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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R 4
김경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11월
평점 :
드라이아이스
ㅡ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문득 어머니의 필체가 기억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리고 나는 고향과 나 사이의 시간이
위독함을 12월의 창문으로부터 느낀다
낭만은 그런 것이다
이번 생은 내내 불편할 것
골목 끝 슈퍼마켓 냉장고에 고개를 넣고
냉동식품을 뒤적거리다가 문득
만져버린 드라이아이스 한 조각,
결빙의 시간들이 피부에 타 붙는다
저렇게 차게 살다가 뜨거운 먼지로 사라지는
삶이라는 것이 끝내 부정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손끝에 닿는 그 짧은 순간에
내 적막한 열망보다 순도 높은 저 시간이
내 몸에 뿌리내렸던 시간들을 살아버렸기 때문일까
온몸의 열을 다 빼앗긴 것처럼 진저리친다
내 안의 야경을 다 보여줘버린 듯
수은의 눈빛으로 골목에서 나는 잠시 빛난다
나는 내가 살지 못했던 시간 속에서 순교할 것이다
달 사이로 진흙 같은 바람이 지나가고
천천히 오늘도 하늘에 오르지 못한 공기들이
동상을 입은 채 집집마다 흘러들어 가고 있다
귀신처럼
이야기는 다시 페르소나로 돌아온다.
나는 내 안으로 들어가서 나를 붙잡고 이야기한다.
나는 너를 사랑해.
김경주 시인은 나와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다.
배를 잡고 웃는다고 한다.
나는 한 때 저마다 땅 속을 깊이 파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빗대어 사람에게 저마다의 인생이 있으니 비난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아마도 땅을 가장 잘 파헤치고 그 누구보다도 빨리 땅의 근본에 가 닿을 수 있는 자들은 오타쿠들일 것이다. 하지만 오타쿠들의 가장 큰 단점은
공감하고 연대할 줄 모른다는 것이다. 그들은 내 안에 있는 수많은 자신들을 껴안으려다 파멸한다. 그런 경우는 자기 수용이 아니라 '자기
합리화'라고 한다. 보통 그런 경우는 초자아가 굉장히 강력한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단순히 자기 자신이 굉장히 보수적이어서 그런데도 혼자서
지레 자기 자신의 초자아에 겁을 먹어서 그런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밀리터리 오타쿠가 자기 합리화를 한다는 건 아니라고
말해두고 싶다. 그렇다고 자기 자신을 극단적으로 부정하려 하는 것도(부정적인 자신을 지워서 사회에 인정을 받고 싶은 매슬로우의 인정욕구인데)
문제가 있다. 김경주 시인은 자신의 가슴 속을 열어보면 전인류 수억명의 시체로 인해 피가 바다를 이룰 것이라 한다. 이를 보건대 그는 수없이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고 혹은 죽여가면서 자기 자신들을 다 포용할 수 있는 그 어떤 날을 꿈꾸고 있는 게 아닐까 짐작해본다. 페르소나 4에서
주인공들은 자기 내부에서 가장 받아들이기 싫은 자신을 포옹하면서 전투력을 지닐 수 있었다. 그럼 주인공들이 착하다는 건 내부의 어떤 주인공
자신들이 결정하는가? 나는 이에 대해 의문을 가져왔는데 김경주 시인은 이 시집에서 가장 명확하게 결론을 내린다. 결정하는 그 자는 유령같고
귀신같고 음악같아 이름을 붙일 수 없다는 것이다.
낭송하시는 우아한 모습...
시에 애니메이션 에반게리온 설정을 많이 붙여왔던 점이나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로 볼 때 그는 명백히 오타쿠이다. 하지만 그는
가끔씩 굴 밖으로 나와 따뜻한 애정을 품고 세상을 바라본다. 아무래도 어머니께서 암으로 죽어가시는 듯 한데 그래서 그런지 이 시집 자체에 가족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설탕공장에 다니는 아가씨 이야기 다음엔 공장에서 퇴근하여 피로한 몸을 눕히고 악몽을 꾸는 누이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더불어 팬티를 같이 입는 아버지에 대한 유머러스한 이야기도. 이 분은 시인 뿐만 아니라 극작가로서도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는데, 결국 첫 시집부터
인류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많이 담겨 있었기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 싶다. 가르치지 않고 잰체하지 않는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인권을
짓밟아버리는 초단편소설가 장주원이라던가, 자기 자신의 가난밖에 공감할 줄 모르면서 글을 씁네 하고 있는 내가 아는 어디의 누구하고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등장하는 음악과 시:
https://youtu.be/NCXRqgXiARA
음악은 우리가 생을 미행하는 데 꼭 필요한 거예요 중에서
시간과의 친교로 음악은 인간의 세계에 가서 망명을 보내다
죽는다
https://youtu.be/F6nyy7G9MDA
음악은 우리가 생을 미행하는 데 꼭 필요한 거예요 중에서
일찍이 소년들은 사슬을 끌고 걸어가 구석에서 독한 술을 마시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떤 음악 속으로 시간을 유배해버린 자신의 열렬한 회의 때문이다
https://youtu.be/Pe-T3b7E3rc
음악은 우리가 생을 미행하는 데 꼭 필요한 거예요 중에서
생의 마지막 리듬은 자신의 맥박을 들으며 천천히 저격수의 음악을
받아들이며 상대는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허물어진다
https://youtu.be/zYpBHc8px_U
음악은 우리가 생을 미행하는 데 꼭 필요한 거예요 중에서
그 사람이 아직 소녀였을 때 그는 현기증 때문에 늘 첫 서리를 피했다
가장 추운 곳에 닿아 우는 새처럼 모든 흉상들이 두려웠던 시절 소녀는 몇 년 동안 집에 살았지만 몇 년 동안 집을 비웠다고 기록했다 그것이 그
소녀의 음악이라고 청년이 되고 나서 얼굴이 틀어진 소녀들을 자신의 구멍으로 불러놓고 그는 한참을 수줍어해야 했다
https://youtu.be/dbbtmskCRUY
폭설, 민박, 편지 1 중에서
빈 술병들처럼 차례로
그리운 것들이 쓰러지면
혼자서 폐선을 끽끽 흔들다가
돌아왔다
외로웠으므로 편지 몇 통 더 태웠다
바다는 화덕처럼 눈발에 다시 끓기 시작하고
https://youtu.be/K6KbEnGnymk
테레민을 위한 하나의 시놉시스 중에서
(실체와 속성의 관점으로)
<속성>
이 극에서 작곡가 아낙사고라스는
사랑하는 한 여인을 위해 자신이 만들었던 음악을 사람으로 환생하게 하여 이루지 못한 사랑을 추행에 이루려 한다. 자신의 자아를 음악에 부여하며
살아간다.
(...)
"다음 세상에서 너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거라."
(...)
"그 생에도 내가 이루지 못한 사랑이
있을 테니, 내가 음악이 되어 너를 깨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