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지의 세계 민음의 시 214
황인찬 지음 / 민음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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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친구

이 시는 알아차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불 꺼진 가로등 아래로 걸어가는 저 사람 죽겠구나
오늘 밤이구나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저녁이 오고 밤이 오고 겨울이 옵니다 몇 개의 문장은 더 쓰입니다 겨울밤에 죽기로 결심한 사람은 장을 보고 돌아와서 차를 마시고

차분한 마음으로 오늘 있던 일을 다 적습니다
차는 천천히 식어갑니다 열은 원래 흩어지는 것입니다
이 시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저 사람은 집을 떠나고,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불이 꺼집니다 몇 개의 문장을 더 쓴다면 겨울밤 불 꺼진 가로등 아래로 걸어가는 저 사람이 걷는 모습이 나오겠지요

불 꺼진 가로등 아래로 걸어가는 저 사람
써 놓고도 구분이 되지 않는 어둠 속에서 걷고 있습니다

오늘은 죽어야지, 생각하면서
씩씩하게 잘 걷습니다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몸이 굳어 갑니다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이 시는 끝이 날 겁니다

그러나 몇 개의 문장은 자꾸만 쓰이고, 자꾸만 걷고, 씩씩하고 용감하게, 겨울밤은 자꾸만 추워지고

몇 개의 문장을 더 쓰면
몇 개의 문장은 더 쓰이지 않고

그래도 사람은 걷고 시는 계속되고 겨울의 밤입니다
차가 따뜻하군요

이 시는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

  

 페북에서 자살하겠다고 글 올렸다가 사과하거나 글 삭제한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나는군요. 

 

 희지의 세계라는 제목이 미지의 세계 웹툰에서 만들어졌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 웹툰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지만 미지의 세계 웹툰이 모종의 사건과 관련된 것으로 밝혀지자 책으로 발간된 것들조차 모조리 회수되었다. 말 그대로 쫄딱 망했다. 황인찬조차 의도하지 못한 멋진 실수였다. 페미니스트를 자칭했던 문단 모두가 침묵하고 있는 가운데 그는 실패함으로서 멋지게 성공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미지의 세계 웹툰은 결국 세상에 아무런 공헌을 하지 못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웹툰 작가도 피해자인 10대 여성도 가해자인 남성도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를 주제로 삼은 시집으로서 너무나 완벽한 이야기가 아닌가.

 첫번째 시집에서 실연에 대한 깊은 절망이 묻어났다면 두번째 시집에선 사회를 이바지하기 위한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진다. 그 점에 대해선 나와 정말 똑같은 케이스인 듯하다. 단지 그는 이야기를 꺼낼 뿐이다. 그것도 남들이 침울하다고 기피하는 이야기를 자꾸만 꺼내고, 그 때문에 선생님들에게 꾸지람을 들어도 개의치 않는다. 어차피 사회를 바꾸는 히어로가 되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꺼냄으로서 무언가가 바뀔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없다. 어차피 인간은 시간이 지나면서 늙어가고, 선생님을 욕하던 사람이 결국 선생님이 되며,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시에는 서툰 점이 귀엽기도 하다. 어쩌면 자신에게는 이별에 관한 시가 주제에 맞는다고 체념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황인찬만 소설과 이야기에 주목한 시를 쓴 건 아닌데 평론가 분이 너무 오바하시는 것 같다. 이전에 리뷰했던 글로리홀이라는 시집에서도 소설을 써라 소설을 어쩌고 하는 연작 시리즈가 있고, 이후에 리뷰할 김언의 시집 제목도 소설을 쓰자이다. 아무래도 시짓기를 가르치는 선생님 중에서 습관적으로 '시를 쓰라고 했지 언제 소설 쓰라고 했냐?' 식으로 꾸중하는 사람이 있었나 보다. 이래서 사람이 훈계를 적당히 해야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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