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도자기 여행>은 북유럽, 동유럽, 서유럽의 도자기 문화사를 다룬 기행문이다. 독일 마이센(Messein)으로부터 시작되는 유럽 도자기 역사는 중국의 청화백자(靑華白磁)의 수입으로부터 출발한다. 동양 도자기를 만나기 이전 유럽에는 고온을 견뎌낼 수 있는 흙이 없었기 때문에, 남유럽이베리아에서는 러스터웨어(lusteware)라는 도기가, 네덜란드 등에서는 마욜리카(majorlica)등의 자기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아름다움은 청화백자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이탈리아든 네덜란드든 유럽은 그릇 제작에 사용한 점토의 특성 때문에 흰색 도기는 꿈도 꾸지 못했다. 유럽은 1710년까지 자기 생산에 필수적인 고령토의 존재를 모르거나 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니 1,300℃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그릇을 굽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고, 그런 온도에서 휘발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안료인 파란 코발트블루의 존재도 잘 몰랐다.(p34)... 이같은 상황에서 매일같이 칙칙한 그릇만 보다가 하얀 눈처럼 우아하기 그지없는 순백색 그릇을 보았을 때 얼마나 설레었을 것인가!(p37) <유럽 도자기 여행 : 북유럽편> 中


 청화백자는 백자, 즉 하얀 자기에 푸른색 안료인 코발트블루로 그림을 그려 장식한 것을 말한다. 청화백자는 지구의 도자기 역사를 바꾸어놓은 주역이다... 유럽 왕실은 모두 청화백자에 눈이 멀어 너도나도 파란 코발트블루의 바다에 빠져들었다.(p34) 그래서 탐미주의를 대표하는 오스카 와일드(Oscar Fingal O'Flahertie Wills Wilde, 1854 ~ 1900)는 청화백자, 즉 쯔비벨무스터(Zwiebelmuster)에 대해 "일상에서 파란색 도자기를 사용할수록 그 깊은 세계에 점점 도달하기 어려워진다"고 표현했다.(p35) <유럽 도자기 여행 : 동유럽편> 中


 당시 유럽 상류층은 중국 청화백자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으나, 이를 받아들여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도자기로 생산하게 된 계기는 일본의 아리타 자기의 수입으로부터였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의 아리타 자기를 만들어낸 이는 조선의 도공 이삼평이었다. 일본에서 '도자기 전쟁 Ceramic war'으로 부른다는 '임진왜란'의 영향은 이처럼 멀리 떨어진 유럽에도 미치고 있었다.


[사진] 청화백자(출처 : 한국경제매거진)


 임진왜란 (壬辰倭亂, 1592 ~ 1598) 당시 아리타가 속해 있는 사가현(佐賀縣)의 영주였던 나베지마 나오시게(鍋島直茂, 1537 ~ 1619)는 1만2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 땅에 쳐들어왔다가 나중에 다시 일본으로 퇴각할 때 수만 명(많게는 10여만 명으로 추산)의 도공을 붙잡아와서 일본에 정착키고 자기를 만들게 만들었다. 이때 일본에 잡혀온 이삼평(李參平, ? ~ 1655)은 아리타에 있는 이즈미야마(泉山)에서 태토를 발견해 이곳에 가마를 만들고 일본 최초의 백색 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p138)... 1650년대부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의해 유럽으로 수출된 아리타 도자기는 공식 기록에 의한 것만 해도 100여년 동안 120만여 점이 넘는다고 한다.(p139) <유럽 도자기 여행 : 북유럽편> 中

 

 일본 도자기가 유럽 왕실에서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교체되는 시기에 바닷길을 막는 쇄국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도자기 제품의 수입이 끊기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일본과 베트남을 새로운 수입처로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아리타 도자기가 유럽에서 각광받게 된 것이다.(p51) <유럽 도자기 여행 : 동유럽편> 中


 실크로드(Silk Road)를 통해 중국 자기들이 들어오고, 대항해시대를 맞이하여 동양으로 진출한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대대적으로 일본 자기가 수입되면서 유럽 도자기 산업은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현재 중국이 경제 성장을 위해 유럽과 미국의 선진기술을 받아들였던 그 방식 그대로 16세기 유럽인들은 모방을 통해 도자기 산업을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다. 


[사진] 유럽 도자기(출처 : 경향신문) 


 품질이 월등히 좋은 중국 자기들이 쏟아져 들어오게 되자 델프트 마욜리카 산업도 일대 변화에 직면하게 되었다. 눈높이가 높아진 소비자들을 상대로 물건을 팔려면 그들 역시 제품의 질을 높이든지, 기존의 색상을 바꾸든지 무엇인가 변해야 했다. 그러면 델프트 도공들은 과연 처음으로 어떤 일을 했을까? 가장 손쉬운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그렇다. 가장 쉬운 방법, 그것은 모방이다... 1640년부터 1800년께까지 델프트 도기들은 거의 대부분 중국 자기를 성공적으로 모방할 수 있었다.(p52) <유럽 도자기 여행 : 북유럽편> 中

 

 동유럽 편에서 누누이 살펴본 바와 같이 마이슨 도자기를 제작하게 한 작센의 군주 아우구스트 1세처럼 샹티이의 루이 앙리 왕자 역시 열렬한 동양 도자기 애호가였고, 특히 일본의 아리타 가키에몬 양식을 좋아했다. 이 점 역시 아우구스트 1세와 똑같다. 그래서 샹티이 공장의 초기 제품은 가키에몬 도자기와 거의 흡사한 '파송 드 자퐁 facon de Japon'이 생산되었다. 이들 제품은 언뜻 보면 어느 것이 아리타 자기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정도다.(p453)  <유럽 도자기 여행 : 서유럽편> 中


 이처럼 유럽 도자기는 중국과 조선, 일본의 영향을 받아 출발하였음에도 이제는 이들 지역으로 제품을 수출할 정도로 발전하게 되었음을 <유럽 도자기 여행>을 통해서 알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동양에서 출발한 도자기 산업이 유럽에서 꽃피운 이유는 무엇일까? 


아르민 클라인(Armin Klein, 1855 ~ 1883)의 인물화 도자기에는 흡사 라파엘전파의 그림속에나 나올 법한 인물들이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아르민 클라인의 도자기를 보고 있으면 캔버스 대신 도자기 위에 그림을 그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을 다 그린 다음 불에 구워야 한다는 점에서, 화폭이 그리 넓지 않다는 점에서 매우 제한적이지만 도자기의 그림은 깨지지 않는 한 변색되지 않고 영원불멸한 존재로 남아 있을테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가!.(p391) <유럽 도자기 여행 : 동유럽편> 中


 동양에서 도자기는 그릇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으나, 유럽에서는 이를 넘어서 건물 외벽을 장식하는 타일을 비롯하여 도자기 위에 그림을 그리는 용도로까지 활용되었다. 아마도 이것은 신(神)의 절대적 가치를 추구하는 유럽인들의 취향과 도자기의 속성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반면, 인간의 유한함을 강조하며 건물에 나무(木)을 많이 사용하는 동양 문화권에서는 서양만큼 도자기의 절대성은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용도에 제한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추측해본다.

 

[그림] 극세밀화로 복원된 황룡사 9층 목탑(출처 : 중앙일보)


 그리고, 이러한 수요(需要, demand)의 차이는 자연스럽게 경제주체들의 결합을 유도하고 그 결과가 오늘날의 유럽 도자기 산업과 우리의 차이를 만들어낸 것이라 생각해 본다. 큰 시장(市場)이 있는 곳에는 생산을 위한 여러 요소들이 결합되기 마련임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기에, 20세기 소비 사회를 통찰한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1929 ~ 2007)의 주장은 유럽 도자기 발전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독점적 생산은 결코 단순히 재화의 생산만은 아닌, 항상 제(諸) 관계의 (독점적) 생산이며, 여러 차이의 생산이기도 하다. 따라서 거대한 트러스트와 미소(微小)한 소비자, 생산의 독점적 구조와 소비의 '개인주의적' 구조 사이에는 논리적 공범관계(共犯關係)가 존재한다. 왜냐하면 개인이 욕심부리며 '소비하는' 차이는 또한 일반화된 생산의 중요한 영역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오늘날에는 독점의 영향하에서 대단히 폭넓은 균질성이 생산 및 소비의 여러 내용(재화, 생산물, 서비스, 관계, 차이)을 결합시키고 있다.(p119) <소비의 사회> 中


 <유럽 도자기 여행>에서는 이처럼 유럽의 여러 지역의 아름다운 도자기 사진과 함께 도자기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유럽 도자기의 발전에는 우리의 아픈 역사 또한 자리잡고 있음도 우리에게 알려준다. 책을 통해 도자기라는 씨앗의 원산지는 동양이었으나, 이를 꽃피운 곳은 유럽이었음을 확인하면서 우리는 도자기 문화를 꽃피운 유럽에 대한 부러움과 함께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우리 것에 대해서 도 생각하게 된다.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은 우리 곁에 있지만, 평소에는 잘 알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자신을 잘 모르는 것은 아닐까. 


 2018년 광복(光復) 73주년을 맞아 근대화(近代化)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부정하는 뉴라이트의 역사관으로는 결코 깨달을 수 없는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을 <유럽 도자기 여행>을 통해 하면서 이번 페이퍼를 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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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7 16: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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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8 09: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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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8 23: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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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8 23: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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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8 23: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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