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학기 동안 열심히 수업하며 기쁨과 보람을 느꼈으면 좋았겠지만 몇 분 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단련 또는 제련되었다는 느낌이 강하다. 대여섯 명의 아이들이 나란히 앉아 있는 교실에서는 학교폭력이라든가 인권침해 같은 분란이 일어나기도 쉽지 않다. 나라는 사람은 아이들에게 상처도 입지만 기운도 받는 사람이다. 그런데 아이들을 만나는 순간은 잠시 뿐. 좁은 교무실에서 보고 싶지 않아도 눈앞에 있고 알고 싶지 않아도 터득이 되는 불화의 정치를 보고 있자니 명치 통증이 가실 날이 없었다. 그럼에도 한 학기 소감을 물어오는 다정하신 선생님께는 미운 정, 고운 정이라는 한껏 순화된 표현으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가식이나 위선이 아니다. 실제로 그들이 부재중일 때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곰곰이 떠올리자면 짠하게 밀려오는 뭉클함 같은 것이 있다. 반면교사라 하지 않던가.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인데 나 역시 오래 머물면 그들과 다르지 않으리라.

 

그러한 환경은 나를 열정적인 독서가로 만들어 주었다. 에머슨부터 논어까지, 무릎을 치며 읽어 내려간 구절이 얼마나 많던가. 에둘러 말하는 인간학인 문학과는 다소 거리를 두게 되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인간학들에 관심이 갔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독서에 몰두하다 보니 얻은 것이라고는 인간에 대한 엄청난 통찰은커녕 견비통과 위장병뿐이지만 습관적으로 모든 것에 원인 제시, 의미 부여하기 좋아하는 나는 마치 신이 나를 일부러 이곳에 보내기라도 한 것처럼 꾸준하고 치밀하게 상대를 읽고, 이해하고, 미워하거나 좋아하고, 잽 또는 어퍼컷을 시도했다가는 뭐하는 짓인가. 혹시 내 인생이 트루먼쇼인가. 당혹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내게 밝다, 솔직하다, 깔끔하다, 등 긍정적 수식어를 붙여주며 나를 파악한 것처럼 얘기했지만 그들이 나의 내면에서 펼쳐지는 적나라한 파노라마를 볼 수 있다면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읽는 것 같은 혼란과 짜증에 경악해버리겠지.

 

그 사이 영달이는 내 주변 인물들의 이름을 다 외웠고 오가는 이야기 속에서 잘잘못을 대충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아직 나보다 말을 잘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관찰과 침묵에 능하다는 면에서는 훨씬 강자임에 틀림없다. 아이 앞에서 책잡히는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서 이 방학에도 쉬지 못하고 머리와 손발을 놀리는 나도 참 피곤한 인생이다. 상대의 가슴 한복판을 파고드는 독설은 나를 닮은 데다 남편의 서늘하기 짝이 없는 새침함까지 빼닮아서 당최 만만치가 않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이 가끔 머릿속에서 단단한 견고딕체로 둥둥 떠다니곤 한다. 면피할 수 없는 자리, 부모.

 

 

 

 

 

 

 

 

 

 

 

 

 

 

 

그리고 요즘 읽고 있는 책. 안개의 나라.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로 유명한 김광규 시인의 시선집이다. ‘크낙산의 마음’, ‘나무처럼 젊은이들도와 같은 시들은 너무 좋아서 옛 시집에서 찾아 여러 번 반복해서 읽기도 했는데 좋은 시들이 가득 담긴 양장본 시선집으로 나오니 나 같은 독자들에게는 선물과도 같다. 학생들에게는 아마도 과묵하고 점잖은 교수님이셨을텐데 시들을 읽다 보면 갈등, 회한, 연민 등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다채로운 감정들이 읽힌다. 요즘의 어떤 시들 마냥 수다스럽지도 않고 관념적이지도 않다. 지극히 평이하고 단순한 시어들인데 한 번 더 읽어보게 되고 곁에 두었다가 마음이 산란한 날, 위로나 수양 차원에서 읽어보고픈 시들이 많다. 누가 나를 보지 않아도 내가 나를 보고 있다는 자각이 들 때, 아픈 나를 나 스스로 치유하는 시간이 필요할 때, 시를 찾고 시를 읽게 되는 것 같다.

 

그 손

- 김 광 규

 

그것은 커다란 손 같았다

밑에서 받쳐주는 든든한 손

쓰러지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옆에서 감싸주는 따뜻한 손

바람처럼 스쳐가는

보이지 않는 손

누구도 잡을 수 없는

물과 같은 손

시간의 물결 위로 떠내려가는

꽃잎처럼 가녀린 손

아픈 마음 쓰다듬어주는

부드러운 손

팔을 뻗쳐도 닿을락 말락

끝내 놓쳐버린 손

커다란 오동잎처럼 보이던

그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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