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자연책'이라 부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책을 아무리 크게 만든다 해도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세계의 아주 작은 일부도 한 권에 담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디서 끝나게 될까? 별자리부터 지구의 핵에 이르기까지 배워야 할 것이 무궁무진하다. 그동안  지나칠 때마다 궁금했던 동식물, 나무, 풀, 곤충, 강수량,육지, 수역 등을 이번 자연책 작업을 통해 제대로 공부할 수 있었다.(p8) <자연해부도감> 中

 

  줄리아 로스먼(Julia Rothman)의 <자연해부도감 Nature Anatomy>은 저자의 말처럼 정말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해와 달, 별부터 시작해서 지구 기후, 우리 주변의 동식물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자연(自然 nature)이라 부르는 거의 모든 것들의 이야기가 편한 그림과 함께 담겨있다는 점이 책의 장점이다. 소재의 다양성 측면에서 <자연해부도감>은 빌 브라이슨(Bill Bryson, 1952 ~ )의  <거의 모든 것의 역사 A short History of Nearly Everything>을 떠올리게 하지만, 드로잉(drawing) 중심의 책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거의 모든 것의 역사>에 비해 다루는 내용도 매우 제한적이다. 지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을 평안하게 만들어주는 책으로, 이는 저자의 말로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나는 뉴욕 도심부인 브루클린의 파크슬로프에 살고 있는데, 우리 집은 프로스펙트 파크 입구에서 가까운 몇 안 되는 건물들 가운데 하나다. 잠깐 바람 쐬는 걸 두고 '자연 산책'라 부르는 것이 지나칠 호들갑일지는 모르겠지만 매일 잠시나마 초록의 자연에 에워싸이는 시간은 내게 더없이 소중하다.(p6) <자연해부도감> 中 


 <자연해부도감>은 저자의 말처럼 산책하는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용의 깊이에 대해 지적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생각되지만, 저자의 머리말을 읽으면서 다른 생각을 떠올리게 된다. 그것은 <자연해부도감>의 자연이 저자가 살고 있는 삶의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저자는 도시에서 야생(野生)을 아름다운 세계로 생각하지만, 과연 그럴까. 마루야마 겐지(丸山健二, 1943 ~ )가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를 통해 밖에서 바라본 시골이 이상향이 아닌 현실임을 말하듯, 저자가 그린 자연도 추상적인 것이 아니지 않을까. 이러한 이유로 <자연해부도감>을 읽으면서 자연에 대한 느낌을 받기보다, 책의 그림에만 눈이 가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이다.


 자연에서의 현실이란 것을 잘 몰랐던 젊은 시절, 몰래 눈여겨둔 별장지가 있었습니다. 높은 지대에서 바라본 전망은 아름다운 아즈미노에서도 각별했습니다. 그곳에 집을 짓고 살면 구름 위에서 생활하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집필 의욕이 솟구쳐 생각대로 소설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집필 의욕이 솟구쳐 생각대로 소설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어설픈 기대에 사로잡혔습니다... 만약 당신이 땅값이 싸다는 점에 눈이 멀어 곧바로 사기로 결정하고 말았다면 이는 중대한 실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도시 땅값과 비교하면 분명하면 분명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쌉니다.  하지만 현지 시세를 감안하면 턱없이 비싼 가격으로 바가지를 씌운 것입니다.(p33)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 中


 그런 면에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 (Henry David Thoreau, 1817 ~ 1862)의 <야생화 일기 Thoreau's Wildflowers>에는 자연 안에서 함께 숨쉬며 자연을 바라본 이의 시각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독자들은 자연안에서 삶을 발견하고, 저자와 함께 식물을 발견하는 체험을 할 수 있기에 책의 깊이가 한층 깊어진다는 생각을 해본다.


 1853년 6월 10일


 우리가 거닐었던 이 멋진 야생 지역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옛 칼라일 길은 양쪽에 야생사과나무 초원과 접해 있다. 사과 나무들은 대부분 어쩌다 씨앗이 날라왔거나 사과즙 찌꺼기를 버린 데서 움이 트는 등 우연히 터를 잡고 제멋대로 자라며, 자작나무와 소나무에 가려져 있다. 이 드넓은 과수원의 사과나무들은 열매를 제법 생산하지만 야생에서 삼림수로 자란다. 이곳은 가울에 산책하는 사람들에게는 천국이다.(p187) <소로의 야생화 일기> 中


 <자연해부도감>과 <소로의 야생화 일기>는 같은 자연을 그렸지만, 전자가 관념적인 자연을 표현했다면, 후자는 현실적인 자연을 표현했기에, 깊이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주제는 조금 달라지지만, 관념적인 자연과 현실의 자연을 대조하자면, 우리나라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와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현실을 그린 진경산수화가 관념적인 남종문인화보다 높은 평가를 받는 것도 이러한 기준의 연장선상이 아닐까. 현실(現實)이 공허한 이념(理念 ideology)보다 언제나 중요한 것이니까...  


 진경산수화란 우리나라 산천을 소재로 그린 산수화로 특히 조선 후기(18~19세기)에 유행한 실경산수화를 가리킨다. 실경을 화폭에 담는 경향은 18세기에 와서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이미 고려 이래 오랜 전통을 갖고 계속되어 왔다... 진경 眞景이란 원래 문인화적 개념이다. 대상의 겉모습만을 묘사한 형사 形似의 그림이 아니라 대상의 본질을 표현하는 신사 神似의 그림을 진경이라 한 것이다. 진경산수화는 화보나 다른 그림을 모방한 그림이 아니고 우리나라 산하를 직접 답사하고 화폭에 담은 살아있는 그림[活畵]이다.(p102) <Korean Art Book 회화2> 中



[그림] 정선의 금강전도(金剛全圖)[출처 : 위키백과]


 다만, 진경시대의 배경에는 명(明)나라 멸망으로 인해 중화(中華)의 적통을 우리가 이었다는 사대(事大)사상이 있다는 사실을 아쉽게 느끼면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문화적으로 우리보다 열등한 여진족이 무력으로 중국을 차지했다 해도 중화의 계승자가 될 수 없는데, 하물며 그 야만 풍속인 변발호목(辮髮胡服)을 한민족(漢民族)에게 강요하여 중화문화 전체를 야만적으로 변질시켜 놓았으니 중국에서는 이미 중화문화 전통이 단절되었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니 중화문화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주자성리학의 적통(嫡統)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조산만이 중화문화를 계승할 자격을 갖추었으므로 이제 조선이 중화가 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었다.(p22)... 이로 말미암아 조선이 곧 중화라는 조선중화주의가 조선사회 전반에 점차 팽배해 가기 시작하였다. 이제 조선이 곧 중화라는 주장을 떳떳하게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 조선 고유문화를 꽃피워내는 데 조금이라도 주저할 리가 있었겠는가.(p23) <진경시대 1>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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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뜻을 깨닫는 것은 본래 세 점을 한 곧은 줄로 맞추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일직선상에 놓여져 이 끝에서 저 끝이 내다뵈는 것이 뜻을 앎이다.(p163) <너 자신을 혁명하라> 中


 함석헌(咸錫憲, 1901 ~ 1989)은 <너 자신을 혁명하라>에서 뜻과 진리를 깨닫기 위해 정진(精進)할 것을 강조한다.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개념 중 선생은 새로움을 힘 있음, 밝음, 처음, 맑음 등으로 정의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갈아내어 새롭게 되기를 우리에게 주문한다.


 새로움이란 첫째로 힘 있음이다. 힘 있다 함은 밖을 이김이다. 생명은 스스로 끊임없이 피어나고 지어내는 것이기 때문애 늘 어디 가든지 막아냄, 건드림, 잡아당김을 느낀다. 그것을 이기고 제대로 하는 것, 자유하는 것이 생명이다. 새롭다는 것은 자유하는 힘을 가졌단 말이다. 갈아 놓은 칼날은 새 것이다.(p107).... 새것은 맑다. 이른바 청신(淸新)이다. 새벽 바람처럼, 골짜기 물처럼 맑은 것이 새것이다. 맑다는 것은 다른 무엇이 섞여 들어가지 않았단 말이다. 섞인 것이 있으면 제 본바탈을 잃는다. 바탈을 잃으면 죽은 것이다... 갈아야 한다. 죽음을 물리치고 새 삶을 일으키기 위해서 갈아야 한다.(p109) <너 자신을 혁명하라> 中

 

 한편,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1933 ~ )의 <혁명의 시간 Time for Revolution >은 다른 관점에서 시간의 의미로 접근한다. 네그리의 혁명과 함석헌의 혁명이 지향하는 바가 조금을 다를지라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뜻(의미)를 깨닫는 것을 추구하는 바는 통하는 바 있다.


 앎(이는 유물론적 장 안에 있는 에피스테메 episteme이며, 논리이다)이란 카이로스(Kairos)다. 즉 앎의 사건, 이름붙이기(naming)의 사건, 혹은 저 정확하게는 특이성singularity)으로서의 앎이다. 이는 논리적 혁신과 존재론적 창조를 교직한다.(p17) <혁명의 시간> 中


 그렇다면, 카이로스가 무엇인가를 알아봐야 할 차례다.  <시간의 탄생 Zeit: Eine Kulturgeschichte>에서 저자 알렉산더 데만트 (Alexander Demandt, 1937 ~ )는 그리스 신화안의  크로노스 Chronos, 아이온 Aion, 카이로스 Kairos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크로노스 Chronos의 아들은 아이온 Aion이다.... 아이온은 벌거벗은 젋은이로 뱀에 둘러싸여 있으며 다양한 상징으로 장식되어 있다. 후광이나 사자의 머리를 하고 있으며 날개와 성화가 달려있고 배경에는 태양과 달이, 구석에는 12궁도와 바람의 형상이 새겨져 있다. 아이온은 시간의 상징으로 뱀에 휘감겨 있으며 머리가 세 개다. 사자의 머리는 현재를, 늑대의 머리는 과거를, 개의 머리는 미래를 나타낸다.(p75)... 아이온이 가장 긴 시간이라면 카이로스 Kairos, 즉 기회는 가장 짧은 시간이다. 이는 우리가 눈치채고 활용해야만 하는 찰나의 특별한 순간이다. 소년 카이로스는 오른손에는 칼을, 왼손에는 한 쌍의 거울을 들고 있으며 발꿈치에는 날개를 달고 있다. 제우스 조차 눈 깜짝할 사이에 달아나버리는 소년을 잡아올 수 없다고 파이드로스 Phaedrus는 기록하고 있다.(p77) <시간의 탄생> 中


  아이온이 과거, 현재, 미래를 의미하는 영원(永遠)의 시간을 상징한다면, 카이로스는 순간이며, 기회의 시간이다. 그리고, 네그리는 아이온 안의 카이로스 안에서 창조하는 생명력을 발견할 때가 바로 혁명의 시간임을 말한다.


  카이로스는 영원한 것 속에 있다. 카이로스가 바로 창조하는 영원한 것이다.(kairos is the eternal that creates)라고 말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이 영원한 것은 우리에 선행한다. 그 가장자리에서 우리의 창조활동이 일어나고 존재 즉 영원을 확장하는 활동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카이로스가 여는 모든 것은 영원하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에 대한 책임이 있는 동시에 영원을 생산할 책임이 있다.(.p73)... 존재가 창조되는 소용돌이치는 '토포스(topos, 장소)'와 이 생산을 스스로 조직하는 '텔로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시간의 양태 내에서의) 우리의 이해를 심화하는 것이 중요하다.(p75) <혁명의 시간> 中


  '아이온 - 카이로스'의 관계가 이와 같다면, '크로노스 - 카이로스'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한국인이 캐낸 그리스 문명>의 저자 김승중에 따르면 이들의 관계는 '객관성 -  주관성'으로 정리된다. 이처럼 시간의 의미는 '영원-순간', '객관성-주관성'으로 크게 될 수 있을 것이다. 

 

 '흐로노스 chronos"는 우리가 잘 아는 베테랑 할아버지, 시간의 아버지 Father Time, 즉 누구나 인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시간을 의미한다. 반면, "카이로스 Kairos"는 완전히 반대의 예측 불가능한 주관적인 시간이다. 객관적인 시간이라는 것은 바로 아이작 뉴턴이 얘기하는 시간의 특징 aquabiliter fluit - 즉, 강의 물이 항상 일정하게 흐르듯 영원히 고정된 시간이 바로 흐로노스이다.(p35)... 그에 반해서 주관적인 시간 "카이로스"는 흔히 "기회 opportunity"라고 번역되기도 하는데, 이는 일정하게 아주 "적절한 때 right timing"을 의미한다. 흐로노스가 신적인 우주의 영원한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인간세상의 찰나, 즉 짤막한 현재의 시간이다.(p37)' <한국인이 캐낸 그리스 문명> 中


 이러한 객관성-주관성은 현재에서 만나게 되며, 우리는 생각과 언어를 통해 지금 이 순간(시간), 바로 여기 여기(공간)에서 무의미한 영원의 시간에 뜻(의미)를 부여하며 삶을 살아간다. 우리의 삶이 자기 인식의 시공간(space-time)에서  끊임없이 퍼져가는 물리적인 엔트로피(entropy) 법칙을 거부하며 생명의 도약인 '엘랑비탈(Elan Vital)'을 하는 것이라면, 시간을 헤아리는 것은 의미를 부여하는 여정의 작은 첫걸음이 될 것이다.

 

 우리는 '객관적으로' 사실을 보며 '주관적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인식하기 전에 대상이 존재하므로 처음에는 객관성에 우위를 부여했다가 곧 인식 과정은 인식 능력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므로 객관성은 일시적인 것으로 주관성이 우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p49)... 현재 속에서 주관성과 객관성은 서로 접촉한다. 우리의 현재 의식적 행위는 그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가능성이다... 자기반성을 위해서는 생각과 언어라는 도구가 필요하듯 시간과 공간은 자기인식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p50) <시간의 탄생> 中


 2020년과 경자년(庚子年). 태양력(太陽歷)과 태음력(太陰歷)으로 우리가 의미를 부여한 시간이 맞아들어가는 첫 날인 2020년 설날을 맞아 시간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경자년의 첫 날을 맞아 새로움의 의미를 되새기고, 무의미한 아이온에 뜻을 부여하여 자신을 바꾸는 한 해가 되길 바라본다.


 고대 동양에서부터 내려오는 가장 오래된 축제에 대한 소식은 진흙판 위에 새겨진 설형문자를 통해서 전해졌다. 그것은 BC 3000년에서 BC 2000년 사이에 바빌로니아의 도시를 관장하던 주신 主神 마르두크를 기념하기 위한 새해 축제가 12일 동안 열렸다는 증거이기도 했다.(p460) <시간의 탄생> 中


 고대 페르시아에서도 새해는 중요한 축제 행사였다. 오늘날까지도 이란에서 나우루즈 Nauruz는 유명한 축제다.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에 따르면 아후라 마즈다와 아리만, 선악의 투쟁이 곧 세상의 역사다. 결국 선이 승리하고 두 세력 사이에서 평화 계약이 이루어지는데 이날이 바로 봄이 시작되는 때이자 새해가 시작되는 시기로 축하의식이 열리는 날이었다.(p461) <시간의 탄생> 中


 얼마전 2020년 새해 축하 인사를 이웃분들께 드렸습니다. 이번에는 경자년 새해 인사를 페이퍼로 드립니다.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의 한 구절을 마지막으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합니다. 이웃분들 모두 각자의 세계(뜻)를 위대한 정오(카이로스)안에서 찾는 한 해 되세요! 


 어린아이는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 최초의 운동, 거룩한 긍정이다. 그렇다. 나의 형제들이여,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 거룩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욕구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 나는 너희들에게 정신의 세 단계 변화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는가를.(p41)... 사자는 왔으며 내 아이들도 가까이 와 있다. 차라투스투라는 성숙해졌다. 나의 때가 온 것이다. 이것은 나의 아침이다. 나의 낮이 시작된다. 솟아올라라, 솟아올라라, 너 위대한 정오여!(p529)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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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0-01-24 10: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호랑이님!! 행복한 명절 보내세용^-^

겨울호랑이 2020-01-24 19:05   좋아요 0 | URL
syo님께서도 행복한 설연휴 되세요! 감사합니다^^:)

캐모마일 2020-01-24 12: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에 새뜻을 새기기에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겨울호랑이 2020-01-24 19:06   좋아요 0 | URL
캐모마일님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페넬로페 2020-01-24 2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 시간을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탁월한 이야기네요^^
완전히 이해할 순 없어도 가슴깊이 뭉클함을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겨울호랑이님!
여기서의 크로노스는 제우스의 아버지와 다른 신인거죠?
아님 같은 신을 나타내는건가요?

겨울호랑이 2020-01-24 22:3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페넬로페님 말씀처럼 크로노스는 제우스의 아버지, 우라노스의 아들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한 연휴 되세요!^^:)
 


 기독교 전설은 초기부터 그리스 신화 - 예를 들어 레다와 백조의 신화나 다나에와 황금의 비(shower of Gold) 신화 - 와 조로아스터교의 사오샨트 신화 양쪽에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모티프를 채택하였다.(p387) <신의 가면 3 : 서양 신화> 中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 1904 ~ 1987)는 <신의 가면 III : 서양 신화 The Masks of God Vol.III: Occidental Mythology>에서 기독교에서 드러나는 페르시아/이집트 문명의 영향에 대해 말한다. 그는 <신의 가면>에서 페르시아/이집트 문명의 영향은 성모 영보(聖母領報 Annunciation), 그리스도 탄생, 동방박사의 방문에서 잘 드러남을 지적한다.


 진짜 기적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전설의 수준에서만 본다면, 동정녀의 탄생은 기독교 유산 가운데 헤브루 측면이 아니라 페르시아나 그리스 측면에서 나온 신화적 모티프로 해석해야 한다.(p389) <신의 가면 3 : 서양 신화> 中


[그림] 성모영보(출처 : https://www.visituffizi.org/artworks/annunciation-by-simone-martini-and-lippo-memmi/)


 그리스도의 탄생 장면에서는 미트라가 어머니 바위로부터 출생하는 전설에 나오는 귀에 익은 모티프를 되풀이한다. 하늘의 군대라는 것도 조로아스터교적인 배경을 암시한다. 특히 주님의 영광의 빛이 비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한 광채 - 아베스탄, Xvarnah, "영광의 빛" - 는 아후라 마즈다에 의한 태초의 창조의 빛이다. 이것은 후광으로 상징된다. 후광은 페르시아의 예술에 처음으로 나타나서, 동쪽으로는 불교도들에게, 서쪽으로는 기독교권에 전파되었다.(p389) <신의 가면 3 : 서양 신화> 中


[그림] 보티첼리, <신비한 탄생, 그리스도의 탄생> (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522769469215540357/)

 

 우리에게 예수는 여관 마굿간에서 태어난 전설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콥트 기독교 전승에서는 이집트의 영향을 보다 깊게 확인할 수 있다.


 중동 기독교는 예로부터 예수가 동굴에서 탄생하셨다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 성지의 전통 촌락에 있는 많은 소박한 집들도 동굴에서 시작하여 그 수가 늘어갔다. 예수가 태어나신 곳을 동굴로 보는 전통은 2세기 중엽에 저술 활동을 했던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 Martyr)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p54)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中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탄생 일자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200년 무렵)는 4월 19일로 추정하는 연대기 학자에서부터 5월 20일로 보는 학자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 탄생일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전한다. 클레멘트 자신은 기원전 3년 11월 17일을 그리스도 탄생일로 보았다. 서기 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동방 그리스도교들은 1월 6일을 그리스도 탄생일로 축하했다. 354년에 로마 교회를 비롯한 일부 서방 교회들은 12월 25일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했다. 당시 이것은 낮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로 잘못 계산되었다. 동지는 이미 미트라교의 중심 축제로서, 정복당하지 않는 태양의 탄생일이었다.(p371) <문명이야기 3-2> 中 


 동방박사 방문은 1월 6일에 기념된다. 이 날짜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처녀" 코레에게서 새로운 아이온(오시리스가 통합주의적으로 인격화된 존재)이 태어나는 것을 기념하는 축제의 날이었다. 그곳에서 코레는 이시스와 동일시되었다. 지평선에 빛나는 별 시리우스(천랑성)가 떠오르는 것이 아이온의 탄생의 표시라고 하여,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때가 되면 그 별이 떠오르기를 기다려왔다(p390) <신의 가면 3 : 서양 신화> 中



[그림] 동방박사의 방문 <Adoration of the Magi> (출처 : https://smarthistory.org/gentile-da-fabriano-adoration-magi-reframed/)


 캠벨은 페르시아 미트라와 이집트 오시리스 신화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 탄생(성탄 聖誕)을 근거로 헬레니즘(Hellenism)과 헤브라이즘(Hebraism) 더 나아가 기독교에 미친 오리엔트 요소를 찾아낸다. 그리고, 이러한 캠벨의 관점은 마틴 버날(Martin Bernal, 1937 ~ 2013)의 <블랙아테나 Black Athena>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블랙아테나>는 이전에도 여러번 넘겼지만, 이번에도 훗날을 기약한다...


 그리스도 탄생을 12월 25일에 기념하는 현재의 관행은 353년이나 354년이 되어서야 제도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일은 로마에서 교황 리베리우스가 시행한 것이다. 미트라가 어머니 바위에서 태어난 것을 기념하던 축제가 그날 열렸기 때문에, 그것을 흡수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12월 25일이 동지였다. 따라서 그때부터 그리스도는 미트라나 로마의 황제와 마찬가지로 다시 떠오른 태양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리스도 탄생 장면에는 2개의 신화와 2개의 날짜가 연결되어 있는 셈이다. 12월 25일과 1월 6일이라는 이 두 날짜는 각각 페르시아권과 이집트권을 가리키고 있다.(p391) <신의 가면 3 : 서양 신화> 中


 캠벨의 저작에서는 그리스도 탄생과 관련한 헬레니즘 영향을 간략하게 언급하기에,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칼 융(Carl Gustav Jung, 1875 ~ 1961)의 <인간과 상징 Man and His Symbols>의 내용을 옮겨본다. 칼 융은 이 안에서 디오니소스교를 계승한 오르페우스교(Orphicism)와 초기 기독교의 관계를 주목한다. 비록, 두 개의 종교는 지향하는 방향이 과거와 미래로 각각 다르지만, 로마 제국 대중에게 소망의 상징이라는 면에서 같은 의미로 다가갔다. 오르페우스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서는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 ~ 1986)의 <세계종교사상사 2> 리뷰에서 자세히 다룰 계획이다... 이 역시 훗날에.


 디오니소스교는 정신에서 육체로, 육체에서 정신으로 끊임없이 변전하기 때문에 금욕적인 사람에게 이런 의례는 너무 야만적이고 너무 광폭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같은 사람들은 오르페우스 신앙을 통해 내적으로만 종교적 무아경을 체험하게 된다. 오르페우스는 실제 인물이었던 것 같다. 가수, 예언자, 교사였던 그는 결국 학살당했고, 그의 무덤은 성지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초기 기독교 교회가 오르페우스에게서 그리스도의 원형을 봤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못된다. 이 두 종교는 후기 헬레니즘 세계에 내세의 신성한 삶을 약속한다. 로마 제국의 치하에서 사라져 가는 그리스 문화를 지키려던 대중에게, 신의 중재자이자 인간이었던 오르페우스와 그리스도는 미래의 삶에 대한 간절한 소망의 상징이었다.(p214) <인간과 상징> 中


 페르시아/이집트 문명과 이의 영향을 받은 서양 문명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동지(冬至)는 큰 명절이었다. 과거 페이퍼에 올렸던 내용을 다시 올려본다. 팥죽을 먹으면서 액을 쫓는 행위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팥죽할멈과 호랑이 이야기에서 잘 재현되어있다. 이 책들은 딸아이가 좋아하는 책이므로 곁들어 올려 놓는다.


 동짓날은 작은 설(亞歲) 이라고 한다. 팥죽을 쑤고 찹쌀가루를 새알 모양으로 만들어 그 속에 넣어 심으로 삼는다. 꿀을 타서 명절 음식으로 제사에 올린다. 팥죽을 대문에 뿌려 액운을 없앤다. <형초세시기>를 보면 "공공씨(共工氏)에게 어리석은 아들이 있었는데 동짓날에 죽어서 역귀가 되었다. 팥을 무서워하므로 동짓날에는 죽을 만들어 쫓는다."하였다.(p215)... 동짓날 팥죽에 대한 기록은고려시대 문헌에도 보인다. 이제현(李齊賢, 1287 ~ 1367)의 <동지 冬至>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동지에 반드시 팥죽을 끓인다. 東人冬至必烹豆粥"라고 주석이 달려 있다.(p217)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 中


 밤이 가장 긴, 어둠의 힘이 가장 강한 때인 동지가 거의 모든 문명에서 명절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깊은 어둠이라는 현재 상황의 어려움보다 이제는 밝음이 길어질 것이라는 희망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 아닐까. 문학작품 <어린 성냥팔이 소녀>, <행복한 왕자>,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잘 나타나는 현세의 어두움이 밝은 미래로 바뀌는 순간. 이제는 낮이 밤보다 길어질 것이라는 기대가 동지(크리스마스)를 명절로 만든 것이라 생각된다. 


 다음날 새벽 어린 소녀는 장밋빛 뺨을 하고 미소를 띤 채, 두 집 사이에 옴츠려 있었다. 소녀는 지난해 마지막 날 밤에 얼어죽은 것이었다.... 소녀가 보았던 것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할머니와 함께 행복한 새해를 맞이하러 간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웠는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었다.(p360) <주석달린 고전 동화집, 어린 성냥팔이 소녀> 中


 마침내 작은 제비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제비는 행복한 왕자에게 입맞춤을 하고는 왕자의 발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순간 동상 속에서 무엇이 쪼개지는 듯한 알 수 없는 소리가 났습니다. 납으로 된 왕자의 심장이 두 쪽으로 갈라진 것입니다. 다음날 이른 아침, 흉해진 행복한 왕자의 동상을 본 사람들은 동상을 끌어내려 용광로에 넣고 녹여 버렸습니다. 그러나 쪼개진 심장은 아무리 해도 녹지 않았습니다.(p26)... 천사는 조각난 납 심장과 죽은 제비를 가지고 하느님께 돌아갔습니다. "이 새는 천국의 뜰에서 노래를 부르도록 할 것이며, 행복한 왕자는 이 곳에서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니라.(p28)  <행복한 왕자> 中


 페이퍼가 매우 길어졌는데, 우선 이번 페이퍼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교 신자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의미있는 날이라는 것이다. 힘든 한 해를 돌아보면서 수고한 자신과 주위를 위로하고 새로운 한 해에 대한 희망을 가지는 날로서. 그리고, 이러한 결론을 내려고 한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합니다. 무슨 선물을 받을까 설게기 때문이지요. 이때 왜 선물을 주고받는지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은 어떨까요?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는 사랑과 행복을 모두와 나누는 것이니까요. <크리스마스를 찾아서, 추천사> 中


 살펴본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이웃분들 모두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시길 바랍니다. 힘든 시간을 잘 이겨내심을 축하드리며, 어제보다 나은 오늘, 그리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


 페이퍼의 마지막은 크리스마스에 많이 공연되는 차이코프스키(Pyotr Ilyich Tchaikovsky, 1840 ~ 1893)의 <호두까기 인형 Op.71 The nutcracker Op.71>을 소개하며 "Merry christmas!" 라고만 하면 썰렁할 것 같아 작성하다 늘어져버린 페이퍼를 갈무리합니다...



 <호두까기 인형>은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세 편의 발레 중에서도 가장 짧은 작품으로, 음악성이 원숙에 달한 만년의 시기에 만들어진 대표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공주> 등의 경험이 충분히 살아있는 작품으로서, 음악적으로도 앞의 두 곡에 필적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곡 전체를 통해서도 독특한 그의 어두운 음영이 보이지 않고, 프랑스 민요 등을 교묘히 인용해 시종 밝고 부드러운 분위기에 넘쳐 있다. 더욱이 동화적 세계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섬세하고 독창적인 수법으로 묘사되고 있다. 천진난만하고 사랑스런 소녀 클라라의 심리와 쥐의 대군을 대조적으로 표현한 것은 찬사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 당시의 발레음악으로서는 처음 시도되어지는 부분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눈의 왈츠>에 어린이 합창을 첨가시켜 그 색채를 풍부하게 그려내었다는 점이다. 또한 첼레스타를 채용하여 훌륭한 효과를 거둔 점 등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p111) <차이코프스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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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4 19: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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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4 19: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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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지 2019-12-27 09: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항상 건강하시고 댁내 두루 평안하시길 기원합니다:-)

겨울호랑이 2019-12-27 10:09   좋아요 2 | URL
갱지님 감사합니다. 갱지님께서도 행복한 연말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다시 인사드립니다.

2019-12-27 10: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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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27 19: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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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2 07: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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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2 08: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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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6 17: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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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6 18: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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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것을 알아 두십시오. 모든 사람이 듣기는 빨리 하되, 말하기는 더디 하고 분노하기도 더디 해야 합니다...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성경> <야고 1:19 ~ 25)


 시위를 할 때 함께 무리 지어 걷는 것은 정치적 행위이다. 거리를 행진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행진은 상징적 행동으로, 공적인 장소를 걸어 지나감으로써 그 공간을 점령한다는 의미가 있다.. 시위 행진이 있을 때면 수천 명(경찰 추산에 따르면 수백 명)이 사람들이 모여 같은 방향으로 걷는데, 이렇게 함께 걷는 가운데 생성되는 연대감 역시 상징적인 것이다.(p57) <걷다> 中


 2016년 이후 오랫만에 뜻이 맞는 자신의 생각을 실천으로 옮긴 이웃들과 함께 한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서초역과 교대역까지 거리가 짧긴 하지만, 교대역 앞까지 통제된 사람의 물결 속에서 마음이 통하고 생각이 같은 이들을 만나 외롭지 않은 하루였습니다. 편향되고 왜곡된 정보화 시대 속에서 통하는 이들을 길에서 만났을 때의 느낌. 그런 느낌을 깊이 느끼며 하루를 마무리 합니다...


 양명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은 주자학의 선지후행설(先知後行說)에 대한비판에서 나온 것이다. 양명은  "알과 행위는 사욕에 의해 가로막힌 것이지, 지행의 본체가 아니다. 알고도 행하지 않는 자는 없었다.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은 단지 아직 알지 못한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양명은 "참된 앎은 행하기 위한 까닭이다. 행하지 않으면 그것을 앎이라 말 할 수 없다.(眞知所以爲行 不行不足以爲知)"고 하였다. 양명에 의하면 앎은 실천 중에 터득되는 것이므로 지행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전습록 1>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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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8 20: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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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8 22: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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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8 22: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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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8 22: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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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19-09-28 2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방이라 참석이 어렵지만 적극 지지합니다!ㅎ

겨울호랑이 2019-09-28 22:5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막시무스님.!!^^:) 아 참, 저를 지지하는게 아니시지요? 뜻을 같이 하는 분을 만나 반갑습니다.

단발머리 2019-09-29 07: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젯밤의 감동이 느껴지네요.
어제 무리지어 행진하는 사람들 속에 겨울호랑이님이 계셨군요. 저도 그 속에 있었습니다. 서로를 몰라보고 지나쳤지만,
겨울호랑이님, 더욱 반갑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9-29 08:36   좋아요 0 | URL
단발머리님께서도 오셨군요. 저 역시 반갑습니다. 어제 밤 행사로 고단하실텐데 평안한 휴일 되세요!^^:)

나와같다면 2019-09-29 17: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겨울호랑이님 덕분에 미셸 퓌에슈의 [사랑하다] 를 읽었어요

[걷 다] 나는. 오늘도 에도 상징적인 마음을 건드리는 문장이 있네요

겨울호랑이 2019-09-29 17:49   좋아요 1 | URL
[사랑하다]와 [걷 다]를 처음 읽은 시점이 2017년으로 기억이 됩니다. 그때에도 나와같다면님께서 [사랑하다]를 읽고 좋은 독서했다고 말씀해주셨는데, 이번에도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북다이제스터 2019-09-29 1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행합일... 알면서도 가장 어려운 뜻인 것 같습니다. 저녁 날도 추운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9-09-29 18:32   좋아요 1 | URL
그렇습니다. 머리와 손발을 일치시키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인듯 합니다. 그런데, 사실 어제 더워서 고생했습니다. 반바지를 입을 것 그랬다는 생각을.... 아마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거리 감각을 되찾고, 시간과 공간에 대해 좀더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사실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는 도구들을 이용하다보면 주변 세상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게 된다. 시간과 공간을 좀 더 생생하게 지배할 수 있는 힘을 빼앗기는 것이다.(p42)... 두 발로 걸을 때, 우리는 세상을 직접 경험하고 느낀다.(p45) <걷다> 中


 얼마전 알라딘에서 '독보적' 서비스를 시작했다. 하루 1권의 책을 읽고, 하루 5,000 걸음을 걸으면 하루 미션이 수행되는 이벤트를 통해 '걷기'에 대해 생각하면서 '걷기'와 관련된 오래된 두 권의 책을 꺼내 읽어본다.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발로 걸어가는 인간은 모든 감각기관 의 모공을 활짝 열어주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으로 빠져든다. 그 명상에서 돌아올 때면 가끔 사람이 달라져서 당장의 삶을 지배하는 다급한 일에 매달리기보다는 시간을그윽하게 즐기는 경향을 보인다. 걷는다는 것은 잠시 동안 혹은 오랫동안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p9) <걷기예찬> 中


  몸과 생명의 근원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일주일 동안 숲 속 서바이벌 체험을 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야생의 자연에서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것들에 대한 감각을 되살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계와 직접 대면할 때의 느낌과 평상시의 그것과의 차이를 통해 현재 우리의 삶이 어떤 모습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다.(p13) <걷다> 中


<걷기예찬 Eloge de la Marche>와 <걷다 Marcher>의 저자는 '걷기'의 의미를 관계에서 찾는다. 나와 나 밖의 세계, 가진 것과 현재 가지고 있지 못한 것. 이들과의 관계를 걷기를 통해 우리는 다시 생각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걷기'를 통해 일상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하루 5,000 걸음이 많게 여겨지지만, 출/퇴근, 식사시간, 청소 등 일상 업무를 보다보면 생각보다 5,000 걸음이 많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별도의 운동시간을 내려한다면 부담스럽게 느껴질 걸음량이지만, 생각보다 많은 움직임과 관계를 맺고 있음을 걸음을 재면서 느낀다. 문제는 5,000걸음을 측정하기 위해서 나는 핸드폰을 들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 서비스가 구글 피트니스 서비스와 연동되기 때문에, 전자파가 나오는 핸드폰을 계속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조금(솔직히 많이) 부담되는 것도 사실이다.


 층계참을 지날 때마다 엘리베이터 맞은편 벅에 붙은 커다란 얼굴의 포스터가 그를 노려보았다. 그 얼굴은 교묘하게 그려져 있었다. 마치 눈동자가 사람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 얼굴 아래 '빅 브라더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p10) <1984> 中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 ~ 1950)의 <1984>에서 묘사된 빅 브라더(Big Brother)와 같이 내 자신을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당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핸드폰의 위치 정보 서비스에서 정보 제공을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런 사실이 내게는 크게 위안이 되지 않는다. 구글 위치 정보 제공에 동의해도 정보는 수집된다는 다음의 기사 때문이기도 하다.


 구글 위치정보 기사 : http://www.techdaily.co.kr/news/articleView.html?idxno=549


[사진] 구글 위치 정보 서비스(출처 : 테크데일리)


 텔레스크린은 수신과 송신을 동시에 행한다. 이 기계는 윈스턴이 내는 소리가 아무리 작아도 낱낱이 포착한다. 이 기계는 윈스턴이 내는 소리가 아무리 작아도 낱낱이 포착한다. 더욱이 그가 이 금속판의 시계(視界) 안에 들어 있는 한, 그의 일거일동은 다 보이고 들린다. 물론 언제 감시를 받고 있는지 알 수는 없다.(p11) <1984> 中


 개인적으로 핸드폰을 통한 개인정보 수집에 대해 부정적인 편이다. 수집된 개인 정보가 내 자신을 편리하게 해준다지만, 머지 않은 미래에 우리 모두는 5G로 연결되어 AI(인공지능)에게 감시당하며, 배달앱을 통해 모든 것을 배달하면서 세상과 격리되어 살아갈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 현실화된 이러한 세상이라면, 벤담의 판옵티콘은 오히려 낭만적인 근대감옥이 될 지도 모르겠다.

 

폐쇄되고, 세분되고, 모든 면에서 감시받는 이 공간에서 개인들은 지정된 장소에서 꼼짝 못하고, 아무리 사소한 움직임이라도 통제되며, 모든 사건들은 기록되고, 끊임없는 기록 작업은 중심부와 주변부를 연결시키고, 권력은 끊임없는 위계질서의 형상으로 완벽하게 행사되고, 개인은 줄곧 기록되고 검사되면서, 생존자, 병자, 사망자로 구별된다.(p306)... 벤담(Bentham)의 '판옵티콘(Panopticon)'은 이러한 조합의 건축적 형태이다.(p309)... 수감자에게는 권력의 자동적인 기능을 보장해 주는 가시성의 의식적이고 지속적인 상태가 만들어진다. 감시작용에 중단이 있더라도 그 효과는 계속되도록 하고, 권력의 완벽한 상태는 권력행사의 현실성이 점차 약화되도록하고, 건축의 장치는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과 상관없이 권력관계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기계장치가 되도록 한다.(p311) <감시와 처벌> 中


 얼마 전 모처럼 아이와 함께 가족들이 영화를 보기 위해 나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시간이 남아 이곳저곳을 거닐면서 주변상가를 둘러볼 수 있었는데, 그 상가에 사람이 없는 모습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극장 주변이면 보통 중심상권으로 봐야하는데, 그곳에서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영화는 네플릭스로, 식사는 배달의 민족으로, 옷은 쇼핑몰에서 구입하는 행태가 우리를 세상과 격리시키고, 경기를 어렵게 만드는 주요인은 아닐런지. 그런 의미에서 '걷기'의 의미는 세상과 연결이고, 소통이라는 저자들의 통찰은 적극 공감하게 된다.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은 그 세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 다시 말해서 그 세계를 명명하는 것이다. 도보 여행자가 왜 그토록 이름을 알아내고자 하는지 그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p98) <걷기예찬> 中 


 알라딘의 '독보적(獨步的)' 서비스를 통해 걷기의 의미와 현대 과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최근 놀랍게 발달하는 과학기술 속에서 점차 설자리를 잃어가는 인간의 모습이 슬퍼지기도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스티븐 핑거(Steven Pinker, 1954 ~ )의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How The Mind Works>를 통해 위로받는다. 

 

 이 사실들을 종합하면, 영혼은 우리가 잠을 잘 때 돌아다니고, 그림자 속에 몰래 존재하고, 연못의 수면을 통해 우리를 훔쳐보고, 우리가 죽을 때 육체를 떠난다는 이론이 나온다. 현대과학은 그림자와 환영을 설명하는 더 훌륭한 이론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것이 꿈을 꾸고, 상상하고, 신체를 조종하는 감각력을 가진 자아를 얼마나 잘 설명할지는 미지수다.(p863)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中


 실재란 어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있네. 그것도 실수를 할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곧 사라져버릴 개인의 마음속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불멸하는 당의 마음속에 있지. 당이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건 무엇이든 다 진실일세. 당의 눈을 통해 보지 않고는 실재를 볼 수 없네.(p347) <1984> 中


  이제는 세상과 자신과의 연결, 그리고 자신의 발견을 생각해볼 시간이 된 듯하다. 여기에 현대과학까지 들어올 필요는 사실 없다고 여겨지지만, 이제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된 이상 바람직한 활용을 생각하면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첫 걸음은 다른 걸음과는 다른다. 첫 걸음을 내딛음으로써 "역동적 불균형"이 시작되어 다른 걸음들이 딸려오기 때문이다. 사랑에서, 그리고 인생의 한 영역에서, 첫 걸음을 내딛는다는 것은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정지 자세를 깨고 불균형 상태를 창출하는 것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첫 걸음을 떼는 그 순간 이미 상황은 변화했고, 우리는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p34) <걷다> 中


PS. 스탬프 하나에 열심히 미션을 채워가는 자신을 보면 좋게 말해 동심(童心)이 살아 있는 것도 같지만, 어린 시절 '참 잘했어요'의 세뇌 효과가 강했다는 느낌도 함께 가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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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1 11: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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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1 21: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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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1 11: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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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1 21: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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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2019-09-23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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