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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 일본인이 밝히는 한국 호랑이 멸종의 진실
엔도 키미오 지음, 이은옥 옮김 / 이담북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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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40(1907) 1,2월 무렵이었다. 한 마리의 호랑이를 짊어진 조선인들이 목포로와서 살 사람을 찾고 있었다. 이리에[入江] 운송점 사장이 호랑이를 살 생각으로 교섭과 상담을 해 드디어 구매를 결정했다. 그 기념으로 모두들 기념촬영을 하려고 하자, 경찰이 오더니 잠깐 기다리라고,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고 하며 기념촬영이 중단되었다. 전화상으로 무슨 일인가 이유를 물어보자

이 호랑이는 명찰 불갑사로 이름 높은 영광군의 불갑산에서, 그곳에 살고 있는 농민들이 덫으로 잡은 것이나, 화약 사용의 혐의가 있다. 따라서 잡은 본인들의 자유처분에 맡길 수 없으니 아무쪼록 영광경찰서로 반송해 주길 바라는 바이다.”

<중략> 그래서 수차례 회의를 한 끝에 드디어 경매의 수속을 마쳤다. 개표해 보니 그 여행객은 백 원에 입찰을, 목포부의 모 씨가 200원에 입찰하고 있어서 일단 목포에서 호랑이가 유출되는 것약 200원으로 박제를 의뢰해 지금의 소학교의 일실에 위풍당당하게 놓이게 되었다. 이 호랑이는 포획 이후 여러 시간이 흘러 부패의 우려도 있고 영광으로 보내는 시간이 없어서 소학교로 기증하자는 임기 조치로서 마츠이 서장이 목포에서 처분한 것이었다. 과연 맹호 한 마리이다. 쓰러져서도 좀처럼 극락왕생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목포부사> 쇼와 5(1930)여담일속중에서- 

 

 

▲목포유달초등학교에 박제 형태로 보관되어 있는 유일한 한국 호랑이. 사진>뉴시스 

 

 

국내에 남아있는 유일한 한국 호랑이에 관한 기록이다. 현재 유일한 한국 호랑이는 목포 유달초등학교에 박제 형태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 문헌이 발견되기 전까지 구전으로만 전해졌을 뿐 유일한 한국 호랑이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없는 상태였다. 구전이다보니 전하는 사람에 따라 포획 시기와 기증 연도 등이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고, 당시 상황과 관련된 한국인은 한국인대로 또 일본인은 일본인대로 각자의 시각에서 기억하다 보니 유일한 한국 호랑이에 대한 통일된 정보가 없다시피 했다.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이 책이 출간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유일한 한국 호랑이는 박제 형태로 목포유달초등학교에 보관되어 있고

마지막 한국 호랑이는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잡혔다 

 

 

▲엔도 키미오의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 

 

 

유일한 한국 호랑이와 마지막 한국 호랑이에 관한 정확한 기록과 한국 호랑이 멸종의 진실을 밝힌 책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의 저자는 일본인 엔도 키미오다. 그는 한국 유력지의 오보만을 믿고 무작정 한국을 방문한 뒤 몇 년에 걸쳐 한국 호랑이 관계자와 자료를 뒤져 르포 형식의 이 책을 출간했다. 그가 한국 호랑이를 취재하면서 내린 결론은 현재 한국에는 최소한 남한에는 한국 호랑이가 없다는 것이다. 대신 유일한 한국 호랑이가 박제 형태로나마 목포 유달초등학교에 남아 있다는 것과 마지막 한국 호랑이가 경주 대덕산에서 잡혔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일한 한국 호랑이와 마지막 한국 호랑이에 관해 체계적으로 정리된 자료가 없었다. 엔도 키미오에 의해 한국 호랑이에 관한 역사가 비로소 정리된 것이다.

 

엔도 키미오는 목포유달초등학교에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한국 호랑이의 정확한 포획 시기를 밝히기 위해 목포와 서울, 일본을 오가며 자료를 수집했다. 책이 마치 목포 근대사처럼 보이는 것도 그만큼 당시 포획되어 박제 형태로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한국 호랑이에 관한 자료가 부실하다는 반증이었다. 엔도 키미오는 닥치는 대로 목포 개항 초기의 자료를 수집했다. 급기야 목포시립도서관(개항 당시 일본 영사관 자리)에서 1930년에 씌여진 <목포부사>라는 책을 찾아내고 그 안에 유일한 한국 호랑이에 관한 자료가 있음을 확인했다. <목포부사>에 따르면 유일한 한국 호랑이가 포획되어 박제 형태로 보존된 시기는 기존에 알려진 1911년이 아니라 1907년이었다. 1907년 영광 불갑사에서 잡혀 히라구치 쇼지로라는 일본인이 경매를 통해 산 뒤 박제해서 1908년 당시 일본인 학교였던 목포유달초등학교에 기증한 것이었다.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잡힌 마지막 한국 호랑이.  

 

 

엔도 키미오가 밝혀낸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1921년 경주 대덕산에서 잡힌 마지막 한국 호랑이의 포획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재연해 냈다. 그는 서울대 도서관에서 총독부 발행 국어 독본(일제 당시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대덕산 호랑이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내고 당시 실제 상황과 많이 다르게 기술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대덕산 호랑이의 공격을 받았다는 김유근 할아버지를 비롯해 생존해 있는 관련자들을 직접 취재한 결과 당시 총독부 발행 교과서에 실린 대덕산 호랑이 이야기는 일젝 호랑이 포획을 이용해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강요한 소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국 호랑이의 멸종은 일제의 해수구제정책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한국 호랑이는 왜 멸종했을까? 엔도 키미오는 목포유달초등학교에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한국 호랑이와 경주 대덕산에서 잡혔다는 마지막 한국 호랑이를 취재하는 과정에서 들은 증언과 직접 찾아낸 고문서를 통해 일제의 해수구제정책이 한국 호랑이를 멸종시켰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가 찾아낸 문서는 <조선휘보>와 월간지 『조선』1926 1월호에 실린 호랑이와 조선이었다 

 

 

▲목포 다다미상 하라구치 쇼지로씨가 구입한  호랑이 가죽. 1914년

 

 

일제는 1910~1920년대를 걸쳐 주민이나 가축에게 피해를 주는 호랑이, 표범, , 늑대 등의 해수(해로운 짐승)’을 구제하는 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총독부가 발행한 <조선휘보>에 따르면 호랑이로 인해 죽은 사람이 1915 8, 1916년에는 4명이었다. 가축 피해는 이보다 많은 각각 565마리, 576마리였다. 특히 늑대 피해로는 1915년에는 113명이 사망했고, 1916년에는 54명이 사망했다. 일제는 피해 신고를 받으면 주민들을 몰이꾼으로 동원해 야생동물들을 닥치는 대로 포획하거나 사살하기 시작했다 

 

 

▲민화 속 호랑이. 사진>서울신문 

 

 

일제는 1915년과 1916년에 걸쳐 24마리의 호랑이를 포획했다. 또 월간지 『조선』1월호 호랑이와 조선에는 1919년과 1924년 사이에 호랑이가 33마리, 표범이 88마리나 포획된 것으로 실려있다. 이후에도 호랑이 구제 수는 1934 1마리, 1937 3마리, 1938 1마리, 1940 1마리 등 급격히 호랑이 개체수가 줄어들고 있었다. 특히 1933년 이후에는 북한 지역으로 이 당시에 이미 남한 지역에는 호랑이가 멸종됐을 수도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하지만 1940년대까지도 남한 지역에서 해수 피해가 있었던 것으로 볼 때 그 때까지도 한국 호랑이가 남아 있었을 수도 있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호랑이 피해가 잦아서 대대적인 호랑이 포획정책이 있어왔다. 일제의 해수구제정책이 아니었더라도 한국 호랑이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기도 하다. 

 

호랑이는 우리나라 민담이나 민화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한국을 대표하는 맹수다. 또 지역에 따라서는 호랑이가 신성시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호랑이 멸종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유일한 한국 호랑이와 마지막 한국 호랑이에 관한 진실이 한 일본인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한국 호랑이의 흔적은 극동 러시아에 있는 아무르 호랑이에게서 찾을 수 밖에 없다고 한다. 한국 호랑이 멸종의 진실을 일본인이 밝혀냈다면 어딘가에 살아있을 한국 호랑이 보호와 보존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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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의 세계사
사토 요우이치로 지음, 김치영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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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먹는 밥. 하지만 밥의 주재료인 쌀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쌀이 벼의 씨라는 것쯤은 벼를 본 적이 없는 도시인들도 다 아는 상식이다. 그러나 언제부터 벼를 재배하기 시작했으며, 벼에는 어떤 종류가 있으며, 각 나라의 쌀에는 어떤 차이가 있으며,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원인이 무엇인지는 벼를 재배하고 있는 사람들조차 낯선 정보들이다. 일본의 농학박사이자 총합지구환경학연구소 교수인 사토 요우이치로가 쓴 <쌀의 세계사>는 이런 쌀에 관한 궁금증을 속 시원히 해결해 준다.

 

사토 교수에 따르면 벼의 씨인 쌀은 분류학상으로 벼과의 대나무아과 벼속에 속한다. 세계 공통의 학명은 오리자(Oryza). 쌀이 중요한 이유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영양소인 당질을 공급해 주기 때문이다. 당질은 단백질, 지방질 등과 함께 체외로부터 섭취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필수영양소다. 특히 당질은 식물만 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있어 곡물 재배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쌀은 옥수수, 밀과 함께 세계 3대 곡물이다. 그러나 옥수수가 주로 사료용으로 쓰인다는 점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쌀과 밀이 식량으로서의 세계 곡물 시장을 양분하고 있는 셈이다 

 

 

곡물이라고 불리는 식물들은 모두 재배식물이다. 벼도 마찬가지로 야생벼의 탄생은 수억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재배벼에서 비롯된 오리자 사티바 즉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쌀은 1만 년 전 중국 장강 유역에서 탄생했다. 한편 벼 품종은 1920년대 세계 각지의 쌀을 처음으로 본 일본 큐슈대학의 카토 시게모토 교수의 분류법에 따라 재배벼를 일본형인 자포니카와 인도형인 인디카로 구분해 왔다. 즉 벼를 야생벼와 재배벼가 나눈 다음 재배벼를 다시 인디카와 자포니카로 나눈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자연과학의 발달로 최근에는 이런 분류보다는 벼를 인디카형과 자포니카형으로 나누고 각각을 야생형과 재배형으로 나누는 분류법이 더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위에서 말한 오리자 사티바는 자포니카를 말한다. 반면 인도 등 남아시아의 벼인 인디카는 중국에서 탄생한 자포니카가 아시아 일대로 옮겨져 야생종과의 교배를 통해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전세계 쌀의 90%는 인디카다. 자포니카는 한국과 일본, 중국,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만 재배되고 있다.

 

간단하게 쌀의 역사와 종류를 살펴 보았지만 벼가 재배되는 지역의 풍토에 따라 쌀과 쌀로 만든 요리도 저마다의 특징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각국을 대표하는 쌀 요리를 통해 쌀의 역사와 세계사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카오팟쿤

카오팟은 태국의 볶음밥이다. 태국의 국민요리라고 할 수 있을만큼 대중적인 음식이다. 카오팟은 쌀 볶음에 무엇을 넣느냐에 따라 카오팟쿤(새우 볶음밥), 카오팟무(돼지고기 볶음밥), 카오팟카이(닭고기 볶음밥)라고 부른다 

 

 

이 지역은 열대몬순 기후로 강수량이 많을 뿐더러 홍수도 잦은 지역이다. 일반적으로 벼는 물에 약한 것으로 알려졌다. 벼농사에 꼭 물이 필요하지만 벼가 물에 잠기면 바로 죽어버린다. 그래서 이 지역에는 홍수를 잘 견뎌낼 수 있는 뜬벼라는 품종이 있다. 몸의 대부분이 물에 잠기면 그것을 감지하여 줄기를 자라게 하는 품종이다. 특히 뜬벼 지대의 벼농사에는 물이 많기 때문에 물고기나 오리 등을 흔히 볼 수 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확산되고 있는 친환경 생태 농업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볶음밥이 발달한 이유는 뜬벼 지대에서 생산되는 쌀이 찰기가 없고 퍼석퍼석하기 때문이다.

 

카오람

태국 북쪽에 있는 라오스는 화전이 발달해 있다. 라오스나 태국의 화전에서 재배하는 벼는 찹쌀이다. 즉 라오스를 중심으로 인도네시아 반도 중앙부, 버마, 중국 운남성에서 귀주성에 걸친 지역을 찹쌀 문화권으로 구분한다

 

 

화전지대 사람들이 먹는 찹쌀은 점성이 약한 멥쌀과 달리 점성이 강해 밥을 하면 찰진 것이 특징이다. 쌀의 점성은 아밀로스와 아밀로텍틴이라는 전분의 차이인데 당의 분자가 나선형으로 연결된 코일형 구조인 아밀로스의 함량이 높을수록 퍼석퍼석한 식감의 쌀이 된다. 멥쌀의 아밀로스 비율이 15~30%인 반면 찹쌀은 아밀로스 함량이 0이다. 라오스의 대나무통 찹쌀밥인 카오람은 찹쌀과 물, 바나나, 설탕, 코코넛 밀크 등을 대나무통에 넣고 구워서 먹는데 찰지기 때문에 대나무통을 손으로 뜯으면 대나무통 모양의 밥이 완성된다.

 

한편 한국이나 일본 등 온대몬순 지역의 벼재배 중 특이한 점은 수전을 이용해 논두렁에대두를 심는다는 것이다. 대두를 심는 이유는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단백질을 얻기 위해서다. 일반적으로 단백질은 동물성에서 주로 얻지만 식물 중에서도 높은 단백질 식품이 몇 가지 있는데 온대몬순 지역의 대두가 대표적이다. 특히 온대몬순 지역에서는 쌀을 으깨서 먹는 떡 문화와 곡주 문화가 발달해 있다.

 

필라프

쌀 문화가 중국이나 한국, 일본, 동남아시아, 인도 등 몬순 아시아 지역에서만 발달한 것은 아니다.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추상의 길인 실크로드 유역에도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벼농사가 행해졌다. 하지만 현재는 의미 있는 수준의 양은 아니다. 다만 중앙 아시아의 경우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한 이유 때문인지 쌀 요리를 꽤 볼 수 있다 

 

 

특히 우즈베키스탄에는 필라프라는 쌀 요리가 있는데 푹 삶은 양고기에 쌀을 넣은 다음토막 낸 당근을 올리고 뜸을 들여 만든다. 필라프에 사용되는 쌀도 자포니카 벼로 어느 정도 점성이 있어 아주 퍼석퍼석한 수준은 아니다.  

 

지금까지는 살펴본 지역은 대부분 아시아 지역으로 이 지역에서 벼를 재배하기 시작했고수천 년 동안 벼재배 문화권을 형성하고 살았으니 쌀 문화가 발달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서양에도 쌀 문화가 있을까? 물론 있다. 그렇지만 어떻게 동양에서 서양으로 쌀이 전해졌는지 밝히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작물 도래 경로를 밝히기 위해 고고학적 방법과 유전학적 방법 등이 동원되기는 하지만 사실 도래의 경로가 단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진실에 접근하기란 쉽지 않다. 물론 커피처럼 단 한 번의 도래가 그 땅을 그 작물로 대산지로 만든 케이스도 있다. 커피의 대산지인 브라질은 애초에 수천 개의 씨와 수십 그루가 단 한 번의 도항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또 같은 것이 다른 곳에서 반복적으로 운반된 것도 있다. 다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여러 번에 걸쳐 같은 것을 운반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저자는 중국에서 시작된 벼재배가 일본열도나 서양으로 전해진 것도 이런 케이스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파엘라

유럽의 벼산지는 지중해 연안으로 국한된다. 특히 유럽의 가장 큰 산지인 이탈리아 포 강 유역의 롬바르디아 평원은 최소한 15세기부터 벼가 재배된 것으로 추측된다. 프랑스에서도 벼가 재배되긴 하지만 지중해 연안에서만이다  

 

 

어쨌든 소규모이긴 하지만 유럽에서도 벼를 재배하고 있다. 그렇다면 쌀 요리도 분명 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유럽의 쌀 요리는 리소토라는 이탈리아 요리일 것이다. 당근 등을 올리브유로 볶은 것에 쌀을 넣어 한 번 더 볶은 후 수프를 첨가하여 익힌 조림요리다. 이탈리아에서 개량된 알보리오라는 품종의 쌀을 사용한다. 또 빼놓을 수 없는 유럽의 쌀 요리가 바로 파엘라이다. 야채와 고기, 어패류를 올리브유로 볶은 것에 쌀을 넣고 잘 익힌 후 프라이팬째 오븐 등에 넣어 익힌 요리이다. 파엘라는 스페인 남부의 요리이지만 이슬람 문화권에서 전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의 쌀 요리에 사용되는 쌀은 모두 열대 자포니카에 속한 쌀들이다.

 

캘리포니아 롤

벼재배 지역 중 가장 특이한 곳이 미국일 것이다. 미국의 역사만큼이나 미국의 쌀 역사도 오래되지 않아서 기껏해야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정도다. 본격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이후다. 원래 벼농사가 없었던 미국이 세계적인 벼재배지이자 쌀 수출국이 된 데는 아시아의 이민자들을 대거 받아들인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풍토 또한 건조하고 여름에는 햇볕이 강해 물만 있다면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캘리포니아가 세계적인 벼농사 지대가 된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벼 도래에 관해서 미국판 문익점일화가 있다.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 볍씨 몇 개를 몰래 호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귀국했다. 그는 파리의 시장에서 이탈리아의 쌀이 미국의 쌀보다 왜 비싸게 팔리는지 계속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탈리아 쌀을 본보기로 미국의 쌀 품종개량을 계획했던 것이다. 지금이야 이런 행동을 한다면 국제법 저촉이 될 수도 있지만 어쨌든 당시에는 그런 일화도 있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쌀 요리는 마키스시라는 캘리포니아 롤이다. 하지만 마키스시와 달리 캘리포니아 롤은 먼저 가운데에 밥과 삶은 게살이 들어있고 바깥쪽을 김으로 말고 다시 그 바깥쪽을 아보카도나 붕장어 등으로 마는 것이 특징이다. 아무래도 아시아 이민자들이 많다 보니 일본 스시를 모방해 새로운 쌀 요리로 진화한 것이다.

 

한국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는 말이 있다. 쌀이 주식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는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식생활의 서구화가 진행됨에 따라 매년 쌀 소비는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쌀 재고가 쌓이고 있다. 게다가 남북관계도 경색 국면이 지속되면서 쌀 재고 문제를 해결할 대책이 보이지 않는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해마다 쌀 관세화 유예 조건으로 수십만 톤의 쌀을 수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우리 농촌은 쌀값 폭락으로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

 

특히 1995년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에서부터 인정 받았던 쌀 관세화 유예 조치가 올해 말로 종료된다. 쌀 시장 개방이 눈 앞으로 다가왔지만 그 동안 정부는 국내 농업을 살리기 위한 제대로 된 대책 하나 내놓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국회의 사전 동의나 농민과의 협의 없이 쌀시장 개방을 강행하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다. 쌀 시장 개방(쌀 관세화)가 피할 수 없는 대세하고는 하지만 우리나라 식량 자급률이 22%밖에 되지 않는 상황에서 쌀 시장 개방은 식량주권의 붕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농민단체들은 개방하더라도 고율의 관세(전국농민회총연맹 510%,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 400% 이상 주장)를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부는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쌀 시장 개방을 공식 선언하겠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정부가 농민단체가 국회와의 협의 없이 쌀 시장 개방을 공식 선언한다면 그 후에 벌어질 혼란과 국내농업 붕괴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책임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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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 15소녀 표류기 1
최현숙 지음 / 이매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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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번의 선거를 특징짓는 키워드를 꼽으라면 단연 세대간 갈등일 것이다. 한국 현대사를 지배했던 3(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퇴장 이후 선거 때마다 반복되던 지역적 투표행태는 괄목할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조금씩 옅어지고 있지만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온 세대별 투표행태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견고해지고 집요해지고 있다. 당장 6.4지방선거를 앞두고 쏟아지는 여론조사만 봐도 이런 흐름은 각종 이슈를 덮고도 남을 만큼 위력적임을 알 수 있다. 지역적 투표행태도 그랬지만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세대별 투표행태의 고착화도 여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투표 형태 즉 저소득층과 소외계층은 진보를, 고소득층과 기득권 계층은 보수를 지지하는 일반적인 상식을 무너뜨리고 있다. 이런 결과는 노인 인구의 급증과도 무관하지 않다.

 

빠르게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은 전체 노인 인구의 50%에 육박해 OECD 국가 중 압도적인 1위로 알려졌다. 하지만 노인 세대의 투표는 복지나 분배를 강조한 진보보다는 경쟁과 성장을 기치로 내건 보수 쪽으로의 쏠림 현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심지어 박근혜 정부의 복지 공약 폐기에도 불구하고 노인 세대의 보수 쏠림 현상은 더욱 심화되고 있고 노인 세대의 일방적인 지지는 박근혜 정부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아이러니한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나이를 먹을수록 안정을 추구한다고는 하지만 그들 앞에 놓인 현실에 비해 지나친 쏠림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이런 비상식적인 투표 행태가 세대간 갈등을 부추기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 세대는 기성 세대를 향해 '세금만 축내는 노인들'이라고 비아냥 거리고, 노인 세대는 젊은이들을 '세상 물정 모르는 치기 어린 것들'로 맞받아친다. 어느덧 세대간 갈등과 반목의 치유는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가장 큰 난제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세대간 갈등의 치유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노동당 소속 정치인이기도 한 최현숙의 책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에서 희미하나마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길이 보인다.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는 이매진 출판사에서 기획하고 있는 ‘15소녀 표류기의 첫 번째 책이다.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흔해빠진 할머니들의 흔해빠진 이야기. 그래서 저자는 세 여성 노인의 생애사는 사실 관계와 객관성을 시비할 수 있는 구술사口述史라기보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인지와 기억이 왜곡될 가능성이 전제된 구술사口述辭라고 완곡하게 표현하지만 세 노인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독자에 따라 구술사口述史일 수도 있고, 구술사口述辭일 수도 있지만 빈 수레처럼 요란하기만 한 우리사회의 소통에 대해 소통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우리네 어머니이고, 할머니인 세 여성 노인의 살아온 이야기는 사실 새로울 것이 없다.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세대는 노인 세대의 사고와 선택에 대해 꼰대들의 그것으로 치부하기 일쑤다. ? 그 동안 들어왔던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는 그저 흘러간 대중가요처럼 무의미하게 기억 속에서 잊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흘러간 대중가요에 불과했던 노인들의 이야기를 작정하고 다시 끄집어 낸다. 그것도 저자는 들어주기만 하는 아주 일방적인 소통으로 말이다. 어쩌면 그 동안 우리는 노인 세대가 젊은 세대의 생각만 이해해 달라고 강요하고 우리의 이야기만 들어달라고 앙탈을 부렸는지도 모른다. 정치적으로 아니 요즘 현실을 감안할 때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세 여성 노인과 진보 정치인의 소통이 새삼 감동스러운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은 아닐까?

 

책에 등장하는 세 여성 노인의 이름은 김미숙(89), 김복례(87), 안완철(81)이다. 안완철 노인은 저자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에서부터 한국전쟁, 산업화와 군부독재 시대를 거쳐 민주정부에 이르기까지 질곡 많은 한국 현대사의 산 증인이다.

 

그때 여자들 스무 살까지 시집을 안가면 ‘덴시따이’라구, 그래 그 정신대. 그거에 뽑혀나가니까 허겁지겁 시집들을 보낸 거야. 나도 곧 그 나이가 되는 거지. 그래서 덴시따이 뽑혀갈까봐 겁이 나 가지고, 허겁지겁 시집을 보낸 거야. 열여덟 때야. 아무리 급해도 혼인이니까 골라서 간다고 간 게, 시골로 갔어. 평양서 오십 리 정도 들어가는 시골이야. 외아들에 시어미만 있는 간단한 집으로, 골라 골라 보낸 거지. 내가 성격이 좀 쎄고 안 차분하니깐, 시집살이 안 할 거 같은 편한 집으로 고른 거지.-<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 중에서-

 

혼란한 시기에 여성과 아동은 어쩔 수 없이 사회적 약자가 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삼종지도를 강요당했던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성이 받았던 사회적 차별은 삶 자체가 투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극히 또 일방적으로 보수적인 그들의 선택을 두고 말이 많지만 사실 그들이 살아온 길은 어느 진보 정치인보다 더 치열했고 극적이었다.

 

댄스홀 나가면서랑 미군들이랑 살면서, 애를 수도 없이 떼었어. 낳은 적은 없어. 생긴 거 같으면 병원 가서 진찰해서 떼구, 떼구 그랬지. 하나 있는 아들 키우기도 그렇게 힘든데, 아닌 말로 내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어떻게 애를 또 낳냐구? 더구나 혼혈아를. 살림하는 미군한테 말도 안 하고 혼자 가서 뗐어. 하긴 결혼할 작정한 그 싸진하고는 애를 낳을 생각을 했어. 근데 그 사람이 원래 자식이 둘 있어서 그런가, 좀 피하더라구. 같이 산 게 길지 않아서 그런가, 안 생겼어. 뱃속에서 죽은 것들한테야 그것도 생명인데 생각하면 불쌍하다 싶지만, 길게 보면 안 낳는 게 훨씬 나은 거지. 난 좀, 거기 여자들로는 나이가 든 축이었거든.-<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 중에서-

 

진보의 본질이 일상과의 끊임없는 투쟁이 아닐까? 제목 천당허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는 저자의 어머니이기도 한 안완철 노인이 남부럽지 않았던 어린 시절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겪어야 했던 여성으로서의 차별과 가장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남편 대신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집 장사에서부터 사채 놀이까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야만 했던 기막힌 인생사를 한탄하며 하는 말이다. ‘칭하가 정확히 방언인지 아니면 외래어인지 잘 모르겠지만 차이쯤으로 해석이 가능하지 싶다. 사회적 약자였던 세 여성 노인에게 인생은 그야말로 천당과 지옥을 오간 굴곡진 삶 그 자체였을 것이다.

 

밥이 진보다

 

그렇다면 저자는 흔해빠진 노인들의 흔해빠진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얼마 전 TV에 출연한 여론 전문가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의 지지율은 심각한 실정을 하지 않는 이상 40% 아래로는 떨어지지 않을 것으로 분석했다. 그 이유는 노인 세대의 지지율이 확고하기 때문이다. 또 그 배경에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가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박정희 향수’. 그것은 바로 가난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는 믿음이다. 젊은 세대는 박정희 향수를 독재 시대의 유물로 치부하지만 평생 헐벗고 굶주린 일상을 경험했던 노인 세대에게는 분명 다른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고 노인 세대가 박정희가 정권 연장을 위해 저질렀던 수많은 악행들을 모르는 바도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인 세대의 박정희 향수속에서 진보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봤다면 정치의 자도 모르는 일개 독자의 지나친 상상이고 억측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밥이 진보라는 엄중하고 엄연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10년의 진보정권(일반적으로 진보정권이라 부르지만 필자는 민주정부였을 뿐 진보정부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일반적인 평가에 의하면)에서 인권이 개선되고 사회 시스템이 민주적으로 바뀌는 등 정치적으로는 적지 않은 성과를 낸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정치는 정치일 뿐. 개인들의 삶이 나아졌나를 따지고 들면 진보정부였다는 사실이 무색해진다. 또 요즘 박근혜 정부의 과거로의 회귀를 두고 국민들이 분노할 줄 모른다며 자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진보의 위기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석기 사태와 새로운 통합 신당 출현이 눈앞에 다가오면서 그 흔한 야권연대에서도 진보 정당은 찬밥 신세다. 이제 진보 정치가 살 길은 하나다. 정치적인 구호보다는 국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분노할 줄 모르는 게 아니라 먹고 사느라 분노할 기력이 없는 것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행복해지는가는 개인적이며 정치적인 질문이다. 진보 정치를 합네 하며 계급차별을 강령에 넣고 온갖 회견문과 피켓과 말로 선언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고, 그런 사람들과 만나지도 않았다. 아마 진보 정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말하기보다 듣기를 더 많이 해야 하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와 느낌과 욕망을 상세하게 들어야 할 것이다.-<천당과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 중에서-

 

진보 정치인이기도 한 저자의 자기 고백이자 요양 노동을 통해 깨달은 진보 정치가 걸어야 할 미래의 모습이기도 하다. 저자는 책을 통해서 세대간 갈등의 치유는 진정성 있는 세대간 소통으로부터, 진보 정치는 세 여성 노인들의 삶처럼 소외된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에둘러 강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젊은 시절 미군 부대 근처에서 어찌어찌 일했던 김미숙 할머니가 과거를 회개하라는 목사인 아들 부부에 대한 넋두리는 그들의 이야기는 들어주지 않고 꼰대취급만 하는 젊은 세대에게 보내는 분노의 절규처럼 들린다.

 

다른 회개래면 할 거 많아두, 난 그 회개는 안 나와. 나도 예수 믿지만, 난 그런 게 별루 죄라고 생각이 안 돼. 여자 혼자 벌어먹고 사느라 한 일인데, 내가 도둑질을 했어 살인을 했어? 그리고 그렇게 임신된 거를 다 낳았어 봐. 그걸 누가 책임지고 키울 거야? 거기서도 미군이랑 살림하던 여자들은 많이들 낳았어. 남자 붙잡아놓을래니까, 남자가 낳자 그러면 낳는 거지. 그러다가 백이믄 아흔 다섯은 남자 혼자 미국 들어가든가, 안 나타나든가 하구, 그 새끼는 여자 혼자 책임이 되는 거야. 그렇게 혼혈아 낳아서 많이들 결국에는 미국으로 입양 보내고 하는 거지. 붙들고 키운 사람들 보면, 어린 것들이 손가락질당해서 학교도 못 가고 직장도 못 다니고, 그러드라고. 나 하나로 끝나면 될 걸 왜 애까지 않아서 그 설움을 또 만드냐구? 그걸 회개하라니 말이 돼?-<천당하고 지옥이 그만큼 칭하가 날라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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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마지막 표범
엔도 키미오 지음, 이은옥 외 옮김 / 이담북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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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비탈진 마당과 기울어진 듯한 기와지붕의 작은 집. 돌을 쌓아 점토로 굳힌 허리 높이의 토대가 집을 받치고 있었다. 마당에서 보이는 격자문의 창호지는 찢어져 있고, 구멍 난 흙벽은 감색 종이로 막아 붙여 놓았다. 집 측면에 위치한 아궁이 입구는 온돌에 불을 지피는 곳이라 검게 그을려 있었다. 호랑이와 표범이 부부라고 믿고 있었던 순박한 부부가 이 가난한 산골 집의 주인이었다. 남편인 홍갑씨는 젊었을 적부터 사냥을 즐겼는데 총은 사용하지 않고 철사를 말아서 만든 올무만으로 노루나 멧돼지, 꿩 등을 잡았다. 그 해 겨울도 홍갑씨는 올무를 설치해 놓은 뒷산에 올랐다.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홍갑씨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돌아와서는 소리쳤다.

, , 호랑이가…… 올무에 걸려 날뛰고 있어!”

마침 집에 있었던 아들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아버지가 말한 곳으로 갔다. 호랑이는 허리가 올무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드럼통으로 우리를 만들어 호랑이를 집어넣고 마을로 내려왔다. 잡아 온 호랑이는 아흐레 동안 드럼통 안에서 집토끼를 먹이로 주며 키웠는데 엄청난 식욕 때문에 시장에서 돼지고기나 소고기까지 사와 챙겨주어야만 했다. 이 날 이후로 마을 사람들은 바람 소리만 들어도 호랑이가 아닐까 겁을 먹었다고 한다.

 

울던 아이가 호랑이보다 곶감을 더 무서워했다는 시절의 이야기가 아니다. 불과 52년 전겨울 소백산맥의 작은 오지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다. 마을 사람들이 호랑이라고 믿었던 맹수는 다름아닌 표범이었다. 1962 212, 경상남도 합천군 묘산면 산제리 가야마을 오도산(해발 1,134m)에서 황홍갑씨와 마을 사람들이 잡은 표범은 서울 창경원(현 서울 동물원)으로 옮겨져 12년간 사육되었다. 이 후 더 이상 표범이 발견되지 않아 오도산 표범은 한국의 마지막 표범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TV 동물의 왕국에서나 볼 수 있었던 표범. 그런 표범이 한국에도 살았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대중에게 알린 사람은 안타깝지만 일본의 동물문학 작가 엔도 키미오다. 2010 <한국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를 통해 한국 호랑이가 일제의 해수구제정책에 의해 멸종됐다는 사실을 밝혀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엔도 키미오는 이 저서에서 『조선총독부 통계연표』를 인용해 일본이 조선을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1919년부터 1942년까지 호랑이와 표범 등을 해수(害獸,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짐승)로 지정하고 관청과 마을 사람들을 동원해 죽여 없앴다고 폭로한 바 있다. 이 기간 동안 호랑이는 97마리, 표범은 무려 624마리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은 사람들의 기억 저 편으로 사라진 한국 표범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안도 키미오가 <한국의 마지막 표범>에서 묘사한 한국 표범은 고양이과 동물 특유의 신비스러운 빛을 띠고 있다고 한다.

 

조선의 표범은 열대지방의 표범에 비해 훨씬 덩치가 크고 털이 많았다. 넓은 이마와 조금 작아 보이는 귀, 두꺼운 입술에 은빛의 수염을 갖고 있었으며, 앞발은 크고 다부졌다. 전체적으로 담황빛을 띠는 가운데, 가슴 부분은 희고 머리에서 등까지 짙은 갈색이 퍼져있다. 그 위에 표범 무늬가 드러나는데 특히 등과 몸 옆쪽에는 커다란 매화 무늬가 있었다. -<한국의 마지막 표범> 중에서-

 

책에서는 한국 표범의 존재에 관한 또 다른 중요한 사실들을 보여주고 있다. 오도산 표범이 잡히고 2~3년 후 이리시(현 익산시)에 있는 교회 목사가 젊은 암컷 표범이 필요하자 않냐며 서울 창경원에 연락이 왔다. 동물원 측에서는 오도산 표범과 짝을 지어 번식시키려 했지만 동물보호에 관한 인식이 전무했던 시절이라 거래 가격이 문제가 되어 끝내 성사되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동물원 담당자가 퇴직했고 정확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지만 1960년대까지 우리나라 남부 뿐만 아니라 서부에도 표범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안도 키미오는 한국 표범에 관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진 한 장을 확보한다. 안도 키미오는 진돗개가 표범을 잡았다는 1963 1113일 동아일보 기사를 토대로 현장을 직접 방문해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당시의 생생한 증언을 들었다. 오도산에서 표범이 잡힌 1년 후인 1963 323. 1962년 표범이 잡혔던 오도산에서 북쪽으로 18킬로미터 떨어진 경상남도 거창군 가야면 대전리 비끼니산에서 또 표범이 발견된 것이다. 진돗개 두 마리를 키우고 있던 황수룡씨는 진돗개 한 마리와 함께 비끼니산을 산책하던 중 갑자기 나타난 표범에게 개 한 마리를 잃었다. 다음 날 황씨는 남은 진돗개를 데리고 동네 사람들과  비끼니산을 다시 올라가 몸길이 1미터, 꼬리 길이 70센티미터의 표범을 사살했다. 불행히도 이 죽은 표범은 대구의 총포상을 거쳐 뱀 가게에 팔리고 말았다. 표범을 잡은 진돗개와 마을 청년들이 죽은 표범과 함께 찍은 사진만이 존재할 뿐이다.

 

죽은 표범을 뱀 가게에 팔아버린 동네 사람들도 그렇지만 표범을 잡은 진돗개에 촛점을 맞춘 동아일보 기사 또한 야생동물 보호에 관한 인식이 전무했던 당시의 시대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게다가 읽는 내내 우리나라에도 표범이 살았다는 충격적인(?) 사실보다 이 엄청난 일을 외국인의 글을 통해 접해야 한다는 사실에 더 기가 막히는 것은 비단 필자의 소회만은 아닐 것이다. 평생을 민화 수집에 힘을 쏟은 한국 민화의 대가이자 책에서 엔도 키미오와 동행하며 한국 표범에 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 가회민화박물관 조자용 관장도 이런 현실을 개탄한다.

 

우리나라에는 왜 표범이나 호랑이를 소중히 여기는 학자와 작가가 없는 거야! 어째서 일본 사람이 찾으러 다니는 거냐고!”

…중략…

내가 고리타분한 걸까. 미국의 최고학부에서 공부를 했지만 내 고향은 북한의 벽촌이지.그래서 늘 아버지가 말씀하신 정직하게 살아라라는 가르침을 계속 잊지 않고 살아왔어……. 하지만 고속도로가 놓이고, 호랑이는 멸종하고, 마을에서는 신앙이 사라졌지. 선조 대대로 지켜 오던 것들이 모두 없어져 가는데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한국의 마지막 표범> 중에서-

 

일제 강점기의 해수구제정책과 한국전쟁이 우리나라 야생동물의 멸종 위기를 재촉했다는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더욱이 한국전쟁 이후 근대화와 산업화가 본격화되면서 환경에 대한 관심이 정책 우선 순위에서 밀려남으로써 한반도에 서식했던 야생동물들은 하나 둘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또 호랑이에 비해 표범은 더더욱 관심 밖의 동물이었다. 그러나 책 표지 그림에서 보듯 조상들이 표범을 민화로 남겼다는 것은 호랑이만큼이나 표범도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과 역사를 같이 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 책을 기획한 ()한국범보전기금 이 항 대표(서울대 수의학과 교수)는 기획 후기에서조자용 관장의 한탄에 이렇게 화답한다.

 

이 두 권의 책을 기획하고 출판함으로, 한반도에서 사라져간 호랑이와 표범을 위한 진혼곡의 서곡 부분이 겨우 마무리 되었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많은 부분은 관심 있는 한국인 연구자에 의해 후속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잊힌 한반도의 동물,

호랑이와 표범이 스러져 간 쓰라린 이야기.

이들의 슬픈 역사가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에 의해 수집되고 기록되어야 한다는 것도 어찌 보면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실 야생의 동물들에게 무슨 국적이 있고 국경이 있으랴. -<한국의 마지막 표범> ‘기획 후기중에서-

 

기획 후기에서 이 항 교수에 따르면 한국 표범은 역사적으로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 동북부와 러시아 연해주 남부에 널리 분포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50마리 정도만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다행인 것은 러시아 정부가 2012 49, 기존의 케드로바야 자연보호구, 바르소니 연방야생동물보호구, 보리소브코 고원지역 야생동물보호구와 중국 접경지대에 있는 표범 서식지를 더해 표범의 보전을 주목적으로 하는 표범의 땅 국립공원(Land of Leopard National Park)” 설립을 공식 발표한 것이다. 이 국립공원은 러시아에서 단 한 종의 야생동물을 위해 설립된 유일한 국립공원이라고 한다. 이 항 교수는 이 표범의 땅 국립공원이 한국 표범 보전에 획기적인 전기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한편 이 항 교수는 엔도 키미오도 확신하지 못했던 DMZ 일대의 한국 표범 생존 가능성에 대해서도 희망 섞인 전망을 내놨다. 표범은 호랑이보다는 훨씬 그 크기가 작기 때문에 먹이 요구량이 작고 따라서 호랑이처럼 넓은 서식영역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DMZ 일대에 회복된 멧돼지, 고라니, 너구리 등의 동물은 표범의 먹이동물로서 충분한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의 아무르 표범(한국 표범과 같은 종) 재도입 계획이 성공한다면 남한에서의 표범 재도입 구상도 그 실현 가능성이 더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분단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DMZ가 남과 북의 긴장 완화는 물론 야생동물의 평화지대가 될 수 있다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 오른다.

 

이 항 교수의 말대로 이런 노력들이 결실을 맺어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 누군가가 한국 표범의 귀환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쓰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 굳게 믿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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