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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비디우스의 네 시대



 변신이야기의 작가, 오비디우스에 대해여


  변신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작가에 휘둘린 나는 그의 언어를 따라가고 그가 표현해 낸 세계 속에서 한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부랴부랴 이러한 세계를 그려내는 작가의 실제적 모습을 찾아본다. 나름 머릿속에 그려지는 오비디우스의 자신감 넘치고 유려한 언변은 그의 발걸음마저 유쾌하고 활달했을 것이라 느끼게 한다. 바닥을 치고 끌고 가는 무거움과 진중함이 아니라 발뒤꿈치를 들고 엉덩이마저 약간 흔들며 걸어가는 모습이랄까. 기사 가문에서 태어나 관리직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는 남성의 발걸음으로는 어색하지 않으냐 할 지 모르나 내게 그 발걸음은 오비디우스의 언변에서 느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쾌활함과 유쾌함 속에 본질적으로 스며있는 경박함이 코믹스럽기까지 하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이미지는 유배지에서 쓸쓸히 생을 보내는 그의 모습에서도 지워지지가 않으니 그에 대한 첫 이미지가 너무나 각인된 탓이다.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 채 여러 갈래로 나오는 추방 원인에 대한 이야기들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유배지에서 애타게 권력자에게 띄우는 그의 시와 서한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그 스스로에게는 피말리는 생존의 문제였겠지만) 변신이야기의 종결이 결국 권력자에게 띄우는 아부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수천 년이 지나 여러 가지 떠도는 이야기들로만 그의 생애를 접한 나이기에 그 세월 동안의 오비디우스의 고통, 슬픔, 분노, 억울함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어찌 그것을 가늠한다 할 수 있으랴. 다만, 욕심에 그의 말년이 좀더 당당하고 덤덤했기를 바라는 것이다. 한 시대를 ‘오비디우스의 시대’라 칭송받던 그이다. 정말로 그의 추방 이유가 <사랑의 기술>에서 나타난 사랑에 대한 묘사때문이라면 후대뿐만이 아니라 당대에도 뛰어난 문학적인 역량을 칭송 받던 그이기에 <비가>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이 ‘내가 잘못했소’, ‘다시는 그러지 않겠소’라며 아우구스투스에게 돌려보내달라고 애원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변신이야기>의 끝을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치는 찬가로 둔갑시키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하는 아쉬움이다. 그것이 작가적 자존심 아니겠는가.


1) 황금시대 - 그의 문학은 봄이었다   


 오비디우스는 호메로스, 3대 비극시인인 소포클레스・아이스퀼로스・에우리피데스, 베르길리우스와 더불어 로마 시대를 넘어 중세와 르네상스,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표적인 작가로서 명성을 드날리고 있다. 루드빅 트라우베라는 학자는 서양의 12~13세기는 오비디우스의 시대라 불릴 만큼 오비디우스의 영향력이 강렬했다고 얘기할 정도이다. 예술가들이 당대에는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후대에 이르러서야 칭송받는 것과 달리 오비디우스는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로마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시인이었고 그가 죽고 난 후에는 홀로 로마의 황금기를 대표하는 시인이 되기도 했다.

 그가 시인으로서 금방 명성을 얻었다. 그의 탁원한 묘사력과 수사학이 그의 작품에 녹아 있으며 그의 작품은 상상력과 풍부한 독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로마신화 뿐만 아니라 융을 비롯한 많은 작가와 화가, 예술가와 인문학자들이 오비디우스의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얻고 그들 작품에 인용하거나 새로운 창작을 하기도 했다.


2) 은의 시대 - 계절이 생겨나 집을 만들다


 사투르누스가 암흑의 타르타로스에 갇히고 세상의 지배권이 유피테르의 손으로 넘어가면서 계절이 생기고 인간들은 집으로 들어가고 곡식을 뿌렸다. 오비디우스는 이 시대를 은의 시대라 말한다. 오비디우스는 자기의 계절을 만들어 집에 정착을 했을까.

 그는 이탈리아 펠리그니의 술모의 기사 가문에서 태어나 나름 유복한 생활을 했다. 대다수의 시인들이 아우구스투스로부터 경제적 후원을 받던 것과 달리 안정된 기반에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의 뜻에 충실했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아테네로 유학하여 웅변술의 대가였던 아우렐리우스 푸스쿠스와 포르키우스 라트로에게서 수사학과 법률 공부를 했다. 관리가 되기 위한 공부였고 실제로 관리생활도 조금은 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식이 아버지를 이기는 시간이 오는 법, 그는 아버지의 반대에도 결국 관리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그가 하고 싶은 작품을 쓰는 것을 선택한다. 물론, 지금과 마찬가지로 정치가, 관료가 되는 것이 안정된 생활과 명예를 주는 직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로마는 문학을 핍박했던 시대가 아니라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팍스 로마나’가 꽃피던 시절이다. 화려한 문화예술의 번영은 현실적인 여건에 구애받지 않고 문학적 재능을 펼칠 수 있었다. 그의 아내 역시 유명한 여류 시인인 술피키아라고 한다.

 이에 대한 개인적인 기록은 찾아보기 어려우나 그는 세 번 결혼을 했고 두 번 이혼을 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이혼이 어떤 인식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술피키아가 그의 마지막 부인이라는 것만 전한다. 그리고 두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딸었고 손자들을 둔 것으로만 알려졌다. 술피키아는 그처럼 문인 보호자인 메살라의 식객이었고 그가 유배로 인해 고통받을 때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주었다 한다.


3) 청동의 시대 - 무기를 쥐었으나 범죄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비디우스의 문학적 재능을 주목한 사람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이다. 그는 시인이자 장군으로 당시 가난한 시인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경제적 후원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비디우스는 자신이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었기에 당대 아우구스투스로부터 경제적 후원을 받는 다른 작가들과는 그 작품의 경향에서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오비디우스의 작품은 연애와 사랑을 다루고 있으며 그 경향도 상당히 자유스러운 연애를 주창했다는 것이다.


4) 철의 시대 - 오로지 기만과 계략과 음모와 폭력과 저주받을 탐욕이 들어찼다


 철의 시대에 인간은 순결, 정직, 성실성 같은 덕목을 기피하고 오로지 기만과 부실(不實)과 배반과 폭력과 탐욕만을 좇았다. 기간테스들이 신들에게 도전하자 유피테르는 대홍수를 내려 모든 인간들을 죽게 한다. 신실한 노부부 데우칼리온과 퓌라만 살아남아, 이들이 던진 돌에서 인간들이 다시 생겨난다. 철의 시대의 이 모양은 오비디우스가 겪은 말년의 사건과 유사하다. 이 때의 오비디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입장에서 보건대 황제가 내린 율리아법을 무시하고 오로지 기만을 일삼으며 황제에게 도전했다. 그리하여 황제는 그에게 추방령을 내리고 그의 작품 역시 외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비디우스는 유배지에서도 그가 가진 필력으로 끊임없이 작품을 쏟아내어 후대에 이르러서도 그의 명성을 이어나갔다.


▷ 이 도시를 떠나라


 추방이다. 원로원 재판이나 다른 정식 재판 절차는 없었다. 오로지 왕,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에 의해 집행되었고 그 희생자는 오비디우스였다.

 로마로부터 멀리 떨어진 토미스, 지금의 루마니아에서 10여 년을 보내던 그는 귀향을 꿈꾸다 사라져갔다. 그곳의 야만인들 사이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비참하고 쓸쓸한 만년을 보냈다고도 하고 나름 적응을 잘했다고도 전한다. 오비디우스의 시신 매장 장소는 정확이 알 수 없으나 토미스 인근 도시 카나라로 추정된다고 하다. 루마니아의 코스탄차 광장에 오비디우스 동상이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아우구스투스의 이 추방원인은 아우구스투스가 율리아 법을 제정한 그 시기, 지나치게 외설적으로 표현한 그의 시 때문이라고 알려졌다. 윤리적인 문란을 바로잡으려는 황제에게 이러한 금서를 작성한 오비디우스는 당연히 죄를 물어야 할 것이었다. 그렇기에 금서를 작성한 오비디우스는 그의 작품의 경향 때문에 추방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추방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론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오비디우스는 끊임없이 황제에게 자비와 애정을 갈구하였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는 시들을 쓰고, 아우구스투스의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변신이야기>를 쓰며 로마로 되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노력과 염원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그를 다시 찾지 않았고 추방당한 오비디우스는 누구도 그를 아는 체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기에 유배지에서 10년을 보내다 혼자 죽어갔다고 전해진다.


▷ 네 작품도 함께 떠나라


 그러면 표면적으로 추방의 원인이 된 그의 작품, <사랑의 기술>은 어떠한 내용들을 품고 있는가. 오비디우스의 작품의 전반적인 경향이 ‘사랑’을 다루고 있다. 오비디우스는 주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랑을 이야기했다. 그 사랑의 시는 고귀하다거나 진정성보다는 ‘유혹’과 ‘연애’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초기 작품인 <사랑도 가지가지>나 <여류편지>에서도 여성을 중심으로 한 연애의 노래나 편지를 담고 있는데 상당히 자유로운 연애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주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랑’을 이야기 했고, 사랑에 대한 시를 많이 썼다.  그는 사랑의 고귀함이나 사랑에 대한 진정성 같은 것 보다는 사랑의 ‘유혹’에 대한 부분에 중점을 두어 작품을 써내려 갔다. 율리아간통법은 간통한 자는 서로 다른 섬에 추방하고 재산의 일부를 몰수하며 아버지는 간통한 딸과 상대를 죽일 수 있는 내용의 법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러한 법을 제정하면서 당시 보수적이고 엄격한 기강을 세우고자 했다고 전해진다.


"여자의 남편을 네 편으로 만들려고 애를 써라. 그녀의 남편과 친구가 되면 너와 그녀의 관계에서도 손해보다는 이득이 많이 생길 것이다. 술자리에서 제비를 뽑아 네가 마실 차례가 되었어도 그에게 양보하라. 네가 먼저 받은 화관도 그의 머리에 씌워주라. 신분이 너보다 못하든 같은 개의치 마라, 그가 모든 일을 항상 너보다 먼저 하도록 하라, 대화에서 발언할 기회도 그에게 먼저 양보하라“ - 사랑의 기술


 그러나 위에서처럼 사랑이 기술은 자유분방한 연애를 다루며 마치 아우구스투스의 이 법을 조롱하듯이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그 내용 역시 연애의 기술을 알려주지만 실제로는 간통을 부추기는 말들을 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추방의 원인으로 지목된 이 책은 법 제정 이전부터 발표되었으니 오비디우스의 추방의 이유에 대한 논란이 가속화된 건 당연할 지 모른다.


▷ 유배지에서 보내는 편지


 그는 추방당한 뒤, <비가>와 <흑해로부터의 편지>를 쓰게 되는데 여기에는 변방으로 유배된 시인의 불행과 도시에 대한 귀환을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끝내 귀국은 허락되지 않았다.

 이 책에서 그 스스로 추방의 원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비가>에서 자신의 추방은 ‘시와 실수’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중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살인보다 더 나쁘고, ‘시’보다 더 해롭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신의 이 잘못은 대해서는 누구도 알고 있는 문제이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언급하지 않겠노라 말하고 있다. 그는 <비가>에서 발생한 악재들 중 일부는 자신과 더불어 소멸할 것이라며 본인 스스로 그것을 감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모든 비밀들을 다 얘기해왔던 옛 친구에게조차 자신을 파멸시킨 그 비밀에 대해서만은 함구했다는 오비디우스는 그 자신의 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간단치도 안전하지도 않은 일이라면서 자신이 입은 상처의 성격에 대해서나 원인에 대해서 묻지 말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러한 침묵이 사람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추론된 이야기 중의 하나는 오비디우스가 유배될 당시 로마 황실에서는 차기 대권과 관련하여 암투가 일어나는 과정에서 오비디우스가 보아서는 안되는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 율리아의 간통 현장을 우연히 목격했거나, 혹은 아우구스투스 자신이 황제 음모에 간접적으로 연루되었다거나, 율리아와 연애를 일으켰다고 보는 추론들이 있다. 어떤 이들은 황실 내부의 수치스런 사건을 목격했다고 유배를 당한 것은 설득력이 떨어져 정치적 음모에 그 자신이 가담한 것이 아니냐고 하기도 한다. 특히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은 티베리우스 황제가 오비디우스의 사면 복권 요청을 묵살하고 그를 로마로 다시 불러들이지 않은 것도 이런 주장에 힘을 보태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자주 거론되는 것은 시에서 표현하고 있듯이 황제의 공공연한 왕실 위상을 세우는 데 애를 쓰는 있음에도 공공연히 오비디우스가 황제의 손녀 율리아와 연애를 일삼고 황제를 조롱하였다는 것이다.

 ㅊ어느 이야기가 정확한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중요하진 않다. 그저 매우 궁금할 뿐이다. 다만, 황제의 근엄한 사회분위기 조성에도 불구하고 자유분방한 영혼으로 당 시대를 살았던 오비디우스가 있었고, 그의 작품이 있었고, 오늘날까지 읽혀지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참고 자료

•오비디우스, 사랑의 기술

•최혜영, 오비디우스 추방 원인과 언론 자유의 한계, 역사학보, Vol.172, No.0, Startpage 249, Endpage 278, Totalpage 30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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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조셉 캠벨 지음, 이윤기 옮김 / 민음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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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


Joseph Campbell, 이윤기 옮김 / 민음사, 1999



  이 책은 비교신화학자로 널리 알려진 조셉 캠벨의 신화와 관련된 초기 저서이다. 캠벨은 이 책의 저술 목적을 ‘종교와 신화의 형태로 가려져 있는 진리를 밝히되, 비근한 실례를 잇대어 비교함으로써 옛 뜻이 스스로 드러나게 하는 데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캠벨은 전세계 각 나라의 신화와 전설의 구조가 동일한 패턴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파악하여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있다. 한마디로 캠벨은 이를 신화의 원형이라 명명했으며 융과 심리학의 이론들을 인용하여 각 나라의 영웅전설을 분석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영웅이란 신화와 전설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에도 인류의 무의식속에서 나타나는 존재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영웅은 본질적으로 영웅을 위한 모험을 떠나게 되는데 그러한 영웅의 모험과정에서 통일한 패턴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영웅은 출발→입문→귀환의 3단계를 거치며 영웅으로 변모한다.

  출발단계에서 영웅은 평범한 일상생활을 하던 중 모험에의 소명을 받고 이 소명을 거부하다가 초자연적인 조력자의 도움을 받아 첫 관문을 통과하여 성서의 요나처럼 어두컴컴한 고래의 뱃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입문단계에서는 시련을 겪고 여신을 만나 도움을 받거나 영웅을 유혹하는, 즉 방해하는 여성을 만나게 된다. 이런 시련을 통해 원만하지 못한 관계에 있던 아버지와 정신적 화해를 하게 되고 신격화의 경지에 이르거나 궁극의 공을 깨닫는 경지에 이른다. 귀환단계에서의 영웅은 귀환을 거부하고 그 세계에 머물러 있거나 그 세계를 어렵게 탈출하거나 외부로부터 구조되고 영웅의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게 된다. 그리고는 다시 일상생활로 귀환하여 두 세계의 스승이 되어 삶의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내용을 캠벨은 1부 영웅의 모험이란 제목 아래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2부는 우주발생적 순환으로서 다양한 형태의 영웅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각 나라의 신화, 전설, 민담을 찾아 영웅의 공통 요소를 추출하여 구조를 세우고 심리학적 이론을 토대로 하여 체계를 정립하면서 그가 찾아낸 사례들을 예화로 보여주는 형태로 글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한 예화가 더욱 방대한 분량으로 나타나 있다.


  "신화적 영웅의 길은, 부수적으로는 지상적(地上的)일지 모르나,

 근본적으로는 내적인 길이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구는 이것이다. 영웅이 모험을 떠나고 스펙타클한 여정을 겪는 과정은 흥미롭다. 그러나 그들의 모험에 관한 이야기, 실제적인 예화들보다 캠벨이 이들 이야기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설명하고 주장하는 부분에 마음이 간다. 명확하지 않은 이미지들을 명료하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영웅은 참 부러워


만화의 주인공은 참 부러워

거인 나라, 요정 나라, 별나라 다 가보고

나도 가고 싶어, 나도 가고 싶어

우주의 왕자 히맨

슈퍼맨, 스파이더맨, 배트맨, 아쿠아맨.....히맨.


 어릴 적부터 익숙하게 봐왔던 영웅 만화는 노래 가사처럼 못하는 것이 없다. 못 가는 곳도 없이 심지어 초능력, 마술을 부려가며 그 존재를 보여준다. 세상에 수많은 만화영화 속의 영웅들이 이 세계를 구해주리라는 믿음에 익숙해져 영웅이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만 한편 만화영화 속의 영웅은 이미 그 나라의 왕이나 왕자들이었다. 2014년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현실에서 영웅은 없다.....사회를 지키고 구원해야 할 창조적 영웅의 역할은 우리 모두에게 부여된다.

 이미 어린이들도 영웅의 모험에 익숙해져 있다. 만화영화 속의 영웅들 역시도 캠벨이 말하듯 영웅의 여정을 고스란히 겪는다. 이와 같이 익숙한 패턴에 대해서 체계적이고 명확한 이론으로 각인시켜 흩트려진 이야기들을 정리해 주었다는 점에서 캠벨의 직관과 노력이 현재까지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는지 알 수 있다. 특정한 나라의 신화 이야기는 분명 접하지 못할 이야기들일 것인데 이 책을 통해 그런 이야기들을 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영웅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복종(자기 극복)의 기술을 완성한 인간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복종인가?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하는 수수께끼이며, 

영웅의 바탕되는 미덕과 역사적 행위가 풀었어야 하는 문제다.

오직 탄생(낡은 것의 새로운 태어남이 아닌, 새로운 것의 탄생)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다. 죽음의 끈질긴 재현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내부에, 

사회적인 무리의 내부에 끊임없는 <탄생의 재현(palingenesia)>

(우리가 갱생하지 않는다면 오래 잔존하게 되어 있다면)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갱생하지 않는다면 응보 천벌여신 Nemesis의 복수만이 

우리가 얻게 되는 승리가 될 것이기 때문이며, 

파멸은 우리 미덕의 껍질부터 깰 것이기 때문이다.(P29)


영웅은 과거 개인적, 지방의 역사적 제약과 싸워 

이것을 보편적으로 타당하고 정상의 인간적인 형태로 환원시킬 수 있었던 

남자나 여자를 일컫는다. 그런 사람의 상상력과 이상과 영감은 태고적부터 

인간의 생명과 사상의 원천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영웅은, 현재의 붕괴되어 가는 사회나 정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사회재생의 심원한 원리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한다. 

영웅은 현대인으로 죽었지만 영원한 인간(완전하게 되되, 특이하지 않은 우주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따라서 두 번째 엄숙한 과업과 행위는

(토인비가 주장하고, 인류의 모든 신화가 보여 주듯이)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와 재생의 삶에 대해 그가 배운 바를 가르쳐주는 것이다.(p33) 



   그러나 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하는 토대를 심리학, 정신분석에서 가져와서 설명함으로써 이 책이 신화를 이야기하는가 정신분석을 이야기하는가 하는 생각이 약간은 들었다. 이미 정신분석은 인간의 외현적인 행동을 무의식의 작용으로 간주하여 끊임없이 무의식의 기저에 숨겨진 과거의 이야기를 찾아낸다. 궁극적으로 캠벨이 말하는 영웅도 내면탐험이라는 점에서 결국 정신분석학적인 이야기를 길게 서술한 느낌도 없지 않다.

  몇 번을 읽으면 글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읽혀지겠지만 번역의 문제로 봐야 할지 어색한 문체가 독해에 방해를 하는 점은 아쉬웠다. 또한 작가가 서술한 다른 신화 책에 비해서 이론의 흐름을 설명하는데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매끄럽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아마도 (오타의 향연과 함께 한) 1999년 출판을 읽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이 책이 작가의 처음 책이라는 선입견 때문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문장 하나 하나를 떠나서 전체적인 맥락에서의 이 책을 보자면 그 주제, 메시지는 확실히 전달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하나 더, 거의 모든 신화와 종교에서 나타나는 여성이미지가 폄하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영웅이야기에서 ‘여성’은 영웅이 아니라 영웅의 방해꾼으로 나타난다. 전세계 그 많은 나라에서 정말로 영웅의 여정을 따르는 ‘여성’은 없었던가? 유혹자로서의 여성 이야기도 좋다. 다양한 영웅의 분류에 ‘여성 영웅’이야기를 한꼭지 첨가시켰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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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힘
조셉 캠벨 & 빌 모이어스 지음, 이윤기 옮김 / 이끌리오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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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힘(The Power of Myth)


조셉 캠벨‧빌 모이어스 대담, 이윤기 옮김, 이끌리오, 2003.



  이 책은 캠벨과 저널리스트 빌 모이어스와의 방송용 대담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처음 기획에서부터 책으로 엮을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자인 캠벨 사후 대담의 내용이 책으로 출간되었다. 서문에서 빌 모이어스는 캠벨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내용을 집약해서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전체 8장으로 구성되어 각 장마다 모이어스의 질문에 캠벨이 답하는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1장은 현대 세계에서 신화가 가지는 의의를 설명하고 있으며 2장은 궁극적으로 신화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3장은 과거의 신화와 의례에 대해서, 4장은 희생과 천복(天福)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5장은 영웅의 모험의 여정에 관해 이야기함 6장은 우주의 어머니인 여신의 신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7장은 사랑과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며 8장은 영원의 가면에 관한 신화의 이미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대담 형식을 취함으로써 캠벨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이어스가 명료하게 요약하거나 의문점을 질문하며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어 읽으면서도 이야기를 듣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캠벨이 이야기하는 형태는 안타깝게도 나에게 아주 명료하거나 구체적인 각인을 주기 보다는 그 전체적인 아우라로 나를 감탄시켰다. 물론 문장 하나하나에 매료된 구절도 분명 있으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 의미를 이해하는데 분명 모자랐기에 그가 던지는 메시지를 제대로 받아먹지 못했다는 아쉬움은 크다.

  하지만 비교적 내 삶과 대입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천복에 관한 것, 내면의 길에 관한 내용들은 쉽게 와 닿았다. 천복을 좇으면 어떻게 되느냐는 모이어스의 질문에, “천복에 이르게 된다”는 그 말. 참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말이었고 인디언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수집한 그 답게 인디언 추장이 자연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지는 인디언들의 삶에 대한 아쉬움과 더불어 더욱 되씹어 보게 된다.

  또한 캠벨을 신화학자로 부각하다 보니 간과했던 부분이다. 그 또한 종교학자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종교와 신들에 대한 이야기 역시 내가 종교인이 아니기에 주의깊게 읽혀지기도 했다. 그리고 에덴동산에서의 두려움, 신에 대한 이야기..다시 보니 마음에 드는 글들이 많다. 신화의 힘은 두고 두고 되씹으며 읽어 봐야 할 듯하다.


  이 책은 대담의 기록이다. 즉 작가가 하고자 하는 말을 글로써 전달한 것이 아니라 질문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 형태로 캠벨이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고 있다. 글과 말이라는 것은 전달형태면에서 여러 가지로 다르다. 그렇기에 글로써 읽어내려갈 때에는 전달력이란 측면에서 약한 면을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힘으로 온전히 이야기를 엮어 갈 때에는 자연스러운 흐름에 맞추어 내용을 정리할 수 있으나 대담은 질문자의 의도 또한 개입되어 때론 반복적이고, 때론 부연적으로, 때론 흐름과는 조금 동떨어진 형태로 이야기가 흘러가게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빌 모이어스가 적절히 질문의 형태를 조절하며 대담을 이끌고 있다지만 이 책이 대표적인 신화입문서, 신화개론서 이야기된다는 것을 볼 때 보다 쉽게 일반인의 눈높이의 질문이 이루어지지 못한 점이 아쉽다. 즉, 개론서라는 것이 많은 내용을 다루기 때문이 아니라 보다 핵심적인 부분을 간결하고 쉽게 정리할 수 있다면 더욱 좋았을 듯한 느낌이 든다. 특히 이 책이 캠벨이 저술한 초기 저작물이 아니라, 캠벨이 많은 저서를 출간하고 생에 마지막 즈음 자신의 모든 저술에서 말한 바를 총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리하여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화의 이미지, 신화와 인생, 신화와 함께하는 삶, 신의 가면 등의 내용이 각 장마다 조금씩 자리한 요약서의 느낌이 들었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고서 오히려 다른 저서들을 살펴보아야 신화의 힘에 겨우 접근이 가능하다고나 할까.

  한편으론 저자가 살아 이 책의 출간을 주도했다면 지금의 형태와는 다른 정말로 신화의 개론서로서의 책을 서술했을 것이란 점에서 아쉽기도 했다. 의도적인 질문과 반박을 접어둔 채 오로지 그의 이야기에 대한 수용적인 자세로 책을 읽으려 하면서도 이해가 어렵거나 더한 답변이 요구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그저 신화에 대한 메타포, 그가 자신의 일생을 바쳐, 그의 천복으로서 임했던 신화에 대한 생각과 신념으로서 글들을 이해하며 읽었기에 책을 읽고 난 이후의 몽상적인 상태가 지속되다. 캠벨의 저작들을 보다 쉽게 이해하고 접근하기 위한 대담으로서는 오히려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차라리 좀더 '신화'의 의미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을들 뽑아내어 그것을 중심으로 한 질문과 경험에 대한 이야기로 풀어 갔으면 하는 생각이다.  방대함은 깊이에 대해 부족하게 한다. 이 책이 신화에 대한 이해, 개론서가 되어야지 조셉 캠벨이 그동안 쓴 책들의 요약 정리본은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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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신화 조셉 캠벨



조셉 캠벨[Joseph John Campbell] 에 대하여


금주법의 시대, 술을 만들어 먹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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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e as a young man at the University of Paris (1928)

Working on A Skeleton Key to Finnegans Wake (1944)

At home in Hawaii (1985)

 

At the National Arts Club receiving Medal of Honor (1985)

 


사람이 어찌할 바를 모를 때에는 정말로 어찌할 수 없다. 내겐 아무런 철학도 없었다.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무슨 영문인지 우리는 함께 존 듀이를 공부했다. 카멜 도서관에서 나는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두 권짜리 『서구의 몰락』을 꺼내 들었는데, 이런, 세상에! 거기 적힌 내용은 벼락과도 같았다. 슈펭글러는 말했다. “젊은이여, 만약 그대가 미래의 세계에 있고 싶다면, 자신의 그림붓과 시 쓰는 펜일랑 선반 위에 얹어 두고, 멍키 스패너나 법전을 집어 들어라.” 나는 스타인벡에게 말했다. “저기요, 이것 좀 한번 읽어 보세요.” 나는 책의 제1권을 다 읽은 다음에 그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잠시 후에 내게 다가와서 이렇게 말했다. “아, 나는 이 책 절대 못 보겠는걸. 아, 내 예술은 어쩌나.” 그는 거의 2주 동안이나 한방 먹은 사람처럼 넋이 나가 좀처럼 글을 쓰지 못했다.

        - 신화와 인생, p92~93 -


   

   캠벨이 말하는 '아무런 철학도 없었다.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라는 말이 한편으론 미심쩍긴 하지만 가만히의 생을 들여다보면(물론, 그렇다고 그의 생을 충분히 알 것 같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지? 라는 말이 나오려 한다. 그의 생을 조금 들여다보기 전에는 그는 그는 샌님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잘 자란 가정에서 소위 사회적인 지위를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나아가는 청년의 모습. 일견 반듯하고 이성적인듯하지만 그것보다는 좀 차갑고...

  그러나 내가 보게 되는 캠벨은 자유주의자적 기질이 다분하고 인생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유쾌하고 낙천적인 기질이 다분한 사람이다. 위트가 있고 경쾌함이 그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느낌이다.


 슈펭글러의 책을 읽은 것이야말로 내겐 중요한 경험이었기 때문에, 나는 에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있잖아요, 에드.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지금껏 평생 삶에 대해 ‘아니’라고 말해 왔는데, 이제부터는 ‘그래’라고 말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그가 말했다. “그래, 근데 그렇게 하려면 술에 취해야 되니까 일단 파티를 열자고.” 그 당시는 대공황의 시대일뿐만 아니라 금주법의 시대이기도 했다.  -신화와 인생, 93.


    금주법의 시대, 신나게 술을 만들어 먹는  모습을 상상하면 그의 그 기질에 동참하고프다. 주위 사람도 같은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해줄 듯하다. 더불어 신화에 대해 깊이있는 이야기도 나눌 수 있고 말이다. 그래서 그가 없는 것이 참 안타깝다.


   캠벨은 미국인이다. 뉴욕에서 태어났고 게다가 상위 중산층 가정에서 자랐다. 가톨릭 가정에서 자라 부모님의 지원과 사랑을 받고 자랐다. 그의 긍정성은 어릴 적부터 이런 포용적 가정에서 자란 이유도 있을 듯 보인다. 특히 그는 아버지와 함께 미국자연사박물관을 구경갔다가 아메리칸 인디언에 대해 매료된다. 이후 인디언에 관한 신화와 민담들을 섭렵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신화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하던 그는 14세 때에는 병으로 집안에 머물며 자연과학을 공부하였고 대학에서도 생물학과 수학을 전공하였다.



참고 자료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

•신화의 이미지, 살림, 2006.

•신화의힘, 이끌리오, 2003

•조셉캠밸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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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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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자꾸 내게 이야기하려 한다...

 

 

   아, 살구. 알 수 없는 이해와 감정이입으로 나는 거듭 그녀의 여행에 함께 했고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소제목처럼 돌고 돌아 되돌아오는 그 여정에 그녀가 거두고 그녀가 만들어낸 살구와 함께 했다. 아이슬란드의 기후처럼 차가운 살가움, 서리진 추위가 빚어내는 정화(淨化)의 기운이 그녀의 글 속에 스며있었다. 한마디로 단정할 수 없는 감정이 물밀듯이 흘러나왔다.

   맨스플레인의 창시자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는 책을 통해 그녀를 알고 그 책의 문체와 어조를 예상하고 있었기에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내가 아는 작가가 맞는지를 거듭 확인했다. 마치 오전에는 에너지 넘치는 강의를 듣다가 늦은 밤 사막 한가운데서 별을 보며 자신의 속내를 내비치는 그녀와 마주한 느낌이었다. 더 깊은 인생의 대비가 통찰의 환희가 사유의 고뇌가 이해의 갈망이 그녀의 문장 속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흑백 사진의 여백은 마음을 먹먹하게 했고 까닭모르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야기, 이야기, 이야기. 먼 나라의 그녀에게서 나는 어린 시절의 그녀를 듣는다. 어깨를 늘어뜨린 채 책다발을 한아름 지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나비가 살짝 와서 머무를 것이다. 그 가벼운 위로의 날개짓을 보지 못한 채 그녀는 두려움을 안고서 더 깊이 더 깊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갔다. 어느 순간 헤매었을지언정 미로 속에서 길로 인도하는 끝없는 이야기를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다시 되돌아 나오면 되었다. 그 되돌아오기를 결정하는 때가 그녀가 말한 그 순간은 아닐까.

 

유한한 덧없음, 불확실성, 고통, 변화의 가능성 같은 것이 찾아와 삶을 그 전과 후로 나누어 버리는 때가 있다. 수없이 들은 사실과 생각이, 생생하고 급박하고 실감나는 현실이 되는 순간(p223)."

 

   그녀는 많은 슬픈 이야기들을 알고 있다. 그녀의 슬픔은 미로 속에서 같이 헤매었고 저 먼 아이슬란드 바다 위에서 서린 얼음 위에 올려놓고 마주한다. 어쩌면 여행을 떠나는 시초가 되었을지 모를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 어머니와의 관계와 애증의 더미가 얼음 위에서 점차 소멸해 간다. 거울과 같이 투명한 그 얼음 속에서 그녀가 자아를 찾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던 노력이 있었기에 그러하다. 그녀는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 선택하기 위해 살구더미를 받아들였던 것처럼 그녀의 삶에서 좋은 기억들을 촘촘히 만들어냈다.

 

 

우리가 보기에 다리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걷기에 필요한 기술과 확신, 그리고 걸으려는 의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어머니가 그렇게 천천히 알려지지 않는 존재로, 알 수 없는 존재로 변해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리고 기술이나 사실들을 잃어버렸음에도 자아를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지, 기능을 잃어버린 자아의 가치란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p337).

 

   그녀의 사유는 우리가 삶에서 겪는 그 모든 이야기들이 있다. 어느 누구도 삶의 이 내용들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말할 수 없다. 인생에서 겪는 고통과 질병과 고독과 이별과 단절과 반목들. 또한 사랑과 이해와 용서의 단지, 우리와 그녀의 사유의 방식과 사유의 방향이 조금 달랐달까. 어느 누구나 삶을 바라보는 생각의 방식은 있다. 그것에 반응하는 감정의 반향은 있다. 어떠한 결론을 만들어가든, 그녀가 걷는 사유의 길을 같이 걸어 보기를.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좋다.

 

  누가 당신의 말을 듣는가. 할 말이 있다는 것과 그것을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들려진다는 것은 말 그대로 듣는 이의 귀에서 머리까지 이어진 미로를 여행하는 공기의 울림이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어두운 통로에서는 더 많은 일이 벌어진다. 당신은 당신의 욕망과 필요 혹은 관심에 부합하는 것을 선택하여 듣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화가 너무 잘 통하는 세상은 삶을 온통 편안한 것과 익숙한 것만 비춰 주는 겨울로 만들어 버릴 위험이 있고, 그 반대의 세상에도 마찬가지로 위험은 있다. 주의해서 귀를 기울이자(p283~284).

 

   그녀는 계속 이야기하고 나는 듣는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그녀의 이야기처럼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 이야기 속에 숨겨진 정화의 힘을 믿는다. 그녀는 내게도 이야기하라고 건넨다. 그녀의 이야기를 건네며 너도 감정의 정화 속에 참여하라고 끊임없이 속삭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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