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기원
천희란 지음 / 현대문학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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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 기원, 천희란, 현대문학, 2018.


  0의 무게는 얼마큼일까. 죽음이 많아서 참으로 무겁겠다 싶은 죽음이 짙게, 깊게 드리워진 단편집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방식은 하나라 생각했는데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수만 갈래고 곳곳에 죽음이 서려있다. 굳이 선택하지 않아도 필연적으로 오는 죽음을 선택한 이들의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어쩌면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산다는 것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외면받은 그들의 삶들을 돌아보게 된다. 그 삶들의 가지는 친화되지 못한 이유들을. 


죽을 용기로 살았어야 해.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니까 죽을 용기와 살 용기, 그것은 과연 같은 종류의 용기일까. 나는 맑스와 마르크스, 그리스인과 희랍인, 자정과 0시, 두 번의 침묵, 분명 같은데 서로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것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죽을 용기로 살았어야 한다는 그 말에 대해 영이 무어라고 답을 할지 상상해본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상상 속에서 어떤 동의나 항변도 구하지 못한다는 사실만을 재차 확인하게 된다. 영은 아무것도 쓰지 않았고, 이제는 아무것도 쓸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살아 있기 때문에 그 문제에 대한 답을 결코 알 수 없다. 물론 내가 알 수 있는 확실한 사실이란 거의 없다 해도 좋을 것이다. 빈 편지지와 잉크가 가득 찬 볼펜은 무엇인가를 쓰기 위해 존재하는 물건이라는 것. 영은 죽었고, 나는 살아있다는 것. 그렇다. 그것뿐이다.


  「다섯 개의 프렐류드, 그리고 푸가」는 문학상 수상집에서 읽은 것으로 또한번 읽게 되어 다른 단편보다 또렷이 기억되었다. 타인의 죽음의 순간은 당연 강렬할 수밖에 없고 그에 대해 할 말은 그 모습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라는 것에서 일찌감치 눈치챘어야 했다. 대상이 정해진 편지, 그 속에 담긴 어느 글의 진의가 몰고 올 파장이, 충격이 내도록 머리에 가슴에 머문다. 아니 소설 전반을 뚜렷하게 지휘하는 단어, 죽음. 그 단어가 끌어들이는 무거움과 우울함의 파장이 작가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는 글 속에 잠긴다. 


절대로 쓰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가진다는 것의 의미를 알 것 같다. 한 작가에게 쓰고 싶지 않은 것은 곧 쓸 수 없는 것일 테다. 비열한 글쓰기란 자신과 타인의 삶을 팔아 연명하는 것도, 핍진한 허구를 구성하지 못하는 것도, 삶의 새로운 의미를 발굴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저 쓸 수 없는 것을 쓸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두는 것, 지금까지의 절망이 모두 허위였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떠난 이는 말이 없기에 그 이유들을 기억하는 것은 오로지 현재의 삶을 사는 이들이다. 그들은 눈앞에서 연인의 죽음을 목격하고 목격자로서의 이야기를 하며, 죽기 전날의 눈오는 밤, 술에 취해 찾아와 여러 물건들이 든 편의점 봉투를 내밀었던 친구의 사소한 몸짓들을 기억하며, 아내가 죽은 이유를 알기 위해 일기장을 보고 자취를 뒤따르며, 죽은 동생이 남긴 메모를 쫓아 비밀 모임 속 죽음을 마주하며, 불멸의 삶이기에 기꺼이 자살을 감행하는 예술가를 지켜본다. 이런 일들은 모두 죽은 자의 몫이 아니다. 죽음을 보는 것은, 그에 대한 해석을 하게 되는 것은, 그것에 대해 느끼는 것은 언제나 목격자, 함께 세상을 살던 자들이다. 그렇기에 죽음이란 타인에 의해서 더 강하게 각인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 죽음의 이야기는 그들의 삶이 아니라 내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재단되고 해석된다. 그것이 죽음을 바라보는 자의 특권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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