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좌우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과 느낌이 대상으로 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것과 그것 아닌 것, ‘인‘ 것과 ‘아닌‘ 것의 얽힘 가운데서 ㅇㅣ루어지는 사태이다. 0074
사람이 찾는 것은 무엇인가. 믿을 만한 대상. 그의 삶에 희망과 활기를 주는 것. 0092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사건들이 혹은 의식과 환경의 ㅅㅏ태들이 서로 뒤섞여 이어지는 이야기를 쓰는 클로드 시몽. 그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흐름을 실제대로 옮김으로서 소설을 쓴다고 주장한다. 0100
아무도 모든 것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누구든지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과의 얽힘을 떠날 수 없다. 어떻게 얽히는가. 거기에 논리와 존재의 샘이 있다. 0107
모든 철학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광맥과 같은 것이 있다. 그리고 그 광맥을 뚫고 흐르는 한 심장의 박동이 있다. 0155
철학과 논리가 개념의 조작과 놀이, 이유와 귀결의 그물로부터 풀려날 수 있는가. 개념의 놀이와 논리의 그물에 스며든 온갖 우연의 가지들을 버리고 거슬러올라가 의문과 상상과 추론이 시작하는 시원의 사태에 이를 수 있는가 0157
동양 사람이 서양 사람의 사상으로부터 많은 것을 잘라버리지 않은면 그것으로 수십 년을 가르치고 배우면서도 자신의 기질이나 호흡에서 우러나는 사상의 맥을 이룰 없는 것과 같다. 무엇을 잘라버릴까.(동아시아 사람은 그의 많은 것을 버리지 않으면 서양악기에서 자신의 몸과 일체가 되어나오는 음악을 만들어낼 수 없을 것 같다.) 0190


그들의 직관과 경험으로 세계에 대한 자아의 폐쇄성이나 주관성을 벗어날 수 있는가...직관과 경험은 타자로 이어져 열리는 사태이다. 타자로 이어져 열림이라는 논리에 호소하지 않는 한 그들로부터 결과한 현대의 유아론이나 인본사상을 피할 수 있겠는가. 0251
타자에게 넘겨줌으로 자아를 실현하는 자. 타자와의 얽힘에서 자아의 영토를 극소화하는 자. 극소의 생각으로 깨닫는 철학자. 극소의 힘으로 일하는 물리학자. 자아의 동일성을 버리는 자.(서양문명으로부터 던져진 생각거리) 0253
타자로부터 밀려오는 파국을 막으려는 의지의 사람은 자아를 가지고 세계를 본다. 자아의 대상으로 세계를 구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의 존재와 생각의 연장선 위에서 타자를 만나게 되어...더욱 큰 파국을 몰고 오는 참 타자를 결국에 만난다. 0255
사람의 역사는 자기도 이해할 수 없게시리 각기의 순수한 의도 밖에서 거역할 수 없는 어떤 길을 따라 만들어지고 있을 뿐이다....사물의 참 모습은 ‘이다‘로서가 아니라 ‘아니다‘로서 주어질 뿐이다. 0257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각자의 어디엔가 영혼이 있다. 영혼의 세상과 하나가 아니고 다름이다. 0290
라이프니츠의 모나드처럼 자아는 자기 밖의 사태를 비추고 있다. 자기 밖의 사태와의 얽힘을 떠난 자아는 있을 수 없으므로 그는 그 자체로서 다만 외로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참 모습을 알 수 없는 타자와의 얽힘을 떠난 자아는 세상에 없다. 0295


사람이 생각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 잘못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에 사물의 온전한 모습이 드러날 것이라고 기대한 점이다......생각이라는 것은 다만 뒤로 물러나 있는 자가 벌이는 겉치레에 말려드는 것이다. 생각은 뒤로 물러나 있는 자가 드러내보여주는 파노라마에 살 뿐이다. 생각을 끊음으로, 사람의 믿음을 거두어들임으로 오히려 파노라마 뒤로 물러나 있는 자의 모습에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 0302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사태는 같음과 다름의 다름이 아닌가. 같음과 다름이 하나의 바퀴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0303
파르메니데스와 헤겔, 데카르트와 후설이 찾아낸 존재와 사유는 드러나는 것으로 드러나지 않음을 버리지 않았는가. 드러나지 않음에서 다름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 없이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 0350
현실에 주어진 사물의 정체는 그 사물의 현실이 아닌, 현실 밖의 타자로서 드러나지 않겠는가 0353
파도가 파도 되게 하는 자는 파도가 아니다. 나무를 나무 되게 하는 자는 나무가 아니다. 음악을 음악되게 하는 자는 음악이 아니다...있음의 뿌리 되는 가장 높은 형상이나 어떤 다른 것에도 매달림이 없이 스스로 있는 자는 세상에 있음과의 다름으로 엃히어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0354
존재자는 오히려 존재를 존재로 한정하는 존재 아님을 존재 뒤에 지님으로 세계에 드러나지 않는가. 무엇으로든지 드러남은 드러나지 않음과 다름으로 얽히어 이루어진다. 0355
드러난 현실에 언제나 드러나지 않은 바가 따라다녀 지울 수 없는 그림자의 바탕으로 얽히지 않는가 0394
다름으로 얽히는 사물의 모습을 찾는 것이 존재의 깊이를 앎이 아니냐.0395


흔들이는 자기 운명의 목덜미를 휘어잡은 그 자의 돌아볼 수 없는 모습과 움직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해한다는 것은 뒤로 물러선다는 것이다...물러섬으로써 얻은 가설의 타당성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발견되는 것이지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0403
빠져든 습관의 늪에서 자기의 몸을 일으키는 행위. 그것이 물음이다. ‘이다‘라는 게으름의 조류에서 자신을 세워서 ‘아니다‘로 거슬러오는 타자의 파도에 부딪치려고 물음을 던진다. 0406
‘그 밖에 없는가‘...이것들은 끝없이 밀려오는 타자에 부딪쳐서 떠오르는 상상의 대상이다. 0407
바꿈의 뿌리는 있음에 있는가, 없음에 있는가, 아니라면 있음과 없음은 같이 그 밑에 있는 바탕에서 다름으로 얽히어 교대하는 다만 순간의 모습들이 아닌가. 0433
말로 엮은 그물에 걸려 있지 않음을 어떻게 가리킬 수 있는가. 같음으로 엮이는 그물로부터 어떻게 있음의 뿌리로 벗어날 수 있는가. 0470
시원분석은 시작에 놓여 있는 어떤 사태를 찾음이 아니다. 그것은 지난날에서처럼 지금도 되풀이되는 보편의 바탕을 찾는다. 0473
얽힘을 찾는 두 갈래의 길이 있다. 그 사태의 안으로 혹은 필연으로 얽혀 있는 것을 찾는 내재함축의 길과 그 사태의 밖으로 혹은 우연으로 얽혀 있는 것을 찾는 잉여추적의 길이 있다. 0495


서양사람들은 그들 사이의 메울 수 없는 철학적 이견에도 불구하고 다같이 ‘이다‘나 ‘아니다‘의 분명한 선택을 강요하는 무모순의 형식논리를 바탕에 깔고 있다. 0500
이는 순수 존재라는 시원의 사태에 안으로 얽힘과 밖으로 얽힘이 짜는 두 갈래의 길이 함께 깃들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0542
반성과 부정의 샘은 이성 내재와 이성 초월의 두갈래로 펼쳐지는 타자의 길을 따라 흐르는 것이다. 0543
얽어짬의 논리를 초월성으로 푸는 자는 없는가 0599


경험주의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상상으로 모든 연역적인 귀결이나 일반화에 부딪칠 반역의 가능성을 가르치는 것이다. 0630
경험은 주어진 사태인 전건으로부터 그 전건 아닌 자에 달려 있는 후건으로 나아가는 밖으로 얽어짬의 논리 위에서 벌어지는 사태이다. 0632
경험을 좌우하는 논리는 없는가...경험은 그의 확률로서 0이나 1을 빼놓는 사태이다. 경험은 확률 0과 1 사이에서 일어난다. 0636
왜 그들은 직관과 경험의 논리를 주장하는가. 새로운 진리를 찾는 길이 전제 안으로 얽혀짜이는 테두리 밖의 잉여에 주어지는 직관이나 경험에 호소하는 데 있으니까 0670
참으로 자기 밖의 타자를 만날 수 있는가. 자기를 떠나야 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자기를 떠날 수 있는가. 어떻게 자기를 떠날 수 있는가. 어떻게 참으로 자기 아닌 타자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는가. 0673
말은 참으로 있음을 드러내거나 대변하는 것인가. 아니면, 말은 참으로 있음을 덮어버리거나 배반하는 것인가. 아니며, 말은 있음을 만들어내는 것인가. 상호주관의 바탕 위에 선다고 ㅎㅏ는 말은 사람들이 같이 만들어낸 하나의 그물이 아닌가. 그 말의 그물은 참으로 주어진 ㅅㅏ태를 건져내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이 만들어낸 그물에 가려서 오히려 참으로 주어진 사태를 놓쳐버리는 것은 아닌가. 이십세기 언어철학의 두 가지 큰 흐름을 일으킨 장본인인 비트겐슈타인과 하이데거는 ㅅㅏ람들이 정교하게 짜내는 말의 그물을 어떻게 돌이켜보았는가. 그들은 말의 그물이 다만 도구적으로나 실용적으로 쓰임에 그치는 것이므로 참으로 주어진 사태를 잡으려면 말의 그물과 짜임을 헤쳐보아야 함을 가르치지 않았는가. 0675
존재와 존재 ㅇㅣ전의 뿌리가 얽히는 한 줄기 추론이 흐르며 일으키는 파동이다. 그것은 추론과 상상이 흐르는 길에 부딪쳐서 나타나는 존재의, 아니 존재 이전의 뿌리가 짓는 매듭 현상이다. 0694


의문의 사태는 자신이 만들어낸 것인지 타자로부터 덮쳐온 것인지 알 수 없는 그러나 언제나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다. 0775
어떤 사태든지 그 사태 아닌 것이 내는 조건에 마주침으로써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존재 밖에서 존재의 뿌리를 찾을 수는 없는가. 뿌리나 바탕이나 이유를 찾음에 두 갈래의 길을 피할 수 있겠는가. 0776
한결같지 않음의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보편의 대상에 귀의할 것인가. ‘보편의 횡포‘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을 것인가. 자아실현의 목적과 대상이 있는가. 아니면, ‘자아와 대상‘‘은 풀어버려야 할 매듭인가. 빠져나갈 수 없는 선택의 굴레 속에서 얽혀 이어지는 존재의 매듭을 번갈아잡으며 방황하는 ㅅㅏ람들. 철학자. 정치가. 신앙가. 0790


소와 같은 짐승에겐 부정의 체험이 없는가. 0800
뜻밖의 사태를 언제나 상상하는 것은 불합리한 것인가. 0801
생각이란 파도처럼 일며 깨지는 것...방향도 알 수 없는 거친 풍랑을 만나면 산산이 찢겨진 그물에 얽힌 채로 바람과 바다가 지닌 무한한 자유와 힘을 상상해야 한다. 0802
사람의 경험으로부터 파국과 미결의 사태, 부조리와 무의미를 밀어내버릴 수 있는가. 0823
한결같이 펼쳐지는 연장선 너머에 얽혀 있는 잉여의 사태에 대한 상상으로 귀결은 내재함축을 따르는 추리의 영역 밖으로 나아가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다. 0850
가능의 사태에서 현실의 사태로 나아감에 부딪치는 우연을 막을 수 있는가. 그 미결의 정도를 확률이나 귀납논리로 줄일 수 있는가. 0851
뜻밖의 사태를 만나거나 잡는 데에 연역적인 논리의 추리는 크게 쓸모있는 것이 아니다. 0854
깨달음이란 다름의 사다리를 딛으며 거슬러올라감이 아닌가. 0870
부정의 힘을 가진 자는 어디에 있는가..상상에 맞서는 거부이거나 거부에 맞서는 상상이다. 0878
생명은 거부하는 힘으로 태어나 거부에 둘러싸여 잠든다. 존재 아닌 자의 힘으로 나타나고 존재 아닌 자의 힘이 거두어간다. 0890


타자를 정복하거나 세계를 하나로 통일하거나 그것은 일시적인 자유의 환상이다. 타자가 허용하지 않는 자유는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0902
생각은 의문을 가진 자의 깨어날 수 없는 집념이다. 그것은 치료허거나 벗어나야 할 것이지 키우거나 잡고 있어야 할 일이 아니다. 0931
생각 자체는 언제나 이탈이며 거부이다. 0933
갓난 아기가 자기 아닌 참 대상의 소리나 참 타자의 몸짓에 마음을 여는 순간은 어떻게 일어나는 가0938
죽는다는 것은 드디어 버림으로 들어서는 자유의 길 0939
일생은 어린 아이 때 하루의 꿈같다. 부지런히 뛰는 삶은 더욱 짧다. 0970
찾음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버림으로써 보편과 일반에 이르지 않겠는가. 개념이나 경험 가운데는 사람의 관점이나 의도가 들어앉아 있으니까. 0980
이성 자신의 우연과 의존성을 시인함으로 타자에의 양도를 목표로 하는 합리성은 없는가. 0982
웃음은 말의 그물을 뚫는 것인가...웃음은 아직 버릇의 그물 가운데에 얽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웃는 얼굴에 따귀를 부친다면 웃음이 버릇의 그물을 깨뜨리고 그참 모스ㅂ으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0991


한 이란 무엇인가. ㄱㅓ절당했기 때문에 풀리지 않은 감정,실험하지 못한 ㅇㅣㄹ에 대한 사라지지 않는 우ㅓㄴ망과 집념. ‘아니다‘를 토해내는 부정으 ㅣ샘이 초월한 데에 있거나 현실에 펼쳐지는 파도의 피할 수 없는 밀림이기때문에 넘쳐오는 것./아무리 퍼올려도 끝없이 쏟ㅇㅏ지는 우물바닥처럼 깊이 가라앉은 것인가 1001
동양 사람의 논리는 애매함을 받ㅇㅏ들이는 정신으로 이루어진다. 그의 논리는 실ㅈㅔ의 정신을 나타낸다. 1004
왜 인류구원을 향한 박애와 보편의 정신을 외치는 종교는 오히려 더 닫히거나 배타적일 수 있는가. 왜 동양 사람은 옛날부터 공과 무 혹은 중용의 대도를 지니고 자유자재의 열린생각과 논리를 펼치면서 전제정치와 획일주의의 더 오랜 흐름을 가지고 있는가. 1040

볕뉘.

-1. 고도를 기다리며의 럭키는 모자를 쓰면 생각하는 작가가 된다. 그 모자를 서로 번갈아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쓴다. 서로 번갈아 쓰는 모양새를 취하다보니 어느 것이 어느 모자인줄 조차 모르게 된다. 더 이상 생각이라는 것 조차 수면 아래로 떨어진다. 생각해. 생각해. 생각해.

0. 안티호모에렉투스를 인상깊게 읽고 저작을 챙겨보려고 했지만 어디에서도 구하기 쉽지 않았다. 괄호의 철학. 위의 저서는 30년전 저작이고, 저자가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는 책이기도 하다. 강신주가 박동환철학에 대한 강연을 한다고해서 끌리기도 했고, 사유가 확장되었으면 하는 바램들이었다. 이렇게 다시 만나다.

1. 앞의 철학책들과 이어 읽으면 편할 듯 싶다. 이어진 저작들 사이 다른 결들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면서 읽고 싶다. 있다라고 하는 순간 없어진다. 나와 너에 또 다시 집착하는 순간 그 사이는 다시 안보이기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무엇일까. 백지상태로 만들어놓고 덧셈의 가지를 하나하나 그려보는 것도 몸에 맞는 철학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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