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아버지
장은아 지음 / 문이당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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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떠나서 외국에서 사는 교포들 페북엔 흔하다. 페북이니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친구가 되고 일상을 엿볼 수 있지, 그렇지 않았으면 교포란 막연히 지구촌 어딘가에 존재하리라 여겨지는 가상의 존재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업이나 학업 때문에 외국에 있는 분들도 계시지만, 개중에는 한국에서 살기 힘든 여러 가지 이유로, 즉 한국을 탈출한 분들도 계신 거로 안다. 예전에 재미교포라면 막연히 동경했었는데, 그 이면을 생각해본 후, 이분들의 삶이란 무척 고달픈 것이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성북동 아버지>는 재미교포 장은아 작가의 작품이다. 작품의 주인공인 수혜의 삶이 얼마큼 실제 작가의 삶을 반영하고 있는가를 잘 모르겠지만, 작가의 경험 없이 나온 이야기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주인공 수혜가 왜 미국으로 오게 됐는지를 이야기하는 내용이 작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한 마디로 불행한 가정사가 만들어낸 고통과 슬픔의 반평생을 그린 이 작품은 정통적인 소설 작법에 따라 쓰인, 정통파 소설이란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이야기도 한국의 가부장제적 가족 제도 아래에서 우리가 흔히 봐왔던 것이라 익숙하다.

 

뭔가 대단히 익숙한 형식과 내용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수혜가 어릴 때부터 성장해서 미국으로 떠나기까지의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나는 주인공의 상황에 감정이 이입돼 가슴이 뭉클하고 목에 메어오는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꼭 수혜의 가족이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가족이란 아픔이나 슬픔 없이는 마주하기 힘든 집단이다. 우리는 성장하면서 아버지나 어머니 중 누군가가 불편하고 미워서 차라리 인생에서 사라져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고, 내 진짜 부모는 따로 있을 거야 하는 가족 로망스를 가지며 살기도 한다. 주인공 수혜에게 아버지는 그런 존재였다. 다행인 것은 평생 원망하던 존재인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너무 뻔한 결말이라 생각될 수도 있지만, 이해와 화해로 끝나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힘은 항상 크다. 그게 가능했던 건 아버지가 기본적으로 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작품은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불행했지만, 가족의 끈으로 결국 행복할 수 있었던 한 여성 재미교포의 이야기다. 익숙한 소재지만, 감동까지 느낄 수 있었던 건 작가의 힘이라 생각된다. 중년 이후 분들이 읽어보시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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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쓰고 다시 쓰고 끝까지 씁니다 - 시나리오에서 소설까지 생계형 작가의 글쓰기
김호연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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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 소설가들은 너무 많아서 아직 이름만 알고 못 읽어본 소설가들이 꽤 된다. 그런데 한 권도 아니고 두 권 읽은 소설가는 김호연 작가 외엔 기억이 안 난다. <불편한 편의점>에 이어 지난주 주말엔 <망원동 브라더스>를 읽었고, 이번 주말엔 <매일 쓰고 다시 쓰고 끝까지 씁니다>를 읽었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작가가 그동안 글을 쓰며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밝힌 일종의 글쓰기 자서전같은 책이다. 나는 내게 감동을 준 <불편한 편의점>이나 <망원동 브라더스>가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나 궁금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그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을까 싶었다. 지금껏 작가는 소설가이기보단 시나리오 작가의 정체성을 가지고 지속해서 글을 써왔고, 그 역량이 소설로 전화돼 감동과 재미, 웃음과 성찰을 주는 이야기들이 탄생하게 됐다는 걸 알았다. 무려 20여 년 동안 글쓰기 하나에 대한 욕망과 의욕으로 가난과 좌절, 실의의 날들을 극복하며 그가 이뤄낸 성과들은 내 예상보다 많았다.

 

세상 뭐든지 그냥 얻어지는 건 없어 보인다. 이 책은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줄 목적도 있는 책이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서 글쓰기를 매개로 한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봤다. 어떨 때는 내가 느꼈던 것과 비슷한 실의에 공감이 되기도 했고, 경제적 궁핍 속에서도 끊임없이 글쓰기를 해왔다는 점에서 존경스럽다.

 

이 책은 작년 11월에 출간됐는데, 아쉽게도 <불편한 편의점>의 창작 과정에 얽힌 이야기까지 진행되지 못하고 멈춰버렸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보면 항상 힘이 난다. 그래서 <인간극장>을 주야장천 보던 때가 있었고, <다큐멘터리 3>도 그런 열정으로 봤다

 

* 이 책을 읽으며, 두 군데 오타를 발견했다. 틀림없이 중쇄를 찍으실터이므로, 그때는 고쳐서 나오면 좋겠다. 표지 예쁘고, 내용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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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7-06 2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휴.... 정말 오랜 서재 친구분께서.
격조했습니다.

wasulemono 2021-07-06 20: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영화, 도시를 캐스팅하다 - 한국영화가 사랑한 도시, 도시가 만난 영화 한티재 산문선 2
백정우 지음 / 한티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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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비교하면 영화에서 장소는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시각적으로 직접 호소하는 게 영화다 보니 더 그런 것같다. 한때는 인물이나 배우에 시선을 집중하던 때도 있었지만, 요즘은 인물이나 배우 빼고 다른 걸 감상하는 취미가 생겨버렸다. 그래서 예전에 한 번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영화 볼 때 ‘가급적 인물 안 보기’를 시도한 적도 있다.
동시대 영화에선 영화 배경이 큰 느낌을 안 주는데 예전 영화를 볼 때면, 영화를 촬영한 곳이 어디인지 궁금하고, 그 궁금함이 지속하면 영화를 본 후 인터넷을 뒤지는 버릇도 생겼다. 비교적 최근 영화들은 그 장소를 추정하는 게 어렵지 않지만, 1950~1960년대 한국영화의 경우, 지금과는 완전히 바뀐 곳이 많아서 정말 어렵다. 그래서 누군가 조사해놓은 게 있어서 어떤 영화를 어디서 촬영했다는 정보를 얻게 되면 호기심이 동하기 마련이다. 오랫동안 생각나는 곳이면 여행 삼아 다녀올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런 탓일까, 이런 류의 책들이 있으면 싶지만, 그런 책은 거의 없다. 그런데 전혀 없는 게 아니었다. 영화평론가 #백정우 선생님의 저서 <영화,도시를캐스팅하다>(한티재, 2019)가 그런 책이다.
이 책에는 1990년대 이후 최근까지 나온 영화들의 촬영지 14곳을 선정해서 그곳에서 찍은 영화들이 이 장소들을 어떻게 수용하고 있는가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제천, 함평, 인천, 군산, 영월, 삼척, 옥천, 파주, 춘천, 울산, 성주, 거제, 부산, 대구, 그리고 번외편으로 서울.
이 책을 읽으면서 전국을 영화 로케이션 장소 탐방이라는 콘셉트로 여행을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재미나게 읽었던 꼭지는 ‘군산’이다. 문학 답사의 단골 방문지이기도 했던 군산은 장률 감독의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의 촬영지로, 내가 본 영화의 인상과 잘 결합하면서 한층 생생하게 읽혔다. 메인이 되는 이야기들이 주로 1990년대 이후, 지방 로케이션 장소 이야기에 할애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함인지, 번외편은 1970~1980년대 서울을 다루고 있다.
흔히 이런 류의 생각에서 기대하는 예쁜 사진은 없지만, 오히려 글로만 읽으니 상상하는 재미가 있어서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책 전체 분량도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라, ‘단꺼번에’ 읽기 좋다. 나는 한 꼭지 읽을 때마다 생소한 영화들이 나오면 왓챠에 그 영화가 있는지 찾아보고, 있으면 ‘보고싶어요’에 표시하는 재미도 덤으로 가졌다.
한국영화의 전성기 1950~1960년대 로케이션에 관한 이야기가 없는 게 아쉽지만, 이건 그냥 나올 만한 이야기는 아닐 거란 생각이 든다. 앞으로 영영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어 슬프다. 나중에 할 일이 없어지는 때가 오면, 道樂 차원에서 내가 한번 해보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인터넷에 카페를 개설한 지 1년은 된 것같은데, 회원은 나밖에 없다.
‘제천’ 꼭지에서 영화평론가 故 류상욱이 거론되어 반갑고 안타까웠다. 한때 천리안 영화동호회에서 친분을 가졌던 분이다. 나한테 들뢰즈 불어판 한 권을 빌려 가시고선 돌려주지 않으셨다. 이젠 영영 돌려받지 못하게 된 게 슬프다.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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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편의점 불편한 편의점 1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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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구 청파동 소재 한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게 되는 중년 노숙자와 그를 둘러싼 동네 사람들 이야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숙자가 편의점 알바생이 돼 동네 주민들과 나누는 삶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특별히 참신한 소재는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소재 자체가 대단히 친숙하고 일상적이어서 호기심을 갖고 읽게 됐다.
노숙인이 과연 알바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으로 그의 하루하루를 따라가다 보면, 그를 동정하고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이 그와 어느새 친해지고, 또 조언과 격려, 위로를 받는 위치로 뒤바뀌는 충격적인(!) 변화가 따른다. 극적인 사건은 없지만, 주인공 노숙자가 그보다는 괜찮은 삶을 살아간다고 믿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따뜻함과 진심 어린 조언과 격려는 그걸 지켜보는 내게도 간접적으로 위로가 되었다.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일드 <심야식당>도, 또 캐드 <김씨네 편의점>도 생각난다. 편의점만큼 현대인에게 익숙하고 친숙한 공간이 있을까 싶은데, 이 작품은 의미 있는 공간을 작품의 배경으로 설정했고, 사회적으로 하대받는 존재인 노숙자와 그를 바라보며 동정하는 사람들이 결국은 비슷한 삶을 통과해가는 동료들이라는 걸 잘 부각했다고 생각된다.
난 웃음의 코드가 좀 독특하고, 또 웬만한 건 내 웃음을 유발하기도 힘든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나는 계속 키득 키득거렸다. 좀 어눌하면서도 진심을 담아 할 말은 다 하는 주인공의 언어 구사력은 이 작품을 더욱 재미있게 읽게 해줬다.
이 작품은 소설 그 자체로도 좋지만, 뮤지컬로 만들어지면, <지하철 1호선>, 그리고 에피소드를 좀 덧붙이면 tv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정도의 인기는 충분히 얻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눈 밝은 제작자가 있다면, 모름지기 작가님께 한시바삐 연락을 취해봐야 하리라.
이 소설은 일상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지만, 하루하루 지쳐가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 가족과 같이 지내되 벽을 쌓고 사는 분, 이것저것도 아니지만 잔잔한 일상의 이야기를 즐기시는 분, 그런 분들이 한번 읽어보시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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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입니다 -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
김지은 지음 / 봄알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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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글은 애초 아래에 게시되었습니다.



내 문제를 인권의 문제로 보면서 인권에 대한 공부를 조금씩 하고 있다. 그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그전엔 주로 영상물에 의존했다면 지금은 책들을 살펴보고 있다. 인권에 대한 보편적 개론서를 집었다가 보다 현실적인 책으로 방향을 틀었다.

<김지은입니다>.

제목만으로도 너무나 잘 알려진 권력형 성폭력 고발의 기록물이다.

이 책을 읽어가면서 고백 혹은 고발의 과정에서 김지은씨가 겪었던 심리적 고통이나 갈등, 그리고 이를 넘어서고자 하는 싸움과 결심의 내용들이 나의 그것과 너무 유사하다는 점에 많이 놀랐다.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로서 도지사이자 차기 대권 유력 후보인 어마어마한 권력자와 맞서 싸웠다는 점에서, 내 경우와 감히 비교하기조차 힘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김지은씨는 서지현 검사의 미투를 보면서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다고 한다. 미투는 남의 일이고, 자신이 싸우기엔 안희정은 너무나 벅찬 존재고, 용기를 내서 말해도 아무도 안도와줄 거란 생각, 그렇다면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자기만 조용히 있으면 되는 게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고. 권력에 의한 피해자들 모두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안희정이 계속 김지은씨를 부를 때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고 한다. 물론 계속 되는 성폭력의 과정에서. 자기 혼자 도망쳐 되는 문제가 아니고, 자기는 악몽같은 소굴에서 벗어나도 다른 피해자는 계속 생길 것이란 생각 때문에 괴로워했다고 한다.

나 역시 A가 내 연구실을 찾아오거나 전화를 하거나 카톡 문자를 보내거나 할 때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렇지 않을 때도 항상 A가 나를 부르는 공포에 시달렸다. 물론 이건 나를 포함해 연구원, 대학원생, 조교들 모두가 느끼는 것이었다.

연락이 제때 안 되면 난리가 나고 일이 있다고 그러면 밖에 있다가도 달려가야 했다. 그럴 수 없을 때는 욕을 먹을 각오는 해야 한다. 내 직책은 A의 수행비서가 아닌데, 현실은 그런 식이었다.

김지은씨는 지사의 이야기에 반문할 수 없고 무조건 따라야 했다. 무슨 말을 하든 안희정의 말에 수긍하고 기분을 맞춰야 했다. 어떤 일에 대해서도 거절할 수 없었다.

나 역시 A가 불편한 심기를 보이는 게 무서웠다. 짬이 한참 안 될 때는 그처럼 행동했던 것같다. 정말 거절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는 최대한 완곡한 말을 사용해서 거절의 의사를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이었다. 교수인 내가 이런데 강사나 연구원, 대학원생 이야기는 굳이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김지은씨가 JTBC 뉴스룸에 나와서 피해 사실을 밝힌 건 방송을 보는 국민이 자신을 지켜줬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피해자에게 용기를 주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고. 내가 SNS를 통해서 피해 사실을 고백한 것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검찰에 1차 고소인 조사를 받으러 가면서 이상하게 전보다 더 생생해진 자신을 느꼈다고 한다. 아마 그건 묵은 진실을 드러내놓으니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일 거라고. 나 역시 <살아남은 자의 유서>와 그에 이어지는 <뉴노멀> 시리즈를 통해서 하나씩 고백하고 나서 더 살아있는 자신을 느꼈다.

김지은씨는 권력자의 추천과 입김이 많이 작용하는 정치판에서 일을 하면서 고생했다. 그래서 그는 그만큼 더 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런 식의 구조는 대학도 마찬가지다. 교수의 눈밖에 나면 학위를 받기도 어렵고 강사 자리를 얻기도 어렵다. 한 대학원생의 미래가 교수의 수중에 놓이다 보니 둘 중 하나가 죽는다는 각오가 아니면 문제가 있어도 드러내기 어렵다. 그러면서 속으로 운다.

김지은씨는 자신의 미투로 뭔가 달라지길 바랐다고 한다. 악몽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고, 다른 피해를 막고 싶었다고. 잘못하면 그가 차기 대권 유력주자일지라도 처벌 받아야 한다고, 인간이 인간의 인권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외치고 싶었다고 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이 권력자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나 노리개가 되어선 안 된다. 대학이 지성의 전당이 되려면 인권의 가치를 가르치고, 거기서 우리 모두가 시작하자고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는 적나라한 폭력보단 위력에 더 많이 지배당하는 삶을 산다. 위력은 폭행, 협박이 아니라도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이용해 타인의 의사를 제어하는 유무형의 힘이다. 대학 역시 엄연히 위력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상사, 교수, 선배의 위력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위력에 의한 행위들이 마치 당사자 간 합의에 의한 것처럼 포장되고, 막상 피해를 고백하면 “넌 왜 피해자처럼 보이지 않는 행동을 했지?”란 식의 질문으로 피해자를 비난한다.

위력의 공간에서 최상위 권력자가 아닌 이상 어떻게 매 순간 자신의 피해를 고스란히 표출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그곳이 피해자에게 생존을 위해 소중한 공간이라면 참아내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지낼 수밖에 없다. 그게 현실이다.

김지은씨는 그런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런 삶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용기를 냈고, 싸웠던 것이다.

김지은씨가 싸우자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의 지지와 격려, 도움이 있었다고 한다. 나도 이전엔 알지도 못했던 분들에게서 많은 격려를 받고 있다.

김지은씨가 싸우기 이전에도 그런 싸움의 앞줄에 섰던 ‘퍼스트 펭귄’들이 있었다. 김복동, 권인숙, 서지현. 권력에 맞서 인권이 유린된 경험을 고발한 사람들이다. 이들이 있었기에 또 다른 ‘뒷줄 펭귄’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내 뒤를 돌아보니 아직은 아무도 없는 것같다. 그러나 언젠가 뒤돌아봤을 때, 누가 내 뒤에 서 있을 것같다.

김지은씨는 힘들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자신을 지탱하는 힘. 자신이 숨 쉬게 해준 것, 그건 글쓰기라고 했다. 싸움의 기록.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 역시 기록으로 이 과정을 남기는 일이다.

김지은씨는 수행비서로 일하면서 끼니도 제대로 드시지 못했던 것같다. 그리고 싸움을 하고 나선 좋아하는 호떡도 제대로 사드시지 못했다고 한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끼니도 제대로 챙기고 호떡도 가끔 사드시는지.

언젠가 기회가 되면 호떡 한번 대접하고 싶다.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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