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두가 되는 고통

 

왜 하필 벌레는

여기를 갉아 먹었을까요

 

나뭇잎 하나를 주워 들고 네가

질문을 만든다

 

나뭇잎 구멍에 눈을 대고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나뭇잎 한 장에서 격투의 내력이 읽힌다

 

벌레에겐 그게 긍지였겠지

거긴 나뭇잎의 궁지였으니까

서로의 흉터에서 사는 우리처럼

 

그래서 우리는 아침마다

화분에 물을 준다

 

물조리개를 들 때에는 어김없이

산타클로스의 표정을 짓는다

 

보여요? 벌레들이 전부 선물이었으면 좋겠어요

새잎이 나고 새잎이 난다

 

시간이 여위어간다

아픔이 유순해진다

내가 알던 흉터들이 짙어진다

 

초록 옆에 파랑이 있다면

무지개,라고 말하듯이

 

파랑 옆에 보라가 있다면

,이라고 말해야 한다

 

행복보다 더 행복한 걸 궁지라고 부르는 시간

신비보다 더 신비한 걸 흉터라고 부르는 시간

벌레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나뭇잎 하나를 주워 든 네게서

새잎이 나고 새잎이 난다

 

 

생일

 

흰쌀이 익어 밥이 되는 기적을 기다린다

식기를 가지런히 엎어 두고

물기를 마르길 기다리듯이

 

푸릇한 것들의 꼭지를 따서 찬물에 헹군다

비릿한 것들의 상처를 벌려 내장을 꺼낸다

 

이 방은 대합실의 구조를 갖고 있다

한 정거장 한 정거장 파리함과 피곤함을 지나쳐 온 사람이

기다란 의자에 기다랗게 누워 구조를 완성한다

 

슬픔을 슬퍼하는 사람이 오로지 슬퍼 보인다

사람인 것에 지쳐가는 사람만이 오로지 사람다워 보인다

안식과 평화를 냉장고에서 꺼내 아침상을 차린다

 

나쁜 일들을 쓰다듬어주던

크나큰 두 손이 지붕 위에서 퍼드덕거릴 때

햇살이 집안을 만건곤하게 비출 때

 

미역이 제 몸을 부풀려 국물을 만드는 기적을

간장 냄새와 참기름 냄새가 돕고 있다

 

살점을 떼어낸 듯한 묵상이

눈물처럼 밥상에 뚝뚝 떨어진다

쪼그리고 앉아 무릎을 모은다

 

 

누군가 곁에서 자꾸 질문을 던진다

 

살구나무 아래 농익은 살구가 떨어져 뒹굴 듯이

내가 서 있는 자리에 너무 많은 질문들이

도착해 있다

 

다른 꽃이 피었던 자리에서 피는 꽃

다른 사람이 죽었던 자리에서 사는 한가족

몇 사람을 더 견디려고 몇 사람이 되어 살아간다

 

우리는 같은 사람을 나누어 가진 적이 있다

같은 슬픔을 자주 그리워한다

 

내가 누구인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마다

나를 당신이라고 믿었던 적도 있었다

 

지난 연인들이 자꾸 나타나

자기 이야기를 겹쳐 쓰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같은 사람이 되어간다

 

당신은 알라의 얼굴에서

예수의 표정이 묻어 나는 걸 보았다고 했다

내 걸음걸이에서 이제는

당신이 묻어 나오는 걸 아느냐고

당신에게 물어보았다

 

우리는

두 개의 바다가 만나는 해안에

도착해 있다

 

늙은 아기가 햇볕에 나와 앉아 바다를 보고 있다

바다가 질문들을 한없이 밀어내고 있다

 

우리에게 달라진 것은 장소뿐이었지만

어느새 우리들 기억이 달라져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강과 나

 

 

지금이라고 말해줄게, 강물이 흐르고 있다고, 깊지

는 않다고, 작은 배에 작은 노가 있다고, 강을 건널

준비가 다 됐다고 말해줄게.

 

등을 구부려 머리를 감고, 등을 세우고 머리를 빗

, 햇볕에 물기를 말리며 바위에 앉아 있다고 말해

줄게, 오리온 자리가 머리 위에 빛나던 밤과 소박한

구름이 해를 가리던 낮에, 지구 건너편 어떤 나라에

서 네가 존경하던 큰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나도 들

었다고 말해줄게,

 

돌멩이는 동그랗고 풀들은 얌전하다고 말해줄게,

나는 밥을 끊고 담배를 끊고 시간을 끊어버렸다고 말

해줄게, 일몰이 몰려오고, 알 수 없는 옛날 노래가 흘

러오고, 발가벗은 아이들이 발가벗고, 헤엄치는 물고

기가 헤엄치는 강가,

 

뿌리를 강물에 담근 교살무화과나무가 뿌리를 강물

에 담그고, 퍼덕이는 커다란 물고기가 할아버지의 낚

시 항아리에서 쉴 새 없이 퍼덕이고, 이 커다란 물고

기를 굽기 위해 조금 후엔 장작을 피울 거라고.

 

구불구불한 강을 따라 구불구불한 길이 나 있는 이

곳에서, 구불구불한 길에 사는 구불구불한 사람들과

하루 종일 산책을 했다고 말해줄게, 큰 나무 그늘 아

래 작은 나무, 가느다란 나무다리 아래 가느다란 나

무 교각들이 간신히 쉬고 있다고,

 

멀리서 한 사람이 반찬을 담은 쟁반을 들고 살금살

금 걸어오고 있다고 말해줄게, 물고기는 바삭바삭하

다고, 근사한 냄새가 난다고, 풍겨 온다고, 출렁인다

, 통증처럼 배가 고프다고, 준비가 다 됐다고, 지금

이라고, 말해줄게

 

이불의 불면증

 

너는 마치

이불을 재워주기 위해 잠이 드는 사람 같아

 

네 품에 안겨서

초록색 이불이 조금씩 몸을 뒤척이네

 

품었던 것의

품고 있던 독을 고스란히

자기 육체로 옮겨오는 사람처럼

먼 곳을 생각하는 자의 표정을 짓지

 

독충처럼

꼬리 끝이나 대가리를 곧추세우는 대신

언제고 입꼬리를 올리지

 

이불을 재우는 사람처럼

너의 잠은 동그랗네

크고 작은 동그라미들이 비눗방울처럼

네 언저리에 둥둥 떠오르네

 

너는 모로 누워

부탁해요, 제발

기도하는 사람처럼 두 손을 모으고

곤히 잠들어 있네

 

이것은 꿈이 아니지

말하지 않을 땐 마지막 남은 너의 고백 같아서

부탁으로 나는 그걸 알아듣지

 

이불은 에메랄드 사원의 와불처럼 누워

네 살결을 만지고 있네

네 살결이 먼저 선잠에서 깨어나고 있네

 

걸리버

 

창문 모서리에

은빛 서리가 끼는 아침과

목련이 녹아 흐르는 따사로운 오후

사이를

 

도무지 묶이지 않는

너무 먼 차이를

 

맨 처음

일교차라 이름 붙인 사람을

사랑한다

 

빈 빨랫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빗방울의 마음으로

 

+

커피를 따는 케냐 아가씨의 검은 손과

모닝커피를 내리는 나의 검은 그림자

사이를

 

다다를 수 없는 너무 먼 대륙을 건넜던

아랍 상인의 검은 슬리퍼를

사랑한다

 

세계지도를 맨 처음 들여다보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적어놓은 채로 죽은 어떤 시인의 문장과

오래 살아 이런 꼴을 겪는다는 늙은 아버지의 푸념

사이를

 

달리기 선수처럼

아침저녁으로 왕복하는 한 사람을

사랑한다

 

내가 부친 편지가 돌아와

내 손에서 다시 읽히는

마음으로

 

+

 

출구 없는 삶에

문을 그려 넣는 마음이었을

도처의 소리 소문 없는 죽음들을

 

사랑한다

 

계절을 잃어버린 계절에 피는

느닷없는 꽃망울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여행자

 

아무도 살지 않던 땅으로 간 사람이 있었다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사람이 있었다

집을 짓고 창을 내고 비둘기를 키우던 사람이 있었다

 

그 창문으로 나는 지금 바깥을 내다본다

이토록 난해한 지형을 가장 쉽게 이해한 사람이

가장 오래 서 있었을 자리에 서서

 

우주 어딘가

사람이 살 수 없는 별에서 시를 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축을 도살하고 고기를 굽는 생활처럼 태연하게

 

잘 지냅니까,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할 줄 아는 말이 거의 없는 낯선 땅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건 잠깐의 반가움과

오랜 두려움뿐이다

 

두려움에 집중하다 보면

지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 싶었던 사람이

실은 자신의 피폐를 통역하려 했다는 것을

파리처럼 기웃거리는 낙관을 내쫓으면서

나는 알게 된다

 

아파요, 살고 싶어요, 감기약이 필요해요.

살고 싶어서 더러워진 사람이 나는 되기로 한다

 

더러워진 채로 잠드는 발과

더려워진 채로 악수를 하는 손만을

돌보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했던 사람이

불구가 되어간 곳을 유적지라 부른다

커다란 석상에 표정을 새기던 노예들은

무언가를 알아도 안다고 말하진 않았다

 

그 누구도

조롱하지 않는 사람으로 지내기로 한다

위험해, 조심해, 괜찮아,

하루에 한가지씩만 다독이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아무도 살아남지 않은 땅에서 사는 사람이 있다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사람이 있다

집을 짓고 창을 내고 청포도를 키우는 사람이 있다

 

 

볕뉘. 시집을 읽고나니, 비행기표가 숨어있다. 0207, 1955기 이름, 탑승구, 탑승위치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다. 시집을 아껴두다 이제사 이렇게 동그라미를 쳐둔다.  지난 해 흐릿한 기억이 선명하게 이륙한다. 찬연한 슬픔을 가득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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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근 거리에서 강연이 있었다. 안해 것으로 가끔 물품을 구입하기도 하였지만, 활동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확인하고 싶기도 하였다. 조합원 가입을 하고난 뒤, 검색을 해보니 하루이틀 뒤에 대표 강연이 마침 있었다. 전날 회식이 과하여 몸 컨디션이 별로이어서 그만둘까하다가 그래도 유선 약속이기도 하고, 평소 궁금하던 것들에 대한 확인 욕심도 있었던 것 같다. 주변 지인들의 활동을 통해 느끼는 것. 아니 흐름을 잡지 못하게 하는 것은 '내부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였다. 사업화, 사업확장에 따라 쫓아가지 못하는 그 결들과 속내를 묻고 싶기도 확인하고 싶기도 하였다.

 

 

조금 시간이 남아 지난 독서의 흔적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결사운동'으로서의 성격규정이 좋았고, 거칠지만 장기적인 전망에 공감했던 것 같다. 강연주제는 관료화의 문제였다. 막스베버가 말한 필요악. 사업이 커지고, 조직이 커지면 생기는 문제들. 그래 분권이 답이다. 미숙함을 인정하고 용인하는 것이 건강한 것이다. 관료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내부긴장을 만들어내는 것들이 관건이다. 

 

 

'관료화'에 대한 포커스가 좋다. 집요하게 보려는 노력에 공감한다. 연합회 조직은 누가 견제하나요? 대표의 과잉은 어떻게 조절해야하나요? 활동가는 누가 위로해주나요? 직원협동조합, 물품별 협동조합, 분사, 생각이나 이념이 다르면 분가하는 것이 맞고, 활동을 해도 말귀가 먹히지 않을 때는 대표성을 확보해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한다.

 

 

볕뉘.

 

1. 올해까지 공식적인 활동을 하고 차년부터 안식년을 가질 계획인 것 같다. 경제학 공부를 더 해보고 싶다는 그는 충남 부여 출신이다. 자그마한 체구에 눈빛이 강하다. 지역 오마이뉴스의 심규상기자를 보는 듯했다. 기자로서의 집요함과 성실성. 그리고 만담도 말이다. 건강성에 대한 질문을 담고 사는 것이 쉽지 않은데 오히려 진보라고 주창하는 이들에게서 찾지 못하는 말과 이야기를 여기서 들으니 내심 반가웠다.  

 

2. 조합원의 질문에 눙을 치면 답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당분간 별 문제가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활동을 하고 조직을 책임지면서 주부들의 장점인 세심함과 여성성이 많이 사라지는 것이 우려스럽다. 회의분위기도 경직되고,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더 남성적인 분위기에 사로잡히는 모습들 말이다. 위 아래가 있는 것이 아니겠지만, 내부민주주의에 대한 논의, 긴장이 지속된다면 사회문화권에 대한 인권의 전반적인 사항이 내부에 스며들어야 한다. 노동문제에 대한 책임과 의무도 별도의 고민하는 단위가 만들어지기도 하여야 할 것이다.

 

3. 26년이라는 시간동안의 노고. 활동가로 규정하는 자신의 노력에도 감사드리고 싶다. 민주주의에 대한 잣대로 일상을 다시 들여다보고 확인하고 나누는 또 다른 전환이 있으면 지금해온 만큼, 그 시간동안 사회적 책임으로 많은 것들을 바꾸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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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김 - 그린다는 것은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는 일만은 아닌 것 같다. 그림에 푹 빠져지는 나날. 수성싸인펜화를 그리는 동영상을 보는 와중에 그림은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새긴다'는 표현이 들어와 가슴 가까이 머물고 있다. 또 다른 하나. 새롭게 탄생할 그림을 위하여라는 문자를 받고 나서이다. 새기거나 낳는 과정이라는 것이 그리워한다는 한정된 인식에서 벗어나는 지렛대 역할을 하고 있다.

 

 

2. - 그림만큼 솔직한 것이 없는 것 같다. 머리로 이해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라 몸의 각인을 거쳐 손끝에 다시 살아나는 일. 잎새 하나 하나는 그리는 일은 잎을 만드는 일과 흡사하다. 결을 따라 마음을 조심스레 주고 난 뒤라 그 형상이 다가온다. 온전히 몸으로 겪어내는 일. 자전거를 배울 무렵 몇미터...몇 미터...어느 순간 뒤에서 밀어주지 않아도 손을 놓았다는 것을 잊은 채 나아가는 것은 아닐까. 잘하는 것보다 꾸준함, 성실함이 이 방면의 계명인 것을 이제서야 느낀다. 묵묵히 나아가는 일. 가슴과 마음을 담는 일은 무엇보다 몸이 견디고 나아가는 만큼임을 새삼 짚게 된다.

 

 

3. 문턱 - 대상을 달리해 그리다보면 아직 느낌이 살지 않는다. 소묘와 채색이 차이, 드로잉과 인물, 인체 모두 다르게 다가오고 어렵다. 공통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의 턱을 느낀다. 어렵게 어렵게 가다보면 그 문턱을 넘어서는 지점. 너머에 대한 갈망이 생겨난다. 또한 퇴행에 대한 두려움도 같이 스민다. 불화를 겪고 있다는 것. 긴장을 하고 있다는 건  어쩌면 몸의 또 다른 경련이자 시작인지 모르겠다.

 

 

 

볕뉘. 수채, 채색  유투브 동영상에 빠져있는 나날이다. 조금씩 조금씩 달라 정작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는 듯하다. 그래도 직접 배우는 것을 코어로 해서 조금 조금 살을 붙여나가고 있다. 경계를 무디게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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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느림 - 풍경을 담는 시간. 그 틈이 있는 완행열차에 몸을 싣다. 가벼운 책들만 챙긴 멜 가방하나. 저녁에 출발한 기차는 밤이 깊어 시집 몇권을 축내고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가까운 숙소를 검색하다 게스트하우스 4인실을 예약했는데, 어쩌다보니 독채로 쓴다. 새벽 동천을 거닐다. 거닐고 담고, 담고 거닐고 흐린 날 무채색의 쑥빛의 강가가 순조롭다 싶다. 그렇게 거닐다. 장미같은 흰 꽃들이 유난히 골목골목 많다. 무엇일까. 무슨 꽃일까. 피어나는 순결한 꽃들과 무딘 노랑으로 떨어진 꽃그늘들. 작기도 하고, 줄기로 뻗어올린 나무에도 색이 농도를 달리하며 한 나무에 피어난다. 피어진다.

 

 

 

2. 자전거 - 흐린 하늘이 그래도 안심이어서 자전거를 빌린다. 이것저것 등록절차가 번거롭지만 끝을 본다. 얻은 자전거가 생각보다 좋지 않다. 페달 한쪽은 반틈이 없고 뻑뻑한 발힘. 근육의 약간이 통증을 주면서 나아간다. 서걱거린다. 부딪힌다. 바람결은 달려오는 소리와 강가에 들려오는 소리가 부딪친다. 순간순간 아련하다. 그렇게 꽃길을 돌고 걷고 걷고 건다. 갈대와 부들이 분간이 되지 않는 풀숲. 풀숲을 뉘이는 바람. 바람에 바스락거리는 풀볕. 정신없이 꽃숲을 헤치다 문학관을 생각해내었다. 지근거리라 여기고 페달을 밟다. 길도 없고 이정표도 사라지고 한참을 우회한 뒤에서야 갈 곳의 입구다.

 

 

 

3. 숲길 - 허기가 진다. 갈대숲은 안개처럼 짙다. 길과 숲이 구별이 되지 않는다. 숲과 강의 색깔도 겹쳐있다. 한참을 돌고 나서야,  무딘 노랑이 허기로 신호를 보내고 나서야  제자리다.

 

 

 

'무진'은 사람들의 일상성의 배후, 안개에 휩싸인 채 도사리고 있는 음험한 상상의 공간이며, 일상에 빠져듦으로써 상처를  잊으려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강요하는 이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묻고 있는 괴로운 도시이다.

 

이 소도시의 특징은 거기에 신기루처럼 떠다니는 나른함과 몽롱함이다. 도시를 둘러싸는 안개와 해풍 속에 미립자처럼 섞여서 사람들의 폐부로 들어오는 수면제에 취해서 사람들은 무진에서는 어떠한 의미도 땅 위에 세울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마치 곤한 낮잠에서 막 깨어난 사람이 두 손아귀에 힘이 빠져서 아무것도 움켜잡지 못하는 것과 흡사한, 삶에 대한 무력감이다.

 

이 방죽길 위에서 " 이 작품은 나의 생애 중에서 가장 슬픈 시절에 쓴 작품이다. 아직도 이 방죽길이 이야기가 된다면...그것은 그 문장에 스며든 슬픔의 힘 때문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 김훈 -

 

 

 

4. 치자 -  슬픔처럼 아린 무딘 노랑과 해맑고 순결한 흰꽃. 치자꽃의 읍내를 누빈다. 아침에 만난 그길. 다시 만난 실개천. 그리고 또 다시 본 그 길. 시장길. 어느 새 익숙해져 버린 도시. 완만히 흐르는 동천. 밤빛. 불빛. 몇번을 더 거닐어야 될 듯 싶다. 밀려내려가는 강 길. 강가의 강보다 넓은 갈대의 부산함. 그 소리들이 여운처럼 짙다. 그 풀빛이 마음에 남아돈다. 새벽 작은 기차에 몸을 싣다. 밀려오는 안개를 등뒤에 두고 온다. 바다로 천천히 흐르도록 둔다.  앞으로 난 철로. 그 길로 또 다른 강을 만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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