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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1

나의 아내, 요코

 

 

 

 

2층 구조의 강당에서 문예 강연회가 열렸다.
무슨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까?

사회자의 소개와 함께 박수를 받으며 연단에 선 나는 고민에 빠졌다. 물론 이야기를 시작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풀어나갈 수 있겠지만, 마음과 표정은 아직 긴장돼 있었다.

그런 기분을 떨치고 입을 열려는 순간, 2층석 맨 앞줄의 가장자리에 있던 여성 관객이 눈에 들어와 갑자기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요코가 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눈과 눈이 마주친 순간, 요코는 양손을 머리 위아래로 가져가서 장난스러운 몸짓으로 ‘셰~!’ 동작을 취했다. 인기 만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행동이자 텔레비전 광고 등으로도 잘 알려진 우스꽝스러운 개그였다.
그것을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곳에서 하다니. 화내야 하나, 웃어야 하나. 그저 “졌다, 졌어” 하고 내뱉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그 위기를 어떻게든 넘기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강연을 끝내고 대기실로 돌아오자 요코가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찾아왔다. 말로는 거듭 “미안해요”라고 하면서도 얼굴과 몸에는 웃음이 묻어 있었다.


“당황했잖아.”
“미안해요. 이제 안 그럴게요.”
“그래야지.”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지만 몇몇 관객은 눈치 챘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강사 대기실에 오래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대기실 사람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다음 스케줄에 쫓기는 척하면서 그곳을 나왔다. 마침 지나가던 택시를 잡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긴자(銀座)로 가주세요."



내가 운전사와 얼굴을 마주치기도 전에 요코가 얼른 대답했다.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뒤이어 요코는 목적지인 가게 이름을 운전사에게 알려줬다.
나는 학생 시절을 동안 긴자까지 나가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결혼 후에도 마찬가지로 긴자와는 별 인연 없는 생활을 보냈다.

한편 요코는 긴자를 가로질러 신바시(新橋) 역까지 걷는 것이 유일한 건강법이라고 자칭했다. 그녀는 걸으면서 이따금 바겐세일 매장에 들러 저렴한 물건을 건져오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눈요기하는 게 더 즐거운 듯했다. 무작정 구경하고 또 구경하면서 걷는다.

그것이 그녀에게는 틀림없이 인생의 즐거움 중 하나였을 것이다.

 

저녁 식사를 하던 중 텔레비전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미국에서 유골을 인공위성에 실어 지구 주위를 빙글빙글 돌게 만든다는 소식이었다. 문자 그대로 죽은 사람을 천국에서 영면시킨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요코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보, 당신은 죽어서도 절대 저렇게 하지 말아줘요.


이런 종류의 뉴스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그녀였다. 나는 반쯤 어처구니가 없고, 반쯤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왜 그런 일까지 걱정하는 거야?
당신은 비행기를 타거나 하늘을 나는 걸 좋아하잖아요. 분명히 당신은 죽어서도 하늘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 또 긴자에 가는 거야?하고 한숨지을지도 몰라요.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걱정한다.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고 대답했다.


그래, 좋아. 안 그럴게. 일단 저렇게 눈이 핑핑 돌아가는 걸 견딜 수도 없을 테니 말이야.
아아, 다행이다.


요코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또 이렇게 덧붙였다.


안심해요. 당신이 감시하지 않아도 절대 쓸데없는 물건은 사지 않을 테니까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대화를 하는 부부가 또 있을까.

 

 

 

 

_<무심코 당신을 부르다가> 출간 전 연재 2회 계속

 

 

 

 


 

 

<무심코 당신을 부르다가>

반생이 넘는 시간을 함께한 부부의 첫 만남에서부터 소박하고도 별난 일상, 남편밖에 모르는 아내의 사랑스러운 모습, 그리고 긴 이별을 준비하기까지의 삶의 풍경을 고스란히 담아낸 편지.

힘들고 숨 가쁜 인생을 동행하는 사람, 떠올리면 미안하고 고마운 누군가가 당신 곁에도 있습니까?

 

저자_ 시로야마 사부로

일본 경제소설의 아버지. 해박한 지식과 통찰로 기업과 조직의 생리, 직장인들의 애환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경제소설을 잇달아 발표하며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그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이전 소설과는 전혀 다른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내의 말, 표정, 사소한 행동까지 함께 살아온 날들을 꼼꼼하게 써내려가며 아내를 잃은 슬픔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환기시켰다.

그러던 중 2007년에 세상을 떠났고, 미처 완성하지 못한 원고를 그의 서재에서 발견한 둘째 딸 이노우에 기코가 편집부에 전달해 비로소 《무심코 당신을 부르다가》가 완성됐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먼저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는 남편의 담담하면서도 진심어린 고백으로 독자의 마음을 울렸고, 일본 TBS TV 드라마로도 방영되어 화제를 일으켰다.
대표작으로 《소설일본은행(小説日本銀行)》《황금의 나날(黄金の日日)》《관료들의 여름(官僚たちの夏)》《임원실 오후 3시(役員室午後三時)》《가격파괴(価格破壊)》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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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빈 2017-08-01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기대되는 에세이네요. 요즘 나오는 에세이 스타일은 읽다보면 감정소모가 많아서 굉장히 피곤하다고 느껴지거든요. 표지의 바다와 하늘이 예쁘네요^^

예문아카이브 2017-08-01 14:15   좋아요 0 | URL
윤성빈 님, 감사합니다! ^^ 8월 7일까지 출간 전 연재 진행할 예정이니,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기대 부탁드립니다.

햇살 2017-08-02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잔잔한 스토리네요. 다음 이야기도 궁금합니다~

예문아카이브 2017-08-02 11:18   좋아요 0 | URL
달 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