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속의 항해 창비세계문학 66
진 리스 지음, 최선령 옮김 / 창비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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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꿀 수 없는 어둠

어둠 속의 항해, 진 리스, 창비, 2019.


  작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가장 자전적이며 최고작으로 뽑은 소설이라는 점에서 호기심이 배가된다. 제목에서 짐작되는 막막함과 1890년생인 작가의 생애가 더해져서 잿빛이미지를 가득 안긴다. 이 작품은 1934년 출간되었지만 자전적 소설이라고 볼 때 배경은 1910년  즈음이 된다. 1910년이라는 시간에 서 있는 한 여자의 생애가 휘몰아친다.

  진 리스는 열여섯에 홀로 영국으로 건너간 도미니카 태생이다. 당시 도미니카는 영국령이었고 진 리스의 아버지는 웨일스, 어머니는 스코틀랜드계 크리올 태생이었다. 진 리스의 이국적 외모와 억양은 진 리스가 영국에서 생활하는 동안 그녀를 괴롭히는 요인이 되었다. 아버지의 사망으로 경제적 지원이 끊기고 배우가 되고자 왕립연극학교에 다니지만 역시 언어와 왕따를 겪으며 그만두고 코러스걸, 마네킹, 누드모델 등의 일을 하며 생활을 이어나간다. 그 과정에서 만난 부유한 연상의 남자, 사랑했지만 그에게서 버림받고 불법 낙태수술을 받은 경험이 진 리스의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의 일이자 이 소설의 중심 이야기가 된다.

  애나 모건이 되어 펼치는 이야기에는 머물 곳을 찾아 몇 번을 옮겨 가는 주거지처럼 반복되어 펼쳐지는 애나 모건의 기억이 있다. 어떤 상황을 겪을 때마다 몽환과 독백으로 때로는  정신분열된 것처럼 과거로 빨려 들어가는 그녀는 현재에 사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붙들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국 생활은 불안정하기 그지없고 그때마다 여지없이 소환되는 것으로 보건대 과거의 그녀는 행복했던 것일까.


바깥은 밤.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가늘고 슬픈 쓸쓸한 목소리들. 그리고 마치 살아 있는 무엇이라도 되는 듯 사람을 짓누르는 그 열기. 나는 흑인이 되고 싶었다. 난 항상 흑인이 되고 싶었다. 프랜신이 거기 있어서 나는 행복했다. 나는 그녀의 손이 부채질을 하느라 까딱까딱하는 모습을 보았고, 그녀의 손수건 밑으로 떨어지는 구슬같은 땀방울을 보았다. 검다는 것은 따스하고 유쾌하며 희다는 것은 차갑고 슬프다.

 

  분명 그녀는 현재 행복하지 않다. 서인도제도에서 자란 그녀에게 영국은 너무 춥고 어두운 잿빛의 세계였다. 반면에 서인도 제도는 따스하고 밝은 자줏빛의 세계다. 그 풍경에 대한 느낌은 단지 공간적 배경, 지리적 위치에 따른 차이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 그 세계에서 느끼는 모든 것의 총체다. 사물과 인간 관계에서 느끼는 모든 것이다. 돈 한푼 없는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중 한명으로서의 그녀는 거기에 더해 이방인으로서의 차별을 겪는다. “저주받은 소수들의 인생”이 열여덟 그녀에게 붙어진 삶의 이름이다.

  그녀는 “흑인이 되고파”하는 생각을 한다. 이미 영국으로 건너오기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다. 영국에서 흑인이 되고프다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게 들리지만 서인도제도에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게 느껴지기는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흑인이 되고프다는 생각이 프랜신에 대한 애정 갈구인가 생각했다. 엄마 없는 상실감과 모정을 프랜신에게 얻으려 했던 소녀의 마음이 있었던 것인가 하고. 프랜신과 닮고자 하는 마음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글쎄, 모를 일이다. 애나 모건에게 가득한 서인도제도에 대한 열망은 현재 영국에서 겪는 삶에 대한 반작용일지도.

  노예인 흑인 프랜신은 백인이기에 애나 모건을 좋아하지 않는다. 애나 모건은 자신 역시도 백인인 게 싫다는 것을 프랜신에게 설명해내지 못했다. 백인이지만 영국에서 애나 모건은 이방인일 뿐이다. 그것도 몹시도 가난한 젊은 여자. 서인도에서의 애나가 되고파 했던 프랜신이 영국에서의 자신이 겪는 삶과 다르지 않다. 아니다. 애나는 ‘프랜신’이 되고자 한 것이 아니라 ‘흑인’이 되고프다고 했으니 프랜신의 삶을 꿈꾸는 것과는 다를 수도 있겠다. 서인도에서 애나 모건의 삶으로 보건대 결코 될 수 없는 프랜신이다. 영국에서 그녀가 오를 수 없는 위치를 꿈꾸는 것과 같다.


“안돼요, 젊은 아가씨가 이렇게 살면 안돼요.” 도스 부인이 말했다.

사람들은 ‘젊은’이라는 말을 하며 마치 젊다는 게 무슨 범죄라도 되는 양 굴지만, 정작 늙어가는 것은 항상 그리도 무서워한다. 나는 생각했다. ‘내가 늙어서 이 모든 망할 일이 다 끝났으면 좋겠어. 그럼 도무지 아무것도 아닌 일로 이렇게 침울한 기분에 빠져 있진 않을 텐데.’


  젊은 아가씨가 사는 삶. 그것은 남성에게 원조받는 삶이다. 애나에게는 분명 사랑이 있었으나 경제적 지원과 맞물린 나이 많은 남자와의 관계는 타인들에게는 ‘원조관계’로 보일 뿐이고 남성 역시도 그렇게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여기에 애나는 상처받을 뿐이다. 애나는 이 관계에 힘겨워하고 또한 좀더 당당해질 수 있으려 노력하지만 뜻대로 되지 못한다.

  “그 추잡한 외국인들 같은 걸 말하는 건 아니니까. 외국인들 싫지 않아?”

  한 사람으로서 ‘외국인’은 싫어하지만 젊은 여성으로서는, 뭔가를 이용해 먹을 때는 외국인어도 상관없는 이들의 세계에서 애나 모건은 한없이 무기력하다. 그런 자신을 슬퍼하고 좌절하며 그녀가 다다르는 곳은……. 애나 모건의 삶을 무조건 이해한다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하지만 애나 모건의 상황이라면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이 당연시되고 있는 지금 현실을 생각해본다면 1910년대 애나가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싶다. 애나가 전전하며 살아가던 영국의 어둡고 춥고 습하고 낡은 집을 떠올려 본다. 물속으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는 현실. 나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죽음의 문턱에서 다소의 희망이라도 잡아보려는 애나 모건의 독백들이 정신없이 흘러간다.

  이 소설을 페미니즘 문학의 대표 도서로 소개하고 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읽다 보면 계속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애나가, 애나의 삶이? 이런 의구심을 가지고 책을 읽다 보니 때로는 책에 대한 소개문구가 책을 편하게 읽어 나가게 하는 방해자로 등극하기도 한다. 하지만 책을 덮고 생각해보니 페미니즘이란 말에 너무 호도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언뜻 페미니즘은 어떤 행동력을 요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애나는 여권주의를 위한 활동적인 삶을 피력하고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여성으로 나타나진 않는다. 그것이 페미니즘인 것도 아니다. 애나 모건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여성의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문학으로 동의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 시대 식민지 출신 여성의 삶이 곧 시대의 여성의 삶의 역사로서 기록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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