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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해: 우리는 그 어떤 것이든 간에 그것이 갖고 있는 전망들 가운데 일부를 통해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망 전체는 유한한 인식을 넘어서는 무한성을 지니고 있다. 94 이해란 결코 정신의 완결된 정태적 상태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언제나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통찰의 과정이라는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95 존재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세부적인 오류들 너머에 있으면서, 그 세대에 있어 식별될 수 있는 삶의 향상의 주요 원천이 되고 있는 그런 깊이의 본질적인 특성을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또 하나의 조건, 즉 ‘향상이란 것이 있다면‘이라는 조건이 첨가되어야 한다. 97 근대인들은 배경 속에 숨어 있으면서 우리의 보잘것없는 안정된 전통을 압도할 날을 기다리고 있는 거대한 선택지들에 대한 느낌을 상실해 버렸다. 문명이 살아남을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이해의 확대가 필요하다. 98 지성적인 것에 대한 우리의 경험에 늘 붙어 다니기도 하는 통찰의 느낌은 이해의 성장과 관계가 있다. 103

[ ] 이해: 언어는 직관을 따라가지 못한다. 철학의 난제는 자명한 것을 표현하는 일이다.우리의 이해는 낱말이 지니고 있는 일상적인 어법의 한계를 넘어선다. 철학은 시와 유사한 것이다. 철학은 시인의 생생한 암시에다 이에 어울리는 관용적인 어구를 찾아내어 부여하려는 노력이다.....이해는 자명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직관은 그 명석성에 있어 한계가 있다. 게다가 우리의 직관은 그 명석성에 있어 한계가 있다. 게다가 우리의 직관은 명멸하는 성격의 것이다.....명석성은 우리가 어렴풋이 인지한 주변 세계에 대한 불완전한 통찰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106, 107 질서가 혼란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라는 주장에는 어떠한 근거도 없다. 우리의 과제는 이 양자를 공히 용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우리의 통찰의 확대를 위한 통로를 시사해 줄 수 있는 그런 일반적인 개념을 창출해내는 데 있다. 109 철학이 딜레마의 어느 한쪽을 간단하게 처리해 버린다면 이는 그 자신의 과제를 회피하는 것이 된다. 우리는 결코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통찰력을 키워나갈 수는 있다. 110 우리는 현재 속에 있다. 현재는 항상 변하고 있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파생된다. 그리고 그것은 미래를 조건 짓고 있으며, 미래로 넘어가고 있다. 이것이 과정이다. 그리고 이것은 우주에 들어 있는 냉혹한 하나의 사실이다. 112 과정에 의해 우주는 유한자들의 여러 한계로부터 빠져나온다. 과정에서 무한자는 유한자 속에 내재하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모든 한계가 타파되고 모든 모순이 해소된다. 116

[ ] 이해: 우리의 인식은, 15차원의 공간적 관계를 포함하고 있는 사건들과의 본질적인 연관을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다면 왜곡될지도 모른다. 자연의 3차원을 그 유일의 중요한 차원적 측면으로 보는 독단적인 가정이 과거에는 유용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위험스런 것이 되어 가고 있다. 미래에 가서는 그것이 지식의 진보에 치명적인 장애가 될지도 모른다. 120 설정되어 있는 기존의 패턴 속으로 세부사실들을 끌어모으는 데에서 부분적으로 진보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어리석은 생각을 경외하는 독단적인 정신에서 이루어지는 안정된 진보이다. 그러나 역사는 개념적인 경험 속으로 새로운 패턴을 도입하는 또 다른 유형의 진보를 보여준다. 121 에피쿠로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같이 그들이 경험하는 다양한 요소들은, 정확히 그들이 이들을 이해하는 형식 그대로의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추상에 따르는 위험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123 사고의 역사는 활기찬 개시와 무기력한 종결의 비극적인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완결된 지식의 확실성에서는 통찰의 느낌이 사라져 버린다. 이때의 독단이야말로 학문의 적이다. 124 하나의 어떤 존재가 낳을 수 있는 특정 효과는, 그 밖의 어떤 존재에 의해서도 산출될 수 없다는 것이다. 125 부조화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들은 각기 논리적인 유형과 미적인 유형이라 명명될 수 있겠다. 126 미적인 경험은 자명성을 향유하는 또다른 한 가지 양태이다. 127 논리학과 미학의 차이는 관게하는 추상의 정도에 있다. 논리학은 고도의 추상에 주목하고, 미학은 이해력의 유한성에 따르는 불가피한 여건들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구체적인 것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따라서 논리학과 미학은 유한한 정신이 무한을 부분적으로 통찰하면서 부딪치게 되는 딜레마의 양극단에 있는 것이다.28 노리적 이해의 특징적인 태도는 세부사실에서 출발하여, 성취된 구성물로 나아간다는 데 있다. 논리적인 향유는 다자로부터 일자로 이행한다. 128 미적인 향유는 이와 정반대 방향으로 달린다. 우리는 건축물의 아름다움이나 그림이 주는 즐거움 또는 문장의 정교한 조화에 압도되는 수가 있다. 이때는 전체가 세부사실들에 선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우리는 식별의 단계로 나아간다. 순식간에 세부사실들이 총체적인 효과의 근거로서 우리에게 덮쳐 온다. 129 미적 경험은 보다 구체적이기 때문에 논리적인 경험보다 더 광범한 논제가 된다...논리학과 미학은 모두 폐쇄된 사실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우리의 삶은 개시의 경험 속에서 이루어진다. 개시에 대한 이런 느낌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영혼이라 불리는 기능 양태와 결별하게 된다. 130 우리는 사고할 때 살아 있다.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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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망(활동): 우리의 위험은, 어떤 한 군의 사건들 속에 연루되어 있는 우주에 대한 하나의 어떤 전망에 타당한 관념들을 취하고는, 전망에 있어 그와 일치하지 않는 다른 사건들에다 무비판적으로 적용하는 데에 있다. 140 개개인의 사사로운 생각을 용이하게 보존하기 위한 매체로서 문자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이 시기의 일이다. 그 이전까지 문자는 왕의 명령이나 정복자의 자기 과시를 기록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138 존재의 유형에 관한 가장 단순한 학설은 어떤 극단적인 유형이 그 밖의 다른 것들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한다는 것이다....이러한 학설을 받아들일 때, 이행의 요소를 그처럼 폐기처분하게 되는 결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한 형상들의 영역만을 주시하게 된다. 이 상상의 영역에는 추이나 증감이 존재하지 않는다. 142 완전성은 인간의 상상에 늘 붙어 다니는 관념이다. 그것은 무시될 수 없다. 그러나 형상들의 영역에다 단순하게 완전성을 부과하는 것은 정당성이 전혀 없는 짓거리이다. 진흙덩이의 형상이나 악의 형상 또는 그 밖의 다른 불완전한 것들의 형상들은 어쩌란 말인가? 형상들의 집에는 많은 방이 있는 것이다.....다섯이나 여섯과 같은 수적인 관념들은 이들을 예증할 수 있는 사물들의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형상들은 본질적으로 그들 밖에 있는 것들과 관계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넘어서는 것들과 어떠한 관계도 지니고 있지 않은 절대적 실재성을 형상들에다 부여하는 것은 환상적인 조치에 불과하다. 형상들의 영역은 가능태의 영역이며, 가능태라는 바로 이 관념은 외재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그것은 생존과 운동에 관련되어 있다....그것은 욕구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형상을 실현하고 있으면서도 형상을 훨씬 넘어서고 있는 현실태의 전개와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와 관련되어 있다...실재한다는 것은 자존한다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실재의 양태들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철학의 과제는 다양한 존재 유형들 간의 상호관련성을 밝히는 데 있다. 144-145

[ ] 전망: 경험의 영역에는 외부로부터의 파생에 대한 감각, 내부에서의 직접적 향유에 대한 감각, 그리고 외부로의 전달에 대한 감각이 있다. 이와 같은 향유의 복잡한 감각은 과거, 현재, 미래를 포함하고 있다. 149 인과적 효과성은 어떤 사물에 대한 느낌이 과거로부터의 계승으로 고스란히 정착되는 지각양태를 의미하며...단순한 느낌으로서의 물리적 지각 혹은 비감각적 지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현시적 직접성은 인과적 효과성으로부터 파생된, 명석 판명석을 동반하는 지각 양태를 의미하는데, 근대 인식론 철학에서 주목해온 경험 양태이다. 하지만 화이트헤드의 감각지각, 즉 현시적 직접성의 지각에 의해 경험된 세계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인과적 효과성으로부터 이끌어낸 파생적 추상물로서의 세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149 감각지각은 동물의 경험에 있어 추상화의 극치이다. 이러한 추상화는 선택적인 강조를 진척시켜가는 가운데 이로부터 발생한다. 그것은 인간의 삶에 세 가지 것을 선사한다. 즉, 정확성에의 접근, 외재적인 활동들의 질적인 분화에 대한 감각, 그리고 본질적인 연관에 대한 무시가 그것이다. 153 시각이나 청각과 같은 고등한 감각지각의 자료에만 주목하는 데에서 지난 200여 년 동안의 철학적 발전은 손상을 입어 왔다. 우리는 무엇을 인식하는가라는 물음이 우리는 무엇을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변형되어 버렸다. 154

[ ] 전망: 현실화의 모든 형식들은 유한의 어떤 측면들을 표현한다. 그러한 형식의 본성은 저것이 아닌 이것이라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그것은 배제를 표현한다. 그리고 배제는 유한을 의미한다. 161 순수한 명석성과 질서로부터의 초월이야말로 예견하지 못한 상황을 처리하는 데 있어, 그리고 진보와 자극을 가져오는 데에 있어 불가결한 요소인 것이다. 생명은 단순한 순응의 굴레에 얽매여 있을 때 퇴락한다. 모호하고 무질서한 경험의 요소를 구체화시키는 능력은 새로움으로의 전진에 본질적인 것이다. 162 서구의 철학사상사에서 최고의 실재란 변화를 떠나 있는 것이라는 전제와 결부되어 있었다. 불변하는 질서는 궁극적인 완전성으로 간주되었고, 그 결과 역사적 우주는 그 지위에 있어 단순한 현상이라는 관념을 낳았던 부분적인 실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경험이 지닌 가장 명백한 특성이 형이상학적 체게를 구축하는 데에 있어서는 부차적인 기능의 것으로 경시되어 왔다. 우리는 소란스런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전통 철학적 사상에 의해 세례를 받은 철학과 종교는 이러한 소란을 축출해 버린다. 소란의 축출은 갈 데까지 간 쇠락의 산물이다. 163 우리는 철학을 향해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즉, 철학은 여러 유형의 질서의 출현과 유형에서 유형으로 이행 및 우리의 경험 속에 자명하게 드러나는 것으로서의 우주 가운데 들어 있는 선과 악의 혼돈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수학은 그 당시 창조나 변천의 느낌과는 전혀 무관한 관념들에만 관여하고 있었다. 그리스의 수학은 오직 수와 기하학적 형상들만을 그 구성요소로 하고 있었다....그리스인들이 그 학문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변화라는 관념은 목전에서 사라졌다....비나 비율..이 형상들은 제작기 그 각각에 고유한 완전성을 구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것이 수학의 기본적인 개념들에 대한 그리스 사상의 반응이었다. 인간의 정신은 이와 같이 영원성을 일견하게 되자 이에 현혹되고 말았다. 이런 발견의 결과로 그리스 철학은 궁극적인 실재를, 무시간적으로 관게 맺고 있는 정태적인 존재들로 개념화시켜 이해하였다. 165 플라톤과 흄은 체계가 합리적인 사고 본질적인 요소가 된다는 점을 예증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폐쇄된 체계란 생동하는 이해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라는 점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생각을 설명하는 가운데 모든 체계를 초월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우리의 근원적인 통찰에는 명석성과 모호성이 뒤섞여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168

[ ] 전망: 우리는 어떻게 직접적으로 현존하고 있는 것들이 제각기 그 자신의 본질적인 요소로서, 선행하는 자신의 과거와 후속하는 미래를 필요로 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직접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 속에는 세 가지 요소, 즉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들어 있다. 170 구체적으로 실현된 역사적 사실의 특성 자체는 그것이 배제했던 가능태들과 다양한 유형의 관련을 맺고 있다. 현재의 사실 속에는 부분적으로 재생되고 부분적으로 배제되어 버린 과거의 다양한 특성들이 들어 있으며, 부분적으로 공유되고 부분적으로 배제되는, 현재 속에 공존하고 있는 여러 특성들이 들어 있다. 또한 그 속에는 부분적으로 예비되고 부분적으로 배제되는, 미래의 여러 가능성들이 있다. 171

[ ] 전망: 우리의 경험을 특징짓고 있는 네 가지 주요 양태; 미적 경험에는 세 가지의 주요 측면이 있는데 천재에 대한 감각, 개시의 감각, 좌절의 감각이 그것이다. 우리는 또한 사태의 세 가지 측면을 확보하게 되는데, 통일성에 대한 경험, 다수성에 대한 경험, 이행에 대한 경험이 그것이다. 우리는 분할의 세 가지 기본적인 근거, 즉 명석성과 모호성, 질서와 무질서, 선과 악을 식별한다. 마지막으로 창조적 과정 속에는 두 가지 궁극적인 존재 유형이 함축되어 있다. 하나는 잠재적인 욕구 속에 들어 있을 수도 있고 실현된 사실 속에 들어 있을 수도 있는 이중적 존재성을 지닌 영원한 형식들이고, 다른 하나는 현재 사실 속에 들어 있는 과거의 사실로서 존재할 수도 있고 직접적인 현재 사실로서 존재할 수 있는 이중적 존재방식을 지신 실현된 사실이다. 또한 현재의 직접태는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를 향한 욕구를 간직하고 있다. 사상가가 이들 네 가지 경험의 양태들을 취급하는 방식은 철학의 형태를 결정짓는 동시에 실천적인 삶에 미치는 사고의 영향력을 결정짓는다. 172


볕뉘

경험의 방울이라는 표현은 윌리엄제임스의 표현이다. 좌표상의 고정점으로 보는 기존 철학의 관행은 모든 것을 멈추어 서있는 것으로 보려한다. 그래서 그 관점은 관찰자의 시선이자 시간의 사유를 발견할 수 없다. 화이트헤드는 기존철학이 시간을 넣지 않았고, 뒷장에 이어지는 생명과 운동마저 발라낸 건조한 철학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그가 빌려낸 시간이란 생명을 불어넣는 표현이 경험만이 아니라 경험의 방울이다. 아픔이기도 해서 경험의 눈물이라고 쓸까도 싶어진다. 역동하는 상태로 모든 것을 보고 사유하는 것. 파도의 흐름을 타고 유유히 향유해보는 것. 사유의 흐름을 닫지 않고 열어두는 것. 말미 그는 이 사고의 양태의 출발점으로서 경험을 총괄하여 분류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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