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트러블 -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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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책 후기를 빙자한 나의 페미니즘 이야기 -

학부 때 철학 책을 보며 이 사람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다고 느낀 사람이 딱 두 명 있다. 하나가 미셸 푸코, 다른 하나가 주디스 버틀러다. 여성 없는 페미니즘, 그 사상을 주디스 버틀러와 내가 공유한다.

(1) 최근 누군가가 트랜스젠더는 여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성 염색체 XX만이 여자라는 요지였다. 우리나라에서 대중적으로 알려진 트랜스젠더로 거의 유일한 하리수씨가 글을 썼다. 논리적 반박은 아니었고, 감정적 대응에 가까웠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자신이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다는 말이었다. 트렌스젠더로 유명한 그녀의 그런 이야기가 내게는 정말 흥미로웠다.
아무튼, 이 사태에서 내가 가장 궁금했던 것은 바로 ‘여성’이 누구냐의 문제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여성이라는 카테고리 자체가 매우 헐거운 것이며 그 단어가 묶는 개체들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차이를 지워버린다고 말한다. 부자인 여자, 못 사는 여자, 공부 잘 한 여자, 운동 좋아하는 여자 등등, 이 모든 차이점들에도 우리는 어떤 존재들이 여자라는 것을 단 번에 파악해서 분류하는 데 성공한다.
나는 그에 대해 항상 의문을 가져왔다. 내가 사회에 의해 여성이라고 규정되어 온 것은 맞다. 나도 꽤나 사회의 젠더 체계에 순응적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나는 항상 의아했다. 예를 들어, 왜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한 성별만을 ‘당연히’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같은 질문들 말이다. 불확정적인 세상을 살며 다들 자기 자신의 취향을 그렇게 무비판적으로 긍정하며 산다는 게 꽤나 신기했다. 나 스스로는 솔직히 말해서, 내 운명의 짝이 여자라고 해도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이다.
한 가지 더 붙여, 나는 콤플렉스도 가지고 살고 있다. 내가 ‘여성’이라고 하던데, 별로 여자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여성성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이중적인 감정을 갖는다. 어렸을 때부터 장군감이라느니 같은 소위 ‘남성적 기질’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불려왔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탈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여자 같은’ 행동들과 여러 취향들을 스스로가 연습했다. 그게 주디스 버틀러가 말하는 반복적 행동일 것이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 ‘여자’라는 어떤 이상점(이데아)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노력해봤자 나는 결코 그것이 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여자’조차 만들어진 관념물이기 때문에. 내가 생각한 ‘여자’란 개념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이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여자’일 것이기 때문에. 그걸 주디스 버틀러의 책을 읽으며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나의 기질과 사회가 규정하는 여자라는 기질, 그 두 가지를 섞어 ‘내’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보면, 일단 나는 나의 어떤 부분에서 여자를 ‘선택’한 것 같다.

(2) 페미니즘에 관해서 최근의 격렬한 논쟁들은, 아마 그것에 관해 갖는 상(image)가 모두 다 다른 것 같아 그럴 것이다. 내게 페미니즘 관련해서 그 지향점은, 주디스 버틀러가 말한 것처럼, 성별의 구분법조차 만들어 내어 우리를 관통하는 만들어진 위계질서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 위계질서 안에서 남자와 여자 둘 다 내게는 다 같은 권력의 적용대상들이다. 그 위계질서가 남자와 여자의 행동양식을 결정하고, 어떤 성별을 좋아할 것인지 정해주고, 어떻게 행동할지조차 규정하는 이 사회(남자는 부엌에 들어가서 음식하면 남성성이 저하된다, 여자는 정치적 의견을 말하면 안 된다)에 다 적용된다. 우리는 모든 성별을 얽어매는 이 구분양상에 저항해야 하는 것, 어떤 한 가지 성별만이 아니라 섹스와 젠더를 규정하여 우리로 하여금 더욱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여자는 여자를 사랑하면 안 되고 남자는 남자를 사랑하면 안 되고, 여자가 남자가 되면 안 되며, 남자가 여자가 되면 안 되는) 그 상황의 탈피가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이다.

(3) 현재 우리 사회에서 발생되는 문제는 ‘김치녀’와 ‘한남’이 같냐의 문제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한남’을 ‘김치녀’와 같은 남성의 여성혐오 단어에 대항해서 나온 무기라고 인식한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그 두 단어가 똑같이 다른 성별을 혐오하는 폭력적인 단어라고 인식한다. 이 두 지점의 위치가 극명해 균열의 소리도 크다.
일단 밝히고 싶은 지점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 내가 미러링 전략 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주디스 버틀러가 이야기하는 패러디의 개념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쪽이 하는 차별과 혐오를 다른 맥락으로 전시하며, 자기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자성하는 힘을 준다면, 그것이 미러링 전략의 좋은 효과일 것이다. 두 번째 인정하는 지점은, 우리 사회의 기본 성별 위계질서가 특정 사회적 성별/젠더(여성, LGBT 등)에 가혹하다는 것이다. 이성애 남성이 사회에서 주도적으로 차지해온 위치는 분명 역사적인 것이며, 그것이 이성애 남성을 제외한 다른 젠더들에게 미쳐온 억압이 꽤나 크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 젠더가 항상 ‘정상/적격’의 위치를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신분차별이 있던 옛날에 높은 신분에서 남성이 정치참여권을 가졌던 것 등)
그러나 현재 개인적으로 ‘김치녀’, ‘한남’, 이런 표현이 나에게는 다 똑같이 들린다. 어떤 맥락에서 그것이 효과적인 무기가 되었던 적도 있고, 그럴 수도 있지만 지금은 무차별적으로 서로 단어 남용 밖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아래 기사의 일본 교수가 한 말을 인용해보고 싶다.


"(여성혐오 문화에 대응하는 하나의 전략으로서 미러링 mirroring에 대해) 언어학적으로 보면 '패러디'라고 할 수 있다. 상대의 언어를 빼앗아, 그대로 되돌려준다는 뜻이다. 패러디는 물론 싸우는 도구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패러디를 하면 본인의 레벨을 상대의 레벨로 낮추게 되는 결과도 낳을 수 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젠더간의 압도적인 권력 차이를 생각해 볼 때 '미러링'은 적절한 전략이라고 할 수 없다. 남성들이 남발하는 반동적인 전략에 똑같이 휩쓸릴 수 있다."
심연을 바라보니, 심연이 자기가 된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성애 남성이라는 젠더가 인터넷에 폭력성을 과시하는 그 문제적 방식이 그대로 성별만 바꾸어 진행되고 있다. 내가 (2)에서 쓴 것처럼, 나는 성별의 구분법이 전 인간을 규제하는 사태의 탈피를 원하기 때문에, 그런 미러링 전략이 나와 맞지 않아도, 서로의 젠더적 위치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기를 원했지만, 그 구분법의 벽만 높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내가 보았을 때 이것은 폭력적인 성차별/분별의 끝없는 재생산일 뿐이며, 일베/김치녀 등의 그 끔찍한 문화의 아류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4) 유아인 사태에서도 나는 유아인이 처음에 달았던 댓글(애호박으로 때려준다는 농담)을 보며 그냥 왜 굳이 저런 표현을 썼지, 조금 부적절하지 않나 싶었다. 그런데 거기에다 대고 무차별적으로 ‘한남’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에 대해 놀랐다. 그 이후에 전개된 양상과는 별개로, 그 사건만 놓고 봤을 때, 그건 미러링이나 문제제기가 아니라, 폭력적이었다고 본다. 이게 조금만 진보적인 사람을 놓고 빨갱이라고 부르는 것/보수적인 사람 두고 태극기 부대라 부르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5) 항상 이 문제에 대해 슬프게 생각한다. 결국 ‘여성’이라는 정치적 집단이 대항할 지점은 똑같은 폭력이었던 것일까. 폭력과 혐오를 폭력과 혐오로 받아야만 사람들이 ‘봐주는 것일까’. 얼마 전까지는, 사람들이 ‘봐준다’는 것 자체로 위안을 삼았으나, 이제는 현 양상이 과연 괜찮은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6)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본다. 필연적 균열이 발생시키는 잡음이라 믿는다. 아래는 젠더 트러블의 일부분이다. 나 개인적으로 페미니즘 뿐 아니라 정체성 담론에서 젠더 트러블은 필독이라고 본다.
개인적으로 라캉, 프로이트 비판도 시원했다. ㅎㅎ

「옮긴이 해제」
p20 따라서 선험적이거나 일반적인 ‘집합’이나 ‘범주’로서의 여성은 없다. 여성은 언제나 재의미화와 재각인에 열려 있는 경합의 장소이며, 그 열린 의미화의 가능성이 급진적 정치성을 가능하게 하는 초석인 것이다.

p21 그러나 보편 범주로서의 ‘여성’이 없다고 정치적 실천 주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본질적’ 의미의 보편성이 없다고 의미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 보편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각 특수성이 결합하는 ‘구성된 보편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 정체성의 해체는 정치성의 해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글쓴이」
p67 이 책의 요점은 젠더의 당연시된 지식이 실제에 대한 선제적이고 폭력적인 경계선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p97 아마도 ‘섹스(본인 추가 설명 : 생물학적 성별)’라 불리는 이 문화적인 구성물은 젠더만큼이나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 될 것이다. 어쩌면 섹스는 언제나 이미 젠더였을지도 모른다. 그 결과 섹스와 젠더는 전혀 구별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된다.
p100 이 ‘몸’도 그 자체로 하나의 구성물이다.
p111 다시 말해 여성 범주의 일관성이나 통일성에 대한 주장은 수많은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다양성을 사실상 거부한 것이다. 그 다양성 안에 구체적 ‘여성들’의 배치가 구성되는데도 말이다.
p115 ‘사람’의 ‘일관성’과 ‘연속성’은 그 사람됨의 논리적이거나 분석적인 특질이 아니다. 그보다는 사회적으로 구성되고 유지되는 인식 가능성의 규범들이다.
p130~131 우리는 이제 젠더의 본질적 효과가 젠더 일관성의 규제적 관행 때문에 수행적으로 생산되고 강제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본질의 형이상학이라는 물려받은 담론 안에서 젠더는 수행적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여기서 수행적이라는 의미는 목적한 정체성을 스스로 구성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젠더는 언제나 행위이다.
(라캉 관련)
p179 “관찰에서 밝혀졌듯이 여성의 동성애 경향은 실망에서 오는 것이고, 그것이 사랑의 추구라는 측면을 강화시킨다”고 주장한다. 편의상 누가 관찰하고 무엇이 관찰되는가는 생략되어 있는데도, 라캉은 자신의 해석이 누구든 주의 깊게 본 사람에게는 명백히 나타난다고 간주한다. ‘관찰’을 통해서 바라보게 되는 것은 여성 동성애자의 근원적인 실망이고, 여기서 이 실망은 가면을 통해 지배/해결된 거부를 되살아나게 한다. 또한 여성 동성애자가 어떤 강화된 이상화, 즉 욕망을 대가로 이루어지는 사랑의 속구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도 다소 ‘관찰’하게 된다.
p194 상징계는 인간 주체가 그것에 접근할 수는 없어도,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신성으로 인간 주체에 작동하는 것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 라캉 이론은 일종의 ‘노예의 도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라캉 이론은 어떻게 니체가 󰡔도덕의 계보학󰡕에서 보여준 통찰을 전유한 뒤 수정될 수 있었을까? 신, 즉 접근할 수 없는 상징계는 규칙적으로 자신의 무능함을 설정해주는 어떤 권력(권력에의 의지) 때문에 접근이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는데 말이다. ... 실패를 보장하는 법의 구성은, ‘법’을 영원한 불가능성으로 구성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바로 그 생산적 권력을 부인하는, 노예의 도덕을 나타내는 징후이다.
(프로이드 관련)
p202 다시 말해, 아버지에 대한 욕망을 어떻게 여성적 기질의 증거로 읽어내는가 말이다.

(다시)
p207-208 따라서 ‘기질’이라는 언어는 거짓 근본주의로서, 금지의 결과를 통해 정서적으로 형성되거나 ‘고정’된다. 그 결과 기질은 심리의 근원적인 성적 사실이 아니라, 에고 이상의 공모와 가치 전환의 행위 및 문화가 부가한, 법으로부터 생산된 효과이다.
p231 이성애를 분명한 사회형식으로 온전히 보존하려면 인식 가능한 동성애 개념이 필요하고, 그것을 문화적으로 인식 불가능하게 만드는 동성애 개념의 금지 또한 필요하게 된다.
p265 푸코는 ‘섹스’를 기원보다는 하나의 결과로 간주하는 역담론을 끌어온다. 그는 육체적 쾌락의 기원적이고 연속적인 원인이자 의미였던 ‘섹스’ 대신에 담론과 권력이라는 열려 있는 복합적인 역사체계로서의 ‘섹슈얼리티’를 제안한다.
p307-308 성의 무한한 증식은 논리적으로 성의 부정 그 자체를 포함한다. 만약 성의 수가 존재하는 개체들의 수에 상응하는 것이라면, 더 이상 성은 하나의 용어로서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즉 어떤 사람의 성은 근본적으로 특이한 자질이 될 것이며, 더 이상 유용하거나 기술 가능한 일반화로 작동될 수 없을 것이다.
p339 “영혼이 몸의 감옥이다.”(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인용)
p347 따라서 젠더는 규제를 통해 자신의 기원을 감추는 하나의 구성물이다.
p348 젠더의 행동은 반복된 연기를 필요로 한다.
p352 나의 주장은 ‘행위 뒤의 행위자’가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며, ‘행위자’는 행위 속에서 행위를 통해 다양하게 구성된다는 것이다. 이는 자아가 자아의 행위를 통해서 구성된다는 실존주의적 이론으로 회귀하려는 것이 아니다.
p363 따라서 존재론은 하나의 토대가 아니라 규범적 명령이며, 이 명령은 자신을 필연적인 토대로서의 정치 담론으로 설정함으로써 음흉하게 작동한다. 정체성의 해체는 정치성의 해체가 아니다. 그것은 정체성이 표명되는 관점 자체를 정치적인 것으로 확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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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TexTan > [책오디세이] 최근의 지젝과 라캉 책들

나중에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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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 모델, 중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왜 유능한가 - 대의민주주의의 덫과 현능정치의 도전
대니얼 A. 벨 지음, 김기협 옮김 / 서해문집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The China Model : Political Meritocracy and the Limits of Democracy


(책을 읽은 감상 요약)

  일단 간략하게 이 책을 평하자면, 나는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그리고 경의를 표한다. 내가 먼저 밝히고 싶은 것은 나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이 저자의 사상이 내가 앞으로 싸워나가야 할 반대 지평의 주요한 흐름 중 하나일 것임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저자가 자신의 생각을 열심히 펼쳐나가려는 그 노력을 평가절하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주석의 양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저자가 밝히기를 전체 내용의 3분의 1이 주석이다. 그의 이 충실함은 학문적으로 가치가 있다. 그가 주장하는 길이 옳지 않다고 반박될 수도 있고, 그의 사상이 결국 중국에서 널리 받아져 활용될 수도 있는 등 여러 가능성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세계에서 존재하고 있고 꽤나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는 사상에 관해 진지하게 접근했다는 점에서 일독의 가치가 있는 학자였다.


(책의 주요 내용을 본문의 문장을 빌어 설명, 인용은 쪽수로 처리한다.

7 - 품성과 능력이 뛰어난 지도자의 선발을 인민의 투표에만 맡기지 않는 현능주의 meritocracy 정치제도를 다룬 책이다.

21 - 민주주의의 위험은 다음 네 가지이다. '다수의 전횡', '소수의 전횡', '투표 집단의 전횡', '경쟁적 개인주의자의 전횡' 

23 - 현능주의에 따르는 중요한 문제점은 다음 세 가지이다. '통치자의 권력 남용', '사회 유동성의 저하', '체제 정당성을 외부에 설득시키는 것의 어려움'

38 - 중요한 문제는, 지도자에게 경험과 전문성을 요구하지 않는 제도가 거의 의심을 용납하지 않는 절대적 지지를 받는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보인다는 점이다. 

71 - 선거란 것은 정권을 바꿈으로써 정치를 바꿀 수 있다는 (많은 경우 잘못된) 믿음을 심어줌으로써 실제 정치적 문제를 국민의 관심으로부터 가려주는 장치다. 

289~290 - 쑨원은 미국 헌정체제의 3권분립을 찬성하면서도 그것으로 부족하다며 '중하민국의 장래 헌법'에는 5권분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추가될 두 기관은 전통시대 정부기구를 현대화한 것이다. ... 간단히 말해서, 인민이 선출한 지도자의 실력을 시험으로 검증함으로써 현능주의와 민주주의를 배합한다는 것이다. 

314 - 바닥은 민주주의, 꼭대기는 현능주의, 그리고 중간은 실험 공간으로 하는 이 수직 모델을 '차이나 모델'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이고 단편적인 생각)

- 이 책의 주장은 플라톤이 말한 철인정치와 비슷하다. 

- 확실히 사람들이 복잡한 현대 사회의 문제를 알 만한 여유가 없거나, 이해한다고 해도 공익을 생각하지 않고 투표를 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정의 공정성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가치를 옹호하는 힘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고 본다. 절차의 중요성은 우리 모두에게 기회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투명하게 하여 사회의 문제점을 민중이 직시하게 하여 모두가 모두의 힘으로 고쳐나가게 한다. 즉, 민주주의가 불완전하다고 하는 것은 인간이 불완전하다고 하는 말이나 같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립이다. 나는 도산 안창호가 말한 자립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적이고 이기적일 수 있지만 그것보다 분명한 더 넓은 시야의 '우리'가 있다. 인간은 교육으로 나만이 아닌 '우리'를 볼 수 있다. 민주주의는 인간에 대한 투자와 함께 나아갈 수 있다. 일부 엘리트 교육을 통해 그들의 통치로 우리는 개선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라는 주체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만 남을 뿐이다. 

- 본문은 싱가포르의 예를 많이 들고 있다. 하지만 저자도 인지하다시피 싱가포르에도 민주주의를 향한 갈망이 커지고 있다. 이것은 현능주의 체제의 문제 아닌가? 또한 엘리트를 양성하고 그들로 하여금 정치 지도자를 선발하는 절차는 틀에 박힌, 운이 좋은 엘리트만을 양성할 뿐이다. 시대의 도도한 흐름 속에 급변하는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일군의 비슷한 사람들만을 뽑아낼 엘리트 체제가 이처럼 급변하는 체제에 옳을까?

- 특히 대한민국의 맥락에서 요새 우리는 굉장히 성장한 시민의식을 보인 바 있다. 2016년 촛불혁명이 그러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일은 벨이 이야기하는 선거의 문제점을 노출시키기도 한다. 우리가 선거를 잘못하여 박근혜 대통령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우리 손으로 박근혜를 끌어내리기도 하였다. 그것도 굉장히 평화로운 방법으로 이룩해냈다. 민중이 문제의 심각함을 감각하고 그것을 개선시킬 수 있다는 높은 수준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가 엘리트에게만 의존해서 문제를 처리할 필요가 있을까?

- 벨은 중국 공산당의 집권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들이 밑에서부터 올라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논리는 사실 꽤나 효력있는 생각이고, 실제로 타당하다. 나부터도 어떤 일을 할 때 밑에서부터 올라가는 것만큼 우수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구조가 받쳐주지 않으면 외부 인사는 내부 그룹에 적응하기 쉽지 않고, 원래 있던 곳에 있던 사람만큼 더 잘하기는 매우 힘들다. 그만큼 그 조직에 대한 이해도가 외부 인사로서도 높거나 하는 등 적어도 이전부터 그 조직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2, 30년 간 공무원으로 아래서부터 위까지 치고 올라간 사람들의 현장 실무 경험은 정말 막강하다. 나부터도 그것을 피부로 느끼는 직업군이기 때문에 절절히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당 장기 집권이 그 현능주의 체제를 보장하는 것인지 나는 의문이다. 스스로 개혁을 어떻게 할 것이냐가 큰 관건인데 현능주의 체제에서는 엘리트들의 구성원이 바뀔 뿐 그들의 정신이 어떤 식으로 감찰되고 변화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 저자가 추구하는 방향은 유학적인 사상으로 보이기는 하는데 가끔 지나치게 비합리적이고, 지나치게 사회/공동체/집단주의에 가까워 보일 때가 있다. 개인의 자유를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생각을 한다고 여겨질 때가 있는데, 191쪽에서 그의 주장을 확인하면 "둘 이상의 언어를 쓰는 사람들은 치매가 5년 가량 늦어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으므로(해당 연구 인용) 여러 언어를 쓰는 정치 지도자들은 은퇴를 좀 늦게 해도 괜찮을 것이다.", 191~192쪽의 "헌법에 대통령과 부통령은 35세, 상원의원은 30세, 하원의원은 25세 이상이어야 한다. 중요한 자리일수록 연령 제한도 올라가야 한다는 원칙은 바람직한 것이지만 선동정치와 반엘리트주의가 팽배하고 젊음이 예찬받는 지금 미국 사회에서는 내놓기 어려울 것 같다."라는 주장을 한다. 전형적인 Ageism이다. 

- 238쪽에서 그는 "일본과 한국과 대만에서 유교 전통의 유산과 민주주의 정치 체제가 상치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고 주장하는데 개인적으로 상치되는 점이 있다고 느낀다. 아주 동의하지는 않지만 지나치게 교조화된 성리학 정신이 팽배한 조선 후기의 문화가 우리의 현재 민주주의/다원주의 사회와 맞지 않는 경우가 있다. 

- 어떤 점에서 중국의 현실에 굉장히 나이브하고 순진해 보일 때가 있다. 261쪽의 주석을 보면 "시진핑 주석이 두 차례 정치국 상무위원회 임기를 넘어 주석직을 지키려고 할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고 나는 생각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쁜 황제'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내 주장을 재고하겠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문제는 (1) 시진핑 체제에 대한 긍정적인 벨의 신뢰/개인적 믿음이 책 전체 주장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 (2) 시진핑이 굳이 주석직 지키지 않고 상왕 노릇을 한다면 여전히 '나쁜 황제' 문제는 걱정할 것이 아닌지 등이 있다. 학자가 믿음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을 나는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여러 모로 중국 공산당과 시진핑 체제에 대해 본인이 좋은 점을 크게 놓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수는 있다. 270쪽의 주석에서 그는 "중국의 경우 정부가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편이고, 수백만 중국인이 여행과 유학으로부터 정치적 믿음이 바뀌지 않은 채 돌아오고 있으며, 믿을 만한 여론조사에서 정권이 높은 지지율을 꾸준히 누리고 있다. 그러므로 중국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짓된 의식 상태'에 빠져 있을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겠다."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정말 의아스럽다. 많은 중국 인재들이 미국 가서 사는 것이 문제 된다는 뉴스를 본 기억은 차치하고서라도, 실제로 벨의 주장대로 사람들이 유학을 하고 정치적 믿음이 바뀌지 않은 채 돌아온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지? 또한 다른 여러 요소들, 문화나 사회적인 문제, 언어, 게다가 중화사상까지 고려하지 않고서 중국 정치 체제의 만족도를 단순히 정당화시키는 것에는 큰 문제가 있다고 보인다. 

- 보론에서 벨은 사람들에게 받은 비판에 대해 대답한다. 실제로도 내가 가진 여러 질문을 벨 본인이 책을 발표하고 많이 받은 것 같다. 나는 온건하게 반응한 편이고, 굉장히 공격적인 반응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반응할 수 있다. 368쪽에서 "내가 가장 많이 듣는 비난이 내가 중국 정부의 '변호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그런 주장을 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다. 나는 하나의 '이념'을 옹호하는 것이지, 특정한 정치 현실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굳이 딱지를 붙인다면 나는 정치이론가이고, 내 방법은 상황정치론이다. 사회의 공적 문화를 주도하는 정치적 이념을 합리적인 방어가 가능한 방법으로 설명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책을 전체 읽었으면 그런 말을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부정적인 방식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다. 나는 어떤 사람도 완벽한, 진공에 가까운 객관성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 벨은 중국과 공산당 정치에 관해 분명히 낙관적인 지점으로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가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믿음을 전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 부분은 내가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는 분명 중국 공산당 시진핑 체제를 긍정하는 특정한 정치 현실에 대해 더 나은 개선점을 이야기하면서 그 체제의 현존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정치이념인 현능주의 체제를 성취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벨에게 안타까운 일일 수 있겠지만, 그가 믿는 시진핑과 중국 공산당이 정말 현능주의와 가까운지, 그리고 그들이 만약 실패한다면, 더 많은 사람을 억압하고, 더 많은 사람 위에 군림하여 guardian수호계급이 아니라 착취계급이 된다면, 그의 이 모든 이론들은 허망한 것이 될 것이고, 그는 전세계적 시대 흐름을 역행한 학자로 기록될 것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현행 민주주의에 던지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현재 우리의 시점, 즉 촛불혁명을 겪고 나서 민중의 에너지를 관리하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길이 크게 거론된다. 하나는 직접 민주주의의 강화이고 다른 하나는 정당의 강화이다. 나 개인적으로 전자보다 후자를 미는 사람으로서, 더 좋은 통치체제, 정치조직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전문화, 직업인으로서의 정치인에 대한 고민을 하는 사람으로서 벨이 정치지도자는 우수한 인재여야 한다(유교적인 관점에서 왕도로 이끌 군자, 성인)는 점은 분명히 틀린 말이 아니다. 분명 우리는 웬만하면 우수한 사람을 뽑고 싶어하는데, 만약 우리 개인의 목소리와 자유가 크다면 우리는 꼭 우수한 사람을 뽑고 싶어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오히려 나의 목소리를 잘 반영할 사람을 뽑는다. 미국 사람들이 트럼프를 뽑은 것도 같은 심리일 수 있다. 잘나거나 도덕군자가 아니라, 내가 요새 사회를 보며 갖는 생각들을 속시원하게 이야기하고 반영해 줄 사람으로서 트럼프를 뽑은 것이다. 이렇다면 직업정치인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나 많은 고민이 든다. 단순히 대중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결국 자극적인 민주주의의 프레임에서 사람들은 끝없이 자기를 착취할 사람을 알지도 못하면서 자기 사람으로 뽑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직업정치인이 대중의 의사에 반해 자신의 의사를 밀고 나가는, 그러나 그 의사가 전문적이고 타당한 것이라면? 이때의 가정을 벨은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확실히 쉬운 문제는 아니다. 인기에 영합하는 현재의 선거민주주의를 우리는 분명 고찰할 필요가 있다. 확실히 민주주의 안에 어떤 식으로 전문성을 투입시킬 수 있느냐는 정말, 정말 중요한 문제이긴 하다. 




* 책을 읽는 과정에서 궁금했던 내용들


1. 싱가포르 체제에 관하여(장/단점)

2. 막스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

3. 시험 성적이 한 인간의 정치적 우수성을 얼마나 입증할 수 있는가?

4. 오스만 제국의 역사

5. 중국 송나라의 역사

6. 현대 유학자들의 동향

7. Foreign Policy 일독

8. 소시오패스에 관하여

9. 중국인은 '세뇌' 당하고 있는가?

10. 존 스튜어트 밀의 대표저작 일독

11. 동양과 서양의 가족관에 과하여

12. 1인 1표를 동양적 문화관에서 바라볼 때의 정당한 근거

13. 존 듀이의 저작 일독

14. 중국의 지난 30년 간의 객관적 성과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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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reat Gatsby (Paperback, 영국판) - 『위대한 개츠비 』 원서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 Penguin Classics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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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원서로 읽었다. 초반에 파티 장면 부분까지는 잘 이해도 안 되고 조금 묘사가 흐드러져 있는 느낌을 받아 약간 꾸역꾸역 읽었는데, 개츠비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그의 서사가 나타나며 이야기가 훨씬 재미있어졌다.


가장 긴장감 넘치는 장면은 아무래도 호텔방에서 개츠비와 탐이 설전을 벌이는 부분이었다. 사실 그 이전부터 개츠비가 데이지의 탐에 대해 가졌던 애정,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과 같이, 개츠비 자신이 함께 하지 않은 세월을 인정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자신이 데이지를 사랑하는 만큼 데이지도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단지 상황 때문이었을 뿐 그녀의 마음은 항상 자신에게 있기만을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안타깝게도 사실이 아니었다. 데이지에게는 분명 탐과의 즐겁고 소중한 시간이 있었다. 그걸 부정하라고 데이지에게 윽박지르는 순간, 데이지는 오히려 탐을 사랑하는 부분적 내면과 직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전체의 주된 내용은 가지지 못한 것을 꿈꾸는 인간, 에 관한 이야기다. 화려한 파티, 부유한 사람들에 대한 냉소가 느껴진다. 그들은 피상적인 파티광들이지만 정작 그것을 제공한 사람이 죽었을 때 얼굴조차 비추지 않는다. 울프샤이엄은 비즈니스 관계에 감정을 섞고 싶어하지 않고, 탐은 가책을 느끼며, 데이지는 자신의 중대한 죄 이후에 얼굴도 비추지 않는다. 


개츠비는 딱하고 불쌍하고 모자란 사람 같으면서도, 가장 순수하고 충실한 사람 같기도 하다. 인간은 다양한 면모를 가지고 있으니까 당연할 것이다. 나는 그가 데이지를 사랑한 이유에 대해서도 고민해보았다. 데이지가 가진 풍족한 면, 그가 흉내낼 수 없는 부유함과 풍족함, 여유를 가진, 그의 마음 속 하나의 거대한 상징을, 그가 꿈꿔온 그 별빛을 데이지는 가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 별빛은 내면의 아름다움과 강인함을 보장해주진 못했다. 개츠비가 자신과 같은 '신분/계층'이 아니라는 암시를 받고, 그녀는 흔들린다. 데이지를 욕할 수만은 없다. 그녀는 그 정도로 용감한 사람이 아닐 뿐이니까. 사실 그녀는 언제나 우유부단하고, 무기력하고, 회피하는 성격이다. 그녀가 소설에 나오는 모든 부분을 읽어보면 그렇다. 하지만 개츠비는 그녀를 자신이 손 뻗으면 닿을 빛으로 상정하고 그에 닿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닉 캐러웨이는 아버지의 말씀을 가슴에 새긴 덕분에 그를 더욱 연민한 것일 수 있다. '네가 가진 것은 남들이 가지지 못한 것이다.' 개츠비는 자신이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 것을 갖기 위해 끝없이 노력해야 했다.


개츠비가 데이지를 만난 부분의 묘사가 특히 아름답다. 


전체적으로 여운이 남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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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의 발견 (개정판) - 민주주의에서 정당이란 무엇이고 또 무엇일 수 있을까 정치발전소 강의노트 2
박상훈 지음 / 후마니타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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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인상깊게, 그리고 잘 본 책이다. 저자가 한국정치에 관해 깊이 고찰해왔고, 현실적인 해법이 무엇이 될 수 있을까 고심한 흔적이 잘 보인다.

요즘에 내가 정치학책을 읽다 보면 흐름을 크게 두 가지로 보인다. 하나는 정당을 강화하자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직접민주주의를 강화하자는 이야기다. 

두 가지 모두 내 눈에는 상당히 중요해 보이는데, 개인적으로 전자에 좀 더 쏠려 있다. 후자는 아직 대한민국의 풍토에서 약간 먼 듯한 느낌일 뿐만 아니라 설령 개개인이 직접민주주의 형식으로 정치에 참여를 한다고 해도 결국 정당과 유사한 조직은 어떤 식으로든 발생될 거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특히 국가적 규모에서 우리는 제한된 정보에 접근하게 되고, 그 정보에 다른 이들보다 직업정신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정당인/정치인이라면 우리는 우리보다 관련 문제에 더 열성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정당이 필요 없을 정도라면 내 생각에 말 그대로 국민 하나하나가 정치인이 되는 수준, 즉 현재 직접민주주의의 강화를 이야기하는 사람들 말처럼 추첨제따위의 도입이 이루어지는 것일 듯하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정치에 관심을 가지자는 이야기 이상으로 우리 모두가 정치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 과연 긍정적이고 현실적인 해법일까?

그런 문제에서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저자가 정당의 강화라는 문제를 시급하게 본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나 역시 그게 현문제에서 가장 긴요한 해법이라고 본다. 있는 것부터 잘 꾸려놓아야 한다는 말에 포인트가 있다. 우리는 어쨌든 정당을 기반으로 한 정치지형에서 움직이고 있으며 그것들을 지금보다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조직으로 가동시킬 필요는 있어 보인다. 또한 명사 위주가 아니라 정당이라는 조직을 통해 합리적이고 가시적인 아젠다를 제공받을 필요가 있다는 말에도 강력히 동의한다. 카리스마나 매력 같은 개인의 측면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어떤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 정치인의 직업적 소명 아닐까 생각한다. 지금 우리네 정치인들은 대중에 너무 휘둘리는 경향이 있다. 우습다. 대중들은 막상 중요한 결정권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또 결정권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결정권이 행사되었을 때 대중들에게 혜택이 잘 가지 않는다는 것이 묘미랄까.

여러 가지 구절에서 동의를 많이 하긴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 두 가지의 의문점을 제기할 수 있었다. 


Q1. 저자는 민주주의가 꼭 정당이라는 중간층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은 아닌가?

Q2. 직접민주주의의 확대가 정치의 신자유주의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정당과 정치조직이 유사하게 작동할 것이라는 점에서 저자의 의견에 크게 동의하는 바이긴 하지만, 직접민주주의가 어떤 식으로 강화될 수 있는지 고민해보는 것에 대해서도 분명 시사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직접민주주의가 확대되어봤자 의미가 없을 것이라는 단정은 조금 위험할 수 있다고 본다.


덧붙이자면, 지역주의 조장에 대해서는 김대중 자서전 1권만 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김대중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지역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원래는 없던 것이었는데 독재정권이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하고 자신을 비롯한 여러 인물을 견제하는 과정에서 동원되었다고 주장했다. 나 역시 지역주의가 설령 있다고 해도 그것에만 집중하는 것은 경제적 불평등과 여러 비합리적 사회구조라는 근원적 문제점에서 시선을 돌리게 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에 백번 동의하는 바이다.


p17 어느 시대든 최선의 사회구성체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실천적 고민이야말로 정치학의 최대 관심사였다. ... 스티븐 스미스 교수에 따르면, 그런 지식과 지혜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고대의 철학자들은 에로스Eros라고 불렀다고 한다. 다시 말해 좋은 사회구성체 내지 좋은 정치 공동체를 구현하고, 그 속에서 좀 더 자유롭고 선한 삶을 살 수 있는 조건을 탐색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에로틱한‘ 활동으로 여겼던 것인데, 현대 민주주의에서라면 그런 ‘가슴 두근거리는 일‘은 좋은 정당정치의 실현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추적하는 데 있지 않을까 한다.

p44 권력과 통치의 문제를 회피하면서 좋은 정치를 이룰 수는 없다. 그렇기에 정치를 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런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권력과 통치를 선용하는 길을 찾는 데 있다. 권력도 통치도 없는 정치? 그건 망상일 뿐이다.

p140 어떤 것이든 참여와 의견을 형성하는 데는 비용이 들고 여가가 필요하다. 참여의 문턱을 넘어 들어오는 시민의 의견은 직업, 소득, 교육, 연령 등 수많은 요소로부터 불평등한 영향을 받는다. 정당정치의 가치와 역할은 그런 불평등성을 완화하는 데 있다. ... 정당정치의 민주적 역할이 약할수록 상층 편향적이고 교육받은 중산층 중심의 정치가 될 수밖에 없다. 참여의 비용을 낮춰 주고 의견 및 대안 형성과 관련해 확신의 딜레마를 해결해 줄 수 있도록 잘 조직된 ‘강한 정당‘이 있어야 가난한 시민들에게도 평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민주정치가 가능하다.

p331 정당 조직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 없이, 정당 후보라는 이름만 빌리고 실제로는 ‘개인 정치‘의 도구로 소속 정당을 활용하는 정치가들만 양산된다면, 민주정치의 미래는 없다. 막스 베버에 따르면, 인류 역사에서 정치를 직업이자 소명으로 삼은 사례는 단 두 경우 뿐이다. 하나는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에서 등장했던 ‘데마고그‘로서 그 첫 번째 인물은 기원전 5세기 중엽 아테네 민주주의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페리클레스였다. 다른 하나는 현대 민주주의와 더불어 등장한 ‘정당 리더‘이다. 이 두경우를 빼고는 정치라는 일에 직업적 소명을 가졌던 예는 없다며, 베버는 군주정하에서 다양한 정치 보좌역을 했던 주교, 인문학자, 귀족, 양반 등에게 정치는 ‘부업‘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만큼 정당 리더는 현대 민주주의에서 핵심적 위치를 갖는다는 것으로, 정당 리더를 거쳐 수상도 되고 대통령도 되는 일이 자연스러워야 정치도 사회도 좋아진다. 정당은 이제 인기가 없다며 개인 이미지나 네트워크형 시민 정치로 대통령이 되겠다면 ‘베를루스코니식 정치‘와 다를 바 없거나, 기껏해야 ‘착한 베를루슼니‘ 이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p344 한국의 지역주의는 근대 이전의 전통 사회에서 존재했던 지역감정이나 지역 정서, 지역 편견의 연장으로 볼 수 있을까? 전혀 아니다. 지금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지역주의는 근대 이후 새롭게 만들어진 매우 근대적인 현상이다. 옛날부터 있었다고 하는 지역색이나 편견 역시 정치적 필요 때문에 선별적으로 불러들여지고 작위적으로 변조되었을 뿐이다.

p374 단순다수제와 비례대표제는 그 나름 장점과 단점을 나눠 갖고 있다. 달리 말하면 어느 한쪽이 절대적으로 우월하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비례대표제를 선호하는 사람들 가운데 단순다수제나 소선거구제를 마치 ‘문제의 근원‘ 내지 ‘악의 제도‘처럼 설명하는 경우가 있는데, 지나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단순다수제는 정치에서 지배적인 결정 방법이다. 민주주의는 다수 지배의 원리 위에서 실천되며, 비례대표제하에서도 연립정부 형성이든 법안 통과든 최종적으로는 단순다수의 원리가 작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 아무리 전면적인 비례대표제를 실시하더라도 약한 정당은 불리하다. ...누구든 자신의 표가 최종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기를 바라며, ... 따라서 정당 스스로 강해지려 하지 않고, 막연한 제도 효과에 의존해 정당정치를 바꾸고 좋게 만들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비현실적일 때가 많다

p382 이런 정당 개혁론에서 이해되지 않는 것 가운데 하나는 "당직 및 공직 후보자 선출권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는 것이다. 정당이 자율적으로 행사해야 할 그 권한은 민주주의에서라면 어느 누구도 가져갈 수 없다. 당연히 그걸 달라는 국민도 있을 수 없다. 민주주의에서 국민, 시민은 정당들이 내세운 공직 후보와 그들의 공약을 보고 최종 결정권을 행사하는 주권자이다. 정당들이 책임 있게 공직 후보를 내보내지 않으면 시민 주권의 의미는 모호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해서 시민의 평가를 받아야 할 정당이 자신의 일을 시민에게 해 달라고 한다면, 도대체 이런 민주주의는 무슨 민주주의인가.

혹자는 시민의 의사를 더 많이 반영하고자 정당 스스로 개방하겠다는데 그것이 왜 문제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민주주의를 시민의 의사를 모으는 일로만 본다면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시민의 선호와 의사를 모으는 것이라면 굳이 민주주의를 할 일이 아니다. 그런 일에는 시장 원리가 더 낫고, 여론조사로 대신할 수도 있다. 인터넷이나 모바일 등 손쉬운 기술을 활용할 수도 있다. ‘네트워크 정당론‘이 바로 그런 것이고, 어떤 면에서는 그런 접근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p393 정치는 옳음을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결과로 말해야 하는 분야이다. 성과를 내는 것은 선의만으로는 어려우며, 상황을 이해하고 이견과 대화하고 조정을 통해 가능성을 찾아가는 실력을 필요로 한다.

p406 정치적 판단은 다를 수 있지만 인간적 선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과 보수적 시민들 모두 비극적 죽음을 가슴 아파하며 이런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본다는 점마저 의심하고 부정하는 일은 자신의 영혼만 상하게 만드는 일이다.

p416 정치는 좋은 사회구성체를 조형해 내는 과업을 통해 구성원 개개인이 좀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확대하는 역할을 한다. 사회를 좋게 만드는 것, 그래서 개개인들이 좀 더 풍부한 삶을 살 가능성을 향유하는 것, 그런 변화를 이끌고 그것이 시민 스스로의 자치라는 민주적 이상과 병행하게 하는 것, 이런 일을 민주정치라 할 수 있는데, 생각해 보면 이런 일 만큼 가슴 뛰는 인간 활동도 없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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