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사나이 (구) 문지 스펙트럼 20
E.T.A. 호프만 지음, 김현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나와 그는 이 단편을 같은 날에 읽었다. 정독도서관에서 이 단편을 빠르게 읽은 내가 그에게 꼭 한 번 읽어보라는 연락을 취했기 때문이다. 두 시간도 안 되어서 곧 그에게 연락이 왔다. 다 읽었다는 말, 감탄을 금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악몽의 은유', 그것이 우리 둘이 내린 공통의 결론이었다.

  나는 현재 수업을 하나 듣고 있다. 이 수업을 통해 나를 비롯한 다른 학생들은 환상 문학에 접근하고 있다. 수업을 진행하시는 교수님의 특성상 독일문학이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한다. 


  '괴이하게도 내가 사모한 교수님은 독일어를 하시며 베를린 천사의 시를 추천해주셨고, 내가 애증한 교수님은 독어독문과였으며, 내가 사랑하는 남자도 독어독문과, 그리고 칸트와 헤겔과 니체가 독일인이다. 아쉽게도 미셸 푸코는 프랑스인이지만. 내일 볼 영화의 남자 주인공인 마이클 패스벤더도 독일 계열이다. 혹은 독일인일 것이다.'


  이 수업에서 얻은 나의 가장 큰 성과는 호프만의 작품들을 읽게 된 것이다. 호프만, 나는 그 사람의 이름을 길을 지나다 들은 정도에 불과했다. 처음 보게 된 것은 '호두깎기 인형'이었다. 그 유명한 작품은 우리 마음 속에 아름다운 발레리나의 상으로만 존재한다. 감동적이고 충직스러운 크리스마스 인형과 작고 사랑스러운 여자아이. 그렇기에 원작이 그렇게 변태적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호두 깎는 인형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장이 아니므로, 그 이야기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다만 호프만이라는 인물이 '밤의 마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는 것이 놀랍지 않을 따름이다. 


  '나는 카프카 생각을 했다. 카프카도 법조인이었는데 밤에는 글을 썼다지. 억눌린 듯한 그림자의 문체를 가진 것도 비슷하다.'


  하지만 '모래 사나이'는 '호두깎기 인형'을 넘어서는 엄청난 작품이었다. 나 역시 이 짧고 무서운 단편을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냈다. 이 단편은 편지로 시작한다. 나타나엘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어린 시절을 읽는 나는 이 흉측한 이야기가 마치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악마의 환영과 같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어렸을 때 부모님 말을 듣지 않고 밤을 새우다 본, 우리 집 베란다 복도에서 나를 쳐다보던 눈이 없던 그 검고 긴 외계인을 잊을 수 없다.' 


  나와 나타나엘은 완벽히 같은 이야기를 공유하고 있었다. 다만, 그 요소들이 달랐을 뿐이다. 그리고 나의 이야기를 여러분들이 전적으로 믿을 수 없듯이 나 역시 나타나엘의 증언을 전적으로 믿을 수 없었다. 그는 미쳐있었다. 그가 유모한테 들었다고 한 그 끔찍한 저주의 말들도 십중팔구는 다 거짓일 것이다. 어떻게 독일인들의 환상 속에나 존재하는 모래사나이 따위가 잠자지 않는 어린 아이들의 눈을 뽑아내서 그 빈 눈구멍 안에 검고 뜨거운 쇳가루를 부을 수 있다는 말인가?

  나타나엘의 신경질적인 꿈은 그러나 사건들만이 아니라 인간들을 대상으로도 펼쳐진다. 클라라에 대한 그의 의심은 편지의 서술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자신에게 이성적인 클라라를 언짢아 한다. 그렇지만 클라라를 끊임없이 찬양한다. 그의 그러한 이중적인 태도는 남을 험담하기 위해 눈치를 보는 인간들의 작태와 동일하다. 그는 자신과 같은 환상세계의 정신을 가지지 않는 자신의 여자를 개조시키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지만 클라라는 그의 분에 넘치는 여자였으며, 그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의 손아귀에 놀아날 만한 여자는 움직이지 않는 나무인형인 올림피아 뿐이다. 자신이 쉽게 다룰 수 있는 존재, 자신의 말을 단지 '아-'라는 단말마의 외침으로만 응대해주는 올림피아만이 그의 영원한 자위와 성교의 대상인 것이다.

  이러한 부분들을 생각해보면 나는 프로이트가 이 단편을 분석하며 눈의 상실에 대한 나타나엘의 공포를 거세에 대한 공포로 연결시킨 것이 이해가 간다. 눈, 이성과 진실을 보기 위해 존재하는 눈, 그것을 똑바로 갖고 있는 클라라는 이성과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자신만의 환상을 보는 나타나엘 자신을 거세시킬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녀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그 비뚤어진 서술구조에서도 드러난다. 클라라는 아름다운 존재이며 동시에 아름답지 않은 존재이다. 자신을 굴복시킬 수 있는 힘은 위대하지만 동시에 없애고 피해야 할 권력이다. 그러한 두려움은 클라라 뿐이 아니라 자신의 성기보다 더 큰 성기를 가진 어른 남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읽을 수도 있다. 자신과 같은 피를 가진 미래의 모습인 아버지를 제거하고, 아버지를 빌게 만든 코펠리우스는 모래사나이로 나타나엘을 굴복시킨다. 그를 마치 어리고 무능한 쥐처럼 찍찍 울게 만든다. 그를 닮은 존재들은 무조건 두려움을 유발시킨다. 처음에는 그를 닮은 상인, 나중에는 보통의 회색 덤불조차 나타나엘을 미치게 만든다.

  그러나 서술자는 사형집행을 바라보며 냉정하게 미소짓고 있는 중세의 귀족처럼 그러한 나타나엘을 조소한다. 코펠리우스가 등장해 나타나엘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예견한다. 나타나엘이 죽고 나서 새로운 가정을 차린 클라라를 향해 당연히 그녀가 누릴 만한, 나타나엘이 절대 줄 수 없었을 행복이라고 이야기한다.

  나와 그가 생각하기에 이 단편은 그대로 '악몽의 은유'이다. 악몽, 자신의 남성성과 자신의 세계관이 처절하게 굴복되어 무너지고 비웃음 당하는 것, 프로이트가 말한 것처럼 인간 대부분이면 꾼다는 벌거벗은 채로 느끼는 수치심의 꿈, 사랑하는 것들은 산산조각나고 두려움을 느끼는 것들은 비이성적인 연결로라도 이루어지는 바로 그것이 악몽 그 자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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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4-11-30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프만의 소설에서 카프카적 느낌이 났다니 다시 한 번 호프만을 읽어보고 싶군요. 최근에 카프카를 읽었는데 정말 한 번에 읽어도 도통 이해가지 않을 정도로 악몽 같은 글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읽고 싶은 매력 아니, 마력(魔力)이 있는 글입니다.

설표 2014-11-30 14:08   좋아요 1 | URL
카프카의 글이 악몽 같다면, 그것은 인간의 무력함과 나약함이 이해할 수 없는 여러 양상들 앞에서 처참히 깨지거나 적어도 그 앞에서 방황하게 되는 양상으로 드러나기 때문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 그러한 글쓰기를 하는 여러 작가들이 꽤나 있는 편이더군요. 호프만도 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미묘한 결은 다들 다르기 때문에 `카프카적 느낌`이란 표현도 굉장히 추상적인 분류에 불과하지만 말이죠.
이러한 계열의 책들을 보며 저는 자꾸 읽고 싶다기보다는, 반복적으로 머릿 속에서 재생하고 싶습니다. 문자들이 이미지화 된 것을 계속 상상하고 싶은 거죠. 읽은 이의 머릿속에 잔상을 남기는 힘을 마력이라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마력적인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재능 있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생각합니다.
cyrus님 댓글에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하게 되었군요. 모쪼록 이렇게 생각을 풀 수 있게 해주신 댓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