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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부 유럽 경제사 - 서양 문명의 변경에서 떠오르는 경제의 심장으로
양동휴.김영완 지음 / 미지북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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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로마 시대의 라티푼디움은 노예 경작과 자유민 경작, 두 형태가 있었다. 이 가운데 신분상 자유민kolonatus이 지대 납부를 전제로 토지를 경작하는 프레카리움 Precarium 제도의 성격이 더 강했다.... 이 같은 로마 시대의 토지 생산 조직 형태 가운데 자유민적 요소는 후퇴하고 조세 납부 요소만 남아 이것이 게르만적 인적 지배 형태인 문트권權과 아이겐권權에 합해져 그룬트헤어샤프트(장원 영주제)가 만들어졌다. 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34/228 


[지도] 라인강과 엘베강 (출처 : https://www.researchgate.net/figure/Map-showing-the-German-stretches-of-the-international-waterways-the-Rhine-Danube-and_fig1_321840509)


 <중부 유럽 경제사>에서는 고대 로마의 지배 아래에 있던 라인강 서안 지역과는 다른 엘베강 동쪽의 게르만-슬라브 경제 체제를 보여준다. 라인강 서안에서는 군단병이 정착하고 퇴역 후 인근에서 자리를 잡는 형태인 프레카리움으로부터 시작하여 게르만 전통이 결합된 봉건제(feudalism)/장원제(莊園制)가 발달했다면, 엘베강 동쪽에서는 농노(農奴)에 의해 운영되는 농장제(農莊制)로 발전했다는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독일 농민이 이주하고 이들이 이민족과 동화됨으로써 엘베 강 동쪽 지역에는 서유럽의 그룬트헤어샤프트 지역과는 다른 게르만-슬라브적 요소의 독일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14세기 중엽 이전까지 동부 지역 농민은 곡물 생산과 판매에 참여할 재량이 있었다. 그러나 서방으로 수출하는 곡물 가격이 떨어지자 경지 단위가 큰 땅일수록 위기 대처에 유리했다. 즉 기사령과 대지주는 경쟁력이 있었지만 자유농민은 토지를 처분하고 이들에게 예속되어야 했다. 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39/228


 16세기부터 농업 제도도 변하기 시작했다. 봉건 영주들은 주인 없는 땅을 점유하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소유 토지를 확대했다. 영주가 농민이 보유한 토지를 회수하거나 합병하는 일도 일어났다(16세기 후반). 생산과정 특화와 집약화가 발생하고 농업이 발생했다... 기사 영주들이 농업 기업가(구츠헤어)로 성장하면서 그룬트헤어샤프트와는 다른 형태의 구츠헤어샤프트Gutssherrschaft(농장 영주제)가 성립되었다. 이 영주들의 후예가 바로 프로이센의 융커 계층이다. 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40/228


 서유럽에서는 이후 '상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자유도시가 발달하게 되고, 이들이 자유를 얻는 대가로 국왕과 결탁하면서, 토지에 기반을 둔 귀족계층이 몰락하고 중앙집권국가로 나아가는 반면, 동유럽에서는 농장에 대한 지배권을 가진 이들의 세력이 강대했던 결과로 서유럽과 같은 상업혁명 -> 자본축적 ->산업혁명의 경로를 밟을 수 없었다. 이같은 양상은 엘베강 동쪽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양상이었고, 결과적으로 서유럽에 비해 대규모 자본이 축적되지 못한 주원인이 되었으나, 중앙집권화로 나가는 과정 - 지방권력인 토지귀족과 국가권력인 관료제 -  사이의 관계 설정에 있어서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동부 독일(엘베강 동쪽 지역)에서는 구츠헤어샤프트가 잔존했다. 대토지 경영은 19세기 농노해방 이후에도 융커 체제로 유지된다. 16~18세기에 독일 지역의 농업 제도는 크게 두 형태였다. 남서 독일에서는 일부 남은 그룬트헤어샤프트를 기반으로 경영 형태가 변화했다. 농민 보유지는 장원 영주가 정하는 일정한 조건하에 분할 또는 상속이 가능했다. 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41/228


 농장 영주제Gutsherrschaft는 16세기 이후 엘베강 동쪽 지방에서 행해지던 후기 봉건제적인 농업 제도의 유형이다. 농장 영주제 지역에서는 수출용 곡물 생산을 위해 노동 부역(봉건 지대)과 인신적 종속이 강화되고(재판 농노제), 영주(구츠헤어, 즉 토지 귀족)는 농노에 대한 재판권을 보유했다. 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76/228


  독일은 융커(Junker) 세력을 중앙권력으로 포섭하여 이를 기반으로 한 국가관료제를 발전시켜나가는 반면, 오스트리아는 토지 귀족의 세력을 중앙권력으로부터 배제시킴으로써 중앙권력과 지방권력이 반목하게 되었고, 이러한 갈등으로 인해 오스트리아는 중앙집권에 실패하면서, 소(小)독일주의를 주창한 프로이센 중심의 독일 통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반해 오스트리아 제국은 중앙집권화에 실패하면서 19세기의 민족주의 열풍 아래 여러 국가로 나뉘어지게 되었고, 이후 신생 독립국들이 난립하게 되는 동유럽 슬라브 지역은 19세기 후반까지도 산업을 정착시키지 못하고 제2차 세계대전 후 공산화되었음이 본문에서 간략하게 서술된다. 


 프로이센과 달리 합스부르그제국에서는 토지 귀족이 국가기구에 편입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들에게 불리한 개혁을 제국이 시도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제국을 내적으로 취약하게 한 원인이었다. 문화적, 사회적으로 토지 귀족과 분리되어 있던 도시 출신 관료를 통해 제국이 귀족의 집단적 이해관계를 직접 침범하자 귀족들이 제각기 사나운 자기네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대에 제국은 반혁명의 보루였으나 제국 자체는 무기력했고 표류했다. 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158/228 


 정리하자면, 중부-동유럽의 '농장영주제'는 엘베강 동부 지역의 경제적 공통점으로 서유럽으로부터 끊임없는 자극을 받은 프로이센에서 융커를 중심으로 한 관료제의 도입으로 주변부에서 중심으로 편입한 반면, 상대적으로 토지귀족의 세력이 강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국가들은 산업화에 실패하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공산화되면서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 <중부 유럽 경제사>의 전체 구조다.


 <중부 유럽 경제사>는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 중부 지역의 경제사를 기술한 책이지만, 전체 분량의 절반 정도는 독일 역사에, 나머지의 절반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역사에 할당되며 체코, 폴란드, 러시아의 역사는 매우 간략하게 서술된 책이다. 독일은 중부 유럽에 속하지만, 사실상 서유럽 경제의 중심임을 감안한다면 중부 유럽사의 분량은 매우 부족하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개인적으로는 월러스틴(mmanuel Maurice Wallerstein, 1930 ~ 2019)이 <근대세계체제 The Modern World-system>에서 말한 서유럽의 주변부로서 동유럽의 경제사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알고 싶었지만, 여기에 미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앞서 요약한 내용으로 큰 얼개만 정리하는 것으로 독서의 의의를 찾는다...


 슬라브 사회는 지배계급(전사 귀족) 내에서 서유럽식 규범에 점차 적응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서유럽과 같은 조건적 토지 보유제(상급자에게 충성을 바치고 토지를 보유하는 일)나 법적 전통, 계약 이념(보호를 받는 조건으로 하는 복종) 등은 잘 확립되지 않았다. 자유도시가 발달하기도 어려웠고 귀족에게 면세권이 없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동유럽 일대 지배계급의 응집력이 서유럽보다 훨씬 미약했고, 귀족이 너무 광대한 땅에 흩어져 있어 왕조가 이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어려웠으며, 그 결과 훗날 귀족의 반동이 오래 지속되면서 근대적 국가조직을 창출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175/228


 전반적으로 동유럽 지역은 군주와 기사 계급 간에 중간 단계의 영주권이 없고, 공권력도 제한되거나 분할되어 있지 않았다. 농민에 대한 영주의 권력이 단일 장원의 권력에 영역적, 인신적, 경제적으로 집중되었다. 농민은 순수 노예에 근접한 수준의 인신적 예속 상태에 있었다. 동유럽 모든 지역에서 지방 행정직은 세습제가 아닌 임명제였다. 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189/228

한자동맹 상인들은 부채, 계약 사항 등을 기재한 사업 장부를 공개하여 동맹의 보증을 확보하는 영업 기법도 개발했다(13세기 말). 이 제도는 자본주의의 필수 요소인 자본, 위험 감수, 공격적인 사업 추진을 촉진하면서 북유럽 일대에서 신용과 상업을 확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른바 ‘상업혁명‘이자 중세 말 유럽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들이 창출한 엄청난 부 덕분에 징세도 가능해졌다. 이를 기반으로 이제 왕들은 토지에 기반을 둔 귀족에 의존하는 간접적인 왕국 지배가 아니라, 관료제를 창출하여 점차 근대적인 정치권력을 창출해갈 참이었다.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29/228

명확히 12세기에 서유럽의 변형이 시작되었다. 인간과 토지 관계에만 의존해오던 사회가 상업과 제조업이 농업에 영향을 끼치는 사회로 변해간 것이다. 농산물은 자급자족을 넘어 교환의 대상과 원료로서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다. 이러한 유형의 경제활동을 억제하던 장원제의 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45/228

보헤미아 지역에서 토지 재산의 집중도가 높아졌다. 영주, 성직자가 전체 토지의 4분의 3을 차지했다. 하급 귀족은 거의 사라졌다. 농노의 노동 부역 부담은 늘었다. 30년전쟁 이전에 보헤미아에서는 영주도 농노와 함께 조세를 부담했었다. 그런데 1648년 이후에 귀족들은 실질적으로 면세권을 획득했다. 모든 조세 부담이 농노에게 전가되었다. _ 양동휴, 김영완, <중부 유럽 경제사> , p19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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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12-30 23: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댓글 달기엔 너무 세부적이고 전문적이어서 읽고만 갑니다.
항상 겨울호랑이님 글은 배울게 많네요

겨울호랑이 2022-12-30 23:45   좋아요 2 | URL
항상 그레이스님의 좋은 말씀과 격려로 지난 한 해 부족한 글이나마 올릴 수 있었습니다. 저 또한 그레이스님의 글을 통해 많이 배워가고 있습니다. 감사드리며 내년 한 해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효율성이 일시적 가치라면 회복력은 특정한 조건이다. 효율성을 높이면 종종 회복력이 약화되는 것이 사실인데, 이를 해소할 수단이 되는 시간적 가치는 효율성이 아니라 적응성이다. 효율성의 핵심은 마찰, 즉 경제활동의 속도와 최적화를 늦출 수 있는 중복과 반복을 제거하는 데 있다. 하지만 회복력의 핵심은 적어도 본질적으로는 중복성과 다양성이다. _ 제러미 리프킨, <회복력 시대> , p19/345


 제러미 리프킨 (Jeremy Rifkin, 1945 ~ )은 <회복력 시대 The Age of Resilience: Reimagining Existence on a Rewilding Earth>에서 기존의 '효율성'을 대신한 '적응성' 을 강조한다. 자연을 타자(他者)로 보고, 이로부터 인류 자신 - 정확하게는 중심부 위치한 존재 - 의 풍요를 위해 이용할 자원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끊임없이 부정적인 것을 외부화하고,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면서 현재의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이 저자의 주된 관점이다.


 진보의 시대 전체를 이끈 시간적 지향의 근본은 '효율성'이다. 즉 천연자원의 착취와 소비와 폐기를 최적화하고, 그렇게 해서 자연 자체가 고갈돼도 사회의 물질적 풍요를 점점 더 빨리 증진한다는 임무다. 우리 개인의 시간적 지행과 우리 사회의 시간적 박동이 효율성이라는 원칙을 중심에 두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지구의 지배적인 종으로 그리고 지금은 자연계의 파멸로 이끌었다. _ 제러미 리프킨, <회복력 시대> , p6/345


 이러한 관점은 최근 기후위기, 팬더믹 위기를 겪으며 위기를 경고한 다른 석학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저자는 이러한 위기에 대한 해법을 지난 수십년간 자신의 저작에서 일관되게 주장해온 내용과 연계해서 진단과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3차 산업혁명 인프라는 중앙 집중형보다는 분산형으로 설계되었다. 이것은 사유화를 피해 개방적으로 투명하게 유지될 때 네트워크 효과를 최적화하며 가장 잘 수행된다. 네트워크와 플랫폼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모든 참가자가 더 많은 '사회적 자본'을 축적하게 되기 때문이다. _ 제러미 리프킨, <회복력 시대> , p193/345


 한계비용은 디지털 상호 연결로 더 낮아지지만, 공급자-사용자 네트워크의 지속적인 서비스 공급과 트래픽의 중단 없는 흐름으로 한계비용의 급격한 감소를 만회할 수 있다. 공급자-사용자 네트워크의 새로운 경제 시대에 지식 공유에서 에너지 공유, 차량 공유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제활동이 잠재적으로 서비스가 된다. _ 제러미 리프킨, <회복력 시대> , p196/345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에너지원이 점차 고갈되는 상황에서 화석 연료 대신 녹색 경제가 대두될 것이고, 인터넷의 발달로 경제적으로는 향후 디지털로 연결된 세상에서 소유 대신 공유경제가 대세가 되고, 정치적으로는 시민사회가 부상하며, 글로벌(global) 대신 로컬(local)이 활성화되면서 대량생산의 테일러주의 대신 소규모 다품종 생산이 보편화되고, 인간 가치가 높아지는 세상. 제러미 리프킨의 전작들에서 단편적으로 그려졌던 미래들이 '적응'과 '회복력'이라는 화두로 <회복력 시대>에서 묶인다.


 회복력 시대에는 모든 대륙에서 문자 그대로 수십억 가정과 수백만 기업, 크고 작은 수십만 지역사회가 일하고 거주하는 곳에서 태양광과 풍력을 붙잡아 만든 새로운 에너지를 마이크로그리드에 저장하고 글로컬 에너지 인터넷을 통해 공유할 것이다. 몇몇 지역에서만 풍부하게 발견되는 화석연료와 달리 태양과 바람은 분산된 에너지로서 모든 곳에 존재한다. _ 제러미 리프킨, <회복력 시대> , p199/345


 생태 지역 거버넌스는 그 본질과 취지상 시장이 아니라 공공의 자산이며 그 안에서 인간 주체가 자신이 몸담은 생태 지역을 구성하는 다른 무수한 주체에 끊임없이 적응한다는 사실은 거듭 강조할 만하다. 배타성이 아닌 포용성의 자유라는 새로운 개념, 다시 말해 인간 종을 넘어 우리의 동료 생명체들과 지구상의 다른 모든 주체를 포함하는 연결성은 생태 지역이 지배하는 미래의 결정적 역학이다. _ 제러미 리프킨, <회복력 시대> , p232/345


 이런 면에서 <회복력 시대>는 저자 제러미 리프킨 미래학의 결산이라고 하겠다. 저자는 책에서 암울한 현실을 지적하면서도, 절망적인 미래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긴박한 현재의 위기에서 우리가 가야할 길이 무엇인가가 더 명확해졌음을 책 본문을 통해 밝힌다. 그렇지만, 이와 함께 팬더믹 이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터져나오는 문제들 속에 새로운 길, 희망 대신 과거로의 회귀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현 상황에서 저자의 주장이 과연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엔트로피 법칙에 따라 에너지원은 고갈되었지만, 리프킨의 전망과는 달리 원자력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는 현실,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디지털 공유 경제 대신 강화된 소유권과 통제로 인한 중앙집권과 불평등한 세상과 글로벌 공급체인으로 연결된 대기업 중심의 세상. 지난 시간동안 리프킨 전망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세상은 움직여왔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상황에서 암울한 현재가 과연 변곡점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점을 개인적으로 갖게 된다.


이런 점에서 <회복력 시대>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저자 리프킨의 전망과 우리의 현실을 비교하고, 우리가 가야할 길을 독자 스스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보다 의미있지 않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진보의 시대에 평등은 자율성의 파생물로서만 가치가 있다. 자율성에 대한 신념이 전제되지 않고는 평등을 옹호할 수 없다. 스스로 자율적 행위자라고 믿는 만큼 평등을 요구할 것이며 그것이 다반사가 된다는 뜻이다. 모든 개인의 본질이 자율성의 추구라면 평등한 대우에 대한 욕구가 필연적으로 따라온다(p281)... 관계적 자아를 위한 회복력은 자립성과 자율성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에 대한 개방성과 취약성에서 비롯한다. 그것은 삶의 긍정적인 경험을 공유하는 것에 대한 개방성을 의미하는데, 삶의 긍정적인 경험은 풍부한 관계망을 만들고 풍부한 관계망은 다시 회복력을 강화한다._ 제러미 리프킨, <회복력 시대> , p283/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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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민씨는 <시사IN>과 만난 자리에서 다른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자기 가족이 인파 많은 곳에 가면 혹시나 싶어다들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조금이라도불안함을 느낀다면 이건 절대 남의 일이아닙니다. 책임질 사람이 책임지고 무거운 자리에 앉은 사람이 무거운 책임을 인지할 때에야 이 전 국민적 트라우마를 내려놓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 P17

트라우마를 겪으면 쉴 수 있는 시간이주어져야 하지만 현재로선 불가능하다.
유 대원은 참사 이후 내리 15일 동안 격일로 24시간 근무, 24시간 휴식을 반복했다.
휴직으로 빠진 동료의 빈자리를 메우기위해서다. "내가 참사 때문에 힘들다고 특별휴가 받아서 나가면 누군가 또 24시간근무에 들어가야 한다. 인원이 확충되고나서 빠진 인원의 업무를 대신하는 시스템이 아닌 이상 휴가는 무의미하다." - P18

몸이 아프고 피곤한 것은 견딜 수 있다. 그보다 추모공간을 지키기 위해 실랑이를 해야 하는 게 더 힘들다. 강 팀장은용산구청 직원, 해밀톤호텔 관계자들이
"(추모 물품을) 언제 치울 거냐‘라고 물을때마다 "내가 왜 (추모 물품을) 치우는사람이 됐냐"라고 되묻는다고 했다. 강팀장이 잠을 줄여가며 지키려 한 추모 물품은 ‘이태원 참사를 기억하는 행위‘ 자체다. 이들에겐 그저 치워야 할 ‘행정 대상‘처럼 취급받는 게 싫었다.  2주 전엔 추모물품을 건드리는 취객을 말리다 넘어져휴대전화 액정이 깨지고 무릎을 다쳤다. - P21

복싱 동작인 어퍼컷은 경기를 한순간에 뒤집는 필살기다. 정치권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세리머니는 법과 원칙의 ‘강골 검사‘라는 본인 이미지를 각인시키기 위한 수단이자, 국정을 이끌어갈 자신감의 표현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심판, 정권교체를 강조하는 유세에서 어퍼컷을 한 만큼상대를 공격하는 의미로 보일 수 있다는 부정적 평가도 함께 나왔다. 선거운동이 경기 전 ‘몸풀기‘라면 대통령 취임은 ‘링‘ 위에 올라섰다는 뜻이 된다. 실전에 돌입한 윤석열 대통령의 어퍼컷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 P38

‘그런데 박근혜는 도대체 왜 사면된걸까? 박근혜를 사면하면 국민이통합된다고? 팬클럽이 머글과 통합되는 일도 있나?"
난데없이 떨어진 도돌이표 때문에시간이 5년이나 뒤로 갔다. 다시 폭주하는 독재 권력의 후예를 민주화된 제도와 절차로 단죄한 세계사적사건도 은근슬쩍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민주주의가 원래 그런 거라지만, 이 나라의 시간은 올해도 참 기묘하게 흘렀다.  - P45

도리어 ‘장애인이 왜 출근 시간에 지하철을 타려고 하느냐‘며 사과를 요구한다. 비장애인 남성 (이준석)이 SNS에서 혐오와 차별 발언으로 권력을 확장할때 장애인 여성(김예지)은 현장에서 무릎 꿇고 사과한다. 교통약자의 시기는모두에게 주어진다. 그 누구도 영원히 건장한 성인으로만 살아갈 수는 없다.
조금 늦더라도 천천히, 마지막 한 명까지 같이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요구는 모두를 위한 것이다. - P70

부모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아이가 해외로 입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미혼의젊은 여성에게 그녀의 부모는 말한다. 너와 네 아이의 행복을 위한 선택이었노라고, 긴 세월 떨어져 사는 동안 엄마와 아이는 각자의 삶에서 슬픈 의문을갖게 될 것이다. 과연 이런 삶이 행복일까. 행복을 왜 타인이 결정하는가 아이를 낳았지만 키우지 못했다는 죄책감, 부모에게조차 버림받았다는 외로움과 분노를 누가 감히 행복으로 치환했던가.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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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개념은 처음에는 어느 정도 정적인 성격을 띠었다. ‘통일‘은 이미 주어진, 종종 의식되지 못한 은폐된 통일을 나타냈다. 예술작품의 통일은 예술작품을 결정하고 예술작품과 함께 제공된다. 예술작품을 포괄하는 더상위의 통일, 즉 한 나라 안에서 한 시대 안에서의 예술의 통일, 문학의 통일도 역시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현존하는 현상으로 확인된다.  - P82

‘통일‘은 이제 빈번히, 특히 미래의 기대 속에서, 다름 아닌 질서, 조화, 정의, 행복의동의어로 나타났고, 이러한 의미에서 통일은 극우주의자들부터급진적인 좌파 세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치적 집단들에 의해 간절히 요구되었다. 그래서 그 단어가 갖고 있는 비합리적인 열광적힘이 우리 세기에도 현실의 이념적인 은폐에서뿐만 아니라 대중들의 동원에서도 입증될 수 있었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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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브 사회는 지배계급(전사 귀족) 내에서 서유럽식 규범에 점차 적응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서유럽과 같은 조건적 토지 보유제(상급자에게 충성을 바치고 토지를 보유하는 일)나 법적 전통, 계약 이념(보호를 받는 조건으로 하는 복종) 등은 잘 확립되지 않았다. 자유도시가 발달하기도 어려웠고 귀족에게 면세권이 없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동유럽 일대 지배계급의 응집력이 서유럽보다 훨씬 미약했고, 귀족이 너무 광대한 땅에 흩어져 있어 왕조가 이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어려웠으며, 그 결과 훗날 귀족의 반동이 오래 지속되면서 근대적 국가조직을 창출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1차 대전에 얽힌 복잡한 사정은 이미 7장에서 다 얘기했다. 하지만 다민족국가 오스만제국이 결국 내셔널리즘 때문에 유럽 지역에서 밀려난 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오스트리아가 자기네 역시 내셔널리즘으로 인해 붕괴될 것을 우려하여 자포자기 심정에서 상당히 의도적으로 전쟁 발발을 자초한 면이 있다는 지적은 여기에서 다시 해도 좋으리라.

헝가리는 동유럽에서 가장 개혁 지향적인 국가였다. 1956년 사건 이후 모스크바의 간섭이 있긴 했지만 시장경제를 도입하려는 노력과 개혁은 계속 진행되었다. 브레즈네프는 카다르의 충성심을 신뢰하며 헝가리 국내 개혁을 용인했다. 카다르 정권은 시장 지향적 개혁 정책을 추진하고 소련식 계획경제를 폐지했다.

슬라브 농업은 쟁기와 윤작을 도입하여 생산성이 향상되었다(500년 무렵). 이에 따라 제조업(특히 은세공)이 가능해지고 더 부유한 인근 지역과 교역하면서 새로운 부가 창출되기 시작했다. 무슬림 칼리프들과의 노예무역이 슬라브족이 쌓은 중요한 부의 원천이었다(8세기, 중부 유럽에서 아랍 은화가 많이 발굴됨).

전반적으로 동유럽 지역은 군주와 기사 계급 간에 중간 단계의 영주권이 없고, 공권력도 제한되거나 분할되어 있지 않았다. 농민에 대한 영주의 권력이 단일 장원의 권력에 영역적, 인신적, 경제적으로 집중되었다. 농민은 순수 노예에 근접한 수준의 인신적 예속 상태에 있었다. 동유럽 모든 지역에서 지방 행정직은 세습제가 아닌 임명제였다.

동유럽의 곡물이 서유럽으로 향하는 곡물 무역이 시작되고(13세기 중엽), 독일의 팽창 등으로 인해 동유럽은 서유럽 문명에 더욱 긴밀히 연계되었다.

13세기 말부터 유럽 전역에 위기가 찾아왔다. 위기란 인구 정체, 기후변화, 흉작, 대기근, 흑사병 창궐 등을 말한다. 동유럽은 자유로운 상업도시 같은 위기 충격 완화 장치가 별로 없어 서유럽보다 타격이 훨씬 컸다(14세기). 자치권이 확보된 자유도시도 없고, 별로 잘 발달하지 못했지만 명목상의 도시 생활도 거의 사라졌다.

흔히 나치가 반유대주의의 온상인 줄 알지만, 사실 반유대주의는 그 이전에 이미 중, 동부 유럽 농민들 사이에서 훨씬 더 폭발적인 호소력을 지녔다. 이들에게 유대인은 자본가, 교육받은 전문직의 상징이었다.

크림전쟁(1854~1856년)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러시아제국 내에서도 근대화의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재판 절차의 자유화, 젬스트보(농촌 귀족의 자치 기구)와 도시 자치회, 개병제 등이 도입되었다. 국가가 군대를 재조직하려면 농민을 귀족이 아닌 국가가 직접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해방령(1861년)을 선포하여 모든 농노는 인신적으로 해방되었다.

러시아의 공업화는 1890년쯤 정점을 이루며 직물업, 주로 군사력과 관련된 중공업, 운송 부문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러시아에는 예로부터 공업화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고 농업만으로도 살 수 있다는 주장이 분분하기도 했으나, 재무장관 비테Witte(재임 1892~1903년)는 공업화 수준이 낮으면 결국 국가가 위협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서유럽을 따라잡기 위해 서유럽의 기술, 자본을 대거 유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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