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명의 외교 관계는 명이 조선 왕을 책봉하고 조선은 명에 조공하는 체제를 기본 골격으로 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양국 간에는 빈번한 사신 왕래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태조대에는 대명 관계의 갈등 양상에 따라 사신 파견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p42)...  원래 조공이란 중국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은 주변 국가가 사신을 파견해 공물을 바치면(진헌 進獻), 중국 황제가 그에 대한 답례로써 물품을 내려 주는 (회사 回賜) 경제 행위가 핵심이었다. 진헌과 회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러한 조공 무역은 근대적인 국제 무역과는 성격이 다르지만, 국제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물자의 교역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공무역이었다.(p43) < 15세기 : 조선의 때 이른 절정> 中


 <15세기 : 조선의 때이른 절정>에서는 1392년 건국된 조선 朝鮮이 세종(世宗, 1397 ~ 1450)대에 국가의 틀을 빠르게 잡아가는 모습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15세기에 이루어진 조선의 변화는 크게 '소중화 小中華'라는 주제어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로 만들어진 조선은 15세기에 국가 기틀을 잡는 과제를 안고 있었는데, 그 중심에는 왕조정통성 王朝正統性 확보 필요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조선은 이러한 과제를 '소중화'를 통해 빠르게 풀어갈 수 있었다. 


 조선은 왕조정통성 확보를 위해 중국과의 관계부터 정리해 나간다. 명나라의 책봉을 받은 왕 王의 지위를 국내외적으로 결정하면서 조선의 외교정책은 '사대 事大'로 결정되었다. 그렇지만, 과연 교린 交隣으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 <15세기>는 의문을 제시한다. 


 흔히 조선 시대의 대외 정책을 '사대교린 事大交隣'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사대'의 대상은 중국이고, '교린'의 대상은 중국을 제외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나 부족들이다. 즉 여진, 일본, 유구 琉球 등이다. 그런데, '교린'이라는 말에는 서로 필적할 만한 나라가 대등한 자격으로 교류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과연 조선이 여진, 일본, 유구 등을 대등하게 인식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p44) < 15세기 : 조선의 때 이른 절정> 中

 

 이의 근거로 당대의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들고 있다. 고지도는 지도의 정확성보다 당시를 살아가던 이들의 세계관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우리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통해 '소중화'에 대한 조선인의 생각을 찾을 수 있다.


 고지도 古地圖는 역사 지도와는 달리 현재의 지식을 과거 어떤 특정 시점의 영사막에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가 제작될 당시의 시점에서 투사된 지도이고 그 당시 지식의 총제가 특정 공간을 지도상에 재현한 도표이다. 그것은 단순한 기념 사진이 아니라 과거에서 현재를 향하여 점진적으로 동일한 공간을 그려나가면서 공간에 대한 보다 개선된 도형을 보여 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p13) <서양고지도와 한국> 中


[사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출처 : 위키백과)


 1402년에 제작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라는 세계지도가 있다. 이 지도에는 한가운데 중국이 있고 그 오른쪽에 실제보다 크게 확대된 조선이 있다. 그리고 조선의 아래쪽에는 실제보다 훨씬 더 축소된 일본이 그려져 있다. 실제보다 확대된 조선과 축소된 일본의 모습은 이 지도를 제작한 조선인의 일본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즉 당시 조선 사람들은 일본을 조선과 대등한 관계로 인정하기보다는 조선 아래에 있는 존재로 인식했다고 할 수 있다.(p44) < 15세기 : 조선의 때 이른 절정> 中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로 대표되는 조선인의 인식을 <15세기>에서는 민족적 자존의식이라고 정리한다. 비록 중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소중화로서 문화국임을 자부했던 조선 선비들의 인식이 <15세기>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 천문학, 예악, 문자 등 과학기술의 발달로 이어져 조선은 15세기에 절정에 이르렀다고 <15세기>는 해석하고 있다. 


 그렇지만, 독자적인 민족의식이 자부심의 표현으로부터만 나온 것일까. <한국수학사>는 <15세기>보다 한층 깊이 들어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한국수학사>의 다른 관점은 천문, 예악, 문자의 관점에서 <15세기>와 비교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조선은 오래전부터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여 문화적으로 중국과 동등하다는 자존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세조 때 양성지 梁誠之의 말을 들어보면, 그는 조선이 명과 대소에 따른 국력의 차이가 있고 따라서 사대를 한다는 현실은 인정한다. 그러나 문화적인 면에서는 조선도 기자 箕子 이후 문물이 발달해 '군자지국', '예의지방', '소중화'라 불리며, 중국과 비교해 전혀 열등할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대동 大東 으로서 단군이 중국의 전설적인 성군인 요 堯와 같은 시기에 나라를 세웠고, 기자조선- 신라 - 고려를 거치면서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 역사를 전개해온 사실을 강조했다. 조선 부분을 확대, 과장해 그려냈던 이면에는 이러한 문화적 자존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p58) < 15세기 : 조선의 때 이른 절정> 中


 1. 천문 天文


 <15세기>에서는 조선이 천명 天命을 받았음을 <천상열차분야지도> 제작을 통해 보여준다고 서술하고 있다. 고구려의 <천상열차분야지도> 탁본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1395년 천문도 제작은 이러한 조선 왕조 적통성 주장의 근거가 되었다. 


 하늘을 대신해 인간 세상을 통치하라는 명을 받은 자로서 왕은 하늘의 뜻을 받들기 위해 항상 정성을 다해 천문을 읽어야 했다. 그렇기에 천문학은 제왕학이었다.... 조선 왕조가 개창된 지 불과 3년 만에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제작한 까닭이 분명해진다. 조선 왕조가 천명을 받았으며, 요/순 임금처럼 모범적인 성군의 정치를 펼칠 것을 천하에 알리는 상징적인 행위였다.(p136) < 15세기 : 조선의 때 이른 절정> 中 


 <한국수학사> 역시 천문학의 목적성에 주목하고 있다. 간의, 옥류 등 천체기구를 보관하던 건물(흠경각)의 건설은 실생활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왕실의 정통성 확보에 목적이 있었다고 해석하고 있으며, 이러한 관점은 예악과 문자의 의의에서도 이어지게 된다.

 

 흠경각(欽敬閣)은 단시일에 집중적인 노력에 의해 발휘된 한국인의 창조력에 관한예증일 뿐이다. 이 업적은 전통적인 유교 문화의 후예임을 과시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지고 보면, 누각제도 역시 일반 대중에게 시각을 알린다는 것은 둘째 문제였고, 왕실의 정통성 확보가 가장 큰 목적이었다.


 우리나라는 멀리 바다 밖으로 떨어져 있으나, 모든 문물은 오로지 중화(中華)의 제도를 따르고 있다. 다만 천문 관측의 의기만 갖추어져 있지 않다. (<세종실록>, 세종 19년 4월 15일) (p245) <한국수학사> 中

 

 2 예악 禮樂


 조선 시대 예악 또한 실생활의 필요가 아니라 질서와 조화라는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왕조 차원의 정비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러한 필요에 의해 당시 <악학궤범>의 편찬과 악기 정비 등의 작업이 이루어지게 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조선 왕조는 유교적 이상 국가를 구현하고자 예악 정치를 표방했다. 여기서 예 禮와 악 樂이란 추상적 구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예가 질서를 위한 것이라면 악은 조화를 위한 것이다. 질서와 화합을 위해 필요한 예악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실체로서, 형정 形政의 근본을 이루며 왕도의 필수 요건이다.(p151) < 15세기 : 조선의 때 이른 절정> 中


 세종은 예술에서도 주체성을 강조했지만, 유교 국가의 이상적인 지도자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 조선의 왕으로서 가장 주력한 음악은 역시 아악이었다. 그래서 거문고, 비파, 대금, 생황 등의 아악기가 제작되었다. 그러나 악기를 만드는 것보다 악기를 조율하는 것이 먼저였다. (p256) <한국수학사> 中 


3. 문자 文字


 세종 당시 가장 위대한 발명이라 불리는 훈민정음의 창제. 이에 대해 <15세기>에서는 말과 글이 다른 필요에 의해 훈민정음이 창조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수학사>에서 바라보는 관점은 이와는 조금 다르다.


 한자를 가지고 한국어를 표기하려는 시도, 이른바 차자표기법 借字表記法이 등장하기는 했다... 차자 표기법이 발전해 사용되기는 했지만, 말과 글이 따로 노는 상황은 한자, 한문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보통 백성과 여성에게 많은 불편을 불러왔다.(p165) < 15세기 : 조선의 때 이른 절정> 中


 <한국수학사>에서 훈민정음의 창제가 주체성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왔음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한국수학사>에서는 훈민정음에 담긴 사상이 중국 고전 사상인 음양오행이 담겨 있음을 밝히고 있으며, 결국 소중화로서 정통성을 표현하고 했다는 한계점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세종의 왕립 아카데미인 집혀전이 이룩한 최대 업적은 바로 한글 창제이다. 체계적인 문자를 발명하게 된 가장 큰 동기는 바로 독립국가로서의 주체성에 대한 자각이다... 여기에서도 주체의식과 관련해서 정통성을 지향하는 태도가 강하게 드러나 있다. 민족의 주체성을 과시하기 위해서 독자적인 문자를 창조하려고 했던 것은 중국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를 원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의식적으로 옛 중국의 고전 사상에 적극적으로 다가가고자 했던 것이다. <훈민정음>의 기초 작업에 직접 동원된 학문과 사상은 중국의 음운학과 주자학(朱子學)이다... 성음학이건 송학이건 그 근본 사상은 모두 음양오행설이다. <훈민정음>에도 이 전통적 이데올리기가 반영되었다.


 하늘과 땅의 이치는 오직 음양과 오행뿐이다. 곤괘와 복괘의 사이가 태극이 되고 움직이고 고요한 후에 음양이 된다. 무릇 생명을 지닌 무리로서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자 음양을 두고 어디로 가나. 그러니 사람의 목소리도 모두 음양의 이치에 따른다. (<훈민정음해례> 제자해) (p264) <한국수학사> 中 


 이렇게 본다면, 결국 조선 시대 초기 의 과학, 문화 혁명은 조선 왕조의 정통성 확보라는 목적하에서 이루어진 관제官製 혁명이라는 한계점을 지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변화를 끌어내지 못한 조선 초기 과학 문화 혁명에 대한 <한국수학사>의 평가는 <15세기>에 비해 냉정하다.


 과학이 가설이라고 한다면 세종 시대의 과학을 지배한 가설은 중국의 옛 자연철학에 근거를 둔 것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그 과학 정신은 한반도의 독자적인 합리주의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적인 주체성은 과학기술의 지속적인 성장을 촉진하는 원동력이 되지는 못했다. 이는 세종 시대의 과학자들이 당시 과학 문화의 핵심적인 주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과학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집단 의식이 각 구성원의 자율적인 과학 정신에 있지 않았고, 이 집단 또한 세종의 개성이 반영되어 재구성된 소재, 또는 필요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된 도구의 집합에 불과했던 것이다.(p269) <한국수학사> 中  


 이에 대비되는 변화가 서양에서 있었음을 <15세기>에서 보여주고 있다. 15세기 한국사를 세계사와 비교해서 서술하는 것이 <15세기> 민음 한국사의 장점 중 하나라 여겨진다. 여기에 소개된 구텐베르크(Johannes Gensfleisch zur Laden zum Gutenberg, 1398~ 1468)의 금속활자로 인해 <성경 The Holy Bible>이 보급되고, 이로 인해 '종교개혁 宗敎改革'이 크게 일어났다는 사실과 비교해 본다면, 조선시대 과학기술 발전의 한계점을 보다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1450년 독일의 구텐베르크는 유럽 최초로 금속활자를 사용한 대량 인쇄에 성공했다. 이 사건은 유럽뿐 아니라 세계 문화사의 돌이킬 수 없는 이정표였다. 구텐베르크는 포도즙을 짜내는 압착기에서 착안해 양면 인쇄 등 기존 목판인쇄기보다 월등한 활판인쇄기를 발명했다. 이로써 이전에는 손으로 베끼는 데 4~5개월이 걸리던 200쪽의 책을 하루면 인쇄할 수 있게 되었다. 지식 복제의 속도를 120 ~150배나 증대시킨 셈이다.(p19) < 15세기 : 조선의 때 이른 절정> 中


 2018년 5월 미국 빌보드(Billboard) 차트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BTS(방탄소년단)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앨범 발표 직후 에서 높은 인기를 끄는 방탄소년단과 K-POP을 통해 15세기 조선의 과학 문화 혁명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많은 이들이 K-POP의 한계점 중 하나로 연예 기획사 시스템을 들고 있다. 연습생 중에서 소수의 엘리트를 데뷔시키는 연습생 제도는 K-POP의 장점이자 한계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수 기획사가 끌어가는 K-POP의 모습은 15세기 조선 초기 지도층이 끌어간 과학, 문화 발전의 모습을 떠올리게한다. 그렇지만, K-POP과 조선 전기 과학이 큰 차이는 일반 대중들의 삶을 변화시켰다는 점이라 여겨진다. 역사적 사실은 '최초'가 중요할 지는 모르지만, 역사적 의의는 '삶의 변화'에 더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이번 페이퍼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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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6-03 21: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5세기 조선 지식인 그리고 사림들에게는
자주적 의식이 결여되었던 걸까요?

소중화주의에 천착해서 오로지 대국을 향
한 해바라기만 하다가 결국 명나라가 망해
가는 판에, 병자호란이라는 전대미문의 국
가적 망신을 당했으니까요.

하긴 숭정 몇백년이라는 연호를 채 버리지
못한 소중화 완완세인들의 시대착오적 유
산은 그 유구한 전통을 묵묵하게 이어가고
있는 현실이죠. 그들이 신봉하던 중화가 아
메리카나로 바뀌었을 뿐.

겨울호랑이 2018-06-03 21:30   좋아요 2 | URL
15세기 조선이 등장했을 때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정권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외부와의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소중화 사상과 사대를 유지할 수 밖에 없었는지 모르겠네요. 국가의 하부까지 개혁할 수 없었던 조선 문화의 한계는 여기에서도 나타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레삭매냐님 말씀처럼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는 것도 느끼게 되네요...

2018-06-03 2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03 2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8-06-03 2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탄소년단이 등장할 줄이야ㅎㄱㅎ! 겨울호랑이님 소재 연결 파도타기 늘 재밌어요^^!

겨울호랑이 2018-06-03 22:40   좋아요 1 | URL
^^:) 제가 소재를 좀 막 던지는 편이지요... 일단 먹물을 화선지에 흩뿌리고 점을 연결해서 선을 만들고 글자라 우기는 느낌이랄까요 ㅋㅋ

AgalmA 2018-06-03 23:01   좋아요 1 | URL
소재 즉흥성이 우리 친구할 만합니다ㅎㅎ;;
아빠 겨울호랑이 & 아기 흰 호랑이, 뒤에는 엄마 호랑이 감시입니까ㅋ
겨울호랑이님 프사 구경 놓칠까봐 자주 와야겠네요^^;;

겨울호랑이 2018-06-03 22:48   좋아요 2 | URL
오늘 이천 아울렛에 갔었는데 도자기로 만든 호랑이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ㅋㅋ 역시 고양이 같은 호랑이가 제일 친근하게 느껴져요^^:)!

AgalmA 2018-06-03 2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다만 떨다 갈 순 없고.... 글에 대한 소감도 남겨야지;
이 글의 관점이 참 좋습니다. 최초가 아니라 문화 파급력을 더 중요하게 봐야 한다는 지적이^^👍

겨울호랑이 2018-06-03 22:58   좋아요 1 | URL
ㅋㅋ 새삼스럽게 AgalmA님의 독후감을 접하니 어색하지만... 저 역시 격을 갖춰서.. AgalmA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2018-06-04 15: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6-04 15:3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