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뉘.

0. 산문시인 파리의 우울에 끌려 미술비평가이자 현대시를 연 시인인 보들레르를 읽는다. 34살차이나는 두번째 부인에게서 난 보들레르 6살때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한 아버지를 여위었다. 부친의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고 물쓰듯이 돈을 뿌리고 다녔던 보들레르는 재산을 압류당하다시피하고 매달 조금씩 받아썼다. 그렇다고 그 버릇이 바뀐 것을 아니었다. 삶과 일상을 늘 위태로운 지경으로 모는 그는 그 경계를 늘 글과 작품으로 단련시킨다. 시대의 우울을 고스란히 품고 작품으로 추출해낸다. 그 책 속의 책 가운데 하나가 말라르메였다. 말라르메의 시집. 평생 극히 적은 시를 쓴 그는 작품을 낳기 위해 끊임없이 삶을 채근한다. 그리고 조금씩 읽다가 늘 주시당하던 그 책 글렌굴드 피아노 솔로를 보게된다. 그리고 다시 보들레를를 그 책 안에서 만났다.

1. 예술을 위한 예술. 그 예술에는 예술만이 있던 것이 아니었다. 치열한 삶 아니 괴팍스럽기까지한 원칙과 철칙. 어쩌면 시대가 말하지 못하는 멜랑콜리를 그대로 안고 있는 것 같다. 작품을 지켜주는 것은 사유와 삶, 고독이었다. 능히 즐기는 고독. 밤새워 자신과 작품과 부단히 씨름하는 나날의 연속인 듯싶다. 보들레르는 젊을 때 걸린 성병으로 말년 자주 의식을 잃기도 하고 아팠다. 그 날선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원하는 작품에 대해서는 엄중했다. 그를 읽으면서 이시가와 타쿠보쿠가 겹쳤다. 드나들던 유곽. 빚에 대해 빚처럼 생각하지 않던 삶의 방식. 타쿠보쿠는 시에 자신의 성찰과 내면의 부끄러움을 거침없이 넣었다. 삶의 부끄러움을 넣을 줄 알던 시인. 그것이 그의 단명한 목숨이 아니라 사회적 삶의 수명을 연장시켰다. 마흔여섯에 유명을 달리한 보들레르 역시 날선 자학과 귀족주의가 번갈아 감돈다.

2. 음악은 쉽지 않다. 결국 만나는 길이 음악이라고 하지만, 글렌굴드 피아노 연주를 듣거나 읽으면서 기괴하면서 이해할 수 있기도 한 것 같다. 연주자가 연주를 하지 않고 몇달 동안 몇 주 동안 서성거린다. 기껏 연습이라고는 일주일에 한 두번. 될 수 있으면 피아노란 사물과 거리를 둔다. 사물이 아니라 건반의 느낌과 발성상태까지, 그날의 습도까지 감지할 것 같은 연주자. 단 한번인 피아노의 음내림을 기원하는 무당같은 연주자. 시간이 아니라 한음 한음 공간을 만든다는 연주자.

3. 어떻게 하다가 이런 볼 것 같지 않은 책의 숲길로 들어섰는지 모르겠다. 한번 괄호를 다시 한번 치면서 읽고 싶다. 음악 대신에, 유행 대신에...또 다른 무엇. 사유의 갱부들... ...예술가의 낯설고 날선 일상들로 사유의 폭을 찢어버리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이번 달은 이 들 사이에서 더 앓게 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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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보들레르

2. 말라르메

그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꽃을 보았다면 너는 그저 그런 꽃 한 송이를 본 것에 지나지 않지만, 네가 정말로 무심한 상태에서 그 꽃을 보았다면 너는 우주의 한 얼굴을, 지극히 작은 얼굴이지만, 본 것이다. 말라르메에게서 낡고 우연한 관념들을 차례로 부정하고 색조와 선율로 하나된 인상이 되려는 이 시어의 지평선에 순수 관념들이 떠오르게 되는 것도 같은 이치다./”시구를 파들어” 간다는 것은 마음 속에 이 투명한 거울을 마련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점에서 한 시인에게서 그의 언어의 고행은 바로 그의 실존의 고행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32

얼음에 갇힌 백조가 자신을 해방시키려는 노력에 희망이 없다는 것을 명철하게 알면서도 순백의 얼음에 능동적으로 자신을 붙박을 때도 38

책의 개념은 그의 시쓰기 속으로 들어와 내적 비평의 기능을 했으며, 사물과 생각과 말의 관계에 대한 성찰의 틀을 마련했다. 41

말라르메의 [최신유행]이란 8호까지의 잡지는 치밀하고 난해한 말라르메의 시와 반짝이는 작은 장식품으로 가득 차 있으며 아름답고도 무의미한 유행의 세계 간의 유사성을 강조하고, 19세기 이후 현대의 패션 산업이 어떻게 예술화의 길을 밟았으며, 모던파의 예술이 어떻게 현대의 유행에서 영감을 받았는가를 기술하는 가운데 이 잡지를 그 중요한 단계에 위치시키고 있다./”사물이 아니라, 사물에서 산출되는 효과를” 그리려 했던 말라르메의 시법이 다른 방법으로 실현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42

외국어 속에 마법으로 묶여 있는 저 순수 언어를 자기 언어를 통해 풀어내고, 작품 속에 갇혀 있는 저 순수 언어를 작품의 재창조를 통해 해방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번역가의 과제”라는 벤야민의 말이 위안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44

3. 글렌굴드

굴드의 고독은 찢김이 아니고 스스로 아무는 상처였다. 풍요로운 은신처, 모아들이는 장소, 그는 묵상을 했던 것이다. 릴케처럼 그도 “나는 과실 속의 씨처럼 일 속에 있습니다.”fㅏ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21

“내가 기억하는 한,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늘 혼자서 보냈다. 그건 내가 비사교적이기 때문이 아니고, 예술가가 창조자로서 작업하기 위해 머리를 쓰기 바란다면 자아 규제 – 바로 사회로부터 자신을 절단시키는 한 방식 – 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관심의 대상이 될 만한 작품을 산출하고자 하는 예술가라면 누구나 사회 생활면에서 다소 뒤떨어진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37

연주회는 음악을 현재형으로 만들려고 ㅎㅏ지만, 사실은 청중을 그들이 듣는 것에서 멀어지도록 한다고 굴드는 믿었다. 연주회에서 연주를 할 때, 그는 음반이나 텔레비전 연주와 가까워지기 위해 자신이 애쓰고 있다는 느낌을 종종 받곤 했다. ㅅㅏ람들이 가장 생생하고 가장 직접적이라고 믿는 것이 사실은 스튜디오 안에서 이루어지는 빛나는 아름다움의 탐구의 죽은 그림자라는 듯이. 절단, 동시 녹음, 반복 녹음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움, 보들레르라면 ‘화장의 아름다움‘이라고 말했으리라. 보다 노골적으로 굴드는 상궤를 벗어난 아름다움, 임상실험, 해부를 원했다. 48

그의 부재는 보다 강렬한 현전이라 할 수 있다. 굴드는 청중을 원했으며, 더 많은 ㅅㅏ람들이 열정적으로 그에게 올 수 있도록 거리를 유지할 줄 알았다. 59
자신의 생각들과 함께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 어렵지 않게 침묵을 공유할 수 있는 능력, 상대방을 괴롭히지 않고 그의 공격을 살짝 피해 갈 수 있는 능력, 이런 것들이 우정의 본질이 아닌가?/굴드는 사람들과의 의사 소통을 거부했지만, 그가 거부한 것은 ‘커뮤니케이션 시대‘라는 명목으로 팔아먹은 이 텅 빈 말, 비의사 소통이었다. 그의 고독은 고독 속에 있는 각자를 만나려는 수단이었다. 굴드는 우리에게 우정을 증명해 주었다. 65

이 예술가의 이같은 별난 행동들을 기인의 전설로 치부해버리고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할 것인가? 나는 반대로 이 육신의 병, 이 공포가 음악가에게 기계의 작동에 ㄷㅐ한 극도의 예민함과 섬세한 조음감각, 그리고 그의 세련된 연주를 가능케했다고 믿는다. 72

굴드에게 있어 음악은 일종의 ‘아래‘에 대한 사랑이다. 음향은 아래로부터, 피아노에서 오는 것이지, 몸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 손가락은 단지 이 음향을 해방시키기 위해 있다는 생각. 아무리 낮게 내려가도 지나치지 않다는 것이다. 84/음향이 밖에서 전달되어 오지 않고, 마치 악기의 내부로부터 추출되는 것 같다. 85
그는 ‘아름다움‘을 접합과 절단, 합성과 분해, 외과적인 미의 개념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술은 정보를 재생해 내는 도구가 아니고, 예술적 의미에서 정보를 조작하는 도구라고 보았다. 스튜디오는 그에게 피아노와 똑같은 악기였다. 89

그가 무대를 떠난 것은, 연주홀이 음악을 듣기 위한 최적의 장소가 아니라는 확신에서였다. 그곳엔 형상들이 현존하며, 따라서 고독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연주회는 부도덕했다/악마의 간계. “예술가는 위험에 처한 존재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90

굴드는 놀라운 방식으로 시간을 얽히게 하고, 도취 상태에서 기다림을 따라 잡는다/연주회에 대해 굴드가 가장 꺼렸던 점이 어찌 보면 시간성이다. 그는 연주회 시간을 혐오한다고 말했다.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연주자가 움직이는, 방향지어지고 역전 불가능한 시간. 95, 96

더 잘 연주하기 위해 거리를 둘 것. 이것이 굴드의 미학이다./듣기보다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 자신의 몸의 지체를 분리시키고, 자신을 몸으로부터 분리시키기. 음악가의 시도라고 하기에는 이상한 시도이다. 그렇지만 굴드는 적극적으로 주장했다./굴드의 미학은 발견을 돕는 미학이다. 본능적으로 연주가들은 제거하기보다는 첨가하는데, 그의 미학은 제거하는 편을 택한다. 99, 101

굴드가 남긴 것은 무게가 없는 거대한 것, 느끼기보다는 명명하기 더 어려운 것, 가까이 다가갈수록 잡히지 않는 무엇이다.(미는 우리가 건드릴 수 없는 것, 우리를 그 영향력 속에 가두어두는 것이다.)/아름다움은 견딜 수 없고 냉혹하다. 그것은 무자비하게 우리의 눈길을 후려치고, 귀를 유혹하고, 대기중인 우리의 말들을 낚아챈다. 104, 105

그는 음악을 따고, 들어올리고, 아니면 공중에서 낚아채는 듯했다. 언제나 밖에서, 뒤로 물러서며 끝없이 한계를 넓혀 가는 어떤 공간 속에 있듯이 그는 음악 속에 있었다...친숙해지면 음악이 꺼져 ㅂㅓ리고 만다...무서운 것이 잊혀지고 나면 아름다움은 부재한다./우리의 원래 모습보다 한 발 앞선 곳에서 우리에게 말을 건다./아주 스타카토적이고 점묘적이라고까지 할 만한 이 secco식의 연주를 통해 탁월한 밀도와 놀라운 연속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106, 107, 108

굴드는 피아노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본다. “네가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 지 내가 알려면 너는 아주 분명한 분석적인 ㄱㅐ념을 가지고 내게 접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더없이 추잡한 것이 되어 버릴 것이다.” 피아노는 대답하지 않고 질문한다. “이것이 정말 네가 바라는 것인가?”라고 물으면서 그 너머로 나아가도록 다그친다. 굴드는 피아노의 이같은 점을 좋아했다. 그의 방해물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113

굴드는 유채색을 싫어했으며, 화려한 빛깔의 방에서는 일을 할 수도, 분명한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회색과 암청색을 간신히 견뎌낼 수 있을 정도였다./그는 상상의 음질을 원했으며, 존재하지 않는 음을 찾곤 했다. 잃어버린 음이 아니라, 부재하는 음을/”이곳에서 시간은 공간이 된다”는 바그너가 ㅍㅏ르지팔의 기본 미학으로 삼았던 원칙이었다. 굴드가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갱도를 파는 광부, 혹은 ㄱㅏ장자리를 둥글게 다듬는 조각가가 생각난다. 울림을 지닌 재료를 가지고 하는 작업. 다시 시작하거나 회복이 불가능한 작업/음악의 촉각적 공간적 개념을 공유한다. 즉 색채가 입체감을 인지하는 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굴드가 음악에서 과육을 제거하기 바라는 것은 색채와 무관한 자체의 구조, 그 골조의 아름다움을 환한 빛 속에서 보기 위해서이다. 122, 123,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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