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 고구려 산성을 가다 - 73개 고구려산성 현장답사
원종선 지음 / 통나무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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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산성은 결코 독자적으로 방어하지 않고 주변의 성들이 서로 연합하여 방어선을 구축한다. 이것이 바로 고구려산성의 힘이다. 당시 고구려가 거대국가였던 중원의 왕조에 견주어 조금도 뒤지지 않는 국력을 자랑할 수 있었던 기틀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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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7 10: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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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7 11: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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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역사」는 자유민주주의 관점에서 해방이후의 현대사를 바라본 책이다. 개인적으로 뉴라이트 역사관에 동의하지 않지만, 뉴라이트 사관을 대중에게 알기 쉽게 설명했다는 점에 이 책의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거시적으로 바라볼 때 역사관에서는 객관적 실증 자료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결국에는 자유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를 만들어 낼 것을 역설하는 저자의 역사관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또한 미시적으로 구체적인 사례를 바라볼 때 대한민국의 건국주체가 이 땅에서 성장한 근대문명세력임을 밝히는 저자의 글 속에서 항일무장독립투쟁의 주체로서 중앙아시아, 북간도, 연해주 등지에서 독립군과 중남미와 하와이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이들은 대한민국의 건국에서 배제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 역시 수긍하기 어려운 점이다. 때문에 이 책의 논조를 찬성하기 어렵지만, 앞에서 말한 바처럼 대중을 대상으로 뉴라이트 역사관이 무엇인가 잘 설명한 점은 인정할만하다.

위에서 말한 저자의 뉴라이트 역사관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는 다른 역사책과의 대조를 통해 다른 페이퍼에서 찾아보도록 하자...






요컨대 자유 이념에서 바라 본 역사의 발전은 타협적이며 개량적이며 점진적이며 진화적이다. 지난 20세기의 세계사를 성찰하면서 이 점을 솔직하게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지금까지 어둡고 부정적이고 정체적으로 비쳐진 대한민국의 역사가 밝게 긍정적으로 달리 해석된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그렇게 재해석된 우리의 역사를 만나게 될 것이다.(p39)

대한민국의 건국은 개항 이후 이 땅에서 성장한 근대문명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것은 성리학의 전통사회로부터 자유민주주의의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말하였다. 긴 역사의 관점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은 인간들의 삶의 원리에 있어서 일대 전환을 의미하였다. 그 대전환의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은 사회의 혁명적인 파괴나 재편을 동반하지는 않았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온건하고 점진적인 사회개량의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낡은 사회구조가 그대로 이어지고, 그 속에 성장한 계층이 그대로 지배적 지위를 누려서 신생 국가에 걸 맞는 혁명적 기풍은 없는 듯이 보였다. 그렇지만 바로 그 속에 장차 한국인의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인 풍요를이끌어낼 문명의 잠재력이 듬뿍 담겨 있었다.(p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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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9-02-05 13: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들에게 있어서 자유란 개념은 미국식 반공주의에 국한되어 있다 봅니다. 이들은 항상 자랑스러운 역사를 강조합니다. 그들이 해석한 자랑스러움이란 친일파를 앞세워 노동자 농민의 요구를 무시한 것과 유신독재의 역사입니다. 즉 북한이라는 제1의 적이 있다는 논리를 앞세워 그런 전쟁의 위협속에서 버텨내 부국강병을 성취했다는 체제우월주의적 셩격이 강하죠.

그리고 이들은 역사라는 학문에서 말아야할 짓을 합니다. 북에 대한 적대감을 부추기며 그럴 것이다 라는 가정을 세우죠. 예를들면 몽양 여운형의 좌우합작이 공산화의 길이었다는 논리처럼요.

어떻게 보면 자신들이 만들어낸 상상에 빠진거라 볼 수 있겠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2-05 14:02   좋아요 1 | URL
^^:) Nam Gi Kim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역사가 개인이 정치의식을 갖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목적의식을 가지고 역사를 이용하는 것은 역사가의 사명에서 어긋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가의 사관뿐 아니라 독자의 역사관도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Nam Gi Kim 님 미국은 잘 다녀오셨나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한 연휴 보내세요!^^:)

NamGiKim 2019-02-05 14:06   좋아요 1 | URL
네 미국은 잘 갔다왔습니다. 미국 동부(뉴욕, 필라델피아, 보스턴 워싱턴 DC), 캐나다(토론토), 서부(LA, 라스베가스, 센프란시스코, 그랜드 캐년)해서 총 1개월 간의 긴 여행이었죠.

참고로 12월엔 예상치 못한일로 그리스와 터키도 갔다왔습니다. 정말 많이 놀러갔다 왔네요.ㅎ 네 호랑이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행복한 연휴 보내세요.^-^

겨울호랑이 2019-02-05 14:24   좋아요 1 | URL
좋은 시간이었겠군요. 저도 오래전에 2개월간 미국 배낭여행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레이 하운드와 암트랙을 타고 다녔었는데 ㅋ Nam Gi Kim님 남은 연휴 행복하게 보내세요!^^:)

NamGiKim 2019-02-05 14:29   좋아요 1 | URL
전 메가버스 이용했죠.ㅎ

레삭매냐 2019-02-07 1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랑케 실증 사학의 맹신적인 후예들이
우리나라 사학계를 망쳐 놓은 게
(어떤 면에서 보면 식민사학의 영향
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천추의 한
이라고 생각합니다.

뉴라이트 사관 역시 비슷한 궤적을
그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겨울호랑이님도 메리 설날입니다 :>

겨울호랑이 2019-02-07 13:44   좋아요 1 | URL
레삭매냐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또한 극단적인 민족주의도 마찬가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과거를 종합적으로 고찰하고 현대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작업이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 코벨의 한국문화 2
존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옮김 / 글을읽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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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佛敎)는 백제가 신라, 고구려와 맞서 싸울 때 왜를 동맹국으로 가깝게 해두려는 일종의 유인책에서 왜국에 전파한 것이다. 실제로 660년 백제가 망하게 됐을 때 왜는 구원군과 선박을 보냈지만 그것은 너무 늦게 도착했다. 이때 10만 명의 백제 상류계급이 일본으로 갔다고 한다. 이들의 도래는 일본에서 불교미술이 꽃피는 계기가 됐다. 백제 불교건축과 예술을 통해 일본에 불교문명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p42)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中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은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1910 ~ 1996)박사의 <부여기마족과 왜(倭)>에 이은 두 번째 한국문화 관련 책으로, 불교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고대 백제(百濟)시대부터 고려(高麗), 조선(朝鮮)시대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미친 한국 문화의 영향을 미술사 관점에서 보여준다.


[사진] 고려불화(출처 : <대고려국보전> 호암갤러리)


 이 고려불화 <양유관세음도>는 '우타오쯔가 그린 당나라 것'으로 꼬리표를 달고 있을 때 봤던 것보다 지금이 더 찬란해 보였다... 관세음의 얼굴, 옷, 보석장식 등에 구사된 고난도의 기법은 그 시대에 유행했던 고려청자의 힘든 과정인 상감기법과도 통한다. 관세음이 걸치고 있는 사라의 투명함을 사실처럼 드러낸 것이나, 거미줄처럼 섬세한 흰 비단에 짜인 금빛 작은 무늬를 그려낸 솜씨는 정말 압도적인 것이었다.(p252)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中


 일반인들은 접하기 힘든 일본에 소재한 작품, 건축물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통해 저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감상할 것인가에 대해 알려주고 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일본에 남은 한국 미술>을 통해 인상적인 대목은 일본에 미친 한국의 영향을 여러 방면에서 다각도로 조명하려는 저자의 노력이다. 7세기 불교미술품인 호류지의 옥충주자(玉蟲廚子)가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저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근거로 내세운다.



[사진] 호류지의 옥충주자(출처 : https://www.pinterest.co.kr/pin/506584658056795227/)


  마지막 3단계를 나타내는 아래쪽 그림은 석가모니가 굶주린 암호랑이와 그 새끼들에게 자신의 몸을 먹이로 내주어 먹힘으로써 짐승에게도 보시를 하는 불교 계율을 시사하는 것이다. 여기의 호랑이 그림은 이 짐승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솜씨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일본에는 '호랑이가 없다!' 호랑이 비슷한 살쾡이조차도 일본에는 없었다. 이로써 일본인이 그렸을 가능성은 배제된다.(p116)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中


 또한, 일본 신사를 지키고 있는 코마이누 상(像)을 통해 이들 개가 일본 원산이 아닌 한반도로부터 건너온 품종임을 지적한 저자의 설명은 최근 이루어진 토종개의 유전자 분석 결과를 통해 뒷받침되고 있다. 이처럼, 책 전반에 걸쳐 단순한 사실 주장이 아닌 근거를 통해 일본에 미친 한국 문화 영향이 강조되기에 저자의 설명은 보다 설득력을 갖게 된다.


 일본의 모든 신사는 예외없이 두 마리 코마이누 高麗犬, 고구려 개가 지킨다. 코마 高麗라는 말은 고구려를 지칭해 흔히 쓰인다.(p29)... 코마이누는 시베리아 늑대와 개의 혼혈이다. 고구려의 두뇌들이 그런 새 육종을 만들어냈거나, 아니면 늑대를 개의 종족으로 기들여 인간이 통제할 수 있으면서도 사나운 수비견으로 키워냈던 것이다. 이것들은 무게가 50킬로그램에 달하고 늑대의 큰 코를 그대로 지녔다. 길고 털이 무성한 꼬리, 몸체의 긴 털과 갈기는 개보다 늑대에 가깝다.(p32)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中


 관련기사 : http://www.newskr.kr/news/articleView.html?idxno=5665



[그림] 토종개의 계통수 분석 결과(출처 : 한국농어촌방송)


 그렇지만, 한국 문화에 대한 저자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모든 주장을 찬성하기는 어렵다. 고려 후기 왜구(倭寇)의 침략으로 많은 고려 불화(佛畵)가 일본으로 약탈당한 사실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려 측에서는 왜구의 노략질은 극심한 폐해일 뿐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뜻밖의 반전이 있었다. 고려에 와서 양곡이나 귀금속을 훔칠 수 없을 때면 왜구들은 사찰의 값진 물건인 불화를 약탈해갔는데, 조선이 건국한 1392년 이래 억불정책이 실시되면서 조선의 절에서 이런 사치스런 불화가 더 이상 소용에 닿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일본의 사찰과 신토신사에는 1백여 점의 14세기 고려불화가 보관되기에 이른 것이다.(p206)... 한국의 사찰에서는 이런 탱화를 조심성 없이 다루기도 하고 초파일 같은 날 밖에 내다 걸거나 벽에 그대로 걸어두어 비바람이나 먼지, 향불로 인한 훼손, 도난 등 여러 가지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반면 일본의 절들은 이를 아름다운 자산으로 여겨 매우 귀하게 취급하는 것이 관례였다.(p208)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中


 수준 높은 한국 문화재를 한국인들은 제대로 관리할 수 없으니, 약탈과 같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라도 일본에 남아 연구를 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는 듯한 저자의 위와 같은 말은 일제 하에 식민지 경험을 한 우리로서는 선뜻 동의하기 힘들다. 위와 같은 저자의 논리대로라면, 고대 이집트의 유물들은 대영박물관에 보관되는 편이 카이로 박물관으로 돌려보내지는 것보다 연구목적으로는 더 바람직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제국주의 시대에 열강들이 가져간 문화재가 고국으로 반환되고 있는 현실은 문화재의 연구나 보존의 효율성보다 약탈이라는 취득방법이 부당하다는 인식의 반증일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에서는 이러한 부분은 고려되지 않고 있기에 아쉽게 느껴진다.


 한국의 절에 무속적인 흔적이랄 수 있는 대들보 상량을 눈여겨본 사람이라면, 절마다 있는 산신각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라면, 무속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얼른 이해할 것이다.(p59)... 한국역사에서는 언제나 이러한 '종교적 타협'이 있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불교적 요소, 도교적인 것, 조상 숭배라는 유교적 요소가 동시에 나타난다. 오늘날의 절 건축에도, 천장 대들보에는 화려한 단청으로 춤추고 노래하는 남녀 무당들 그림이 선명히 그려져 있다.(p60)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中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에서는 위와 같이 한국미술의 특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인들은 외부로부터 문화를 받아들일 때에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한국의 토대 위에서 받아들였다. 다른 종교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게 들어온 기독교의 경우를 보더라도, 서양의 기독교와는 다른 한국 기독교만의 특징을 가진다는 점에서도 이러한 부분은 명확해진다. 이러한 '타협'을 통한 외부 문화의 수용이 한국 사회를 역동적으로 만들었음을 생각해본다면, 과거의 것을 잘 보존하지만 정체된 일본 사회와는 다른 문명의 특성이라고 여기는 것이 좋지 않을까도 생각하게 된다. (물론, 과거를 무조건 비판하고 새로운 것만 추종하는 태도 또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처럼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은 일본에 미친 한국 문화의 영향을 미국 미술사가의 입장에서 잘 정리한 책이면서도, 한국인으로서는 아쉬운 부분이 느껴지는 한계가 있는 좋은 책이라 생각하면서 이번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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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6 09: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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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6 09: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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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7 08: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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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7 12: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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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기마족과 왜(倭)
존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옮김 / 글을읽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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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족(扶餘族)은 말을 배에 싣고 바다를 건너 왔으며 창, 칼 등 월등한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손쉽게 원주민을 제압하면서 규슈에서 나라 야마토 평원으로 동진(東進)해 나갔다... 이들은 군사집단이었으며 새로이 정착할 신천지를 찾아 일본에 온 것이다. 그 때문에 말을 대동해 갈 필요가 있었다. 일본에는 초기에 말이 없었다.(p38) <부여기마족과 왜>中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1910 ~ 1996)교수에 의하면 3세기 중국 대륙에서 선비족(鮮卑族)과 부여족의 다툼이 있었다. 여기서 밀려난 부여족이 한반도로 남하하게 되었고, 일부가 일본열도로 건너가 정복활동을 벌이게 된다. 코벨 박사에 의하면 이러한 '부여족의 왜 정벌' 이후 일본은 비로소 중앙집권 국가체계를 형성하게 된다.


 부여족의 왜 정벌은 일본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30여년 간 지속된 부여족 지배는 일본에 처음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했다. 8세기 나라(奈良)의 사가들이 한국의 왜 침입을 부정하고 반대로 왜의 한국 침입으로 바꿔서 설정한 것은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3세기 중국의 사성 <삼국지> <위지>에 "이 시기 왜에 말(馬)이 없었다"고 기록된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것이다.(p168) <부여기마족과 왜>中


 책 본문을 통해 코벨 박사는 부여족의 일본 정벌을 주장하는데 그치지 않고, 일본의 역사 왜곡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한다. 저자에 의하면, <일본서기 日本書記>의 진구황후(神功皇后, 169 ~ 269)의 신라 정벌은 부여족(가야)의 왜 정복이 거꾸로 기술된 것의 이러한 역사 왜곡의 대표적 사례다.


[사진] 진구 황후(출처 : 위키백과)


 4세기의 가야가 후일 신라에 병합된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은 일본 역사책에 나오는 신공왕후의 원정로가 근거를 갖제 된다고 볼 수 있다. 즉 '미마나(任那, 가야를 의미함)정복' 이라는 일본 역사가의 주장을 신공이 고령으로부터 남쪽으로 진격하여 백제 군사와 합류한 것으로 풀이하면 이치에 닿는 해석이 되는 것이다.(p79)<부여기마족과 왜>中


 흥미로운 것은 신공의 조상이 광대한 압록강 너머 북방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암시가 <일본서기>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내용은 신공이 '신라왕'을 굴복시키자 신라왕은 '아리나례(阿利那禮)강이 거꾸로 흐를 때까지' 신공에게 복속할 것을 맹세했다고 하는 대목이다. <일본서기>를 영역한 애스턴(W.G. Aston)은 한국의 민족주의를 도모할 아무 이유가 없던 입장에서 아리나례강을 현재 북한 국경의 서쪽 절반을 가로질러 흐르는 압록강으로 생각했다.(p79)<부여기마족과 왜>中


 그렇다면, 어느 시기에 일본의 역사 왜곡이 구체화되는가. 저자는 그 시점을 백제 멸망 이후 약 10만명에 이르는 유민이 일본으로 흘러간 때로 추정한다. 도래인(渡來人)의 처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백제 유민들이 왜(倭)를 일본(日本)으로 만드는 작업에 동참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백제학자들은 일본의 구비관(口碑官)들이 부르는 노래역사에 나오는 사건과 이름을 백제사에 결부시키고 일부는 가야사와 신라사까지 차용해 일본사로 바꿔치기 했다. 그들은 '일본국의 창시자'라는 신비한 영웅담을 만들어냈다. 여기엔 부여-가야의 왜 정벌에서 얻어진 구체적 이야기들을 따다 쓴 만큼 사실적인 내용이 있다. 이런 것들이 짜집기되어 일본사는 서기전 660년부터 비롯된다는, 왕실에서 만족할 만큼의 오랜 전통을 가진 나라로 만들어졌다.(p185) <부여기마족과 왜>中


 코벨 박사의 <부여기마족과 왜>의 내용은 이처럼 일본 문화에 미친 부여족의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이 책의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우리가 고대 한일 관계사에서 놓치지 말아야 하는 점은 부여족이 왜를 정복한 4세기 이전부터 이미 한반도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다.


 초기에 왜로 이주한 사람들이 타고 간 배는 4세기 기마민족이 타고 간 배보다 작았다. 그래도 기마족들처럼 왜를 침입하려고 배에다 많은 말을 싣고 가는 모험은 하지 않았던 만큼 무사히 왜 땅에 건너가 뿌리내릴 수 있었다. 초기 이주민들이 처음 정착한 곳은 이즈모(出雪)였는데, 이곳은 여러모로 신라와 관련된 곳이다.... 이들 대부분은 바람과 바다에 생활을 의지하는 어민들로, 해의 신보다는 바람의 신을 더 우러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일본이 통일국가가 되고 나서 바람의 신 스사노오를 모신 이즈모 신사가 해의 여신을 받드는 이세 신사에 밀려 지위가 두 번째로 낮아졌다는 사실은 초기 이주사에서 중요한 것이다.(p186) <부여기마족과 왜>中


 4세기 이전 기마민족보다 먼저 일본에 진출해 있었던 이들은 누구일까. 위의 내용에 따르면 우리에게 일본 원주민으로 알려진 아이누족보다 먼저 이주한 이들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이러한 가능성은 북한 사학자 김석형에 의해 뒷받침된다.


 북한의 사학자 김석형(金錫亨)의 주장에 따르면 일본열도에는 백제, 신라, 고구려의 분국으로 세 그룹의 한국인 사회가 건설돼 있었다고 한다... 일본의 고대 역사서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은 신라와 이즈모이며 4~5세기에 들어서는 백제가 자주 거론된다. 고구려가 등장하는 것은 552년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뒤의 일이다.(p138) <부여기마족과 왜>中

 

 위의 내용을 종합하면, 4세기 이전 신라에서 바람의 신을 모시던 집단이 일본 원주민을 몰아내고 일본 열도에서 주도권을 잡았고, 4세기 가야로 대표되는 부여족의 일본원정이 있은 후에는 백제계가, 6세기 무렵부터는 고구려의 세력이 일본으로 진출하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정리될 것이다. 그렇지만, <부여기마족과 왜(倭)>는 언제부터 한반도인들의 일본 진출이 있었는가에 대한 조망 없이, 중반부에 해당하는 부여족의 진출부터 다루고 있다. 책에서 4세기 이전 신라인들의 일본 진출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지는데, 이는 일본의 조몬 시대/야요이 시대에 고대 한인(韓人)들의 영향력은 과소 평가될 수 있다는 우려를 갖게 한다. 저자의 의도는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부여기마족 이전 신라인들의 일본 진출에 대해서 먼저 언급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었을까 느껴진다는 점에서 이 부분은 아쉽다. 그렇지만, 이러한 고대 한반도인들의 일본 이주사(移住史) 중 일부인 부여족의 왜 정복을, 미국인인 저자가 저술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의미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이와 같이 부여기마족에 의해 중앙집권국가체제를 만들고, <일본서기>의 편찬을 통해 한반도와 절연(絶連)한 일본이 어떻게 발전해 나갔는가. 이어지는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에서는 그 다음 이야기가 이어진다. 결론부터 말하자만, 19세기 중반까지 일본은 그 영향력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 책의 내용이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리뷰에서 하기로 하고, <부여기마족과 왜(倭)>의 리뷰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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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5 12: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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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5 20: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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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통사 - 국망의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는 거울 규장각 새로 읽는 우리 고전 총서 2
박은식 지음, 김태웅 옮김 / 아카넷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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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금 망국의 처참함이 한민족보다 더 심한 것이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겠는가. 하늘과 땅은 망망하고 쇠잔한 숨길은 깜빡깜빡 희미하여 아픔을 울부짖고 원통함을 호소하는 것을 스스로 그칠 수가 없구나. 옛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가 있으나 역사는 말할 수가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은 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인가. 이것이 통사(痛史)를 짓는 까닭이다. 정신이 보존되어 멸하지 아니하면 형체는 부활할 때가 있을 것이다.(p27) <한국통사> 中  


 박은식(朴殷植, 1859 ~ 1925)은 <한국통사>를 통해 한국 근대의 아픔을 돌아보면서 우리의 정신을 보존할 수 있다면 다시 나라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말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한국통사>에서 말하는 나라의 정신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라의 혼과 백


 역사가 보존된다는 것은 나라의 혼(魂)이 보존된다는 것이다. 아시아에서 최대이며 최고의 나라를 들어 논한다면, 중국의 혼은 문학에 의탁하였고, 돌궐의 혼은 종교에 의탁하였다. 이는 혼이 강한 나라이다. 선비, 거란, 몽고와 같은 나라는 바야흐로 번성할 때는 능히 큰 땅을 정복하여 위엄을 천하에 떨쳤지만, 무력이 한 번 쇠약해지자 나라의 수명도 다하게 되었다. 이는 백(魄)이 강한 나라이다. 대개 국교(國敎), 국학(國學), 국어(國語), 국문(國文), 국사(國史)는 혼에 속하는 것이요, 전곡(錢穀), 군대(軍隊), 성지(城池), 선함(船艦), 기계(器械) 등은 백에 속하는 것으로, 혼의 됨됨은 백에 따라서 죽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국교와 국사가 망하지 아니하면, 그 나라도 망하지 않는 것이다. 오호라! 한국의 백은 이미 죽었으나, 이른바 혼이란 것은 남아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p310) <한국통사> 中


 사람이 죽으면 '백'은 땅으로 돌아가고, '혼'은 하늘로 올라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자는 나라 역시 혼(魂)과 백(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특히, '혼'이 '백'보다 더 중요하기에, 우리가 역사를 통해 '혼'을 지킬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부흥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이를 위해 <한국통사>에서 역사의 아픔을 기록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오늘날 우리 민족 모두가 우리 조상의 피로써 골육을 삼고 우리 조상의 혼으로 영각(靈覺)을 삼고 있으며, 우리 조상은 신성한 교화가 있고 신성한 정법(政法)이 있고, 신성한 문사(文事)와 무공(武功)이 있으니. 우리 민족이 다른 것에서 구함이 옳겠는가. 무릇 우리 형제는 서로 생각하고 늘 잊지 말며 형체와 정신을 전멸시키지 말 것을 구구히 바란다.(p27)  <한국통사> 中


 아픈 역사의 시작


 과연, 이러한 아픈 역사의 시작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저자는 이러한 시원(始原)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 ~ 1898)의 배움이 부족한 것에서 찾고 있다.


[사진] 경주 척화비(斥和碑)[출처 : 위키 백과]


 무릇 그 자리는 할 만했고, 재주도 할 만 했으며, 시운 또한 할 만했는데, 꼭 필요한 것은 배움이었다.  옛날과 지금을 두루 통하고 안과 밖을 관찰할 만한 학식으로 그 힘센 팔을 걷어붙이고 새로운 조선을 건설하여 문명 열강과 같이 바다와 육지로 함께 달리며 여유로워야 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배움이 없어 국내를 다스리는 데는 사사로운 지혜를 임의로 사용하여 움직임이 많고 거동이 지나쳤으며, 국외를 대하는 데는 배척을 주장으로 삼아 문을 닫고 스스로 소경이 되었다. 마침내 변란이 매우 가까운 데서 발생하여 화가 나라에 미쳤으니 반도 중흥의 기운도 기어코 회복되지 못하였다. 아! 애석하도다. 아픈 역사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p57) <한국통사> 中


 세계 혁명사의 경험


 지도자가 배움이 부족하여 스스로 외부와 단절하고 고립의 길을 택한 결과로 근대 이후 우리의 불행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인 박은식은 <한국통사>를 통해  불행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점진적이며 꾸준한 개혁이 필요함을 강조하는데, 이러한 저자의 관점은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을 기술하는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김옥균(金玉均, 1851 ~ 1894)을 중심으로 한 개화당이 일본의 세력을 등에 업고 급진개혁을 추구하였으나, 결국 3일 천하로 막 내리게 된 갑신정변. 이의 실패 원인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이런 거사야말로 비록 폭발적이고 열렬한 행사라고 말할지라도 실은 하늘의 때[天時]를 따라야 하고, 인심에 응해야 하며, 점진적으로, 변화시켜야 하고 단계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각종 기관을 차례대로 설치하거나 종교를 좇아 인심을 끌어내든가 혹은 학설로 말미암아 솔선하여 주장하거나 언론으로 인심을 고취한다든다, 문자로 정치의 이치[政理]을 발휘해서 공중(公衆)의 사상이 점차 여기로 기울게 해야 한다. 그 후에 정치 방면에 들어가 맹렬히 급격한 수단을 사용하되, 찬성하는 자가 많아지고 반대하는 자가 적어졌을 때 새로운 정치를 세워야 아무런 방해물이 없게 된다. 비록 하루 동안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실은 수십 년의 오랜 시일을 미리부터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세계 혁명사의 경험이다.(p126) <한국통사> 中  


 급진적인 개혁보다 지속적인 노력을 강조하는 저자의 주장은 여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대한제국 당시 독립당(獨立黨)을 비판적으로 서술하는 지점에서도 드러난다. 


 무릇 사람의 작업도 늘 마음에 두고 오래 지나도 게을리하지 아니하며 면밀히 힘을 기울이는 자는 비록 약할지라도 반드시 성공을 거둘 수 있으나, 조급한 마음으로 빨리 성사시키겠다고 하여 미친 듯이 뛰어 달리는 자는 비록 강할지라도 반드시 패한다. 하물며 독립당은 본래 강력한 힘도 없는데 빨리 성사하려 함에 있어서랴.(p196) <한국통사> 中  


 결국, 저자는 지도자의 배움이 부족한 것에서 시작된 우리 역사의 불행을 바로 보고, 이러한 아픔이 반복되지 않도록 후손들로 하여금 우리의 혼(魂)을 잘 보존할 것을 강조하고 이를 일깨우기 위해 <한국통사>를 기록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아픈 역사를 돌아봐야하는가? 자랑스러운 역사를 통해서는 우리의 혼을 바로 세울 수 없는 것일까?


 고통의 의미


 살다보면, 몸이 아플 때가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진료를 받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아닐까. 혹시 내게 잘못된 생활 습관은 없는지, 내가 무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살피는 시간을 갖는 것이 진정한 고통의 의미라 생각된다.


 <한국통사>에서 통(痛)은 '아픔'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라의 고통 역시 몸의 고통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그 후에야 아플 통(痛)이 통할 통(通)으로 바뀌어,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대화하며,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끝나는 지점이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누군가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통해서 혼은 정상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자랑스러운 역사는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반성과 꾸준한 준비에서 나옴을 우리는 최근 역사를 통해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한국통사>를 다시 돌아봐야 하는 이유라 여겨진다. 


[사진] 2018년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출처 :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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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1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01 0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bookholic 2018-05-01 11: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우리 역사에서 ‘痛‘자는 발붙일 없길 바랍니다...

겨울호랑이 2018-05-01 11:25   좋아요 0 | URL
네.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더이상의 아픔은 없어야 겠지요...

AgalmA 2018-05-02 1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혼을 바로 세우는 건 필요한 일이지만 그것을 민족이나 국가에 일치시키는 건 위험한 이데올로기가 되기 쉽죠. 이게 현대에서 큰 문제점이기도 하고요. 경제적 이득을 꾀하면서 국가주의를 앞세우는 많은 나라들 보십시오. 민주주의고 뭐고 아무 소용이 없죠.

겨울호랑이 2018-05-02 13:55   좋아요 1 | URL
AgalmA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민족이나 국가가 지나치게 강조되어 개인이 무시되는 전체주의 사회로 변질되어간 수많은 사례를 우리는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지요... 부분과 전체의 조화. 쉽지 않은 과제라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