트 씨다. 번역자와 짧은 만남이 있었다. 시낭송 모임 속에서 앙리미쇼에 대한 인상과 그림들. 그 보다는 삶의 강렬함에 대한 공감이었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보들레르와 말라르메....릴케....열정적인 삶들이 더 문을 열어제끼는 듯하다. 평생 70편의 시를 쓰고 쓰고 다시 쓰는 일이거나, 십년동안 비가를 짓기위해 자신을 허무는 일이거나, 존경하는 스승을 만나자 마자 작품을 갈갈이 찢겨버린 그 ...노력...어쩌면 폄훼되고 있는 순수예술이라는 발자욱들을 우리는 너무 쉽게 평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2. 이 책은 글자 그대로 ‘전복‘의 서이다. 책과 생각, 사유, 상상 그리고 삶, 작품에 대한 이야기다. 릴케의 두이노 비가가 열고개의 비가가 아니듯이...그들의 작품 사이에 호흡하는 영 혼은 강열하다. 칼끝으로 삶을 열어 제끼는 모습들도 말이다. 말 한마디, 단어 하나 하나 예사롭지 않다. 그 단어의 소멸과 죽음을 익히 알기에 온몸의 호흡으로 생각 한톨을 옮겨심는다. 씨앗.

3. 주의는 뒤의 미련한 자들이 붙이는 일이다. 초현실주의라는 꼬리표를 아무렇게나 붙이고 지워버리는 일도, 순수예술이라는 장소와 시대를 엇나가 붙인 뒤 잊어버리는 일도 무척 얄팍하다. 그래서 그들의 삶과 그 그림자들을 들여다보는 일이 중요하다. 이렇게 생각이라는 낚시에 걸려나오는 미끼 생각들, 그리고 그것을 덥썩 무는 사유들... 어쩌면 책들로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책 속의 책....그 책 속의 책으로 꼬리를 물며 걸려 올라오는 것인지도....책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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