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수 있다면 결코 슬프지 않습니다. 생각하면 우리가 생명을 저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것은 기쁨만이 아닙니다. 슬픔도 사랑의 일부입니다. 마치 우리의 삶이 그런 것처럼.(p418)... 사람의 길을 키우는 길이야말로 그 사회를 인간적인 사회로 만드는 일입니다. 사람은 다른 가치의 하위 개념이 아닙니다. 사람이 '끝'입니다. 절망과 역경을 '사람'을 키워 내는 것으로 극복하는 것, 이것이 석과불식 碩果不食의 교훈입니다.(p423) <담론> 中


 <담론 談論>에는 신영복 교수의 전작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의 많은 내용과 함께 사상의 지향점이 잘 나타난다. 20년에 걸친 고통스러운 수감생활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이겨낸 저자의 이야기가 강의 곳곳에 녹아 있다는 점에서 이 책과 <강의>는 잘 어울리는 세트임을 느끼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노자(老子) 철학의 성격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 작은 소득이었다. 먼저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에 소개된 내용을 살펴보자. 강신주는 노자의 사상 안에서 제국주의 帝國主義 모습을 발견하고 자본주의 수탈구조를 합리화는 사상이라고 규정한다.


 노자 철학에 등장하는 많은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바로 '천하(天下)'이다. '천하'는 글자 그대로 '하늘 아래'를 의미한다. 결국 이것은 전국(戰國)의 혼란과 무질서를 '하늘 아래'라는 생각으로 통일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하고 있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강력한 파시즘으로 무장한 국가의 무력으로는 전국(戰國)을 통일할 수 있지만, 결코 그것만으로 통일된 제국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진단했던 것이다.(p284)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 中


  노자의 해법은 피통치자가 '제국'안에 들어오면 사랑의 원리로, '제국' 바깥에 남으려고 한다면 폭력의 원리에 입각해서 통치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흥미로운 것은 노자의 '제국' 논리가 역사상 존재했던 크고 작은 거의 모든 '제국들'에서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점은 '제국'이 결코 '국가'와 독립적인 층위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노자 철학의 진정한 고유성을 그가 '제국'으로까지 이어질 '국가'의 작동원리를 발견했다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p285)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


 강신주의 해석에 따르면, 노자의 '무위 無爲'도 '위 爲'를 위한 방편으로 전락할 것이며, 자연(自然) 역시 인간이 만들어낸 국가의 모습에 다름이니게 된다. 때문에, 상당히 혁신적인 생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개인적으로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는데, 신영복의 <담론>과 <강의>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하게 지적한다.


 노자에 따르면 국가란 하나의 교환 체계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국가는 수탈과 재분배라는 교환 논리에 따라 작동하는 기구다. 그러나 문제는 노자가 국가를 자명하게 주어진 전제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p285)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


 <노자 老子>는 민초의 정치학입니다. 민초들의 심지 心志를 약하게 하고 그 복골 腹骨을 강하게 해야 한다는 <노자> 3장의 예를 들어 <노자>가 제왕학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민 民을 생산노동에 적합한 존재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의 생산적 토대를 튼튼하게 하고, 기층 민중의 삶을 안정적 구조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뜼으로 읽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61장을 예로 들어 정치란 먼저 주는 것이고, 나라를 취하는 국취 國取가 목적인 듯 반론하고 있지만 61장의 핵심은 평화론입니다. 대국자하류 大國者下流 천하지교 天下之交. 노자가 이야기하는 대국은 바다입니다(p136)... <노자>가 제왕학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잃는 결정적 부분이 바로 물의 철학입니다. 비단 물의 철학뿐만 아니라 <노자>의 핵심 사상인 무위가 바로 반전사상 反戰思想입니다.(p137) <담론> 中


 <노자> 텍스트로만 한정해 보자면, 선뜻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 그래서, 시야를 좀더 넓혀 다른 고전인 <주역 周易>과 <맹자 孟子>의 내용까지 함께 높고 생각하게 된다. 하늘이 아래, 땅이 위쪽에 놓인 지천태(地天泰) 괘는 마치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데, 그것은 가지고 있는 곳에서 없는 곳으로 덜어주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지천태가 매우 좋은 괘인 이유는 덜어주는 모습이 자연(自然)스러운 길(道)이기 때문이 아닐까.


 지천태 地天泰 괘는 매우 좋은 괘로 읽힙니다. 그 이유가 바로 하괘와 상괘의 관계 때문입니다. 곤 坤 괘가 위에 있고 건 乾괘가 아래에 있습니다.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에 있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좋은 괘로 읽힙니다. 땅의 기운은 내려오고, 하늘의 기운은 올라갑니다.(p67) <담론> 中

 

 如有不嗜殺人者, 則天下之民皆引領而望之矣. 誠如是也, 民歸之, 由水之就下, 沛然誰能禦之. 만일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이가 있으면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목을 길게 빼고서 바라볼 것입니다. 진실로 이와 같다면 백성들이 그 사람에게 따라가는 것이 마치 물이 아래로 흘러 내려가는 것과 같을 것이니 줄기차게 흘러가는 기세를 누가 능히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맹자정의 孟子正義  양혜왕상 梁惠王上 6장 六章>(p47)


 만약, <노자>를 읽은 군주가 크게 깨달음을 얻어 도(道)를 따라 간다면, 그 길의 결과로 많은 백성을 얻는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만약, 군주가 인위적으로 그런 행동을 한다면, 일시적으로는 가능할 지라도 바다(大國에 이를 때까지 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도를 행하다 보니, 바다로 나아갔을 뿐, 바다로 나아가기 위해 도를 행했다고 본다면 원인과 결과가 바뀐 해석이 아닐까. 이러한 이유로 <노자>에서 자본주의 수탈구조 대신 반전(反戰)사상을 찾아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생각된다. 여기에서 잠시 '수탈-재분배 구조'에 대해 생각해보자.


 수탈과 재분배라는 고유한 작동 원리가 유지되는 한, 그것이 전자본주의 경제체제든 혹은 자본주의 경제체제든 아니면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경제체제든 간에, 국가가 그 어떤 생산양식 혹은 생산력이라도 자신의 교환 논리로 선택하고 편입시킨다고 보아야 한다.(p288)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  


 국가에 대해 부정적인 <강신주의 노자 혹은 장자>의 논리는 국가를 약탈-재분배 구조로 파악한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 ~ )의 사상에 기반한다. 국가에 대한 가라타니 고진의 부정적인 인식은 '국가' '자본'의 문제를 인류 공동의 문제로 규정하기에 이른다.

 

 칼 폴라니의 결점은 재분배가 약탈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국가가 약탈-재분배라는 '교환양식'에 존재한다는 것을 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p62) <세계공화국으로> 中


 인류는 지금 긴급히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제인 전쟁, 환경파괴, 경제적 격차는 분리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여기에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집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국가와 자본의 문제로 귀착됩니다. 국가와 자본을 통제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대로 파국의 길을 걷고 말 것입니다. 이것들은 일국(一國) 단위로는 생각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글로벌한 비(非)국가조직이나 네트워크가 많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유효하게 기능하지 않는 것은 결국 제 국가의 방해와 만나기 때문입니다.(p225) <세계공화국으로> 中


 이에 반해, 피게티(Thomas Piketty, 1971 ~ )의 견해는 다르다. 축적된 부(富)가 가져오는 불평등한 소득 분배를 해결하기 위해, 피게티는 세계공화국 수준에서 이루어질 글로벌 자본세와 함께 사회적 국가의 역할을 강조한다. 국가를 자본의 편에 서있다고 규정한 고진과 국가를 자본 개혁의 주체로 바라본 피게티. 같은 진단, 다른 치료를 제시한 두 석학의 이야기에 우리는 고민하게 된다. 우리는 국가(國家)를 어떻게 규정해야할 것인가. 이 문제를 깊게 보려면 근대 국가 이전 선사시대까지 나가야할 수도 있기에 일단은 멈추도록 하자.


  우리가 주목한 것은 20세기에 창안되었지만 미래에도 틀림없이 핵심적인 역할을 계속 수행해야만 할 사회적 국가와 누진적 소득세라는 두 가지 기본 제도다... 여기서 이상적인 수단은 매우 높은 수준의 국제적 금융 투명성과 결부된 누진적인 글로벌 자본세가 될 것이다. 세금은 끝없는 불평등의 악순환을 피하고 세계적인 자본집중의 우려스러운 동학을 통제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p617) <21세기 자본> 中


 반 反시장주의와 반 反 국가주의 모두 부분적으로는 옳다. 그러나 마구잡이로 내달리고 있는 금융자본주의에 대해 통제권을 되찾을 수 있는 새로운 제도가 필요한 동시에 현대사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조세 및 소득이전제도의 지속적인 개혁과 현대화가 이뤄져야 한다.(p564)... 의료와 교육에 대한 정부지출(국민소득의 10~15퍼센트)과 대체소득 및 이전지출(국민소득의 10~15퍼센트 또는 20퍼센트)을 전부 합하면 국가의 총 사회적 지출은 (대체로) 국민소득의 25~35퍼센트 정도로 추산된다. 다시 말해 지난 세기에 이뤄진 재정국가의 성장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국가'의 건설을 반영하는 것이다.(p570) <21세기 자본> 中


 다시 <노자>로 돌아와서, <노자>와 관련한 강신주의 해석에서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과거를 통해 현재의 문제를 발견한다는면에서 참신성은 있었지만, 춘추(春秋), 전국(戰國)시대가 자식을 서로 바꿔 잡아먹던 시대이며 늙은 부모를 산에 버리던 시대임을 생각해보자. 끔찍한 시대를 살았던 이들과 시대 안에서 풍요로운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기 위한 수탈구조를 생각한다는 해석은 분명 무리하다 여겨진다. <노자>의 정치사상을 이렇게 정리해본다. 


  우리가 이 지점에서 합의해야 하는 것은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 時制라는 사실입니다. 공자의 사상이 서주 西周 시대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오늘의 시점에서 규정하여 비민주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지요.(p141)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中


 <담론>과 <강의 : 나의 고전독법>에 대한 이야기는 앞에서 했으니, 책 내용 중 하나인 <주역>의 내용 중 인상깊었던 구절을 마지막으로 이번 페이퍼를 정리하자.


 '위 位'는 효 爻의 자리입니다. 효를 읽을 때에는 먼저 그 자기를 읽습니다. 그러나 <주역 周易> 독법에 있어서 양효는 어디에 있든 늘 양효로서 운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양효가 양효의 '자리(位)'에 있어야 양효의 운동을 합니다. 효가 자기 자리에 있는 것을 득위 得位했다고 하고 그렇지 못한 경우를 실위 失位했다고 합니다. 양효, 음효라는 효 자체의 존재성보다는 효가 처해 있는 자리와의 관계를 중시합니다. 그래서 관계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p63) <담론> 中


  양효가 양효의 자리에 있어야 득위한다는 말은 길(吉)하다와 통할 것이고,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야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공부를 안 한 학생이 시험을 잘 칠 수 있을 것인가를 주역점을 쳐서 물었을 때 '길'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주역점의 결과는 점을 치는 상대 기준으로 길(吉) 흉(凶)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보편적 가치에 기준을 두고 결과를 말해준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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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7 0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27 0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종이달 2022-05-22 2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5-22 23:5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종이달님
 


 새로운 문명과 사회 구성 원리에 관해서는 앞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언급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우리가 걸어놓는 화두는 '관계론' 關係論 입니다... 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 存在論 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p23)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中


  신영복(申榮福, 1941 ~ 2016)의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에서는 서양철학을 존재론으로, 동양철학을 관계론으로 규정한다. 존재론에서 개별 존재가 기본단위로 이로부터 확장을 추구한다면, 관계론에서는 기본단위가 망(網)이 된다. 마치 물리학에서 기본 단위를 '점'으로 보는 사상과 '끈 string'으로 보는 사상(초끈이론)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기초단위의 설정부터 두 사상은 다르다.

 

 존재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를 세계의 기본 단위로 인식하고 그 개별적 존재에 실체성 實體性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부단히 자기를 강화해가는 운동 원리를 갖습니다. 그것은 자기증식 自己增殖을 운동 원리로 하는 자본 운동의 표현입니다.(p23)... 이에 비하여 관계론적 구성 원리는 개별적 존재가 존재의 궁극적 형식이 아니라는 세계관을 승인합니다. 세계의 모든 존재는 관계망 關係網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지요.(p24)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中


 저자는 이러한 두 세계의 차이로부터 우리가 동(同)에서 화(和)로 나가야함을 강조한다. 존재론의 자기 증식적 성향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새로운 가치관의 변환을 촉구한다. 저자에게 고전은 단순한 옛글이 아닌 현실 문제의 해결방안을 촉구하는 현실의 목소리다. 다만, 우리가 고전으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하지만, 현대의 기준으로 과거를 평가하는 것에는 분명하게 선을 긋는다. 당대 현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평가에 저자는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동 同은 이를테면 지배와 억압의 논리이며 흡수와 합병의 논리입니다. 돌이켜보면 이것은 근대사회의 일관된 논리이며 존재론의 논리이자 강철의 논리입니다. 이러한 동 同의 논리를 화 和의 논리, 즉 공존과 평화의 논리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p46)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中


  우리가 이 지점에서 합의해야 하는 것은 고전과 역사의 독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시제 時制라는 사실입니다. 공자의 사상이 서주 西周 시대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오늘의 시점에서 규정하여 비민주적인 것으로 폄하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과거의 담론을 현대의 가치 의식으로 재단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지요.(p141)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中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에서 저자는 경제학을 전공한 학자의 입장에서 고전을 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를 자본집중화로 인한 빈부격차와 인간소외, 신자유주의문제로 바라보는 저자는 인간관계의 회복을 통해 현대자본주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오늘날의 주류 담론인 전 지구적 자본주의(global capitalism)와 세계화 논리는 한마디로 거대 축적 자본의 사활적 死活的 공세 攻勢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전개 과정이 역사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자본 축적 과정의 전형적 형태입니다. 존재론적 구성 원리와 존재론적 운동 형태를 지양하지 않는 한 다른 경로가 없기 때문이지요.(p33)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中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상품을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통일물로 설명하고 이를 상품의 이중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상품은 교환가치가 본질입니다. 사용가치는 교환가치에 종속되는 것이지요. 상품은 한마디로 말해서 팔리기만 하면 그만입니다. 사용가치는 교환가치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감성이 상품미학에 포섭된다는 것은 의상과 언어가 지배하는 문화적 상황으로 전락한다는 것이지요.(p197)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中


 생각해보면,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 ~ 1790)가 <국부론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의 처음을 분업(分業)을 통한 효율적인 생산을 말한 것으로 시작하면서 근대 경제학은 생산 중심의 경제학으로 변모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렇지만, 같은 저자의 <도덕감정론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이 동감(同感)으로 부터 시작됨을 생각해본다면, 애덤 스미스의 경제철학에도 생산 이전에 교환이 중심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신영복 교수의 동양고전에 대한 성찰은 생산에서 교환 중심의 경제학으로, 근대 경제학의 시작을 <도덕감정론>으로 생각하는 학자의 현실 인식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신영복의 인식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 ~ )의 사상과도 통한다. 


 자본은 자기증식을 할 수 없을 때, 자본이기를 멈춘다. 따라서 언젠가 이윤율이 일반적으로 저하되는 시점에 자본주의는 끝난다. 그때 비자본제경제가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것이 그 충격을 흡수하고 탈자본주의화를 돕는 일이 될 것이다. 명확한 것은 생산 과정에 대한 과도한 중시와 유통과정의 경시가 자본의 축적과정에 대응한 대항운동을 실패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시정하는 데에는 좀 더 근본적으로 사회구성체의 역사를 '생산양식'이 아닌 '교환양식'에서 보는 시점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p413) <세계사의 구조>中


 저자는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에서 '존재론-관계론'의 문제를 경제학에 대한 인식으로 끌어갔지만, 저자와 배경지식이 다른 이들은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문명(文明, culture)를 바라보는 아널드 J.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 CH,1889 ~ 1975)와 정수일(鄭守一, 1934 ~ )의 입장 차이는 존재론과 관계론에 다름 아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바를 정리해보자. 결론은 두 종류의 관계, 즉 동일한 사회 내부의 부분사회(커뮤니티) 간의 관계와 서로 다른 사회 간의 관계는 명확히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p44)... 이해할 수 있는 역사 연구의 단위는 민족국가도 아니요 정반대인 인류도 아니며, 다만 우리가 사회라고 이름 붙인 어떤 종류의 인간 집단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하게 될 것이다.(p49) <역사의 연구 Study of History 1> 中


 씰크로드학의 핵심은 씰크로드를 통한 문명의 교류상을 밝혀내는 것이다. 문명의 교류, 이것은 씰크로드학의 전편에 깔려 있는 밑그림이며 전장(全章)을 관류하는 물줄기다. 그래서 씰크로드학은 일종의 문명교류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문명이란 인간이 육체적/정신적 노동을 통해 창출한 결과물의 총체로서,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으로 대별된다. 문명의 생명은 이러한 결과물에 대한 공유(共有)다.(p18) <씰크로드학> 中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에서는 저자의 깊은 성찰이 담긴 해설도 접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 더 의미있게 다가오는 것은 과거를 통해 현재의 문제를 바라보고 미래의 길(道)을 확인하는 자세라 생각된다. 그리고, 한석봉의 어머니처럼 저자는 독자들에게 한 길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훌륭한 인문독서 입문서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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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0-01-25 10: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차이를 인정하자는 것은 관계론이 아닌 존재론의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차이 인정은 영원히 차이를 좁히지 못하여 존재를 고착화 한다는 주장인 것 같습니다. 존재론자들의 숨은 의도에 관계론자들이 여전히 많이 속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아무튼 새해 첫날부터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즐건 설 명절 보내세요. ^^

겨울호랑이 2020-01-25 14:54   좋아요 2 | URL
그렇군요. 북다이제스터님 말씀처럼 존재론과 관계론의 논쟁은 오늘날에도 계속 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북다이제스터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한 연휴 되세요!^^:)

초딩 2020-01-25 1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겨울호랑이 2020-01-25 14:55   좋아요 0 | URL
초딩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설연휴에 복 많이 받으세요!^^:)

하나의책장 2020-01-26 1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행복한 설 연휴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20-01-26 11:0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하나의책장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평안한 연휴 되세요!^^:)

종이달 2022-05-22 2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겨울호랑이 2022-05-22 23:5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종이달님
 

 

 뜻을 깨닫는 것은 본래 세 점을 한 곧은 줄로 맞추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일직선상에 놓여져 이 끝에서 저 끝이 내다뵈는 것이 뜻을 앎이다.(p163) <너 자신을 혁명하라> 中


 함석헌(咸錫憲, 1901 ~ 1989)은 <너 자신을 혁명하라>에서 뜻과 진리를 깨닫기 위해 정진(精進)할 것을 강조한다.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개념 중 선생은 새로움을 힘 있음, 밝음, 처음, 맑음 등으로 정의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갈아내어 새롭게 되기를 우리에게 주문한다.


 새로움이란 첫째로 힘 있음이다. 힘 있다 함은 밖을 이김이다. 생명은 스스로 끊임없이 피어나고 지어내는 것이기 때문애 늘 어디 가든지 막아냄, 건드림, 잡아당김을 느낀다. 그것을 이기고 제대로 하는 것, 자유하는 것이 생명이다. 새롭다는 것은 자유하는 힘을 가졌단 말이다. 갈아 놓은 칼날은 새 것이다.(p107).... 새것은 맑다. 이른바 청신(淸新)이다. 새벽 바람처럼, 골짜기 물처럼 맑은 것이 새것이다. 맑다는 것은 다른 무엇이 섞여 들어가지 않았단 말이다. 섞인 것이 있으면 제 본바탈을 잃는다. 바탈을 잃으면 죽은 것이다... 갈아야 한다. 죽음을 물리치고 새 삶을 일으키기 위해서 갈아야 한다.(p109) <너 자신을 혁명하라> 中

 

 한편,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1933 ~ )의 <혁명의 시간 Time for Revolution >은 다른 관점에서 시간의 의미로 접근한다. 네그리의 혁명과 함석헌의 혁명이 지향하는 바가 조금을 다를지라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뜻(의미)를 깨닫는 것을 추구하는 바는 통하는 바 있다.


 앎(이는 유물론적 장 안에 있는 에피스테메 episteme이며, 논리이다)이란 카이로스(Kairos)다. 즉 앎의 사건, 이름붙이기(naming)의 사건, 혹은 저 정확하게는 특이성singularity)으로서의 앎이다. 이는 논리적 혁신과 존재론적 창조를 교직한다.(p17) <혁명의 시간> 中


 그렇다면, 카이로스가 무엇인가를 알아봐야 할 차례다.  <시간의 탄생 Zeit: Eine Kulturgeschichte>에서 저자 알렉산더 데만트 (Alexander Demandt, 1937 ~ )는 그리스 신화안의  크로노스 Chronos, 아이온 Aion, 카이로스 Kairos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크로노스 Chronos의 아들은 아이온 Aion이다.... 아이온은 벌거벗은 젋은이로 뱀에 둘러싸여 있으며 다양한 상징으로 장식되어 있다. 후광이나 사자의 머리를 하고 있으며 날개와 성화가 달려있고 배경에는 태양과 달이, 구석에는 12궁도와 바람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아이온은 시간의 상징으로 뱀에 휘감겨 있으며 머리가 세 개다. 사자의 머리는 현재를, 늑대의 머리는 과거를, 개의 머리는 미래를 나타낸다.(p75)... 아이온이 가장 긴 시간이라면 카이로스 Kairos, 즉 기회는 가장 짧은 시간이다. 이는 우리가 눈치채고 활용해야만 하는 찰나의 특별한 순간이다. 소년 카이로스는 오른손에는 칼을, 왼손에는 한 쌍의 거울을 들고 있으며 발꿈치에는 날개를 달고 있다. 제우스 조차 눈 깜짝할 사이에 달아나버리는 소년을 잡아올 수 없다고 파이드로스 Phaedrus는 기록하고 있다.(p77) <시간의 탄생> 中


  아이온이 과거, 현재, 미래를 의미하는 영원(永遠)의 시간을 상징한다면, 카이로스는 순간이며, 기회의 시간이다. 그리고, 네그리는 아이온 안의 카이로스 안에서 창조하는 생명력을 발견할 때가 바로 혁명의 시간임을 말한다.


  카이로스는 영원한 것 속에 있다. 카이로스가 바로 창조하는 영원한 것이다.(kairos is the eternal that creates)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이 영원한 것은 우리에 선행한다. 그 가장자리에서 우리의 창조활동이 일어나고 존재 즉 영원을 확장하는 활동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카이로스가 여는 모든 것은 영원하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에 대한 책임이 있는 동시에 영원을 생산할 책임이 있다.(.p73)... 존재가 창조되는 소용돌이치는 '토포스(topos, 장소)'와 이 생산을 스스로 조직하는 '텔로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시간의 양태 내에서의) 우리의 이해를 심화하는 것이 중요하다.(p75) <혁명의 시간> 中


  '아이온 - 카이로스'의 관계가 이와 같다면, '크로노스 - 카이로스'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한국인이 캐낸 그리스 문명>의 저자 김승중에 따르면 이들의 관계는 '객관성 -  주관성'으로 정리된다. 이처럼 시간의 의미는 '영원-순간', '객관성-주관성'으로 크게 될 수 있을 것이다. 

 

 '흐로노스 chronos"는 우리가 잘 아는 베테랑 할아버지, 시간의 아버지 Father Time, 즉 누구나 인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반면, "카이로스 Kairos"는 완전히 반대의 예측 불가능한 주관적인 시간이다. 객관적인 시간이라는 것은 바로 아이작 뉴턴이 얘기하는 시간의 특징 aquabiliter fluit - 즉, 강의 물이 항상 일정하게 흐르듯 영원히 고정된 시간이 바로 흐로노스이다.(p35)... 그에 반해서 주관적인 시간 "카이로스"는 흔히 "기회 opportunity"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이는 일정하게 아주 "적절한 때 right timing"을 의미한다. 흐로노스가 신적인 우주의 영원한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인간세상의 찰나, 즉 짤막한 현재의 시간이다.(p37)' <한국인이 캐낸 그리스 문명> 中


 이러한 객관성-주관성은 현재에서 만나게 되며, 우리는 생각과 언어를 통해 지금 이 순간(시간), 바로 여기 여기(공간)에서 무의미한 영원의 시간에 뜻(의미)를 부여하며 삶을 살아간다. 우리의 삶이 자기 인식의 시공간(space-time)에서  끊임없이 퍼져가는 물리적인 엔트로피(entropy) 법칙을 거부하며 생명의 도약인 '엘랑비탈(Elan Vital)'을 하는 것이라면, 시간을 헤아리는 것은 의미를 부여하는 여정의 작은 첫걸음이 될 것이다.

 

 우리는 '객관적으로' 사실을 보며 '주관적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인식하기 전에 대상이 존재하므로 처음에는 객관성에 우위를 부여했다가 곧 인식 과정은 인식 능력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객관성은 일시적인 것으로 주관성이 우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p49)... 현재 속에서 주관성과 객관성은 서로 접촉한다. 우리의 현재 의식적 행위는 그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가능성이다... 자기반성을 위해서는 생각과 언어라는 도구가 필요하듯 시간과 공간은 자기인식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p50) <시간의 탄생> 中


 2020년과 경자년(庚子年). 태양력(太陽歷)과 태음력(太陰歷)으로 우리가 의미를 부여한 시간이 맞아들어가는 첫 날인 2020년 설날을 맞아 시간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경자년의 첫 날을 맞아 새로움의 의미를 되새기고, 무의미한 아이온에 뜻을 부여하여 자신을 바꾸는 한 해가 되길 바라본다.


 고대 동양에서부터 내려오는 가장 오래된 축제에 대한 소식은 진흙판 위에 새겨진 설형문자를 통해서 전해졌다. 그것은 BC 3000년에서 BC 2000년 사이에 바빌로니아의 도시를 관장하던 주신 主神 마르두크를 기념하기 위한 새해 축제가 12일 동안 열렸다는 증거이기도 했다.(p460) <시간의 탄생> 中


 고대 페르시아에서도 새해는 중요한 축제 행사였다. 오늘날까지도 이란에서 나우루즈 Nauruz는 유명한 축제다.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에 따르면 아후라 마즈다와 아리만, 선악의 투쟁이 곧 세상의 역사다. 결국 선이 승리하고 두 세력 사이에서 평화 계약이 이루어지는데 이날이 바로 봄이 시작되는 때이자 새해가 시작되는 시기로 축하의식이 열리는 날이었다.(p461) <시간의 탄생> 中


 얼마전 2020년 새해 축하 인사를 이웃분들께 드렸습니다. 이번에는 경자년 새해 인사를 페이퍼로 드립니다.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의 한 구절을 마지막으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합니다. 이웃분들 모두 각자의 세계(뜻)를 위대한 정오(카이로스)안에서 찾는 한 해 되세요! 


 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 최초의 운동, 거룩한 긍정이다. 그렇다. 나의 형제들이여,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 거룩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욕구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 나는 너희들에게 정신의 세 단계 변화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는가를.(p41)... 사자는 왔으며 내 아이들도 가까이 와 있다. 차라투스투라는 성숙해졌다. 나의 때가 온 것이다. 이것은 나의 아침이다. 나의 낮이 시작된다. 솟아올라라, 솟아올라라, 너 위대한 정오여!(p529)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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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0-01-24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호랑이님!! 행복한 명절 보내세용^-^

겨울호랑이 2020-01-24 19:05   좋아요 0 | URL
syo님께서도 행복한 설연휴 되세요! 감사합니다^^:)

캐모마일 2020-01-24 12: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에 새뜻을 새기기에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겨울호랑이 2020-01-24 19:06   좋아요 0 | URL
캐모마일님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페넬로페 2020-01-24 2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 시간을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탁월한 이야기네요^^
완전히 이해할 순 없어도 가슴깊이 뭉클함을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님!
여기서의 크로노스는 제우스의 아버지와 다른 신인거죠?
아님 같은 신을 나타내는건가요?

겨울호랑이 2020-01-24 22:3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페넬로페님 말씀처럼 크로노스는 제우스의 아버지, 우라노스의 아들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한 연휴 되세요!^^:)
 
양자 : 101가지 질문과 답변
케네스 W. 포드 지음, 이덕환 옮김 / 까치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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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규모(scale)이다. 우리의 거시 세계(large scale world)라고 해서 양자물리학의 원자보다 더 작은 세계에서보다 덜 유효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큰 규모에서 나타나는 특성에 대한 양자적 기반은 직접 관찰하기 어렵게 숩겨져 있다. 양자물리학은 원자나 원자보다 더 작은 영역에서나 그 모습이 나타난다.(p21)<양자 : 101가지 질문과 답변> 中

양자역학(量子力學, quantum physics)이 적용되는 세계는 우리가 직접 관찰하기 어려운 미시 세계(small scale world)다. 때문에 우리는 이 세계에 적용되는 법칙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때문에, 양자물리학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파동(wave), 입자(particle), 확률(probability)의 개념을 사용한다.

양자물리학의 근본적인 문제로 바로 넘어가보자. 원자 속에 들어 있는 전자는 입자일까, 아니면 파동일까? 일반적인 답은 두 가지 모두라는 것이다. 전자는 그 자체가 전체 공간에 확률 파동으로 퍼져 있는 입자이다. 보는 방법에 따라서 전자는 확실한 형태가 없는 구름처럼 보이기도 하고, 입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파동-입자 이중성은 시각화하기가 어렵거나 불가능할 수도 있다.(p32) <양자 : 101가지 질문과 답변> 中

입자는 파장을 가지고 있다. 입자는 회절과 간섭을 한다. 입자는 파동함수를 가지고 있다. 1924년 드 브로이가 유명한 방정식을 제시한 이후 양자물리학의 전체 역사는 물질의 파동성을 기반으로 발전했다. 파동이 물리적 세계의 핵심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파동이 꼭 필요할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이다. 파동-입자 이중성(wave-particle duality)은 입자가 생성되거나 소멸될 때는 입자처럼 행동하고, 그 중간에는 파동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측정은 입자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측정의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한 예측에는 파동이 이용된다. 입자는 실재(reality)를 나타낸다.(p272) <양자 : 101가지 질문과 답변> 中

우리는 미시 세계의 법칙을 거시 세계의 언어로 표현할 때, 파동-입자 이중성, 불확정성 원리 등의 복잡한 개념을 가져오게 된다. 만약 우리가 미시의 세계에 살고 있다면 그때에도 이러한 설명이 필요할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미시의 세계는 불확실성이 확실한 세계일테니까.

불확정성 원리(不確定性原理, uncertainty principle)는 위치가 더 정밀하게 결정되면 될 수록, 그 순간의 운동량은 그만큼 덜 정확하게 알려지게 되고, 그 역도 성립한다는 것이다.... 불확정성 원리는 양자물리학의 핵심이라고 알려져 있다. 고전물리학에서는 불확정성 원리에 대응하는 원리가 없기 때문이다.(p263) <양자 : 101가지 질문과 답변> 中

내가 속하지 않는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내가 알던 상식(common sense) 대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과거의 내가 부정하는 듯한 고통을 가져오기도 한다. 그렇지만, 내 자신의 고통여부와 관계없이 사실은 실재한다.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한단계 성장하게 된다.

언젠가 끈이론이 힘을 얻게 될 때의 "새로 개선된" 표준 모형(standard model)에서는 기본 입자의 수가 24개보다 줄어들 것이고, 4번째 힘인 중력도 함께 통합될 것이다.(p56)<양자 : 101가지 질문과 답변> 中

양자역학을 통해 우리는 감각 경험 (感覺經驗)이 절대진리가 될 수 없음을 확인할 수 있고, 물리학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단순한 수식(數式)이상의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물리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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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채호를 코페르니쿠스에 비유하는 것이 매우 적절하다고 믿는다. 코페르니쿠스가 남달랐던 것은 관점의 전환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이 관점의 전환 외에 다른 것들을 거의 알지 못했으며 그 나머지는 케플러와 갈릴레오와 뉴턴이 채워넣을 때까지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그럼에도 코페르니쿠스는 진정으로 위대했다. 왜냐하면 프톨레마이오스 이후 자그만치 1500년 동안 신의 법칙으로 통용되던 도그마를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신채호도 마찬가지다. 그는 최소한 중국 당나라 시대 이후 1000년 동안 동북아시아 주류 사학계 철칙으로 통용되던 사관을 한순간에 뒤집었다.(p107)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 中


  김상태의 <엉터리 사학자 가짜 고대사>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은 고조선사(古朝鮮史)를 중심으로 강단사학, 진보사학, 재야사학계가 일본의 식민사관(植民史觀)과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을 벗어나지 못한 현실을 비판한 책이다. 글에 담긴 진보적인 저자의 입장과는 달리 고조선사에서는 진보사학자들 또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들 대신 저자는 신채호(申采浩, 1880 ~ 1936) - 윤내현(尹乃鉉, 1939 ~ )이 강조한 고조선론을 재조명한다. 코페르니쿠스 - 갈릴레오로 비유될 수 있는 이들 책에서는 강단 사학계의 '소(小)고조선론'과 재야사학계의 <환단고기 桓檀古記>로 대표되는 '대동이 大東夷'론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다. 저자는 대고조선론을 고대사의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렇다면, 소고조선론과 대동이론의 문제점과 위험성은 무엇일까.


 "서기전 3세기 전후 연나라 장군 진개의 침공 이후 고조선은 무조건 평양 지역에 있었다." "고조선은 서기전 108년 평양 지역에서 망했으며 그 자리에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특히 낙랑군은 서기 후 300년까지 남아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북부를 400년간 지배했다. 이것이야말로 주류 고대사학계와 그들의 소고조선론이 지키고자 하는 핵심중의 핵심이다.(p167)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 中


 소고선론을 요약하자면, '소고선론-평양중심설'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무엇일까. 저자는 일본의 식민사관을 비판없이 수용한 남한의 고대사 연구 행태를 비판하는데, 이는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는 식민사관의 타율성론을 학계가 스스로 입증한 꼴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병도의 '소고선론-평양중심설'은 해방 이후 40년이 넘도록 주류 고대사학계의 확고부동한 통설이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고조선 이론을 받아들인 이병도의 학설을 모시는 것 말고 남한 주류 고대사학계가 해방 이후 40년이 지난 1980년대 말까지 고조선 연구에 관련해서는 한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문헌 연구든 고고학 연구든 마찬가지다.(p181)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 中


다른 한편으로, 저자는 중국 역사속에  등장한 '동이'의 개념 사용에 유의할 것을 당부한다.  <환단고기>, <이하동서설> 등의 책은  '동이- 화하(華夏)'의 패권다툼관점에서 동북아시아 역사를 바라본다. 이런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문제점은 무엇일까. 몽골족, 만주족, 일본 민족 등과 우리가 같은 민족이라는 내용까지 포함하는 이러한 주장은 오히려 우리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할 위험을 담고있다.


 동이족 東夷族은 중국 문헌에 여러 형태로 등장하기 때문에 신중하게 연구해야 할 대상이지만 다른 한편 무분별하게 남용되어 국수주의 환빠들의 개념으로 전락하기도 한다.'동이족 = 중국과 만주의 전대륙에서 활동했던 민족 = 우리 한민족'이란 등식 아래서 "중국 대륙도 본래는 동이족이 장악했던 대륙이자 사실상 우리 한민족의 땅"이라는 공식을 굳혀버린 것이다. 엄격한 역사적 논증 없이 남용된 이런 식의 판타지는 문제가 크다.(p241)... 이형구는 이 상 商(은 殷)나라가 동이족의 일파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동이족 또한 누가 뭐래도 현 중국 민족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이형구를 따르는 한 여기에도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혹시 상(은)나라와 같은 동이족이라는 우리 민족도 중국 민족의 일부가 되는 거 아닌가?(p243)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 中


 이에 대해 윤내현은 민족의 정의를 혈연이 아닌 문화(文化)를 통해 내림으로써 이들의 주장에 선을 긋는다. 에르네스트 르낭 (Ernest Renan, 1823 ~ 1892)의 <민족이란 무엇인가? Qu'est-ce qu'une nation? >의 민족 정의와 통하는 바가 있는 윤내현의 개념 정의는 맹목적 민족주의로 흐를 수 있는 위험을 차단시킨다.


 윤내현은 종족이나 혈연적 동일성을 민족의 핵심요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민족이란 우연과 필연의 역사과정 속에서 언어, 문화, 경제 등의 종합이 긴 시간동안 누적되어 '형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윤내현은 아직 의미도 분명하지 않은 동이족 개념을 중시하지 않는다.(p242)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 中


  하나의 민족은 하나의 영혼이며 정신적인 원리입니다. 한쪽은 과거에 있는 것이며, 다른 한쪽은 현재에 있는 것입니다. 한쪽은 풍요로운 추억을 가진 유산을 공동으로 소유하는 거싱며, 다른 한쪽은 현재의 묵시적인 동의, 함께 살려는 욕구, 각자가 받은 유산을 계속해서 발전시키고자 하는 의지입니다.(p80)...  인간은 인종의 노예도, 언어의 노예도, 종교의 노예도, 강물의 흐름의 노예도 산맥의 방향의 노예도 아닙니다. 인간들의 대결집, 건전한 정신과 뜨거운 심장이야말로 민족이라 부르는 도덕적 양심을 창출합니다.(p83)  <민족이란 무엇인가> 中


 이런 점에서 저자는 윤내현의 업적을 높이 평가한다. 때마침, <고조선 연구(상)> <고조선 연구(하)>는 다 읽었고, 다른 2권의 책도 최근 갖추었으니 윤내현 교수의 3부작을 이제는 읽고 정리할 일이 남았다... 여기에 더해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1893 ~ 1950)의 <조선사연구>를 읽고, 단재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조선상고문화사>를 올해안에 재독할 수 있을까... 


 윤내현은 대고조선의 필연성을 거대하고 완변한 한문체계로 완성했다. 불세출의 거인 신채호의 수원 水原으로부터 시작하여 폭포처럼 격렬한 리지린의 계곡을 지나 윤내현은 대고조선의 평온하고도 광할한 호수를 이루었다. 이것은 그의 대표 3부작 <한국고대사신론> <고조선 연구> <한국열국사연구>로 귀결된다.(p334) <한국 고대사와 그 역적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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