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게시물은 일부 재편집한 콘텐츠임을 밝힙니다*

 

 

 

 

 

EP. 5

약속 시간에 자주 늦다

 

 

 



요코의 단점다운 단점이라고 하면 자주 약속 시간에 늦는다는 것이다. 

요코는 ‘눈앞에서’라는 말을 마치 인사말처럼 입에 달고 살았다. “눈앞에서 전철 문이 닫혀서요”, “눈앞에서 마지막 택시를 놓쳐서요” 등등.

어느 날은 내가 약속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는데, 평소와 달리 요코가 먼저 와 있었다.





“어머, 오늘은 당신이 늦었네요.”


그러고는 식당 주인을 향해 물었다.


“저기요, 저 지금 20분 전에 와서 쭉 기다리고 있었죠?”


식당 주인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 시간을 지켰다는 것만으로, 그것이 20분 전이든 아니든 간에 지금까지 늦었던 시간을 벌충해주지도 않는데 하는 생각에 나는 미소가 지어졌다. 

요코가 화장실에 잠깐 간 사이 식당 주인이 와서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진실을 알려줬다.


“사실 아내 분은 2~3분 전에 오셨어요. 거짓말을 해도 눈감아달라고 하시더라고요. 모처럼 일찍 오신 게 무척 즐거우셨나 봐요.”


그로부터 1~2년 후,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지가사키 시내의 단골 국숫집에서 만나기로 했을 때 요코가 나타난 시간은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흐른 뒤였다. 

5분이나 10분 정도 늦는 것은 놀랄 일도 아니고, 그 즈음에는 요코 나름대로 노력하면서부터 지각하는 횟수도 줄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나 많이 늦었을까?

국숫집은 손님의 회전율이 빠르다. 나 혼자 아무것도 먹지 않고 식탁을 차지하고 앉아 있으니 따가운 눈총이 쏠리는 것 같았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마침내 미안하다는 말을 연발하며 뛰어 들어온 요코는 지금까지 본 적 없던 창백한 얼굴이었다.


“요 근처에서 앞차랑 접촉 사고가 났어요. 난 확실히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큰 사고를 일으켜 두 번 다시 차를 타지 않게 된 나와는 달리, 요코는 지금껏 접촉 사고 한 번 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다행히 다친 사람이 없고 상대방의 자동차 수리비만 물어주면 되는 정도였다.


“그 정도로 끝났으니 다행이네.”

“미안해요.”


요코를 위로해줬지만, 그녀는 미안하다고 거듭 말하면서도 아직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나이 들었잖아. 그런 일도 일어날 수 있지. 먼저 주문부터 해.”

“나이 들었다고 해도….”


요코는 어지간히 충격을 받아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인지, 접촉 사고에 대한 일을 머릿속에서 쉽사리 떨쳐버리지 못했다.


“아무튼, 얼른 국수 시켜.”


나는 꾸짖듯이 재촉했다. 하지만 요코는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듯억울한 표정이었다.





그것은 나이 들었기 때문에 생긴 사고가 아님을 나중에야 알게 됐고, 나는 ‘진작 알아차렸더라면…’ 하고 오랫동안 후회했다.

그 사고는 사실 요코의 암세포가 이미 혈액으로 흘러들어가 뇌 기능을 저해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고였다. 그런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_<무심코 당신을 부르다가> 출간 전 연재 끝.

 

 

 




 


 

 


 

 


 


 

 

<무심코 당신을 부르다가>

반생이 넘는 시간을 함께한 부부의 첫 만남에서부터 소박하고도 별난 일상, 남편밖에 모르는 아내의 사랑스러운 모습, 그리고 긴 이별을 준비하기까지의 삶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낸 편지.

힘들고 숨 가쁜 인생을 동행하는 사람, 떠올리면 미안하고 고마운 누군가가 당신 곁에도 있습니까?

 

저자_ 시로야마 사부로

일본 경제소설의 아버지. 해박한 지식과 통찰로 기업과 조직의 생리, 직장인들의 애환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경제소설을 잇달아 발표하며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그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이전 소설과는 전혀 다른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내의 말, 표정, 사소한 행동까지 함께 살아온 날들을 꼼꼼하게 써내려가며 아내를 잃은 슬픔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환기시켰다.

그러던 중 2007년에 세상을 떠났고, 미처 완성하지 못한 원고를 그의 서재에서 발견한 둘째 딸 이노우에 기코가 편집부에 전달해 비로소 《무심코 당신을 부르다가》가 완성됐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먼저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는 남편의 담담하면서도 진심어린 고백으로 독자의 마음을 울렸고, 일본 TBS TV 드라마로도 방영되어 화제를 일으켰다.
대표작으로 《소설일본은행(小説日本銀行)》《황금의 나날(黄金の日日)》《관료들의 여름(官僚たちの夏)》《임원실 오후 3시(役員室午後三時)》《가격파괴(価格破壊)》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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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2017-08-07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마지막이라니요 ㅠㅠ 일주일 동안 재밌게 보았습니다.. 출간되면 꼭 사서 보고 싶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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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4

오로라를 보다

 


 



둘이서 오로라를 보러 간 적도 있다.

전부터 한 번쯤은 오로라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알래스카의 페어뱅크스에 가면 1년에 250일 동안이나 오로라가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니 1주일 동안 머물면 분명히 오로라를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여행 일정을 잡았다.


분명히 오로라는 떴다. 그 증거로 오로라의 자기가 그래프로 기록되는 것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하지만 오로라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기대하던 밤이 돼도 주변은 온통 밝기만 했다. 여름철이었기 때문에 알래스카는 백야였던 것이다. 이래서는 오로라가 보일 리가 없었다. 나는 망연자실해졌다.





“겨울에 오면 확실히 볼 수 있어요. 아주 아름다워요.”


그런 내가 딱했는지 현지인이 다가와 위로했다.

하지만 나는 추위를 잘 타기 때문에 일부러 여름에 온 것이었다. 결국 평생 오로라와는 인연이 없겠구나 하고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과학 지식이 미천하다고 해도 어둠이 잘 찾아오지 않는 백야의 계절에 일부러 오로라를 보기 위해 머나먼 알래스카까지 찾아오다니. 쓸데없이 시간과 비용을 낭비했다. 

요코 역시 과학과는 담을 쌓았기 때문인지 “정말이지 당신은 참!” 하고 나를 탓하거나 불평을 늘어놓기보다 “아, 그렇구나. 아쉽네요”라고 중얼거리기만 했다. 너무나 싱거운 반응에 내가 다 허탈해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생각지도 못한 형태로 그날에 대한 보상을 줬다.

그로부터 2~3년 후에 요코와 함께 야간 비행기를 타고 유럽으로 향하고 있을 때였다. 밤이 깊어지자 기내 전등 불빛은 약해졌고 승객들은 서서히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나만 독서 등을 켜고 책을 읽고 있었다. 독서 등은 옆자리와 딱 중간의 천장에 있었기 때문에 평소라면 옆자리 손님에게 피해를 줄까 봐 불을 켜기 힘들었겠지만, 이날은 옆자리에 요코가 앉아 있었기 때문에 상관없었다.






“독서는 당신의 일이잖아요.”


그 말과 함께 독서 등 켜는 것을 허락해준 그녀는 이내 잠에 빠져들었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스튜어디스가 발소리를 죽인 채 다가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손님, 창밖에 오로라가 나타났어요.”


그 말에 창문을 연 나는 황급하게 요코를 깨웠다. 독서 등을 끄고 우리 부부는 뺨을 맞댄 채 창 아래를 내려다봤다.

우리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거대한 빛의 향연.

빛의 장막은 색깔과 반짝임을 시시각각 바꾸면서 하늘 가득 평온하게 춤추고 있었다. 그것도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마치 우리 부부만을 위해 하늘에서 연출해준 선물 같았다. 

우리는 손을 맞잡고 함께 여행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느꼈다. 

새삼스레 가슴이 뜨거워졌다.


 


 


_<무심코 당신을 부르다가> 출간 전 연재 5회 계속

 

 







 

<무심코 당신을 부르다가>

반생이 넘는 시간을 함께한 부부의 첫 만남에서부터 소박하고도 별난 일상, 남편밖에 모르는 아내의 사랑스러운 모습, 그리고 긴 이별을 준비하기까지의 삶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낸 편지.

힘들고 숨 가쁜 인생을 동행하는 사람, 떠올리면 미안하고 고마운 누군가가 당신 곁에도 있습니까?

 

저자_ 시로야마 사부로

일본 경제소설의 아버지. 해박한 지식과 통찰로 기업과 조직의 생리, 직장인들의 애환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경제소설을 잇달아 발표하며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그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이전 소설과는 전혀 다른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내의 말, 표정, 사소한 행동까지 함께 살아온 날들을 꼼꼼하게 써내려가며 아내를 잃은 슬픔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환기시켰다.

그러던 중 2007년에 세상을 떠났고, 미처 완성하지 못한 원고를 그의 서재에서 발견한 둘째 딸 이노우에 기코가 편집부에 전달해 비로소 《무심코 당신을 부르다가》가 완성됐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먼저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는 남편의 담담하면서도 진심어린 고백으로 독자의 마음을 울렸고, 일본 TBS TV 드라마로도 방영되어 화제를 일으켰다.
대표작으로 《소설일본은행(小説日本銀行)》《황금의 나날(黄金の日日)》《관료들의 여름(官僚たちの夏)》《임원실 오후 3시(役員室午後三時)》《가격파괴(価格破壊)》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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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2017-08-04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한 기회로 보게 된 오로라라니..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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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3

여행 동반자

 





우리는 여행을 자주 했는데, 여행지에서 일어나는 흔한 다툼도 전혀 없었다. 왜냐하면 서로 행동 범위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취재 여행을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갈래?”라고 물으면 요코는 항상 “갈래요”라고 곧바로 대답했다. 그런데 요코는 매번 어느 나라 또는 어느 지방에 가는지는 거의 물어보지 않았다.


“당신은 여행을 좋아한다면서도 어딜 가든 상관없다고 하는데, 그래서야 정말로 여행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겠어?”


언젠가 이렇게 물어봤더니 요코는 다음과 같은, 일종의 명언을 남겼다.





“집안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면 어디든지 좋아요.”


‘집안일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여행을 떠나는 요코는 명승지나 유적지 등은 안중에도 없고, 기념품을 쇼핑하느라 돌아다니기 바빴다. 

나는 나대로 흥미로운 명승지나 유적지를 돌아다니느라 한나절을 모두 보냈다. 또는 호텔에서 그 지방의 신문과 잡지를 읽으면서 맥주나 와인을 마셨다.

그렇게 따로 행동할 거라면 부부끼리 여행을 가는 의미가 없지 않느냐는 말을 들을 법도 하지만, 우리는 세 끼 식사만큼은 늘 함께하므로 그것으로 만족했다.


요코의 쇼핑은 여행지에서만 그치지 않았다. 

해외에서 열차 여행을 할 때도 차내 판매원에게서 물건을 사기도 하고, 플랫폼에서 정차 시간이 길어질 것 같으면 역 매점에서도 물건을 샀다.





단 한순간도 허투루 쓰지 않는, 이른바 요코만의 쇼핑법이다. 

“이 나라의 동전을 남기고 다른 나라로 가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동전 지갑을 들고 플랫폼의 매점으로 달려가곤 했다. 


그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사건에 휘말렸던 적이 있었다. 

국제 열차가 스위스에서 이탈리아로 넘어갈 때 요코는 언제나처럼 남은 스위스 동전을 다 써야 한다며 동전 지갑을 들고 플랫폼의 매점으로 향했다. 늘 걱정하던 몸무게는 잠시 잊은 듯 가볍게 달려갔다.

그런데 몇 분 후에 국경 경찰이 순찰을 돌다가 내 옆에 놓인 요코의 핸드백을 수상히 여겼다. 내가 사정을 설명해도 경찰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 안에 돈이 얼마 들어 있나요?”


경찰이 물었다. 

묘한 질문이었지만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그런 건 알 턱이 없지요.”


나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답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경찰은 호루라기 같은 물건을 입으로 불었고, 그 소리를 들은 또 다른 경찰이 달려왔다. 아내가 핸드백에 얼마나 돈을 넣고 다니는지 모르는 사람은 남편이 아닐 것이라는 판단인 듯했다.

서양에서는 ‘레이디 퍼스트’라는 둥 여자를 위해주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아내를 꼬치꼬치 감시하는 것이 부부 사이인 걸까? 고개를 갸웃하는 내게 경찰들은 수갑까지 채울 기세였다. 변명은 고사하고 제대로 설명하기도 힘들었다.


그러는 와중에 요코가 태연하게 돌아왔다. 비스킷 봉지 같은 것을 손에 들고서.

“알겠습니다”나 “죄송합니다” 같은 말은 한마디 하지 않은 채 경찰들은 사라졌다. 무례한 건지, 인종차별인 건지는 모르겠다. 그저 나 혼자 발끈한 채 열차는 국경의 역을 뒤로했다.

 

 


 


_<무심코 당신을 부르다가> 출간 전 연재 4회 계속

 

 






 

<무심코 당신을 부르다가>

반생이 넘는 시간을 함께한 부부의 첫 만남에서부터 소박하고도 별난 일상, 남편밖에 모르는 아내의 사랑스러운 모습, 그리고 긴 이별을 준비하기까지의 삶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낸 편지.

힘들고 숨 가쁜 인생을 동행하는 사람, 떠올리면 미안하고 고마운 누군가가 당신 곁에도 있습니까?

 

저자_ 시로야마 사부로

일본 경제소설의 아버지. 해박한 지식과 통찰로 기업과 조직의 생리, 직장인들의 애환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경제소설을 잇달아 발표하며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그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이전 소설과는 전혀 다른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내의 말, 표정, 사소한 행동까지 함께 살아온 날들을 꼼꼼하게 써내려가며 아내를 잃은 슬픔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환기시켰다.

그러던 중 2007년에 세상을 떠났고, 미처 완성하지 못한 원고를 그의 서재에서 발견한 둘째 딸 이노우에 기코가 편집부에 전달해 비로소 《무심코 당신을 부르다가》가 완성됐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먼저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는 남편의 담담하면서도 진심어린 고백으로 독자의 마음을 울렸고, 일본 TBS TV 드라마로도 방영되어 화제를 일으켰다.
대표작으로 《소설일본은행(小説日本銀行)》《황금의 나날(黄金の日日)》《관료들의 여름(官僚たちの夏)》《임원실 오후 3시(役員室午後三時)》《가격파괴(価格破壊)》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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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2017-08-03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게 바로, 이상적인 부부의 모습이 아닐까요? 서로가 무엇을 하든 ‘믿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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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2

요코와 원숭이

 

 

 

 

가고시마·사쿠라지마·기리시마 등 삼도 신혼여행 코스를 돌아다닌 후 온천으로 유명한 도시인 벳푸(別府)로 향했다.

둘이서 온천에 몸을 담그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방문하고 싶은 장소가 있었다. 그래서 벳푸에서는 1박만 하고 다음 날에는 다카사키 산으로 향했다.

다카사키 산은 야생 원숭이를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동물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온천보다 더 기대되는 장소였다.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익숙한 야생 원숭이가 벤치 등받이까지 다가와 모자와 코트 차림으로 앉아 있는 요코와 나란히 휴식을 취했다.

어딘가에 둘의 흥미를 끄는 것이 있었는지 요코와 원숭이는 같은 각도로 얼굴을 돌려 한 지점을 바라봤다. 요코와 원숭이는 서로 닿을 듯 말 듯 한 가까운 거리에서 옆얼굴을 나란히 했다.

 

 

 

 

서로에게 관심이 없으면서도 한 지점을 바라보고 있는 요코와 원숭이는 자연스러운 하나의 풍경처럼 비쳤다.
사람과 원숭이가 하나의 풍경으로 녹아든 채 얼굴을 나란히 한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얼른 그 장면을 카메라로 클로즈업해 셔터를 눌렀다.

감정 표현을 잘하지 못하는 나는 사진에 찍히는 것이 고역스럽다. 기계를 다루는 것도 서툴기 때문에 남의 사진을 잘 찍어주지도 못한다. 그래서 요코와 원숭이가 함께 찍힌 이 사진은 신혼여행에서 유일하게 남은 사진이 됐다.

 

 

 


“내가 마치 원숭이랑 신혼여행을 간 것 같네요.”


세월이 흘러 규슈에서 남긴 단 한 장의 사진을 볼 때마다 요코의 군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원숭이 떼 속의 한 마리 같아요”, “나를 원숭이 취급해서 즐거웠나 봐요” 하는 투덜거림도 덤으로 들었다.
원망을 듣는 처지가 됐지만 원래 벳푸에 간 이유는 온천보다는 원숭이 구경이었기 때문에, 요코에게는 불만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동물을 좋아하는 내겐 무척 마음에 드는 구도의 사진이었다.
나의 동물 애호는 그 후에도 쭉 이어져서 어느 나라에 가든 반드시 동물원에 들러야 했고, 어떨 때는 느닷없이 집 주변에 연못을 만들어 펭귄을 기르자고 말해서 그녀를 어이없게 만들었다.
여하튼 펭귄은 요코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했다.


올 때는 기나긴 열차 여행이었지만, 갈 때는 벳푸에서 고베까지 세토나이 해를 가로지르는 배 여행이었다. 로맨틱하게 여행을 끝내고 싶어서 배 안에 화장실이 딸린 개별실을 어렵사리 잡았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늦은 밤에 그 화장실이 문제를 일으켰다. 
당시에는 아직 물에 녹는 휴지가 없어 변기가 자주 막히곤 했는데, 그 바람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 것이다. 책임은 쌍방에게 동등하게 있었지만, 화장실을 뚫는 작업은 내 몫이었다. 팔을 걷어붙이고 땀을 뻘뻘 흘리며 뭉쳐 있는 화장지를 빼내기 시작했다.


 

 

 


“잠잘 시간도 없겠어요.”


요정은 살짝 어리광을 부리면서 푸념을 했다.
고베에 도착하자 부둣가에 지어져 있는 호텔이 마음에 들어 즉석에서 예정에 없던 2박을 더 했다.
나고야로 출발하기 전 요코는 집에 전화를 걸어 무사히 여행을 끝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때 그녀는 “정말로 최고의 여행이었어”라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훗날 처남이 매부랑 얼마나 좋았으면 그러나 싶어 민망했다고 한다. 나 역시 그의 말을 듣고 쑥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_<무심코 당신을 부르다가> 출간 전 연재 3회 계속

 

 

 




 

<무심코 당신을 부르다가>

반생이 넘는 시간을 함께한 부부의 첫 만남에서부터 소박하고도 별난 일상, 남편밖에 모르는 아내의 사랑스러운 모습, 그리고 긴 이별을 준비하기까지의 삶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낸 편지.

힘들고 숨 가쁜 인생을 동행하는 사람, 떠올리면 미안하고 고마운 누군가가 당신 곁에도 있습니까?

 

저자_ 시로야마 사부로

일본 경제소설의 아버지. 해박한 지식과 통찰로 기업과 조직의 생리, 직장인들의 애환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경제소설을 잇달아 발표하며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그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이전 소설과는 전혀 다른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내의 말, 표정, 사소한 행동까지 함께 살아온 날들을 꼼꼼하게 써내려가며 아내를 잃은 슬픔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환기시켰다.

그러던 중 2007년에 세상을 떠났고, 미처 완성하지 못한 원고를 그의 서재에서 발견한 둘째 딸 이노우에 기코가 편집부에 전달해 비로소 《무심코 당신을 부르다가》가 완성됐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먼저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는 남편의 담담하면서도 진심어린 고백으로 독자의 마음을 울렸고, 일본 TBS TV 드라마로도 방영되어 화제를 일으켰다.
대표작으로 《소설일본은행(小説日本銀行)》《황금의 나날(黄金の日日)》《관료들의 여름(官僚たちの夏)》《임원실 오후 3시(役員室午後三時)》《가격파괴(価格破壊)》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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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2017-08-02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나이 든 시점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쓴 편지인가 봅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가 얼마나 행복한 날들이었을지.. 무엇보다 아내와 함께한 순간들이니 더 소중하게 느껴졌을 것 같아요. 나이가 들수록 자꾸만 옛날이 그리워지곤 하는데, 저자는..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네요.

예문아카이브 2017-08-02 11:22   좋아요 0 | URL
추억은 마음속에 그리움을 남기곤 하지요..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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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1

나의 아내, 요코

 

 

 

 

2층 구조의 강당에서 문예 강연회가 열렸다.
무슨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까?

사회자의 소개와 함께 박수를 받으며 연단에 선 나는 고민에 빠졌다. 물론 이야기를 시작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풀어나갈 수 있겠지만, 마음과 표정은 아직 긴장돼 있었다.

그런 기분을 떨치고 입을 열려는 순간, 2층석 맨 앞줄의 가장자리에 있던 여성 관객이 눈에 들어와 갑자기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요코가 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눈과 눈이 마주친 순간, 요코는 양손을 머리 위아래로 가져가서 장난스러운 몸짓으로 ‘셰~!’ 동작을 취했다. 인기 만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행동이자 텔레비전 광고 등으로도 잘 알려진 우스꽝스러운 개그였다.
그것을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곳에서 하다니. 화내야 하나, 웃어야 하나. 그저 “졌다, 졌어” 하고 내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그 위기를 어떻게든 넘기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강연을 끝내고 대기실로 돌아오자 요코가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찾아왔다. 말로는 거듭 “미안해요”라고 하면서도 얼굴과 몸에는 웃음이 묻어 있었다.


“당황했잖아.”
“미안해요. 이제 안 그럴게요.”
“그래야지.”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지만 몇몇 관객은 눈치 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강사 대기실에 오래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대기실 사람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다음 스케줄에 쫓기는 척하면서 그곳을 나왔다. 마침 지나가던 택시를 잡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긴자(銀座)로 가주세요."



내가 운전사와 얼굴을 마주치기도 전에 요코가 얼른 대답했다.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뒤이어 요코는 목적지인 가게 이름을 운전사에게 알려줬다.
나는 학생 시절을 동안 긴자까지 나가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결혼 후에도 마찬가지로 긴자와는 별 인연 없는 생활을 보냈다.

한편 요코는 긴자를 가로질러 신바시(新橋) 역까지 걷는 것이 유일한 건강법이라고 자칭했다. 그녀는 걸으면서 이따금 바겐세일 매장에 들러 저렴한 물건을 건져오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눈요기하는 게 더 즐거운 듯했다. 무작정 구경하고 또 구경하면서 걷는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틀림없이 인생의 즐거움 중 하나였을 것이다.

 

저녁 식사를 하던 중 텔레비전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미국에서 유골을 인공위성에 실어 지구 주위를 빙글빙글 돌게 만든다는 소식이었다. 문자 그대로 죽은 사람을 천국에서 영면시킨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요코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보, 당신은 죽어서도 절대 저렇게 하지 말아줘요.


이런 종류의 뉴스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그녀였다. 나는 반쯤 어처구니가 없고, 반쯤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왜 그런 일까지 걱정하는 거야?
당신은 비행기를 타거나 하늘을 나는 걸 좋아하잖아요. 분명히 당신은 죽어서도 하늘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 또 긴자에 가는 거야?하고 한숨지을지도 몰라요.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걱정한다.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고 대답했다.


그래, 좋아. 안 그럴게. 일단 저렇게 눈이 핑핑 돌아가는 걸 견딜 수도 없을 테니 말이야.
아아, 다행이다.


요코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또 이렇게 덧붙였다.


안심해요. 당신이 감시하지 않아도 절대 쓸데없는 물건은 사지 않을 테니까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대화를 하는 부부가 또 있을까.

 

 

 

 

_<무심코 당신을 부르다가> 출간 전 연재 2회 계속

 

 

 

 


 

 

<무심코 당신을 부르다가>

반생이 넘는 시간을 함께한 부부의 첫 만남에서부터 소박하고도 별난 일상, 남편밖에 모르는 아내의 사랑스러운 모습, 그리고 긴 이별을 준비하기까지의 삶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낸 편지.

힘들고 숨 가쁜 인생을 동행하는 사람, 떠올리면 미안하고 고마운 누군가가 당신 곁에도 있습니까?

 

저자_ 시로야마 사부로

일본 경제소설의 아버지. 해박한 지식과 통찰로 기업과 조직의 생리, 직장인들의 애환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경제소설을 잇달아 발표하며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그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이전 소설과는 전혀 다른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내의 말, 표정, 사소한 행동까지 함께 살아온 날들을 꼼꼼하게 써내려가며 아내를 잃은 슬픔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환기시켰다.

그러던 중 2007년에 세상을 떠났고, 미처 완성하지 못한 원고를 그의 서재에서 발견한 둘째 딸 이노우에 기코가 편집부에 전달해 비로소 《무심코 당신을 부르다가》가 완성됐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먼저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는 남편의 담담하면서도 진심어린 고백으로 독자의 마음을 울렸고, 일본 TBS TV 드라마로도 방영되어 화제를 일으켰다.
대표작으로 《소설일본은행(小説日本銀行)》《황금의 나날(黄金の日日)》《관료들의 여름(官僚たちの夏)》《임원실 오후 3시(役員室午後三時)》《가격파괴(価格破壊)》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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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빈 2017-08-01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기대되는 에세이네요. 요즘 나오는 에세이 스타일은 읽다보면 감정소모가 많아서 굉장히 피곤하다고 느껴지거든요. 표지의 바다와 하늘이 예쁘네요^^

예문아카이브 2017-08-01 14:15   좋아요 0 | URL
윤성빈 님, 감사합니다! ^^ 8월 7일까지 출간 전 연재 진행할 예정이니,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기대 부탁드립니다.

햇살 2017-08-02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잔잔한 스토리네요. 다음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예문아카이브 2017-08-02 11:18   좋아요 0 | URL
달 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