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네치를 위하여 - 제2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작
조남주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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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딩이라서 슬프다

고마네치를 위하여 ,조남주, 은행나무, 2016.


  “어쩐지 나는 이 해피엔딩마저도 슬프게 느껴졌다.”

  그랬다. 난 이들의 삶이 슬펐다. 아니 그렇게 말하기 위해선 소설의 엔딩을 제대로 정의해야 한다. 서울에서 가난하기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달동네 S동에서 살던 고마니 가족, 재건축, 재개발을 꿈꾸며 서른해를 넘기도록 버티던 그곳의 삶을 정리하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떠난다. 이것은, 해피엔딩일까.

  그토록 가난하고 힘겨운 S동살이가 마냥 칙칙하고 힘겹지 않은 것은 무겁게 이야기를 이끌지 않은 작가의 힘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다 지나간 일’이기 때문이다. 추억이란 그런 것이다. 기억은 그때를 아름다웠노라고 낭만적이라고 끊임없이 외친다. 그것은 지금 현재의 삶이 그닥 유쾌하지만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서른 여섯, 미혼이며 실직 상태의 더 이상 꿈꾸기도 없는 ‘고마니’는 유년 시절 자신이 꿈을 가지고 있던 시절을 회상한다. 그 시절이 환상적이고 아름다울 수 있었다면 아홉 살 소녀, 고마니가 꿈꾸고 노력하기 때문이었다.   

  서른 여섯 고마니가 일찌감치 깨달은 바, 모든 어른은 어린 시절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자신도 마찬가지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실패 이후의 삶을 살아낸다는 뜻이라 생각하는 고마니 인생의 첫 실패이자 꿈은 고마네치처럼 되는 것이다. 1988년 그해에 서울올림픽이 소녀에게 안겨준 체조 선수의 꿈은 동네 아이들과 체조 연습을 하는 것에서 시작해 체조 학원을 다니고 체조 학교를 다니는 것까지 이르게 된다. 희망이라곤 부동산 재개발뿐인 생활에서 고마니의 엄마는 딸의 꿈을 위해 S동살이와는 맞지 않는 지원을 해준다. 그래도 딸을 위해 무언가를 해줄 수 있었던 그때를 행복하게 여기는 엄마의 모습은 애잔하다.

  이름의 유사성으로 자신이 고마네치의 환생임을 주장하며 왕따 상황에서도 자존감을 높이기도 했지만 고마네치는 고마니의 인생에서 졸고 있는 뇌를 깨우는 것처럼 인생의 발자취를 확인하고 자신을 점검하도록 하는 위치이기도 했다. 그런 고마네치는 차우셰스코의 독재정권 아래서 힘겹게 살다가 망명했고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나 결혼해 안정된 상태가 되었다. 이런 고마네치의 해피엔딩을 슬프게 느끼는 건 루마니아 국민영웅, 체조선수 고마네치는 고마니에게는 닿을 수 없는 환상이었기 때문이다.

  비루한 삶을 살아가는 현실적 존재로 인식되기에 느껴지는 슬픔과 애틋함은 체조 선수가 되리라는 꿈이 결국 환상에서 현실적인 이유로 무너지는 것을 겪어야 하는 슬픔과도 맞닿아 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성장해가는 소녀 고마니가 꿈을 포기하게 된 계기가 성장의 징후라는 아이러니는 애잔하다. 아무리 체조선수가 되기 위한 재능이 부족했다고 할지라도, 준비하기엔 늦은 나이였다고 해도.

  이제 다시 고마니는 꿈꾸지 않는가. 진정 고마니 부모의 희망은 부동산뿐인가. 우리가 꿈꿀 수 있는 환경이란 결국 ‘주어진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는 건 실패한 경험보다도 더 쓰다. 성실과 정직으로도 녹록치 않은, 힘겹고 비루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건 얼마나 모순인가. 꿈꾸는 것조차 쉽지 않은 삶, 거듭거듭 실패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의 슬픔은 그 속에서 아름다운 삶의 태도를 잊어버리게 하기에 슬프고 아프다.


사실 고생스럽게 살아온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마음보가 더 못된 법이다. 이리저리 부딪히고 깨졌으니 둥글둥글한 게 아니라 뾰족뾰족 모가 나는 게 당연하다. 불법과 탈법과 비도덕을 동원해서라도 고생문에서 나오겠다는 게 정상이지 가시밭길이라도 바르고 착하게 가겠다는 건, 미친 거다.


  미친 세상. ‘너무 더럽고, 사람들이 구질구질하다며 그걸 가릴 수 있게’ 하라는 지시를 하면서 너무 더럽고 구질구질한 형태의 구조적 세상을 만들어가는 ‘그렇지 않은 이들’이 있다. 세상은 그들로 인해 상식이 비상식이 되고 때론 모난 사람들을 만들어 간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도 지속되는 삶에서 한없이 모가 난 순간마다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이게 삶이라고 고마니는 말한다. 다섯 아들이 전쟁터로 넘어가 돌아오지 않은 ‘넘어가면 고만인’ 고마니 고개에서 이름을 딴 고마니는 말한다. 거듭된 실패에도 특별히 우울하지 않은, 겨울에 해고당한 건 불행 중 다행이라고 고마니는 말한다. 십년을 일한 직장에서 해고되어 또다시 진로를 고민하는 중이지만 지금 이순간도 그저 열심히 살고 있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누구도 행복하지 않지만 누구도 우울하지 않게 그들의 시간을 열심히 살고 있을 고마니의 해피엔딩이 한없이 슬프게 느껴진다. 차우셰스코의 독재정권에서 경제적·정신적으로 핍박받으며 살다가 망명한 고마네치의 삶을 떠오르게 한다. 힘겨운 사람들을 더 힘겹게 만드는 ‘힘’ 속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고마니는 내게는 전혀 환상적인 존재가 아니라서, 고마니는 ‘나’라서 이 해피엔딩은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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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18 08: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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