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은 눈이 내 얼굴을 - 제35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228
안태운 지음 / 민음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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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기를 쓰고 있다 중에서

 

네가 좋았다. 너도 그럴 것 같고 나는 너의 일기를 쓰려 한다. 너는 허락한다. 나는 너의 일기를 쓰고 너도 너의 것을 쓰자. 우리는 서로 쓴 일기를 보여 주진 않으리라 멩세한다. 볼 수 있어선 안 된다고. 안 됩니까. 너는 끄덕인다. (...) 너의 방은 신기하다. 모든 것의 처음 같다. 봄 같고 서랍이 있다. 서랍은 비어 있다. 우리는 들어간다. 그곳으로 너는 회색 일기장을 넣는다. 나는 갈색 일기장을 넣고 있다. (...) 너의 가족은 서랍 속 일기장을 출간한다, 그러나 회색이 아닌 갈색 일기장을. 그것이 덜 불온하다고. 덜 위험하고, 덜 음란하다고. 덜할 것이라고.



 


 

여기서부터 한동안 연애시처럼 보이는 작품이 갑툭튀한다. 그러나 메시지는 심오한 편.


정말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많이 생각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무엇보다 잘 알 거라는 편견이 있다. 좋아하는 사람을 가까이 본 콩깍지 낀 나보다, 그 사람을 한번 봤거나 먼발치에서 거리를 두고 지켜본 누군가가 더욱 잘 이해한다는 걸 우리는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사람들? 그들은 진실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사실 진실이 그렇게 필요한가? 세상에선 치장한 가짜가 진실보다 더욱 인정을 받는다. 그 외에도 시에는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조차 사실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리는 시인의 고통이 드러나있다.

 

고래책방 갔을 때 실망한 점은 일단 에세이가 많다는 사실이었다. (고래를 테마로 한 책이라고 꽂아놓은 칸에 고래사냥에 대한 책이 있는 점은 완벽한 날들에 비교해볼때 상당히 할 말이 많은데 일단 제외하고.) 물론 그 사이에서 보물이 있었지만, 키가 160인 나로서는 도저히 손에 닿을 수 없는 높이에 위치해 있어서 직원을 불러야 했다. 마지막에 팟캐스트를 하고 있다는 사람이 썼다는 시를 볼 땐 약간 화가 치밀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걸 지금 시라고 쓴 거야?'라고 하기보단 '이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 납득 가능하게 하는 시를 쓰는구나'라고 하는 게 차라리 내 정신건강에 좋다는 사실을 최근 터득한지라. 안태욱 시인의 시를 잠깐 보면 굉장히 투박하고 단면적인 글로 읽힌다. 그러나 돌을 던지는 사람들, 낳는 걸 축하하거나 축하하지 않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등장하는 걸 발견하면, 시는 굉장히 깊어지는 면이 있다. 500페이지 남짓되는 자기계발서는 줄줄 읽으면서 정작 어떤 과거가 있는 사람이던 쉽게 읽을 수 있는 100페이지 남짓한 시집이 어렵다고 읽지 않는다니. 참 세상은 요지경인 듯하다.

 

서평이 좀 과장된 게 아닌가 싶긴 하지만 몇몇 시로 한정해보면 그로테스크하다는 말은 사실이다. 나처럼 우울한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재밌게 읽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다고 고어하진 않고, 유령 이야기 정도로 보면 될 듯.

 

옥상으로 중에서

 

영화는 끝났고 스크린을 철거한다. 영화를 뜯어낸다. 뜯어내고 있다. 이곳은 무너질 것 같다. 바람이 분다. 주변에선 이곳만이 생생하다. 옥상이 철거될 겁니다. 우리는 올라가곤 했었다. 옥상은 다른 곳에서 재현되고 있을 겁니다. 우리는 올라갔었다. 취한다.



 


 

그런데 진짜 이 시집에서는 가망 없는 시들이 많다 ㅎㅎ 꿈에서 이미 헤어진 전애인을 만났지만 화자가 이미 꿈이란 걸 알고 있다던가. 환상이란 걸 알아서 화자가 그리 빠져들거나 즐기지 않으면서도 엿보듯 묘사하는 게 은근 매력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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