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의 시간 속으로 - 지구의 숨겨진 시간을 찾아가는 한 지질학자의 사색과 기록
윌리엄 글래슬리 지음, 이지민 옮김, 좌용주 감수 / 더숲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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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질학자 윌리엄 글래스리의 <근원의 시간 속으로>. 저자는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지구의 거의 모든 역사를 고스란히 가진 그린란드 지역을 답사한다. 이 책은 있는 그대로의 야생을 감각하며 그가 써내려간 사색의 기록이다.



인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야생의 장대함 앞에서는 어떠한 분별도 필요치 않다. 저자는 끝없는 야생을 홀로 걸으며 체험한 이러한 통찰들을 하나씩 풀어놓는다. 모든 존재는 동등하며 그것들은 각자의 속도로 자연히 변화한다. 전체와 분리되어 있는 것은 없으며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인간 또한 그 장대함의 일부다. 시작도 끝도 한계도 없는 바로 그 야생의 풍경이랴말로 생의 본질이고 근원일 것이다. 지질학에 대한 전문적인 이야기들은 잘 모르는 분야라 기억 속에서 흩어졌지만, 저자가 묘사하는 야생의 풍경과 사색의 기록만큼은 생생하게 느껴진다.



책을 읽으면서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북극으로 떠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어디갔어, 버나뎃?>의 남극 기지가 떠올랐다. 영화 <와일드>와 <인 투 더 와일드>도. 언젠가 직접 야생의 웅장함 앞에 설 날을 기다리며, 야생이 사라지면 영혼의 집도 사라진다는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한다.



‘야생은 우리가 영혼이라 여기는 것의 태곳적 심장이다. 따라서 야생은 일종의 집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중략) 우리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지구의 진화 방식을 둘러싼 질문과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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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정원에서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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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이를 잃은 뒤에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를 마음껏 그리워하는 일, 그와 함께한 날들을 추억하는 일, 그의 빈자리를 향해 몰려오는 슬픔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일. 크리스티앙 보뱅은 사랑하는 이를 잃은 그 해 가을과 겨울, 작은 글의 정원을 가꾼다. 사랑과 자유와 지혜로 가득했던 여인 지슬렌을 향한 ‘그리움의 정원‘을.



이 책의 제목은 ‘그리움의 정원에서‘이지만 보뱅이 말하고 있는 것은 사랑이다. 그는 지슬렌이 얼마나 사랑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한다. 삶의 순간순간을 사랑으로 살아냈던 지슬렌이 얼마나 위대한 사랑의 천재였는지 말이다. 보뱅은 떠난 이를 그리워하며 슬픔에 빠져있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 슬픔조차 감싸안는 것이 ‘사랑‘임을 발견해낸다. 그러니까 보뱅은 모든 순간에, 심지어 사랑하는 이가 곁을 떠난 순간에도 사랑을 발견할 수 있음을 아는 사람이다. 그는 우리의 본성은 사랑이기에, 슬픔과 그리움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깊이 삶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삶을 사랑으로 살아냈던 지슬렌을 그리는 연서이자 삶을 향한 찬가다. 사랑하는 이에게 배운 그대로 삶을 사랑하겠다는 투명한 다짐이다.



책 속에서 가장 놀라웠던 부분은 바로 질투에 관한 구절이었다. 보뱅은 질투에 연루된 건 ‘불현듯 광기에 사로잡힌 한 사람‘일 뿐이며 그 안에서는 ‘오로지 나, 나, 나 기필코 나만을 외치는 소음과 분노에 찬 말‘만 소용돌이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질투란 사랑하는 이를 소유해야만 한다는 욕망이 일으킨 고통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질투에서 자유로지면 우리는 언제든 질투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 지위와 소유와 욕망 같은 건 전부 내려놓고 어린아이처럼 그냥 지금 사랑할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다. 불평하지 않고 화내지 않고 그냥 웃으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스스로 만들어낸 고통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던 날, 이 구절을 읽고 단숨에 고통에서 풀려났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인식의 전환을 일으킨 책으로 오래도록 기억하게될 것 같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냥 쥐고 있었던 걸 놓으면 될 일이었던 것이다. 바로 그 자리에 사랑이 있다.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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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를 닮은 소녀
에릭 포스네스 한센 지음, 손화수 옮김 / 잔(도서출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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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사자를 닮은 소녀>. 말 그대로 사자를 닮은, 황금빛 털로 뒤덮인 채 태어난 소녀 에바의 이야기. 전형적인 성장소설과는 사뭇 다른 결을 가지고 있는, 고독하고 쓸쓸한 분위기가 지배적인 소설이다. 사실 우리 모두 남들과 ‘다른‘ 점 하나쯤은 있지 않나. 대부분 눈에 보이지 않을 뿐. 보통의 사람들과는 눈에 띌 만큼 ‘다른‘ 용모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이유로 곱절은 더 위험하고 고독해진 에바의 삶은 ‘다름‘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어준다.



전반부인 에바의 탄생기는 3인칭 시점으로, 후반부인 성장기는 1인칭 시점을 넘나들며 진행된다. 에바가 과거를 회상하며 스스로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중반부부터 무척 흥미롭게 읽었다. 남들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시간을 고립되어 살아온 에바. 반대로 밖에 나갈 때는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화려한 옷을 걸치는 에바. 이처럼 아이러니로 가득한 생활 속에서 에바는 다른 청소년기 아이들과 다름없는 몸과 마음의 혼란을 겪어낸다. 자아상이 확립되는 바로 그 시기의 이야기들이 자세하게 다뤄져 흥미롭다. 스스로와 타인과 세상을 미워했다가 사랑했다가를 반복하며 성장해나가는 건 누구나 겪는 보편적인 일인데도 에바는 너무나 처절하게 이 시기를 지난다.



사실은 마지막 장면의 충격이 가시지 않아서 다 읽고 나서도 감정을 정리하기 힘들었다. 에바가 다음 행보로서 그녀 삶의 운명을 직접 결정하기 직전에 상징적으로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데, 5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읽으며 에바와 동질감을 쌓아왔던터라 그녀가 느꼈을 감정들로부터 거리를 두기 힘들었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생각해보니 이 결말 역시 기존의 성장소설과는 달리 아주 놀랍고도 색다르구나 싶다. 그러니까 결말을 통해 내가 받은 느낌은, 적지 않은 시간 진행되는 연극을 아주 몰입해서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무대 위에 거울이 등장해 나의 본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의 그 깨어남과 비슷했다.



노르웨이의 작가 에릭 포스네스 한센의 장편소설 <사자를 닮은 소녀>. 작년에 잔 출판사에서 출간된 로이 야콥센의 <보이지 않는 것들>도 노르웨이 작가의 소설이었는데 정말 독특하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었다. 북유럽 작가와 작품들에게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냉엄하면서도 남다른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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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앙스 - 성동혁 산문집
성동혁 지음 / 수오서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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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읽을수록 자꾸만 투명한 구 모양의 오브제가 떠올랐던 산문집. 성동혁 시인의 <뉘앙스>. 시인의 문장은 슬프고 맑지만 결코 깨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책을 다 읽고 난 뒤의 기분은 마치 아무도 밟지 않은 설원을 눈 앞에 두고 있을 때 느낄 법한 바로 그런 기분.



성동혁 시인의 시집을 오랜시간 아껴 읽어왔다. <6>과 <아네모네>. 첫 시집에 적힌 ‘이곳이 나의 예배당입니다‘라는 시인의 말을 오래도록 중얼거리던 날들도 있었다. <아네모네>는 오래도록 침대 맡을 지켜주었던 시집이고.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지만, 각별하게 여기는 시인이나 시집에 대해 말하는 것은 내밀한 모습을 들키는 것처럼 여겨져 말을 줄이는 편인데, 희한하게 주변에 성동혁 시인을 아끼는 이들이 많아 그의 시 이야기는 종종 나누곤 했었다. 산문집은 어떨지 가늠이 되지 않아 두고두고 아껴 읽자 싶었었는데 참지 못하고 그만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읽고 나니 문장들로 엮인 글 한 편 한 편이 마치 시와 같아서 미루지 않고 읽어보기를 잘했다 싶다.



수사를 늘이지 않아도 마음이 오롯이 전달되는 문장들. 이 책에 담긴 슬픔은 아주 투명하고 맑은 것, 이 책에 담긴 다정함은 아주 조심스럽고 따뜻한 것. 책을 읽은 것만으로도 소중한 마음을 전달받은 것 같다. 그중에서도 특히 ‘문장은 나의 아름다운 사람들을 담기엔 너무 협소하다.‘는 문장을, 그 속에 담긴 마음을 가만히 헤아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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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인 채 완전한 축제
술라이커 저우아드 지음, 신소희 옮김 / 윌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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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수전 손택의 말을 빌리자면 사람들은 모두 건강의 왕국과 질병의 왕국을 넘나든다. 기대 수명이 늘어난 오늘날 이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스물 두 살에 급성 골수성 백혈병을 진단받고 약 4년간의 투병생활 끝에 살아남은 술라이커 저우어드는 두 왕국을 넘나드는 자신의 여정을 솔직하고 가감없이 그려낸다. 처음 증상을 느꼈을 때부터 환자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과정, 끝까지 자신을 지탱했던 글쓰기와 사랑, 이후 건강의 왕국으로 진입하기 위한 자동차 여행까지. 이 책은 한 인간이 자신을 이뤘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자신을 처음부터 하나씩 받아들여나가는 이야기다.

질병과 고통만큼 삶의 불확실성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하는 것은 없다. 그리고 한 번 이것과 마주한 사람은 결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회복은 익숙한 내 모습을 영원히 버리고 새로운 나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저자는 생존확률 35퍼센트를 뚫고 살아남았으나 꿈과 사랑, 정체성을 비롯한 모든 것을 다시 처음부터 찾아나가야했다. 세상은 병에서 살아남은 이후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예전과는 영영 달라진 몸과 면역체계를 이끌고 다시 처음부터 자립해야하는 건 전부 자기 자신의 몫이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 저자는 자신의 투병 칼럼을 읽고 편지를 보낸 이들을 만나기 위해 자동차 여행을 떠난다. 보통 사람보다 아주 느린 속도로, 그러니까 새로운 그녀만의 속도로. 내밀한 이야기를 자기연민 없이 그러나 솔직하고 용감하게 드러내는 저자의 태도는 무척 매력적이다. 한치 앞을 모르는 여정을 떠나는 저자의 모습은 우리 자신의 모습과도 닮았다.

삶은 계속된다. 병을 진단 받은 뒤에도, 화학 치료를 받은 뒤에도, 성공적으로 치료가 끝난 뒤에도. 그게 무엇이든, 병이든 고통이든 슬픔이든 기쁨이든 우리는 그것과 ‘함께‘ 살아간다. 그 누구도 예외일 수는 없다. 우리는 술라이커 저우어드의 경이로운 이야기를 통해 ‘고통의 존재를 외면하지 않고 삶을 고통에 빼앗기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설령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야 할지라도.

​+ 원제 ‘Between Two Kingdoms‘도 좋지만, 한국어 제목 ‘엉망인 채 완전한 축제‘도 정말 좋다.

++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저자의 근황을 찾아보다가 병의 재발 소식을 들었다. 그녀는 근황을 알리며 프리다 칼로의 ‘나는 나의 뮤즈다. 나는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다. 내가 더 잘 알고 싶은 주제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나와 나의 몸과 질병과 고통과 삶. 용기와 희망. 그녀가 남긴 모든 문장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강인함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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