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각사

[ ] 감정에도 말더듬이 증세가 있었던 것이다. 내 감정은 언제나 시기를 놓쳐버린다. 그 결과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사건과 슬픔이라는 감정이 각기 다른, 고립된, 서로 연결되지 않고 서로 침범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미미한 시간의 엇갈림, 미미한 지체가 언제나 내 감정과 사건을 전혀 다른, 마치 그것이 본질적으로 무관한 듯한 상태로 바꿔버린다. 60

[ ] 나는 이러한 얼굴에 직면한다. 중요한 비밀을 고백할 때에도, 미에 대한 격렬한 감동을 호소할 때에도, 자신의 내장을 꺼내어 보여주는 듯한 경우에도, 내가 직면하는 것은 이러한 얼굴이다. 그 얼굴은 더할 나위 없이 충실히 나의 우스꽝스러운 초조감을 그대로 흉내 내어, 마치 무시무시한 거울처럼 변해 있었다. 아무리 잘생긴 얼굴이라도, 그럴 때에는 나와 똑같이 추한 얼굴로 변모한다. 65

[ ] 그는 햇빛 아래에서 혼자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한 인상이 가슴에 와닿았다. 봄날의 햇빛과 꽃 속에서, 내가 느끼는 부끄러움과 어색함을 그는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그 모습을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주장하고 있는 그림자, 아니, 존재하고 있는 그림자 그 자체였다. 햇빛은 그의 단단한 피부에 스며들지 못함에 틀림없었다. 136

[ ] 우리들과 세계를 대립 상태로 만드는 무서운 불안은, 세계건 우리들이건 어느 족인가가 변하면 해소되겠지만, 변화를 꿈꾸는 몽상을 나는 증오하니까 몽상을 아주 싫어하게 됐지. 하지만 세계가 변하면 나는 존재하지 않고, 내가 변하면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리적으로 밝혀낸 확신은 오히려 일종의 화해, 일종의 융화와도 비슷해. 있는 그대로의 내가 사랑 받지 못한다는 생각은 세상과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야. 그리고 불구자가 결국 빠져드는 함정은 대립 상태의 해소가 아니라 대립 상태의 전적인 시인이라는 형태로 나타나지. 그러니까 불구는 불치가 되는거야. 140

[ ] 거울을 보지 않으면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겠지만, 불구라는 사실은 언제나 눈앞에 놓여 있는 거울이야. 그 거울에 종일 내 전신이 비치고 있지. 망각은 불가능해. 그러니까 나에게는 세상에서 말하는 불안 따위는 어린애 장난처럼 보일 뿐이지. 불안은 없어. 내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건, 태양이나 지구나 아름다운 새나 보기 흉한 악어가 존재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확실한 거지. 세계는 비석처럼 움직이지 않아. 146

[ ] 내 생각이 이해하지 힘든 걸까? 설명을 필요로 할까 하지만 내가 그 이후로 안심하고 ‘사랑은 있을 수 없다‘고 믿게 됐다는 사실은 너도 알겠지? 불안도 없어. 사랑도 없고. 세계는 영원히 정지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도달하고 있는 거야. 이 세계를 일부러 ‘우리들의 세계‘라고 해석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이런 식으로, 세상의 ‘사랑‘에 관한 미몽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어. 그것은 가상이 실상과 결합하려는 미몽이라고 - 이윽고 나는, 결코 사랑받지 못한다는 내 확신이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양태라는 걸 알게 됐지. 150

[ ] 가시와기가 암시하며 내 앞에서 즉흥적으로 연출해 보여줬던 인생에서는, 산다는 것과 파멸하는 것이 똑같은 의미밖에 지니지 못했다. 그 인생에는 자연스러움도 결여되어 있거니와 금각 같은 구조의 아름다움도 결여되어, 말하자면 끔찍한 경련의 일종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에 내가 크게 이끌리고 자신의 방향을 설정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우선 가시로 가득한 삶의 파편으로 손을 피투성이로 만들어야 하는 것은 두려웠다. 가시와기는 본능과 이지를 같은 정도로 경멸했다. 기괴한 모양의 공처럼 그의 존재 자체가 굴러다니며 현실의 벽을 부수려 하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행위조차 되지 못했다. 요컨대 그가 암시한 인생이란, 미지로 가장하여 우리들을 속이고 있는 현실을 무너뜨리고 다시는 조금이라도 미지를 포함하지 못하도록 세계를 청소하기 위한, 위험하고 천박한 연극이었던 것이다. 164

[ ] 가시와기는 뒷면에서 인생에 도달하는 어두운 샛길을 처음으로 가르쳐준 친구였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파멸로 돌진하는 듯 보이면서도, 의외의 술수에 능하기에 비열함을 그대로 용기로 바꿔 우리들이 악덕이라고 부르는 것을 다시금 순수한 에너지로 환원시키는 일종의 연금술이라고 해도 좋았다. 181

[ ] 가시와기를 깊이 알게 되면서 느낀 사실이지만, 그는 오랫동안 지속되는 미를 싫어했다. 곧바로 사라지는 음악이라든지 수일 후에 시드는 꽂꽂이라든지, 그의 취향은 그러한 것들에 한정되어 건축이나 문학을 싫어했다. 그가 금각에 온 것도 달이 비치는 동안의 금각을 찾아서 온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음악의 미는 얼마나 불가사의한 것이가 연주자가 성취하는 그 일순간의 미는 일정한 시간을 순수한 지속으로 바꾸어, 확실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하루살이와 같은 단명의 생물처럼, 생명 그 자체의 완전한 추상이며 창조였다. 203

[ ] 미는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지만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니까. 미라는 것은 마치, 뭐라고 할까, 충치 같은 거야. 그건 혀에 닿아 신경 쓰이고 아프게 해서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지. 더 이상 아픔을 견딜 수 없게 되면 치과 의사에게 뽑아달라고 하지. 피투성이의 자그만한 갈색의 더러운 이빨을 자신의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겠지. ‘이건가? 고작 이런 거였나? 나에게 통증을 주고 나를 끊임없이 그 존재 때문에 고민하게 만들며....209

[ ] 미적인 것, 네가 좋아하는 미적인 것, 그건 인간의 정신 속에서 인식에 위탁된 나머지 부분, 잉여 부분의 환영이야. 네가 말하는 ‘삶을 견디는 다른 방법‘의 환영이야. 원래 그런 건 없다고도 할 수 있지. 할 수 있지만, 그 환영을 강력하게 만들고 최대한 현실성을 부여하는 건 역시 인식이야. 인식에 있어서 미는 결코 위안이 아니거든. 여자이고 아내이기도 하겠지만 위안은 아니야. 하지만 결코 위안이 아니면서 미적인 것과 인식과의 결혼에서는 무언가가 생겨나지. 덧없는, 물거품과도 같은, 아무 쓸모도 없는 거지만 무엇가가 생겨나지. 세상에서 예술이라고 부르는 게 그거야.˝ 313

볕뉘

1. 스무해 가까운 시절에 금각사를 가본 적이 있다. 이렇게 마주 앉아 숨가쁘게 보았다.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그늘 안의 금빛, 어두움 속에 찬란이 겹치기도 했다. 미추의 이분구도가 약간 거슬리기도 했고, 광염소나타나 최근 박물관을 모티브로 한 단편도 겹쳤지만 그 자체로 좋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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