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 ] 들뢰즈는 카프카가 전형적인 분산된 사이버네틱 권력의 예언자라고 주장했다. ...표면적인 무죄선고와 더불어 두려운 최종 판결이 도래하지 않도록 피고인이 끝없이 계속되는 법률적 공방 과정에 참여하는 ˝무한한 지연˝이다....통제사회가 무한한 지연을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교육은 평생동안 이어지는 과정이 되었고, 일하는 삶이 지속되는 한 훈련도 지속된다....권력이 이처럼 ‘무한히 지연되는 ‘ 양식을 취함에 따라 외적인 감시는 내적인 관리로 대체된다. 46-47

[ ] 시장의 명령과 관료주의적으로 정의된 ‘목표‘의 결합은 현재 공공서비스를 규제하고 있는 ‘시장 스탈린주의적‘ 실천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47

[ ] ‘따분하다‘ ; 문장을 읽는 글의 내용이 아니라, 읽는 행위 자체를 이렇게 느끼는 것이다. 10대의 귀차니즘이 아니라 ‘너무 자극받아 집중할 수 없는‘ 문자 문화이후의 ‘새로운 육체‘와 퇴조하고 있는 훈육 체계의 제한과 집중 논리가 이루는 부조한다...언제든 달콤한 만족감을 주는 부단한 흐름에서 차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학생들은 햄버거를 원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니체를 원한다. 48-49 헤드폰을 쓰고 있는 학생; 학생들은 현재의 집중력 부족을 미래의 실패와 관련짓지 못하고 시간을 하나의 일관된 서사로 종합하지 못하는데 이는 단순한 의욕 상실 이상의 징후를 의미한다. 50..시간은 언제나 디지털의 극소 조각들로 이미 잘려 있다.51

[ ] 훈육을 대표하는 인물이 노동자-수감자라면 통제를 대표하는 인물은 채무자-중독자다.....주의력 결핍 과잉 행동 장애 같은 무언가가 병리 현상이라면 그것은 후기 자본주의의 병리 현상이다. 즉 하이퍼 미디어 소비 문화의 엔터테인먼트-통제 회로에 몰입한 결과다. 유사하게 난독증이라 불리는 것은 많은 경우 어떤 포스트렉시아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10대들은 독해할 필요 없이 자본의 이미지 기반 데이터를 아주 효율적으로 다룬다. 넷-모바일-잡지의 정보를 찾아 돌아다닐 때는 표어만 살펴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51

[ ] 어떤 경우든 ‘새로운 것‘에 대한 저항은 좌파가 힘을 모을 수 있거나 모아야 하는 대의가 아니다..‘새로운 것‘에 대한 자본주의의 전유와 싸우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지만 ‘새로운 것‘을 되찾는 일이 우리가 처한 상황에 적응하는 문제일 수는 없다. 적응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제법 잘해 왔으며 또 ‘성공적인 적응‘은 관리주의의 탁월한 전략이니 말이다..바디우와 하비는 모두 신자유주의 정치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계급 권력 및 특권으로의 복귀와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포스트정치적‘이라 묘사되는 시대에도 계급 전쟁은 지속된다, 하지만 부유한 자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전개된다는 사실을 입증한다...신자유주의자들은 레닌주의자들보다 더한 레닌주의자인 바, 이들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번성하도록 이데올로기적 분위기를 창출하는 지식인 전위부대로 싱크탱크를 운용한다. 57-58 중요한 것은 동기부여/동기상실의 이분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 따라서 통제 프로그램과 탈동일시가 낙담에 빠진 무관심과는 다른 무언가도 등록될 수 있는 길을 발견해야 한다.한 가지 가능한 전략은 정치의 영역을 옮겨 놓는 것이다. 59

5.

[ ] 포스트포드주의: 자본주의는 가족을 요구하고 있다. 자신이 가족을 침식해 가는 그 순간에 말이다. 63 조립라인 대신 ‘정보의 흐름‘이 들어선 포스트포드주의에서 사람들은 의사소통을 통해 일한다. 일과 삶은 분리할 수 없게 되었다. 자본은 우리가 꿈꿀때 우리를 쫓는다. 시간은 더 이상 선형적이지 않으며, 무질서해지고 점형태로 분할되었다. 생산과 분배가 재구조화됨에 따라 신경계도 재구조화되고 있다..프리캐러티 precarity 상황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65 식별할 수 있는 외부의 적은 더 이상 없다...양극성 장애는 자본주의의 ‘내부‘에 고유한 정신 질환이다....망상과 자기 확신이 없으며 자본주의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정신적 고통의 비율은 세대차이로 두배였다...67 많은 사람이 끔찍하게 불안정한 포스트포드주의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다.

[ ] 현재의 지배적 존재론은 정신 질환의 사회적 인과성에 대한 어떤 가능성도 부정한다. 정신 질환의 화학-생물학화는 당연히 그것의 탈정치화로 이어지게 된다. 정신 질환을 개인의 화학-생물학적 문제로 간주하면 자본주의는 어마어마한 이득을 얻게 된다. 첫째, 원자적 개인화를 향한 자본의 추진력을 강화한다. 둘째, 다국적 제약 회사에 엄청나게 수익성 높은 시장을 제공한다. 모든 정신 질환은 신경학적으로 설명되지만 이 설명이 그것들의 인과관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자본주의 리얼리즘에 도전하고자 하는 좌파에게는 정신 질환을 재정치화하는 일이 시급한 과제다. 69

6.

[ ] 시장 스탈린주의와 관료주의적 반생산: ‘스마트해지기‘라는 에토스를 따르는 사무실의 경영 스타일은 셔츠 차림에 격식을 따지지 않는 태도와 은밀한 권위주의가 혼합된 것이다. 70 이제 노동자들에게 생산뿐 아니라 정서도 요구한다..반관료주의와 반스탈린주의를 자처해 온 신자유주의적 정부들하에서 관료주의적 조치들이 강화되어야 했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수수께끼처럼 보일 수도 있다...새로운 종류의 관료주의, 가령 ‘목표와 목적‘, ‘성과‘, ‘임무 진술‘등의 담론은 증가해 왔다. 관료주의가 일종의 억압된 것의 귀환이며, 그것을 타파하겠다고 공언해 온 체계의 심장부에 아이러니하게 재등장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에서 관료주의의 부활은 격세유전이나 이상 현상 이상이다. 73 새로운 정보 체계는 고위 관리자들에게 그 조직에 대한 포괄적인 그림을 제공하는데, 이는 네트워크 속 어디에도 개인들이 숨을 공간이 거의 없게 만든다. 그러나 정보 테크놀로지로 인해 관리자들이 데이터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데이터 자체도 증가했다. 이러한 ‘정보‘의 상당 부분은 노동자들 자신이 제공한다. 73 애초에 정량화하기 힘든 노동 형태를 측정하려는 충동은 불가피하게 추가적인 관리 및 관료주의를 요구했다....노동은 그 자체의 공식적인 목표보다는 표상을 생산하고 조작하는 쪽으로 방향을 맞추게 된다.76 신자유주의적 신노동당 정부는 이상한 반복 강박 속에서 실제 세계의 결과들이 오직 외양(홍보)의 층위에서 등록되는 한에서만 중요시되는 그런 계획들을 수행하곤 했다. 77 시장 스탈린주의를 자본주의의 ‘진정한 정신‘에서 일탈한 것으로 간주하면 잘못일 것이다. 오히려 스탈린주의의 본질적 차원은 사회주의 같은 사회적 프로젝트와 연계되었기에 억제되어 있었고, 이미지들이 자율적 힘을 획득하는 후기 자본주의 문화에 이르러 비로소 등장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낫다. 증권거래소에서 가치는 한 기업이 ‘실제로 하는 일‘보다는 그 기업의 (미래) 실적에 대한 직관과 믿음에 기반해 생성된다. 말하자면 자본주의에서 견고한 모든 것이 홍보 속으로 사라지고, 후기 자본주의는 그것이 시장 메커니즘을 부과한다는 특징으로 정의된다. 78 ˝제 소관이 아닙니다. 유감입니다. 규정이 그렇습니다.˝ 86 어느 누구도 무엇이 요구되는지 알지 못했다. 대신에 개인들은 특수한 몸짓이나 지침이 의미하는 바를 추측할 수만 있을 뿐이었다. 87 감사문화: 교사들은 이런 ‘데이터‘를 대조 확인하고 소비하는 대타자에게 인상을 남기는 것이 점점 자기 일의 목적처럼 보인다는 사실에 좌절감을 느낀다. 나는 ‘데이터‘를 따옴표 안에 넣었는데 이른바 정보의 상당수가 감사 영역 바깥에서는 거의 의미가 없고 활용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89 옛/엄격한 심사 체계와 새/가벼운 심사 체계의 차이는 정확히 앞서 요약했던 표면적인 무죄 선고와 무한한 지연이라는 카프카의 구별과 일치한다.90 실제 관찰 자체보다는 관찰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기에 해야 하는 보여 주기식의 불필요한 관료주의 업무와 훨씬 더 많이 관련된다. 90

[ ] 하나의 현실과 다른 현실이 중첩된다는 것을 당신이 볼 수 있다면: 전대미문의 변화 속도와 그런 변덕스러움과는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온갖 측면에 있어서의 전대미문의 표준화가 병존한다는 것이다....102 새로운 기억들을 만들지 못하는 무능, 이것이 포스트모던한 곤경을 짚어 주는 간명한 정식이다. 103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 이 둘은 공적 영역 및 민주주의를 침식하는 데 있어서는 서로 협력하며, 정치적 과정이 아니라 상품에서 해결책을 찾기를 기대하는 피지배 시민을 만들어 냈다. ....정확히 이 주체들은 자신이 자유로 오해하는 선택과 욕구 충족의 영역에 몰입해 있기 때문이다. 104-105


7.

[ ] 중앙교환국은 없다; 콜센터에 전화를 걸면 바로 알게 되듯 제대로 아는 사람도 없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때라도 그럴 권한이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무력하게 기다리면서 쌓여 가는 노여움 등이 후기 자본주의의 정치적 현상학이 집약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분노를 터뜨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이런 분노는 허공을 향해 가해지는 공격, 자신과 마찬가지로 체계의 희생자이지만 그에 대한 연대의 가능성은 없는 누군가를 향한 공격으로 표출된다. 분노의 적절한 대상이 없듯 분노가 초래하는 공격 역시 아무 효과도 낳지 못할 것이다. 110

[ ] 생태 재앙의 원인은 어떤 비인격적인 구조다. 그 구조는 온갖 방식의 효과를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정확히 말해 책임을 질 수 있는 주체는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주체, 즉 집합적인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직면해 있는 전 지구적인 다른 모든 위기와 마찬가지로, 생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그에 적합한 주체가 구축되어야 한다. 113

[ ] 자본주의에는 확실히 음모들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더 깊은 층위의 구조 덕분에 그 음모들이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관리자 집단이나 은행가 계급을 전반적으로 새로운 일군의 (더 선한) 사람들로 대체하면 사태가 나아지리라고 누구도 진심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반대로 악덕 행위가 구조 탓에 발생한다는 것 그리고 구조가 그대로 있는 한 악덕 행위가 재생산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116 본인은 자신의 관리자들이 해 온 일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이며 사태가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누구든 경영에 발을 들여놓으면 그리 오래지 않아 권력의 잿빛 화석화에 포섭되기 시작한다. 구조를 감지할 수 있는 곳은 바로 여기다. 즉 우리는 여기서 실제로 구조가 사람들을 지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사람들을 통해 말하는 구조의 무감각한/무감각해지게 만드는 판단을 들을 수 있다. 118 기업구조를 벌주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모든 기업이 각기 독립체이기는 하지만 개별적인 인간과는 다르며, 따라서 기업을 처벌하는 것과 개인을 처벌하는 것 사이의 어떤 유비도 빈약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기업이 모든 것의 배후 깊숙히 있는 행위자인 것 같지는 않다. 기업들 자체는 주체-가-아닌-궁극적인 원인, 즉 자본에 의해 제약되어 있는 것이자 자본의 표현이다. 119

8.

[ ] 마르크스적 슈퍼보모: 정신 건강이나 지적인 성숙의 문제는 거의 주목받지 못한다. 대신에 우리는 ‘좋은 느낌을 주고 좋아 보이는 것‘이 전부인 환원주의적이고 쾌락주의적인 건강 모델을 본다. 124 텔레비전은 지금 우리가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는 더 이상 말해주지 않는다..텔레비전은 정말이지 도덕을 안내하는 체계가 아니라 감정을 안내하는 체계이다. 124-125

[ ] ˝자아의 제국˝- 사람들은 자기 내부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즉 개인주의의 세계 안에서 모두가 자신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고 자신의 상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 125 옛 미디어의 반동적인 대응은 미디어 종사자들로 하여금 교육하고 지도하는 역할을 완전히 포기하게 만들고, 또한 좌파와 우파 양편 모두에 만연한 포플리즘 기류에 편승해 온건하고 평이한 프로그램을 제작하도록 미디어 생산자들을 ‘협박‘하기 때문이다....부성주의적인 것에 대한 미디어 계급의 거부는 놀라운 다양성으로 가득한 상향식 문화가 아니라 점점 더 유아화된 문화를 낳았다....127 공적인 것이 소비를위한 것으로 대체되면서 실험주의와 같은 혁신들은 이제 생각할 수도 없게 되었다. 구조적 불안정성이 지속되고 ‘장기적인 것이 말소된‘ 결과는 언제나 혁신이 아니라 침체와 보수주의다....후기자본주의를 지배하는 정서는 공포와 냉소주의다.....진정으로 새로운 좌파의 목적은 국가를 넘겨받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일반의지에 종속시키는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129 개인과 그들의 이해관계의 총합으로 환원할 수 없는 공적 공간이라는 관념을 되살리고 현대화할 필요를 수반한다. 130

[ ] 필요한 일은 결과를 구조적 원인과 연결하는 것이다. 거대 서사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의심에 맞서 우리는 이러한 징후들이 모두 고립된 우연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체계적인 원인 즉 자본의 효과라고 재단언해야 한다. 우리는 존재론적으로 또한 지리학적으로 어디에나 편재해 있는 자본에 맞설 수 있는 전략들을, 마치 처음인 것처럼, 발전시키기 시작할 필요가 있다. 130 은행 긴급 구제 이후 신자유주의는 모든 면에서 신뢰를 잃었다. 신자유주의가 하룻밤 사이에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전제들은 계속해서 정치경제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그 전제들은 확신에 찬 추진력을 지닌 이데올로기적 기획의 일부가 아니라 관성적이며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디폴트 상태로 그 지배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131 다시 영년 year zero이다. 132 실질적인 반자본주의는 자본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자본의 경쟁 상대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전자본주의적 영토들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없다. 반자본주의는 그 자체의 진정한 보편성을 통해 자본의 세계화에 대항해야 한다...정치화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을 누구나 차지할 수 있는 것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정치적 행위 주체를 필요로 한다. 신자유주의가 1968년 이후 노동게급의 욕망을 병합함으로써 승리했다면, 새로운 좌파의 실천은 신자유주의가 만들었으나 만족시킬 수는 없었던 욕망들에 기반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관료제의 대규모 축소)132-133 관리주의에 맞서는 새로운 형태의 투쟁 전략을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133 내부적인 문제에 훨씬 더 관심을 가지고 위기가 열어 준 기회를 이용해 공공서비스에서 비즈니스 존재론을 제거하는 데 앞장서야 할 때다...우리는 의학적 질환으로 간주되는 광범위한 정신 건강 문제를 유효한 적대로 전환해야 한다. 정서적 장애들은 불만이 내면에 갇혀 있을 때 발생한다...시장에 기대는 방식만으로 환경 재앙을 피할 수 없다. 이 새로운 고행에는 실천적인 정당성뿐아니라 리비도적인 정당성도 있다...무제한적인 방종이 비참과 불만을 야기한다면, 욕망을 제한할 필요성은 줄어들기보다 오히려 커진다고 할 수 있다. 이 집합적인 관리가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하는지 역시나 물음이지만....역사의 종언이라는 어둡고 긴 밤을 엄청난 기회로 장악할 수 있어야 한다. 134-135

9.

[ ] 우리는 현실주의자가 될 여유가 없다; 이데올로기는 비정치적으로 보일 때, 그저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처럼 보일 때 가장 강력하다....동시대 좌파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어려운 시험대 중 하나는 당신이 언급한 그 체념이다...실종된 것은 우리의 정치지 정치 그 자체가 아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좌파의 병리 현상이다. 139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신자유주의에 굴복했다는 사실분 아니라 사회적 상상력의 쇠퇴와도 관련된다...그것은 이제 다른 정치 프로그램들을 떠올릴 수조차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우리는 오큐파이 운동에 직면했을 때 자본의 옹호자들이 자본주의에 대한 긍정적인 대안은 없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그 주장을 진지하게 취급할 필요가 있다. 불평하고 청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140-141

[ ] 소소한 쾌락들과 음울함이 서로 대립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둘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동일한 사태라고 생각한다....레트로 마니아....조금씩 끊임없이 주어지는 디지털 자극에 사람들이 언제나 접속해 있다는 사실은 획기적인 문화적 생산을 위한 조건들, 가령 모종의 침잠, 반성을 위한 공간, 몰입하는 능력 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참신함과 혁신에 대한 자본의 모든 수사에도 불구하고 문화가 점점 더 동질화되고 예상 가능한 것으로 변해 왔다는 점이 이제는 분명해진 상황이다. 오락과 쾌락에 아주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된 동시에 우울증이 특히 청년들 사이에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포드주의 시대와 연관된 권태는 끝났다. 이제 그런 권태를 위한 공간은 없다. 144-145 디지털 세상을 표류하는 경험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분위기는 매혹과 권태의 혼합물이다. 우리는 열광하는 동시에 권태로워한다. 146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욕망조차 다소 예스러워 보인다.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충동을 다른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는지가 초점이다. 146

[ ] 자본주의 리얼리즘에서 우리는 대중적이지 않은 포퓰리즘과 더불어 정말로 즐겁지는 않은 오락을 만나게 된다....언제나 미국 전체 인구의 4분의 1 정도는 자본가가 자신의 미래를 가져가는 것보다 정부가 자기 돈을 가져갈까 봐 끝없이 전전긍긍하는 우매한 인종주의적 호모포비아이다. 그래서 제게는 욕망과 충동을 분리하는 일이 중요해 보인다. 다시말해 사적인 것으로 변해 버린 것을 되찾아 우리 모두에게 공통된 것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집합성에 대한 욕망을 자극할 수 있도록 누락되어 있는 것을 강조하는 일이 중요해 보인다.. 150

[ ] 우리는 자본주의가 오락을 제공하지만 불평등하게(누가 그것에 접근할 수 있는가), 부당하게(착취를 통해서), 너무 많은 것(삶, 미래, 환경, 욕망 자체 등)을 희생시키며 그렇게 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150

[ ] 저는 상품에 대한 이런 절제를 물러섬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상이한 종류의 욕망이 출현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기를 더 선호한다. 151

[ ] 현재의 자본주의는 상품을 통해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아마도 경쟁과 지대라는 측면에서 생각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저는 절제보다는 오히려 훈육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집단들로 만들 수 있게 해주는 그런 훈육 말이다. 152

[ ] 오직 포스트자본주의만이 민주주의를 가져올 수 있다고, 우리는 진보와 계몽의 편에 있지만 자본은 야만의 편에 있다고 주장하는 편이 낫다. 156 우리는 대항 세력을 구축해야 한다. 157 자본주의 리얼리즘이 거둔 성공 중 하나는 비자본주의적인 것을 전체주의적인 것과 결합시켰다는 점이다. 158

볕뉘.

0.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알튀세르의 책은 그람시 이론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보는 책이다. 철학, 혁명을 말하다란 책은 68혁명을 되짚어보고 있다. 이 가운데 알튀세르 편을 읽다. 여기서도 이론의 문제점을 면밀하게 살펴보고 있다. 어쩌면 이 책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주제면에서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1. 저자는 작년에 고인이 되었지만, 이 책은 많은 보조 텍스트와 마지막 대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론서들의 모호함이 아니라 좀더 현실에 밀착하여 탐색하고 손에 잡힐 수 있도록 노력한 흔적들이 여실한 것 같다.

2. 간명한 문구들을 되살펴 보아도 그가 주장하는 것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