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 유령이 떠돌고 있다. ˝이것이다.˝와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라고 외친다. 어떤 세상인데, 왜 그럴 수 있냐고 되묻지 마라. 나는 아니라고 말하지도 마라. 밟아도 밟아도 되살아나는 것이니 그리 한 숨을 쉬지도 마라. ‘도‘와 ‘모‘만 필요한 윷판인가? 개, 걸, 윷의 목소리는 늘 잊히거나 전체와 관계없는 목소리로 소멸된다. 백색소음이었던 것이다. 백과 흑, 흑백, 검정과 하양을 한 번 경험해본 이를 회색이라고 해보자. 회색이란 사건을 경험한 이만이 흑과 백의 농도를 느끼고 있다.

경주지진에 이어 포항지진은 아직 진행중이다. 지진멀미에 아직도 몸은 여지없이 반응한다. 존 듀이는 국내에 십진법, 실용주의자로 잘못 알려진 것이 많은 것 같은데 사실은 전통적인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해 무척 애를 쓴 인물이다. ˝삶은 아무런 문제없이 물 흐르듯 순탄하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삶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경험은 역사적 사건과 유사한 것이다. 경험은 일정한 시간간격을 두고 일어나는 사건이며, 경험 특유의 줄거리를 가진다. 따라서 언제나 경험은 시작과 과정과 끝이 있다.˝ 고 하면서 ˝경험이란 우리가 살아오면서 직접 겪었던 일을 회상하면서 ˝나는 그러한 (하나의) 경험을 한 적이 있어˝고 말할 때의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고 한다. 물론 여기서 경험은 정서나 감정의 고저를 안고 있다. 한발 떨어져서 지켜보는 관조의 의미만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멀미의 여파와 불안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사건을 보는 것이다. ˝사고를 통해 구분할 수 있는 다양한 성질은 실제 경험 속에서 각각의 특성을 잃어버리고 하나의 통합된 전체를 이룬다.˝ ˝하나의 경험에서 보면 사고한다고 하는 것은 경험에서 지각되는 관념들을 일정한 질성이 드러나도록 계속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존듀이, 경험으로서의 예술 1, 89-93 그는 따로따로 떼어놓고 분석하는 사유가 맹점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의 완결과 성숙으로 소소하고 미미한 것들의 역할을 포함해서 전체를 느낄 수 있도록 그것이 충만함으로서 경험을 유도하며, 새로운 접근법으로서 ‘하나의 경험‘을 그토록 강조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나누고, 내 편과 네 편을 나누는 것이 그리 잘못이냐고 물을 수 있다. 남성과 여성으로, 이성과 감성을 나누듯이 육체와 영혼을 나누고, 자연과 사회를 갈라놓고 어른과 아이를 분별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느냐, 나누고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알 수 없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세상과 사물을 인식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바로 이것임을 유념해두고 가자. 이탈리아의 철학자인 랏자라또는 ˝우리가 가능성을 ‘기존 체제에 의해 고찰한다면, 여러 가능태의 배분은 기존의 양자택일 형식(남성/여성, 자본가/노동자, 자연/사회, 어른/아이, 정신/육체 등)에 의거하게 된다.˝ 고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욕망이나, 감정, 지각 역시 그 이항대립의 틀내에 있을 수 밖에 없음을 경고한다. 그러면서 ˝양자택일의 거부는 일종의 중단 혹은 무력화로 보이더라도 주어진 것의 저쪽에 주어지지 않는 것의 새로운 지평을 우리에게 여는 것이다.˝ 16-18 라고 말하면서 이항대립의 문법을 다시 고민할 것을 권면한다. ˝세계가 객체와 주체가 아니라 관계의 짜임새로부터 성립하고 있다. 서로 마주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은 여러 사물과 사건에 관해 함께 느끼고 서로 ‘영향 받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우정, 친애의 정, 슬픔은 전부 공감 관계의 표현이다.˝ 여러 경험과 사건들이 감정과 관계로 확산될 수 있고, 다른 선택지의 표현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심지어는 자본주의 역시 끊임없는 발명과 삶의 세뇌를 반복하므로 다른 출발을 할 것을 주장한다. ˝기쁨과 슬픔의 존재론이야말로 발명과 반복의 존재론으로 자본주의에 대립하는 것이다.˝ 32, 150-153 마우리치오 랏자라또, 사건의 정치

한편으로 ‘이것 아니면 저것이다‘라는 양자택일 못지 않게 ‘이것이다‘라는 것도 눈여겨 보아야할 지점이다. ‘이것이다‘라는 확신은 모든 문제를 자기 인식의 경계로 불러들여 합리화하는 것으로 한 몫한다. 모든 문제는 ‘남북을 갈라져서야‘, ‘자본/노동의 계급때문이야‘, ‘서울/지방으로 나눠져서야‘, ‘남/여란 가부장제때문이지‘, ‘그래 거봐 생태란 개념이 없어서잖아‘.....그렇게 갈라보는 시선은 끝없이 깊어지기만 한다. 긁어모으는 정보는 한계가 없다. 이것이라는 이유는 차고도 넘친다. 종북이나 좌파때문이라는 상황과 다르다고만 할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피셔-리히테가 삶과 예술, 몸과 정신, 관객과 배우의 경계를 허무는 예술-사건을 포괄하는 이론을 제시하면서 경계가 갖는 한계를 다음과 같이 새롭게 사유해보는 작업은 참고할 만하다. ˝경계는 서로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는 문지방이 된다...오히려 이것은 융통성 없는 대립의 극복에 관한 것이고, 역동적인 차이로 이끄는 것이다. 이분법적 개념쌍을 와해시키고, ‘이것 아니면 저것‘ 대신에 ‘이것뿐만 아니라 저것도‘라는 논리를 따른다.˝ 라고 한다. 이것이다라는 경계가 다른 문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되면서 풍부해질 수는 없을까? ˝ 450-452 ˝수행성의 미학은 모든 인간이 ‘이것 아니면 저것‘이 아니라 ‘이것뿐만 아니라 저것도‘에 의해 결정되는 새로운 관계를 맺을 것을 장려한다.˝어쩌면 우리는 너무나 떨어져서 세상을 분석적으로만 보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놓치고 있는 것이 많지는 않은가? 456 이상 에리카 피셔 리히테, 수행성의 미학


마지막은 레비나스다. 제자를 자초한 우치다 타츠루는 ˝타자는 빈자, 이방인, 과부, 고아의 모습을 갖는 동시에 스승의 모습을 가지며, 그것이 나에게 자유를 수여하고, 나의 자유를 기초 지우는 것이다... 약함은 타자성 그 자체를 형용하고 있다. 사랑하는 일, 그것은 타자를 위해 마음 아파하는 일이며, 타자의 약함에 도움의 손을 내미는 일이다.˝ 우치다 타츠루, 사랑의 현상학 레비나스는 스승이 존재의 철학에 머문데 비해 숱한 죽음을 목도하며 삶만이 아니라 죽음의 무한을 철학에 들여왔다. 그런면에서 창조의 베르그송 철학도 존재의 마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가졌다고 한다. ˝사랑의 대상은 우리의 외부에 있어, 나의 지배나 파악을 벗어나 있다. 애당초 내가 지배하고, 파악하고, 통제 가능한 것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다...우리는 사랑할 요건이 갖추어졌다고 해서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랑은 우리의 그런 이성적 판단과는 상관없이 우리를 휘어잡는다.˝ 264 -266 나의 시야에서, 마음에서 벗어나 있는 타자를 상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다르게 읽고 다르게 만나는 책과 사랑받는 사람의 다양성의 철학으로 읽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조금 기존의 철학과 다른 것은 아닌가 싶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보와 소통이 넘친다는 0과 1의 디지털시대에 어쩌면 우리를 놓치고 있는 것은 이런 낡은 사고습관에서 연유하는 것은 아닐까? 눈과 말, 시선과 감정의 느낌을 전유할 수 있는 아날로그의 사유나 사건 부재로부터 나오는 증상은 아닐까? 눈에 드는 물건과 음식처럼 사람도 느낌과 정서의 새로운 공유로서 사람을 만나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 낯선 이를 만나도 환대할 수 있는가? 어쩌면 전도하기에 급급해 다른 이의 감정과 그 줄기에 붙은 많은 지혜와 사랑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신들의 경계를 더 튼튼히 하고, 자신을 흔들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모와 도뿐인 나만의 생각에서, 너로 이어지는 개 윷 걸의 시선으로 겨우 다가서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온전한 사유와 삶은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여전히 빠이거나 까인가? 아니면 꼰대인가? 생각이나 삶을 의탁한다는 것 자체가 선과 악, 좋고 나쁨에 기대는 것이다. 이것과 저것 사이에는 이것도, 저것도, 이것뿐만 아니라 저것뿐만 아니라는 특이함이 있다. 그래서 겨우 전체를 향해가는 사유를 시작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과 저것이 결코 보지 못하는 달의 이면을 같이 볼 수 있는 사유를 향해 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