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뒷세이아, 모험과 귀향, 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 리라이팅 클래식 13
강대진 지음 / 그린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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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작품은, 트로이아 전쟁에 참가했던 영웅이, 바다를 떠돌며 모험을 겪은 후 20년 만에 집에 돌아와, 자기 아내에게 구혼하면서 자기 집 재산을 먹어치우고 있는 횡포한 무리들을 처단하는 걸 주된 내용으로 한다. 간단히 줄이자면 '오뒷세우스의 모험과 복수'다. 이것이 <오뒷세이아>의 중심 주제 두 가지이다. _ 강대진, <오뒷세이아, 모험과 귀향, 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 p43

강대진의 <오뒷세이아, 모험과 귀향, 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는 호메로스(Homeros, BCE 8C ? ~ ?)의 <오뒷세이아 ODYSSEIA>의 입문서다. 트로이를 멸망시킨 영웅 오뒷세우스가 고향 이타케로 바로 돌아가지 못하고 10여년 간 떠돌아다닌 후 고향으로 돌아와 아내를 유혹하던 구혼자들을 처단하고 다시 왕(王)으로 자리한 이야기. 많은 이들이 '모험'-'복수'라는 2개의 주제에 주목하지만, <오뒷세이아, 모험과 귀향, 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는 흔히 놓치기 쉬운 다른 하나의 주제를 독자들에게 일깨운다.

이 작품의 다른 핵심은 텔레마코스라는 젊은이의 성장이다. 그는 아버지의 행방을 찾아 여행을 떠나고, 아버지의 모험을 축소해서 겪고, 그것을 통해 어른이 된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는 뱃사람의 모험담과 집 떠난 이의 귀향담에 더하여, 젊은이의 성장담이 함께 다뤄지고 있으며, 이 세 가지가 <오뒷세이아>의 세 주제이다. _ 강대진, <오뒷세이아, 모험과 귀향, 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 p43

저자는 들어가는 글에서 아들 텔레마코스에 초점을 맞추지만, 그것은 텔레마키아에만 한정된 주제가 아니다. 아버지 오뒷세우스의 귀환 역시 그의 성장과정을 그리고 있으며 그 과정을 통해 그는 <일리아스>에서 꾀 많고, 다른 이들을 속이는데 익숙한 장수로부터 '신과 같은' 오뒷세우스로 성장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오뒷세우스의 성장과 이타케의 질서 회복이라는 틀을 따라 진행되고 있다. 그는 죽은 자, 아무것도 아닌 자, 표류자의 단계를 지나왔으며, 지금은 표류자는 아니지만 어딘지 모를 바닷가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자로 서 있다. 그가 한 나라의 왕으로 다시 서서 뒤집힌 질서를 바로잡으러면, 아직도 더 성장해야 한다._ 강대진, <오뒷세이아, 모험과 귀향, 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 p389

<오뒷세이아>에서 눈에 띄는 '모험'과 '복수'라는 주제로 한정 짓는다면, <일리아스>의 주제 '아킬레우스의 분노'에 이은 '오뒷세우스의 모험'이라는 후속작품에 머무르지 않을까. 여기에 '성장(成長)'이라는 주제가 더해지면서 <오뒷세우스>는 '분노-복수'의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가능성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헤시오도스(Hesiodos, BCE 776 ~ ?)가 <일과 나날>을 통해 노래한 것처럼 '황금의 시대', '은의 시대', '청동의 시대', '영웅의 시대', '철의 시대'를 거치며 창조 이후 끊임없이 쇠락한 인류 문명에 '판도라의 상자'처럼 작은 희망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 사람들끼리 맹약을 맺게 하여, 원한을 잊고서 이전처럼 서로 사랑하게끔 만들어 주자는 것이 핵심이다. 어떤 학자는 이것이 인류의 정신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발상이라고 평가한다. 이전까지 끝없는 피의 보복이 잇달았는데, 여기서 그것을 단절하고 맹약으로 평화를 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_ 강대진, <오뒷세이아, 모험과 귀향, 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 p655

<오뒷세이아>의 내용 자체는 널리 알려져 있지만, 서사시의 구조 안에서 어떻게 주제의식이 작동하는가를 <오뒷세이아, 모험과 귀향, 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는 잘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구조를 통해 다른 하나의 은유를 개인적으로 발견하게 된다. 오뒷세우스라는 '국가'와 텔레마코스-페넬로페라는 '가정'의 결합이라는. 12세기 도리아 인 또는 지중해 해양 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붕괴된 미케네 문명의 국가 권력의 소멸이 지중해 식민 활동을 통해 다시 부활하고, 국가 권력의 부활이 가족 내 질서에 영향을 행사하는 과정을 묘사한 것은 아닐까. 부활한 국가 권력은 예전과 같이 구술 언어에만 의존한 신정(神政) 권력이 아니라, 이제는 시간을 넘어서는 문자(文字) 언어를 통해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냈고, 텔레마코스는 혈통이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새로운 시대의 주인임을 입증해야 했다는 이야기. 다소 거칠지만, 이러한 틀에서 <오오뒷세이아>를 다시 읽으려 한다...

시인과 그의 주인공은 도착한 땅이 얼마나 식민하기에 좋은 곳인지 보여준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런 태도에서 기원전 8세기 희랍인의 경험을 발견하고, 이것이 작품 전개에 리듬을 제공한다고 보기도 한다. 즉 지중해 곳곳에서 식민 활동을 했던 경험이 여기 반영되어, 주인공의 모험에도 그것이 보이며, 거기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주인공이 자기 고향을 '재(再)식민화'한다는 것이다. _ 강대진, <오뒷세이아, 모험과 귀향, 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 p211

지금 이 단계에서 오뒷세우스가 젊음을 되찾는 것은 언어와 상상력이 이룬 놀라운 성취이다. 오뒷세우스는 칼륍소 못지 않게 언어라는 마술에 능한 사람이고, 페넬로페의 상상력은 시간의 위력을 이기고 과거를 복원하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언어-상상-현실로 이어지는 이 단계적 성취는 우리가 <일리아스>에서도 발견하는 기술이다. _ 강대진, <오뒷세이아, 모험과 귀향, 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 p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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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교화(敎化)를 세우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서 이들을 시끄럽게 하지 않는데 있으며,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에는 정성과 믿음을 이들에게 보이는 것 만한 것이 없고 이들을 시끄럽게 하지 않는 데는 청정함을 가지고 이들을 진무(鎭撫)하는 것 만한 것이 없다.

"예(禮)의 규정에 준거(準)하면 오악은 삼공(三公)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는데, 지금 비록 왕작(王)을덧붙여 준다고 하여도 오히려 신하일 뿐입니다. 천자가 이름을 호칭하는 것은 아마도 옛 제도가 아닐까 걱정됩니다. 청컨대 지금부터는 다시는 어서(御署, 황제의 서명)하지 마십시오."

12월 초하루 무인일에 사천(司天)에서 일식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이르러 음습한 구름이 하늘을가리기를 아침부터 시작해서 오시(時)에 이르러 흩어지자 여러 신하들이 축하였다. 일식이 없게 된 것을 축하하는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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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포터의 경쟁전략 - 경쟁우위에 서기 위한 분석과 전략 21세기북스 경제경영 클래식 시리즈 4
마이클 포터 지음, 조동성 옮김 / 21세기북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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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기업이 활동하는 기반인 산업을 전체적으로 분석하고, 그 산업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예측하며, 경쟁기업과 자사의 위치를 파악하고, 이러한 분석결과를 특정 사업의 경쟁전략으로 전환하는데 도움이 되는 포괄적인 분석체계를 제시하고자 한다. _ 마이클 포터, <마이클 포터의 경쟁전략>, p26

마이클 포터 (Michael E. Porter)의 <마이클 포터의 경쟁전략 Competitive Strategy: Techniques for Analyzing Industries and Competitors>은 산업 내 위치한 기업의 처한 산업 내/외부의 환경과 이로부터 들어오는 압력에 대한 내용 분석과 대처법을 다룬 책이다. 이미 1980년대 쓰여져 이제는 일반에도 널리 알려진 경영학의 고전 <마이클 포터의 경쟁전략>. 저자 마이클 포터는 책을 산업경쟁을 유발하는 5가지 요인으로 구분하고, 각각의 요인에 대한 분석을 하는 것으로 논지를 전개한다.

특정 산업의 경쟁강도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산업의 경쟁은 현재 그 산업에서 경쟁을 벌이고 있는 기업의 행위보다 근원적인 경제적 구조에 의해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 특정 산업의 경쟁은 새로운 진입기업의 위협, 구매자의 교섭력, 대체제 나 대체 서비스의 위협, 공급자의 교섭력, 기존 기업 간의 경쟁 등 5가지 기본적인 요인에 의해 좌우된다. _ 마이클 포터, <마이클 포터의 경쟁전략>, p38

경쟁전략의 기본은 '낮은 원가'와 '높은 가격'이다. 경쟁 기업보다 낮은 비용을 들여 제품/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 유통, R&D, 법적 지원책을 확보하고, 경쟁 기업보다 높은 가격을 책정할 수 있는 브랜드, 차별화된 경험을 제공하여 독점(獨占)적 지위를 확보하고 수직적 통합(vertical integration)을 통해 저비용-고이윤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스노우볼(snow-ball)을 키워가는 여러 방안이 책에서 논의된다.

책에서 다뤄지는 내용은 기업이 시장 내에서 확보할 수 있는 최상의 지위, '독점적 공급자'로 서기 위한 여러 전략이 다뤄지지만, 이 책의 내용은 자본주의 시장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마이클 포터의 경쟁전략을 민주주의 정당(政黨)에 대입해보면 다음과 같이 되지 않을까.

어느 하나의 정치 이념(이데올로기)을 선점한 정당이 있다고 하자. 요즘 유행하는 '자유(自由)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에는 다소 중도적인 정당, 더 보수적인 정당 등이 해당 이데올로기(산업) 내에서 경쟁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숟가락을 얻으려는 세력(잠재적인 진입기업)도 있고, 보다 많은 표를 얻을 수 있는 '자유주의'를 대체할 '평등주의' 등은 대체재/대체서비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이데올로기를 소비하는 지지자들은 구매자이며,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구현할 수 있는 후원자들은 공급자가 될 것이다. 한 정당과 그 정당이 표방하는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환경 속에서 이 정당이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이클 포터의 경쟁전략>의 내용은 이에 대한 좋은 은유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면에서 <마이클 포터의 경쟁전략>은 경제/경영 서적이기도 하면서 정치적으로도 여러 의미를 담은 책이라 생각한다. 2024년 상반기 경제적으로 반도체, 바이오, 2차 전지 등 성장 산업과 저PBR 관련 금융 등 전통 산업 간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한 주식시장의 움직임과 정치적으로 4월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마이클 포터의 3부작 <경쟁전략> <경쟁우위> <권력의 배신>을 보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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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음(陰)이라도 애석한 것이다. 만약에 종일토록 선을 행한다하여도 일생 동안에 역시〔할 수 있는 일이 얼마 없을 것인데 부지런히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전 시대에 요(遼)를 정벌하면서 사람들이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였으니, 수 양제(隋煬帝, 楊廣, 569-618)의모든 군사들이 함락되어 죽었고, 당 태종(太宗, 李世民, 598~649)은 자신이 사졸들보다 앞장섰지만 끝내해결한 바가 없었습니다. 대개 나라를 다스리는 도(道)란 안으로 정사를 잘 닦는데 있으니 그러면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이 와서 귀부합니다.

"진(晉, 후진)-한(漢, 후한) 시절의 병란으로 산 영혼들이 시들고 죽어서 거의 다 없어졌는데, 당시에 다시는 태평스러운 날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짐이 몸소 여러 정사를 살펴보고 만 가지 일들이 면밀하게 정리하며 매번 상천(上天 하늘)이 하사하시어서 이처럼 번성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마침내 잘 다스려지고 혼란스러운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고려에서는 처음으로 요(遼)의 연호를 사용하였는데, 정사일(5일)에 사자를 파견하여 정삭(朔)을 시행한다고 알리고 포로를 돌려보내 줄 것을 빌었다. 요(遼)가 그들이 대속(代)하고 송환하는 것을 허락하고 숭록경(崇祿卿)인 소술관(蕭述管)·어사대부인 이완(李流)을 파견하여 조서를 싸가지고 이들을 위무하게 하였다.

경술일(29일)에 고려 국왕인 왕치(治, 성종, 960-997, 재위: 981~997)가 요(遼)의 군사가 그들의 경계를침략하였다고 하며 사자를 파견하여 군사를 출병하기를 빌었다. 황제는 북쪽 변경이 비로소 편안해 졌는데 가볍게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고 하여서 그 사자(使者)에게 두터이 사례하고 그를 돌려보내면서 이어 우대하는 조서로 왕치에게 답장하였다. 이로부터 고려의 조공은 드디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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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 폭력비판을 위하여 / 초현실주의 외 발터 벤야민 선집 5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옮김 / 길(도서출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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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과 깨어남의 변증법은 그 구조를 두고 볼 때 비평적 인식의 방법론으로서 침잠과 파괴라는 두 원칙, 다시 말해 대상(꿈) 속으로의 미메시스적 '침잠'과, 그 대상(꿈)의 연속성을 중단시키고 이로부터 대상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전복적으로 얻어내는 '파괴'라는 비평의 두 원칙에 상응한다. _ <해제 :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적 구제비평>, p29


 진리에 대한 신화의 무차별성은 이의성으로 현상되어 나타나는데, 이 현상을 변증법적으로 사유하여 신화의 신화성을 파악하는 것이 인식의 목표가 된다. 즉 신화의 극복은 역사를 그 신화에 추상적으로 대결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역사 속에 작용하는 신화적 이의성을 변증법적으로 사유함으로써 이루어지며, 이 사유를 통해 현상이 구제된다. _ <해제 :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적 구제비평>, p35


 발터 벤야민(Walter Bendix Schonflies Benjamin, 1892~1940) 선집에 있는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폭력비판을 위하여>, <초현실주의> 등은 그의 역사철학적 인식이 담긴 미학 비평서다. 벤야민에게 역사성은 단독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낡음과 새로움, 법적 목적과 자연적 목적, 운명과 성격 등 상호 대립하는 이미지들을 '언어'를 통해 규정하려는 노력은 오류를 만들어낼 뿐이다. 그리고, 이들의 강한 결속은 신화성의 부활을 가져오게 되며 우리는 이를  20세기 모더니티에서 신화적 키치(kitsch)롤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새로운 생산수단의 형식은 처음에는 예전 생산수단의 형식에 지배받기 마련이다(마르크스). 이 새로운 생산수단의 형식은 집단의식 속에 이미지들을 산출하는데, 이 이미지들 속에서 새것은 옛것과 상호 침투한다. 이 상들은 소망의 이미지들(Wunschbider)이다. 그리고 이 이미지들 속에서 집단은 사회적 생산물의 미숙함과 사회적 생산질서의 결함들은 지양하면서 동시에 미화하려 한다. 그와 함께 이 소망의 이미지들 속에는 낡아버린 것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놓으려는 강한 노력이 나타난다. 이러한 경향은 새로운 것에서 자극을 받는 구상적 판타지로 하여금 태고의 것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_ 발터 벤야민, <19세기의 수도 파리(1935)>, p179


  만국박람회와 철제 구조물이 만들어내는 자본주의의 '판타스마고리아'.  여기에서 사람들은 교환가치에 대한 환영에 빠지게 되고, 환영 안에서 억압받는 이들은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 속에서 갈 길을 잃고 만다. 벤야민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기한 방안이 바로 '침잠'과 '파괴'다. 이들을 통해서 환영에 대한 연속적 인식은 기억으로 붙잡을 수 있으며, 역사는 과학적 인식과 기억의 대상의 결합을 통해 현재성을 갖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인식과 기억의 결합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역사는 주체에 의해 올바르게 해석된다.   


 어떤 희망도 없는 체념이 바로 위대한 혁명가의 최후의 말이다. 19세기는 새로운 기술적 잠재성들에 상응하는 새로운 사회적 질서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그 최후의 말이 옛것과 새것의 길 잃은 중개자들, 판타스마고리아의 심장부에 있는 그 중개자들에게 남겨지게 된 이유이다. 판타스마고리아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 바로 그 세계가 모더니티이다. _ 발터 벤야민, <19세기의 수도 파리(1939)>, p250


 과거를 역사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그것이 '원래 어떠했는가'를 인식하는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다는 것을 뜻한다. 역사적 유물론의 중요한 과제는 위험의 순간에 역사적 주체에게 예기치 않게 나타나는 과거의 이미지를 붙드는 일이다. 어느 시대에나 전승된 것을 제압하려 획책하는 타협주의로부터 그 전승된 것을 쟁취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_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p334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얽힘으로 인한 과거로의 퇴행을 막는 것을 역사적 소명으로 인식한 발터 벤야민에게 '도도한 역사의 흐름', '끊임없이 상승하는 역사의 법칙'을 강조하는 전통적 진보(進步)사관은 역사적 실체를 온전하게 파악하는 것을 방해한다. 사진을 극도로 싫어했던 벤야민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진가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 1908~2004)의 <결정적 순간>이 역설적으로 벤야민의 '침잠'과 '파괴' 그리고 '파괴'와 '구제'를 잘 표현한 것이 아닌가를 생각하게 된다.  


 상호통합적인 구조를 변증법적인 틀을 통해 바라보고 이러한 역사철학적 인식으로부터 정치적 실천을 강조한 발터 벤야민의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읽으며, 미학과 역사철학을 넘나드는 그의 사상에서 '수행'과 '전복'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유(思惟)에는 생각의 흐름만이 아니라 생각들의 정지도 포함된다. 사유는 갑자기 정지하는 그 순간에 그 상황에 충격을 가하게 되고, 또 이를 통해 그 상황은 하나의 단자(單子, Monade)로 결정(結晶)된다. 역사적 유물론자는 역사적 대상에 다가가되, 그가 그 대상을 단자로 맞닥뜨리는 곳에서만 다가간다. 이러한 단자의 구조 속에서 그는 사건의 메시아적 정지의 표지, 달리 말해 억압받는 과거를 위한 투쟁에서 나타나는 혁명적 기회의 신호를 인식한다. 그는 균질하고 공허한 역사의 진행 과정을 폭파하여 그로부터 하나의 특정한 시대를 끄집어내기 위해 그 기회를 포착한다. 이런 식으로 그는 한 시대에서 한 특정한 삶을, 필생의 업적에서 한 특정한 작품을 캐낸다. _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p348


폭력에 대한 비판은 폭력의 역사에 대한 철학이다. 역사의 ‘철학‘인 이유는 그 역사의 결말이라는 이념만이 그 역사의 시대적 자료들에 대해 비판하고 구분하며 결정하는 입장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가장 가까운 것에만 정향할 뿐인 시선은 기껏해야 법정립적인 것과 법보존적인 것으로서의 폭력의 형상들에서 변증법적 부침(浮沈) 정도를 감지해낼 수 있을 뿐이다. - P115

초현실주의자들은 확실성을 가지고 심리가 아니라 사물들을 추적한다. 대상들의 토템 나무(Totembaum)를 그들은 긍원사의 밀림 속에서 찾아 헤맨다. 이 토템 나무 최상단의, 최후의 찡그린 얼굴이 키치이다. 키치는 우리가 꿈속에서나 대화에서 사멸한 사물세계의 힘을 빨아 들이기 위해 두르는 평범한 것의 마지막 마스크이다(p138)... 혁명을 위한 도취의 힘들을 얻기, 이것이 초현실주의의 모든 책과 시도가 추구하는 목표이다. 초현실주의는 그것을 자신의 가장 고유한 과제라고 불러도 좋다. - P162

잔재가 남는다. 집단 역시 신체적이다. 그리고 기술 속에서 그 집단에게 조직되는 자연(physis)은 그것의 정치적이고 개관적인 현실에 따라 볼 때 저 이미지 공간 속에서만, 즉 범속한 각성이 우리를 친숙하게 만드는 그 이미지 공간에서만 생성될 수 있다. 그 자연 속에서 신체와 이미지 공간이 서로 깊이 침투함으로써 모든 혁명적 긴장이 신체적인 집단적 신경감응(kollecktive Innervation)이 되고 집단의 모든 신체적 신경감응이 혁명적 방전(放電)이 되어야만 비로소, 현실은 <공산주의자 선언>이 요구하는 것처럼 그 자체를 능가하게 될 것이다. - P167

우리들 앞에서 일련의 사건들이 전개되고 있는 바로 그것에서 그(역사의 천사)는, 잔해 위에 또 잔해를 쉼 없이 쌓이게 하고 또 이 잔해를 우리들 발 앞에 내팽개치는 단 하나의 파국만을 본다. 그는 산산이 부서진 것들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천국에서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이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는 날개를 접을 수도 없다. 이 폭풍은 간단없이 그를 떠밀고 있으며, 반면 그의 앞에 쌓이는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고 있다. 우리가 진보라고 일컫는 것은 바로 이러한 폭풍을 두고 하는 말이다. - P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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