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요절 시인이 아닌 우리의 내면에도 변덕스러운 날씨에 언뜻언뜻 드는 별 같은 그런 지층이 있다. 긴 시간의 층들은 두텁다. 이미지로 그렇다는 게 아니라 물리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아주 짧은 시간의 층들은 너무나 얇다. 긴 시간의 층들 사이에 끼인 짧은 시간의 층들은 어느 무심한 발굴자의 삽질에 의해 너무나 자주 무심하게 파괴된다. 32

[ ] 어느 날, 트라클의 시를 읽다가 내가 잊고 있던 뮌스터의 첫인상이 20년이라는 세월을 뒤로한 채 문득 찾아왔다. 아주 짧은 시간의 층이라 얇아서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트라클의 시가 내 시간의 얇은 지층 하나를 돌려주었던 것이다. 시를 읽는 어떤 시간은 이런 시간이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것이 돌아오는 시간. 그 시간을 새로 발견하고는 그 시간으로 들어가보는 것. 32

[ ] 삼척이라는 말조차 잊어버리고 난 뒤 다시 삼척을 들추어보니 떠나고 싶은 마음만이 가득했던 어린 시절이 기차역이 떠오른다. 그리고 시는 떠오름 속으로 들어가 영영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오래 중첩된 인간의 역사도 삼척삼척이라고 한 시인이 중얼거릴 때 그림자 너머 어디론가 가고 싶었던 인간의 순간적인 기억만 남는다. 우리는 도착하고 떠나가는 장소를 사랑한다. 이곳에는 일탈의 일렁이는 무늬가 있다. 몸에서 나온 냄새와 영혼의 냄새는 이곳에서 하나로 짜여진다. 누군가 싸준 김밥 냄새도. 41

[ ] 김밥은 잘 정돈된 혼돈을 뜻한다. 김밥에 말려진 재료들은 강, 바다, 들판에서 온 것들이다. 채소, 어묵, 햄, 그리고 간을 한 밥. 이 모든 것들은 소금에 섞이면서 혼동을 갈무리하며 김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김밥은 소금이 몰고 오는 혼동이 자물린 차가운 시간을 뜻한다. 소금을 친 음식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더운 시간 속, 소금은 그냥 널브러져 있다가 음식이 차가워지면 진면목을 드러낸다. 절여진 시간이 입안으로 들어올 때 얼마나 짜고 쓴지 우리는 알지만 그 유혹을 차마 떨치지 못한다. 삶의 짠맛을 보기 위해 우리는 기차역으로 간다. 기차 안에서 김밥을 먹으며 자주 목이 막히고 떠나오던 기차역이 자꾸 눈에 어른거리는데도 말이다. 42


볕뉘.

0. 무심히 에세이를 읽다가 밑줄띠지를 달아놓는다. 시간을 발라내어 다루는 모습들이 오묘하다. 자물린 시간. 절여진 시간들.......

1. 잃어버린 줄 알았던 얇고 짧은 층의 시간이 돌아오는.......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우리들의 조금 더 깊은 일상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새김된 시간들로 지금은 더 탄탄해지거나 새롭게 변주되는 앞이 다가오느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발굴된 시간들을 서로 잘 다루는 것이 우리의 다가올 시간을 다룰 기회가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디가 아니라 어디로 향해있는 시간들을 손아귀에 모시고 있는 것이 더욱 소중한지도 모르겠다. 또 어디로 떠나려고 하는 시간들이 서로의 마음을 더 일렁이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 차가운 시간도, 절여진 시간도 꼭꼭 씹어 시간의 즙을 낼 수 있다면, 아마 우리의 삶들은 이리 팍팍하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는 어쩌면 서로 시간의 층을 켜켜로 가지고 있는 시간부자들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일상을 다르게 연주할 수 있는 듬직한 자산가인지도 모른다. 왕년의 시간만 우려먹거나 훈장처럼 주렁주렁 걸고 있지 않는 한, 곁의 다른 이들의 시간이 섞여들어올 수 있도록 열어두고 있다면 말이다. 시간의 씨줄과 날줄을 보거나 느낄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그리 짜고 쓰지만 않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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