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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 도자기 여행>은 북유럽, 동유럽, 서유럽의 도자기 문화사를 다룬 기행문이다. 독일 마이센(Messein)으로부터 시작되는 유럽 도자기 역사는 중국의 청화백자(靑華白磁)의 수입으로부터 출발한다. 동양 도자기를 만나기 이전 유럽에는 고온을 견뎌낼 수 있는 흙이 없었기 때문에, 남유럽이베리아에서는 러스터웨어(lusteware)라는 도기가, 네덜란드 등에서는 마욜리카(majorlica)등의 자기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아름다움은 청화백자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이탈리아든 네덜란드든 유럽은 그릇 제작에 사용한 점토의 특성 때문에 흰색 도기는 꿈도 꾸지 못했다. 유럽은 1710년까지 자기 생산에 필수적인 고령토의 존재를 모르거나 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니 1,300℃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그릇을 굽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고, 그런 온도에서 휘발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안료인 파란 코발트블루의 존재도 잘 몰랐다.(p34)... 이같은 상황에서 매일같이 칙칙한 그릇만 보다가 하얀 눈처럼 우아하기 그지없는 순백색 그릇을 보았을 때 얼마나 설레었을 것인가!(p37) <유럽 도자기 여행 : 북유럽편> 中


 청화백자는 백자, 즉 하얀 자기에 푸른색 안료인 코발트블루로 그림을 그려 장식한 것을 말한다. 청화백자는 지구의 도자기 역사를 바꾸어놓은 주역이다... 유럽 왕실은 모두 청화백자에 눈이 멀어 너도나도 파란 코발트블루의 바다에 빠져들었다.(p34) 그래서 탐미주의를 대표하는 오스카 와일드(Oscar Fingal O'Flahertie Wills Wilde, 1854 ~ 1900)는 청화백자, 즉 쯔비벨무스터(Zwiebelmuster)에 대해 "일상에서 파란색 도자기를 사용할수록 그 깊은 세계에 점점 도달하기 어려워진다"고 표현했다.(p35) <유럽 도자기 여행 : 동유럽편> 中


 당시 유럽 상류층은 중국 청화백자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으나, 이를 받아들여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도자기로 생산하게 된 계기는 일본의 아리타 자기의 수입으로부터였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의 아리타 자기를 만들어낸 이는 조선의 도공 이삼평이었다. 일본에서 '도자기 전쟁 Ceramic war'으로 부른다는 '임진왜란'의 영향은 이처럼 멀리 떨어진 유럽에도 미치고 있었다.


[사진] 청화백자(출처 : 한국경제매거진)


 임진왜란 (壬辰倭亂, 1592 ~ 1598) 당시 아리타가 속해 있는 사가현(佐賀縣)의 영주였던 나베지마 나오시게(鍋島直茂, 1537 ~ 1619)는 1만2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 땅에 쳐들어왔다가 나중에 다시 일본으로 퇴각할 때 수만 명(많게는 10여만 명으로 추산)의 도공을 붙잡아와서 일본에 정착키고 자기를 만들게 만들었다. 이때 일본에 잡혀온 이삼평(李參平, ? ~ 1655)은 아리타에 있는 이즈미야마(泉山)에서 태토를 발견해 이곳에 가마를 만들고 일본 최초의 백색 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p138)... 1650년대부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의해 유럽으로 수출된 아리타 도자기는 공식 기록에 의한 것만 해도 100여년 동안 120만여 점이 넘는다고 한다.(p139) <유럽 도자기 여행 : 북유럽편> 中

 

 일본 도자기가 유럽 왕실에서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교체되는 시기에 바닷길을 막는 쇄국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도자기 제품의 수입이 끊기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일본과 베트남을 새로운 수입처로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아리타 도자기가 유럽에서 각광받게 된 것이다.(p51) <유럽 도자기 여행 : 동유럽편> 中


 실크로드(Silk Road)를 통해 중국 자기들이 들어오고, 대항해시대를 맞이하여 동양으로 진출한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대대적으로 일본 자기가 수입되면서 유럽 도자기 산업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현재 중국이 경제 성장을 위해 유럽과 미국의 선진기술을 받아들였던 그 방식 그대로 16세기 유럽인들은 모방을 통해 도자기 산업을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다. 


[사진] 유럽 도자기(출처 : 경향신문) 


 품질이 월등히 좋은 중국 자기들이 쏟아져 들어오게 되자 델프트 마욜리카 산업도 일대 변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눈높이가 높아진 소비자들을 상대로 물건을 팔려면 그들 역시 제품의 질을 높이든지, 기존의 색상을 바꾸든지 무엇인가 변해야 했다. 그러면 델프트 도공들은 과연 처음으로 어떤 일을 했을까? 가장 손쉬운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그렇다. 가장 쉬운 방법, 그것은 모방이다... 1640년부터 1800년께까지 델프트 도기들은 거의 대부분 중국 자기를 성공적으로 모방할 수 있었다.(p52) <유럽 도자기 여행 : 북유럽편> 中

 

 동유럽 편에서 누누이 살펴본 바와 같이 마이슨 도자기를 제작하게 한 작센의 군주 아우구스트 1세처럼 샹티이의 루이 앙리 왕자 역시 열렬한 동양 도자기 애호가였고, 특히 일본의 아리타 가키에몬 양식을 좋아했다. 이 점 역시 아우구스트 1세와 똑같다. 그래서 샹티이 공장의 초기 제품은 가키에몬 도자기와 거의 흡사한 '파송 드 자퐁 facon de Japon'이 생산되었다. 이들 제품은 언뜻 보면 어느 것이 아리타 자기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정도다.(p453)  <유럽 도자기 여행 : 서유럽편> 中


 이처럼 유럽 도자기는 중국과 조선, 일본의 영향을 받아 출발하였음에도 이제는 이들 지역으로 제품을 수출할 정도로 발전하게 되었음을 <유럽 도자기 여행>을 통해서 알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동양에서 출발한 도자기 산업이 유럽에서 꽃피운 이유는 무엇일까? 


아르민 클라인(Armin Klein, 1855 ~ 1883)의 인물화 도자기에는 흡사 라파엘전파의 그림속에나 나올 법한 인물들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아르민 클라인의 도자기를 보고 있으면 캔버스 대신 도자기 위에 그림을 그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을 다 그린 다음 불에 구워야 한다는 점에서, 화폭이 그리 넓지 않다는 점에서 매우 제한적이지만 도자기의 그림은 깨지지 않는 한 변색되지 않고 영원불멸한 존재로 남아 있을테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가!.(p391) <유럽 도자기 여행 : 동유럽편> 中


 동양에서 도자기는 그릇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으나, 유럽에서는 이를 넘어서 건물 외벽을 장식하는 타일을 비롯하여 도자기 위에 그림을 그리는 용도로까지 활용되었다. 아마도 이것은 신(神)의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유럽인들의 취향과 도자기의 속성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반면, 인간의 유한함을 강조하며 건물에 나무(木)을 많이 사용하는 동양 문화권에서는 서양만큼 도자기의 절대성은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용도에 제한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추측해본다.

 

[그림] 극세밀화로 복원된 황룡사 9층 목탑(출처 : 중앙일보)


 그리고, 이러한 수요(需要, demand)의 차이는 자연스럽게 경제주체들의 결합을 유도하고 그 결과가 오늘날의 유럽 도자기 산업과 우리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라 생각해 본다. 큰 시장(市場)이 있는 곳에는 생산을 위한 여러 요소들이 결합되기 마련임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기에, 20세기 소비 사회를 통찰한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 ~ 2007)의 주장은 유럽 도자기 발전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독점적 생산은 결코 단순히 재화의 생산만은 아닌, 항상 제(諸) 관계의 (독점적) 생산이며, 여러 차이의 생산이기도 하다. 따라서 거대한 트러스트와 미소(微小)한 소비자, 생산의 독점적 구조와 소비의 '개인주의적' 구조 사이에는 논리적 공범관계(共犯關係)가 존재한다. 왜냐하면 개인이 욕심부리며 '소비하는' 차이는 또한 일반화된 생산의 중요한 영역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오늘날에는 독점의 영향하에서 대단히 폭넓은 균질성이 생산 및 소비의 여러 내용(재화, 생산물, 서비스, 관계, 차이)을 결합시키고 있다.(p119) <소비의 사회> 中


 <유럽 도자기 여행>에서는 이처럼 유럽의 여러 지역의 아름다운 도자기 사진과 함께 도자기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유럽 도자기의 발전에는 우리의 아픈 역사 또한 자리잡고 있음도 우리에게 알려준다. 책을 통해 도자기라는 씨앗의 원산지는 동양이었으나, 이를 꽃피운 곳은 유럽이었음을 확인하면서 우리는 도자기 문화를 꽃피운 유럽에 대한 부러움과 함께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우리 것에 대해서 도 생각하게 된다.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은 우리 곁에 있지만, 평소에는 잘 알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자신을 잘 모르는 것은 아닐까. 


 2018년 광복(光復) 73주년을 맞아 근대화(近代化)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부정하는 뉴라이트의 역사관으로는 결코 깨달을 수 없는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을 <유럽 도자기 여행>을 통해 하면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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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7 16: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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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8 09: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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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8 23: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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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8 23: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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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8 23: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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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사 김정희>는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 ~ 1856)의 삶을 그린 평전이다. 저자인 유홍준 교수가 산숭해심(山崇海深)으로 정리한 추사의 예술과 학문세계가 시기별로 소개되고 있으며, 본문에 많은 작품이 수록되어 있어 볼거리 또한 풍부하다. 책에서 서술된 추사의 삶에서 큰 분기점을 고른다면 1809년 아버지를 따라 자제군관의 지위로 연경(燕京)을 방문하여 여러 학자들과 교류한 일과 1840년 제주도 유배 사건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연경을 방문한 추사는 담계 옹방강(覃溪 翁方綱, 1733 ~ 1818)과 운대 완원(芸臺 阮元, 1764 ~ 1849)과 특히 깊은 친분을 유지하면서, 이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추사는 완원을 스승으로 모시겠다는 뜻을 세워 자신의 아호를 완당(阮堂)이라 했고, 연행 후 중년으로 들어서면서 추사보다 완당이라는 호를 더 많이 사용했다.(p71) <추사 김정희> 中


 연경 방문 이후 추사는 청나라 학자들과 지속적인 교류를 하게 되었다. 이는 추사의 학문과 예술세계를 깊게 한 반면, 다른 이들로 하여금 추사가 거만하다는 인상을 갖게 하는 악영향을 주기도 한다. 제주도 유배 이전 추사의 글씨는 중국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았는데, 이러한 그의 서체는 한 세대 이전의 서예가 원교 이광사(員嶠 李匡師, 1705 ~ 1777)와 많이 비교되었다. 저자는 두 사람의 서체를 다음과 같이 비교한다. 


  원교의 <대웅보전>과 추사의 <무량수각> 두 글씨는 두 사람의 세예 세계가 얼마나 달랐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무량수각>은 기름진 획의 예서풍 글씨이고 <대웅보전>은 굳센 획에 리듬이 있는 해서체이다.(p243) <추사 김정희> 中


 추사는 자신과 다른 서체를 가진 원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는데, 제주도 유배 이전 대흥사에 들려 원교가 쓴 "대웅보전(大雄寶殿)"의 현판을 내리게 할 정도로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우리는 청명 임창순(靑溟 任昌淳, 1914 ~ 1999)의 글에서도 원교에 대한 추사의 박한 평가를 확인하게 된다.

 

 김정희는 <서원교필결후 書員嶠筆訣後>에서 "세상 사람은 원교의 글씨 이름에 떨려서 그의 학설을 절대적인 것으로 신봉했다" 하였으며(p226)... <서결 書訣>에 대하여 거의 완전한 곳이 없을 정도로 혹평하였다.(p227) <청명 임창순> <원교 이광사전(員嶠 李匡師展)에 부침>中


 자부심이 강한 김정희에게 제주도 유배는 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지금은 비행기로 편하게 갈 수 있는 제주도는 과거에는 높은 파도와 잦은 풍랑등으로 쉽게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지난 2016년에 제주도에 배를 타고 갈 일이 있었다. 큰 배였음에도 비가 날리는 검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추사가 살았던 과거에는 어떠했을까. 


[사진] 추사는 저 검은 제주도 바다 저편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by 겨울 호랑이)


 제주는 옛 탐라인데 큰 바다가 사이에 끼어 있어 이곳을 건너가려면 보통 열흘에서 한 달 정도가 소요되곤 했다. 그런데 공이 이곳을 건널 적에는 유독 큰 파도 속에서 천둥 벼락까지 만나 죽고 사는 것이 순간에 달린 지경이었다.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고 서로 부둥켜안고 통곡했고, 뱃사공도 다리가 떨려 감히 전진하지 못했다.(p245) <추사 김정희> 中


 들어가는 것만큼 험난했을 약 10여년의 제주도 유배생활을 통해 추사는 자신만의 필체인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하게 되었다. 걸작 <세한도 歲寒圖> 또한 이 시기에 그려진 것을 생각해본다면, 제주도 유배 시기를 통해 김정희는 청나라의 영향을 받던 '완당'에서 '추사'라는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음을 확인하게 된다.


[사진] 세한도 (출처 : 위키백과)


 서체의 기본은 해서(楷書)와 행서(行書)인데 (제주도) 유배 이후 추사의 간찰 서체에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점점 금석기와 예서의 맛이 들어가면서 필회개에 강약의 리듬이 강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편지의 글씨들은 한마디로 해서, 행서, 예서(隸書)의 필법이 서로 뒤엉켜 있는 듯하다. 그럼에도 아무 잘못이 없고 오히려 필획의 굳센 느낌만 강하게 다가온다.(p344) <추사 김정희> 中


 제주도 유배 이후 추사는 자신의 세계를 구축했을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의 예술 세계를 인정하는 넓은 마음도 갖추게 되었다. 제주 유배 이전 비판했던 원교의 <대웅보전> 글씨도 다시 달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는 추사의 모습 속에서 한결 원숙해진 대인(大人)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원교는 원교대로 한 생(生)이 있고, 나름의 성취가 있었음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 내가 원교의 시절에 태어났으면 원교만 한 글씨를 썼을 것인가. 사실 원교가 왕희지를 따른 것 자체야 잘못이 없지 않은가. 세상이 의심하지 않은데 어떻게 원교만이 그것이 왕희지의 진품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겠는가.'(p356)<추사 김정희> 中


 추사의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준 제주도 유배를 통해 플라톤(Platon, BC 427 ? ~ BC 348 ?)이 말한 '동굴(spelaion)의 비유'를 떠올리게 된다.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평생을 어둠 속에서 묶여 있다가 지내던 이가 동굴 밖의 햇빛을 바라보게 되는 상황을 <국가>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가령 이들 중에서 누군가가 풀려나서는, 갑자기 일어서서 목을 돌리고 걸어가 그 불빛 쪽으로 쳐다보도록 강요당할 경우에, 그는 이 모든 걸 하면서 고통스러워할 것이고, 또한 전에는 그 그림자들만 보았을 뿐인 실물들을 눈부심 때문에 볼 수도 없을 걸세.(515c)... 그러나 만약에 누군가가 그를 이곳으로부터 험하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통해 억지로 끌고 간다면, 그래서 그를 햇빛 속으로 끌어내 올 때까지 놓아 주지 않는다면, 그는 고통스러워하며 또한 자신이 끌리어 온 데에 짜증을 내지 않겠는가?(515e)... 그러기에, 그가 높은 곳의 것들을 보게 되려면, 익숙해짐(synetheia)이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하네.(제7권 515e) <국가, 정체> 中  


 추사가 기득권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보지 못했을 보다 넓고 큰 경지를 제주도 유배를 통해 끌려 가서 보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또한 그 시기가 10여년이 되었기 때문에 그가 바라본 아름다운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도 유배 시기는 추사에게 '고통스럽지만 진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단련(鍛鍊)의 시기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추사 김정희>에서 저자는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 1720 ~ 1799) 일화를 서두에 언급하면서 그의 파란만장했던 생애가 그의 뛰어난 글씨를 연계하는 분위기를 피워낸다. 만약, 추사가 글씨를 쓰지 않고 사상가로 남았다면 그의 인생은 편안했을까?


 김노경이 우리 집 아이의 글씨라고 대답하자, 채제공이 말하기를 "이 아이는 필시 명필로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이오. 그러나 만약 글씨를 잘 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마시오. 그러나 만약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하면 크게 귀하게 되리라" 했다고 한다.(p30)... 추사가 글씨를 잘 쓰게 되면 운명이 기구할 것이나 문장으로 나아가면 크게 귀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의 속뜻은 과연 무엇일까?(p31) <추사 김정희> 中


 글씨를 쓰면 기구한 운명이 될 것이나, 문장에 전념하면 이름을 떨칠 수 있다는 채제공의 예언은 분명 흥미로운 부분이 있지만, 추사의 글씨와 학문을 분리해서 봐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추사의 글씨가 그의 학문 세계를 담아내기 때문이 아닐까.


 금강산의 만이천봉은 모두가 절경이며 볼 적마다 새로운 것처럼 추사(秋史)의 글씨도 얼핏 보면 비슷한듯하나 모두가 특수한 형태를 지니고 웅장한 만폭, 구룡이나 섬세한 만물상처럼 볼 적마다 보는 사람의 넋을 뺏고 만다. 그러므로 몇 번을 거듭하더라도 또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추사(秋史)는 명필이기에 앞서 대경학자(大經學者)이다. 학자로서의 성과는 오히려 글씨에 묻혀서 바로 아는 사람이 적다. 저술을 많이 남기지는 않았으나 그는 중국에서 들어온 고증학을 집대성한 학자다. 그러므로 글씨가 학문에 근거를 두지 않은 것은 거의 없다.(p220) <청명 임창순> <추사 김정희 명작전(秋史 金正喜 名作展)>中


 <추사 김정희> 뒷부분에는 과거 <완당평전>을 저술했던 저자가 이를 절판시킬 수 밖에 없었던 사연과 <추사 김정희>를 쓰게 된 이유 등이 담겨 있다. 그러한 사연 때문일까. 책을 읽으면서 과거 청나라의 영향을 받던 '완당'이 자신만의 세계를 갖춘 '추사'로 거듭나는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추사 김정희>속에서 뛰어난 학자이자 예술가의 모습과 함께 시간에 따라 원숙해지는 한 인간의 모습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기에 추사에 대한 좋은 평전이라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좋은 책을 선물해주신 이웃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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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2 22: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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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2 22: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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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2 23: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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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2 23: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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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8-05-22 2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추사가 제주 갔다 오면서 인물 됨됨이로서도 학자로서도 완성되는 부분이 너무 감동스럽더라고요! 사과를 받아줄 사람들이 그 자리에 없었던 게 슬프던;_;)! 추사 글씨는 볼 때마다 어줍잖게 따라하고 싶어서 근질근질ㅜㅋㅜ)...뭐 나만 그런 건 아니니까ㅎㅎ;;...일단 벼루 열 개를 아작내고 붓 천 개를 몽당붓으로 만들어야 가능하다는데ㅎㄷㄷ

겨울호랑이 2018-05-22 22:46   좋아요 1 | URL
정말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모님 살아계실 때 효도하란 말도 있는 것 같아요. 이젠 AgalmA님의 ‘1일 1글씨‘ 개봉인가요? 기대해 봅니다!^^:) 생각해보니 「세한도」처럼 ‘1일 1그림‘에 추사체로 작품 설명을 ‘시‘로 하시면 3박자를 갖춘 예술 작품이 되겠어요!

AgalmA 2018-05-22 22:57   좋아요 1 | URL
안 그래도 글을 담은 문인화처럼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긴 했는데 까마득한 저의 실력에ㅜㅜ....

겨울호랑이 2018-05-22 23:02   좋아요 1 | URL
태어나면서부터 문인이 있나요?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겠지요. AgalmA님의 도전을 응원합니다!^^:) 참, 음악까지 넣으면 거의 4D수준의 예술이.... 겨울호랑이님께서 AgalmA님께 부담을 백배로 선믈하셨습니다 ㅋㅋ

AgalmA 2018-05-22 23:14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님이 옹방강과 완원의 역할을ㅎㄱㅎ!
얘얘~ 연의 가르치기도 힘든 분이야...ㅎㅎ;

겨울호랑이 2018-05-22 23:17   좋아요 1 | URL
ㅋㅋ 저는 믹스커피를 즐겨마시는초의선사 역을 맡겠습니다.

2018-05-22 23: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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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2 23: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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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경시대(眞景時代)라는 것은 조선 왕조 후기 문화가 조선 고유색을 한껏 드러내면서 난만한 발전을 이룩하였던 문화절정기(文化絶頂期)를 일컫는 문화사적인 시대 구분 명칭이다. 그 기간은 숙종(1675 ~ 1720) 대에서 정조(1777 ~ 1800)대에 걸치는 125년간이라 할 수 있는데 숙종 46년과 경종 4년의 50년 동안은 진경문화의 초창기라 할 수 있고, 영조 51년의 재위 기간이 그 절정기이며 정조 24년은 쇠퇴기라 할 수 있다.(p13) <진경시대 1> 中


 <진경시대 1>과 <진경시대 2>는 조선 시대 후기에 해당하는 시대를 미술사(美術史)적 측면에서 분석한 책이다. 또한, 이 시기는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 ~ 1759)으로 대표되는 진경산수화와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 ~ 1806)로 대표되는 풍속화의 시대이기도 하다. 

 

조선후기의 산수화에서 남종화풍과 함께 더 없이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은 진경산수화의 발달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우리 나라에 실제로 존재하는 명산승경(名山勝景)을 소재로 하고 남종화법에 토대를 둔 한국적 화풍으로 그려낸 것이 이른바 '동국진경(東國眞景)', 즉 진경산수화다.(p492) <한국 미술의 역사> 中


 조선 후기의 회화에서 또 한 가지 지극히 중요하게 평가되는 것은 풍속화의 발달이다.(p503)... 그런데 이 시대의 풍속화는 비록 다루는 주제는 달라도 우리 주변을 관찰하여 주제를 포착하고 사실적 표현을 기본으로 하여 그리되 예술적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진경산수화와 기본적으로 공통성을 띠고 있다.... 조선시대의 회화에서 보편적으로 확인되듯이 풍속화도 초기 단계에서는 공재 윤두서, 관아재 조영석 등의 사대부 화가들이 그리기 시작하여 그 기초를 다졌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기반 위에 김홍도, 김득신, 신윤복 같은 탁월한 화원들이 출현하여 높은 수준의 발전을 이룩했던 것이다.(p504) <한국 미술의 역사> 中


 고등학교 때까지 조선 후기 회화풍에 대해 관념(觀念)적이며 이상(理想)적 산수를 그렸던  조선시대 전기와는 다른 화풍(畵風)이 이 시기를 대표하는 진경산수화라는 사실, 그리고 이러한 화풍이 조선 후기 시대정신의 변화로부터 발생했다는 정도로 배워왔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여기에 실학(實學)사상과 결부시켜 이를 조선시대 근대사상이 싹튼 근거로 제시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지만, <진경시대>는 이와는 다른 사실을 말해준다. (물론, 내가 수업시간에 졸아서 잘못 기억했을 수도 있다...)


 율곡은, 일찍이 금강산으로 출가하여 불교 대장경(大藏經)을 섭렵함으로써 주자성리학의 우주론적 철학체계의 원형인 불교철학을 근본적으로 관통한 실력을 바탕으로, 퇴계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이기의 상호작용이라 할지라도 기(氣)만이 작동하고 이(理)는 기에 편승할 뿐이라는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을 주장하여, 만물의 성정이 기(氣)의 변화에 따라 결정된다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으로 심화시켜 놓는다. 결국 이(理)는 만물이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인데 기(氣)만 대상에 따라 국한됨으로써 만물의 차별상이 나타난다는 주장이니, 이를 이통기국설(理通氣局說)이라 한다. 이는 분명 주자가 아직 발명해내지 못한 심오한 학설이었고 주자성리학이 도달해야할 궁극의 경지이기도 하였다.(p15) <진경시대 1> 中


 다소 거칠게 표현해서, 이(理)를 보편/추상적인 원리라 하고, 기(氣)를 감각적/개별적인 존재라고 했을 때, 율곡의 사상은 보편적인 이(理)가 대상에 따라 기(氣)로 다르게 표현된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통국기설이라는 결론에 이른 조선성리학은 이론적으로는 완벽을 구가한 상태라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조선이 처한 현실은 이와는 달리,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을 겪으며 청(淸)나라에게 항복하고, 당시 황제국이었던 명(明)은 멸망을 당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조선의 사상은 어디로 흘러갔을까.


 문화적으로 우리보다 열등한 여진족이 무력으로 중국을 차지했다 해도 중화의 계승자가 될 수 없는데, 하물며 그 야만 풍속인 변발호목(辮髮胡服)을 한민족(漢民族)에게 강요하여 중화문화 전체를 야만적으로 변질시켜 놓았으니 중국에서는 이미 중화문화 전통이 단절되었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니 중화문화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주자성리학의 적통(嫡統)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조선만이 중화문화를 계승할 자격을 갖추었으므로 이제 조선이 중화가 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었다.(p22)... 이로 말미암아 조선이 곧 중화라는 조선중화주의가 조선사회 전반에 점차 팽배해 가기 시작하였다. 이제 조선이 곧 중화라는 주장을 떳떳하게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조선 고유문화를 꽃피워내는 데 조금이라도 주저할 리가 있었겠는가.(p23) <진경시대 1> 中


 종주국(宗主國)인 명이 멸망한 상태에서, 유일하게 남은 중화(中華)의 적통은 소중화(小中華)였던 조선에게만 흐른다고 판단한 것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 ~ 1689)을 중심으로 한 노론(老論)의 당론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이 조선 후기미술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진경시대>의 공저자 중 한 명(최완수)은 말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저자는 우리 산수(山水)에 대한 실질적인 관심의 근원은 소중화 사상과 주리(主理)적인 사상이 바탕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와는 다른 견해를 보이는 또 다른 연구자(유봉학)의 관점도 우리는 같은 책 <진경시대 2>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저자에 따르면 조선시대 풍속화의 경우 조선시대 선비(士)의 기득권이 붕괴하면서, 이른바 '선비의식'의 확산 결과로 조선 후기 풍속화는 독자적인 양식을 수립할 수 있었다.


이 시기(정조 대) 풍속화의 유행은 사(士)의식과 사인적 생활을 공유하는 사계층이 확산되면서 사로서의 소속감을 가졌던 화원화가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풍속화에는 그들의 자아의식과 생활경험이 투영되었다. 더구나 이제는 속태를 해학적으로 묘사하는 가운데 색태를 추구하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 점차 풍속화의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풍속화의 새로운 면모는 순조대 이후 조선의 주자학적 질서가 전면적으로 동요하는 가운데 더욱 심화되었다.(p256) <진경시대 2> 中


 풍속화의 이러한 변천은 조선 후기 사회와 사상의 변화에 조응하는 것이었다. 조선사회를 지탱하던 주자하적 명분론과 문화자존의식이 무너졌으며 조선사회를 이끌었던 사의 위상이 변화하고 사의 확산으로 사와 민이 혼효되는 가운데 사의 그림이었던 동국진경도 변화해 갈 수 밖에 없었다.(p256) <진경시대 2> 中


 이러한 연구자들의 의견을 대략적으로 종합해보면, 조선 후기 회화의 대표적 화풍인 '진경산수화'와 '풍속화'는 함께 피어났다기보다는 일종의 대체적인 화풍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산수에 관심을 가졌던 '동국진경'은 당시 선비들의 중화사상의 결과물인 반면, 선비의식의 확산으로 민(民)의 작품인 '풍속화'가 산수화에 영향을 미쳤다면, 이들은 '같은 듯 다른' 출발점을 가진 화풍이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이와 다른 견해를 보이는 미술사학자들도 있다.) 


 <진경시대1> <진경시대2>에는 이처럼 여러 연구자들이 조선 후기 미술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들이 담겨있다. 또한, 우리에게 익숙한 故 오주석(1956 ~ 2005) 교수의 단원 김홍도에 대한 연구 결과도 담겨 있어 반가운 마음이 들게 된다. <진경시대> 시리즈의 장점은 다양한 시각에서 조선 후기 미술을 보여준다는 점이라 여겨진다. 그래서 내용 면에서 다소 딱딱할 수는 있지만, 크게 지루하지 않게 조선 후기 미술을 훑어볼 수 있는 책이라 여겨진다.


 <한국미술의 역사>에 담긴 대표적인 진경산수화 작품과 풍속화 작품 설명을 마지막으로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그림] <금강전도> (사진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321866704600232541/)


 <금강전도(金剛全圖)>(1734)는 금강산을 부감법으로 조망한 그림으로 원형구도를 보여준다. 왼편 아래쪽에 나무가 우거진 토산들을 배치하고 오른편 대부분의 화면에는 첨봉(尖峰)의 다양한 암산들이 빽빽이 서 있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그림 맨 위쪽 끝에는 비로봉을 묘사하였다. 이 산들과 하늘이 마주치는 여백의 가장자리에는 연한 푸른색을 칠하여 허공을 나타냄과 동시에 첨봉들의 모습이 더욱 부각되도록 하였다. 이처럼 원형 구도, 암산과 토산의 대조, 부감법의 활용 등을 통해서 넓은 면적의 금강산을 일목요연하게 엿볼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토산의 표현에는 일종의 피마준과 태점(苔點)을, 암산의 묘사에는 가늘고 날카로운 수직준(垂直皴)을 구사하여 산들이 지닌 특성과 형태상의 다양함을 능란하게 묘사한 점이 주목된다. 화면 전체에는 이 때문에 힘찬 생기가 넘쳐 흐른다. (p493) <한국 미술의 역사> 中



[그림] 밀희투전 (사진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342766221616682106/)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 1754 ~ 1822)의 <밀희투전(密戱鬪戰)>은 특히 인물묘사의 뛰어남을 보여준다.  앞편의 인물들보다 뒤편의 인물들을 크게 그려서 역원근법을 나타낸 것은 전통과 관계가 깊지만 돋보기를 쓴 인물의 출현은 북경을 통해 들어온 새로운 서양 문물의 영향을 말해준다. 오른쪽 위의 개평꾼인 듯한 인물은 눈이 거슴츠레한 모습이어서 밤늦도록 계속되는 투전판의 열정과 피로를 느끼게 한다. 그의 뒤편에 놓여 있는 술상은 이러한 노름판의 분위기를 더욱 돋구어 준다. 인물들의 동작과 표정이 능숙한 솜씨로 묘사되어 있다.(p514) <한국 미술의 역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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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3-27 15: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공기가 좋은 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
겨울호랑이님,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오후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18-03-27 17:38   좋아요 1 | URL
미세먼지가 오늘도 심하네요.. 서니데이님도 건강한 하루 되세요^^:)
 

1. 사진(寫眞) : 사실(事實)의 기록 


 사진은 어떤 매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진은 여러가지 모습을 가진 종합 예술이기 때문에, 하나로 규정하기는 어렵고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여러 책 속에 나타는 '사진'의 모습 속에서 어렴풋하게나마 그 윤곽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수전 손택(Susan Sontag, 1933 ~ 2004)의 <타인의 고통 Regarding the pain of others>를 통해서 우리는 사실(事實)의 기록으로서 사진을 바라볼 수 있다.


'훨씬 더 속을 뒤집어 놓는 것은 자신들이 곧 죽게 될 것을 아는 사람들을 보게 될 때이다. 프놈펜 교외의 툴슬렝에 있는 어느 고등학교를 개조해 만든 비밀 감옥, 즉 "지식인"이라거나 "반혁명분자"라는 죄목으로 갇혀 있던 1만4천여 명 이상의 캄보디아인들이 살육된 이 감옥에는 1975년부터 1979년 동안 이곳에서 찍은 6천여장의 사진들이 은닉되어 있다. 크메루주가 행한 잔혹상을 기록할 특권을 누렸던 이 자료의 기록자들은 제 자리에 앉은 채 자신의 눈 앞에서 진행되는 처형 과정을 사진에 담았다. 훗날 몇 십년이 지난 뒤, 우리는 이 사진들을 발췌해 모아 놓은 <살육의 들판>이라는 책을 통해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는 얼굴들, 그래서 우리 자신들을 응시하고 있는 얼굴들, 그래서 우리 자신들을 응시하고 있는 얼굴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p95)'


 툴슬렝 감옥에 대한 사진과 사진에 대한 설명을 통해 우리는 '킬링 필드 Killing Field'의 처참한 살육현장 기록과 이에 대한 증거로 사진을 바라보게 된다. 


'폴 포트 정권 시기의 캄보디아에 세워진 툴슬렝 감옥은 'S-21 형무소'라고도 불렸다. 이곳에 수감됐다가 생존한 사람은 7명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이곳은 기념관으로 개조되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다. -<타인의 고통> 中 -



[사진] 엠 에인, <무제>, 툴슬렝 감옥, 1975 ~ 1979


 갓난 아기를 안고 무심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여인, 눈에 공포의 빛을 드리운 채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한 중년 남자의 모습은 그 자체보다 죽음을 눈 앞에 둔 상황에서 우리에게 의미있는 존재로 다가온다. 사진 속에서 이들은 '툴슬렝의 희생자들'라는 집합체(集合體)로서만 우리에게 인식된다.  

 

 '이 감옥에서 사진을 찍었던 인물의 이름은 잘 알려져 있으며, 우리는 그 사진 작가의 이름을 언급할 수도 있다. (그의 이름은 엠 에인이다.) 이와 반면에 그가 찍은 사람들, 그러니까 여윈 몸에 걸쳐진 상의 위쪽에 번호표를 달고 아연실색된 얼굴을 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일종의 집합체로만 존재한다. 즉, 익명의 희생자들로만. 게다가 그들의 이름이 명명되었을지라도, 그 이름이 "우리"에게까지 알려져 있을 것 같지는 않다.(p96)


 전쟁을 배경으로 한 기록사진들은 '사실'이 전제되지 않으면,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그리고, 사진 속의 인물과 사건들은 이러한 사건의 증거로서 의미를 지닌다. <타인의 고통>은 '사실의 충실한 재현'이라는 관점에서 사진을 해석하고 있는 작품이지만, 사진의 의미는 여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2. 사진(寫眞) : 마음의 기록


<타인의 고통>에서 소개된 사진들을 통해서 우리는 거의 동일한 감정(感情)을 공유하게 된다. 사진을 보는 사람들의 성(性), 연령, 직업, 정치 성향에 관계없이 참혹한 현실에 대해 가슴 아파하는 것은 공통된 감정일 것이다. 그래서, 전쟁이라는 것이 결코 <아이언맨>에서 나오는 전투장면처럼 화려한 장면이 아니라는 것을 감상자에게 깨닫게 한다면, <寫眞, 말 없는 詩>와 <소리 없는 빛의 노래> 속의 사진은 이와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엠 에인의 <무제>에서 사실(reality)의 여부는 사진이 주는 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카메라의 대상이 누구인가 여부는 사실 그렇게 큰 의미를 주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그렇지만, 에세이와 시의 형태와 결합된 사진 작품 속에서 우리는 사진 속의 대상이 개별자(個別者)로서 존재(存在) 의미를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타인의 고통> 속 작품과 <사진, 말 없는 이야기>와 <소리 없는 빛의 노래>가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라 생각된다.


[사진1] (출처 : http://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9966164&memberNo=34220424)


[사진2] 출처 : [사진1] (출처 : http://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9966164&memberNo=34220424)


 같은 대상을 보더라도 감상자는 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기도 하고, 지나쳐 버리기도 한다. <사진, 말없는 시>와  <소리없는 빛의 노래>는 감상자의 서로 다른 배경에도 불구하고, 작가와의 대화가 책을 통해 이루어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피사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가의 노력과 독자와 소통하는 시(詩)와 에세이(essay)의 장르 특성이 결합되어 책 전반에 사람의 온기가 도는 따뜻한 감성이 전달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최근 읽은 <사진에 관하여>와 <타인의 고통> 속에서 저널리즘(Journalism)의 매체로서 사진에 대해 알게 되었다면, <사진, 말 없는 시>와 <소리 없는 빛의 노래>를 통해서는 감성의 매체로서 사진을 확인하게 된다. 사진의 성격을 하나로 단정지을 수는 없겠지만, 사진의 다양한 모습을 확인하면서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최근 얻은 작은 소득이 아닐까 생각된다. 항상 많은 도움을 주시지만, 특히 '사진'의 세계로 항상 잘 이끌어 주신 '유레카'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PS. 같은 대상에 대한 다른 해석의 사례로서 <소리 없는 빛의 노래> p34에 있는 '침묵에 대한 저항'과 <사진, 말 없는 시> p104에 실려있는 사진을 비교해서 보는 것도 재미있었다. 같은 대상을 두고도 작가의 서로 다른 관점을 확인하면서 '정답이 없는'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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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2 21: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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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2 21: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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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11-12 22: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올해 헌책방에서 <타인의 고통>을
사기는 했는데 완독에는 이르지 못했네요.

그냥 궁금한 것이 수잔 손택은 사진을 미디
엄으로 분석하는 일에는 능통했지만 과연
자신이 직접 사진을 현상하고 인화하기도
해봤는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도 하나의 노동일진대 노동은 배제하
고 컨텐츠 분석에만 집중한 게 아닌가 하
는 그런 생각입니다.

겨울호랑이 2017-11-12 22:46   좋아요 1 | URL
레삭매냐님 말씀을 듣고 보니, 수잔 손택의 글 중에는 ‘사진‘의 해석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예술작업으로서 사진에 대한 관점도 있겠군요. 레삭매냐님 생각치 못한 부분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2017-11-12 2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12 23: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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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3 00: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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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3 06: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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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4 11: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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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4 12: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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