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과 소통의 대립

[ ] 언표가 표현하는 것은 항상, 결코 그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 새로운 것, 재생산되지 않은 것, 그리고 항상 가치(진, 선, 미)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177 차이를 창조하는 것은 다양하고 새로운 의미의 가능성을 창조하고 다성악화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언어표현의 존재방식을 바흐친은 복수언어주의라고 부른다. 그와 반대로 정보와 소통의 실천은 통일과 중앙집권화를 목표로 하는 힘들로부터 성립한다. 그 힘들은 발화, 언어, 의미의 다양성과 이질성을 파괴하는데, 바흐친은 그와 같은 존재방식을 단일언어주의라고 부른다....바흐친은 거의 모든 철학과 언어학이 무시해 왔던 힘들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 힘들이란 ‘탈중심화하는 원심적인 흐름‘이다. 이 흐름에서 우리들은 저항과 투쟁, 창조와 만난다. 그리고 바로 이 원심적인 흐름안에서야말로 언어적 다양성이 구축되는 것이다. 178, 179

[1 ] 대화는 매우 미세한 현상이지만 끊임없이 넓어지는 활동이고, 사회의 모든 형성과 변형의 원인이다. 즉 대화가 야기하는 것은 언어적인 변형이 아니라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심미적, 도덕적인 변형인 것이다. 이를테면 산호 벌레가 산호초를 만들어 가는 것과 같은 대화 과정의 이러한 중요성은 지금까지 완전히 무시되어 왔다. (사회적 변형의 뿌리) 182 대화는 바로 경제학자가 관심을 가져야 할 주제이다. 왜냐하면 만약 사람들이 말을 하지 않고, 글자도 쓰지 않으며, 인쇄물도 전보도 전화도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경제적 관계 등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183 말한다는 행위는 타자의 말을 전유하는 것에 의해 일종의 대화관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말의 의미작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표현과 억양, 목소리에 의해 시작된다. 184 우리의 말 안에는 모든 목소리들이 반향하고 있다...타자의 말과 관계를 맺는 일은 항상 사건과의 만남이어서 단순한 (언어학적인) 교환이나 (간주관적인) 인식인 것은 아니다. 185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발화는 적어도 그 반은 타자가 발화한 말로부터 성립한다. 사람들이 전하고, 생각하고, 사고하고, 논의하는 것은 ˝타자들이 말하는 언어와 여론, 주장, 정보인 것이다. 그것들에 대해 사람들은 반대하기도 하고, 납득하기도 하며 참조하기도 한다. 186 정보와 소통에 관한 현대의 여러 이론들은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이론들은 언어의 교환을 대화적인 사건으로서, 또는 다양한 주체성의 협동의 공통적 창조와 공통적 실현으로서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86

[ ] 여론은 욕망과 믿음을 형성하고 변형하는 무한소의 힘을 수반하며, 그 힘에 의해 다양화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는 그 다양성에서 모든 잠재성을 탈취하여 단일 언어를 강조하는 수단이나 정보 소통을 전달하는 수단을 만들어 내고, 다양한 가능세계의 공통적인 창조와 실현을 행하는 역능 모두를 무력화하는 것이다. 187 철도, 여행...상업... 사람들의 행위 사이에, 극히 먼 거리에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견고한 유대(이는 비인간적인 유대여서, 공동체와는 관계가 없다)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유대에서 생겨났던 공중은 이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이해하는 것도, 식별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존 듀이 188 시간의 테크놀로지 장치는 통제사회에 특유한 동력이다. 그것은 왕권사회의 기계적인 동력과 규율훈련사회의 열역학적 동력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 장치는 떨어진 장소에 있는 다양한 정신적 습관과 그 구성요소인 욕망과 믿음을 움직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198 시장이 가져온 ‘무한‘의 선택은 그러한 정치적 양자택일(선인가 악인가)이 협소한 틈 안에 있다. 왜냐하면 시장도 또한 동일한 전략을 채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가능성의 창조를 착취하고, 문제를 구성할 능력과 사회적 힘들을 분리하며, 미리 준비된 해결책을 강요하는 전략이다. 201

[ ]지적소유권이라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새로운 인클로저를 시도하고 있다. 신경제의 시도는 독점하여 계층화와 중앙집권화를 꾀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무상성의 논리가 희소성의 논리와 상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05 네트워크가 현실화하는지 어떤지는, 타르드의 낙관주의에 의하면 배치와 결합을 조금씩 만들어내는 능력에 달려 있다. 그 망의 구성은 이미 언급한 두 개의 축, 즉 네트워크와 패치워크에 의해 조직된다. 거기에서 모나드들은 기호와 소리, 이미지의 흐름에 편입된다. 그 흐름은 분기하는 것도 있다면(발명), 그대로 넓어져 가는 것도 있다(반복) 206 개인을 ‘분할가능한 것‘으로 변환하고 공통재를 시장화하려고하는 계획을 그 눈앞에서 가로막는 것은, 특이성을 만들어 내고 세계를 분기시키며 가능성을 창조하는 과정이다. 원심적 힘들이 사용하는 전략은 매우 단순한다. 그것은 모나들이 고객이 아니라 협력자로서 활동한다는 전략이다..바로 협동 그 자체에 수반되는 역동성이다. 협동은 이제 에고이즘의 균형에 의해 조정되지 않으며, 공감과 우애, 슬픔에 의해 작동하기 때문이다. 기업 논리를 밀어붙인다는 것은 뇌의 협동을 파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주체성에 있어서 활동한다는 것이란 함께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209

[ ]권위주의적 발화 (종교적 발화, 도덕적 발화, 성인의 발화, 교수의 발화...그 발화들은 이른바 ‘아버지들‘의 발화이다...)는 우리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지만, ˝우리의 마음 속에 자유로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수렴하거나 발산하고, 다가가거나 떨어져 나오기도 하는 유희는 ˝여기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211 설득적 발화의 방법은 ˝타자의 발화가 최대의 상호 작용을 발휘하는 장소를 만들어 낸다. 그곳은 문맥을 통해 대화가 쌍방에 영향을 주는 장이고, ‘낯선‘ 발화가 자유로이 창조적인 혁명을 가져오는 장이며, 이행이 단계적으로 행해지는 장, 경계와 유희하는 장이다. 212 기도할 때에는 교회의 언어를, 영주와 말할 때에는 자신이 속한 사회계층의 언어를,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과 말할 때에는 또한 별개의 언어를 사용하여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언어들은 각각 닫혀 있었고, 상호 교환도 없었으며, 주체성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비추어 주지도 않았다. 215 바흐친은 자본주의의 힘이 당시의 다양체를 자본/노동의 이항대립으로 환원했다는 점만을 보지 않았다. 그는 또한 그 파괴적 과정이 자본주의 이전 러시아의 생활을 구성하고 있었던 다양한 세계와 충돌하면서 차이의 거대한 에너지와 잠재성을 해방했음을 명확히 보여주었다...현대는 비서구적인 다양한 세계를 자본주의에 의한 통일화와 중앙집권화, 단일언어화로 향하게 하려는 의지가 관통하는 시대인 것이다. 216

[ ] 바흐친에게 자기와 타자의 관계는 다양한 가능세계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에서의 관계로, 또는 언표에서의 다양한 가능성의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결국 발화에는 의미내용으로서의 측면(개념으로서 발화)과 표현으로서의 측면(이미지로서의 발화), 그리고 그 감정-의지의 양상을 전달하는 측면(발화의 어조)이 있다. 222 세계와 지각, 정동, 사고, 객관성에 구조가 부여되는 것은 바로 이 타자의 출현에 의해서다. ˝타자만이 유일하게, 나에 대해 타자를 맞이하는 기쁨, 타자로부터 떨어져나가는 슬픔, 타자를 잃어버리는 고통....을 준다. 의지와 감정에 관한 가치는 모두, 어떤 타자와 관계할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 가치들은 나만의 삶에서는 가질 수 없는 특별한 사건의 중첩을 타자의 삶에 부여한다. 이러한 사건이 가진 성질은 나만의 삶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나의 삶은 시간 안에서 타자의 존재를 품으면서 존재하는 것이다....나와 타자 사이에는 원리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그 차이는 ...사건적 또는 가치론적 질서에서 유래한다...그래서 존재를 구성하는 것은 나도 아니고 고유의 의미에서의 타자도 아니며 나와 타자 양쪽에 앞서 존재하고 있는 사건적 관계인 것이다. 223

[ ]바흐친은 언어학과 철학이 무시하고 있었던 존재의 새로운 잉여, 즉 그가 ‘대화성‘이라고 부른 영역을 구출한다. 이 영역에서 관계는 의미 관계이다. 의미는 언어와 기호에 의해 표현되지만 언어와 기호로 환원되지 않는다...감정, 가치판단, 표현은 언어에서의 어구와는 많은 점에서 관계가 없고, 구체적인 언표에서 살아있는 사용의 과정에서밖에는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바흐친에 의하면 존재의 영역은 ‘응답과 물음‘의 영역이고, 그것들은 ˝동일한 논리적 관계에 속하지 않는다. 사람은 단지 하나의 동일한 의식 그대로 정지해 있지 않는다. 모든 응답은 새로운 질문을 산출한다. 224 의미는 물리적 물질적 현상을 변화시킬 수 없고, 그것을 바랄 수도 없다. 의미는 물질적 힘으로서 활동할 수 없다. 처음부터 의미는 물질적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의미는 어떠한 힘보다도 강한 힘이다. 그것은 실재하는 (실존적인) 요소를 털끝조차도 변화시키지 않지만 사건과 현실의 의미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 모든 것은 그대로 머물면서도 완전하게 별개의 의미를 손에 넣는 것이다.(존재에서의 의미 변형) 226

[ ] 바흐친은 외부(잠재성)의 현실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냈다. 즉 ˝모순어법을 이용하여 ‘로부터의-외부‘의 장소를 내부의 장이라고 말˝해야 한다. ˝예술가는 바로 삶으로부터의 외부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다. 그는 오로지 삶의 내부에 있는 삶(사회적, 정치적, 도덕적, 종교적인 실천)에는 참가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삶을 그 외부에서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 외부에서는, 삶은 삶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서 삶은 외부를 향하며, 삶 그 자체의 외부와 의미의 외부에 있는 활동을 요구한다. 이 외부의 삶에 다다르는 수단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예술가의 작업인 것이다.˝ 227

볕뉘

0. 2시간이 넘는 녹취를 풀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옮겨 놓는다. 하지만 나눈 얘기의 감정의 고저, 그의 삶에서 우러나오거나 응어리진 대목의 호흡은 역시 기록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이 이야기하면서 그가 옮겨 놓고 싶은 감정과 대목, 그 호흡을 이미 알고 있다. 활자화된 녹취록에서는 그 감정의 결을 쉽게 헤아릴 수 없다. 어쩌면 그 녹취는 그 감정의 진도, 그 매듭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재서술될 수 있다. 그러니 여러개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1. 바흐친이 궁금해졌다. 이 친구가 읽는 모습도 그러하지만, 좀더 달리 다른 언중을 느끼고 싶기도 한가 보다. 한나 아렌트의 정치에 대한 대목과 달리 더 세밀하고 풍부하게 느껴졌다. 타자에 대한 개념도 레비나스와 달리 손에 쥐어질 듯하다 싶다. 물론 오독일 것이지만 몹시 궁급해졌다.

2. 정보와 소통을 이야기하는 우리는 정작 대화가 무언지도 모르고 있다는 말이 넘어가다 걸린 가시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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