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개 청목 스테디북스 64
이상 지음 / 청목(청목사) / 2001년 6월
평점 :
절판


학교 과제로 낸 글.

///


무기력함으로 날개를 부르짖은 청년의 이야기 - 이상의 「날개」를 소설의 구성요소 중 작중인물의 이해와 서술자의 종류를 바탕으로 분석


   이상의 대표작인「날개」의 주인공 '나'는 언뜻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그의 행동은 전반적으로 괴이하다. 멀쩡한 젊은 청년이라고 보기 힘들다.「날개」의 독자들에게는 작중인물인 '나'를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다. 대체로 초점은 ‘나’에게 맞추어져 있고, 그가 풀어놓는 이야기만이 독자가 가진 실마리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꼼꼼히 살펴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파악이 쉽지 않다. 작가 이상의 성격이 독특하고 개성적이었던 만큼 그의 작품 속 인물 역시 한 편의 수수께끼 같다.

   이상은 소설「날개」의 ‘나’라는 인물을 구현하는 데 있어 크게 두 가지 접근법을 취한다. 하나는 보여주기 방식이다. 이상이 인물의 행동을 보여줄 때는 주로 ‘나’가 위주이며, 다른 인물들의 행동 묘사가 보이는 경우는 ‘나’가 등장하는 장면과 관련할 때뿐이다. 인물들의 특정한 행동이 이루어지는 데 있어 그 이유를 부연설명 하는 법은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나’를 둘러싼 여러 상황들을 간접적으로 추측하게 된다. 어느 것도 명확한 형태를 가지고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른 접근법은 의식의 흐름을 통한 내면 묘사다. ‘나’의 의식이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을 구성한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날개」를 읽으면서 ‘나’의 적나라한 의식과 마주한다.

   이 두 가지의 접근법은 단순하게 이등분으로 구별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기보다는 서로 엮여져 있는 상태로 ‘나’라는 인물을 형상화한다. 인물의 행동과 내면 묘사가 한데 섞여 펼쳐지는 쪽에 가깝다. 그러한 작가의 묘사방법을 통해 독자가 그려낼 수 있는 '나'라는 인물은 기본적으로 소리 내어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생각만 한다. 생각도 단편적이다. 외부의 자극에 순간적으로만 반응한다. 어느 소설에서도, 어느 이야기에서도 이처럼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젊은 남성을 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무기력한 인물이 많다 치더라도, 자신의 무기력함에 아무런 감정조차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인물은 드물다. 그는 자기의 행동을 변명하지 않는다. 문제의식을 가지지 않는다. 그러한 지점이「날개」의 주인공 ‘나’를 독자로 하여금 비정상적이고 인상적인 인물로 기억되게 한다.

   ‘나’에게는 자존심도, 이해력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속없다는 점에서 마냥 어린아이 같다. 하지만 어린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얼마나 예민한 존재인지 안다면 그러한 비유도 적절하지는 않다. 그는 아내가 키우는 한 마리의 개 같다. 자아가 없는 것 같다. 아내가 반찬을 부실하게 챙겨주면 군소리 없이 그대로 받아먹는다. 그래서 쪽쪽 말라간다. 아내가 옷을 챙겨주지 않으면 또 그대로 옷 한 벌을 입고 다닌다. 코르덴 양복 한 벌로 잠도 자고 밖으로 외출도 한다. 그는 어쩌다가 한 번씩 아내를 찾아오는 내객들의 정체를 궁금해 한다. 내객들이 아내에게 돈을 지불하는 이유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하지만 질문은 일회성에 불과하다. 그 이상 더 나아가지 않는다. 물음은 연장되거나 심화되지 않는다. 회피해버린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노라면 으레히 내 머리는 그냥 혼란하여 버리고 하였다. 잠들기 전에 획득했다는 결론이 오직 불쾌하다는 것뿐이었으면서도 나는 그런 것을 아내에게 물어보거나 한 일이 참 한 번도 없다. 그것은 대체 귀찮기도 하려니와 한잠 자고 일어나는 나는 사뭇 딴사람처럼 이것도 저것도 다 깨끗이 잊어버리고 그만두는 까닭이다.(17)”

   ‘나’는 천치처럼 군다. 그는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아내가 자신에게 아달린을 먹여 온 것을 알고 물어보러 집에 들어온 그는 "내 눈으로는 절대 보아서 안 될 것을 그만 딱 보아 버리고 만 것이다.(34)"와 같은 상황에 부딪친다. 하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서술되지 않는다. 이 소설 안에서 아내가 내객과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는 결국 자세히 언어화되지 않는다. '나'의 사소한 일거수일투족, 그가 아내의 화장품에 비치는 빛들을 갖고 놀고, 불장난 치는 것 따위는 상세하게 다루어진다. 그가 이불 안에 들어가서 사색하고, 게으른 동물로 사는 이야기도 친절히 다 나온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흐릿한 한 문장으로만 넘어 간다. 아내는 내객과 함께 있을 뿐, 정확히 어떻게 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나’의 말에 의하면 아내는 내객과 자신이 같이 있는 모습을 '나'가 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일이 생기면 아내는 꼭 화를 낸다. 그래서 '나'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그래서 나는 보면 아내가 좀 덜 좋아할 것을 그만 보았다.(30)"고 하는 식으로 표현한다. 그 장면은 ‘보지 말아야’ 하는 것이고, ‘아내가 안 좋아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묘사에서 짐작할 수 있는 점은 ‘나’ 자신의 가치판단이 미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나’가 그러한 장면을 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가 보기 싫어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제시된 금기나 선을 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뉘앙스가 된다. 무력하고 나약한 ‘나’는 자신의 물질적인 생존을 아내에게 완전히 맡겨버린 것처럼, 남성으로서의 자존심도 아내에게 미뤄버린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독자는 ‘나’라는 서술자의 진술을 그대로 믿어야 하는지 의심할 필요가 있다. 사회를 스스러워 하고, 인간의 삶을 스스러워 하는 그가 마치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행동하는 것이 과연 진심인지 고민해보아야 한다. 그러한 지점에서 필자의 생각에 ‘나’는 신빙성 없는 서술자이다. '나'는 선택적으로 상황을 본다. 이야기를 할 때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위에 쓴 것처럼 아내와 관련해서 자기가 보고 싶지 않은 점은 최후까지 보려 하지 않는다. “뒤이어 남자가 나오는 것 같더니 아내를 한아름에 덥석 안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는 것(35)” 정도의 상황이 되어서야 ‘나’는 아내가 “밉다”(35)고 말한다. 그제야 그의 속내가 간신히 드러난다. 하지만 그의 그러한 미움도 잠시, 아내가 억수 같이 퍼붓는 독한 말들에 그는 망연자실하여 도망쳐버린다. 어디를 돌아다니는지도 모르게, 어떻게 갔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얼이 빠진 상태로 돌아다니다가 스스로의 자아에 질문을 던진다. “너는 인생에 무슨 욕심이 있느냐고.(36)” 하지만 그는 “나는 나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조차도 어려웠다.”는 말로 자신의 질문에서 또 한 번 도망친다. 그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못한다. 직시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날개」의 결말은 비극적이다. 그는 자신과 아내를 ‘절름발이’로 묘사한다. 그와 아내 둘 다 사지가 멀쩡하다는 점에서 그러한 비유는 일종의 자기합리화이다. 어디 딱히 문제가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나’가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딱지 붙이지 않는 한 스스로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점을 변명할 길이 없다.

   이 글을 최종적으로 정리하자면, 이 소설은 겉보기에는 한 사람의 철저한 미약함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미약함이 아닌 욕망에 방점이 찍혀져 있다는 게 필자의 결론이다. 이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삶에 갖는 욕심이나 욕망은 이야기되지 않는다. 그는 항상 아내에게 지고, 아내 위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 자기 자신은 거세시키고, 지워나간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이 한 편의 총체적 역설처럼 느껴진다. 무능과 무력, 나약함과 미약함만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오히려 한 청년이 자신의 생에 갖는 괴로움과 아내에 대한 애착이 엿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에게 사실 욕망이 죽지 않고 살아있음이 소리 없이 드러난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자신에게 사라진 인공의 날개가 다시 돋아나서 한 번 더 날아보길 바란다. 날개 없는 그가 취할 수 있는 선택권은 그 어디로도 날아가지 않는 것, 무력하게 제자리에 쓰러져 있어야만 했던 것뿐이었다. 날개 꺾인 새는 언제나 날고 싶어 하기 때문에 날고 싶다는 소리조차 차마 낼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짐작하는 바이다.


--

이상,『날개(이상 단편집)』, 청목, 2004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세계의 지성' 톱10

읽을거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영화일기 -1-, 2014년 11월 첫째 주. 2014년 11월 1일~11월 8일

 

  왓챠라는 어플을 깔고 난 다음, 깨달았던 것은 내가 생각보다 영화를 별로 보지 않았다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물론, 뭐 양이란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건 책이랑 똑같은 문제다. 나는 다독한다는 사람에 대해 큰 가치를 두진 않는다. 중요한 건 어떤 책을 어떻게 읽었느냐의 문제니까. 그래도 내가 생각보다 영화를 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는 건 마치 제대로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서는 몸무게를 꼭 재봐야 하는 것과 똑같은 수준으로 필요한 작업이었다.

 

  어쨌든, 내가 어떤 영화를 보았는지 왓챠를 통해 확인하고 난 다음, 이제부터 영화를 정말 작심하고 봐야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그 이후로 시험 기간 같은 예외 경우를 제외하고는 영화를 하루에 한 편씩은 보아야겠다 마음 먹었다. 그리고 그걸 일지처럼 작성하고 공유하는 작업을 해야겠다 결심했다. 모르지, 이렇게 쓰다보면 세상에 영화동지가 늘어날 수도!

 

  살짝 언급을 하고 지나가자면, 영화 각각에 대한 자세한 감상은 사실 평글로서 길게 써야 하는 것이 정석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인상만을 채취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다음이 11월 첫째 주에 내가 본 영화 목록이다.

 

11월 1일 :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밤', 루이스 브뉴엘의 '어느 하녀의 일기'

11월 2일 : 코엔 형제의 '바톤 핑크'

11월 3일 :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
11월 4일 :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일식' (한국어 제목 : 태양은 외로워)
11월 5일 : 마이클 마키마인의 '콜걸' (스웨덴 영화제)
11월 6일 : X
11월 7일 : 얀 트로엘의 '마지막 문장' (스웨덴 영화제)
11월 8일 : 로만 폴란스키의 '테넌트'

 

  이 정도를 보았다.

 

  날짜별로 정리하자면, 11월 1일에는 시험이 끝난 다음 날이라 집에 앉아서 영화를 보았다. 요즘 내가 빠진 배우가 프랑스 대여자배우 쟌느 모로이다. 쟌느 모로가 나온 두 영화를 11월 1일 날 몰아보았다.

 

  11월 6일에는 안타깝게 영화를 보지 못했다.

 

  11월 5, 7일에는 이화여대 모모에서 스웨덴 영화제를 통해 무료로 스웨덴 영화들을 볼 수 있었다.

 

  감독별로 정리하자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들은 정말 예술작품 그 자체였다. 큰 화면으로 정말 다시 보고 싶은 영화들이었다. 만약 영화를 평가하는 기준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두 가지이다. 그것은 장면을 어떻게 다루느냐는 미학의 문제, 그리고 영화의 서사와 그 가지를 통해 스며나오는 정서(내용이라는 단어로 압축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의 문제이다. 그 두 개를 다 이루어내면 그 사람은 예술인이다. 전자에만 도달한 사람은 기술인이고, 후자에만 정통한 사람은 투박한 사람일 수 있다. 어느 쪽이나 예인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는 이미 어떤 한 지경을 찍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의 장면 호흡은 정말 길고, 주로 풍경화에 가깝다. 인간을 도시의 눈으로 관찰하는 그의 시선은 산책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인간의 방황을 찍어낸다. 그리고 종국에 인물이 사라진 그곳에서는 장면을 꽉 채우고 폭발할 듯 이글거리는 일식과 같은 정서가 흘러나온다. 여백의 미를 아는 사람이랄까? '밤'의 마지막 장면, '일식'의 마지막 장면, 특히 '일식'의 마지막 장면은 지금도 종종 다시 돌려본다.

 

  코엔 형제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좋아하는 감독들은 아닌데, 그들이 예술인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차원은 아니다. 잘 만든다. 그런데 어떤 지점에서는 사실 취향이란 문제도 강력하게 작용한다. 이들은 내 기준에서는, 상당히 균형 잡힌 이들이고, 나는 그게 마음에 안 든다. 이들은 웨스 앤더슨과 비슷하다. 그들은 나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정말 잘 만들었다, 라는 말이 나오지만 마음 깊은 곳을 톡 건드리진 못한다. 그런데 코엔 형제의 '바톤 핑크'는 내가 본 이들의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았다. 자세히 이야기하면 스포일러니 굳이 더 나가진 않겠지만 예술과 창작에 뜻이 있는 모든 사람의 고통과 고민, 부조리와 모순을 잘 묘사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정말 에스파냐가 낳은 최고의 명감독이다. 그는 특히 여자 이야기를 다룰 때 있어서 상당히 좋은데,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는 시종일관 유쾌하고, 언뜻 산만할 수 있지만 결국은 종점을 향해 가는 길을 착실히 밟는 영리한 영화다. 더 할 말은 없고, 사실 이 사람의 영화는 '귀향'이 정말 좋다. 관심 있는 분 꼭 보시기를.

 

  '콜걸'의 경우는 애매하다. 상당히 투박하다. 문제가 있을 정도로 투박하달까. 장면미학이 독자적으로 구성되지 않은 감독이었다. 데뷔작이었던 듯 하지만, 훌륭한 감독들은 데뷔작으로도 장면미학을 구축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마지막 결말은 매우 좋았다. 역시 스포일러에 가까우니 말은 안 하겠지만, 특히 우리 사회에서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 결말이라는 것만 언급하는 정도로 끝내겠다.

 

  얀 트로엘 감독 같은 경우 보고 나서 너무 놀랄 정도로 영화가 세련되었었다. 내가 정말 영화를 하루에 한 편씩 보아야 하는 이유를 절감하게 해준 영화였다. 이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이러한 수준으로 영화를 만들어내는 감독들이 있다. 장면미학적으로 이미 독자적인 경지를 구축해 놓은 감독이었다. 정말 기가 막힌, 만약 판소리였다면 내가 얼씨구 외쳤을 정도로 좋은 장면들이 있었다. 또한 그의 영화적 시선에는 정서가 고밀도로 농축되어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에만 충실한 한 이기적인 남자의 정서를 어찌 그렇게 훌륭하게 짜놓았는지. 감탄만 하면 지겨우니 다시 여기서 줄이는 것으로.

  

  로만 폴란스키의 '테넌트' 같은 경우는 상당히 기대하고 봐서 그런지 기대보단 이하였다. 물론 잘 만들었다. 못 만들진 않았는데, 솔직히 어떤 지점부터는 조금 뻔한 이야기 같았다. 감독의 괴기하고 정신분열적인 정서를 느낄 순 있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그것조차 조금 뻔한 형식과 뻔한 내용 같기도 했다. 다시 보면 평가가 달라질 순 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 본인이 연기를 인상적으로 해낸 것은 소소한 재미의 한 요소이기도 하다.

 

  

  길게 썼다. 사실 작품 하나하나만 따지면 훨씬 더 길어야 하지만 인상 위주라서 이 정도로 줄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입] Nymphomaniac: Extended Director's Cut Volume 1 & 2 (님포매니악 볼륨 1 & 볼륨 2)(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
Magnolia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전에 올렸던 것을 다듬어서 계간지 '인간과 문학'에 보냈는데 당선되었습니다. 


////


허무라는 구멍에 쾌락을 부으며 살아온 한 여자의 이야기

영화 Nymphomaniac Vol.Ι,Ⅱ (2013, Lars Von Trier 작)


 

 

 


 

 

 

  살아있는 유럽의 거장,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님포매니악’은 바쿠스의 무녀들처럼 동물성을 버리지 못한 원시인류, 원초적인 에너지를 포기하지 못한 자들,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지나치게 충실한 자들의 이야기다. 성[Sex]은 그것을 다루는 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영화적 요소, 유희적 장치다.

  그러나 원시인의 시대를 한참 탈피한 지금 시대에는 난장판에서 들짐승들을 산 채로 죽였던 여사제들의 시대는 이미 야만과 비합리성 그 자체다. 이제 사람들은 그 비슷한 것을 보는 것만으로 역겨움에 시달린다. 이 시대에 욕망은 생생한 날 것 그 자체로 살아 있을 수 없다. 우리의 인간사회는 논리를 발달시켰고, 언어라는 틀로 동물적 본성을 제어하는데 성공했다. 인간은 이제 무엇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언어화해야 하며, 서사를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의무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서사라는 뼈대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욕망 그 자체의 본질적 내용은 사적이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공유 불가능하다. 언어를 통해 성공시키는 것은 부분적인 의사소통, 단편적인 신호의 전달일 뿐이다. 무엇의 실제를 있는 그대로 포착해낸다고 하기에 언어에는 파악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장벽들이 존재한다. 우리의 욕망은 타인에게 불가해하다. 불협화음, 미끄러지는 차원의 어긋남에서 우리는 자신의 자아라는 탈출할 수 없는 구덩이에 떨어져 외롭다.

  영화의 중요한 틀은 Joe와 Seligman의 대화 구조다. 이 영화가 사실상 처음부터 끝까지 이 둘의 대화라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 설정은 소통에 대한 통찰로 읽을 수 있다. 그 둘은 우연히 길거리에서 만나 Seligman의 집으로 가게 되고, 그곳에서 길고 긴 대화를 시작한다. 영화의 초반 전개는 상당히 인상적인데, 분명 험한 꼴을 당한 Joe를 Seligman이 구조한 상황 속에서 대화가 비교적 덤덤하게 시작되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의 만남이 그러하듯 이들의 만남도 상당히 우연적이고, 즉흥적이다.

  대화의 구조 안에서 각 인물이 맡은 위치를 살펴보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주된 화자인 Joe와 그 이야기들을 듣는 Seligman이 있다. 관객인 우리의 입장은 Seligman과 유사하다. 그러나 우리와 Seligman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우리는 침묵을 지키고 머릿속으로 감상을 이어나가는 처지이지만, Seligman은 이야기의 화자인 Joe와 대면하고 있다. 그렇기에 관객인 우리는 적어도 영화를 보는 시점에서 Joe의 이야기 뿐 아니라 Joe와 Seligman이 나누는 대화까지 전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사실은 ‘우리’야말로 Joe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미묘한 환상을 심어준다.

  이들의 대화에서 관객에게 흥미로운 지점은 Joe와 Seligman이 대척점에 서있는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주인공 Joe는 성적인 쾌락, 그 에너지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인물이다. 그녀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제가 Sex고, 그러한 의미에서 그녀는 진실로 님포매니악이다. 반면 Seligman은 지성과 이성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 그는 박식하고, 백과사전에 가깝다. 모르는 것이 없어 보이는 그가 모르는 것은 육체적인 경험뿐이다. 이성과 감성, 남성과 여성, 대칭적인 상징들은 상당히 도식적이기까지 하고, 감독의 전작인 '안티크라이스트'의 구성처럼 보이기도 한다.

  Joe와 Seligman의 대화는 사회의 다른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 철저히 언어에 기반을 둔다. Seligman은 Joe의 이야기를 듣는 맨 처음부터 끝까지 Joe를 자신의 인식 틀로 이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우연히 마주친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그가 동원한 것은 그가 기존에 갖고 있던 재료들이다. Seligman 같은 경우 성적인 경험이 없다보니 Joe의 모든 섹스 이야기들을 그가 기존에 알고 있던 수학적인 연산, 매듭 묶기, 베토벤과 푸가, 신화적 상징들로 치환시킨다. 이 영화 안에서 섹스 장면만큼이나 중요한 미적 장치는 바로 Seligman의 지식의 풍요로움과 인용의 다채로움이다. 다섯 번째 장인 ‘작은 오르간 학교’에서 보여주는 섹스 장면들과 바흐 음악의 세 개의 성부가 이루어내는 조화는 미적으로 거의 완벽에 가깝다. 성적인 긴장감이 제거된 Seligman의 단편적인 지식들은 그를 순수하고 무성적인 인물로 보이게끔 하고, 우리로 하여금 자극적일 수 있는 Joe의 이야기들을 중화시킨다.

  그 뿐 아니라 Seligman이 Joe의 이야기를 들으며 보이는 이성적이고 학문적인 일련의 이해 시도들은 문학적인 차원에서 놀라운 비유가 되기도 하고, Joe를 해석하는 데 있어 유용한 설명을 하기도 하며, 심지어 Joe 본인도 몰랐던 그녀의 심리를 발견해내기도 한다. 문제는 그가 부분적으로는 Joe를 이해하고 포착해내는 데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여전히 Joe의 경험들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점이다. 사실 무엇인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두 인격체가 결코 해낼 수 없는, 애초에 불가능한 목표다. 원래 하나였던 덩어리들이 신의 벼락에 의해 떨어졌다는 것은 단지 신화에 불과하다. Seligman의 생뚱맞아 보이는 해석에 지친 Joe가 그의 매듭 이야기를 이때껏 들었던 연결고리 중 가장 재미없고 무용하다며 짜증내는 장면은 소통에 실패한 채 어긋나버린 분열과 갈등의 단면을 그대로 고발해준다.

  이처럼 소통은 상정하는 전제에서부터 구조적인 결함을 갖는다. 예를 들어 Seligman은 Joe의 이야기를 몇몇 지점에서는 신뢰할 수 없는 기억으로 문제 삼는다. 특히 Jerome과의 만남에 관해서 그러하다. Seligman은 그 만남이 지나치게 우연에 의존한다고 말한다. 그러한 지적은 관객인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 지적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Joe가 하는 이야기들을 믿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야 한다. Joe가 대꾸하는 것처럼, 남의 이야기를 듣는 데 있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은 그 이야기를 믿거나 안 믿거나 둘 중 하나뿐이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상호소통이 강제적인 신뢰 위에서만 싹튼다는 역설적인 지점이다. 우리가 무엇을 해석하고 이야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것이 앞에 분명히 있다는 ‘믿음’이다.

  Joe가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고, 실수로 누락한 것일 수도 있다. 진실은 어차피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본인조차도 그렇다. 남아있는 것은 우리의 믿음, 불완전할 확률이 매우 높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어야만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 뿐이다. 그 필연적인 기만의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는 우리의 두 눈과 귀로 경청하고, 평가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최대한 공정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지만, 신과 같은 평정심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차선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잊는 순간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잊어버리고, 정말로 나와 타인이 같은 순간을 정확하게 같은 것으로 공유했다는 환상에 빠지기 때문이다.

  Joe 역시 그러했다. 그녀는 Seligman에게 드디어 온전한 첫 번째 친구를 만들게 되어 기쁘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우리를 배신한, 불안한 결말은 결국 무엇이었던가? 완전한 소통은 불가능하다는 사실 뿐이었다. 이성Reason은 자신이 무성이라고 주장하지만, 의식이 있는 곳에 욕망이 있다. 우리는 Seligman을 그의 지식과 상식들이라는 필터로 걸러서 보았다. 순결한 줄 알았던 그가 Joe에게 자신의 물건을 들이댈 때, 그가 숨기고 있던 욕망이 수면 위에 올라왔다.

  다른 존재를 자신의 잣대로 해석하고, 그를 바탕으로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욕망에 무릎 꿇리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시도하는 소통은 어떤 종류의 폭력이 될 수 있다. 이 숙명적인 불행은 영화 안에서 결말의 총의 발사로 형상화된다. 하지만 안전한 대화 구조 바깥에서 소통의 붕괴를 목도한 관객을 통해서도 반복된다. 관객인 우리는 이 영화를 보았지만 그들을 제대로 본 것인지, 그 이야기를 제대로 알 수 있기는 했던 것인지, Joe를 정말 제대로 본 것인지 의문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우선 Joe의 이야기를 믿어보기로 하고, 이야기의 내용을 더 살펴보자. 이 영화 내용의 전반적인 재료는 주인공 Joe의 삶이다. 그녀의 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욕망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걸까? 필자는 우리 안, 우리의 눈으로는 도저히 찾아낼 수 없는 구멍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 구멍은 채우려 해도 채워지지 않고,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니체가 근원적 니힐리즘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 바로 그러한 공허함이다.

  어린 Joe는 수술을 앞둔 병원의 복도에서 자신의 외로움을 온전히 감지한다. 그 철저한 외로움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우주 안에 혼자로 존재하고, 몸 안에 외로움과 눈물만이 가득 차는 기분이 든다. 주위 지나쳐가는 사람들한테 외로워요, 살려주세요, 외쳐본다 해도 아무도 들어줄 사람이 없을 것만 같다. 옆을 지나쳐가는 무수한 사람들 앞에서 존재의 이유를 발견할 수 없는 그 순간, 외로움이 자연히 고르고 있던 숨소리를 거칠게 내쉬기 시작한다.

  그 결여를 무엇으로 메울 수 있는지 모르겠다. 영화 속 ‘뚫리지 않는 문을 혼자 통과하려는’이라는 대사처럼, 텅 빈 공간의 입구에는 투명하지만 튼튼한 막이 있어서 그 무엇도 그 공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그런데 살다보면 이 세상의 어떤 물질이 그 막을 넘어 구멍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 온다. 그 순간 자체가 오르가즘의 작동원리와 유사하다. 수많은 긴장, 아슬아슬하게 한계선을 넘을 것 같으면서 못 넘을 것 같은 문턱의 틈에서 모든 것이 폭발하듯 터져 나와 온 몸에 젖어들어 강력한 과잉을 유희하는 몇 초의 영겁.

  그리고 우리는 또 한 번 착각한다. 우리가 완벽한 소통이 가능할 거라고 믿은 것처럼, 그 짧은 강력함이 우리의 불완전함을 채울 수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어떤 결여를 채운 것이 아니라 순간을 향유한 것에 불과하다.

  Joe의 경우는 명백히 섹스에 탐닉함으로써 그러한 착각에 빠진다. 모든 인간이 Joe처럼 외로운 순간들을 섹스로 달래는 것은 아니다. H 부인은 Joe가 외로움을 달래는 방법을 모른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건 적절한 비난은 아니었다. Joe가 문제가 된 이유는 그녀가 다른 사람들의 꿀단지를 건드리는 방식으로 외로움을 달랬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섹스의 강력함을 좇기보다 솔리테어를 하기도 하고, 좋은 영화를 보기도 하고, 친구와 대화도 하면서 순간의 텅 빈 공간을 채워낸다. 아니면 Joe의 아버지처럼 나뭇잎들을 수집하고, 관찰하면서 감탄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다. 얼마나 얌전한가. 오로지 문제가 되는 것은 향유의 방식일 뿐이다. 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가 문제다. 그녀의 헤픈 몸이 다른 사람들의 가정, 몇 십 년 된 감정들을 산산조각 내버릴 수 있다는 게 유일한 문제다.

  Joe는 오믈렛을 만들려면 계란을 몇 개 깨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의 냉정한 말에 Seligman은 원래 중독자들은 공감을 하지 못하는 법이라고 응수한다. 그의 말에 Joe 역시 바로 대답한다.

  “전 제 욕망에 중독된 것이지, 결핍에 의한 중독이 아닌 걸요. 어딜 가나 모든 걸 파괴한 바로 그 욕망이요.”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들은 기본적으로 마음 안에서 텅 빈 채 덩그러니 남겨졌다고 느끼는 무엇인가를 채워나가려는 우리의 노력이다. 그 근원적인 결여는 사실 채울 수 없다. 결핍 자체는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 우리는 그저 갖고 있는 것을 이용해 새로운 차원의 과잉을 향유한다. 구멍은 채워지지 않고, 우리는 채워지지 못해 채우려고 욕망한다. 욕망의 연쇄다. 그래서 Joe의 말은 옳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런 것처럼, 그녀 역시 결핍이 아닌, 오히려 결핍을 채우려 하는 그 욕망에 중독되었다.

  어떻게 보면 Joe는 교육 받은 것에 충실하다. Joe가 사랑한 아버지와의 관계는 눈여겨 볼만한 부분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스승이었다. 필자는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가르쳐 준 것이 다양성의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그 교육을 물론 Joe 본인이 그냥 따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에 맞게 변용시켰다는 점은 고려해야지만 말이다.

  Joe의 아버지는 나무를 좋아했는데, 나무들도 자세히 보면 개체마다 다 다르다. 나뭇잎 사이로 드리워진 약한 빛 아래에 선선히 불어오는 건조한 바람을 맞으며 나무의자에 앉아 위를 향해 지긋이 치켜보고 있노라면, 푸른 하늘이 적셔진 하얀 구름을 가리는 나뭇잎들이 눈에 찬찬히 들어온다. 서있는 위치도, 그들의 뿌리가 내려진 토양도, 심지어는 꽃이 얼마나 농익게 피어올랐는지도, 그 순간마다 제각각인 그들 자신의 빛깔, 색깔, 향.......그런데 우리는 그 수많은 나무들을 ‘나무’라고 부른다. 기껏해야 더할 수 있는 것은 종에 따라 나무라는 단어 앞에 음절 몇 개 더 얹혀주는 것이 고작이다. 우리 인간의 수용력과 표현력의 한계는 참 제한적이고, 묘사의 방식인 언어는 빈곤하다.

  Joe는 아버지의 교육에 영향을 받아 공책에다 나뭇잎을 수집했다. 그런 식으로 다양한 남성들의 성기도 수집했다. 그녀의 인체에 대한 호기심, 사람이라는 군群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하나하나 보고자 했던 욕망, 그것은 그녀 말처럼 석양이 더 아름답기를, 그 색이 더 화려하길 바랐던 단순한 바람과 비슷한 것 아니었을까? 자연의 아름다움을 더 향유하고자 했던 그녀의 이 바람이 쉽지 않은 요구처럼 보였다면, 그건 그저 그것을 허락지 않은 사회 인습의 강력한 힘에서 우리가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 아닐까?

  Joe가 찾아낸 영혼 나무는 험난하고 높은 바위 위에서 위태롭게 한쪽으로 쏠려 있었다. 이 세상에 나고 자라 죽는 모든 존재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순간들을 채워나가기 위해 지금도 분투하고 있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간이라는 종에 걸맞게 사회가 원하는 요구에 맞추어 살아나간다. 그곳에서 허락받은 일들, 권장되는 일들, 바람직한 일들을 선택해가며 살아간다. 그러면 모든 것이 그나마 쉬워진다. 사람들은 올바른 토양 위에서 따뜻한 햇볕을 받아가며 생존하기를 바란다. 안전한 둥지 위에 오순도순 한 평생 토끼 가족처럼 살아가는 것을 꿈꾼다. 하지만 우리는 Joe와 같은 나무들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들은 험난한 곳에서 거칠게 생존한다. 그 순간마다 얼마나 힘겨울까? 하지만 그들은 그 길을 포기하지 못한다. 그 모양이, 바로 그 힘듦이 그들이 선택한 삶의 가치, 그 자신의 본성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고난 결여를 채울 수 없고, 그래서 순간을 향유하며 살아간다. 그 1초는 휘발되지만 우리가 부여한 가치에 의해 천금이 된다. Joe는 그녀와 잔 남자들에게 최고의 연인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의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섹스를 하고 난 다음 남자들에게 해주는 말, 오르가즘을 준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었다는 그 말은 최고의 찬사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말 하나 때문에 으쓱하는 남자들의 모습이 유치하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말 하나 때문에 Joe의 남자들은 Joe와의 시간을 흐릿하게나마 좋게 기억할 것이고, 추억으로 남길 것이다.

  Joe는 수많은 남성들과 다양한 방식으로 섹스를 즐겼고, 그 많은 시간들을 종합해 자신만의 연인, 혹은 섹스라는 긴 시공간 축의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지루해지고, 닳게 되면 더 깊고 다양한 것들을 찾아 대담한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그녀의 여행은 사실상 사회의 많은 제약 속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그녀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깎이고 마모된다.

  어렸던 Joe는 상대적으로 사회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웠다. 어린 아가씨 둘이 기차에서 남자 낚시질을 하러 돌아다닌 것은 분명 발랑 까진 일이지만, 아주 지탄 받을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혼하지도 않았고, 아이도 가지지 않았고, 또 젊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직 사회의 규율에 대해 잘 모를 나이라서 사회의 시선에서 자유롭다. 아직 그들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따스하다. 갱생의 가능성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친구인 B와 만들었다는 ‘작은 모임’ 역시 그렇게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상황이나 분위기에 따라 그 정도 어린 여성들이 자신들의 성에 대해 눈을 떠서 불경한 노래들을 부르며 섹스에 탐닉하는 작은 모임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동네 애들이 놀러 다니면서 작은 그룹을 만들고 거기에 이름 붙이고 논 것과 큰 차이 없다. 치기 어리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치기 어림이 사회의 자신만만한 권능, 그들을 좌시하고는 있지만 언제 어떤 식으로도 진압 가능하다는 점 아래에서 존속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의 재미있는 장난이 같은 사회 안에서 다른 사람들의 밥그릇을 건드리고 다녔다는 점은 문명의 질서와는 확실히 위배된다. 그러한 서곡을 보여주는 H 부인 이야기는 전체 영화에서 가장 시선을 끄는 시퀀스이다. 이 시퀀스는 웃기기도 하고, 배우 우마 서먼의 훌륭한 연기에 감탄하게 되는 지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엄청난 블랙 코미디이기도 하다. 많은 이들은 결국 H 부인과 가여운 망아지 같은 세 아들들의 똘망똘망한 눈에도 Joe가 죄책감을 느낀 것은 하나도 없어 보인다며 Joe를 비난했을 수 있다. 물론 Joe가 이때의 사건을 통해 정말 아무것도 안 느꼈을 수 있다. 그녀 말마따나 그저 계란 네 개가 깨진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건들은 시작점에 불과하다. 그저 남편의 불륜에 화가 난 미치광이 여자가 자식들을 데리고 쳐들어온 사건으로 축소시킬 일은 아니다. 그 이야기에는 상징성이 있다. 처음 기차에서 낯선 남자의 오랄 섹스를 해준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적어도 그 이야기에서 남자의 아내는 남자가 외간 여자한테 오랄 받은 사실은 모른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이 Joe의 행동에 원한을 갖고, 악하다고 여기고, 비난하기 시작한다. 유부남과 불륜 관계인 젊은 여자 이야기는 사실 매우 흔한 이야기다. 그러나 Joe의 이러한 일탈은 이미 적발되었다는 것 하나로 수많은 사람들의 눈에 뜨인다. 또한 Joe가 아무리 자신을 변호하고, 자신의 욕망의 권리를 주장한다고 해도 실제로 깨진 계란들이 저 너머에 존재한다. 그것 역시 분명한 지점이다. 그녀의 욕망은 분명 다른 이들의 밥그릇을 건드린다.

  우리가 지니는 가치판단의 기준은 우리보다 선행하여 존재하던 사회에서 왔다. 우리는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의 규칙을 배우고, 그것들을 우리 안에 내면화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바다에 태어난 거북이와 같다. 그 조류가 나 자신의 고유함과 다르다 해도,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사회의 법칙이 있다. 사람들이 만약 젊은 사람을 향해 모르는 것이 많고, 치기 어리다고 말한다면, 젊은 사람들이 실제로 정말 아직 많이 모르고, 치기 어리기 때문이다. 젊을수록 경험은 적고, 고초를 덜 겪었기에 아직 때 타지 않았다. 조금 더 법망에서 자유롭다. 법망은 매우 촘촘한 그물이다. 우리의 바깥에서 우리를 무한한 무게로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 존재한다. 산소처럼 우리를 투명하게 통과한다. 우리의 신체와 사고 안에 침투하여 우리 자신의 행동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재생산해낸다. 그 재생산은 궁극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사회 안의 법망에 더욱 효과적으로 갇히게 만든다.

  배우가 아역에서 성인으로 교체하는 접점을 그러한 맥락에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어린 Joe는 비교적 쾌락을 즐기며 자유분방하게 살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 여성으로서의 권능을 무기로 성적 욕망을 채웠다. 그 모든 것들이 남성의 욕망이 허가하는 한 지속되고, 권장되며, 사회 안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져 그녀는 비교적 책임에서 자유로웠다.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성적 쾌락을 잃고, 그때서야 사랑하는 남자와 정서적인 안정을 누리며 아이를 낳고, 결혼을 한다. 더 이상 남성들과의 단순한 섹스가 그녀에게 즐거움을 주지 못한다. 그녀는 고갈되었지만 여전히 버릇을 고치지 못한다. 그녀의 넘쳐나는 욕구를 받아주지 못한 Jerome은 결국 그녀에게 다른 남성들을 허락한다.

  그 지점이 Joe가 성인으로 변하는 지점이다. 계란들을 신나게 까부숴서 원하는 만큼 오믈렛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지만, 허용범위는 무제한적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답게 Jerome과 아들, 가족의 안온함이 아닌 채찍질이라는 쾌락을 선택한다. Jerome은 그런 그녀를 용서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가 용서하지 않은 것을 Joe 스스로도 용서하지 못한다. Seligman 앞에서 아들을 빼앗긴 것에 대해 이야기하던 Joe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컵을 내던졌다. Joe는 감성적인 것이 거짓이라서 싫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녀가 스스로 그 거짓에서 자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그녀는 잠시 섹스중독 치료를 받기도 하는데,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이 그녀의 방종한 행동에 제약을 주기 때문이다. 그녀는 직장 상사로부터 섹스중독 치료 권유를 받게 된다. 치료의 일환으로 섹스를 떠올리는 것들을 집에서 치워버리는데, 치우고 나니 집이 온통 텅텅 비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래도 자신의 본능을 거스르지 못한다. 그녀는 자기 자신이 그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이 떳떳함을 만천하에 밝힌다. 상담 받으러 간 장소에 배치된 거울 속 그녀의 어린 모습은 그녀의 본연적 기질이 원래 그러했음을 보여준다. 그녀는 정신상담사에게 사회의 경찰 노릇을 한다고 비난하며,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자신이 님포매니악임을 당당히 선포한다. 섹스를 섹스 그대로 즐기는 그녀는 바로 님포매니악이지, 남의 언어에 따라 규정된 섹스 중독자가 아니다.

  Joe는 그러한 선포 이후로 주류 사회에 완벽한 이방인이 되고, 사채업이라는 음지에 속하게 된다. 이 부분은 다소 조금 이상한 설정이다. 성적인 고문을 통해 남성들에게서 돈을 받아낸다는 설정은 비현실적인 느낌이다. 영화의 흠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렇게 Joe가 사회적으로 배제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그 즈음 더욱 변두리로 몰린 그녀는 성병으로 추정되는 신체적인 고통까지 안게 된다.

  Seligman에게 Joe는 자신이 매우 사악한 존재이고, 자신이 한 일들은 모두 그릇된 것들이라고 말한다. 한편 그녀는 자기 자신의 본능이 얼마나 반사회적이고 문제적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만큼 스스로 각오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 자신의 죄책감을 청산하지 못했다.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고, 나쁘다고 말하는 그녀는 사회의 기준과 다른 자신의 욕망은 긍정했지만, 사회의 기준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죄인이 아니라고 선포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을 치워내는 데 실패하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했지만, 그것을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죄인으로 살기를 선택했고, 죄인의 굴레를 기꺼이 머리 위에 면류관으로 받아들였다. 공중도덕보다 자신의 쾌락을 따른 그녀는 이미 남의 밥을 훔치는 도둑년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본인도 스스로를 도둑년이라고 생각하며 자기 자신에게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단 사회, 다른 사람들, 아무 상관없는 타인들이 Joe를 더러운 년이라고 비웃는 것만은 아니다. 그녀가 가진 욕망에 가장 큰 형벌을 가한 사람은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가 사랑했던 Jerome이었다. 욕망과 별개로 존재하는 사랑이라는 굴레에서, 가장 능동적인 몸의 주체였던 그녀도 결국 자신이 거스를 수 없는 더 큰 힘 앞에서는 무력했다.

  사랑의 속성은 다채로움이라는 개방성보다는 통합에 대한 지향이라는 보수성과 연결된다. “욕망은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지만, 사랑은 본성을 포장하는 가식”이라는 Joe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욕망은 상대방을 자유롭게 만들지만 사랑은 상대방을 구속한다. 사랑과 욕망의 차이점을 확실히 구분 짓고 넘어가야 한다. 욕망은 Joe가 말한 것처럼 쉽고, 진실 되고, 순간적이다. 아무런 의미가 없고, 단순해서 별일 아닌 것처럼 넘어갈 수 있다. Joe가 맨 처음 Jerome을 J로만 보았을 때도 그녀는 그를 단순히 첫 잠자리 상대로 괜찮은 남자 정도로 생각했다. 단지 그의 손이 근사하다는 게 접근의 이유였다.

  그러나 사랑은 욕망과 다르다. 욕망이 일회적이라면 사랑은 은근하다. 사랑은 단순히 손이 근사해서 빠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근사한 손에 의해 정렬되고 조직되고 다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어린 왕자 식으로 말하자면, 사랑은 길들여지는 것이다. 사랑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몰입과 집중을 하게 만들고, 다른 한 존재를 사유화 하게 만든다. 그래서 사랑이 질투에 어린 욕정일 수 있지만,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순간을 향유하는 매우 강력한 방식 중 하나가 된다. Joe에게 있어 어리고 허세 있고, 섹스도 못했던 J가 루갈라를 케이크포크로 먹는 Jerome이 된 것 같이, 사랑은 한 사람을 고유한 무엇으로 만든다.

  Jerome과의 관계는 여러 에피소드들로 연결된 영화 안에서 처음과 끝의 수미상관으로, 유일하게 관통하는 하나의 큰 줄기다. 역을 맡은 남자배우 샤이아 라보프는 인터뷰에서 자신의 인물을 치졸하고 소심한 남자로 해석하였다고 밝혔다. 배우가 자기가 맡은 인물에 그토록 박한 평가를 주었다는 사실은 상당히 흥미롭다. 배우는 정작 다자연애나 자유로운 섹스를 긍정적으로 바라본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누구에게나 상대방을 사랑하고 그의 선택을 존중하기 위해 자신의 소유욕이 좌절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좌절된 소유욕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온전히 채우지 못한다는 절망감이 Jerome으로 하여금 그녀를 비난하게 만들긴 했지만 결혼생활을 끝장내게 하지는 못했다.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Joe가 Jerome을 벗어나 아예 그가 상상하지도 못하는 새로운 영역으로의 쾌락을 쫓고, 그럼으로써 자신과 자신의 아이까지 버리는 선택을 했다는 점이다. 물론 Joe가 직접 스스로 아이를 버리는 선택을 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이미 그녀는 자신의 쾌락이 더 우선이 되어 아이를 돌보는 데 매우 소홀했다. 그러한 지점은 Jerome조차 참을 수 없는 지점이었고(그 역시 그다지 성실한 남편감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그녀의 솔직한 욕망은 그녀의 인생에서 배우자와 자식을 끊어내게 만든다.

  하지만 단순한 이별만이 Jerome이 내린 잔인한 형벌, 3+5를 일으킨 것은 아니다. Joe는 자신의 애인이자 딸인 P를 자신이 사랑한 유일한 남자에게 빼앗긴다. 운명의 장난 같고, 어떻게 보면 한 편의 막장 드라마 같은 이 관계도는 필자에게 인위적이거나 개연성이 없거나 하지 않았다. 그녀의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그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함의 때문이었다. 그함의는 나이든 여자라는 위치에 대한 은유를 암시한다. 님포매니악 1부는 즐겁고, 비교적 경쾌한데 그 이유는 주인공인 Joe가 어리고, 싱싱하고, 예뻐서 수많은 남성에게 숭배의 대상이 된다는 점 때문이다. 그녀 때문에 그녀의 이십대에 많은 남자들이 그리고 그들의 많은 부인들이 괴로워했다. 그건 철저한 힘의 놀이였다. 둥지와 계란들을 원하면 다 깨트려서 자신의 쾌락을 즐길 수 있던 그녀의 권력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놀이도 결국 시간이 변하자 끝나버렸다. 세계와 사회는 그 이상을 용인하지 않는다. 이제 그녀의 성기는 고통에 시달린다. 그리고 새로운 싱싱하고 어린 여자가 Joe의 옛 남자와 관계를 맺고, 그녀의 자빠진 얼굴에 오줌을 갈긴다. 그건 그녀가 젊고 아름다웠을 때 행했던 권력의 남용과 별 차이가 없이 똑같은 힘의 놀이다. 나이 들고 병든 Joe가 사랑 앞에서 겪어야 하는 고통은 무참하다. 자신의 어린 애인을 빼앗은 자신의 사랑, 변해버린 그 마음에 총을 들고 분노를 발산하려 했지만, 그녀의 무의식이 그걸 막는다. Jerome은 보잘것없는 Joe를 구타하고, 그녀 앞에서 어린 P와 3+5, 자신과 Joe가 맨 처음 나누었던 그 암호를 섞으며 "이제 나는 너랑 자는 것에는 관심 없다. 나는 어린 여자랑 잘 것이다. 너의 모든 힘은 나에게서 떠나갔으니 꺼져 라 이 늙은 여자야."라는 형벌을 가한다.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며 사회의 질서에서 엇나가 남편과 아이라는 여자의 의무를 저버린 그녀에게 가장 큰 징벌이 바로 그 3+5였다. 그 가혹한 형벌에도 불구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껴왔을 Joe가 영화 맨 처음 시작에서 뻗어 누운 상태로 괜찮다고 중얼거린 건, 어떻게 보면 그녀 스스로 Jerome에 대한 사랑이 그제야 완전히 끝났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아직 언급되지 않은 곳이자, 영화 전체에서 가장 이질적인 부분이기도 한 ‘섬망’을 다루며 이야기의 논의를 마무리 짓고자 한다. ‘섬망’은 Joe의 아버지가 죽는 내용을 다루는 장이다. Joe가 인생의 쾌락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1부의 후반부에서 그녀는 아버지의 질병과 죽음을 보게 된다. 그녀는 아버지를 돕고 싶어 하지만, 도울 수 없고, 오히려 병원에서 외간 남자랑 섹스를 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그 자리에서 애액을 분비한다. 이렇게 보면 고통과 욕망은 동전의 양면처럼 떨어진 것이 아니라, 섞인 잡탕 같다. 어쩌면 삶의 마지막이 처절하게 괴롭고, 외면당하는 고통으로 가득할 것이라는 그 허무함이 우리에게 이 순간만큼은 향유해야 한다는 욕망의 원동력일지 모른다. 일단 아버지는 죽었지만, 그녀는 살아있다. 필자는 Joe가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성적으로 흥분한 것이 프로이트 식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신체가 죽음 앞에서 삶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애액의 분비로 표현한 것이라 보았다.

  그렇듯 강한 Joe는 Seligman에게 자신의 강력한 욕망과 앞으로도 싸우겠다고 의지를 표명한다. 자신의 욕망, 자신을 파멸 시키는 강력한 구멍을 그녀는 외면하지도, 무시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 준비가 되어 있고, 기울어진 형태로라도 존재하기 위해 열심히 투쟁할 것을 다짐한다. 물론 그녀의 이러한 의지에 대해 감독인 라스 폰 트리에는 친구처럼 다정한 줄 알았던 Seligman이 흐물흐물한 성기를 들이대는 것으로 나름 비관적인 관점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총소리가 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의 Joe가 살인자가 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비틀린 인생, 조금 더 비틀어지면 어떻겠는가. 필자가 지나치게 그녀의 인생에 대해 낙관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몸에는 아직 구멍이 남아 있다. 자신의 삶의 즐거움을 찾기 위해 SM에 입문하거나 흑인들과 접선하는 등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그녀인데 걱정할 게 딱히 있을까?

  이 영화를 보는 많은 사람들이 죄다 Joe가 불쌍하고 힘겹게 보인다고들 많이 말한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 그녀의 인생은 힘들고, 굴곡지고, 유별나다. 그러나 그녀의 나무가 원래 그렇다. 그녀의 기질이 원래 그렇다. 그녀의 선택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어떤 나무들은 따뜻한 평지가 아니라 높은 절벽 위에서라도 비틀린 채로 살아간다. 어떻게 저런 형태로 살 수 있을까 기겁하고 의문 가질 필요 없다. 생명의 다양성을 잉태하는 그 구멍, 생명력을 부여하고 삶에 의미와 재미를 선물해주는 그 구멍이 우리에게도 엄연히 실존한다.

  우리 인류는 어차피 혼자 남을 운명이다. 게다가 욕망은 결여를 채울 수 없기에 순간을 향유한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자 함은 필연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함몰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외부 세계와 사회로 눈을 돌리게 만든다. 하지만 인간의 운명 속에서 진정한 비극은 우리 욕망의 대상인 외부 세계가 우리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신이 아니며, 우리의 이야기와 욕망은 신화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뼈아픈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 역시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만큼이나 인간을 우울하게 만든다. 자아와 세계는 대결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고, 세계의 가혹한 규칙에 복종하지 못한 인간 개인의 욕망은 Joe의 경우처럼 가혹한 형벌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욕망은 구멍을 갖고 살아가는 모든 자들에게 수반될 수밖에 없는 필수불가결한 에너지이고, 인간의 욕망은 여러 가혹한 형벌 속에서도 죽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쾌락을 향해 솟구친다. 넘쳐흘러야 할 구멍을 메우지 못한 인간은 그 에너지로써 고통의 칼춤을 춘다. 어차피 구멍을 찾아 없애지 못할 바, 그 니힐리즘을 니체가 말한 것처럼 적극적으로 껴안고 어린아이의 정신으로 춤을 추며 매사 즐기는 것도 (물론 고통의 순간도 있겠지만) 확실히 나쁜 선택지는 아닐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받아들이고, 싸우고, 즐기는 주체적인 의지가 건강한 삶의 초석이다. 그렇게 본다면 Joe의 이야기도 딱히 우울하지 않고, 힘겨워 보이지 않는, 그저 또 하나의 형태의 삶에 불과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이 유난히 센 날이면 한강 물결도 거칠다. 순종적으로 한 방향으로만 강너울을 푸아 뱉어낸다. 먹구름이 잔뜩 껴 물조차 검어보이는 길을 걷던 내 눈에 누군가가 매우 밝은 조명으로 시커먼 강가를 비추는 것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영영 못 찾겠구나."라는 문장을 조립했다. 물 위로 무엇이라도 떨구면 곧 저 멀리 헤엄쳐 가버릴 정도였다. 찾기를 포기한 듯 빛의 깜박임은 곧 무기력해졌고, 나도 시선을 거두었다. 수면에서 물살인지, 불은 살점인지 구분치 못할 무엇인가를 보기라도 할까 비겁하게 두려워 하며 그곳을 벗어났다.

  예전에 동호대교에서 시작해, 동호대교로 돌아온 짧은 산책을 한 적 있다. 가기 전에는 없던 새로운 광경이 있었다. 원래 한강을 거니노라면 자전거를 타는 점들과 걷거나 뛰는 선들을 빼고는 그닥 바뀌는 배경이라곤 없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구급차가 서있었고, 저 머지 않은데도 아득한 강가에 하얀 천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귀중히 덮어놓은 무엇인가가 뉘어져 있었다. 얼굴을 보이지 않고 모자만 차분히 눌러쓴 남자 두 명이 곁에 적장자들처럼 서있었다. 죽은 것과 산 것의 차이는 바로 이 지표면 한 장의 차이였다. 나는 지금 위에서 걷고 있지만, 언제 저 아래 누워 하얀 천을 덮고 시퍼렇게 웃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2015년 2월 23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