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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작가
알렉산드라 앤드루스 지음, 이영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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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딱 붙는 옷을 입고, 태닝 오일을 떡칠하고, 필립 로스가 잭슨빌의 가구 할인점인 줄 아는 엄마 밑에서 자랐다면? 그런 사람이 다른 인생을 원한다면? 어떻게 A라는 인생에서 B라는 인생으로 옮겨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B에 어울리는 사람이 될까?

 

출판사 편집 보조로 뉴욕 생활에 적응 중인 플로렌스.

자신이 살던 곳에서는 그래도 잘나가는 축에 끼었지만 뉴욕에서는 어림없는 부류.

자신이 알던 세상 보다 더 큰 세상을 마주하고 어쩔 줄 모르는 플로렌스.

작가가 되고 싶지만 글에 자신이 없고, 자신에게 무언가가 빠졌다는 걸 아는 플로렌스.

그러나 늘 그 현실을 빠져나가고픈 플로렌스.

그녀가 빠져나가고 싶은 것은 그녀의 인생 전체였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럴수록 현실은 더 비참한 플로렌스 앞에 은둔 작가인 모드 딕슨의 조수가 될 행운이 찾아온다.

더 이상 뉴욕에 미련이 없는 플로렌스는 당장 모드 딕슨을 만나러 떠난다.

모드 딕슨은 필명이었고, 헬렌 윌콕스가 모드 딕슨이라는 필명 뒤에 숨은 진짜 이름이었다.

 

어딘지 자신과 비슷한 구석이 있는 헬렌은 거침없으며 까다로운 성격으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차기작을 위해 모로코로 여행을 간 두 사람은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사고를 당한다.

플로렌스는 병원에서 눈을 떴고, 사람들이 자신을 헬렌 윌콕스로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헬렌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한 번쯤 지금 인생이 아닌 성공한 인생을 꿈꿀 때가 있다.

내가 저 자리에 있었을 수도 있는데...

그리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쯤 작가가 되기를 꿈꾼다.

플로렌스는 잔챙이다. 욕심은 있지만 야망을 드러내지 못하고, 사소하고 찔끔찔끔 거리는 복수는 할 줄 알지만 크게 일을 벌이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런 그녀가 헬렌을 만나고 그녀처럼 되고 싶어서 디테일 하나까지 닮으려 애쓰는 모습은 가증스럽다.

주인공이 가증스러운 이유는 '아닌 척', '도덕적인 척', '양심 있는 척'을 하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자신의 욕망을 거침없이 뿜어내며 정면 돌파하는 헬렌이 오히려 가식 없어 보인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읽으며 조마조마하면서 겁나 짜증 났다.

 

"아, 정말 얘 왜 이러니?"

 

이런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그럼에도 책 읽는 걸 멈출 수 없어서!

 

남의 떡이 항상 큰 법이다.

그런 줄 알고 덥석 물어 버리면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법이다.

플로렌스는 자기 앞에 온 기회를 덥석 물었다.

그러나 그걸 지키기 위해 치르는 대가는 엄청난 것이다.

 

그래, 좋아. 플로렌스는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깨부순 다음 필요하면 나중에 고치는 거야.

 

어째서 알렉산드라 앤드루스를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에 비교하는지 알 거 같다.

어딘지 안쓰러우면서도 겁나 답답한 주인공 플로렌스.

그러나 그녀가 헬렌의 기운(?)을 받아서 점점 달라져가는 모습을 보는 재미와 함께 엎치락뒤치락 하는 반전의 재미가 책을 놓지 못하게 한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는 무엇일까?

그 대가를 치르면서 쟁취해야 할 그것은 과연 어떤 부메랑으로 돌아올까?

한 사람은 그 부메랑을 온몸으로 받아 냈고, 한 사람은 미래의 어딘가에서 되돌아올 부메랑을 기다리는 중이다.

 

진실은 결코 입을 다물지 않으니까...

 

내 안엔 누가 있을까?

플로렌스? 헬렌?

둘 다 아니길 빌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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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드러지는 봉황의 색채
이윤하 지음, 조호근 옮김 / 허블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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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드러지는 봉황의 색채> 라는 제목이 무엇을 말하는 건지 궁금했다.

이윤하의 소설은 <나인폭스 갬빗> 이후 두 번째로 읽는 소설이다.

전작에서도 등장한 구미호는 <흐드러지는 봉황의 색채>에서도 구미호족으로 등장한다.

 

화국과 라잔.

가상의 국가이지만 읽다 보면 무엇을 말하는지 알게 된다.

벚꽃으로 대표되는 라잔은 일본을, 진달래로 대표되는 화국은 우리나라를 말한다.

 

라잔에 침략당한 화국은 14행정령으로 불린다.

엄마와 다름없는 봉숭아 언니의 보호를 받으며 자란 제비는 마냥 언니에게만 의지하기 미안해서 어떡해서든 자립해 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제비라는 이름 대신 '테세라오 트세난' 이라는 라잔의 이름으로 개명을 하고 시험을 본다.

자신의 실력으로 당연하게 붙을 거라 생각했지만 당연하게 떨어지고, 제비가 이름을 바꾸고 라잔의 예술성에 들어가기 위해 시험을 봤다는 걸 알게 된 봉숭아와 싸우고 집을 나오게 된다.

 

구미호 학의 도움으로 방위성 사람을 만나 일자리 제안을 받은 제비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 모른 채 찾아가 기계 용 아라지를 만나게 된다.

자동인형 용. 아라지는 옛 화국의 궁궐 지하에 갇혀있다.

 

전쟁용으로 만들어진 용 아라지는 살육을 즐기지 않는다.

제비는 아라지와 소통할 방법을 생각해 내고 그와 소통하면서 아라지와 탈출을 꿈꾼다.

그 와중에 언니의 아내였던 지아를 죽인 결투자 베이의 보호를 받으며 점점 그녀에게로 빠져들게 된다.

 

기계 용, 자동인형, 구미호 족, 마법, 독립군, 다자연애.

낯선 듯 익숙한 이야기에 마법이라는 판타지와 기계 용과 달나라라는 SF적 요소를 버무린 <흐드러지는 봉황의 색채>

이윤하 작가 다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러니까 최대한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제거해 버린다는 거로군요." 제비는 이렇게 말하면서, 통제된 상태로 존재해야만 하는 자동인형들을 떠올렸다. 일말의 동질감이 느껴졌다. 자신도, 자신의 민족도 선택권을 완전히 빼앗긴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

 

 

자동인형들이 돌아다니는 도시

화국인들은 감시를 당하고, 자신들의 천연자원을 모두 빼앗기고, 기계 용과 기계인형들을 움직이기 위한 마법의 안료를 얻기 위해 화국의 골동품과 희귀품들이 박살 나는 광경은 그저 글일 뿐이지만 실제 있었던 일이기에 나도 모르게 분노 게이지가 상승했다.

훌륭한 예술품일수록 그 마법의 깊이는 오묘해서 <흐드러지는 봉황의 색채>는 그만큼 만들기 까다롭고 진귀한 안료이다.

그것이 바로 기계 용 아라지를 움직일 수 있는 진실이었다.

 

제비와 베이의 사랑

아라지와 제비의 교감

남녀 구분 없는 '사랑'의 세계

부역하는 자와 독립운동을 하는 자

자국의 문화 예술품을 미래를 위해 빼돌리려는 그들의 노력들이 독특한 분위기로 담겨 있는 이야기였다.

 

화국과 라잔의 혼혈인 베이

다 알고도 문화재를 빼돌린 것인지 아니면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서 그랬던 건지 영영 알 수 없게 된 학의 죽음.

달 나라까지 이야기를 뻗어 나간 이윤하 작가의 상상력이 감탄스럽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런 독특한 이야기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이해할 수 없더라도 너희가 서로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게 중요한 걸지도 모르겠구나."

 

 

이야기를 관통하는 봉숭아의 말 앞에서 '사랑'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려본다.

서로가 행복해한다면 주변인은 그걸 인정해 주면 된다.

그것이 가장 큰 사랑일터...

 

아라지는 제비와 베이를 태우고 달나라로 갔다.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제비와 베이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서양의 강철배들이 화국을 향해 몰려가는 것이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다음 편 이야기가 나와주면 좋겠다.

왠지 뭔가 덜 완성된 느낌이 남아서 후속편에서 제대로 마무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우리의 이야기에서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보여준 이윤하는 다른 작가들이 따라올 수 없는 장르문학의 독보적인 존재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다를 게 볼 줄 모른다.

이윤하와 같이 뿌리는 한국 사람이지만 외국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말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것이 또 다른 한류를 만들어내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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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 피, 열
단시엘 W. 모니즈 지음, 박경선 옮김 / 모모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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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우유에 자신의 피를 섞어 딸기 우유처럼 마시는 소녀들

13살. 사춘기 즈음.

아무도 자신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두 사람의 세계에서만은 완벽하게 서로를 이해한 소녀들.

옥상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될지 궁금했던 키라는 그 답을 알 수 없었고, 홀로 남겨진 에바는 살아가면서 그 답을 떠올려야 했다. <우유, 피, 열>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생명에 대한 상실감을 부여안고 살아야 하는 여자.

남자도 슬픔을 가슴에 묻고 가지만 그는 결코 그 느낌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유산은 환상통과 같다.

사지가 떨어져 나간 후에도 계속 그곳에 있다고 느끼는 환상통... <향연>

 

목사의 넌즈시 시도하는 행위를 단호하게 뿌리치고 응징의 눈빛을 쏘아 보냈던 제이.

치졸한 목사의 복수는 부모와 주변인들의 시선으로 제이를 옭아매고, 제이의 험담을 듣고 싸운 동생을 보며 제이는 분노를 감추지 않는다. 자신을 향한 분노에는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자기로 인해 동생이 받은 상처는 응징해버리는 제이의 행동이 통쾌하다. 제이가 꽉! 쥐어버린 그것. 분노의 손놀림은 그 어떤 폭력보다 강한 것. 성희롱에 맞서는 제이의 당당한 분노가 아름답다. <혀들>

 

암이 재발한 글로리아는 화학 치료를 거부하고, 중년의 위기에 아내의 암재발까지 겹친 프레드는 방황한다. 고통을 감수하지 않겠다는 글로리아에게 돈은 걱정 말라며 계속 치료를 받자고 종용하는 프레드의 한쪽 마음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고통스러울 걸 알면서도 끝까지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봐야 한다는 남겨질 사람들의 고집. 내 목숨인데도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글로리아는 담배를 피워대며 집을 떠난다. 아내라는 직함을 얻게 되면 의견 또는 결정권 같은 건 사라지는 거지... <천국을 잃다>

 

엄마가 바람피웠다는 사실 때문에 엄마를 벌하고 있는 마고. 사실 마고는 엄마가 바람 같은 바람도 피워보지 못하고 소문에 질식해버린 점이 못마땅하다. 반항심 때문일까? 마고와 선생의 불륜을 짐작한 엄마는 그 선생의 집으로 쳐들어 가는데... 자신의 일에는 무능했던 프랭키는 딸에게 일어난 일만큼은 확실하게 해결할 용기가 있다. <적들의 심장>

 

바다에 빠져서 죽음을 마주한 순간 살아나려고 버둥거렸던 소녀는 작고, 힘없는 트위트를 부여잡고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그 상흔은 오래도록 상처로 남아 사는 내내 문득문득 그녀를 찾아온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 한 일이 부끄러움이 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마음 한구석에 남은 사과하지 못한 그날의 진심... <배의 바깥에서>

 

스노우는 마법을 부릴 줄 알았던 걸까?

나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깨닫는 순간이 모든 사람들에게 오는 건 아니지... <스노우>

 

임신은 축복이라고 모두 알고 있지만 그건 그저 관습일 뿐. 정작 아이를 품고, 낳고, 길러야 하는 모든 일을 떠맡게 되는 여자에게 그 일은 마냥 축복이고 행복이고 기쁨일 수 없다. 그러나 그 외의 감정을 허락하지 않는 세상의 시선. 빌리의 선택은? 블랙홀 속의 또 다른 빌리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필요한 몸들>

 

아버지의 흔적은 생각과 감정과 기억 곳곳에 남았고,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던 주변인들은 견디지 못할 슬픔을 지고 살아야 한다. 하지만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그녀 자신은 스스로 피해자라는 생각보다는 사랑받았던 딸이라고 생각하고 모두가 그렇게 믿어주길 바란다.

그 아버지란 인간. 정말 징하다. 꼭 유언을 그따위로 해야 했니?

사막에 던져버려!!! <물보다 진한> 은 개뿔!

 

어린 게 연하고, 부드럽고, 맛있긴 하지...

인간 위의 포식자는 누구? <색다른 것들>

 

엄마의 부재. 보름달 밤의 모임. 뼈 모으는 할머니..

언젠간 뼈로 돌아간 모든 이들이 다른 세대들 앞에서 뼈로 모습을 보이는 순간 대단한 발견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뼈들의 연감>

 

11편의 이야기들 속 여성들은 모두 우리 안에 담겨있는 우리 자신이다.

11편의 이야기 중 절반은 모두 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여자로서의 부당함, 성희롱, 성폭력, 임신, 유산, 편견, 무지, 갈등, 변화 등등

나와 또 다른 나들이 겪는 일들을 독특한 울림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평범한 감정들이 아닌 유니크한 감정들로 나열된 이야기들의 잔향이 낯설면서도 익숙하다.

 

같은 감정을 낯설게 표현하면 다르게 느껴지고, 다른 걸 보게 된다.

<우유, 피, 열>이 내게 그런 이야기였다.

흔한 여자들의 이야기가 흔하지 않게 쓰였기에 또 다른 감정들이 세련되게 몰려온다.

 

제시의 반격과 키라의 호기심 충족이 뇌리에 새겨진 <우유, 피,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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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스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8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 지음, 구유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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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부 다 한다. 그러면 나를 사랑해주겠지 싶어서. 나는 따귀를 맞지 않지만, 동생은 늘 맞는다. 눈으로 칼을 던지는 동생의 눈은 점점 새카매지는데, 색이 없는 내 눈은 보모들의 눈처럼 창백한 파란색이다.

 

 

공작가의 딸 마리아나와 소피아.

말 잘 듣고 내성적이며 얌전하지만 사랑을 갈구하는 소녀 마리아나.

그와 반대로 고집 세고, 할 말 다 하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소녀 소피아.

폴란드계 프랑스인 아버지는 전쟁에 참가하고, 멕시코계 어머니 루스를 따라 멕시코로 온 두 소녀의 삶은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아름다운 공작부인은 늘 화려하게 차려입고 바쁘게 돌아다닌다.

아이들은 보모의 손에서 크고 어쩌다 보게 되는 엄마의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마리아나는 눈에 띄지 않고 언제나 소피아가 관심을 차지한다.

 

 

엄마를 정의하는 것은 곧 엄마의 부재다. 엄마는 기운을 북돋울 무언가를 찾아 떠났고 나는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

엄마의 부재는 오작 엄마만의 것이고 그 안에 내 자리는 없다.

 

 

 

멕시코 귀족 가문의 딸인 엄마 루스.

그러나 멕시코 혁명 때 재산을 몰수당한 집안이다.

양쪽 가문 모두 귀족인 마리아나의 고귀한 신분은 그들에게 또 다른 굴레를 씌운다.

멕시코에서는 명문가의 딸이지만 백인 혼혈이고, 프랑스에서는 그저 멕시코계 혼혈일 뿐이다.

 

 

마리아나가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는 것은 어쩜 양쪽에서 느끼게 되는 불편한 시선을 예민했던 소녀가 받아들이기 위해서 필요한 자양분 같은 게 아니었을까.

아이들을 보듬어 주고 그 아이들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어야 할 엄마는 늘 부재중이었다.그러다 깜짝 선물처럼 두 아이를 데리고 바다를 보러 가는 여정은 엄마의 무모함과 동시에 자신의 부재를 그런 식으로 채우고 싶었던 보상의 마음도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역시 돌봄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며 어린 시절의 혼란함을 엿볼 수 있었다.

 

<아이리스>에서 가진 자이지만 어쩌면 약자이기도 한 마리아나의 시선은 짤막한 기억의 파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단편적 기억들의 조각조각을 이어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어가는 과정을 통해 마리아나와 함께 성장하는 기분이다.

 

어디에나 있는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들의 대립

사회적이면서 관습적인 편견들

여자에게 지워지는 굴레들이 마리아나의 여린 시선을 통해 보인다.

 

마리아나와 소피아.

두 소녀의 모습은 극명하게 다르다.

그리고 그 둘을 아우르는 엄마 루스의 모습에서 세 가지 버전의 삶을 본다.

루스에게서 갈려 나온 기질은 거침없는 소피아와 대조적으로 순종하는 마리아나로 대표된다.

그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었던 그녀들.

자신들의 정체성을 외부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던 그녀들.

누가 더 주체적으로 살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 모두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었으니까..

 

퇴펠 신부의 말은 언행일치가 안되는 사람들의 모범이었고

그 말에 홀린 마리아나의 모습은 사춘기 소녀의 열정을 태워 버린다.

성장은 아픈 것이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의 의미는 마리아나를 통해 잘 보여진다.

 

퇴펠은 말로써 사람들을 현혹하지만 실제 모습은 그들을 억압한다.

멕시코 혁명의 단면, 아니 모든 권력의 단면을 퇴펠이 보여주고 있었다.

 

미래에 예정된 고독의 씨앗이 움튼다. 루스와 프란시스카 안에, 언제나 이방인이라서 거의 감지되지도 않는 흔적을 남기는 여자들 안에 움튼 것과 같은 씨앗이다.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의 파편들을 모아 소설로 늘어놓은 작가의 솜씨는 혼란스럽고 불안정했던 시기의 마음들을 잘 보여주었다.

늘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들여다봤다면 <아이리스>를 통해서 가진 자이지만 약자였던 여성의 눈을 통해 들여다본 세상의 부조리는 우리가 거의 의식하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편견인 줄 몰랐던 편견.

차별인지 몰랐던 차별.

무심하게 이어받은 수많은 관습들이 혼혈 소녀의 눈으로 보여진다.

 

엘레나 포니아토프스카의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생각해 보지 못했을 진실이었다...

글로벌한 세상이다.

이제는 단일 민족이라는 말은 죽은 말이 된지 오래다.

우리의 시선에서도 달라져야 할 것들이 많다.

<아이리스>의 마리아나를 통해서 우리의 불편한 시선을 거두는 법을 배워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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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에 걸린 소녀 밀레니엄 (문학동네) 4
다비드 라게르크란츠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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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같은 비극 앞에서 아주 다른 반응을 보였던 숙적인 자매를 상대하고 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에게 유산으로 남은 거대한 범죄 제국과 마주하고 있고요."

 

 

밀레니엄 시리즈의 원작가 스티그 라르손의 죽음으로 중단되었던 밀레니엄 시리즈를 이어가기로 한 다비드 라게르크란츠에 의해 쓰인 작품 <거미줄에 걸린 소녀>

영화로도 만들어져서 영화를 먼저 봤었다.

라르손과 비교하고 싶지는 않지만 자연스레 비교가 될 수밖에 없다.

 

일단.

새 시리즈의 시작은 나름 재밌었다.

먼저 읽으신 분들이 재미없다는 반응이 많았는데 그래서인지 나는 생각보다는 재밌게 읽었다.

 

시대에 맞는 소재

인간을 능가하는 인공지능의 개발, 그걸 보호하고 좋은 일에 써야 하는 기관에서조차 신기술을 빼돌리는 산업 스파이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기술을 빼돌리지만 그 기술이 해커들을 대동한 대기업의 탈을 쓴 범죄 집단이라는 걸 알리 없다.

 

인간을 능가하는 인공지능을 개발한 프란스 발데르는 자신의 기술이 해킹당한 걸 알아낸다.

미국에서 스웨덴으로 귀국한 프란스는 이혼 후 엄마와 살고 있는 아들 아우구스트를 데려와 함께 지내게 되면서 아우구스트에게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서번트인 아우구스트는 자신이 본 걸 입체 그림으로 그려내는 재능이 있었고 그와 동시에 수학적 재능도 있었다.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고 있다는 걸 알게 된 프란스는 비밀을 폭로하기 위해 미카엘에게 연락하지만 미카엘이 도착하기 전 살해당한다.

 

살라첸코의 죽음 이후 리스베트는 또다시 어딘가로 잠적해버렸고, 밀레니엄은 대기업의 자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자금난에 허덕인다. 그 와중에 미카엘에게 겨눠지는 미디어의 공격은 밀레니엄을 위태롭게 만들고 미카엘 자신도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이 들어 일을 그만둬야 하나 싶은 심정이었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처럼 한참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는 그때 프란스 발데르의 연락을 받은 미카엘은 프란스의 일에 리스베트가 관여한 흔적을 알아낸다.

프란스의 일에 대해서 1도 모르지만 리스베트의 흔적이 보인 일에 뭔가가 있다고 생각한 그는 프란스를 만나러 가지만 도착과 동시에 프란스가 살해되고 만다.

미카엘의 기자로서의 촉은 이 일이 절대 평범한 일이 아니라는 걸 직감한다.

 

리스베트는 아버지가 남겨놓은 범죄 제국의 실체를 찾고 있는 중이지만 결코 쉽지 않다.

게다가 스멀스멀 다가오는 위험을 감지한 그녀는 동생 카밀라의 존재가 가까이에 있음을 느낀다.

 

만나는 사람 모두를 자신을 숭배하게 만드는 아름다움의 소유자.

그러나 겉모습과는 다른 냉정하고 비정한 사람.

일명 레이디 살라이자 타노스이자 리스베트의 쌍둥이 카밀라.

해커들을 거느리고 가장 중요한 정보들을 빼돌리며 자신만의 제국을 만들어가는 카밀라.

 

전작들에서 이름만 나왔던 카밀라의 실체가 드러난다.

그러나 정작 기대했던 리스베트와의 대결은 이 이야기에는 담겨있지 않다.

앞으로 남은 두 편의 이야기에서 다뤄질 거 같다.

 

흥미진진한 소재와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할 인공지능의 발전과 국익을 위하고 테러를 방지한다는 명목하에 벌어지는 국가기관의 감청.

남의 기술을 교묘히 빼돌려 자기 것으로 만드는 비열함, 그로 인해 정작 혜택을 받아야 하는 노력한 사람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어 버리는 일들.

우리 앞에서 벌어지고 있지만 절대 알 수 없는 일들이 담겼다.

게다가 밀레니엄은 SNS와 인터넷의 발달로 더 이상 신문을 읽지 않는 사람들과 젊은 세대들에게 구시대의 유물로 분류되는 상황이다.

 

글이 글을 만들어내고, 검증 없이 뿌려지는 카더라 통신들 시대에

발로 뛰고, 국민이 알아야 할 비리를 서슴없이 들춰내는 밀레니엄의 신념은 기로에 놓인다.

갈수록 진정한 기사보다는 서로의 묵인하에 대중의 눈을 속이는 기사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미카엘이 대변하는 기자정신은 어떻게 지켜지게 될까?

 

한편으로는 달라지는 시대를 외면하며 자신이 걸어왔던 길만을 고집하는 미카엘의 모습이 답답하기도 했다.

진정한 기자라면 지금 가장 중요한 이슈가 무엇인지 정도는 다방면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미카엘의 모습에서 낡은 시대정신을 보는 거 같았다.

리스베트의 흔적을 몰랐다면 미카엘은 과연 이 일에 관심이나 보였을까?

그런 의미에서 미카엘 블롬크비스트는 위대한 기자이긴 하지만 늙어가는 중이라는 서글픔을 안고 있다.

예전 방식만을 고집하고 달라진 방식에는 회의적이며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고집이 그를 한물 간 사람으로 만든다.

 

장황한 문체와 왠지 촘촘하게 얽혀있던 인물들 간의 관계들이 느슨해진 <거미줄에 걸린 소녀>

이 이야기를 라르손이 썼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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