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이란 무엇인가? 난리가 일어난 뒤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그중에는 난리 전의 일도 가끔 기록하여 난리가 시작된 근본을 밝히려 하였다. (중략)... 「시경」에 ˝내가 앞의 잘못을 징계하여 후의 환란을 조심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징비록」을 지은 이유이다.(p77) 「징비록」중

며칠전 우연히 1학년 학습 과정 중 ‘일기쓰기‘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창고에서 오래전 쓴 일기를 찾았습니다. 1981년부터 1983년까지 쓴 일기묶음을 꺼내어 내용을 읽어보니 어린시절의 제가 낯설게 다가옵니다^^:)

그중 일부를 사진으로 옮겨봅니다.

나중에 연의와 함께 일기를 읽어봐야겠습니다. 별 재미는 없겠지만, 아이눈에 37년 전 자기 또래 아빠는 어떻게 비춰질까요. 아이에게도 제게도 의미있는 경험이 될 것 같아 기대됩니다. 연의도 재밌게 여기고 일기를 즐겁게 쓴다면 더 좋겠지요.^^:)

마지막 글은 어머니가 제 일기를 보시고 격려해 주신 글입니다. 어머니의 관심과 보살핌 덕분에 일기를 쓸 수 있었기에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일어납니다. 저도 연의에게 어머니와 같은 사랑을 베풀 수 있을지 생각해 봅니다.

1982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저는 놀러가지 못해 아쉬워했네요. 내일 연의와는 즐겁게 놀아야겠습니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이 현재의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느끼면서, 새삼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E.H.카의 유명한 말을 떠올리게 됩니다.

인간이 과거의 사회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리고 현재의 사회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증대시키는 것, 이것이 역사의 이중적 기능이다.(p87)「역사란 무엇인가」중

ps. 연의에게 ‘~읍니다‘는 ‘~습니다‘로 알려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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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텔게우스 2019-05-04 16: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잉 당시 아이들 사이에서는 제갈공명이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던 걸까요..?ㅋㅋㅋ 흥미롭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5-04 16:56   좋아요 2 | URL
^^:)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새롭네요. ㅋ 아마 저 일기장 중 어느 페이지에는 학교 괴담 이야기도 적었던 기억이 있습니다만 아직 못 찾았습니다. 일기를 보니 제가 알고 있는 제 자신의 모습과는 많이 다른 내용이 적혀 있어 나름 읽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hnine 2019-05-04 18: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가보란 이런것 아닐까요.
1학년 글씨가 어른 글씨보다 나아요.
또박또박 글씨체에서 성격도 보이는것 같고요.^^

겨울호랑이 2019-05-04 22:25   좋아요 1 | URL
hnine님 말씀처럼 개인적으로는 집에서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보물입니다. 그때는 졸린 눈 비벼가며 나름 정성들여 썼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어설프기만 합니다. 저는 쑥스럽기만 한데, 부족한 어린이 글을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갱지 2019-05-04 18: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반듯한 글씨가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단정하고 똑똑한 어린이가 상상되어 미소짓게 되네요:-)!

겨울호랑이 2019-05-04 22:50   좋아요 2 | URL
제가 보기엔 글씨가 많이 비뚤어지고 크기도 제각각이어서 부족함이 보이는데, 갱지님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알벨루치 2019-05-04 19: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일기장이 남아 있군요! 우아~기록이 역사입니다. 필체도 징비록감입니다 이라믄서 ㅋㅋ

겨울호랑이 2019-05-04 22:51   좋아요 2 | URL
네 창고에서 발굴했습니다.ㅋ 지금 연의와 일기를 같이 읽었는데, 자신도 바로 일기를 쓴다고 하네요 카알벨루치님 감사합니다!^^:)

태인 2019-05-04 21: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 제갈씨들이 제법 있어서 제갈공명이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한 것 아닐까요. 제가 국민학교 다닐때 시골이었는데도 제갈씨를 많이 볼 수 있었거든요.

겨울호랑이 2019-05-04 22:53   좋아요 2 | URL
태인님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성씨 중 선우씨, 황보씨, 서문씨, 독고씨 등 2자 성을 가진 이들이 학교에 있어서 아이들 관점에서 그런 주장이 통했을 것 같습니다.^^:)

timeroad 2019-05-04 23: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해주는‘ 날이다. 라는 대목이 와 닿네요. 즐겁게 하는 날을 선물하기를!

겨울호랑이 2019-05-04 23:39   좋아요 1 | URL
timeroad님 말씀처럼 이제 어른이 되고 보니 어린이들에게 즐거움을 선물해야겠습니다. 딸을 위해서 과거의 아빠가 현재의 아빠에게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timeroad님께서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

붕붕툐툐 2019-05-05 09: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겨울 호랑이님, 어린 시절부터 글쓰기가 남달르셨네요. 짧은 글에서도 많은 것이 느껴집니다.
마지막 어머님의 격려글도 참 인상적이네요~ 글씨도 잘 쓰시고 내용도 멋지고, 무엇보다 초등학생 자녀를 대하는 태도에서 존중감이 가득 묻어나네요.

겨울호랑이 2019-05-05 09:2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붕붕툐툐님.^^:) 그렇지만, 솔직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앞뒤 연결도 안되는 평범한 어린이의 일기에 불과합니다. 말씀하신 대로 일기 사이에 쓴 글을 읽으면서 저도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syo 2019-05-05 1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국민학교 1학년짜리 일기장에 삼국지와 제갈량이라니, 역시, 어린 호랑이님 떡잎 좀 보소!!

겨울호랑이 2019-05-06 09:41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일기장에 그런 내용이 있었네요. 그래봤자 어린이가 만화 「삼국지」나 읽었겠지만요.^^:)

cyrus 2019-05-06 09: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의 글을 읽으니까 오랜만에 저도 책상 서랍 속에 묵혀둔 일기장을 꺼내 보고 싶어져요. 저도 어린이날에 부모님과 함께 외출을 한 기억이 많지 않아요. 일단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일기장을 보면 알겠죠. ^^

겨울호랑이 2019-05-06 09:40   좋아요 0 | URL
일기에 적혀 있는 제 모습과 어린 시절에 대한 제 기억이 다를 때가 많습니다. 이런 것이 일기를 읽는 재미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2019-05-07 13: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07 14: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양이는 본능적으로 물에 젖는 것을 싫어하므로 최대한 짧은 시간 안에 끝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되도록이면 자묘일 때부터 습관을 들여 목욕에 대해 거부감이 들지 않도록 해주세요.(p76)

물을 피하는 귀요미가
물 위를 서성인다

물을 부어주자
물려 버렸다
물에 담가버릴테다

고양이를 씻길 때마다 벌어지는 소란은 피할 도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한바탕 전쟁을 치루고 이렇게 하루를 마무리 합니다. 저는 귀요미 목욕 후「용쟁호투」의 이소룡처럼 되버렸지만, 이웃분들 모두 5월의 첫 연휴 잘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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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5-03 22: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고양이 세수란 말이 있나보네요. ㅋ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

겨울호랑이 2019-05-03 22:46   좋아요 1 | URL
녀석 끊임없이 혀로 핥으며 나름 씻긴하는데, 눈꼽이 잔뜩 낀 것을 보면... 키워보니 ‘고양이 세수‘의 의미가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북다이제스터님께서도 연휴 잘 보내세요!^^:)

2019-05-04 08: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04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bookholic 2019-05-04 1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새 많이 컸네요.
겨울호랑이님의 사랑이 느껴지는 고양님의 자태입니다^^ 즐거운 연휴 되세요...

겨울호랑이 2019-05-04 15:0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아직 1년 미만인데 크기는 성체가 다 된 것 같네요. 어린 생명들은 사람이나 고양이나 참 빠르게 성장하는 것 같습니다. bookholic님께서도 자녀분들과 함께 행복한 연휴 되세요!^^:)

2019-05-04 14: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04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04 15: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04 16: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동안 연락이 뜸하던 친구, 선후배에게 갑자기 전화연락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구나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겪는 일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많은 분들도 알고 있지만, 갑자기 걸려온 전화는 반가움도 있지만, 동시에 부탁에 대한 부담감도 가져다 줍니다.  어제 오랫만에 걸려 온 후배의 전화도 안타깝지만, 부탁의 전화였습니다. 여러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서 많이 부끄럽지만, 힘든 부탁을 한다는 후배의 말로 오랫만의 통화는 이어졌습니다. 후배와 통화를 잘 마친 후 밤에 여러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일부의 생각을 이번 페이퍼에 올려봅니다.

 

 孟子曰:惻隱之心,人皆有之;羞惡之心,人皆有之 ... 惻隱之心,仁也;羞惡之心,義也... 仁義禮智,非由外鑠我也,我固有之也,弗思耳矣 측은지심은 인간이라면 예외없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요, 수오지심 또한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요... 측은지심은 인의 발로이며, 수오지심은 의의 발로이며,,, 인/의/예/지라 하는 것은 밖으로부터 나에게 덮어씌워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래 가지고 있는 것이다.<맹자 孟子> <고자장구 告子章句 상 上 6a-5> 中 (p620) 


  맹자(孟子, BC 372 ~ BC289) 는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은 각각 인 仁과 의 義의 단서이며, 사람은 누구나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제 경우에 비춰보면,후배의 딱한 처지를 들었을 때 저는 '측은지심'이, 후배 마음에는 '부끄러움(수오지심 ?)'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어려운 처지에 있을수도 있기에 이것을 '부끄러움'이라고 표현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저를 포함한 누구나 후배처럼 어려운 처지에 몰릴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 삶은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을 주고 받는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주고 받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사단'을 가지고 있어야겠지요.  '사단' 하면 우리에게는 '사단칠정논쟁 四端七情論爭'이 익숙합니다.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1527 ~ 1572)은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2 ~ 1571)에게 보낸 편지안에서 사단과 칠정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사단 四端 이라는 것이 있어 그것을 넓히고 채우고자 하는 것이라면, 사단이 이 理의 발현임은 확실합니다. 칠정 七情이란 것이 타올라 더욱 번져나가서 그것을 붙들어 묶어서 중도에 맞추어야 하는 것이라면, 칠정이 기의 발현임은 또한 그럴 듯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칠정이 발현하여 절도에 맞는 것은 애초에 사단과 다르지 않습니다. 칠정이 비록 기에 속하긴 해도 이는 분명히 저절로 그 가운데 있습니다. 발현하여 절도에 맞는 것은 곧 하늘이 준 성이요, 본래부터 그러한 실체이니, 어찌 그것을 기의 발현이라 하여 사단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p479)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中


 기대승은 사단뿐 아니라 칠정 -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 - 모두 이 理의 발현이라 주장합니다. 이 理와 기 氣에 대한 논의는 조선시대 200여년 동안 계속된 논쟁이니만큼, 쉽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조금 거칠게 말해서 '이'를'보편 법칙', '기'를 '보편법칙의 구체적 표현(또는 가능성)'으로 정리하면 너무 무리한 표현일까요. 

 

 '만물제동 萬物齊同'이란 만물을 기 氣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기라는 평등 위에서 만물의 차등이 성립합니다. 기라는 보편성 위에서 만물의 개별성들이 성립합니다. 기는 무이죠. 없음이 아니라 아무-것도-아님 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기의 이런 성격을 장자는 즐겨 '허 虛'로 표현합니다.(p726) <개념-뿌리들> 中


 제가 후배의 이야기를 듣고 느꼈던 안타까움 역시 '기 氣'의 표현임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이 경우 측은지심은 일종의 동감이겠지요. 이번에는 '동감(同感, sympathy)'을 들여다보려 합니다. 일반적으로 동감과 관련해서 널리 알려진 저작은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 ~ 1790)의 <도덕감정론 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입니다. 애덤 스미스는 타인에 대한 공감을 기반으로 자신의 경제학 이론을 전개합니다.

 

 타인의 환희에 동감하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그리고 시기심(猜忌心)이 환희에 대한 동감을 방해하지 않는 경우에는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기꺼이 그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환희의 감정에 빠져든다. 그러나 비탄(悲歎)에 공감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며, 비록 우리가 공감하는 경우에도 항상 마지 못해서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비극 공연을 볼 때 우리는 그 연기가 주는 동감적 비애에 가능한 한 저항하다가, 더 이상 그 감정을 피할 수 없게 도어서야 비로소 동감한다. 그런 때에도 우리는 동석자(同席者)에게 우리의 관심을 숨기려고 애를 쓴다.(p83) <도덕감정론> 中


 그렇지만, 애덤 스미스의 동감은 '기쁨에 대한 동감'과 '슬픔에 대한 동감'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기쁨에 대한 동감은 자발적인것에 반해, 슬픔에 대한 동감은 수동적이며, 위선(僞善)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른 양상의 동감에 대해 독일 현상학자  막스 셸러(Max Scheler, 1874 ~ 1928)는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스미스에 따르면 인간 혼자서는 결코 자기 자신의 체험과 의지 그리고 행동과 자기의 존재에 대한 윤리적 가치들을 직접적으로 이끌어낼 수 없다. 자기의 행동을 칭찬하거나 비난하는 관찰자의 판단과 태도 속에 자신을 대입해보고 결국 자기 자신을 편견 없는 관찰자의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그리고 동감을 통해서 자신에게로 향하는 그의 증오, 분노, 흥분, 복수심에 직접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자기 안에서 자기에 대한 긍정적 혹은 부정적 판단의 흐름이 생긴다는 것이다.(p37)... 그러나 이것은 자신의 양심에 대한 착각이며 사회적 암시 soziale Suggestion 때문에 스스로 느낀 가치를 은폐한 것이 아닌가?(p38)<동감의 본질과 형태들> 中


 막스 셸러는 <동감의 본질과 형태들 Wesen und Formen der Sympathie>를 통해 우리는 타인의 감정을 온전하게 체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기론 理氣論의 관점에서 본다면 셸러의 이론을 본다면, 칠정이 이의 발현이라고 본 기대승의 입장에 조금 더 가깝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종합하면, 우리의 감정은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이성 理性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내적 지각의 작용과 그의 본질로 볼 때, 그리고 내적 작용에서 현상하는 사실 영역과 연관해서 볼 때, 각자가 동료 인간의 체험을 자신의 것과 똑같이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p505)... 동일한 영혼 체험이 여러 개인들에게 주어질 수 있다 - 두 인간이 엄밀하게 동일한 고뇌를 느낄 수 있다.(p510) <동감의 본질과 형태들> 中


 다시 제 경우로 돌아와서, 제가 후배에게 느꼈던 안타까움이라는 감정은 어린 시절을 친하게 지냈기에 별다른 어려움없이 그의 감정을 받아들였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때문에, 스미스의 말처럼 후배의 기쁨을 슬픔보다 더 공감한다는 말보다는 셸러의 설명이 더 공감됩니다.(심한 경우, 후배가 로또에 당첨되었다면 배가 아팠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다른 생각을 해봅니다. 후배의 감정에 동감을 했다면, 그 이면에 사회적인 영향이 있었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플라톤(Platon, BC 428 ~ BC 348)의 대화편 <프로타고라스 Protagoras>에서 답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BC 490 ~ BC 415)는 인간이 사회를 구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제우스로부터 염치와 정의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인간은 모든 면에서 짐승들보다 약해서 그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전문기술적인 기술은 그들에게 양식을 위해서는 충분한 도움이 되었지만 짐승들과의 전쟁을 위해서는 부족했지요.(322b)... 인간은 시민적 기술을 가지고 있지 못해서 서로에게 부정의하게 처신했고, 결국 다시 흩어져서는 죽임을 당했지요. 그래서 제우스는, 우리 종족 전체가 멸종하지나 않을까 두려워, 헤르메스를 보내어 인간에게 염치 aidos 와 정의 dike를 가져다 주게하였지요. 나라의 질서와 우정의 결속이 그들을 함께 모을 수 있도록 말이지요.(322c)... 시민적 덕은 전부 정의와 분별을 거쳐서 나와야 하는 것인데요, 이 경우에는 모든 사람을 다 용인해 줍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합당하고요. 이 덕에는 모두가 참여해야 하며, 안 그러면 나라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겁니다.(323a) <프로타고라스> 中 


 프로타고라스가 창작 신화를 통해 설명한 염치 aidos와 정의 dike는 사회를 구성하는 덕목입니다. 여기에서 염치는 역자의 설명에 따르면 오만 hybris의 반대말로서, 일치하지는 않겠지만, 염치는 절제, 겸손 등의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조금 넓게 생각해보면 프로타코라스의 염치, 절제와 맹자의 측은지심, 수오지심에서 통하는 바를 발견게 되는데, 그것은 이들이 나라(국가) 또는 사회를 이루기 위한 덕목이라는 점입니다.


 동서양 모두에서 사회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덕목 속에서 인간의  본성(本性)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본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문화유전자에 의해 매개된 것은 아닐런지. 이에 대해서는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1941 ~ )가 <이기적 유전자 The SElfish Gene>에서 개념을 제시하고, <확장된 표현형 The Extended Phenotype>의 표현을 빌려봅니다.

 

새로이 등장한 수프는 인간의 문화라는 수프다. 새로이 등장한 자기 복제자에게도 이름이 필요한데, 그 이름으로는 문화 전달의 단위 또는 모방의 단위라는 개념을 담고 있는 명사가 적당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이를 '밈 meme'으로 줄이고자 한다... 밈의 예에는 곡조, 사상, 표어, 의복의 유행 등이 있다.(p322) <이기적 유전자> 中


 밈은 일정한 구조를 지니며 정보를 저장하고자 뇌가 사용하는 물리적 매개체 어떤 것에든 실현된다. 뇌가 시냅스를 연결하는 유형으로 정보를 저장한다면, 원리상 밈은 시냅스 구조의 일정 유형으로서 현미경으로 확인 가능하다... 표현형 효과는 뇌에 있는 밈이 밖으로, 눈에 보이게 발현된 것이다. 표현형 효과는 다른 개체가 가진 감각기관으로 지각 가능하고, 이를 수용하는 개체의 뇌에 스스로를 각인해 수용하는 뇌에 원리 밈의 사본을 새겨넣는다. 그리하여 밈의 새로운 사본은 표현형 효과를 널리 전파할 수 있으며, 그 결과 해당 밈 자체의 더 많은 사본은 다른 뇌에서도 만들어질 수 있다.(p214) <확장된 표현형> 中


 도킨스의 표현이 맞다면, 우리는 왜 문화유전자(밈)을 통해서 이들을 전달하고 있을까요. 여기, 동감하지 못하는 경우와 동감하는 경우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구약성경 중 지혜서인 <욥기.에서는 욥이 결백을 알아주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책망하는 한마디로 동감하지 못하는 친구들을 성토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자네들은 언제까지 나를 슬프게 하고 언제까지 나를 말로 짓부수려나? 자네들은 임미 열 번이나 나를 모욕하고 괴롭히면서 부끄러워하지도 않는구려. 내가 참으로 잘못했다 하더라도 그 잘못은 내 잘못일세. 자네들은 참으로 내게 허세를 부리며 내 수치를 밝히려는가?(욥 19 : 2 ~ 5)


 동감하지 못하는 친구들의 모습에서 독자들이 친구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좋을 수 없습니다. 사실, <욥기> 전반에서 친구들이 하는 말이 모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심정적으로 매몰차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듭니다. 반면,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 ~ 1616)의 <리어 왕 King Lear>에서 자신을 버린 아버지의 처지에 동감하는 코딜이어의 대사 속에서 독자 역시 진한 슬픔과 함께 다소의 안도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운면의 불행에 우리 모두가 나약한 모습으로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자기들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해도, 휘날리는 백발이 

그들의 동정심을 일으켰을 텐데, 이 얼굴로 

사나운 비바람을 마주하셨다는 말입니까? 

두려움을 일으키는 암울한 천둥소리에 맞서면서? 

가장 무시무시하고 빠르게 교차하는 번개가 

내리치는 속에서? 이렇게 몇 올 남지 않은 맨머리로 

불쌍한 척후병처럼 경계를 섰나요? 그런 험한 밤에는

나를 물었던 적의 개라 할지라도 따뜻한 난롯가에

두었을 겁니다. 불쌍한 아버지, 당신께서는 

돼지들과 부랑자들과 일행이 되어 썩은 지푸라기를 덮고

오두막에서 쓸쓸히 지내셨군요. 아, 슬프다 슬퍼! (p202) <리어왕 4막 7장> 中


Had you not been their father, these white flakes 

Did challenge pity of them. Was this a face

To be opposed against the warring winds?

To stand against the deep dread-bolted thunder

In the most terrible and nimble stroke

Of quick cross lightning? To watch - poor perdu! -

With this thin helm? Mine enemy's meanest dog,

Though hee had bit me, should have stood that night

Against my fire. And wast thou fain, poor father,

To hovel thee with swine and rogues forlorn

In short and musty straw? Alack, alack!(p260) <King Lear Act4, scene7 28 ~ 38>


 때문에, 우리는 불안한 미래를 살면서 '최소한 사람이라면~'이라고 생각하는 덕목을 사회적으로 공유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서로간의 작은 위로 속에서 힘을 내면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필요했기 때문에 '동감'이 우리 내면에 자리잡은 것은 아니었을까요.


 오랫만에 걸려온 후배의 전화. 그리고 안타까운 소식을 들으면서 느꼈던 동감(同感)이라는 문제에 대해 두서없이 생각해봤습니다. 덕분에, 페이퍼가 너무 길어졌네요. 이웃분들 모두 행복한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PS. 하얗게 불태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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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19-03-30 23: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겨울 호랑이님, 존경스럽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3-30 23:37   좋아요 1 | URL
에고. 과찬이십니다. 생각난 것을 붙이다보니 글이 길어졌고 주제가 다소 산만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붕붕툐툐님!^^:)

2019-03-31 1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3-31 15: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우리는 잠을 자고 마침내 깨어 고요한 겨울 아침을 맞게 된다. 창문틀에는 눈이 솜이나 솜털처럼 따듯하게 쌓여 있고 넓어진 창틀과 성에가 낀 유리창은 은밀한 빛을 받아들여 실내에 포근한 기운을 더한다. 아침의 고요는 무척 인상적이다. 들판 너머 확 트인 곳을 통해 바깥을 내다보려고 창 쪽으로 갈 때면 발아래에서 마루가 삐걱거린다. 쌓인 눈을 무겁게 지고 있는 지붕도 보인다. 처마와 담당에는 눈 종유석(鍾乳石)이 달려 있고 뜰에는 숨겨진 나무 고객이를 덮으며 석순이 서 있다. 나무와 관목들은 하얀 팔을 하늘 곳곳으로 치켜들고 담장과 벽이 있던 곳에는 어둑한 풍경 위로 마구 장난을 친 것처럼 환상적인 형태들이 펼쳐져 있는데, 자연이 사람들에게 예술의 본을 보여주려고 밤사이에 새로운 도안을 뿌려놓은 것 같다.(p76) <소로의 자연사 에세이> 中


 어제 아침부터 띄엄띄엄 내린 눈이 밤 사이에 제법 쌓였습니다. 이번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리지 않아 반가운 마음에 사진을 올려 봅니다.



 입춘(立春)도 지나 봄의 문턱에서 내리는 눈이 조금은 뜬금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지만, 이대로 눈없는 겨울을 보내기에는 아쉬웠는데, 밤사이 쌓인 눈에 아쉬운 마음도 함께 묻힙니다. 저는 겨울의 풍경을 보면서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쳤지만, 소로(Henry David Thoreau, 1817 ~ 1862)는 그 안에서 생명의 기운을 느끼고 있습니다.


 겨울이면 나는 길을 가다 멈춰 서서 어떤 시기와 환경에서든 앞날에 대한 걱정없이 자라는 나무의 모습을 보며 감탄한다. 사실 나무가 사람처럼 시기를 기다리는 법은 없지만, 지금이야말로 묘목이 자라기에는 황금 같은 시기다. 토양, 공기, 햇빛과 비가 아주 적절하니 태초의 환경도 지금보다 더 낫지 않았다. 나무들에게는 "그들의 불만스러운 겨울 winter of their discontent"이란 결코 오지 않는다. 잎이 하나도 없는 자생 포플러 가지 위에서 서리에도 아랑곳 않고 기운차게 돋은 눈을 보라. 숨길 수 없는 자신감을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p37)  <소로의 자연사 에세이> 中


 이러한 소로의 말을 듣다보면, 자연스럽게 주역(周易)의 '지뢰복(地雷復)' 괘(卦)가 떠오릅니다. 땅 밑에 우뢰가 있으니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생명력을 나타내는 이 괘와 겨울 나무를 바라보는 소로의 시선은 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동양사상에도 관심 많았던 소로이니 만큼, 아마 주역을 알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소로 보다 200여년 앞선 독일의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 ~ 1716)가 주역을 읽고 주석까지 달았던 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라 여겨집니다.


 음이 극에 달하면 양으로 돌아가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여러 음이 양을 박식(剝蝕)하여 박락(剝洛)이 극에 달하면 양이 되살아나게 됩니다...'복(復)'괘는 바로 하나의 양이 아래에서 되살아나는 형상으로 '복'은 본원으로 돌아와 원래의 상태를 회복한다(返本回復)'는 뜻입니다... 이는 동지(冬至) 즈음 음기(陰氣)가 극성하고 추위가 맹위를 떨칠 때 오히려 한 가닥 양기가 회생하여 광활한 대지에 봄이 멀지 않았음을 예고하는 것과도 같습니다.이때 무럭무럭 자라나는 그 발랄한 생명력은 어떻게도 막을 수 없는 것이니, '형통'할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p357) <주역 周易> 中


 아침에 내린 눈을 누구나 반갑게 맞이하지만, 오후에 먼지를 먹은 검은 눈은 천덕꾸러기가 되겠지요. 사람의 마음에 간사한 면이 있음을 생각하게 됩니다.(저만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생각해보면 눈(雪)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육아(育兒) 역시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처음에 태어났을 때는 그렇게 예쁘더니 '고난의 행군 100일'을 지나고 나면, 그 좋았던 마음도  많이 약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아이'와 '눈'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번 주말에는 초심(初心)으로 돌아가 연의에게 조금 더 잘 해야겠습니다.


 고양이는 봄가을에 털갈이해 여름철 더위와 겨울철 추위에 대비합니다. 이른 봄부터 점차 털이 빠져 한여름 즈음에 말쑥하게 털이 정리되고, 가을부터는 보온 기능이 뛰어난 겨울털이 빽빽하게 자라나지요. 털갈이 시기에는 평소보다 털이 많이 빠지므로 훨씬 세심하게 브러싱하세요.(p64)  <달콤살벌 고양이 수업> 中


창밖에 쌓인 불구하고, 봄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은 2월이면 꽃대가 올라오는 긴기아난(Kingianum)과 군자란(Clivia miniata)과 함께 겨울이 끝난 다음 '고양이 털파카'를 만들어도 될 만큼 털갈이를 해대는 귀요미 녀석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요즘은 녀석이 고양이가 아니라 누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주말 모처럼 씻기고 쉬고 있는 녀석의 사진을 마지막으로 인사드립니다. 이웃분들 모두 행복한 주말 되세요!



 쌓인 눈은 우리를 가두지만 집이 제공하는 편안한 느낌을 더해주기 때문에 가장 추운 날에도 우리는 난로 위에 앉아 굴뚝 꼭대기를 통해 하늘 보는 것을 즐거워한다. 굴뚝 주변 따뜻한 구석에서 누릴 수 있는 조용하고 평온한 삶을 즐기거나 길거리에서 소들이 우는 소리나 긴 오후 내내 멀리 떨어진 곳간에서 도리깨 소리를 들으며 우리의 맥박을 재면서 말이다.(p97) <소로의 자연사 에세이> 中


PS. 그렇지만, 역할 놀이는 정말 적응이... 어려서도 안하던 것을 딸 때문에 하려니 마치 '밀린 숙제'를 해야하는 심정입니다...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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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2-16 2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로의 일기>에도 자연 묘사가 많이 나옵니다. 소로를 자연을 사랑하는 작가로 꼽습니다.
고양이가 졸린 듯 보입니다. 잠자는 모습은 더 귀엽겠지요.

겨울호랑이 2019-02-16 23:54   좋아요 0 | URL
페크님께서 말씀하신 <소로의 일기>는 <소로의 야생화 일기>를 말씀하신 듯 합니다. 혹 제가 잘 모르는 다른 책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페크님 말씀처럼 소로는 자연을 사랑하는 작가의 모습을 <월든>을 비롯한 그의 여러 책에서 아낌없이 보여준다 여겨집니다. 개인적으로는 소로는 자연 그 자체가 아니었다 하는 생각도 듭니다. 고양이는 낮에 졸고 밤에 돌아다녀서 지금은 아주 생생하게 뛰어나니네요. 아까는 귀여웠는데, 지금은 놀아달라고 보채니 귀찮아 집니다.ㅋ 페크님께서도 편한 밤 되세요. 감사합니다.!^^:)

2019-02-17 10: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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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7 12: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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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4 17: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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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04 18: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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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리(天理)의 길은 아주 넒어서 조금이라도 마음을 여기에 두면 가슴 속이 문득 커지고 밝아짐을 깨닫게 되나, 인욕(인욕)의 길은 매우 좁아서 조금이라도 여기에 발을 들이면 눈앞이 모두 가시덤불과 진흙탕이 되고 만다.(p248) <채근담, 수신과 성찰 修省 14 > 中


 손이 가는 대로 골라 잡은 <채근담 菜根譚>을 펼쳐들고 몇 구절을 읽다보니, 위 구절에서 눈이 멈추게 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다음의 성경 구절이 대구(對句)로 연결된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고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고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 ~ 14>


 <채근담>과 <성경> 모두에서 추구해야할 가치를 말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조금 다르다. 넓은 길과 좁은 문. <채근담>에서는 하늘의 이치에 마음을 두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이를 넓은 길로 바라본 반면, <성경>에서는 소수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좁은 문으로 비유한다. 이들이 차이에는 '넓다'와 '좁다'라는 상태에 대한 차이 뿐 아니라, '이곳'과 '저곳'이라는 위치의 차이도 나타난다.


 <채근담>에서 하늘의 이치는 밖에 있지 않고 우리의 발 아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채근담>에서 하늘의 이치는 지금 이 순간 내가 걸어가는 길이기에 자연스럽고 편안할 것이다. 하늘의 이치가 지금 이순간 나와 함께 있는 것이다. 반면, <성경>에서 하늘의 이치는 미래에 내가 가야할 곳이며, 문을 열어야 들어갈 수 있는 현재의 나와 단절된 공간으로 느껴진다. 정리하면, <채근담>에서 인간은 하늘의 이치를 자신 안에 갖고 있는 존재이기에, 인욕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것으로 족한 반면, <성경>의 인간은 끊임없이 노력해야 겨우 하늘의 이치에 닿을 수 있는 존재로 보여진다. 


조금 더 나아가 성경의 위 구절을 유명하게 만든  앙드레 지드(Andre Gide, 1869 ~ 1951)의 <좁은 문> 을 생각해보자.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소설이지만, <좁은 문>에 대한 해석을 조금 옮겨본다.


 <좁은 문>에서 알리사는 사촌동생 제롬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도 지상적(地上的) 사랑을 눌러버리고 혼자 쓸쓸하게 집을 나가서 아무도 모르게 죽는다. 알리사의 이 행위는 불륜의 모친에 대한 괴로운 추억과 제롬을 남몰래 사랑하는 동생에 대한 따뜻한 애정 등 몇 가지 원인을 생각할 수 있으나 진짜 원인은 그녀의 신비적인 금욕주의에 있다... 지드는 이 작품에서 비인간적인 자기 희생의 허무함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고 할 수 있다...(츨처 : 두산동아대백과)


 이러한 이야기의 구조 속에서 우리는 두 가지 관점에서 알리사의 죽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쓸쓸한 알리사의 죽음을 볼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지드의 자기 희생 비판이 이같은 관점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알리사의 죽음은 안타까운 사건이 된다. 그렇지만,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를 떠올려 본다면 그녀 죽음의 의미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소녀가 쓸쓸하게 죽어갈 때 본 할머니의 환상이 소녀에게 미소를 준 것처럼, 알리사가 죽음의 순간에 그녀가 그토록 원하던 신의 모습을 봤다면, 그녀의 죽음을 안타깝다 여길 문제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알리사가 제롬과 우리를 불쌍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얻었다면, 성냥팔이 소녀 미소의 의미를 주위 사람들이 몰랐던 것처럼 우리는 죽음의 의미를 평가할 위치에 있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우리가 생각할 것은 우리 자신을 넓은 길에 놓느냐, 좁은 문을 바라보며 살아갈 것인가 하는 삶의 태도를 결정하는 문제라 여겨진다. 그런데, 사실 두 문장을 잘 보면 서로 통하는 바를 발견할 수 있다.  <채근담>에서 언급된 넓은 길을 가는 이는 깨달은 자이며, 성령을 받은 자이고, 성인(聖人)이다. 반면, <성경>의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이는 아직 깨닫지 못한 자이고, 성령을 받지 못한 자이고, 범인(凡人)이라고 본다면, 지금 자신에 대한 긍정(肯定)과 부정(不定)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자기 자신을 어느 쪽에 놓고 살아갈 것인가하는 문제는 온전히 자신의 선택(Choice)일 것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구일신일일신우일신) - 진실로 날로 새로워져라! 날로 날로 새로워져라! - 는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묵묵하게 살아간다면 넓은 길을 통해 좁은 문으로 이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알리사 역시 신에 대한 사랑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사랑도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이번 페이퍼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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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8 08: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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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8 09: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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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9-02-08 11: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채근담』을 보니 그 책을 읽으면서 한자로 된 문장들을 일기장에 부지런히 옮겨 적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그 당시만 하더라도 한자를 거의 일상적으로 썼던 것 같은데, 지금 돌아보니 그게 벌써 37년 전의 일이네요. ㅠㅠ

겨울호랑이 2019-02-08 12:37   좋아요 1 | URL
oren님의 필사는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었군요! 필사가 고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것을 oren님을 통해 새삼 느낍니다!^^:)

서니데이 2019-02-09 16: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전이 된 책들은 여러번 읽어도 다시 읽으면 새로울 때가 있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아직 한겨울인가봅니다. 날씨가 차갑습니다.
겨울호랑이님, 따뜻하고 좋은 주말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19-02-09 16:12   좋아요 1 | URL
네 그렇습니다. 매번 읽을 때마다 다르게 다가오는 것이 고전이 주는 매력이라 생각됩니다. 서니데이님께서도 행복한 주말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