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권오민 교수의 <인도철학과 불교>를 읽고 있다. 저자의 말에서 밝힌 것처럼 본 책은 입문서격의 서적이다. 물론 총서 자체가 입문을 위한 책들이니 더 말할 것은 없겠다.  다만 여전히 한자로 번역된 불교용어를 쓰고 있기에 완전히 처음 접하기에는 무리가 있겠다 싶다.  하지만 이정도는 양호한 것이 예를 들어 <유식학입문>이라는 책은 한자로 번역된 불교용어가 한 페이지를 가득채우고 있으니 한글세대에게는 엄청 버거울 것이다(그래서 아직 못 읽었다.그 이유 뿐만은 아니나...).


한형조 교수의 말처럼 이제 불교도 산속에서 벗어나 속세의 민중에게로 더 다가올때가 되었다. 다른 것보다도 한자로 범벅이 되어 있는 불교의 언어를 다시 한글로 옮기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입문의 상황에 있는 (한글세대에 속하는)본인의 입장에서 투덜 거려 본 것이다.

책은 제목과 같이 인도철학과의 불교의 관계를 밝히기 위하여 쓴 것이다.  인도철학과 불교는 인도라는 지리환경적 공간과 그에 기반한 사유 속에서 나온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둘은 전통과 反전통의 관계이긴 하나 공유된 것들도 많다.  삶이란 것이 괴로움이라는 것이 그런 기본적 인식이다. 그에 대한 벗어남에 대한 방법은 차이가 있지만. 

아주 어렵지는 않으나 쉽지는 않아서 100여페이지를 읽고 있다.  현재는 <우파니샤드>를 다루는데, 살짝 지겹다. 존재에서 존재가 나올 수 있지 비존재에서 어떻게 존재가 나오냐는 물음은 여전히 물음표다. <우파니샤드>에서 나오는 한 구절은 마치 진화생물학에서 하나의 생명이 어떻게 무수한 생명으로 나뉘어졌는지에 대한 설명을 연상시켰다.  도킨스의 <조상 이야기>도 어서 읽고 싶은데.  이럴때면 시간이 아쉽다.

 

 

 

 

 

 

 

 

 

 

 어제 막 주문한 <대지도론> 세트를 받았다. 어제 밤에 잠들기 전 1권을 잠시 열어보았다. 익히 알았던 것처럼 반야부의 <대품반야경>에 대한 나가르주나 보살의 주석서이다.  생각보다는 재미있다.  문답식으로 되어 있어 틈틈히 읽어도 상관은 없겠다. 한 30분이나 1시간 정도?  매일 이러다 보면 1년 동안은 읽으려나.  

 

 시작은 부처님이 마하반야밀다경을 설하시게 된 연유에 대한 답을 하는데, 뭐 부처님에 대한 깨달음에 의문을 가진자가 있어서,  삿된/거짓된 깨달음으로 이끄는 자가 있어서 뭐 블라블라... 이어지고, 중간에 부처님이 룸비니 동산에서 마야부인의 옆구리에서 나와 일곱 걸음을 걸은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선언한 것에 대한 변명? 정당화하는 답을 내놓고 있다. 뭐 요약하자면 이미 태어날때부터 깨달은 사람이었으나, 그렇게 되면 근기가 모자란 사람이 '저 분은 원래 그런 사람이라 그런거고 나같은 범부 어렵겠구나'라는 마음에 지레짐작으로 깨달음에 대한 정진을 포기할까봐 일반 대중처럼 성장과정을 보낸 것이라는 것이다.  마치 기독교 신학에서  악이 존재하는것에 대한 독특한 변명 내지 정당화 설명을 들었던 것이 순간 생각이 났다(아마 지의 정원이란 책에서 읽었던 것 같다).

 

이전에 읽은 <불교의 탄생>에서는  이와 같은 설화를 실제로 부처님이 깨닫고 난 이후 처음 설법하려는 과정에서 했던 선언인데 전승되어 오면서 이런 형태가된 거라고 주장했던 것을 읽었는데...  잘 모르겠다. 이런 변명, 정당화에 대한 내용이 흥미롭기는 해도 종국에는 내 관심사는 크게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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