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당전쟁 연구
이상훈 지음 / 주류성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며칠전에 서영교<나당전쟁사 연구>를 읽고 이어서 읽었다. 개인적으로 훨씬 균형감 있는 서술이 좋았다. 서영교의 저서는 너무 나당전쟁의 개전 이유부터 전개과정,  종전까지 외부적 요인에 치중하고 있어서 납득하기 어려웠다.  크게 나당전쟁에 대한 연구에서는 국내학계는 신라에 비중을 크게 두어 신라를 전쟁의 승리자로 강조하는 한편 국외학계에서는 한반도 방기론. 즉, 당시 서역의 토번의 발호로 방기했다는 것으로 당시 국제정세를 강조한다.  기존에 국내학계는 민족주의적 방향으로 지나치게 신라의 승리를 부각하는 바,  서영교는 그에 대해 반작용으로 국제정셀르 강조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지나치게 신라의 역할을 축소하고 나당전쟁기간 동안 벌어진 전투상황 그와 관련된 각 국 수뇌부의 입장을 도외시 한면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결국 당시 토번의 강성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나당전쟁 기간 동안 있었던 전투의 면면을 살피지 못했던 것이다.   그와는 달리  본서는 나당전쟁의 전개과정과 그에 대한 의미를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나당전쟁은 670년 3월 설오유,고연무의 연합군이 요동의 오골성을 선제공격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고 보지만, 실제 나당전쟁의 개전은 신라가 백제고지의 일부 성을 공략하는 669년을 보아야 한다고 저자는 이야기 한다.

 

 개전했다는 의미는 분명히 상대국과의 전면전을 각오하고 여러가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수행한다는 것인데 669년 4월~5월에 백제고지의 공략은 그 일환으로 볼 수 있어 보인다. 신라는 나당연합군으로 백제와 고구려에 대한 군사작전을 수행하면서 상당한 군사주권의 침해를 받은바 있고(지휘통솔권 부터 하여 장군임명, 병력증발 군사작전권등의 침해가 있었다고 한다)  연합군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신라와의 정보공유가 전혀 되지 않아 심지어 신라왕이 직접 가는 경우에도 당의 군사들이 물러났다는 소리를 뒤늦게 듣고서야 돌아갔다는 삼국사기의 기사가 상당 인용된다.

 

 다른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이와 같은 당의 처사는 심각한 위기상황으로 이어져 앞서 당과 연합하여 멸망시킨 고구려와 백제의 마지막 모습이 보였을지 모른다. 이에 신라는 당과의 개전을 결심하고 전쟁준비를 하여 요동에 선제공격을 가한다.  그런데 이 군의 구성은 사찬 설오유 1만의 군대와 고구려부흥군인 고연무 1만의 연합이다.  사실 이렇게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연합군까지 편성했다는 것은 최소 3,4개월 이상은 협의가 진행되었을 것인데, 이 점에서도 670년 이전을 나당전쟁의 시작점으로 잡는 것은 일리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재미있는 것은 설오유의 신분이다.  보통은 진골귀족이 장군을 맡는데 설오유는 진골귀족이 아니며 6두품으로 짐작이 된다. 왜 이런 예외가 있었고, 이들 연합군의 역할은 무엇인가?  669년에 전쟁준비의 조처로 이루어진 오역죄를 지은 자를 제외한 범법자를 사면한바가 있는데,  사면으로 풀린 이들 가운데서 삼국항쟁 당시 포로로 잡힌 백제와 고구려의 장정들도 있었을 것으로 보고 이들이  저자는 설오유가 이끈 1만 군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으리라고 본다.  일리가 있긴 해도 단순히 저자의 추측에 지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도 든다. 하지만 저자가 이렇게 추측한것에는 당시 설오유 고연무 연합군이 가지는 목적을 생각하면 그렇게 유추할 수도 있지 않나 싶다.  저자는 이 연합군을 목적을 당의 시선을 백제고지에서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부흥세력에 대한 지원도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였을 것이다(물론 고구려부흥군의 소모시키련느 부분도 있을 것이고.). 상당 부분 그 부대에 부여한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  백제고지의 83개의 성을 획득하였고 671년에는 소부리주를 설치하여 도독을 임명하기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당의 웅진도독부의 구원군을 보내나,  백제고지에서의 판도를 바꾸기에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나당전쟁 과정 가운데  한반도 방기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토번의 강성에 따라 한반도에 휴지기가 있었고 최종적으로 한반도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지만, 본서의 저자에 따르면 676년 윤3월 이전까지는 토번과 신라의두 전선을 유지하는 것이 당시 당의 전략이었다 한다.

 

 일례로 670년 4월 나사도행군을 편성하여 설인귀에게 맡기면서도  670년 3월 고간과 이근행에게 따로 행군을 편성하여 고구려부흥군을 진압하러 보낸 것으로도 증명된다.  고간과 이근행등의 당장이 당 내부의 중요도, 무게감등이 낮다고 하더라도 결코 당 내부에서 한반도를 방기한 것은 아니란 것이다. 거기다 674년에 유인궤가 계림도총관으로 임명되어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하는 등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당이 서역로 회복을 집중하는 와중에서도 대규모 군을 편성하는 등 한반도에 야욕을 꺽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이런 당이 군사전략을 전격수정하는 것은  토번이 직접적으로 당의 장안으로 진격해올 수 있는 위험에 처해서였다.  물론 저자는 그 시기도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승기를 잡는 매초성 이후의 일로 보고 있다.(676년 윤3월) 이와 같은 예증이 아니라도 신라의 승리로 정리할 수 있다는 점은 나당전쟁이 끝난 이후의 당 조정의 여러 처사를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나당전쟁을 끝낸 이들에 대한 포상도 보이지 않으며, 반군부 세력인 이경현을 중서령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그리고 개원과 사면, 나당전쟁에 주요 군사 자원을 징발당한 지역인 하북도,하남도,강남도에  순무사를 보내는 등 사람들의 민심을 달래는데 노력을 했다는 것에도 증명된다.

 

하나는 원하던 것(백제 고지와 고구려의 일부 영토)를 얻었으며 하나는 원하는 것(한반도)를 얻지 못했다.  그러면 누구를 승리자로 보아야 하는가?

 

 '...결국 신라는 8년에 걸친 당과의 장기전을 치루면서 한반도를 굳건히 지켜내었다. 이러한 나당전쟁의 개전과 종전은 국제정세의 영향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신라의 역량과 주도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나당전쟁에서 만약 신라가 당의 전략이 토번을 중시으로 전환되기 이전에 당에게 패배하였다면, 당은 한반도의 내지화를 강화하고 만주에 대한 장악력도 높혀 나갔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경우 만주지역에서 발해의 건국이나 티베트지역에서 토번의 발호도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토번의 발호 때문에 나당전쟁이 종전되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당군의 신라 원정 실패로 인해, 토번이 강성해질 수 있는 여유과 기회가 생기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백제와 고구려의 패망을 목도한 신라의 목표는 대의명분이 아니라 생존 그 자체였으며,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 최강대국에 맞서 그것을 성취하였던 것이다.(p.322)'   

 

  저자의 마지막 말처럼 토번의 강성으로 신라가 숨통이 트이게 된 것이라 할수도 있지만 반면에 토번 또한 신라를 비롯한 고구려,백제로의 원정으로 강성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지나치게 당시 국제정세를 강조하는 것도,  신라 내부의 역량만으로 이루어낸 승리라고도 볼 수 없다. 당 고종이 678년에 신라의 재침을 시도하려고 했던 것처럼 토번이 쉽게 제압이 되었거나 한반도에 원정하는 가운데도 당을 둘러싼 제부족, 제국등이 안정이 되어 있었더라면?  신라의 승리를 장담 하지 못했을 것이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꼴이 날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고구려가 멸망한 것도 나당연합에 의해서이나, 당이 산발적으로 고구려의 체질을 허약하게 하여 내부 분열을 일어나게 하는 등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처럼  힘들었을 것이다. 동원할 수 있는 인적 물적자원에서 차이가 나지 않는가. 

 

여하튼 본서는 그런 양극단의 주장사이에서 균형감있게 나당전쟁의 실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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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18-04-18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척 잘 쓰신 리뷰네요. 읽기만 해도 흥미가 생겨요.

가넷 2018-04-18 22:3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서영교의 나당전쟁사 연구보다는 훨씬 균형감이 있어 좋네요.그래도 두 권다 읽어보시면 더 재미있으실 듯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