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to Write a Thesis (Paperback)
Eco, Umberto / MIT Press / 201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0. 


나는 세상 유행에 관심이 없다. 

어느 순간부터인가는 더욱 기사를 잘 보지 않게 되었다.

너무나 많은 소식이 있고, 그 소식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도 없으니, 잘 알지도 못한다.

그러면서 어느새 마음에서 성급하게 시시비비를 가린다.

내가 기사를 읽는 것이 아니라 기사에 내가 소비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보니, 세상 돌아가는 일을 무조건 낱낱이 겉핡기 식으로 알아야만 하는 것일까? 의심이 들었다.

정치학을 공부한다고 해도, 정치현상 모두를 알아야만 한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나에게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으니까. 


일장일단이 있을 터인데, 아무튼, 내 공부만 하며 사는 나에게도, 이 김영민 교수 글이 화제라는 소식이 닿았다.

궁금해서 칼럼 글을 10개 정도 읽었다.


그런데 읽다보니, 왜인지 내가 요즘에 읽고 있는 Umberto Eco의 How to Write a Thesis의 내용이 글을 쓰고 공부를 하는 연구자의 자세와 태도, 다른 말로 하면 소임에 관해서 상이할지라도 상통하는 지점이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두 학자의 글에서 읽을 수 있는 학문하는 자의 소임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1.


김영민 교수의 글들 몇 가지는 정말 말 그대로 사람을 자지러지게 웃게 한다. "유학생 선언"에서의 사자탈 에피소드가 그렇다. 

읽으면서 생각했다. 만약 소위 지식인의 업무 중에 좋은 글솜씨로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포함된다면, 이 사람의 글은 확실히 지식인의 그것이다.  

한국에서 지식인들은 근엄과 엄숙함으로 지나치게 방패막을 두르니 그의 글이 더 귀하게 여겨지는 것도 같다. 


그렇지만 그의 글은 읽으며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다. 

전반적으로 모든 글들이 웃기면서도 한편으로 마음이 저릿해진다. 

마냥 읽으며 웃기만 할 수 없게 사람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소위 요새 말로 "빙썅" 있지 않은가. 

좋은 글에 어울리지 않는 저렴한 말일 수도 있는데, 빙그레 웃으며 욕하는 사람을 뜻한다. 


물론 이 교수가 말 그대로 욕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그가 냉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뜻이다. 

가끔 너무 웃겨서 그게 잘 안 보일 뿐이지.

그런데 읽다 보면 나는 그가 누구를 비판하는지 알 것도 같다.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해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보며 나의 양심도 찔리는 걸 보니 말이다. 

그는 이렇게 쓴 바 있다.

지식인으로서의 책무를 다 하지 못하고, 제자의 논문조차 읽지 않고 논문 심사를 하는 스승들을 보며,


앞에 놓인 탁자를 당수로 쪼개며, “선생님들, 논문을 읽지도 않고 심사한다고 여기 앉아 계실 수 있는 겁니까!”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목젖을 뽑아 줄넘기를 한 다음에, 창문을 온몸으로 받아 깨면서 밖으로 뛰쳐나와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고는 학교 운동장에서, 벌거벗고, 흙을 주워 먹으며, 트랙을 뱅글뱅글 돌아야 하지 않았을까?


그래, 맞아, 그래야 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나도 그런 순간들, 그래야 했을지도 모르는 순간들이 꽤나 많았다. 

정말 위의 글처럼 유리창을 온몸으로 박살내면서 나가야 하는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부족했던 것이다.

내 몸이 너무 귀하고, 내 커리어가 참으로 중요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국사회에서 이미 결론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 글이 나온 칼럼의 마지막 부분에서, 지도교수에게 불합리한 행정을 따진 대학원생은 얼마 후 대학원을 나가 고아원에서 일한다고 전해진다.

사실이라면, 그 대학원생은 그 사건만 보면 정말 대단한 인재이자 인물이기 때문에 더 귀한 일을 하시려고 고아원에 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그에게 학문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었을 수도 있다. 

여전히 "대학원"이란 학문을 공부할 수 있는 자들에게 사회적으로 가장 좋은 환경이니까. 우리가 전업으로 공부를 하는 것이 완전히 양해되고 설명되지 않는가. 그리고 학자에게는 이렇다 저렇다 결국 스승이 필요한 점이다. (언젠가 이 점에 관해 대해 글을 쓸 날이 오리라)


그렇지만 대한민국의 대학원이 충분히 그러한 환경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을까?


나부터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서 거침없이 석사를 해외로 나가버린 사람이라 무엇을 어떻게 코멘트할 바 없다. 사실 미국에서도 교수가 박사생 노예취급하는 경우가 왕왕 생기니까 꼭 대한민국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사실 나는 현재까지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어쩌면 석사를 국내에서 갔더라면 "학벌"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좋은 박사 유학이 더 쉬웠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싫었다. 내게 너무 많은 것이 뻔하게 보였다. 미국에서는 "그럴 수도" 있는 일들이 여기서는 "안 그러기가 매우 힘들어지는" 상황이 싫었다. 

한국에서 열등감과 괴로움에 시달리고, 여러 불합리한 행정 속에 고달파하는 교수들의 짜증과 불합리한 카르텔들에 대해, 그들의 인격이 나빠서라고 설명하고 싶진 않다. 

그저 구조와 체계가 사람을 그렇게 만든다. 

그 무기력의 최종점에서 그들에게 남은 것은 권력과 교수라는 이름값의 권위 밖에 없으니, 무엇을 더 가르칠 것이 있을까? 

물론 그들에게 배울 것은 많다. 그렇지만 거기서도 어차피 영어 텍스트를 읽을 거라면 영어 하는 나라에 와서 읽는 게 더 나아 보였다.


그리고 적어도 나는 여러 부분에서 석사 유학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일단 가장 좋은 건, 여기에 좋은 교수들이 있다. 내가 그들에게 배우는 것이 많다. 이게 정말 크다. 그리고 그 중 하나 나의 멘토격은 인격이 완성되어 있다 (적어도 평판이 그렇다). (그리고 나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도) 바로 내가 배울 만한 학자로서의 표본이라는 것이다. 언행일치. 연구준수. (물론 더 지켜보아야 하지만) 


또 하나, 지금의 나는 영어책 읽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다. 물론 말하고 듣기가 마음만큼 되지 않는 것이 흠이지만. 또, 홉스 리바이어던의 옛날 영어체를 읽으면서 욕이 저절로 나오긴 하지만, 이 세상에 많은 자료와 정보들에 한층 더 오리지널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학문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즐겁고도 즐거운 일이다. 

금전적 문제도 언젠가 상환할 수 있다는 나름의 자신감과 믿음으로 버티고 있다. 


아무튼, 김영민 교수도 나와 비슷한 심정으로 유학을 떠났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글들을 보며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접근이 상당히 감성적 (학문공부가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며, 그 과정은 비극적이고 로맨틱하다는 결론) 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게 학문공부는 결국 얻을 수 없는 최종진리에 대한 탐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언제나 우리 주변에 널려져 있는, 모든 것들이기에 내게는 언제나 즐거운 과정이다. 



2.


학문공부의 즐거움을 나는 에코 책에서 느끼고 있다. 


Eco의 책은 기본적으로 제목부터 짐작하다시피 석박사생(박사생)이 어떻게 하면 졸업논문을 잘 쓸 수 있는지에 대한 요령을 매우 세세하게 전수하고 있는, 대가의 친절하고도 실용적인 책이다. 


그는 우리에게 기본적으로 전략적이고 효율적으로 논문 쓸 것을 주문한다. 이 논문이라는 단어에 집착하지 않고, 전반적인 "글"로 바꿔도 마찬가지다. 소설을 쓰든 무엇을 하든 사실 잘 쓴 글은 매우 고도로 전략적이고 지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에세이들은 부끄러운 수준일 것이다. 거의 즉흥적으로 쓰고 웬만해서는 더 고치지 않기 때문이다. (탈고를 하는 게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수많은 자료, 자료, 자료이고, 그 자료를 잘 정리하는 것이다. 에코는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도 매우 세세하게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이러니,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며 공부와 연구라는 것은 잘난 개인의 성취가 절대 아니라 그저 남들이 미리 쌓아올린 돌탑에 돌 하나 얻어내는 것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또 웃긴 건 그 디딤돌 아무렇게나 올려놓으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돌값 인정 받으려면 기존에 쌓아져있던 돌탑과 어떠한 식으로도 맞아 떨어져야 한다. 아니면 적어도 그 돌탑 와르르 무너질 만큼 강력한 굴러들어온 돌이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지식은, 결국 타인들에게 값어치를 인정받지 않으면, 사회의 규칙을 따라 움직이지 않고 아예 불가해하거나 자폐적이면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 숙명이라는 것이다. 자폐와 독창은 한 끗 차이고, 그 돌이 쓸모 없냐 있냐도 한끗 차이다. 


그래서 Eco 글에 나오는 수도원장 Vallet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아름다운 예시다. 대충 이야기를 요약하면 열심히 연구하지만 적절하게 잘 맞는 실마리를 못 차던 Eco는 정말 어쩌다 우연히 한 책을 발견하는데, 평소 같으면 그냥 덮어버리겠지만 책값이 아까워서 읽은 저질 책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정말 아름답게 맞아 떨어진다. 어쩌면 이 즐거움 때문에 학자들이 공부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다. 모든 관계 없는 것들이 사실 관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적합한 예시랄까?


에코의 울림은 참으로 크다. 우리는 매순간 마주하는 모든 것들을 통해 배운다. 모든 곳에 가르침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에 값어치와 배울 것이 있다. 나와 다른 모든 것들이 나와 다른 모든 세상을 설명해주는 열쇠가 된다. 단지 다른 사람들이 시간이 없어서, 열의가 없어서, 재미를 느끼지 못해 못하는 것들을 우리가 전문적으로 하고 있을 뿐.


그러니 내 생각에 공부하는 사람이란, 이 세상 이미 존재하는 것들을 발굴해내는 탐험가이고, 존재하는 것들의 의미를 재평가하는 비평가이고, 아무 의미도 없던 것들을 이어내어 새로 재창조하는 창조자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이 이 사회에 환원이 되는 날, 우리는 이 사회에서 밥값을 하는 지식인이 되기도 한다. 


3.


그래, 이렇게 보면 학자는 어쩌면 정말 김영민 교수의 말처럼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인공일 수도 있고, 내가 Eco 글 보며 느낀 것처럼 비록 개미처럼 사소하지만 그저 하루하루 일상을 살아가듯 공부하는 평범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나는 의미있을 것이라 본다. 사랑이야기는 비극이 재미진 법이고, 소시민의 삶은 안정적인 법이니까.

다만 중요한 것은 무엇을 선택하든 자유지만, 내 생각에, 다른 사람을 글로 웃기게 하면서 양심 찌르지도 못하는 글 수준이라든지, 아니면 소박하게나마 사회에 밥값하려고 열심히 지식창조를 하지도 못하는 학자가 된다면 그건 그냥 폐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물론 폐기물도 밥값은 한다. 반면교사가 된다는 점에서. 

아무튼 그 두 가지 중 하나라도 성취하려면 일상에서의 수련이 필요하다. 모든 지나가는 순간들을 돌아보고, 모든 지나갈 순간에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진짜 그래야 그 두 가지 중 뭐라도 하지 않을까?

결국 공부 많이 한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고, 딱 그 정도일 뿐이라는 게 내 결론이다. 

그래도 공부를 하면 행복할 것이다.

김영민 교수 말처럼 내일 아침 월요일이란 무엇인가! 고래고래 창문 열며 소리지를 수도 있고,

Eco처럼 파리에 어느 가판대에서 우연히 발견한, 아무도 읽지 않을 책에서 크나큰 기쁨을 얻을 수도 있는 것은, 

공부하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사소한 일상의 행복이니까.



https://news.v.daum.net/v/2017072315040044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7272049015&code=99010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eBook] 몸과 소통하라 - 30년 젊게 사는 비법
최창수 지음 / 바른북스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관이다. 남자는 20대 얼굴이 기초설계고 60대 얼굴이 완성인데 여자는 20대 얼굴이 완성이고 60대는 폐허라고 했나? 몸과의 소통도 전부 쓸모없고 당연한 이야기였다. 나는 저자에게 시대와 소통하라는 충고를 하고 싶다. 돈을 안 썼으면 이런 말의 업도 남기지 않을 텐데 돈을 썼으니 차마 아까워 말을 안 남길 수 없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리가 빛나는 순간, 마이 테이블 레시피
박수지 지음 / 그린쿡 / 201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가히 요리계의 명작 에세이집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 시장 상품 인간을 거부하고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
이반 일리치 지음, 허택 옮김 / 느린걸음 / 201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똑같은 말이 계속 무한재반복 된다. 같은 뜻을 가진 문장이 계속 나온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감시와 처벌 - 감옥의 탄생, 번역 개정판
미셸 푸코 지음, 오생근 옮김 / 나남출판 / 201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부제 : 감옥의 역사)”을 읽고

나야 푸코 좋아한 계기는 어렸을 때부터였다. 우리 집 책장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했던 작가 중 하나였다. 제목은 말할 것도 없고(성의 역사, 감시와 처벌, 비정상인들..) 벗겨진 머리에 딱딱한 안경을 쓰고 매섭게 쳐다보는 그 눈빛이 너무나 강렬했다.
그뿐 아니라, 아주 어릴 때 책을 딱 펼쳤는데, 푸코가 남성 간 목욕탕에서의 집단 성행위가 인상적이었다고 기술하는 부분이 나왔다. 정말 좀처럼 잊을 수 없는, 도발적인 사람이었다.

나중에 머리가 크고 푸코의 글을 읽은 이후로, 나는 그가 나와 시공간을 뛰어넘어 공명한다고 진지하게 믿어왔다. 다른 사람이 쓴 모든 글이 내 사고와 “똑같다”고 느끼는 순간은 정말 많지 않다. 그는 20세기 중반을 살다가 에이즈로 죽은 프랑스인이고, 나는 21세기 초반을 살아가는 한국인인데, 그가 나와 같은 생각을 몇 십 년 전에 먼저 다 말해놓았다.

학교 철학과 와보니 푸코 사랑하는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푸코를 아주 좋아했다. 개인적으로 푸코에 대한 이해를 높인 가장 중요한 계기는 김애령 교수님의 수업이었다. 선생님 밑에서 니체 다음으로 푸코 수업을 들었다.

니체나 푸코나 작업의 본질은 비슷하다. 우리가 현재 너무나 당연하다고, 자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추적해 올라가며 그것이 다 만들어진 구성물들임을 밝힌다. 하나의 가치가 견고해지기 전까지의 은폐된 전략과 투쟁의 역사를 까발린다. 니체가 서양 기독교의 위치의 절대성을 도발했다면, 푸코는 현대사회의 개인들이 탄생한 그 과정을 집요하게 바라본다. 내가 해석하기에, 그의 질문은, “나”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의 문제와 관련한다.

“감시와 처벌”은 공권력과 같은 집단권력(사회권력, 혹은 기득권을 잡은 권력)들이 자신에게 저항하거나 반하는 존재들을 어떻게 다스리고, 통제하는지 관찰한다. 과시하는 신체형을 가졌던 옛날의 처벌구조는 이제 보이지 않는 구속과정과 감옥이라는 공간적 격리, 형벌 시간을 채우게 함으로써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회를 박탈하는 형벌 체제로 넘어간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지식인들은 권력에 종사하는 담론들을 통해 ‘문제자’들을 진단하고, 치료하고, 규정한다. 애초에 많은 지식들 자체가 이 사회의 유지를 위해 태어났으므로 그들의 권력을 향한 종사가 놀랄 일은 아니다.

그보다도 가장 효과적이고 두려운 현대사회의 권력 효과는 집행자들의 행위에서 오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한 번 쉽게 표현해본다면, 최순실이나 박근혜가 무서운 것이 아니다. 최순실이나 박근혜를 가능하게 한 우리 자신의 기계적이고 무비판적이었던 정치 인식과 그에 따른 일상적 행위들이 무서운 것이다. 권력 효과의 대상들은 자기 자신을 검열하고(정치 이야기는 자유롭게 해서는 안 된다는 둥의 이야기들) 심지어 그 권력이 미시적으로 수행되는 통로를 자처하며, 그 힘을 대신 발휘해주는 재생산의 수단으로 전락한다.(돌아가신 할머니는 틈만 나면 나에게 말했다, 여자는 부자한테 시집가면 제일이라고. 가부장적 사회의 남성 위주의 사고방식을 할머니는 정말 충실히 수행해냈고, 본인부터 일평생 그에 기대어 생존했다.) 즉 스스로가 스스로를 사회의 특정 권력에 맞춰 부위별로 생산하고, 제작해내는 것이야말로 권력이 하는 통제의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화이다. (나는 “한국 남성/여성”이기 때문에 ~~해야 하며, 어느 집의 “무슨” 씨로서 ~을 해야 한다 등등...) 이에 따르면, “나”의 신체는 외부에서 오는 수많은 관념적 권력 혹은 지향성들의 힘겨루기 장으로 전락한다. 성찰이 없다면 타인/타 권력의 꼭두각시나 거수기 되기 딱 좋은 것이다.

푸코가 예를 든 군대, 학교, 감옥은 그러한 꼭두각시/인간 거수기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철저한 정신 세뇌를 육체로 수행시키지 못하는 존재는 쓸모없다. 이 세 군데는 인간의 영혼을 철저히 습관적이고 만성적인 것으로 길들여 그들의 육체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바꿔낸다. 군대의 숨 막힐 듯 개인을 억압하는 체계(한 명의 예외도 용납하려 하지 않으며, 옆에 있는 동료를 웃겨서도 안 되는), 학교 교실의 자리 배치, 시간표의 엄격한 준수, 그리고 감옥에서의 하루 일과표는 인간 개별로 하여금 여러 규칙들을 던져준 다음 그 규칙에 인간 스스로가 알아서 맞춰가도록 ‘배려’한다. 그것에 실패하는 사람들은 낙오자, 관심병사, 구제불능의 범죄자가 된다.

하지만 감시와 처벌은 학교나 군대, 감옥 같은 곳에서만 기능하지 않는다. 오늘 날, 우리가 표방하는 민주사회가 어쩌면 푸코가 설명하는 그러한 억압된 권력기관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가장 은밀한 개인의 공간을 만들어 낸 현대인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모든 행위는 추적되고, 기록되고, 관리된다.

더 큰 문제는, 이 시대의 모든 것이 파편화되고 개인화되어, 이제 우리에게는 공격할 대상도 시야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거대한 불의는 자취를 감추었다. 운동권의 추억에 살고 있는 세대에게는 젊은 우리의 무력함을 무능으로 받아들이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모든 것이 허용된 자유의 시대로, 이 자유가 가능한 전제조건은 오로지 자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본을 향한 끝없는 마라톤에 참가하게 된지 오래며, 우리 대한민국의 부모들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가르쳤기에 사교육에 아낌없는 돈을 투자했다.

자본을 앞세운 권력의 가장 효과적이고 치명적인 지점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자본주의는 자유주의와 접하여 모든 자유를 허용하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렇기에 모든 사람들이 돈에 종속되었다. “신자유주의”라는 단어는 가끔 매우 흥미롭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돈의 증식과 사용에 관한 권리를 개인의 자율영역에 해당하는 것처럼 주장한다. 생존의 필수가 된 돈, 자본은 새로운 절대적 가치가 되었지만 이것조차 환상이다. 그 부의 축적 과정과 돈이 정당화된 과정 자체가 완벽한 자유를 바탕으로 생겨나지도 않았으며, 불평등함을 전제로 하며, 수많은 권력들의 셀 수 없는 전략과 투쟁으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어야 한다. 돈의 부재를 상상할 수 없는 우리는 그 기원을 추적하여 돈의 부재를 이야기하는 새로운 사회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사실 본능적으로 여기까지 도달한다. 논리적일 뿐 아니라 사회에 대한 관찰력이 있는 사람들은 푸코가 한 이야기를 그렇게 새롭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모든 것이 권력의 강약과 그 줄다리기로 탄생했다는 이야기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그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권력을 이해한 다음, 권력 안에 자기 자신을 순응시킨다. 살아남기 위해서이다. 물론 나도 어느 정도 그러한다. 예를 들어서, 감옥이 그렇게 인간을 길들인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학교가 그렇게 학생들을 대량생산해낸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그것의 전면적인 폐지를 쉽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만큼 대안을 쉽게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권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반역은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misinterpellation, ‘잘못된 호명’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본다. 최근에 접해서 읽고 있는 또 다른 책의 개념인데 알튀세르의 호명이론에서 영향 받았다.

나는 이 개념을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는데, 감시와 처벌을 읽으며 이 이야기가 어디로 가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권력의 한계, 권력이 모든 완벽한 디자인을 고안해 자신의 효과적 전략을 짜냄에도 불구하고 절대 피할 수 없는 하나의 틈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시야에서도 잡히지 않는 한 시점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심지어 권력의 체계가 순수하게 완전하다 치더라도, 새로운 상황과 맥락을 만나면, 탈출구가 없도록 만들어진 그곳에 그제야 탈출구가 생길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푸코는 거기까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이 모든 권력의 웅성거림들을 기록하였다. 그에게는 그 웅성거림을 입증하고 고발하는 것이 중요했으며, "감시와 처벌"은 그 증거록이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비판과 성찰을 몸소 행위한 위대한 활동가이다.

[책의 발췌]

<역자 서문>

p7 - 계보학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전통적인 역사서술 방법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역사에 있어 고정된 본질이나 심층적 법칙, 형이상학적 결말 혹은 도달할 수 없는 진리의 의미가 있다는 논리를 부정한다. 그것은 의미, 가치, 진리, 도덕, 선 등의 개념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들 속에 감추어진 권력의 전략, 지배와 복종, 억압과 전투의 관계를 파헤친다.

p8 - 그것은 궁극적 진리나 절대적 앎을 전제로 한 헤겔적 이성의 계보학이 아니라 해석의 가능성이 끊임없이 열릴 수 있는 니체적인 계보학이다.

p12 - “규율은 개인을 ‘제조한다’”

p13 - 권력이 인간 속에 침투해 들어가고 인간관계 속에서 행사되는 것이라면, 인간을 대상으로 한 지식은 그러한 권력관계 속에서 생성된다. 그런 점에서 중성적이거나 순수한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p14 - 개인은 원자처럼 분리되었고, 타자와의 연결은 파괴되었으며, 공동체의 연대의식이 분열되어 온 역사적 과정은 바로 권력에 의한 주체의 개체화 과정이었다. 근대국가는 개인을 무시하지 않고, 그런 점에서 오히려 끊임없이 개인을 생산해 온 셈이다. 국가는 그런 점에서 가장 개체주의적이며 동시에 가장 전체주의적인 권력형태를 표현하고 있다. ... 주체적 자유를 박탈당한 이 비극적 상황에서 인간은 어떻게 존엄성을 회복하고 진정한 주체로서의 힘을 되찾을 수 있을까?

<본문>

p32~33 형벌의 집행은 자율적인 영역이 되어가고 행정기구는 사직당국이 감당하던 영역을 면제해 주게 되어, 사직 쪽은 형벌의 관료정치적 은폐의 도움으로 그 막연한 불쾌감에서 벗어날 수가 있게 되었다.

p45 사람이란 공격적 행위에 대해 재판하지만, 그것을 통해 공격적 성향을 재판하는 것이다. 강간을 재판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성도덕의 타락을 재판하는 것이고, 살인행위를 재판하면서 충동이나 욕망의 행위를 재판하는 것이다. ... 참으로 재판받고, 처벌받는 것은 소송 요인의 구성요소들 배후에 있는 그러한 그림자(욕망이나 충동들)이기 때문이다.

p47 - 즉 범죄자의 ‘정신’을 재판하기 시작한 것이다.

p51 - 그렇다면 형사사건에서의 정신과 의사의 역할은 어떤 것일까? 그는 ‘책임능력’에 관한 감정인이 아니라, 처벌에 관한 조언자이다.

p58 - 그 권력은 소유되기보다는 오히려 행사되는 것이며, 지배계급이 획득하거나 보존하는 ‘특권’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전략적 입장의 총체적인 효과이며, 피지배자의 입장을 표명하고, 때로는 연장시켜 주기도 하는 효과라는 것이다. 한편, 이 권력은 ‘그것을 갖지 못한 자’들에게 다만 단순하게 일종의 의무 내지 금지로서 강제되는 것은 아니다. 그 권력은 그들을 포위공격하고, 그들을 거쳐가고, 그들을 통해서 관철된다. 더구나 그 권력은 그들을 거점으로 삼는 것이다. ... 바꿔 말하면, 이 권력의 여러 가지 관련은 사회의 심층 속으로 내려가 있어서, 시민에 대한 국가의 모든 관계의 내부와 계급 간의 경계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니다.

p61 - 정신은 실재하며, 그것은 하나의 실재성을 갖고 있고, 정신은 신체의 주위에서, 그 표면에서, 그 내부에서, 권력의 작용에 의해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 권력이야말로 - 보다 일반적으로는, 감시받고 훈련받고 교정받는 사람들, 광인, 유아, 초등학생, 피식민자, 어떤 생산기구에 묶여 살아 있는 동안 계속 감시당하는 사람들, 그러한 모든 사람들에게 행사되는 것이라고. 정신의 역사적 실재성이라고 할 때, 그 정신은 기독교 신학에 의해서 표상되는 의미에서의 정신과는 달리, 태어나면서 죄를 범해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처벌, 감시, 징벌, 속박 등의 소송절차를 거쳐 생겨나는 것이다. 

p62 -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그 인간, 그리고 사람들이 해방시키도록 노력하고 있는 그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이미 그 자체에서 그 인간보다도 훨씬 깊은 곳에서 행해지는 복종화의 성과인 것이다. 한 영혼이 인간 속에 들어가 살면서 인간을 생존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것은 권력이 신체에 대해 행사하는 지배력 안의 한 부품인 것이다. 영혼은 정치적 해부술의 성과이자 도구이며, 또한 신체의 감옥이다.

p86 그렇다면 이것이야말로 범죄의 진실과 재판관의 잘못을, 범죄자의 선량성과 악랄성을, 인간의 심판과 신의 심판 사이의 일치 또는 차이를 의미할 수 있는 고통의 양면성인 것이다. 그 점에서 처형대와 구경거리로 만든 고통을 주위에서 가까이 보고 싶게끔 관객을 부추기는 저 끔찍한 호기심이란 것의 근거가 있다. 사람들은 거기서 범죄와 무죄를, 과거와 미래를, 이 세상과 영원한 세상을 판독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 순간은 모든 관객은 궁금해하는 진실을 알 기회인 것이다.

p197 독방은 수형자가 나쁜 영향을 받지 않고 자기 반성을 하여 자기의 양심 속에서 선의 목소리를 재발견할 수 있는 ‘무서운 충격’의 효과를 자아낸다는 것이다.

p209 신체형을 당하는 육체, 자신에 관한 표상이 조작되는 영혼, 훈육을 받는 신체, 이러한 구성 요소들로 이루어진 세 가지 계열이야말로 18세기 후반에 상호 충돌하는 세 가지 형벌 구조의 특색을 이루는 것이다. ... 그것들은 처벌의 권력이 의존해서 행사되는 방식들로서의 세 가지 권력 기술론이다.

p214 이러한 구속은 습관이라는 무의식적인 동작을 통하여 암암리에 그 작용을 계속하게 된다.

p215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분석 가능한 신체에 조작 가능한 신체를 결부시키는, ‘순종’이라는 개념이다. 복종시킬 수 있고, 쓰임새가 있으며, 변화시킬 수 있고, 나아가서는 완전하게 만들 수 있는 신체가 바로 순종하는 신체이다.

... 어떤 사회에서나 신체는 매우 치밀한 권력의 그물 안에 포착되는 것이고, 그 권력에 신체의 구속이나 금기, 혹은 의무를 부과해 왔다.

p231 그러한 공간 편성에 의해 각자의 자리가 정해지면서,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통제와 학생 전체의 동시학습이 가능해졌다. 또한 학습시간에 대한 새로운 경제적 방안이 마련되었다. 학교의 공간이 교육을 위한 것뿐만 아니라 감시하고 위계질서를 세우고, 상벌을 부과하는 하나의 기관으로서 기능하게 된 것이다.

p233~234 규율은 ‘독방’, ‘자리’, ‘서열’을 조직화함으로써 복합적인 공간을, 즉 건축적이면서 동시에 기능적이고 위계질서를 갖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자리를 고정시키면서, 또한 자리이동을 허용하는 공간이다.

p300 봉건제도가 바로 그러한 예가 될 수 있는 사회에서, 개인화는 군주권이 행사되는 편에서거나 권력의 상층부에서 최상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그런데 규율 중심의 체제 안에서는 개인화가 오히려 ‘하강 지향적’으로 된다. 즉, 권력이 더 익명적이고 기능적으로 됨에 따라 권력의 영향 하에 놓이게 되는 사람들은 한층 더 분명히 개인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p351 감옥 형태는 형법에서 체계적으로 활용되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 개인들을 분류하고, 그들을 공간 안에 고정시키고 배분하며, 그들의 등급을 매기고, 그들로부터 최대한의 시간과 최대한의 신체적 힘을 끌어내고, 그들의 육체를 훈련하고, 그들의 연속적인 행동에 규칙을 부과하고, 그들을 빈틈없는 가시성의 테두리 안에 가두고, 그들 주위에 온통 관찰·등록·평가의 장치를 조직하고, 그들을 집중적인 조사의 대상으로 삼아, 축적된 지식을 형성하기 위한 여러 소송 절차가 사회 전체를 가로질러 치밀하게 구상되었을 때, 사법 기관의 외부에서 감옥 형태가 만들어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