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불타는 골방 (바라 서재) &gt; 책의 감옥</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category/881833</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vitam impendere vero</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Sat, 26 May 2012 09:30:09 +0900</lastBuildDate><image><title>바라</title><url>http://image.aladdin.co.kr/Community/myface/pt_725516154514779.jpg</url><link>http://blog.aladin.co.kr/vara/category/881833</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바라</description></image><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책의 감옥</category><title>공부의 순서 </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5264233</link><pubDate>Thu, 08 Dec 2011 02:5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5264233</guid><description><![CDATA[<!--StartFragment-->
“진리를 인식하는 &lt;성숙의 시기jam maturis annis&gt;(󰡔철학원리󰡕 1부 72항)는 정신이 과거로부터 꾸준히 탈출하는 성장의 시대 뒤에 온다. 그러나 성장은 아무렇게나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신은 자신에 걸맞은 방식으로 스스로를 계도하고 훈련시켜야 한다. 이 계도와 훈련은 방법의 규칙들을 따라야 한다. 방법론은 성장하고 있는 정신이 따라야 하는 진리 인식의 길이다. 여기서 데카르트의 방법론은 정신의 존재론적 조건에 대한 반성과 이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데카르트는 보편수리학을 제안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lt;그러나 나는 나의 부족함을 뼈저리게 깨달아서at ego, tenuitas meae conscius 진리의 탐구에서 꾸준히 어떤 순서를 따르기로 결심했다.&gt; 그 순서를 따를 때, 정신은 &lt;항상 제일 단순하고 제일 쉬운 것으로부터 시작해야&gt; 한다(AT Ⅹ, 378-9).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데카르트는 󰡔성찰󰡕에서 사물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사유의 순서를 따랐다. 그리고 이 사유의 순서는 &lt;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으로a facilioribus ad difficiliora&gt;라는 간단한 말로 설명되기도 한다. 이는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탐구가 방법론적 격률을 따르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lt;쉬운 것에서 어려운 것으로&gt;라는 이 격률은 위의 인용문이 말하고 있듯이 정신의 취약성에 대한 반성에서 연유한다.
인간이 &lt;신적인 구석&gt;을 가지고 있는 한에서 학문은 진리의 자연스러운 가지틀기이고 열매맺음이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인 한에서, 또는 원죄의 무게를 아직 감당하고 있는 한에서, 학문은 인간 나름의 순서에 따라, 정신의 방법적 수고에 의하여 하나하나 그려가야 할 점묘화이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한 번의 붓질로 그림을 완성할 수 없다.” 김상환, ｢스으라의 점묘화: 김수영 시에서 데카르트의 백색 존재론으로｣ 중]]></description></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책의 감옥</category><title>국민형태: 그 역사와 이데올로기</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5100955</link><pubDate>Sun, 25 Sep 2011 16:1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5100955</guid><description><![CDATA[<br />
발리바르, ｢국민형태: 그 역사와 이데올로기｣, 󰡔이론󰡕 1993년 가을호에 수록. <br />
<br />

&#160; <o:p></o:p><br />
<br />

제1부 용어법<br />
<br />

국가는 국민으로 되는 경향이 있지만, 국민은 항상 국가로 되지 않는다. 그런데 국가 없는 국민이나 국가 이전의 국민이라는 생각은 용어 모순이다. 국민국가들의 통합성은 이를 위협하는 내적 갈등(지역갈등과 계급갈등)에 의해 위협을 받지만, 국민국가는 일단 정치적으로 실존하게 되면 국민국가 이전에 민족적(ethnique) 또는 인민적 통일성이 존재했다고 투사한다. <br />
<br />

마르크스주의 역사기술의 역설- 고전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은 부르주아적 역사기술을 재생산하며 기능주의적 논지와 역사주의적 논지 사이에서 진동. 국민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논쟁은 전부(현실적 심층) 아니면 전무(이데올로기나 환상)라는 논리적 궁지에 이른다. 마르크스주의는 국민국가의 종언을 국가 일반의 종언과 동일시. <br />
<br />

&#160; <o:p></o:p><br />
<br />

사회구성체, 국민형태, 국가체계<br />
<br />

출발점으로서 세 가지 개념. 마르크스의 사회구성체 개념은 정치적 제도들의 본성을 무시하고 이에 상부구조라는 파생적 지위를 부여하지만, 오히려 우리는 사회구성체를 그 통일성이 의심스런 채로 있는 한 구성물, 적대적인 계급들의 형세로 이해해야 한다. 사회구성체의 실존이 제기하는 문제는 그것의 기원이나 종말만의 문제가 아니라 재생산의 문제, 그것들의 갈등적 통일성의 유지 문제이다. 곧 프랑스, 독일 등의 이름은 정치적인 것으로 국가나 국민적 동일성을 물신화시켜서는 안 된다. 우선 모든 사회구성체가 국민적이지는 않으며, 역사적으로 수많은 정치형태들이 존재했다. 국민국가의 불균등한 발전, 국민형성을 둘러싼 모든 저항과 갈등에도 유의해야 한다. 두 번째 개념은 국민형태로서 이는 갑자기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등장한 것도 아니고 무한히 가소적인 것도 아니다. 세 번째 개념은 갈등적 균형의 불안정한 관계망으로, 국민국가들의 역사는 그 경계들의 불안정성과 부단한 재규정이라는 일반적 형태를 지닌다. <br />
<br />

&#160; <o:p></o:p><br />
<br />

제2부: 역사<br />
<br />

국민의 형성은 몇 세기에 걸친 역사로 나타나는데, 국민적 동일성에 대한 회고적 환상은 이중적인 것(투사와 운명)이다. 그러나 이를 비판하는 것이 국민의 기원이라는 신화의 힘을 은폐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부단히 모순적인 영유의 대상이 되는 프랑스 혁명을 보라. 국민의 기원이라는 신화는 효력을 갖는 이데올로기적 형태, 국민구성체의 상상적인 단일성이 일상적으로 구성되는 이데올로기적 형태이다. <br />
<br />

&#160; <o:p></o:p><br />
<br />

前국민국가에서 국민국가로<br />
<br />

국민형성의 기원은 국가어의 제도(군주권력의 자율화와 신성화)나 절대군주제의 전진적 형성(통화독점, 행정적 재정적 집중화),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 등 경계와 영토 제도의 혁명화 등 다수의 제도들을 갖는다. 국민형성은 오랜 전사의 결과이지만, 이는 단선적이지 않다. 이는 장기에 걸친 상이한 여러 사건들로 구성되고, 특정한 한 국민의 역사에 속하지 않으며, 제국과 같은 다른 경쟁적 형태에 속한다. 어떤 사건을 국민형태의 전사 속에 자리잡게 한 것은 하나의 필연적인 진화의 선이 아니라 일련의 정세적 관계들이다. 다시 말해 전혀 다른 목표를 갖는 비국민적 국가장치들이 점진적으로 국민국가의 요소를 생산했다. <br />
<br />

한편 모든 인간사회에 전진적으로 확산된 국민형태가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에 조응한다는 테제는 두 가지 정정을 필요로 한다. 1) 우선 자본주의 생산관계들로부터 국민형태를 연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자본주의 세계시장은 모든 국민적 제한을 넘어서는 내적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과연 국민의 형성을 여전히 ‘부르주아적 기획’으로 부를 수 있는가? 오히려 이는 마르크스주의가 자유주의 역사철학으로부터 넘겨받은 정식으로 일종의 역사적 신화이다. 국민의 형성은 자본주의 시장의 역사적 형태로서 항상 중심부와 주변부로 불균등하게 위계화된 세계경제(브로델, 월러스틴)에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정정은 마르크스의 이념적 자본주의를 ‘역사적 자본주의’로 대체한다. 어떤 점에서 근대의 모든 국민은 ‘식민화’의 산물이다. 2) 자본주의 역사에서 국민국가 형태와는 다른 국가 형태들이 출현했으며 일정기간 국민국가와 경쟁하면서 존재했다(제국형태, 초국민적 정치-산업 복합체, 한자동맹 등). 부르주아 정치형태는 한 가지가 아니라 몇 가지가 존재했던 것으로, 갓 태어난 자본주의적 부르주아지는 헤게모니의 몇 개의 형태 사이에서 주저했던 것이다. 요컨대 각자의 역사를 지닌 국민국가들의 형성과 이에 조응하여 사회구성체들이 국민구성체들로 전화한 것을 설명해주는 것은 순수 경제논리가 아니라 계급투쟁의 구체적 형세이다. <br />
<br />

&#160; <o:p></o:p><br />
<br />

사회의 국민화 <br />
<br />

국민형태의 특권적 지위는 그것이 국지적으로 이질적인 계급들의 투쟁이 통제될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자본가계급뿐만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 있고 이것의 산물이기도 한 국가 부르주아지가 출현할 수 있게 해주었다는 사실에 있다. 지배적 부르주아지와 부르주아 사회구성체는 국가를 국민형태로 재구성하고 다른 모든 계급들의 지위를 수정함으로써, ‘주체없는 과정’을 통해 구성된다. 이때 국민형태의 구성 및 진화 과정은 비규정적인 것으로서, 생산양식들뿐 아니라 정치적 형태들의 단선적 진화의 도식들은 기각되어야 한다. <br />
<br />

국민형태는 오늘날 누구에게 너무 늦은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신생국민들 편에서뿐 아니라 구국민들 편에서도 제기되는데, 가령 구 중심부의 경우 국민적 구조들이 해체되는 국면에 들어서기도 했다. 국민구성체들의 역사의 또 다른 특성으로서 ‘사회의 지체한 국민화’. 가령 프랑스의 경우 자본주의가 초래한 모순들과 계급투쟁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해주고 국민형태가 완성되기 전에 이를 다시 만들기 시작하도록 해준 것은 국민적-사회적 국가라는 제도, 경제의 재생산 및 개인의 형성, 가족구조, 사생활의 모든 공간에 개입하는 국민사회국가라는 제도이다. 국민형태의 기원에서부터 현존했으나 19~20세기에 걸쳐 지배적이게 된 이 경향은 모든 계급 개인들의 생존을 전적으로 국민국가의 시민이라는 지위, 국민성원이라는 그들의 자격에 복속시킨다. <br />
<br />

&#160; <o:p></o:p><br />
<br />

인민의 생산<br />
<br />

한 사회구성체는 장치들의 망과 일상적 실천을 통해 국민적 인간(homo nationalis)으로 형성되는 정도만큼 재생산된다. 이때 제도들의 기능작용을 통해 재생산되는 모든 사회적 공동체는 상상적이다. 곧 공동체는 개인적 실존을 집합적 서사의 맥락 안에 투사하고 공통의 이름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과거의 흔적으로 체험되는 전통들에 기초를 둔다. 오직 상상적 공동체들만이 현실적이다. 국민구성체의 경우 실재적인 것의 자리를 차지하는 상상적인 것은 인민이다. 이는 국가적 제도 안에서 스스로를 인지하는 공동체, 그 국가를 다른 국가에 대하여 자기 국가로 인지하여 자신의 계급투쟁을 그 지평 안에 기입하는 공동체이다. 인민은 자연적으로 존재하거나 단번에 구성되어 영속하는 것이 아니다. 근대의 어떤 국민도 타고난 민족적 기초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모든 근대 국민은 아무리 평등주의적이라 할지라도 계급 갈등의 소멸에 조응하지 않는다. 본질적 문제는 인민을 생산하는 것, 인민이 자신을 국민적 공동체로서 부단히 재생산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인민은 정치권력의 토대와 기원으로서 통일성 효과를 산출한다. 루소는 이 문제를 ‘인민을 인민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용어로 제기했으며, 이는 개인들이 어떻게 국민화되는가, 곧 국민적 소속이라는 지배적 형태로 사회화되는가 하는 질문이다. 모든 동일성은 개인적이지만 고립적 동일성이란 내재적으로 모순적인 관념이다. 개인적 동일성은 사회적 가치, 행위와 집합적 상징의 규범의 장에서 구성되는 집단적인 것이자 역사적인 것이다. 인민의 역사적 생산이라는 질문에서 인민의 통일성의 모델은 종별적인 이데올로기적 형태의 구성,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하는 과정을 전제로 한다(피히테-외적 경계는 또한 내적 경계가 되어야 한다). 이 이데올로기적 형태는 애국주의 또는 국민주의이다. <br />
<br />

&#160; <o:p></o:p><br />
<br />

의제적 민족체와 이상적 국민 <br />
<br />

국민국가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는 의제적 민족체(ethnicité fictive)라는 용어를 통해 지칭될 수 있다. 의제라는 용어는 순수한 환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법률적 전통에서의 의인(persona ficta)에 유비함으로써 제도적 효과, 즉 제작(fabrication)의 의미로 사용된다. 어떤 국민도 자연적으로 민족적 기초를 갖지 않으며, 단지 마치 그들이 스스로 기원과 문화, 이해관계의 동일성을 지닌 자연적 공동체를 형성한 것처럼 표상하는 것이다. 의제적 민족체는 애국주의의 대상이 되는 이상적 국민에 불가결하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국민은 다만 이념이나 자의적인 추상으로 나타나고 애국주의의 호소는 누구에게도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br />
<br />

민족체는 언어와 인종을 통해 산출된다. 양자 모두 국민의 성격이 인민에 내재한다는 관념을 표출하여 역사적 인구들을 자연이라는 사실에 뿌리박도록 하며, 이것들의 지속적 존재에 의미를 부여한다. 언어적 공동체는 최근에 와서야 정착되었는데, 국민어(langue nationale)는 일반화된 학교기능을 통해 주입된다. 이 때문에 국민형성과 인민적 제도로서 학교의 발전 사이에는 긴밀한 연관이 있다. 학교는 국민주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장소이자 민족체를 언어적 공동체로 산출하는 일차적 제도이다. 모국어 또는 공통의 기원이라는 이상은 국민성원들이 서로 느끼는 애정의 은유가 된다. 그런데 언어적 공동체는 민족체의 생산에 불충분한 것으로, 이는 언어적 기표의 역설적 본성에 관련된다. 모든 호명은 언어의 수준에서 일어나고, 모든 개인은 언어라는 요소 속에서 호명된다. 동일성의 언어적 구성은 정의상 열려 있는 것으로 (누구도 모국어를 선택하거나 바꿀 수 없지만) 여러 언어를 영유하는 것이 항상 가능하다. 언어적 공동체는 가공할 정도로 제약적인 민족적 기억을 이끌어내지만 또한 동시에 이상한 가소성을 지닌다. 모국어는 반드시 실제 어머니의 언어는 아니다(이민 2세대의 예). 언어적 공동체는 이 공동체가 항상 존재했다는 감정을 주는 그러나 후속 세대들에게 숙명적으로 해당 언어를 사용하도록 강제하지는 않는 현재의 공동체이다. 이상적으로 그것은 누구라도 동화하지만 누구도 붙잡지 않는다. 따라서 특정 인민의 경계 안에 고착되기 위해서 언어적 공동체는 비상한 특수성 또는 폐쇄 내지 배제의 원리를 갖춰야 한다.<br />
<br />

바로 이것이 인종공동체의 원리이다. 문제는 (언어적 공동체와 다르게) 정치적 단위를 구성하는 모든 개인들에게 공통적인 실천일 수 없다. 언어적 공동체가 언어적 실천의 사회적 불평등을 자연화함으로써만 개인들의 평등을 창출할 수 있는 반면, 인종공동체는 사회적 불평등을 더욱 양가적인 유사성 속으로 해소한다. 이는 사회적 차이에 진짜로 국민적인 것과 가짜로 국민적인 것 사이의 분할의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사회적 차이를 민족화한다. 인종 관념의 상징적 핵심은 혈통의 도식, 즉 개인들의 친자관계는 세대에서 세대로 생물학적이고 정신적인 실체를 전달하고 그럼으로써 친족이라 불리는 시간적 공동체 속에 기입된다는 관념이다. 이 관념은 사적 족보들의 경향적 소멸과 상관적인 것으로, 인종공동체 관념은 친족의 경계가 상상적으로 국민의 문턱으로 이전될 때 출현한다. 즉 인종공동체는 자신을 하나의 거대가족 또는 가족관계로서 표상하는 경향이 있다. <br />
<br />

&#160; <o:p></o:p><br />
<br />

학교와 가족 <br />
<br />

최근의 가족의 역사에 관한 논쟁들이 놓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 결정적인 문제, 확대된 친족의 해소와 국민국가의 개입에 의한 가족관계의 침투 사이의 상관관계라는 문제이다. 오늘날 친척관계, 인척관계에 대한 기록을 구성하고 보관하는 것은 국가이다. 국가의 가족정책, 인구학적 기법들, 공중보건, 사회보장 등의 등장은 가족의 국민화, 곧 국민적 공동체를 상징적 친족으로 만드는 것이다. 부르주아 가족과 국민형태를 취하는 사회의 상호관계 속에 우생학이라는 관념이 잠재해 있는 것이나 국민주의가 성차별주의와 은밀한 근친성을 갖는 것, 또한 국민주의를 부족주의(traibalisme)로 표상하는 것이 기만적인 동시에 폭로적(revealing)인 것도 이 때문이다. <br />
<br />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의 중심이 가족-교회 쌍에서 가족-학교 쌍으로 이전했다고 했을 때 옳았다. 이에 두 가지 교정이 필요하다: 특정의 한 제도가 자체로서 ‘하나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이라는 표현이 지시하는 것은 ‘몇몇’ 지배적 제도들의 결합된 기능수행이다. 또한 학교교육과 가족의 중요성은 단지 노동력 재생산에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이 재생산을 의제적 민족체의 구성, 즉 인구정책(푸코가 생명권력이라고 부르는 것)에 함축된 언어적 공동체와 인종공동체의 절합에 복속시킨다는 점에 있다. 이 점에서 부르주아 사회에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적 장치는 국민주의의 헤게모니를 갖는다. <br />
<br />

소견: 언어와 인종 사이의 절합이나 상호보완성이 조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적 민족체와 인종적 민족체는 어떤 의미에서 배타적인데, 언어적 공동체는 열려 있는 반면 인종적 공동체는 원리상 닫혀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럽건설은 의제적 민족체의 산출과 관련하여 공언어주의(colinguisme)의 확립을 지향할 것인가 아니면 유럽적인 인구학적 동일성을 이상화하는 방식을 지향할 것인가. 민족화의 국민적 과정의 산물인 모든 인민은 관국민적으로 교통이 이루어지는 세계 속에서 배타주의나 동일성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날 길을 찾도록 요구되고 있다. 모든 개인은 자기 인민이라는 상상이 변형되어가는 과정에서 다른 인민들에 속하는 개인들과 교통하기 위해 이 상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들을 찾도록 요구되고 있다. <br />
]]></description></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책의 감옥</category><title>&amp;lt;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amp;gt; 중</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4943137</link><pubDate>Fri, 22 Jul 2011 01:4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4943137</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5654566&TPaperId=4943137"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39/80/coveroff/8935654566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김상봉 선생님의 &lt;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gt;의 마지막 대목(382~4쪽)을 옮겨온다.&#160;&#160;&#160;

&#160;
&#160;
&#160;
&#160;
&#160;
&#160;
&#160;
"슬픔의 의미와 고통의 존재 이유를 묻는 것,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 그리고 가장 깊은 슬픔과 절망 속에 있는 사람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것, 그것이 오랫동안 내가 생각한 철학의 길이었습니다. 그것은 플라톤이 걸었던 것과는 정반대의 길입니다. 그는 빛을 찾아 어둠의 동굴을 빠져나와 위로 올라가려 했지만, 나는 도리어 슬픔의 어둠 속으로 내려가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 철학이 걸어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진리가 오직 슬픔 속에서만 계시된다고 내가 믿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빌라도처럼 묻고 싶으시겠지요. 진리란 무엇이냐고. 진리는 만남입니다. 만남이야말로 모든 일치, 즉 모든 진리의 원형인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 나는 너를 온전히 만날 수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오직 우리가 서로의 슬픔에 참여할 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는 슬픔 속에서만 우리에게 도래합니다. 그리고 철학이 진리를 갈망한다면, 철학은 먼저 슬픔의 해석학이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160;(...) 내가 그리스 비극을 이야기한 것은 그것을 사다리로 삼아 할 수 있는 한 깊은 슬픔의 심연 아래로 내려가길 원했기 때문입니다.&#160;&#160;
그러나 편지를 다 쓰고 난 지금 나는 내가 얼마나 깊은 슬픔의 어둠에까지 내려간 것인지, 내가 깊은 슬픔 속에 있는 사람들의 탄식을 올바로 들은 것인지 그리고 과연 내가 들었던 그 많은 말들을 온전히 표현한 것인지, 아무것도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내 말은 아직 슬픔과 고통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경박한 정신의 한가한 유희처럼 보이지나 않을지 나는 적이 두렵고 부끄러운 마음뿐입니다. 끝없는 슬픔의 바다에서 얼마나 더 싶은 심연으로 낮아져야 나는 당신의 슬픔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지요?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의 깊이 앞에서 나는 내 모든 말이 참된 슬픔을 알지 못하는 자의 치기가 아닐까 하여 깊이 저어하고 또 두려워합니다.&#160;&#160;
하지만 그 부끄러움 때문에 내가 걷는&#160;길을 멈추지는 않을 것입니다. 나는 더 낮아지고 낮아져 당신이 있는 가장 깊은 슬픔의 심연까지 내려가겠습니다. 어떻게 가장 깊은 슬픔 속에 참된 기쁨이 깃들이고, 어떻게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 희망의 무지개가 떠오르는지 그 신비를 깨달을 때까지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고 또 내려갈 것입니다.&#160;&#160;
이제 정말 작별할 시간입니다. 긴 편지 끝가지 읽어주신 것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다시 소식드릴 때까지, 사랑하는 그대, 부디 평안하시기를. &#160;]]></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39/80/cover150/8935654566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5654566</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책의 감옥</category><title>﻿니체의 플라톤주의</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4943083</link><pubDate>Fri, 22 Jul 2011 01:2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4943083</guid><description><![CDATA[<br />

&#160;<br />
John Sallis, "Nietzsche's platonism", Platonic legacy, New York: SUNY, 2004의 요약.<br />

&nbsp;
&#160;<br />
<br />

&#160;<br />
<br />

&#160; 니체의 플라톤주의. 니체와 플라톤 양자 사이에는 형이상학의 역사 전체가 놓여있다는 점에서 거대한 간격이 존재한다. 하이데거의 경우 니체를 최후의 형이상학자라고 해석한 바 있다. 문제는 이들 사이의 간격 자체가 아니라 이러한 간격을 가로지르는 운동의 다양한 형상들이다. 플라톤주의의 첫 번째 형상은 결정적으로 니체의 사유를 규정하는데, 니체 자신도 인정하듯이 그의 사유는 플라톤주의의 일종으로 생각될 수 있다. 두 번째 형상은 니체가 플라톤 이후에도 존속하는 플라톤주의라고 간주하는 것으로, 철학적 전통으로서 플라톤주의이다. 세 번째 형상은 이러한 간격을 가로지르는 니체 자신의 해석, 문헌학적 전통에 의해 매개된 것이 아닌 플라톤의 텍스트 자체로의 회귀이다. 네 번째 형상은 플라톤의 은폐된 역사로의 회귀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러한 네 가지 형상은 ‘니체의 플라톤주의’의 다양한 의미를 규정한다. <br />
<br />

&#160;<br />
<br />

1. <br />
<br />

&#160; 첫 번째 형상은 결정적으로 니체의 사유를 규정한 것으로 니체의 사유를 플라톤주의의 일종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니체가 그의 사유 초기부터 후기까지 인정하고 긍정했던 유대관계로서, 가령 &lt;비극의 탄생&gt;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철학은 전도된 플라톤주의이다. (...) 목표로서 가상Schein 속에서 살기.”(Ⅲ 3:207) 여기서 가상이라는 말은 플라톤주의가 ‘진정한 존재’로부터 구별하는 유사성 또는 현상/외관appearance를 명명하기 위한 것이다. 니체의 전략은 플라톤주의가 설정한 위계적 대립을 전도시키고, 가상을 보다 순수하고 더 아름다우며, 더 나은 것으로 간주하면서 플라톤주의가 ‘진정한 존재’라고 부르는 것을 더 열등한 것으로 강등시키는 것이다. <br />
<br />

&#160; 바로 이것이 니체가 &lt;우상의 황혼&gt;에서 또한 보여주는 것인데, 이는 역사의 형태, 오류의 역사라는 형태를 취하는 것이다. ‘어떻게 참된 세계가 마침내 우화가 되었는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플라톤주의가 전도되는 과정의 연속을 보여준다. 이 구절은 하이데거의 니체 해석에서 결정적인 것이며, 데리다 등의 해석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다. 이 구절은 참된 세계가 점점 더 획득할 수 없는 것이 되는 단계를 추적하면서, 참된 세계의 제거로 끝맺는다. 니체는 플라톤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전도의 순간이 “가장 짧은 그림자의 순간”이라고 말한다. 플라톤주의의 그림자가 물러나는 순간, 플라톤주의의 근본적 전도가 빛 속으로 나타나게 되는 순간이 바로 태양이 가장 높은 곳에 이르는 순간인 정오이다. 이는 여전히 전도된 플라톤주의로 남아있다. &#160; <br />
<br />

&#160;<br />
<br />

2. <br />
<br />

&#160; 플라톤주의의 두 번째 형상은 니체가 플라톤 이후로도 서양의 사유와 실천의 역사 속에서 존속해왔다고 간주하는 플라톤주의이다. 이는 니체가 기독교를 “인민을 위한 플라톤주의”(Ⅵ 3: 74)라고 부를 때의 플라톤주의이다. 이는 참된 세계는 회개하는 죄인들에게 약속되어있다는 생각의 가장 오래된 형태이다. 니체는 &lt;우상의 황혼&gt;에서 플라톤을 ‘이미 존재했던preexistently 기독교인’(Ⅴ 3: 149)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플라톤의 이름을 기독교와 결합시키면서 니체는 만약 신이 오류, 맹목, 거짓말이라면 어찌하겠는가라고 묻는다. <br />
<br />

&#160;<br />
<br />

3. <br />
<br />

&#160; 니체의 플라톤 강의 텍스트 전체는 1995년 간행되었다(Ⅱ 4: 1~88). 이는 바질대학에서 고전문헌학을 가르쳤던 시기 니체의 강의를 담고 있다. 최초의 제목은 ‘플라톤 대화편 연구 입문’이었는데, 이는 다양한 제목으로 1873~4년 겨울 학기, 1876년 여름 학기, 1878~9년 겨울 학기의 강의에서 반복되었다. 이 강의는 바질 대학에서의 시기에서부터, &lt;비극의 탄생&gt;, 그리고 &lt;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gt;의 첫 번째 권이 출간될 때까지의 시기를 포괄한다. 이 강의는 최근의 플라톤 문헌과 플라톤의 생애를 다루고, 각 대화편의 요약 설명을 제공하며, 플라톤 사상의 주제를 제시한다. 입문적인 문단에서 니체는 전체 강의를 정향하는 일반적인 언급을 준다. 무엇보다도, 그는 플라톤이 항상 젊은이를 위한 진정한 철학적인 지도자 또는 가이드로 고려되어왔다고 주장한다. <br />
<br />

&#160; 여기서 이미 명백하듯이, 니체가 여기서 플라톤의 이름으로 지시하는 것은 나중에 그가 때때로 언급하는 ‘인민을 위한 플라톤주의’에서와는 완전히 다른 의미의 플라톤이다. 다른 한편, 니체는 플라톤적 사유와 칸트의 관념론과의 연관성을 지적한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칸트적 관념론에 대한 준비 과정이었던 것으로 말해지는데, 이데아론이 이미 사물 자체와 현상 사이의 대립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니체는 플라톤적 사유를 형이상학의 이후 역사와 연결시킨다. <br />
<br />

&#160; 그러나 &lt;비극의 탄생&gt;의 맥락에서, 칸트와 쇼펜하우어가 정확히 진리에의 충동을 한계까지 밀어붙이고 예술의 재탄생을 준비한 인물임을 고려한다면, 플라톤적 사유와 칸트적 관념론 사이의 연관성은 마찬가지로 플라톤을 형이상학의 한계에 위치시키는 것, 니체적 전도에 가깝게 플라톤의 사유를 간주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니체는 플라톤의 산문 작가로서의 재능을 강조하며, 또한 플라톤이 위대한 극작의 재능을 지녔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니체는 플라톤에게 주요한 것은 작가 플라톤이 아니라 선생 플라톤이라고 주장한다. 작가는 단지 선생의 유령일 뿐이며, 그의 작품은 단지 아카데미에서 행해졌던 말의 상기rememberance일 뿐이다. <br />
<br />

&#160; 니체는 당대의 플라톤 문헌에 의지한다. 다양한 학자들 가운데 니체의 플라톤 독해에 중요성을 갖는 학자는 두 명인데, 그 중 한 명은 텐느만Tennemann으로, 희랍 철학을 연구하는 칸트주의자이다. 니체는 특히 플라톤이 ‘이중의 철학’, 명백한 철학과 은밀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는 텐느만의 관점에 대해 언급한다. 또 다른 학자는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프리드리히 슐라이마허로, 그가 강조한 것은 플라톤의 작품에서 형식과 내용은 분리불가능하다는 것, 철학자 플라톤 곁에는 또한 예술가 플라톤이 있다는 것이다. 니체는 플라톤의 예술적 재능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화편에서 예술적 요소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슐라이어마허와 의견을 달리 한다. <br />
<br />

&#160; 니체는 예술작품으로서의 대화편과 예술가 플라톤에게 단지 이차적인 중요성을 돌릴 뿐이다. 니체는 “대화편은 어떤 극적인 것으로서가 아니라, 상기의 형태로, 변증술의 과정으로서 간주되도록 의도된 것이다”(Ⅱ 4:14)라고 말한다. 이후의 강의에서 니체는 “플라톤의 극이 가진 힘은 놀랍게도 과대평가되었다”(Ⅱ 4:161)면서 플라톤의 작품에서 극적인 요소의 중요성을 제한해야 한다고 더욱 강하게 주장하게 된다. <br />
<br />

&#160; 니체는 플라톤의 편지를 비롯한 다양한 문헌을 가지고서 플라톤의 생애에 대해 확장된 논의를 펼친다. 특히 두 가지 점이 언급될 가치가 있는데, 먼저 플라톤의 교육 과정에 관한 것이다. 니체는 플라톤이 젊은 시절 주신찬가의 시들을 지었으나 나중에는 그 시들을 태워버렸다고 말하면서, 플라톤이 갖는 시적 경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둘째로, 니체는 플라톤을 소크라테스의 죽음 이후에도 소크라테스적인 방식으로 존속했던 다른 소크라테스적 철학자들과 분리시키려고 한다. 한편으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이미지를 이상화했으나, 다른 한편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적 경향은 그가 가졌던 초기의 헤라클레토스주의에 의해 제한된다. 니체는 플라톤이 “애초에는 헤라클레이토스주의자였고 결코 순수하게 소크라테스적이지 않았다”(Ⅱ 4:45)고 말한다. <br />
<br />

&#160; 니체가 개별적인 플라톤 대화편에 관해서 하는 설명은 대개 요약적이다. 그러나 어떤 설명은 최근의 학술적 기준에서 볼 때도 매우 예리한 점이 있다. 예컨대 &lt;티마이오스&gt;에서 세계-영혼의 혼합blending에 관한 문단에 대한 니체의 해석은 A. E Taylor나 Serge Margel의 것과 밀접히 상응하는 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혼합의 두 단계를 구분하고, 혼합의 첫 번째 단계에서 섞인 두 요소로부터 나오는 것이 두 번째 단계에서의 두 요소와 섞이는 세 번째 구성 요소가 됨을 인지한다. <br />
<br />

&#160; 다른 한편 때때로 니체의 해석이, 텍스트가 말하는 것을 전통적인 공식으로 대체하면서, 플라톤 텍스트의 언어로부터 벗어나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컨대, &lt;티마이오스&gt;에서 그릇receptacle과 코라를 언급하는 대목을 보자. 그러나 니체가 그릇과 가지적 존재 사이의 구분을 끌어올 때, 그는 전자를 이데아 곁에 있는 원초적 물질로, 이데아의 영원성을 분유하지 않는 비존재non-being로 간주한다. 그러나 &lt;티마이오스&gt;에서 그릇은 결코 질료라는 말로 지시되지 않으며, 니체의 설명과는 반대로 그릇은 그것이 매우 복잡한 방식일지언정 가지적인 것에 참여하는 것으로, 명시적으로 영속적인 것으로서 간주된다(&lt;티마이오스&gt;, 51a-b, 52a-b). <br />
<br />

&#160; 니체가 그의 강의의 두 번째 부분에서 제공하는 플라톤 사상의 주제적 설명은 플라톤 텍스트에 대한 최소한의 언급과 함께 전개된다. 특기할 만한 것은 니체가 빙켈만, 괴테, 독일 헬레니즘의 전체 전통으로부터 계승된 그리스 문화에 대한 관점과 가장 급진적인 방식으로 단절하고 있을 바로 그 시기동안, 그의 플라톤 해석은 그처럼 좁은 경계에서 남아있었다는 사실이다. <br />
<br />

&#160; 니체의 설명은 우선 플라톤의 이데아에 대한 설명에서 시작한다. 그는 개념 및 개념적 규정Begriffsbestimmung에서 시작하며, 무엇보다도 이데아를 개념적 규정의 대상과 동일시한다. 그는 또한 “일반적 개념적 규정의 대상은 감각적인 사물이 아니라, 존재자의 다른 종류eine andere Gattung des Seienden”라고 설명한다. “이데아를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이유는 그가 감각적인 것을 영속적인 흐름과 변화 속에서 보았고 따라서 이를 지식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그는 윤리적인 것은 개념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Ⅱ 4: 149) <br />
<br />

&#160; 니체는 우리의 개별적인 감각 지각이 개별 대상들에 상응하듯이, 우리의 일반적 개념은 개념들 자체와 마찬가지로 불변하는 대상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니체가 말하듯이 이데아론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것은 그러한 설명이 진리가 가상이라고 주장하는 ‘비도덕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말에 관하여’와 같은 텍스트가 쓰였던 바로 그 시기에 주어졌다는 것이다. <br />
<br />

&#160; 니체는 반복해서 플라톤에게 윤리적인 것이 가졌던 우선성을 주장한다. 따라서 이데아를 정립함에 있어 플라톤의 출발점은 선, 미, 정의였고, 그의 목적은 이러한 윤리적 추상물들을 감각적인 것이 갖는 영속적인 흐름, 변화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 니체는 플라톤이 가시적 세계에 대한 고려를 기초로 해서 이데아를 정립할 수도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플라톤은 이러한 방식으로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데아론의 생성은 가시적 세계에 대한 고려 속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론의 기원은 감성적/미학적aesthetic인 것이 아니다. 즉 이데아는 감성적 관조 또는 직관에 기초해서 정립되지 않았다. <br />
<br />

&#160; 이에 니체는 이전에 주장했던 요점, 즉 플라톤의 예술적 충동은 이차적이며 또 다른 충동, 도덕적 충동에 의해 철저히 지배되었다는 것으로 돌아온다. 니체가 말하듯이 “그는 철저히 윤리학자이다.”(Ⅱ 4: 161) 이 지점으로부터 니체는 (신체는 영혼의 감옥이고, 철학의 과업은 감각적인 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결론, 플라톤 사상이 ‘인민을 위한 플라톤주의’ - 이후 니체의 계보학적 비판의 주요한 표적이 될 - 으로 변하게 되었다는 결론으로 나아간다. <br />
<br />

&#160; &#160; &#160; &#160; &#160; &#160; &#160; &#160;<br />
<br />

&#160;<br />
<br />

4. <br />
<br />

&#160; 니체의 플라톤주의의 네 번째 형상. 이는 니체의 바질 강의를 지배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니체는 보기 드문 능력으로 가장 결정적인 모호성과 이 모호성 내에서 일어나는 사유의 끊임없는 순환을 식별한다. 바로 이러한 독해를 통해서 니체는 플라톤의 사유를 그 독특성을 개방하는 방식으로 마주한다. 헤라클레이토스주의자로서 플라톤은 단순히 소크라테스적인 것으로 변했다고 말해지지 않으며, 예술가 플라톤이 아무런 잔여도 없이 도덕주의자 소크라테스로 변형되어왔다고 일관적으로 제시될 수도 없는 것이다. <br />
<br />

&#160; 물론, 니체는 그의 강의에서 플라톤의 예술적 충동이 소크라테스의 도덕적 충동에 의해 제한되었음을 강조한다. 또한 니체가 &lt;비극의 탄생&gt;에서 쓰듯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학생이 되었고, 그의 시를 태워버렸다. 그러나 플라톤이 그의 시를 태워버렸을지라도, 그는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소크라테스처럼 쓰지 않는 자가 되지 않았다. 물론 그가 소크라테스의 매력에 빠지지 않았다면, 그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썼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매력 하에서도 플라톤은 글쓰기를 지속했고 예술가로서 남았다. <br />
<br />

&#160; ‘그리스 국가’라는 제목이 붙은 초기의 텍스트에서 니체는 남아있는 투쟁, 모호성에 대해서 강조한다. “그가 그의 국가에서 천재적 예술가를 배제했다는 것은 예술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평결의 엄밀한 결과였는데, 이는 플라톤이 그 자신과의 싸움에서 그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었다.”(Ⅲ 2: 270f) 그러나 이 자신과의 싸움은 플라톤이 예술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평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때도 중지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때는 그 싸움이 가장 강렬해졌을 때이다. 스스로와 싸우는 플라톤의 이미지, 역동적이며 또한 활발한 모호성의 이미지와 더불어, 니체는 플라톤 사유가 갖는 독특성에 대해 언급한다. <br />
<br />

&#160; &#160;이외에도 플라톤이 그 자신과 영속적인 싸움, 자신과의 분열 속에 있는 인물, 모호성 내부에서 순환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다른 문단들도 있다. &lt;선악을 넘어서&gt;에서 플라톤은 “어떤 철학자도 지금까지 그 마음대로 이용했던 가장 위대한 힘”(Ⅵ 2: 114)으로 선언된다. 또한 니체는 플라톤의 비밀, 그의 스핑크스적 본성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리가 그의 임종의 베개 밑에서 발견한 것은 성서도, 이집트의 책도, 피타고라스의 책도, 플라톤의 책도 아닌, - 아리스토파네스의 책이다. 플라톤 또한 삶을 - 그가 부정햇던 그리스적인 삶을 - 아리스토파네스없이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Ⅵ 2: 43) 또한 니체는 소크라테스주의가 플라톤의 것이 아니고 단지 그의 철학에서만 발견되며, 이러한 소크라테스주의를 신봉하기에는 플라톤이 너무도 고귀하다고 말한다. <br />
<br />

&#160; &lt;우상의 황혼&gt;에서의 플라톤에 대한 가혹한 비판 외에도 니체는 또한 플라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쓴다. “그는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라 그리스인만이 지닐 수 있는 순진무구함을 가지고, 아테네에 그처럼 아름다운 청년이 없었다면 플라톤 철학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 플라톤식의 철학은 차라리 에로틱한 경쟁이라고, 옛 체육 경기와 그 전제들을 연수하고 내면화한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으리라. 플라톤의 철학적 에로티시즘으로부터 마침내 무엇이 나왔는가? 그리스적 경쟁의 새로운 예술적 형식인 변증법”(Ⅵ 3: 120)<br />
<br />

&#160; &lt;즐거운 지식&gt;에서도 니체는 플라톤의 건강함과 강력한 감각에 대해서 쓴다. 마지막으로 1880년 중반에 쓰인 수고에서 니체는 플라톤에 의해 행해진 전도에 대해서 쓰는데, 플라톤은 여전히 예술가로 남아있다. “기본적으로, 그가 예술가였던 것처럼 플라톤은 현상보다 존재를 선호했다.”(Ⅷ 1: 261) <br />
<br />

&#160; 특기할 만한 것은 어떻게 플라톤적 전도의 이미지가, 형이상학의 발생조차 소크라테스적 도덕주의자 플라톤보다도 예술가 플라톤의 손에 더 많은 것을 부여하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극한에서, 이러한 니체의 플라톤주의의 형상은 첫 번째 형상 - 즉 존재보다 현상을 선호하는, 또는 최소한 존재와의 대립 하에서 규정되어 항상 현상이라고 불려왔던 것을 선호하는 - 니체 자신의 사유의 전도된 플라톤주의와 소통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최종적으로 니체가 그리스인으로 남은 이유, 또는 처음부터 그리스로 돌아오려고 시도했던 이유이다. “오 저 그리스인들! 그들은 어떻게 사는지 이해했다. (...) 저 그리스인들은 피상적이었다 - 심오함이 없었다.”(Ⅴ 2: 20, 또한 Ⅵ 3: 437)<br />
]]></description></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책의 감옥</category><title>주체성과 근대철학</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4739557</link><pubDate>Sat, 23 Apr 2011 01:2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4739557</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0826479227&TPaperId=4739557"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533/56/coveroff/0826479227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현대프랑스철학: 근대성과 주체의 지속(캐롤라인 윌리엄스)&#160;<br />
<br />
&#160;<br />
<br />
1장 문제들과 역설들을 상속하기 - 주체성과 근대철학<br />
<br />
&#160;<br />
<br />
주체 개념은 매우 다른 역사적 설명을 갖는 철학적 문제들을 제기한다(데카르트에서 후설 그리고 그 이후). 근대철학 내에서 주체 개념은 대개 subjectum으로, 인식의 객관화하는 토대로, 모든 가능한 존재들의 토대로 개념화되어왔다. 이때 주체는 우선 인식론적 기능을 하는 것으로, 대상의 재현이 사유, 지각, 주체적 의식의 앎의 결과가 되는 가지성intelligibility의 영역을 구획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주체는 이러한 동질성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주체 개념에서 존재론의 영역은 인식론만큼이나 중요하다. 실상 주체의 대문자 역사란 존재하지 않으며, 주체의 개념화는 철학적 스타일의 다수성만큼이나 매우 다양하게 존재한다. 주체에 대한 질문은 이러한 문제들의 역사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이 장의 목표는 데카르트, 스피노자, 헤겔에 의해 전개된 주체에 대한 세 가지 개념을 식별하고 정교화하는 것이다.<br />
<br />
&#160;<br />
<br />
1. 데카르트와 근대적 코기토의 탄생<br />
<br />
&#160; 미셸 푸코가 &lt;말과 사물&gt;에서 보였듯이 근대성과 인식의 합리주의적 정향의 탄생은 데카르트적인 사유 주체 그리고 이후의 칸트적인 초월론적 주체와 분리될 수 없다. 정신과 신체, res cogitans와 res extensa의 데카르트적 이원론은 이후 근대의 철학적, 정치적 사유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주체성의 구성은 이러한 데카르트적인 문제틀에서부터 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1) <br />
<br />
&#160; 데카르트의 철학은 인식의 새로운 토대를 만들고, 사유하는 주체를 구성함으로써 근대를 특징짓는 새로운 과학적 방법을 검증할 수 있도록 한다. 데카르트적 형이상학은 인간 주체의 관점에서 실재의 확실성을 주장할 수 있는가에 대한 깊은 회의주의로부터 발원한다. 인식론적 불확실성은 주체의 실재에 대한 해석뿐만 아니라 진리의 기준들까지도 회의하도록 만든다(아렌트: ‘데카르트적 회의의 특징은 그 보편성’). 만약 우리의 지성intellect이 유한하다면 어떻게 인식은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있는가? 제1성찰에서 나타나듯이 환상, 상상, 부정확한 감각적 지각과 실재를 분간할 수 없다는 회의와 불안은, 이것들을 구별할 수 있는 진정한 코기토의 창조로서만 제거될 수 있는 것이다. 인식론적 안정성과 진리의 획득은 이와 같은 주체의 경험과 실재 사이의 간극을 제거할 수 있을 때에 가능하다. 또한 인식 능력의 토대를 형성하는 것은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이다. 사유 능력 및 참되고 판명한 관념을 그렇지 않은 것과 구별할 수 있는 마음의 능력은 명석 판명함의 척도로서 기능하는 기하학적 법칙과 관련된다. 사유는 환상, 정서affection, 즉각적 경험 등 신체에 의한 흔적들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br />
<br />
&#160; 데카르트 철학은 주체를 명석하거나 기만적인 사유의 저자author이자 의지하고 사유하는 주체, 진리를 형성하는 것에 책임을 지는 주체를 구성한다. 그러나 신의 권위로부터 주체의 책임으로의 이와 같은 이동은 신을 명석판명한 관념의 원인이자 보증자로 가짐으로써만 가능하다. 홉스의 경우를 보더라도 주체의 능력은 신이 부여한 것이며, 인간의 정신은 신처럼 만들어진 것이다. 데카르트적 주체는 인식의 저자이자 또한 이러한 신이 부여한 명석판명한 사유 능력의 오용에 책임을 지는 주체이다. 그런데 이러한 데카르트적 주체의 존재론적 내용은 무엇인가? 그는 주체의 존재론을 본격적으로 내놓지는 않지만, 적어도 데카르트적 주체는 시간 내에서 고정된 것이어야 한다. 그에게 주체성의 본질은 자아의 인식적 능력에 의해 부여되는 것으로, 세계나 타자와의 시공간적 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고 지성의 능력에 대한 내적 반성에 의해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순수하고, 비시간적이고, 자기-폐쇄적이며, 반성적인 의식이다. <br />
<br />
&#160;이후의 철학은 데카르트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데, 인식론적 회의는 주체성의 모든 담론의 어떤 틈fissure이 된다. 회의나 불안의 억압이 곧 주체를 위한 새로운 토대주의적 이론을 만드는 것은 아닌데, 예컨대 정신분석 이론에서는 바로 이러한 억압이 바로 주체의 토대주의적 이론을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캉이 주장하듯이 주체에 의한 대상의 재현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르며, 의심은 진리를 보장하려는 시도들을 영원히 방해하게 된다. 코기토는 언어 내에서 그 자체로 경험될 수 없으며, 그 동일성은 영원히 분열된 채로 남는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데카르트적 주체는 또한 정신분석학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서구 철학의 담론, 특히 칸트 철학은 추상적이고 초월론적인 주체성과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주체성 사이의 이율배반을 화해시키려 시도한다. 흄의 회의주의가 주체의 동일성을 그 굳건한 토대가 결여된 연속적인 흐름flux으로 간주했다면, 칸트는 주체성을 주체와 객체의 구별 위에 정초함으로써 데카르트적 문제틀을 발본화했다. 인식 주체는 절대적이고 초월론적인 존재, ‘통각의 초월론적 통일’이며, 이러한 주체는 인식 가능성의 조건이다(‘경험 일반의 가능성의 조건이 동시에 경험 대상의 가능성이다’).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칸트는 인간 경험의 한계를 인정했으며, 이 점에서 초월론적 주체성은 경험적, 실천적 의식과 일치할 수 없는 이상적 개념화이다. 오류, 환상, 혼동은 데카르트에서처럼 여전히 인식의 자기확실성에 대한 잠재적 방해요인으로 남는다. <br />
<br />
&#160; 이상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객체성보다 특권적인 주체성 개념은 서구의 정치적, 철학적 사유의 지배적 패러다임을 구성한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비판자인 하이데거에게 데카르트적 코기토는 철학을 인간학anthropology으로 변형시키고 세계를 주체에게 표상(Vor-stellen)되는 것으로 만든다(&lt;세계상의 시대&gt;). 흔들릴 수 없는 확실성의 토대로서 주체의 개념화는 근대적 사유 형태의 전형적인 패러다임으로 간주된다. 이것은 스피노자의 반-의인론anti-anthropomorphism이 데카르트에서 헤겔의 주체 개념 사이에서 이례적인 것anomaly으로 나타나게 한다.<br />
<br />
&#160;<br />
<br />
2. 스피노자의 실체 철학: 주체의 분해와 재구성<br />
<br />
&#160; 스피노자가 현대철학에 미친 영향력은 심대한데, 그는 데카르트적인 코기토의 우선성을 대체하는 주체성의 설명을 제공한다. 주체는 욕망, 의지, 자기이해 등이 실체의 체계적, 합리적 질서의 결과로 간주되는 상호연관된 복잡한 관계 도식 속에 위치한다. 이때 실체란 절대적인 신적 실체와 등치될 수 없으며, 범신론으로도 해석될 수 없다. 스피노자는 실체를 은유적인 의미와 실재적real(구체적) 의미로 사용한다. 이때 은유적인 까닭은 실체가 그것의 가능한 속성들의 무한성에서 파악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고, 실재적인 까닭은 그것이 단순히 추상적이거나 천상의 무엇이 아니라 자연적, 물질적인 것, 또한 생life에 관계되기 때문이다. <br />
<br />
&#160; 스피노자의 &lt;윤리학&gt;은 데카르트적 이원론, 주체를 두 가지 모순적인 영역으로 분열시키는 이원론과 대립된다. 그에게 주체성의 형태 및 인식의 구조에 대한 이해는 오직 신체와 정신, 정념과 지성 사이의 상호연관성interconnectedness을 인지함으로써만 달성되는 것이다. 그는 주체와 인식 사이의 관계를 구현embody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는 헤겔과 같지만, 헤겔과 달리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최초의initial 분리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다. 사실 헤겔에 의한 스피노자주의에 대한 주요 비판은 스피노자의 실체 일원론이 주체성을 역사적인 생성 하에서 파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2) 헤겔은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모두 수학적 모델을 준수하면서 사유의 추상적 개념화를 추구했다고 보았다. 반면 피에르 마슈레는 스피노자의 실체 및 속성 이론이 존재와 인식의 무제한적 가능성을 가진 구체적인 체계라고 기술한다. 사실 스피노자의 경험주의 비판, 인식과 주체성의 상상적 토대에 대한 설명, (개체적이고 집단적인) 정신과 신체의 역량potentia을 구획하고, 규율하고, 포함하는 정념에 관한 성찰 등은 알튀세르와 라캉의 주체 이론을 중요한 점에서 예상하는 것이었다. <br />
<br />
&#160; 스피노자의 목적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존재론적 이원론으로 서술되지 않는 인식 이론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는 (신이 모든 세계의 행위를 고정되고 미리 주어진 목적에 따라 이끈다는) 종교적 목적telos의 교설을 받아들이도록 인간들을 기만하는 신학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실재에 대한 목적론적이고 선험적인a priori 개념화는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그릇된 설명이며, 신에 대한 이해를 무지하도록 고정시키는 공상에 불과하다. 세계에 대한 잘못된 지각과 오해는, 의지에 대한 합리적 이해와 우리가 자연과 갖는 정념적 교환 사이의 원초적 간극chasm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러한 이율배반이 우리의 앎의 형태 속에 존재할 때, 스피노자는 오류의 원인을 보여주려고 한다. <br />
<br />
&#160; 반성적 자기의식의 역할은 실체를 구성하는 힘과 변용affect의 구조에 의해 엄격히 제한된다. 의식은 이러한 구조 밖으로 연장될 수 없으며, 주체는 관념의 창조적 작인agency이나 인식 가능성 조건을 만드는 자율적인 경험의 주체가 아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의 본질은 신의 속성의 일정한 변양definite modification에 의해 구성된다’(&lt;윤리학&gt; 2부 명제 10 따름정리corollary). 유사하게, 정신 속에는 절대적인 자유의지란 없으며, 정신은 원인에 의한 이러저러한 의지에 의해 규정되며, 이 원인은 마찬가지로 다른 원인에 의해 규정되고 이렇게 무한히 계속된다(ad infinitum). 스피노자는 정신과 신체를 공통의 실체의 속성의 무한함 가운데서 두 가지 속성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사유와 연장은 이러한 일차적primary 실체의 변용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유, 지성, 의지, 지각, 관념, 대상, 인식의 형태 등은 모두 이러한 실체와의 내재적이고 필연적인 관계로부터 나온다. 주체는 이러한 합리적 총체 내에 위치해야 하며, 실체의 존재 또는 변용의 양태mode로 이해되어야 한다. <br />
<br />
&#160;<br />
<br />
관념들과 이미지들, 신체들과 정신들<br />
<br />
&#160; ‘관념의 질서와 연관은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은 것이다’(2부 48번 명제). 스피노자에게 정신은 그것이 신체의 특수한 관념이기 때문에 개별적 주체이다. 신체는 다수성multiplicity의 장소이자 경험에 의해 많은 방식으로 변용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과 신체 속에서 관념의 질서는 적합하고, 명석 판명한 표상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이 아니라, 인식은 혼잡하고, 부분적인 것이 된다. 명석함과 곡해distortion 사이의 구별. 스피노자에서 정신은 사유 내에서 신체의 관념으로서, 신체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사유하는 신체이다. 이러한 신체와 정신 사이의 중요한 상호연관성, 관념의 물리적이고 물질적인material 장소로서 신체를 고려할 때, 스피노자는 어떻게 순수 인식의 이론을 전개할 수 있는가? <br />
<br />
&#160; 그는 3종의 인식을 구별한다. 각각의 인식은 실체에 대한 각각의 관계 및 존재양태에 대응한다. 1종의 인식은 ‘개별 대상들이 우리에게 어떠한 지성적 질서도 없이 단편적이고 혼잡한 방식으로 감각을 통해 드러나는’(2부 명제 40 sch. 2) 인과적 경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부적합한 관념을 낳는데, 이는 오직 정념, 감정, 신체적 변용들bodily affects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1종의 인식은 신체적 경험의 다수성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취해진 이미지들, 상징symbol으로부터 파생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어떠한 표상 대상도 필요로 하지 않는 스스로에게 적합한 관념과, 이미지나 기호sign에 결부된 관념을 구별한다. 상상imaginatio은 관념과 이미지의 관계를 혼동할 수 있고, 오류를 일으킬 수 있다. 인식의 상상적 형태에 관한 연구에서 스피노자는 언어의 문제에 대해 언급한다. 언어는 재현과 진리 사이의 간극을 메울 수 없으며, 기만, 왜곡, 환상 등에 종속되어 있다. 그에게 언어는 반동적인 것이며, 상상력에 결부되어 있고, 신체적 변용에 밀접히 결부된 부적합한 관념에 의해 조건지어진다. 니체와 마찬가지로 스피노자는 관념의 물질성 및 그 언어적 형태와의 구체적 연관성을 지적한다. 언어와 주체성은 밀접히 연관되어있다. <br />
<br />
&#160; 2종의 인식은 ‘우리가 갖는 사물들의 특성의 적합한 관념과 공통통념common notions이라는 사실로부터'(2부 명제 40 sch. 2) 나온다. 2종의 인식은 1종과 3종의 인식 사이를 매개한다는 점에서 중요한데, 공통통념은 사유가 신체의 직접 경험에 근거하지 않은 일반성generalities을 드러낼 수 있다는 증거이다. 공통통념은 정신이 여러 신체들의 변용의 통일성unity을 추론하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으로부터 나온 상호연관성, 필연적 통합integration 등을 보여준다. &lt;윤리학&gt; 3부와 4부3)에서 스피노자는 신체적 변용을 표상하기 위한 정념의 복잡한 도식을 만드는데, 이는 상상력이 가상illusion, 부적합한 관념 및 상상적 동일화를 낳을 수 있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4부에서 특히 그는 대중들multitude이 신학적이거나 정치적인 권위에 의해 묶일 수 있는 방식에 대해 토론한다. 그는 특히 사랑과 증오, 기쁨과 슬픔, 희망과 공포 사이의 정념의 동요와 인간 사이의 갈등과 불안정성의 항구적인 원천을 추적한다. &lt;스피노자와 정치&gt;에서 발리바르는 스피노자에게 다중은 상호적 인정mutual recognition 과정에 의해 형성될 수 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모방과 동일시는 주체를 대중의 한 부분으로 구성하고, 복종적이고 예속적인 사회적 유대를 창조한다. 정서적 모방(affectuum imitatio)에 대한 연구는 많은 부분에서 정신분석학과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관행practice에 의한 신체의 규율(알튀세르) 등을 예상하는 것이다. ‘신체의 물리학’은 다른 정치적 형태에 따라 구성되고 재구성되는 정념의 취약함과 항구적 진동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독해는 스피노자의 3종의 인식 이론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이성은 체화된 이성embodied reason의 한 종류로, 단지 매우 형식적인 의미에서만 변증법적이다.<br />
<br />
&#160; 사유의 자율적 능력을 보여주는 오성understanding의 단계는 스피노자가 지성intellect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지성은 사유 속성의 한 양태로, 무시간적이고 무한하며 실체에 속하는 것이다. 실체의 속성들로서 유한한 신체와 정신은 모두 지성의 가능성을 포함한다. 지성은 본질과 실존이 하나의 것인 비판적이거나 순수한 사유의 형태이다. 이때 인식의 구성은 대상의 실존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스피노자에게 관념은 대상 이전에before 오는 것이다. 관념은 사유 속성의 효과로, 그것에 내재적인 것이며 관념의 대상ideatum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주체의 감각 지각에 의해 생산된 대상의 관념과, 유한한 신체 및 정신에 의해 동요되기 이전의 사유 내의in thought 대상의 관념은 구분되는 것이다.4) 의인론 및 의식의 주체 이론을 거부하면서, 스피노자의 3종의 인식은 의식을, 관념의 질서와 연관이 실재의 질서와 연관과 동일한 실체의 반성된 실체reflected substance로 정립한다. 3종의 인식은 내재성immanence에 근거하는 것이지 구체적-특수한 것의 초재성transcendence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두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내재적이다. 첫째로 스피노자의 인식 이론은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에 근거하지 않으며, 양자는 모두 실체의 속성들이자 재귀적reflexive(내재적) 인식의 조건을 (양태적으로modally) 포함하고 있다. 둘째로 내재적 인식은 관념의 점증하는 적합성과 신체 및 정신의 관념들의 일반화 위에 기초한다. 이때 신체와 정신 사이에는 평행론, 즉 인식의 상호연관성 및 이성에서 지성으로의 이행이 변용된 사물로서 신체에 대한 자각과 평행됨 모두를 요구하는 평행론이 존재한다. 실체와 그 양태 사이에는 동일성이 존재하며, 이는 원본적인, 존재론적 차이나 헤겔적인 단절적인ruptural 부정성 같은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인식의 발전은 유한한 사유와 무한한 지성 내에서 내재적이지만, 이는 실체에 대한 선험적 개념화를 의미하거나 어떤 목적인final cause을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160; &#160; &#160; &#160;<br />
<br />
&#160; 스피노자는 코기토의 철학이나 절대적 주체성의 철학을 표상하지 않으며, 그에게서 우리는 ‘구조’에 관한 첫 번째 이론을 발견한다. 그는 존재 양태를 실존의 매우 다양한 평면plan 위로 분배한다. 타자로부터 분리되고, 자기-함량적인self-contained 동일성으로 주체를 재구성하는 것은 오직 부적합한, 인식의 상상적 형태일 뿐이다. 주체성이 결여된 스피노자의 구조화된 총체성structured totality 개념은 현대 비판 사상의 반인간주의적 입장과 중요한 관계를 가지며, 또한 알튀세르의 인식론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주체와 객체는 모두 실존의 실재적 평면에 대해 무지한 인식의 상상적 형태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다. 알튀세르에게 인식의 모든 상상적 형태는 이데올로기적이며 참된 인식의 지위를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라캉에게도 상상적인 것은, 코기토가 항상 준거해야 하는 주체의 자아ego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br />
<br />
&#160;<br />
<br />
3. 헤겔적 현상학: 역사의 주체를 구성하기<br />
<br />
&#160; 헤겔로의 회귀는 프랑스철학에서 1930년대에 시작되었는데, 이는 데카르트적이거나 스피노자적인 합리주의 형태에 대한 심각한 도전을 제기했다. 헤겔에 관한 논쟁은 이폴리트, 코제브, 장 발, 메를로-퐁티, 사르트르, 루카치 등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제기된다. 이는 또한 의식의 역사성historicity의 이론으로의 회귀였다. 헤겔적 의미에서 현상학은 의식의 역사적 경험과 관련된다. 그의 사변 철학은 사유와 경험의 여정을 의미와 진리 추구의 과정으로 본다. 헤겔에게 주체성은 보편성, 특수성(specificity or particularity), 개별성(singularity) 등을 통해 분석될 수 있다. 변증법이란 지양의 과정을 통해서 대립물, 모순 그리고 차이를 극복하고 통합할 수 있는 관계이다. 변증법의 논리는 인식과 역사 모두에서 대립되는 운동들을 종합할 수 있게 해준다. <br />
<br />
&#160; 헤겔의 현상학은 철학적 주체의 역사에 관한 변증법적 분석으로, 정신Geist으로서 자기의식의 점진적인 전개로 간주될 수 있다. 그에게 진리, 합리성, 그리고 절대자 모두는 역사적이고 주체적인 생성 과정을 통한 성취achievement이자 결과로서 간주된다. 요컨대 운동과 자아의 시간성temporality없이 사유와 존재는 그 자신들을 정립하거나 넘어설 수 없다. 헤겔의 체계는 정적이지 않고 동적이며 변혁적이다. 운동, 생성 등에 대한 그의 관심은 주체를 운동 자체의 원리로 간주하도록 한다. 주체는 어떤 고정점에 포섭되거나 시공간 상에서 유예될 수 없다. 헤겔에게 철학의 업무는 규정적인 사유를 그 고정성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반정립의 운동을 보는 것이다. 데카르트적 이원론, 그리고 헤겔이 ‘단조로운monochromatic 형식주의’라 부르는 칸트 철학 등은 타자성과 모순을 배제하고, 변증법적 사유만이 종합할 수 있는 본질과 실존 사이의 근본적 관계를 간과하는 주체성의 한 예이다. 헤겔은 그의 실체와 주체 개념을 근원적 차이 또는 틈, 그가 부정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표시한다. 그 자기 운동이 주체를 존재로 만드는 힘이며, 그 본질에 존재를 부여하는 힘은 부정성이다. 실체와 주체 모두 그 자신의 부정을 포함한다. 자아와 주체(의식과 자기의식) 사이의 구별은 인정과 자기의식, 절대지에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한 고된 자기 외화의 과정을 하도록 이끈다. 의식은 절대자 안에서 그 자신의 완전한 의미를 달성하기 위해 스스로의 동일성을 거듭해서 상실하며 강제된 망명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 이러한 욕망하는 주체 개념은 이폴리트, 코제브, 라캉 등에 의해 보다 상세히 전개된다. <br />
<br />
&#160;이제 헤겔의 스피노자적인 형이상학적 일원론 비판의 토대가 명백해진다. 주체의 복잡한 구조를 실체의 단순한 변양modification으로 환원함으로써 스피노자의 논리는 주체적 생성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표현적 총체성expressive totality에 대한 헤겔의 변증법적 개념화는 부정성 개념과 더불어 주체의 작인, 의지, 행위라는 중요한 문제에 대한 응답이다. 헤겔이 보기에 표현적 총체성과 부정성은 차이와 특수성의 구체적 표현, 상호성과 인정, 역사 속에서 의식의 능동적 생성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스피노자의 추상적 실체에 대한 중요한 교정자corrective가 된다. <br />
<br />
&#160; 헤겔의 프랑스에서의 수용에 대해 논의하기 이전에, 마르크스에 의한 헤겔적 주체 개념에 대한 변형을 먼저 다룰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관념론 대 유물론의 논변 외에도 마르크스와 헤겔 모두는 어떻게 실재와 주체성이 나타나고 형태를 갖게 되는가라는 현상학적phenomenological 질문에 흥미를 가졌다. 알튀세르에게 이는 무엇보다 이데올로기와 인식의 문제였고, 이에 그는 헤겔보다는 스피노자로 회귀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t;파리 수고&gt;에서 마르크스는 그 속에서 주체의 실존이 자연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매개되는 세계에 대한 사회적 존재론에 관심을 가졌다. 마르크스에게 동일성과 차이, 부정과 모순은 언제나 그 형태에 있어 명백히 사회적이다. 그에게 헤겔의 오류는 사유와 사회적 존재를 단지 의식의 영역 안에서 파악한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주체의 그 자신과 타인들로부터의 소외estrangement의 정치적 이유에 대해 논의했고, 이는 주체와 타자들 사이의 교류intercourse에 초점을 맞춤으로써만 규정될 수 있다. 헤겔처럼 순수 사유의 영역에서 주체의 실재적 실존 양태는 다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헤겔 모두는 주체의 대상화objectification라는 질문에 흥미를 가졌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헤겔이 소외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사유의 대상화와 혼동한다고 주장한다. 소외alienation는 사유 내 대상으로부터의 소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 마르크스는 헤겔의 주-노 변증법을 취하고 노동을 통한 주체의 외화externalization를 강조한다.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의 소외는 우선 노동 대상으로부터의 소외이며 또한 유적 존재로부터의 소외이다. 이러한 소외에는 중요한 실존적인 차원도 있는데, 대상적 존재로서 주체는 또한 고통받으며 조건지어진 제한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의 임무는 주체의 현실에 대한 이러한 부정을 초극하는 것이다. 이때 변증법에 대한 마르크스의 의인화anthropomorphization는 명백하며, 그의 변증법적 기초를 이루는 것은 실체의 내적 부조화가 아니라 자연적 주체, 인간이다. <br />
<br />
&#160; 마르크스는 사회적 주체의 문제를 자연의 감각적 주체와 관련시키는데, 이러한 감각적 주체는 사회적 삶의 토대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헤겔의 관념론을 과대평가하고 자아와 세계 사이의 존재론적 관계를 과소평가한 것은 아닌가? &lt;정신현상학&gt;도 주체의 복잡한 여정을 기술하면서 이 주체의 유한성과 고통을, 의식과 세계 사이의 존재론적 불균형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160;도입부에서 이야기한 헤겔로의 회귀란 단지 사회적으로 매개된 것으로 간주된 소외로의 회귀일 뿐만 아니라 존재론적 관계로의 회귀이기도 하다. 불행한 의식과 주-노 변증법은 각각 이폴리트와 코제브에 의해 주체의 실존의 존재론을 전개시키는 데에 도입되었다. 문제는 소외의 실존 양태이다. 소외는 마르크스가 &lt;파리 수고&gt;에서 주장한 것처럼 사회적인 것 속에서 대상화되는 것인가 아니면 자아와 세계 사이의 내생적인 관계인가? 만약 전자라면 그 정치적 해결책은 무엇인가(코제브)? 그리고 후자라면 여전히 변증법적으로 개념화될 수 있는 실존의 구조가 존재하는가(이폴리트)? 이러한 새로운 질문방식은 헤겔의 철학을 종합이나 화해없는 반정립, 계속적으로 전복되고 분열하는 통일체 내에서 대립항들의 유희로 해석하도록 만들었다. <br />
<br />
&#160;<br />
<br />
코제브와 이폴리트: 주체, 역사, 구조<br />
<br />
&#160; 코제브의 중심 주장은 &lt;정신현상학&gt;의 자기의식의 운동과 주체성은 무엇보다도 인간학anthropology이라는 점이다. 역사와 인식은 오직 역사를 만드는 인간 행위에 의한 시간적 운동에 의해 주어진다. 청년 마르크스처럼, 코제브는 존재와 생성, 부정과 부정성을 인간 &#160;노동 행위의 역사적 장 내부에 위치시킨다. 자연 상태에서 존재는 단지 대자존재being-for-itself일 뿐으로 자연적 의식은 고립된, 개별적인 자기-확실성을 달성하며 대상에 대한 인식은 단순히 그것과 무매개적인 동일성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타자로부터의 인정을 욕망하는 주체는 동물적-존재를 넘어선다. 인간은 주어진 존재given-being5)를 변혁하는 부정 행위 자체이다. 주체는 곧 역사의 운동으로서, 자연적 존재의 수동적이고 관조적인 행위가 아니라 능동적이며 타자의 인정을 통해 자기인정을 추구하는 (부정성으로서) 주체의 인간화하는 욕망이다. 코제브는 욕망을 그의 인간주의적 문제틀의 중심에 놓는데, 후에 라캉은 이를 자신의 이론으로 취하기도 한다. 코제브는 특히 헤겔의 주-노 변증법을 활용한다. 이는 두 가지의 충돌하는 주체성들의 극적인 설명에다가 자아와 그 자신 사이의 내적 관계 및 자아와 타자 사이의 사회적 관계로서 이원성을 도입하는 것이다. 주인은 의식이 그 자신에 대해 존재하는 의식을 표상한다. 반면 노예의 실재는 그에게 우연과 상실(죽음의 유령)을 주는 주인의 위엄과 우월성의 인정, 그리고 부정적인 것으로 머무는 노동 행위에 의해 구성된다. 그러나 주인은 그의 대상 욕망을 목적 자체로 보는 순수한 부정성에 고정되어 있는 반면에, 노예는 부정적인 것의 초월과 변혁을 위해 준비되어있다. 욕망, 부정성은 자연적 세계를 변용시키며 이 과정에서 노예와의 관계 또한 변용된다. 작업work은 코제브에게 무엇보다도 시간인데, 이는 시간 내에서 존재하며 시간을 요구한다. 작업을 통해서 노예는 인간적 역사로서 인간적 시간성human temporality을 만들고, 자연적 진화를 멈추며 노예적 의식을 극복한다. 이러한 주체성과 욕망에 관한 해석은 자연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사이의 내적인 이원론에 근거한다. 코제브의 구분에 따르면 인식은 언제나 인간 행위 내에서 현시된다. 관념은 작업과 행위에 의해 매개된 대상 및 기투projects의 산물로 나타난다. 코제브의 인간학적 헤겔 독해는 두 가지 중요성을 가진다. 첫째, 이는 욕망이 인간화되고 주체라는 행위자에 결부되어 인간 주체가 역사의 변증법적 운동을 이끌도록 하는 것. 둘째, 진리와 절대지의 가능성의 조건을 언표의 주체enunciating subject에서 찾는 것. 코제브의 인간학적 헤겔 독해는 청년 마르크스의 인간학적 변증법 독해와 유사하다. <br />
<br />
&#160;코제브와 달리 이폴리트의 헤겔 주체 개념 독해는 인간 실존의 비극적 요소를 강조하며, 역사철학에는 인간적 요소나 역사적 행위자로서 주체에 대한 해석이 없다고 본다. 이폴리트는 인간 경험의 조건을 인정투쟁에서 읽어내며, 이러한 투쟁이 타자 및 타자의 인정에 대한 욕망에 관한 것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절대자의 달성은 영원히 연기된다.’ 이폴리트가 주체의 실존적 곤경에 초점을 맞출 때, 이러한 존재론은 인간학적인 방식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식의 가능성과 진리의 경험을 구조화하는 조건의 관점에서 파악된다. 생의 존재는 ‘자아의 불안disquiet’이고, 그 자신이기 위해서는 언제나 스스로에게 타자로 남는 주체의 고통과 소외이다. 이는 부적합성, 대상의 진리에 대한 무한한 비-상응의 경험으로, 주체는 언제나 그 자신과의 통일에 이르는 데 실패한다. 자기발견의 경계에서 동요하는 불행한 의식은 주체성의 토대이다. 이폴리트에게 부정성은 존재의 중심에 위치해있는데, 이는 모든 내용에 내재적이며 모든 주체의 가능성의 조건이다. 그 내적 모순으로 인해 개체는 주어진 상태에 머물지 않는 절대적 충동이 된다. 노동/작업의 행위에서 주체는 그 자신을 부정하고 대상을 새로이 형성한다. 즉 노동은 이성을 인간적 사건으로 정초한다. 이러한 주장은 마르크스나 코제브를 떠올리게 하지만, 이폴리트의 개념화는 이러한 철학적 관점과 구분된다. 이폴리트의 욕망 개념은 이원적 존재론에 의해 파악되지 않으며, 욕망의 인간화는 상상적 운동으로서 인정의 구조에 가깝다. 이폴리트는 다른 곳에서 주-노 변증법을 구조화하는 인정에 대한 욕망을 ‘거울 유희’로 파악한 바 있다. 더 나아가 이폴리트는 시간을 모든 여타의 범주들을 대체하는 것으로 정립한다. 시간은 모든 인간적 실재의 조건이자 주체의 창조적 가능성을 한계짓는 것이다. 이는 주체가 노동 대상과 갖는 마주침을 상실된missed 마주침으로 만든다. 마르크스나 코제브와 달리 자연에 대한 노동은 불행한 의식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으며, 유한성 내에서 욕망은 오직 대상에서 상상적 만족만을 찾을 뿐이다. 코제브에게 시간, 욕망, 인식은 모두 인간화된 것이지만, 이폴리트에서는 시간이 주체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시간은 생을 구조화하는 조건이고, 어떤 수단으로라도 주체에 의해 무화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폴리트가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은 자아의 불안 또는 불행한 의식이다. <br />
<br />
&#160; &#160; &#160; &#160; &#160; &#160; &#160; &#160; &#160; <br />
<br />
&#160; &#160; <br />
<br />
&#160; &#160; &#160; &#160; &#160; &#160; &#160;<br />
<br />
<br />

<br />
<br />
<br />
1)&#160;반면 발리바르는 ‘시민 주체’에서 데카르트는 사유하는 사물, 즉 코기토를 주체라고 명명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아직 실체론과 관련된 것이었고, 주체를 주권적 존재sovereign being로 공식화한 첫 번째 이는 오히려 칸트라는 것이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또한 이 지점이 정치적 주체, 시민이 등장한 순간이다. <br />
<br />
<br />

2)&#160;피에르 마슈레에게 이러한 헤겔의 비판은 스피노자의 속성 개념(1부에서 속성의 정의: 나는 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지각하는 것을 속성으로 파악한다)에 대한 그릇된 독해에서 기인한다. 속성에 대한 주관적 해석이 주장하듯이 속성 개념은 단지 지성에 의해 지각되는 것이 아니며, 스피노자는 사유를 실체 바깥에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사유와 연장 속성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무한한 속성이 존재하며, 유일한 실체는 실체의 절대적 무한성, 절대적 역량의 결과이다. 속성은 사유가 실체의 변양modification으로서 실체에 대해 가질 관계를 표현한다. 자세한 사항은 &lt;헤겔 또는 스피노자&gt;의 3부 참조. <br />
<br />
<br />

3)&#160;네그리는 이 점에서 &lt;윤리학&gt;에서 &lt;신학-정치학 논고&gt;의 초안으로 알려진 저작의 개입을 무시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lt;신학-정치학 논고&gt;는 &lt;윤리학&gt;의 형이상학적 담론 내부로 도입되며, &lt;윤리학&gt;의 후반부에 명백한 정치적 토대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lt;이례적 별종&gt; 5장 참조. <br />
<br />
<br />

4)&#160;&lt;지성개선론&gt;에서 스피노자는 이 중요한 구별을 설명하기 위해 기하학적 유비를 사용한다. ‘참된 관념은 그 대상과는 다른 것이다. 원과 원의 관념은 다른 것이다.’<br />
<br />
<br />

5)&#160;주어진 존재given-being란 코제브가 쓰는 용어로, 동물적 삶 속에 잠겨있는 무매개적 만족의 단순한 세계 속에 있는 주체를 서술한다. <br />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533/56/cover150/0826479227_1.jpg</url><link>http://foreign.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0826479227</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책의 감옥</category><title>규범성의 근원 中</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4661196</link><pubDate>Thu, 24 Mar 2011 02:4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4661196</guid><description><![CDATA[&#160;
&#160;코스가드 여사의 모습(1952~)&#160;&#160;&#160;
&#160;

일종의 윤리학사이기도 한 이 책은 규범성의 근원을 다룬다. 코스가드는 주의주의자(홉스, 푸펜도르프) 등 규범성의 근원을 입법자에게서&#160;찾는 입장, 실재론자들처럼 어떤 도덕적 실재에서 찾는 입장, 흄 등 반성적 승인(reflective endorsement)론자처럼 특정한 인간적 본성에서 찾는 입장 등을 차례로 개괄, 반박하고 자율로서의 자유(칸트)에서 비로소 규범성의 근원이 나올 수 있다고&#160;주장한다. 책 후반부에는 버나드 윌리엄스나 레이몬드 게스 등 동료 학자들의 비판 및 코스가드의 답변 등이 실려있다. 현재 하버드에서 가르치고 있고 또 롤즈의 학생이기도 했던 그녀의 책은 센델의 &lt;정의란 무엇인가&gt; 같은 책보다 훨씬 유익하고&#160;깊이가 있는 것 같다;;(같은 하버드지만, 만약 번역된다하더라도 그렇게 많이 팔릴 것 같지는 않다...)&#160;아래 내용들은 이러한 칸트주의적 관점에 대해&#160;제기될 수 있는&#160;몇몇 반박에 대한 반비판으로 그녀가 제시하는 것들이다. 상당히 혼란스럽고&#160;헤매기도 했던 부분들이지만 그냥 올린다;;&#160;&#160;
Christine Korsgaard, The Sources of Normativity,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160;pp. 145-166.&#160;&#160;&#160;
<br />
가치의 기원과 삶의 가치 <br />
<br />
4.3.1 고통은 앞서 논의한 것들에 대한 반론이 된다. 첫째로 고통은 우리의 심적 삶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데에 장애물이 된다. 그가 사적이라고 부른 바로 그러한 의미의 고통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고통은 규범성에 관한 자연주의적 실재론의 어떤 형태에 대한 큰 유혹이다. 쾌락과 달리 고통은 규범적 사실의 한 종류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고통은 칸트적 윤리학 또는 인간성의 가치를 모든 가치의 토대로 만드는 윤리학에 대한 반론이 되는데, 다른 동물들도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다. <br />
4.3.2 처음 두 반론은 연관된다. 가령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에 반한 논증은 규범적 자연주의- 결코 틀릴 수 없는 -에 대한 반대였다. 그러나 이에 반대하는 이들은 고통이 어떤 토대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공리주의자들은 쾌락과 고통이 가치이기도 한 사실이라고 주장하며 이것이 자연적 세계에서 윤리학이 토대를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감각을 지식의 토대로 놓는 인식론적 주장과 유비적이다. <br />
4.3.3 정말 그런가? ‘나는 빨간 감각을 갖는다’의 경우, 그것을 보는 것은 우리 마음 속의 작은 인간인가? 비트겐슈타인은 바로 모든 심적 행위를 감각과 관념의 관조로 환원시키는 것, 그리고 이러한 그림을 지지하는 ‘가짐’이라는 언어에 대해 공격한다. 그런데 누군가 고통스럽다고 말할 때 그는 그 조건을 바꿔야 할 이유에 대해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그 조건을 바꿔야 할 아주 강한 충동을 갖고 있다고 알리는 것이다. <br />
4.3.4 고통은 단순히 특정한 감각이 아닌데, 고통의 고통스러움은 이러한 감각이 우리가 맞서 싸우도록 이끌리는 감각이라는 사실에 있다(고통의 생물학적 역할). 감정적 고통과 물리적 고통이 공유하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감각이 아니라 세계에 대해 맞서 싸우도록 한다는 것이다. 고통은 조건을 바꿔야 할 이유 자체인 조건이 아니라, 당신이 당신의 조건을 바꿔야 할 이유를 갖는다는 지각perception이다. <br />
4.3.5 공감sympathy은 단순히 다른 이의 고통에 대한 불편한 느낌이 아니라, 덜어질 수 있는 것으로서 그들의 곤란에 대한 고통스러운 자각이다(흄, 허치슨). 동정pity은 다른 이들의 고통에 대한 지각, 그의 조건을 바꿔야 할 이유가 있다는 지각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이다. <br />
4.3.6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살아있는 것은 자신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생명에 있어서 이 자기-유지적인 형상은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하는 것이다. 이 살아있는 것이 동물이고 의식적이라면, 정체성을 보존하는 방식은 감각, 고통을 통한 것이다. 동물은 자신의 물리적 실존을 위협하는 것을 지각하고 그것에 맞서 싸우려 한다. <br />
4.3.7 비교: 인간과 실천적 정체성. 살아있는 것과 물리적 정체성. 의무는 당신의 실천적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에 대한 반성적 거부이며 고통은 물리적 정체성을 위협하는 것에 대한 비반성적 거부이다. 고통은 이유의 지각이며 이는 규범적인 것으로 보인다. <br />
4.3.8 의무와 고통 모두 부정적인 도덕 감정과 관련된다. 고통은 현재, 과거, 미래 모두에 적용되는 이유에 대한 지각이다. 마음의 권위는 부정적인 도덕 감정의 경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감정을 절대적으로 함축한다. 이때 자신의 이유를 지각할 수 없는 마음은 마음으로서 전혀 기능할 수 없을 것이다(칸트에서 도덕적 이유의 활동에 대한 자각으로서 존경respect). <br />
4.3.9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갖는 것처럼, 동물도 감각적이며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갖고 자신에게 가치를 부여한다. 생명이 가치라고 말하는 것은 거의 동어반복이다. 살아있는 것은 그 정체성의 보존이 정언명령인 것으로, 생명은 도덕성의 한 형태이며 도덕성은 인간적 삶이 갖는 그 형태이다. <br />
4.3.10 우리의 동물적 본성은 인간적, 도덕적 정체성이 의존하는 근본적 형태의 정체성이라는 것으로 보인다. 당신의 동물적 본성을 가치롭게 여기지 못하면, 당신은 아무 것도 가치롭게 여길 수 없다. 동물적 정체성이 만드는 이유와 의무는 단지 사적인 이유가 아니며, 다른 동물들에 대한 이유는 또한 당신에 대한 이유도 되는 것이다. 고통받는 동물을 당신이 동정하는 것은, 이유를 지각하기 때문이다. 즉 동물은 울부짖음으로써 고통을 표현하고, 이는 그 조건을 바꿔야 할 이유를 보여준다. 이 울부짖음은 단순한 소음이 아니며, 다른 동물들도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당신에게 의무를 부여할 수 있다. <br />
4.3.11 이전에 우리는 동물들은 반성적 의식, 즉 자기의식을 갖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럼에도 고통과 이유는 반성적 구조를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이유는 충동에 대한 승인이고 고통은 감각에 대한 거부이다. 이러한 이중 구조 또는 자기지시를 가진다는 점에서 고통은 재귀적인recursive 것이다. 고통 속에 있는 동물은 그 조건을 반대하는 것이지만 또한 반대하는 그 조건에 있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고통 속에 있는 것은 고통이다. 이것이 고통이 거의 언제나 나쁜 이유인데, 고통받는 피조물은 그 고통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고통이 내생적으로 나쁜 감각이라는 것은 아닌데 어떤 맥락에서는 고통이 환영받기도 하기 때문이다(장례식에서의 애도). 이때 고통이 내생적으로 나쁜 감각이라 생각하도록 하는 충동은 가치가 단순히 의식과 관련된다는 근본적인 오류로부터 나온다. 고통은 단순히 의식에서 오는 것도 아니고 의식과 무관한 외부 세계에서 오는 정보에 대한 것도 아니다. 가령 스너프 무비 등을 우리가 편안하게 볼 수 없는 것은 단순히 그것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만은 아니고 우리의 고통이 지각하는 악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br />
4.3.12 우리는 식물에게도 의무를 갖는가? 식물은 의식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지 않다. 식물을 존중하지 않는 이는 모든 가치의 토대인 생명에 대한 숭배가 부족함을 보여줄 뿐이지 그가 잘못 되었다고 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br />
4.3.13 동물과 인간은 서로에게 의무를 갖는가? 개를 길들이는 경우 이는 의무가 아니라 지배 관계 아닌가? 이는 틀린 의견은 아니겠지만 외재적인 기술, 3인칭적 기술이다. 동물 또는 인간의 1인칭에서 압력과 지배는 어떤 규범성의 형태, 형상을 갖는다. <br />
4.3.14 두 동물이 지배를 위해 싸울 때조차 이는 고도로 의례화되며, 의지의 싸움이 된다. 도덕성의 기원에 관해서, 니체와 프로이트는 도덕성과 특수한 인간적 의식성이 우리 종의 진화와 동시에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도덕성은 지배 충동(권력의지, 공격본능)이 출구를 박탈당하고 자아에로 돌아섰을 때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본능을 안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을 지배하는 법을 배웠다. 고통, 처벌은 동물이 자신의 정체성에 반역하도록 강제하며 이것이 규범성의 근원이다. 도덕적으로 선한 인간은 자연적 충동을 가질 때조차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이는 자기증오와 허무주의로까지 나아간다. 물론 니체나 프로이트의 계보학적 탐구가 우리가 이전상태로 단순히 회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초인). 아마도 반성적 거리가 우리의 동물적 본성을 통제하도록 했던 것처럼, 아마 또한 자기통제에 대한 반성적 거리가 또한 이를 극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br />
<br />
<br />
회의주의와 자살 <br />
<br />
4.4.1 여기서 이야기한 의무에 대한 설명은 어떤 의미에서 자연주의적이다. 규범성은 어떤 자연적 - 심리학적이고 생물학적인 - 사실에 토대를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이는 자연주의적이지 않다. 자연주의적 관점은 규범적 진리를 사실적 진리와 동일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반성적 승인이 행위를 올바르게 만드는 데에 충분하다는 것이 아닌데, 만약 그렇게 된다면 모든 행위는 올바른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규범적 자연주의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결코 틀릴 수 없는 그런 류의 규범성이란 없다. 만약 우리가 쾌락, 고통, 반성적 승인 또는 거부를 의식 바깥에서, 3인칭으로 본다면 그것들은 단순히 가치의 사실들일 뿐이지 가치 자체를 인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치의 사실은 가치 자체가 아니라 단지 사실일 뿐이다. 그러나 이는 삶의 사실,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가치를 갖도록 하는 자연적 조건이다. <br />
4.4.2 만약 가치가 삶의 사실이라면, 모든 가치에 대한 거부는 삶의 거부의 형태를 갖는다. 따라서 실천적인 규범적 회의주의의 가장 직접적인 형태는 자살이 될 것이다. 물론 모든 자살이 그런 회의주의의 표현은 아니지만, 단지 자신들이 무가치하다고 생각해서, 삶이 아무 의미나 가치가 없다고 저지르는 자살은 문제가 된다. 이때 자살의 부도덕성immorality은 이러저러한 가치의 거부가 아니라 가치 자체에 대한 거부이다. 칸트는 자살하지 않을 의무가 가장 근본적이고 으뜸가는 의무라고 했고, 비트겐슈타인 역시 자살이 허용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될 것이라고 쓴 바 있다. 이들은 살아있음이 하나의 가치가 아니라 모든 가치의 조건이라고 보았고, 자살이 특정 가치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가치 자체에 대한 거부라고 보았다. 이 강의에서 내가 주장한 것은 도덕적 의무와 도덕적 가치는 모든 의무와 가치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인간성의 거부는 가치에 대한 거부이며 이는 완전히 실천적인 규범적 회의주의이다. 가치는 오직 우리 삶이 살 가치가 있을 때 존재하며 우리가 하는 일에 의존적인 것이다. <br />
가령 규범적 회의주의자는 자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할 이유를 갖지 않을 것이다. 그는 욕망과 충동을 갖지만, 어떤 것을 할 이유는 갖지 않으며 그가 하는 것은 단지 순간의 욕망을 따르는 것뿐이다. 그는 정언명법도 가언명법도 갖지 않는다. 그는 어떠한 목적도 갖지 않는데, 그의 욕망은 그에게 이유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욕망은 가언명법에 필요한 의미에서 추구해야 할 목적을 규정해주지 않는다. 만약 목적이 지배적인 욕망의 대상이라고 한다면, 당신이 하는 어떤 것도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될 것이며, 당신은 틀릴 수 없게 된다. 결국 실천적 규범적 회의주의는 합리적 행위 같은 것이 없다는 관점이 된다. 우리는 살아가는 한에서, 인간 존재로서 합리적 행위를 해야만 하며, 동물적 행위나 비반성적 행위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아니다. <br />
<br />
강의의 결론 <br />
<br />
1 홉스나 푸펜도르프 같은 주의주의자는 규범성이 입법자의 명령으로부터 규범성이 나온다고 주장한다. 이는 우리와 우리 자신에 대한 관계를 기술한 것일 때 참이다. 즉 사유하는 자아는 행위하는 자아에게 명령한다. 2 네이글 같은 실재론자들은 이유들이 내생적으로 규범적인 존재자라고 주장한다. 이는 사유하는 자아가 우리에게 현전하는 충동들을 평가하고 욕망이 이와 같은 규범적인 이유인지 보다 객관적으로 살펴보도록 하는 행위를 기술한 것일 때 참이다. 3 또한 사유하는 자아와 행위하는 자아의 관계는 입법적 권위의 관계이며, 우리가 자신에게 권위를 갖는만큼 우리는 우리의 법을 만들 수 있고, 이 법은 규범적이다. 이 점에서 칸트의 견해는 옳다. 자율성은 의무의 근원이다. 4 반성적 승인 이론은 다른 층위에서 또한 참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본성을 승인하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한 아무 것도 규범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반성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우리 가치의 규범성이 우리가 어떤 종류의 동물, 즉 자율적인 도덕적 동물이라는 사실에서 기원한다는 것이다. 5 이는 실재론이 또 다른 층위에서 참이라는 것을 뜻한다. 실재론을 비판하는 존 맥키의 ‘기이함으로부터의 논증’을 상기해보라. 맥키에 따르면 세계가 객관적인 규정성objective prescription을 갖는 가치, 또는 내생적으로 규범적인 존재자를 포함한다는 것은 환상이다. 그러나 맥키는 틀렸고 실재론은 옳다. 그것을 앎으로써 행위에 대한 이유와 동기를 모두 제공하는 존재자는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매우 특이한 존재자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이러한 존재자가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맥키는 도덕적 실재론을 비판하는 위와 같은 말을 썼을 때 과학적 세계관이라는 방에서 홀로 존재하고 있어야만 했을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이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존재자를 세계가 포함하고 있다는 것은 인간의 삶의 가장 익숙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들이고 다른 동물들이다.&#160;<br />
&#160;
&#160;]]></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Community/mypaper/pimg_725516154644423.jpg</url><link>http://blog.aladin.co.kr/vara/4661196</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책의 감옥</category><title>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5, 6장</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4651191</link><pubDate>Mon, 21 Mar 2011 02:0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4651191</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437116X&TPaperId=4651191"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715/47/coveroff/896437116x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160;
&#160;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br />
<br />
5장 민주화 이후의 국가 <br />
<br />
1. 민주화 이후 강력한 국가, 무력한 정부의 문제 <br />
민주주의와 국가: 민주화 이전 한국의 국가는 과대 성장 국가, 발전 국가, 강한 국가 등 권위주의 국가로 개념화되었다. 한국에서 국가의 지배는 냉전 반공주의나 발전주의 같은 이념적 기제를 통해 뒷받침되었으며, 권위주의는 한국 사회에서 매우 동질적인 지배 엘리트(관료 엘리트, 정치 엘리트, 기업 엘리트)를 형성시켰다. 그러나 이제 민주화와 더불어 국가의 이런 성격 및 구조는 변화의 압박에 직면한다. 민주화 이후 유권자의 투표는 민주 정부를 만들어내었고, 이것의 결과는 권위주의 하에서 융합되어 있던 정치 엘리트와 행정 관료 엘리트의 분리였다. <br />
<br />
민주화와 국가의 두 수준: 국가는 두 수준에서 고찰될 수 있다. 하나는 하부구조적 수준의 국가, 대규모 공조직으로서 관료행정적 형태로 제도화된 체제이다(일반적으로 한국의 국가를 강력한 국가라 할 때는 이를 가리킴). 다른 하나는 정부적 수준에서의 국가다. 정부는 권력의 획득과 행사 과정에서 특정의 이념적, 정책적 정향을 갖는 일단의 사람들에 의해 운영되는 국가의 수준이다. 권위주의 하에서 양자는 융합되어있었으나 민주화가 되면서 이 두 수준이 분리된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경우, 집권 초기 이들 정부는 개혁에 대한 열망을 배경으로 집권했으나, 집권 말기에 이르러서는 대통령 리더십이 최하점에 도달한 바 있다. 집권 초 정치 엘리트는 행정 관료에 압도적 우위를 가졌으나, 점차 정치 엘리트는 국정 운영의 무능력과 미숙을 드러냈다. 민주 정부의 정치 엘리트들은 그들의 권력과 개혁 의제를 실천할 능력 사이의 커다란 격차에 직면했기에, 행정 관료 엘리트의 권력은 권위주의 시기보다 커지게 되었다. <br />
<br />
무력한 정부와 헤게모니의 문제: 민주화 이후 과거 야당이 집권하면서 대면하게 되는 문제는 정부의 무력함이다. 김영삼, 김대중 정부 모두 차이는 있으나 무력한 정부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헤게모니의 약함은 무력한 정부의 결정적인 요인인 것이 아니며, 이는 개혁 부진 및 정권 약화의 알리바이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거대 행정 관료 기구를 운영하는 원리로서 절차적 보편성과 개방성이 없었다는 점이다(비선 조직). <br />
<br />
사회적 기반 없는 야당의 문제: 무력한 정부의 등장은 야당이 어떻게 집권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이는 우선 이들이 기존의 발전주의적 모델을 대체할 대안적 비전이나 민주주의 모델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며, 또한 냉전 기득 세력의 이념 공세를 피하고자 그들의 대안을 보수화하려 했다는 것이다(뉴DJ플랜). 이러한 전략적 모호함의 태도로 인해 투표자의 지지와 선출된 자의 책임성 사이의 관계는 느슨하고 모호해지며, 이는 또한 집권정당의 정체성 상실로 이어진다(오도넬의 ‘위임민주주의’). <br />
<br />
2. 무력한 정부와 관료제의 문제 <br />
관료행정 기구에 포획된 정부: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경우 민주주의에서 국가에 대한 대안적이고 구체적인 관념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으며, 기술 관료적 경영주의의 이념에 압도되었던 까닭에 국가 운영에 있어서는 앞선 권위주의 정부 사이에 차이는 별로 없었다. 민주적 국가 운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 때 이는 과거 권위주의 하의 행정 관료 기구를 개혁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지만, 새로운 집권 엘리트들은 이를 진지하게 시도하지 않았다. 또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은 천명만 되었지 정책적으로 구체화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시장효율성, 시장 근본주의가 발전주의에 이어 새로운 헤게모니로 힘을 갖기 시작했다. 민주적 발전 모델을 제시하는 데 실패한 정치 엘리트들은 점차 관료에 의존하고, 결국은 관료에 포획되는 관계로 바뀌게 되었다. <br />
<br />
민주화와 무능한 관료 체제의 문제: 민주주의 하에서 한국의 관료는 복지부동, 무책임, 전문성 결여, 무능, 부패 등의 특성을 갖는다. 왜 그런가? 첫째, 박정희 정부 시기처럼 위로부터 주어진 국가 목표의 부재. 둘째, 중앙정보부, 안기부 등의 강권 기구의 역할이 사라짐(수평적 책임성의 기능 부재). 셋째, 단기적 정권 교체는 관료 개개인의 장기적 전망을 약화. 넷째, 정권 교체에 따른 연줄 관계의 변화로 관료적 위계 구조의 혼란. 결국 이러한 원인들은 관료 체제의 민주적 운용 패러다임 개발하지 못한 탓이다. 민주주의 하에서 관료의 부패가 권위주의 시기보다 심해진 것은 아니더라도, 또한 강조해야 할 것은 시장과 민간 부문의 부패, 상층 엘리트의 부패이다. <br />
<br />
3. 민주화와 대통령제의 문제 <br />
무력한 정부와 강력한 대통령: 한국은 건국 이후 1987년 민주화에 이르기까지 무려 아홉 차례나 헌법을 개정했는데, 이는 정치체제의 불안정성과 낮은 수준의 민주주의 제도화를 보여주며, 한국 헌정사의 불안정은 거의 대통령에 관련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이슈의 중요성에 비해 광범위한 토론과 논쟁이 없었다는 것이다. <br />
<br />
대통령제는 권위주의와 친화적인가?: 민주주의 하의 대통령은 정당을 매개로, 국민들 사이에서 민주적 리더십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대통령은 당선되는 순간부터 물리적 환경의 변화에 압도된다(경호, 공관과 집무실, 비서실). 이는 대통령을 둘러싼 물리적 환경이 권위주의와 매우 친화적임을 보여준다. <br />
<br />
제왕적 대통령의 문제: 제왕적 대통령을 제기하는 담론은 그러나 그 속에 내장된 보수적 파당성으로 인해 진실을 왜곡하는 측면도 있다. 제왕적 대통령을 비판하는 이들은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CEO 대통령이라는 새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CEO 대통령 논의에는 근본적 문제, 즉 이것이 민주주의의 근본 원리(경제로부터 정치의 분리)와 상충되기 때문이다. 기업 구조는 기본적으로 권위주의적이며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국가는 한 사회의 통합 및 시민권의 원리, 공공복리 실현 등을 위한 공공조직이다. CEO 대통령 논의는 정치를 경제적 힘에 종속시키려 하는 신자유주의 내지 신보수주의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시장지향적이고 정치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다. 더구나 애초에 제왕적 대통령 논의가 기원한 미국의 경우 이는 본래 대외 정책 이슈에 관련된 것이었으며 자유주의파의 파당적 비판을 표현한 것이었다. 반면 한국의 경우 이 논의는 권위주의 세력들이 김영삼의 ‘역사 바로 세우기’ 비판의 일환으로 제기한 것이었으며, 헤게모니를 갖지 못한 김대중 정부에 대한 거대 언론과 보수 야당의 동맹에 의해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들은 민주주의가 발전하지 않아서 만들어진 문제의 원인을 특정 대통령, 정부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을 뿐이다. <br />
<br />
대통령의 민주적 리더십: 대통령의 권위주의는 모든 문제의 근원이 아니라 한국 정치의 여러 문제들의 결과물이다. 대통령을 권위주의적으로 만드는 것은 투표자들에게 책임을 지지 않고 구속되지 않는 상황의 결과인 것이며 또한 정당의 허약함 때문이다. 핵심은 오히려 정당과 정당 체제를 민주적으로 발전시키는 것, 즉 정당을 사회의 갈등에 뿌리내리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본 것처럼 냉전 반공주의는 한국의 정당 체제를 이념적으로 극히 협애한 틀에 가두어 놓았다. 정치는 갈등과 이 때문에 분열된 사회를 전제로 경쟁과 타협을 통해 갈등을 민주적으로 표출하고 정당을 매개로 이를 민주적으로 해소하는 과정인데(립셋-갈등과 컨센서스가 민주주의의 필수 요소), 한국에서 갈등은 대표될 수 있는 여지가 극히 좁다. 갈등의 부재는 사회의 특정 집단이 공공의 집합적 결정 과정에서 배제되었음을 보여주며, 따라서 냉전 반공주의와 접맥된 낡은 정당 체제를 해체하고 새로운 갈등 구조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br />
<br />
4. 민주화와 중앙집권화의 문제 <br />
초집중화 = 지리적 집중+엘리트의 동심원적 중첩: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중요 동인 중 하나는 중앙 집중화로, 이를 가져온 역사적 계기는 권위주의적 산업화이다. 중앙 집중화의 구조는 대규모의 정치와 경제를 지향하는 것으로, 정치에 있어서는 국가 중심적, 경제와 시장에 있어서는 재벌 중심적 구조를 강화하는 성격을 지닌다. 한국의 지역당 구조는 지역에 기반을 갖는 다원적 정치 세력 간의 경쟁이 아니라 중앙 집중화의 구조에서 엘리트 간 경쟁의 산물이다. 이는 정치 경쟁, 교육의 경쟁 등을 생사 투쟁처럼 격화시키는 이유가 된다. 그런데 민주화 이후 정부들은 집중화를 완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화시켰다. 지금까지 중앙 집중화에 대한 대책은 대체로 수도권 개발 억제, 지방 분산 등이 그 대안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사회 각 분야의 엘리트 집중도가 여전히 강하고 그 충원 구조가 동심원적 구조를 갖는 상황에서 이런 지방 분산이 초집중화를 얼마나 완화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지리적 분산 역시 시도되어야 하지만, 그보다 엘리트의 동심원적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 사회 주요 영역의 독자성을 강화하고 다원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은 정치 영역에 있어서는 정당들이 넓은 이념적 공간에서 경쟁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못한 사회집단들, 특히 노동자계급이 정치의 중요 행위자로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다. 정치의 다원주의는 교육 개혁, 재벌 개혁 등 여타 영역으로 다원주의를 확산하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br />
<br />
<br />
6장 민주화 이후의 시장 <br />
<br />
1. 민주화와 시장의 개혁 <br />
권위주의 산업화는 어떤 시장을 만들었나: 한국의 시장은 서구의 시장과 상이한 경로로, 즉 민간 부문에서 생성, 발전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권위주의 산업화 과정에 의해 만들어졌다. 권위주의 산업화에서 형성된 시장은 강한 국가 주도성, 재벌 경제체제, 노동의 배제라는 세 가지 특성을 갖는다. 곧 경제 시장에서도 독점과 배제가 지배적 원리가 됨으로써 투명성과 공정 경쟁과 같은 시장경제의 본래적 특징이 발휘될 수 없었던 것이다. 시장에 대한 강한 개입주의 국가의 역할은 한국 사회에 관료적 권위주의를 뿌리내리게 했다. 또한 권위주의적 노동 배제는 재벌 편향적 성장 제일주의의 다른 한 축이었다. 노동자의 참여가 배제된 정책 결정의 조건에서, 정치는 결국 사회 상층 엘리트 간의 게임이 될 수밖에 없었다. <br />
<br />
민주화의 경제적 의미: 한국의 민주화가 갖는 사회경제적 내용은 기존의 권위주의 시장구조를 개혁하는 것이다. 권위주의 정권과 재벌 간의 연합이 주도하는 시장 구조는 재벌, 중소기업 간, 지역 간, 부문 간, 계층 간 불균등성장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또한 노동의 배제는 갈등을 만들어 내고, 이를 통제하기 위해 권위주의적 국가 기제를 필요로 하는 악순환도 일어난다. 이런 구조를 해체하고 정치와 경제 간의 관계를 투명하게 만드는 개혁없이는 어떤 민주개혁도 실효성을 갖지 못한다. <br />
<br />
개혁의 두 계기: 민주화와 세계화: 권위주의 하의 시장구조가 개혁의 의제로 제기된 계기는 두 가지, 민주화와 세계화였다. 먼저 민주화가 기존의 시장구조에 변화를 요구하는 힘으로 작용한 것은 87년 6월 민주항쟁을 기점으로 한다. 현실 정치 세력이 얼마나 민주적인가의 평가 기준으로 재벌 문제와 노동문제에 대한 태도가 중요하게 고려된 것이다(노태우 정부의 업종전문화 정책, 김영삼 정부의 금융실명제). 다음으로 세계화는 80년대 초반부터 수용되어 IMF 당시 급진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때의 세계화의 실제 내용은 신자유주의 또는 워싱턴 콘센서스라 불리는 특정 정책 내용의 수용이었다. 가령 IMF 이전까지 세계화는 대체로 친재벌적, 반노동적 정책 함의를 가진 것이었다면, IMF 이후 세계화는 반노동적인 동시에 반재벌적인 효과를 갖게 되었다. <br />
<br />
2. 민주화는 권위주의 시장구조를 변화시켰는가? <br />
재벌 개혁에 취약한 민주화: 주목할 것은 민주화 이후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권위주의 시기보다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새 정부들은 재벌 개혁을 약속했으나, 이는 집권 초기를 지나면서 구두선에 그쳤다(심지어 노무현 정부에서는 삼성과의 유착이 더 심화). 과거 권위주의 국가에 의해 통제되던 언론과 대학은 이제 재벌의 영향력에 의해 압도되고 있다. <br />
<br />
노동 없는 민주주의: 87년 6월 이전 노동운동은 직접적인 억압 하에 있었다. 그러나 노동운동은 7~8월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민주화에 핵심적으로 기여했다. 당시 노조의 입지는 강했는데, 이 시기 노동운동은 고성장, 소득분배 구조의 개선, 저실업률, 노동력 부족과 구인난 등 현대사에서 가장 노동에 유리한 조건을 맞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김영삼 정부 시기 초기에는 노동정책에 대한 민주적 개선의 시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국가의 중립적 태도와 노조 활동의 자율성 보장은 93년 현총련 연대 파업을 계기로 과거로 후퇴했으며, 이후 개혁적 노동 정책은 반전되었다. 동시에 주류 언론과 경제계의 반격(무노동무임금, 경영권 수호)도 강화되었다. 96년의 총파업은 김영삼 정부의 노동 정책이 갖는 배제적 성격을 보여준다. 이어서 금융 위기와 더불어 강제된 IMF 개혁 패키지의 핵심은 노동시장 유연화였다. 고용불안정이 일반화되고, 소득 불평등도 심화되었다. 이러한 조건에서 노동정책은 복지정책과 연계되는 사회정책적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김대중 정부 시기에 새로운 갈등 유형이 나타나게 된다. 즉 노사관계 차원보다도 노사관계의 틀에 영향을 미치는 노동정책을 둘러싼 갈등이 등장했다. 김대중 정부 역시 정부 정책은 시장경제 우선의 방향으로 기울었으며, 복지, 노동 등 사회정책은 경제정책의 하위 정책으로 간주되었다. 노사정위원회 역시 서구의 코포라티즘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이마저도 민노총의 탈퇴로 지속되지 못했다. 요컨대 전체적으로 보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도 노동은 여전히 배제되었던 사회집단이었다. 과거 고도성장기에는 권위주의 정부에서라 할지라도 완전고용과 소득 증가를 내용으로 노동자를 통합하는 거시경제적 틀이 존재했다면, 금융 위기와 더불어 이 틀은 사라지고(저성장, 고실업) 노동시장 유연화는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결국 주류 노동운동세력은 정부와 대립하게 되었고, 이에 정부의 대응은 과거 권위주의 노동정책으로 후퇴하는 것이 되었다(정치의 붕괴와 항의의 일상화). 결국 민주화 이후에도 노동정책에 있어서는 담론 수준을 넘어서는 정책 전환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br />
<br />
<br />
3. IMF 세계화와 경제개혁 <br />
새로운 사회 균열로서의 세계화: 담론의 측면에서만 보면 김영삼 정부가 세계화 추진의 정점을 이루는 듯 보이지만, IMF 이전까지 한국 사회에서 세계화의 충격은 정치적 수준에서 새로운 균열을 만들지 못했다. 대체로 그 전까지 세계화는 정부와 기득 세력이 민주화와 개혁 요구를 회피하는 논리로 동원된 것이다. 그러나 IMF 이후 세계화는 달랐다. 정부는 세계화의 규범에 맞는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추구했고, 재벌은 자신들이 지배하는 시장의 자율성은 허용하길 바라면서도, 기존의 특혜를 없앨 수 있는 세계화 규범의 적용에 반대했다. 노동의 경우는 노동시장 유연화를 요구하는 세계화 규범에 반대하면서 동시에 노동시장 보호 정책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은 분명한 정치 균열 라인으로 만들어지지 않았고, 더욱 혼란스러운 양태로 나타났다. 금융 위기 이후 균열의 축과 동맹의 양태가 더욱 분열적이고 혼란스러워진 것은 사회적 갈등이 정치적으로 동원되고 대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갈등의 축과 동맹의 축을 명료하게 하며, 경쟁적 대안을 발전시켜야 할 정당의 역할이 존재하지 않았다. <br />
<br />
왜 한국의 민주화는 실질적 개혁에 무력했나: 한국의 민주화는 강권적 권위주의 통치 종식에 있어서는 효과적이었으나 실질적 내용, 사회경제적 측면의 개혁에 있어서는 무력했다.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계급 불평등은 심화되었고, 재벌은 강화되었으며 노동 배제는 지속되었다. 김영삼 정부 시기까지는 실질적 개혁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수 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 시기에는 재벌 개혁이 실질적인 개혁 의제가 될 수 있었다. 이들 집권 세력은 권위주의 시기 고착된 지배 엘리트 구조에서 소외된 주변부 엘리트 집단이었으며, 당시 세계화라는 외적 충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집권 초 김대중 정부는 국내 기득 세력에 대해 이전 어느 정부도 누려보지 못한 자율성을 가졌다. 당시 개혁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데, 하나는 구조조정으로서 금융 위기에 대처할 생존 전략으로서 기존의 거시 경제 운용 모델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수동적 의미의 개혁이며, 다른 하나는 구조개혁으로서 민주주의의 틀에 맞게 경제 발전의 대안적 모델과 사회정책적 대안을 위한 개혁이다. IMF 하에서라도 민주주의에 걸맞은 시장경제체제를 창출하거나 민주주의를 통해 시장경제의 부정적 효과를 보완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은 수사로 그쳐버렸다. IMF 개혁 패키지와 같은 수동적 개혁에 그친다면 김대중 정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구조조정을 넘어서 한국 사회 발전을 위한 장기적이고 자율적인 구조개혁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지역 정당 체제나 보수 편향적 정치 구조를 개혁하고자 하지 않았으며, 자민련과 같은 세력과 연립 정권을 유지할 뿐이었다. <br />
<br />
개혁 실패가 남긴 것: 민주화와 세계화라는 내외적 충격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시장구조는 큰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국가와 재벌의 힘 관계에서 국가의 일방적 우위는 사라지고 재벌은 국가에 의해 쉽게 통제되기 어렵게 되었으며, 노동 배제의 경제체제도 그대로였다. 이는 신자유주의라 할 수 있는 정치에 대한 특정 관점이 사회에 확산되도록 만들었다.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적, 부정적 태도를 확산시키며, 내용적으로는 재벌 체제를 안정화하는 효과를 갖는다. 정치를 폄하하고 조롱하며 정부 기능을 부정할 경우, 민주주의의 의미를 경제에 종속시킬 경우 한국 민주주의는 무력하게 되고 만다. 보수 언론을 통해 유포되는 노동운동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권위주의적이며, 민주적 노사관계를 위한 인식상의 변화도 지체되었다. 또한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노동운동 내부의 연대는 약화되는 반면, 노동운동의 리더십은 아직 관념적인 급진주의에 의해 자신의 잠재력을 소진하고 있다. 만약 민주주의의 정치적 틀에 조응하는 경제에 대한 국가의 역할이 없다면 시장의 부정적 역할을 제어할 힘은 없다. 시장은 하위 체계 중 하나일 뿐이며, 이는 전 사회의 운영 원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계급 구조화의 심화, 소득 불평등 등 한국 사회의 현실은 유능한 민주주의 국가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br />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715/47/cover150/896437116x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437116X</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책의 감옥</category><title>고별 강연(박홍규)</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4249273</link><pubDate>Sun, 07 Nov 2010 21:1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4249273</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22107&TPaperId=4249273"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94/2/coveroff/8937422107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160;
박홍규 고별 강연&#160;&#160;
<br />
고전의 학문 정신은 데이터에서 출발한다. 반면 신화에는 데이터가 없다. 소크라테스가 what it is? 라고 물을 때 it이 데이터이다. 철학은 모든 이론에 앞서서 데이터에서 출발하여, 데이터를 학문적으로 정리해보고 그것을 다시 반성해보는 작업이다. 철학적 데이터는 개별 과학적 데이터와 달리 모든 데이터의 총체이다. 대화편을 보면 플라톤에게 사람은 항상 어떤 나이이고, 이름이 누구며, 어디에서 무엇 하러 왔으며 등등 고유 명사의 입장에서 데이터가 주어지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사람은 그냥 사람, 아리스토텔레스의 체계에 의해 추상화된 데이터로 나타난다. 이처럼 고유 명사의 극한에서 본다는 것이 플라톤의 데이터의 특색이다. 가령 플라톤에서 형상이 무엇인지 말하려면, 대화편에서 형상이라는 말을 전부 찾아내고 이를 전부 분류해서 각 대목의 의미를 밝혀야하지 형상 일반이란 의미가 없다. 구체적 문맥 속에서 그 의미를 밝혀야 하며, 그렇지 않고 그저 추상적인 형상은 플라톤에게는 없다. 그런데 플라톤에서 나타나는 전형적 특징 중 하나는 잰다는 점이다. 왜 재느냐? 데이터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연장성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직접적인 것은 연장성 속에 있는 질quality이다. 만약 데이터를 재지 않는다면 모든 사물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없으며 주관적임을 면할 수 없게 된다. 사물을 정량적으로 재야하며, 잰다는 것은 또한 그것이 되풀이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재어진 것과 재어진 것 사이에는 일정한 관계가 있고 그것이 되풀이될 때 이것을 법칙이라 부를 수 있다. 희랍 당시에 이를 탐구하던 학문이 기하학(geometry 땅을 잰다는 뜻)이다. 반면 질의 경우 잴 때 문제되는 것은 정도degree이다. <br />
데이터는 시간과 공간에서 주어진다. 시간은 운동이 있고 이때 문제되는 것은 질이다. 이른바 제1성질은 공간이 가지고 있는 질이다. 반면 공간은 항상 정지해 있는 것, 구별되는 것, 이것은 여기에 저것은 저기에 있다고 구별될 수 있는 것을 일컫는다. 질이라는 것은 각각 서로 다른 것이며 이것들이 같을 경우 양이 된다. 그런데 질이 각각 자기 동일성을 갖고 있기만 할 경우 운동은 성립하지 않는다. 운동은 질이 연결되고 묶여야 성립한다. 시간, 운동이라는 것은 질의 연속 과정이며 서로 연결되는 과정이다. 플라톤에서 데이터는 시공간 속에 있는데 만약 운동이 빠져버린다면, 질들은 모조리 이전의 연결에서 떠나 흩어지게 된다. 질들이 흩어져서 그 자체 전부 有로 되는데, 이것이 바로 분석analysis(ana위로, 되돌려서, lyô 풀어놓는다)이다. 이후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분석의 기본 의미는 풀어서 돌려준다 또는 자기 본성대로 놓는다는 뜻이다. 분석되기 이전의 운동에 있어서는 우리 인식 대상인 질이 전부 묶여져서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즉 시간과 공간의 관계에서 운동을 빼버릴 경우, 그 속의 질은 전부 풀어져서 자신의 동일성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 있는 사물은 운동과 결합되어 있고 공간 또한 마찬가지로 유동flux 상태에 있다. 이러한 유동에서는 운동과 공간 모두 어디에서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는지 알 수 없다. 유동 속에서 운동과 공간이 뭉쳐져서 서로 분간이 안 되는 상태에서, 공간과 시간은 점점 분리되어 나가고 형상 자체에 이르면 운동은 완전히 빠지게 된다. 즉 운동이 공간 바깥으로 나가버린다. 운동이 완전히 나가서 운동과 공간이 딱 구별되어 나올 경우, 비로소 형상eidos이 나온다. 형상은 결코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유클리드 기하학도 모든 운동을 빼는 데서 성립한다. 운동이나 시간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인식이 안 되는 것이며 학문에서 문제는 사물을 정의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의는 형상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다. 또한 문제는 모든 데이터가 동일 공간 속에 들어갈 때 그 일반적 성격을 무엇이라고 정의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플라톤에게 데이터는 무가 아니라는 것. 없다는 것은 데이터가 될 수 없고, 데이터는 있는데 이것이 바로 존재ousia라는 것으로 정리된다. 그런데 무와 존재 사이에는 단절이 있고 양자는 모순 관계에 있다(존재와 무는 서로 접촉contact하며 이 경계선에서 어느 쪽으로 떨어지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contingency이라는 것). 학문의 원칙은 데이터를 취급할 때 모순을 회피하라는 것, 모순율이다. 즉 데이터 속에 모순이 있으나 그 모순을 회피해야 한다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항상 존재론은 원인론aitiology이며, 모든 데이터들은 차이difference를 가지고 있는데 이 차이의 원인은 무엇인지 물을 수 있다. 이는 모순이 아닌 것, 즉 존재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이다. 학문은 모순율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헤겔처럼 존재와 무가 합쳐진 것이라는 식의 얘기는 하지 않고 존재도 무도 아닌 제3의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때 다름의 원인은 존재도 무도 아닌 무한정자apeiron이다. 무한정자는 모순율에서처럼 단절이 없으므로 연속이 있고 무규정적indefinite인 것이다. 반대로 존재는 한정적definite이며 비연속성을 가진다. 동일성은 되풀이되는 것인 반면 차이는 모순하고 달리 차이의 정도를 극대화시키면 반대적opposite인 것이 되고 반대인 것은 또한 모순으로 간다. 그러나 차이는 반대가 아니며, 다름difference은 공존과 비공존의 양면을 지닌다. 이러한 다름이 비공존에서 나타날 때는 시간이라 하고 공존에서 나타날 때는 공간이라고 한다. 요컨대 어떤 것이 무한정자에서 나타나는 것은 항상 시간과 공간이 함께 나오며, 차이를 통해 나올 때는 항상 시간과 공간이 동시에 다 나온다. <br />
플라톤은 이러한 형식적 존재론을 가지고 다른 사물들의 질서를 찾으려고 시도한다. 동일성과 차이 사이에는 정도 차가 있는데 이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우주의 질서를 정리하는 것(&lt;티마이오스&gt;)이다. 문제는 시간과 공간은 반대되는 것이어서 동시에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인데 이것이 플라톤 철학의 난점이다. 사물이 성립하려면 반드시 동시에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사물의 동일성이 나와야 하지만 두 개의 동일성이 반대되기 때문에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경험적인 세계로 내려가서 양자가 관계를 맺으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알 수 없다. 이런 까닭에 플라톤은 자신의 우주론을 우화fable, 이야기mythos라고 부른다. 반면 형상의 일반적 척도만 가지고 설명하자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 질료form-matter theory 이론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운동은 움직이지 않는 것에 종속되며, 이 구도가 목적론의 전제이다. 이들의 존재론은 우주의 각 사물의 기본적인 자리매김classification을 가능하게 하고 우주 내에서 각 사물의 위치를 정의definition의 차원에서 정하려는 것이다. 정의의 차원에서 각 개별 과학이 완성될 때 존재론은 완성되며, 그래서 철학은 백과사전이 된다. 이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든 플라톤이든 철학은 all-wissen을 궁극 목적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br />
이를 계승하는 것이 플로티누스 학파 및 스콜라 철학이다. 서유럽의 침입 이전의 이들은 미개인으로서 스스로 데이터를 다루지 못했다. 중세 초에 철학은 학교서 가르치듯 희랍이나 로마의 학문을 가르쳤다. 스콜라 철학은 데이터를 직접 다루지 않으며 주입식(폐쇄적, 세뇌식) 성격을 지녔다. 예컨대 스콜라 철학자는 말 이빨이 몇 개냐는 질문에 아리스토텔레스 책을 보라고 답한다. 중세기 문화가 발달하고 데이터 취급 능력 및 기구들이 발달하면 스콜라 철학의 결론이 의문시된다(ex 천체의 운동). 결정적인 예가 갈릴레오의 피사의 사탑에서의 실험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물리학은 단적으로 질의 물리학이다. 존재가 운동하는 한에 있어서의 운동을 다루는 학이 바로 물리학이다. 갈릴레오의 실험과 더불어 스콜라 철학은 붕괴하며, 이런 의미에서 근대 학문의 개조자는 갈릴레오이다. 반면 데카르트의 경우 유동 이론에서 출발하여 모든 것을 회의한다. 플라톤도 유동 이론에서 출발하여 경험을 내부에서 정리해서 다시 검증해보자는 것이며, 이 점에서 데카르트는 플라톤의 후예이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의심스러운 것이 인식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문제를 회피하고, 결국 데이터로부터 도피한다. 본래 science는 라틴어의 scire, scientia에서 나온 말로 주관적인 견해나 생각, 자의적인 사고는 다 빼버리라는 것이며, 희랍어의 epistêmê 역시 의견doxa과 항상 대립하는 것이다. 데카르트와 반대되는 사상이 오귀스트 콩트의 사상으로서, 콩트 역시 중세기 신학과 형이상학을 비판한다. 그의 주장은 현상이나 사실fait 등 데이터로 주어진 것, 실증적positive인 것(&lt;-&gt; 허구적인 것)에서 출발하자는 것이다. 콩트는 갈릴레오 물리학 같은 엄격한 학을 모든 학문에 적용하자고 한다. 가령 콩트는 사회학을 사회적 물리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콩트에게서 학문은 수학, 무기물, 유기물, 사회학 순으로 전개되며 이를 모두 종합하는 것이 철학이 된다. 이 점에서 불란서 철학에서 근대 학문의 기초를 준 것은 오귀스트 콩트가 최초이다. 콩트가 낳은 실증주의는 후에 물리학, 화학, 레비-브륄 등의 인류학, 뒤르켐의 사회학, 병리학 등으로 발전된다. 우리 내면 세계는 실증적으로 증명해야지 데카르트의 코기토 등으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불란서 심리학에서는 병리학, 최면술, 실어증 연구 등이 발달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콩트가 환원론자는 아닌데, 그는 모든 학문이 각 데이터에 따라 성질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콩트의 실증주의와 관련하여 우연과 필연에 대한 결정론에 대한 논쟁이 등장하고 많은 메타과학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는 사유denken를 통한 현상학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불란서 철학자 대부분은 수학자이자 실증과학자였다. <br />
베르그송은 결정론에 관한 논쟁 이전에 생명 현상과 무생물 현상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생물은 자신의 기능을 그 어머니인 생물에서 받는데 이것이 유전(파스퇴르 실험)이다. 이때 유전되는 것은 형질이 아니라 기능이다. 유전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근대 물리학처럼 기계적mechanical인 원인은 항상 결과의 밖에 있으므로 유전을 설명하지 못한다. 기계론은 생명체가 갖는 물질적 부분에 있어서만 설명을 하지 생명 자체의 유전은 설명 못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질료 이론 역시 형상이 밖에서 질료에 주어지는 구조이기 때문에 유전을 설명하지 못한다. 운동에 있어 운동의 존재는 일정한 성격을 갖는데, 운동이 운동 아닌 것으로 될 수 있는 측면이 바로 수동성passivity으로서 이것의 극한치가 정지이다. 운동이 일정하다는 것은 운동의 자기 동일성이고, 운동이 운동 이외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 운동은 항상 지속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운동이 자기 밖에서 운동의 원인을 얻으면 그것은 양화되는 것이며 언제나 수동성을 요구한다.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는 운동은 그 운동을 타자로부터 받아들일 수 없기에 자기 운동자이다. 자발성spontanéité은 능동성의 근원이다. 베르그송은 물질이 엔트로피라고 일차적으로 정의한다. 베르그송은 생물과 무생물을 형이상학의 입장에서 정의하려고 하는 까닭에 플라톤으로 간다. 플라톤도 운동을 중심으로 우주를 분류한 바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질이 엔트로피라도 어느 기간이 걸려서 변하는 것이지 그냥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질도 어떤 의미에서는 지속하며, 따라서 물질과 생명체를 동일 차원에 놓고 다룰 수 있다는 이론이 나올 수 있다. 물질의 세계는 모든 것이 유동이고 모든 것은 변칙, 질quality 뿐이다. 물질과 달리 생명체는 反엔트로피이며 자발성과 자기 운동을 갖는다. 생명체의 자발성, 기능은 반엔트로피이며, 생명체는 언제든 변칙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생존existence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여러 기능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현대 분자생물학에 의하면 분자가 가지고 있는 유전자는 자신의 내부에 정보를 갖고 자신의 외부에 대해 그 정보를 조절해 가면서 자기 내부의 여러 기능을 분화시켜나간다고 한다. 이와 같은 분자생물학의 생각은 발생론적genetisch 측면에서 베르그송 이론과 유사하다. 베르그송은 물질이 분화되는 측면에서 시작하여 성인이 되는 과정으로, 다시 종으로 진행한다. 다음으로 능동성activity의 문제 발생한다. 운동은 A에서 B로 가는 것, 즉 다른 것으로 변하는 것인데 어떻게 운동의 자기 동일성이 유지되는가? 즉 운동 그 자체의 과거 상태의 지금에 있어서의 보존이 문제가 된다. 이 보존이 바로 기억이며, 불란서 심리학자들은 유전도 넓은 의미에서 일종의 기억이라고 본다. &lt;물질과 기억&gt;이라는 책을 베르그송이 쓴 까닭이 바로 이 기억 때문인데, 생물과 물질의 차이는 바로 조절 능력과 기억에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하나의 모범형ideal Typus으로서 인간(어린아이나 장애인이 아니라 정상적인 성인)이 나오지만 베르그송에서는 종에서 성인이 되어 다시 종으로 가는 모든 순환을 보지 않으면 인간이 나오지 않고, 뿐만 아니라 그것이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연속되어 나오는가도 보아야 한다. 인간은 생명체의 하나의 생태학적 어떤 외형aspect에 불과하다. 이렇게 보면 철학도 인간 생활의 하나의 생태학적 형태일 뿐이다. 왜 새가 되고 사람이 되는가? 그 상황에서 삶을 유지하려고 조절한 결과이다. 사람 형태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지 가령 바닷속에 살면 물고기 같은 형태를 지녀야 하는 것이다. 베르그송과 더불어 철학은 본질essentia의 입장에서 실존existentia의 입장으로 간다. 실제 생물학을 볼 경우 식물만이 자기 영양 섭취 능력을 지니지 다른 모든 동물은 가지고 있지 않다. 전부 식물의 기생충이자 일종의 불구자인데 이것을 메우기 위해 여러 가지 기구가 나온다. 인간의 대상화하는 능력도 이것의 일종이다. 인간은 살기 위해 공부하고, 학교도 아니고 복잡한 도구를 만들어내는 등 아주 복잡한 존재이다. 인간이 대상화시키는 능력이나 신경 계통이 나오는 것도 식물이 갖고 있는 능력을 보충하기 위해 나온 것이다. 여기서 과거의 homo sapiens지성인의 세계가 완전히 뒤집어지며, 베르그송의 입장에서 종에서 성인이 되어 종으로 가는 전 과정을 볼 때 그 밑에 공통치를 빼면 조절 능력, 즉 무의식이 나온다. 즉 무의식이 중심이며 대상화된 인식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실증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고대, 근대의 인식론과 달리 베르그송의 인식론은 단순한 사변이 아니라 동물생태학, 식물학, 분자생물학 등 데이터를 모집해서 공통치를 논해야 나오는 것이다. 동물은 대상화하는 능력이 없어도 자신의 삶을 유지할 수 있다. 가령 병아리는 알에서 막 깨어나도 먹을 것, 못 먹을 것을 본능적으로 다 알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으면 안 되는지 배워야 한다. 이러한 까닭에 인간 중심의 경험론이나 합리론 등 인식론은 동물의 영역까지 보자면 재고해야 한다. 또한 베르그송에서 실증과학의 문제는 가령 이런 것이다. 앞서 본 것처럼 과학은 재는 데부터 시작한다. 플라톤은 질을 재는데서, 공간에 있는 것을 재는데서 시작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대개념, 중개념, 소개념, 보편자, 특수자 등의 범주를 통해 질을 재어 양화시킨다. 그런데 베르그송은 질은 서로 다른 것인데 이를 어떻게 재느냐고 질문한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운동, 과정process은 잴 수 없는 것이고 기존의 실증과학은 운동이 지나간 그림자, 스쳐간 공간을 쟀을 뿐이다. 이처럼 실제 운동이 스쳐간 공간을 측정함으로써 모든 이론이 생기는 것이고 모든 학문은 실제 있는 변치로서의 세계를 단지 스쳐갈 따름이다. 이와 관련하여 또 중요한 것은 우리의 내면적인 세계를 잴 수 없다는 것이다. 물질과 달리 생명 현상의 기본은 자발성이고, 자발성은 자기 조절하는 능력으로서 외부에서 어떤 척도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척도를 받아들이면 인과 법칙에 빠지게 되지만 생명의 자율적인 측면은 잴 수 없는 것이다. 심리 현상은 어느 한계 이상으로 잴 수 없으며 이를 재려고 하면 물질 현상처럼 수학적 공간에 넣어야 하는데 이렇게 될 경우 실제 심리현상은 죽어버리고 만다. 베르그송에서 세계는 모두 변칙뿐이며 질로 가득 찬 상황situation이다. <br />
플라톤에서 그랬던 것처럼 모순율, 무가 아니라는 것은 모든 학문과 모든 데이터의 기본이다. 실재하는 사물은 언제나 일정한definite 것이다. 무한정적인 것과 자기동일성을 가진 것 중 존재에 가까운 것은 자기 동일성을 가진 것이다. 이 존재의 측면에서 보면 모든 것은 일정한 것이다. 일정한 것의 극한치는 고유 명사이며 이것이 양화될 경우 보통 명사가 된다. 그러나 질, 운동, 되풀이되지 않는 내용은 잴 수 없는데 이럴 경우 모든 것이 변칙이 되고 만다. 법칙이 성립하려면 운동은 양화해야만 하고, 확정되어definite 있는 질을 빼버려야 하는데 질은 베르그송이 보였듯이 양화되지 않는다. 우주는 질로 차 있으며 일정한 운동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법칙은 한정적 세계에서 무한정적 세계, 양적인 세계로 자꾸 내려가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처럼 특정한 존재가 아닌 그냥 사람 일반을 말하는 것은 그가 질을 양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베르그송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질은 양화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으로, 형상의 세계는 다 고유한 것이며 고유명사로서 되풀이되지 않는다고 본다. 어떤 형상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하는 것은 선험적a priori으로 주어질 수는 없다. 형상, 다가 성립하려면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사건으로서, 법칙도 사건으로서 성립한다. 만약 2+3=5가 성립하는 공간을 수학적 공간이라 하면 왜 수학적 공간이 성립하는지가 우선 문제이며, 그 공간에서 2가 성립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추상적 공간에 대해서는 순전한 우연이다. 우리에게는 모순율이 최고인데 이는 그것이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2가 성립하거나 하지 않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우연(2가 그 자체 무가 아닌 것으로서 무에 대비되어 단적으로 존재, 즉 모순율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에 2라는 그 존재의 까닭을 설명할 수는 없음)이다. 또한 2는 정적static이며 보탠다는 것은 동작, 운동인데 2를 보탠다는 것은 2에 대해 밖에서 주어진 운동이다. 2에 보탠다는 운동이 주어지냐 아니냐는 2에 대해 또한 순전히 우연적이다. 추상적 법칙이란 추상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따라서 어떤 영원한 법칙이 미리 선험적으로 있다는 것은 얘기할 수 없다. 이런 까닭에 학문은 데이터에서 출발하지 어떤 이론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플라톤은 자신의 대화편을 전부 구체적인 고유 명사로 썼는데, 이 점에서 베르그송은 플라톤의 한 특수한 계승자로 간주될 수 있다. 구체적 데이터는 어떤 추상적 사고도 안 들어간 데이터지만 또한 존재론적으로 실재reality이다. 항상 확정된definite 것의 극한치까지 가야하며 확정성의 극한치에서 무한정성의 극한치까지 모두 보자는 것이 플라톤의 철학이다. <br />
이제까지의 이야기는 서양철학의 주류가 무엇이냐 하는 것에 대한 반성이다. 플라톤과 유클리드 기하학 같은 정량적인 학은 이탈리아에서 오며, 형이상학도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에서 온다(파르메니데스). 그리고 서유럽에서 불란서는 로마 문화의 맏딸로서, 희랍 철학 이후 서양 철학의 정수는 불란서로 간다. 오귀스트 콩트가 실증 과학의 배열, 분류, 분할 등을 시작하고 베르그송은 이에 대해 또 질문하고 대답한다. 결국 서양의 실증 과학에 대응할 수 있는 이론은 베르그송에서 끝난다. 요컨대 플라톤이 말한 것처럼 사물을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이나 공간 둘 뿐인데, 플라톤은 둘 다를 놓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공간에서 형상 이론을 놓았으며 베르그송은 이를 시간에서 정리했다. 반복한 바와 같이 서양 철학의 주류는 데이터에서, 대상화된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가 예컨대 헤겔 같은 경우이다. 헤겔은 대상화된 세계에서의 모순율을 부정하기 때문에, 모순의 변증법을 다루는 &lt;논리학&gt; 같은 저서는 비합리주의적이다. 그러나 헤겔의 경우 그 주어진 상황에서 대상화된 세계를 조절하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성립하는 자기의 동일성의 조절 능력이 주제라고 볼 수도 있다. 결국 단순히 어떤 철학이 좋냐 아니냐 하는 식의 논의는 무의미한 것이며, 모든 철학을 그 모든 측면에서 다 봐야 한다. <br />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94/2/cover150/8937422107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22107</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책의 감옥</category><title>벤하비브의 민주적 반추</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4197963</link><pubDate>Sun, 17 Oct 2010 04:0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4197963</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7756596&TPaperId=4197963"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238/62/coveroff/8977756596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0521831342&TPaperId=4197963"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509/49/coveroff/0521831342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

&#160;
&#160;
&#160;
&#160;
&#160;
&#160;
&#160;
&#160;
"보편적 환대라는 세계시민적 규범에 부응하는 정책이나 법을, 법제도와 담론적인 의지 및 여론 형성을 통해 만들어내야 하는 것은 각 나라 국민들 자신이다. 민주주의 국민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것은 입헌적 자기창조의 진행형적 과정이다. 비록 우리가, 배제되는 자가 배제와 포함의 규칙을 정하는 데 참여하지 못한다는 역설을 결코 없앨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지속적이며 다중적인 민주적 반추 과정을 통해 이런 차이를 유연하고 협상 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br />
우리 가운데 있는 이방인과 외국인, 타자를 어떻게 대우하느냐가 도덕적 양심뿐만 아니라 자유민주주의의 정치적 반성 역량을 테스트하는 시금석이 된다. 주권국가의 정체성을 정의내리는 것 자체가 유동적이고 개방적인 과정이며 공공적 토론을 통한 논란 끝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와 당신, 우리와 그들을 구별하는 경계는, 종종 검증되지 않는 편견의 결과이든지, 고대에 벌어졌던 전쟁, 역사적 부정의, 그리고 단순히 행정 명령에서 비롯한 경우가 많다. 그 모든 근대 민족국가의 시작은 어떤 폭력과 부정의의 씨앗을 안고 있으며, 이 점에서는 칼 슈미트가 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자유민주주의는, 국민을 주권자로 만듦과 동시에 이런 국민주권의 정당성을 기본적 인권 원칙의 고수에서 찾는 면에서 스스로를 한계 짓는 집합체이다. ‘우리, 국민’이라는 말은 바로 그 말 자체 속에 보편적 인권에 대한 존중과 국가적으로 경계 지어진 주권적 요청이라는 입헌적 모순을 담고 있는 내재적으로 위험한 문구다. 그것이 난민인지 아니면 이주 노동자인지, 망명객인지, 탐험가인지를 불문 / 하고 외국인과 이방인의 권리는, 반대로 ‘우리, 국민’의 정체성을 정의하고 타협시키며, 묶고 풀며, 또한 윤곽 짓고 유연하게 하는 바로 그런 문지방과 경계를 규정한다. 우리는 시민권에 대한 단일한 모델 즉, 한 영토에서의 거주와 국민 전체가 다소간 밀착된 하나이기에 단일한 행정이 집행되는 것이 옳다고 보는 그런 단일한 시민권 모델이 종언을 고하는 정치적 진화의 순간에 서 있다. 이런 모델이 종언을 고한다는 것이 그렇다고 지금 우리의 제도를 이끄는 정치적 생각이나 규범적 힘이 낡아버렸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이것은 우리가 이제 새로운 유형의 정치적 시민권에 걸맞는 정치적 행위와 주체의 형식을 구상해야 함을 뜻한다. 나는 이런 새로운 정치적 추세를 ‘민주적 반추’라는 개념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br />
민주적 반추(democratic iteration) 개념을 통해 나는 보편주의적 권리 요구와 원칙들이 법적, 정치적 제도에서 뿐 아니라 시민사회적 친교에서 경합되고, 맥락화되며, 행사되거나 취소되고, 가정되거나 정립되는 그런 공공적인 복합적 토론 과정, 숙고, 의견 교환 과정을 총칭한다. 이런 민주적 반추는 공공적인 법제기구나 사법기구, 집행기구 차원에서 ‘강하게’ 이루어질 수도 있고, 비형식적으로 시민사회적 친교와 언론 등의 ‘약한’ 공공성 속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다." (208~209)&#160;
&nbsp;
"되풀이의 구조는 ... 동일성과 차이를 동시에 함축한다. 가장 '순수한' 되풀이 - 하지만 이는 결코 순수하지 않다 - 는 그 자체 안에 자신을 되풀이로 구성하는 어떤 차이의 간극을 포함한다. 어떤 요소의 되풀이 (불)가능성은 자기 자신의 동일성을 선험적으로 분할한다. 심지어 이 동일성이 다른 요소들에 대한 차이화의 관계를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규정하거나 한정할 수 있다는 점, 따라서 이는 이러한 차이의 표시를 지니고 있다는 점은 고려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렇다"<br />
Derrida, Limited Inc, Galilee, 1990, 105쪽. &lt;법의 힘&gt;의 용어해설(186~7)에서 재인용. <br />
&#160;<br />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509/49/cover150/0521831342_1.jpg</url><link>http://foreign.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0521831342</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책의 감옥</category><title>통치성으로서 관용</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4145385</link><pubDate>Mon, 27 Sep 2010 02:5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4145385</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0691136211&TPaperId=4145385"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513/77/coveroff/0691136211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1950231&TPaperId=4145385"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643/22/coveroff/8961950231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160;
&#160;
&#160;
&#160;
&#160;
&#160;
&#160;
다문화주의라는 말의 유행과 더불어, 관용에 관한 담론은 1980년대 중반 이후 세계적 르네상스라고 부를 만큼 성행한다. 한국 역시 90년대 중반 이후 ‘똘레랑스’ 담론의 유행을 겪은 적이 있다. 이 책에서 웬디 브라운은 오늘날 관용이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의 도구로 작동하고, 야만이라는 수사나 서구의 위기 담론과 결합하는 방식, 폭력을 정당화하고 선동하는 방식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관용은 평등주의나 보편주의와 같은 자유주의 담론의 대리보충으로 작용하며(“추상적 시민권과 결합된 개인주의의 경계 설정 기능이 약화되고, 동질성에 기반한 평등이 정의의 원칙으로 기능하지 못하며, 차이의 탈정치화가 국가의 차원에서든 주체의 차원에서든 완전히 성취되지도 완전히 옹호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관용은 평등의 확장이 아니라 평등의 대리보충으로서 등장한다. 대리보충으로서 관용은 다방면에서 평등을 보충하고 대리하며, 무엇보다도 평등이 그 자신의 이름으로 ‘진정한’ 평등을 이루지 못하는 순간 개입하여, 교묘하게 평등의 불완전성을 보완한다.” 125), 차이를 존재론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즉 차이를 물화시키고 자연화, 본질화시킴으로써 권력과 역사에 대한 담론을 차단시킨다(“관용은, 예컨대 ‘제도화된 인종주의’ 같은 불평등의 문제를 ‘상이한 행위와 믿음’의 문제로 전환시킴으로써, 관용해야 할 차이 자체를 생산해내는 불평등과 지배 문화의 작동을 은폐한다. 관용은 차이를 본질화하고 섹슈얼리티, 인종, 종족의 문제를 물신화함으로써, 섹슈얼리티, 종족, 인종이라고 불리는 차이들을 생산해 온 역사와 권력에 대해서는 침묵한다.”89). 관용은 이렇게 정치의 문제를 개인화하고 탈역사화, 탈정치화하며, 도덕적 상대주의를 부추긴다. 문명 담론으로서 관용 담론은 애초에 서구의 종교 갈등을 조정하기 위한 기능을 가졌지만, 오늘날 관용의 최초의 의미는 희박해졌으며, 비서구 사회에 대한 폭력을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 요컨대, 관용은 오늘날 민족적이고 초민족적인 수준에서 작동하는 통치성의 한 방식이다. 문제는 관용에 대한 거부나 불관용의 지지가 아니라, 통치성의 한 방식으로서 관용 담론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고, 이것이 갖는 탈정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효과들에 대해 싸워나가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책의 요지이다. <br />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읽었던 장은 4장인데, 이 장은 관용 담론이 이전 시대처럼 국가와 교회의 전유물이 아닌 통치성governmentality의 한 형태로 등장함을 다룬다. 오늘날 관용은 법과 무관한 것은 아니지만, 법적인 담론은 아니며 국가 담론인 동시에 대중 담론인 것이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브라운은 푸코의 통치성에 대한 설명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는데, 이 부분은 푸코의 통치성에 대한 유용한 설명으로도 읽힐 수도 있다. 푸코에 따르면 통치는 법의 부과의 문제가 아니라 사물의 배치 문제, 전술들tactics을 적용하고 법 자체도 전술로서 활용하는 문제인 것이다("Governmentality", in The Foucault Effect, 95). 법적이면서 비법적인 담론, 교육적, 종교적, 사회적 담론으로서 관용 담론은 근대적 통치성의 핵심인 “전체화하면서 개별화하는”omnes et singulatim 효과(사목권력 : 왕이나 지도자를 양떼를 이끄는 목자로 비유한 고대 오리엔트 사회의 사목 개념과 서구의 정치 사상의 결합에 주목, ) 역시 갖는다. 푸코가 통치성이라는 개념에 관심을 갖는 것은, 1970년대 내내 그가 주목한 일련의 주제들, 주권 개념(죽음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살게 내버려두는 권력) 비판, 국가 이론 및 정치경제학에 기반한 권력 개념의 해체, 국가와 자본의 탈중심화, 규율 및 조절, 규범 등의 권력 분석, 억압 가설을 비판하고 근대적 주체의 생산을 분석하기, 생체권력(‘삶을 만들고 죽게 내버려 두는 권력’) 분석 등을 통합하는 것이다. 통치와 합리성을 결합시킨 통치성 개념은 제도와 지식에 의한 통치와 합리성 간의 근대적 결합을 묘사하는 것으로서, ‘행위의 지도’conduct of conduct와 관련된다. 통치성은 주체들의 신체, 욕구와 능력, 욕망 등을 관리하며, 광범위한 비가시적 권력들과 다양한 과학적, 종교적, 대중적 담론을 통해 작동한다. <br />
브라운은 푸코의 통치성 개념이 갖는 유용성을 긍정하면서도, 근대 정치 권력에서 국가가 갖는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오류를 범한다고 주장한다(142). 현대 국가는 한편으로 세계화로 인한 주권의 약화와 다른 한편으로 자신이 표방해왔던 보편성의 위기로 인해 곤란에 처해 있는데, 관용 담론은 이러한 위기에 처한 국가를 강화시키고 정당화하며, 국가 폭력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푸코의 말처럼 “국가의 통치화”(“Governmentality", 103)가 문제라고 해도, 국가는 여전히 정치적 정당성의 핵심 기반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142). 그러나 푸코는 제도에 종속된 이들이 제도에 부여하는 정치적 정당성의 문제에 주목하지 않았으며(푸코가 정치적 정당성의 문제를 간과한 것은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한 그의 부정적 입장 때문이다. 진리의 생산은 권력의 전제 조건이며, 우리는 진리에 철저히 종속되어있다는 것이다. “Two Lectures", Power/Knowledge, 93~94. 또한 푸코는 권력을 이론화하면서 의식과 주체성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며, 이 점에서 심리학적 행동주의와 몇몇 수렴하는 부분을 갖는다) 통치성에 대한 설명에서도 정당성의 문제는 누락되어 있다(143). 명시적으로 브라운이 그렇게 한 것은 아니지만 의식, 정당성, 주체성의 문제가 푸코에서 누락되었음을 지적하면서, 그녀는 푸코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부재함을 드러낸다. <br />
따라서 “통치성에 대한 완전한 설명은, 주체의 생산, 조직, 동원뿐 아니라, 이러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문제까지 포함하는 것이어야 한다. 국가는 정치권력의 장에서 여전히 이러한 정당화의 문제를 책임지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144) 국가에 의한 관용 담론은 이 점에서 국가 정당성의 결핍 상황, 국가가 보편적 재현을 체현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대응책이기도 한 것이다(144). 제1의 시민덕목으로서 관용은 수동적인 시민상을 옹호하고, 사회적 삶을 혐오를 제어할 줄 아는 고립된 개인 및 집단의 상호작용으로 축소시킨다(150). 관용은 증오를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 발생을 막기 위한 미봉책이 된다. 더 나아가 관용은 “차이를 자연화/사사화함으로써 차이를 구성하는 사회적 권력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 갈등을 개인화/사사화하고, 개인화와 탈연대를 지향하는 관용의 움직임은, 정치적인 것에 대한 공포를 조장”(153)한다. 이처럼 차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관용 담론 속에서, 차이는 영구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쉽게 변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고 만다. 가령 “오늘날 대중 정치 담론 속에서, 이성애 여성은 평등의 후보자가 되는 반면, 레즈비언 여성은 관용의 대상”(130)이 되며, “국가는 평등한 대우와 평등한 보호에 대한 요구를 관용으로 대체해 버림으로써,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고 그것의 평등한 향유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자신의 임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170) <br />
이어지는 6장에서 브라운은 문명과 야만의 구분이 관용 담론에 연루되는 방식을 탐구함으로써 관용의 자유주의, 외견상의 보편주의가 그 이면으로 갖는 제국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인 성격을 잘 보여준다. 어떤 문화는 관용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고, 다른 문화들은 불관용적이고 근본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 관용 담론의 속성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비자유주의 세계의 사람들은 문화에 지배되고, 자유주의 세계의 사람들은 문화를 소유한다. 이러한 담론은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 대 문화라는 대립 구도를 설정하고 자유주의없이 개인의 도덕적 자율성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245). 데카르트, 로크, 칸트, 롤즈와 하버마스에 이르기까지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합리성은 문화적 장소를 초월해서 존재하며, 합리성을 문화나 주체성과 분리시킴으로써, 자유주의 담론은 개인이 자신의 사고방식을 선택할 수 있음을 주장한다(247). 이처럼 합리성과 의지를 가진 개인이라는 자유주의적 정식화는 그 자체로 합리성과 의지의 영역에서 미성숙한 반대항을 함축한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관용은 자율성이라는 선을 증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동시에, 역으로 자율성을 가진 개인들에 의해서만 행해지는 미덕이 된다. 관용은 “자신이 증진시키고자 하는 것을, 이미 그 전제로 삼고 있는 셈이다. 동시에 이는 비개인화된 비자유주의적 주체는, 관용을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250)하기도 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의 참조점은 가장 주되게는 물론 칸트이지만, 브라운은 “관용적인 자유주의적 자아와 불관용적인 유기체적 타자라는 이데올로기적 대립구도”(251)를 프로이트를 통해서 살펴본다. <br />
프로이트에 따르면, 집단적 정체성은 개인화된 정신의 반대라기보다는 성숙함으로부터의 퇴행이며 비합리적이고 위험한 것이다. 프로이트의 작업은 “성숙-개인-양심-억압-문명 대 유아스러움-원시-충동-본능-야만의 대립 구도, 즉 현대의 관용 담론에도 스며들어 있는 지극히 단순한 대립 구도”(254)에 기반해 있다. 철저히 방법론적 개인주의에 입각한 프로이트에 따르면 개인이 집단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을 하나로 묶는 추동, 에로스를 통해 개인 간의 경쟁과 원자화가 극복되어야 한다. 그런데 단순히 잡단의 유대가 구성원 상호 간의 사랑으로부터 도출될 수는 없는데, 고슴도치 콤플렉스와 같은 사랑의 양가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왜 이러한 지나친 근접성과 고립이라는 두 위험 사이의 동요가 안정적인 친밀함으로 대체되는가? 이는 집단 내부의 에로스라기보다는 우리를 리비도 차원에서 결합시켜주는 집단 외부의 지도자나 이상에서 찾을 수 있다. 집단은 집단 외부의 어떤 것에 대한 사랑과 이상화를 통해 구성원들이 서로를 동일시함으로써 형성된다는 것이다(259). 자아의 나르시시즘적 만족에서 시작된 사랑하는 대상화의 이상화는 종종 극단으로 나아가기도 하며, 이렇게 이상화된 대상이 자아이상을 대체하고 자아를 흡수함으로써 개인의 도덕적 분별력은 붕괴할 수 있다. 즉 집단은 개개인의 자아이상이 공통의 대상에 의해 대체되는 한에서, 공고하게 유지된다. 이러한 응집을 통해 집단은 공통의 나를 만들어내며, 이는 사회계약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상태이다(이러한 공통의 나commune moi의 구성은 루소의 사회계약 모델에서도 의도되었던 것이며, 루소 역시 시민종교를 사회계약의 필수적인 보충물로 생각한다). <br />
이와 같은 집단 구성에 관한 프로이트의 이론은 파시즘이나 민족주의를 설명하는 데에도 활용될 수 있으나, 이 이론의 전제들은 오늘날 유기체적 사회를 위험과 불관용에 등치시키는 자유주의적 설명틀, 관용 담론에도 동일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264). 관용 담론은 비자유주의 국가와 자유주의 국가를 나누고, 전자를 원시 상태로의 퇴행으로 간주하고 후자를 성숙한 자기 규제적 개인이 가능한 사회로 간주한다. 이는 문화에 선행하고 문화로부터 자율성을 가진 원자론적 주체를 전제하며, 개인의 자율성과 문명을 위협하는 집단 정체성을 억제하고 규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함축한다. 문명 담론과 결합된 관용의 통치성은 유기체적이고 비서구적이고 비자유주의적인 타자를 제어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268). <br />
결론적으로, 우리가 관용 담론에 맞서 선택해야 할 대안은 물론 자유주의를 단순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주의의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을 성찰하고, 자유주의가 자신의 타자로 삼아왔던 것들과 조우함으로써 자유주의 자체가 변환될 가능성을 개방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도덕적 자율성과 유기체, 세속주의와 근본주의와 같은 허구적 대당을 해체하고, 자유주의의 제국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인 부분을 억제하여 자유주의 내에 항상 존재하는 혼종성을 의식하고 또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브라운은 우리로 하여금 자유주의적 관용 담론의 탈정치화를 넘어서 정치적인 것을 새롭게 실천해나갈 것을 권한다.&#160;<br />
<br />
&#160;]]></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643/22/cover150/8961950231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61950231</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책의 감옥</category><title>정치의 세 개념 : 해방, 변혁, 시빌리테</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4129873</link><pubDate>Sun, 19 Sep 2010 17:5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4129873</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70607X&TPaperId=4129873"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98/14/coveroff/899170607x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0415906024&TPaperId=4129873"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10/38/coveroff/0415906024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1859842674&TPaperId=4129873"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22/51/coveroff/1859842674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160;
정치의 세 개념 : 해방, 변혁, 시빌리테<br />
<br />

&#160;
&#160;
&#160;
&#160;
&#160;
&#160;
1. 들어가며<br />
<br />
&#160;정치를 사고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 가지 변별되는 개념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의 첫 번째 개념은 정치의 자율성(autonomie)이라고 불리며, 이는 해방(émancipation)이라는 형상에 대응된다. 정치의 두 번째 개념은 정치의 타율성(hétéronomie), 즉 구조적이고 정세적인 조건들에 관련된 정치로서, 이는 변혁(transformation)이라는 형상에 대응된다. 이 두 번째 개념의 아포리아로부터 세 번째 개념이 도입되는데, 이는 타율성의 타율성이다. 이 개념은 정치가 의존하는 조건들이 결코 최종심급(dernière instance)이 아님을 보여주며, 반대로 이 조건들을 결정적이게 하는 것은 조건들이 주체를 낳는 방식, 또는 조건들이 주체에 의해 경험되는 방식임을 보여준다. 주체는 자신에게 부과되거나 스스로 창조하는 동일성에 따라 행동한다. 동일성들, 소속들, 그리고 단절(rupture)의 상상적인 것(l'imaginaire)은 조건들의 조건이다. 이는 정치의 자율성과 타율성의 효과들이 설치되는 또 다른 장면/무대(scene)과도 같다. 해방이나 변혁으로 환원불가능한 하나의 정치가 이에 조응하며 나는 이것의 윤리적 지평을 시빌리테(civilité)라고 특징짓는다. &#160;<br />
<br />
&#160;<br />
<br />
&#160;<br />
<br />
2. 정치의 자율성 : 해방<br />
<br />
&#160;정치(la politique)의 자율성은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의 자율성이 아니다. 정치는 내포적(intensive)이라고 할 권리의 보편성을 정치가 참조할 때, 정치가 어떻게 정의되는지를 이해하는 문제이다. 정치의 자율성은 집단(인민, 민족, 사회, 국가...)이 구성원들의 자연적이거나 초월적인 권위로의 예속화(assujetisement) 및 제약, 차별의 확립에 기초할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해방의 정치에서 가장 결정적인 언표행위 중 하나인 1789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에서 자율성 선포의 전형적인 정식화는 평등-자유(égaliberté) 명제이다. 즉 자유 없이는 평등도 없으며 평등 없이는 자유도 없다. 평등한 자유라는 명제는 논박(elenchos)이라 불리는 논리적 형식, 어느 명제의 부정이 곧 자기 반박으로 귀착되는 논리적 형식을 갖는다. 평등한 자유는 무제약적(inconditionée)이며 이는 다음의 두 가지 결과에 의해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br />
<br />
&#160;먼저 정치란 우선 권리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총체인 인민(peuple/demos)의 자기결정의 전개이다. 정치적 주체가 처해 있는 조건들이나 자유와 평등에 가해지는 제약은 그 자체로 부당한 것으로 그것의 폐지는 즉각 요구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인민을 스스로에게서, 즉 자신의 고유한 자율성으로부터&#160;분리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는 모든 지배에 맞선 인민 자신의 민주주의 쟁취의 조건이며, 인민 자신의 책임이다. 다음으로 이 명제의 무제약적 형식은 또한 호혜성의 조항(clause de réciprocité)이라 부를 또 다른 명제를 초래한다. 이 명제는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를 표현한다. 어떤 사람도 외적인, 일방적 결정이나 시혜에 의해 해방될&#160;수 없고 오직 호혜적으로만, 상호 인정에 의해서만 그렇게 될 수 있다. 평등한 자유는 정의상 개인들의 권리들이지만, 이는 집단적으로 쟁취되어야 한다. 이러한 권리들의 본질은 개인들이 서로에게 부여하고 보장하는 권리라는 것이다. 정치의 자율성은, 시민권 외에는 기원도 목적도 갖지 않는 하나의 과정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정치의 주체의 자율성 없이는 인식될 수 없다. 이때 정치의 주체의 자율성은 인민을 구성하는 개인들의 근본적 권리들을 서로에게 부여함과 동시에 인민이 스스로 만들어진다(se faire)는 사실을 의미한다. 즉 주체들이 서로를 위해 해방의 궁극적 원천 및 준거가 되는 한에서 정치의 자율성이 가능하다. 정치의 주체들은 보편적인 것, 즉 정의상 스스로가 그 속에 함축된 것으로 나타나는 보편적인 것의 담지자들이다. 시민이기 위해서는 조건없이(ohne Eigenschaften) 인간인 것으로 충분하다. <br />
<br />
&#160;그러나 이것들이 모순과 아포리아로 가득 차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스스로를 대표하고 보편적인 것의 대변인(porte-parole)이 된다는 관념의 경우가 그러한데, 말(parole)이 또한 하나의 권력 관계일 때부터 그렇다. 랑시에르는 󰡔불화󰡕에서 진정한 아포리아와 변증법의 측면들 가운데 하나를 분석했다. 그는 영속적으로 치안적 논리에 대립하여 평등주의적 논리를 내세우는 바른 정치가 ‘몫이 없는 부분’(part des sans part)의 구축에 있다고 본다. 그러나 계쟁(litige)없이 민주적 정치가 없다면, 민주적 정치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귀결될 수 있다.1) 왜냐하면 몫이 없는 자들(또는 무소유자들)은 정치의(de) 주체도 될 수 없고, 정치 내의(dans) 주체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발본적인 의미의 몫이 없는 자들은 따라서 전체일 수도 부분일 수도 없다(ni tout ni partie). 정치의 가능성의 조건인 그들[몫이 없는 자들]의 실존은 동시에 불가능성의 조건이다. <br />
<br />
&#160;이러한 곤란은 역사적으로 전위된다. 비-배제는 법적 사실로서 자율성의 최초의 유일한 언표행위 속에 있다기보다는, 그 언표행위가 새로운 부정을 통해 포함하게 되는 사후성(après-coup) 속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율성은 사회의 한 부분이 정치에 대한 보편적 권리로부터 배제된 것(능동 시민과 수동 시민, 다수자와 소수자의 대립)이 명백해질 때 정치가 된다. 이러한 부분은 시민권의 가장 능동적인 대변자로 스스로를 제시하며, 자신의 해방을 일반적 해방의 기준으로 행사할 수 있는 분파, 즉 프롤레타리아들, 여성들, 유색인들, 성적 소수자들이다. 이러한 예들은 모든 해방의 역사가 이미 선언된&#160;권리들의 향유를 위한 실제적 투쟁의 역사라는 것을 보여준다. 요컨대 시민권의 부인에 맞선 전투는 해방의 정치의 생명이다. 물론 이는 복잡성과 근본적인 양가성을 수반한다. <br />
<br />
&#160;먼저 평등한 자유라는 명제의 진리에 호소하는 피지배자들, 정치로부터 배제된 자들의 편에 양가성이 있다. 그들은 인민의 인민으로 스스로를 제시하거나 보편계급으로 스스로를 제시할 필요가 있다. 자율성의 정치가 자신의 편에서 부정의 부정, 즉 하나의 절대로 나타나야만 하는 것은 정치의 자율성이 우선 하나의 부정(négation)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정치와 그 주체들의 이상화는 그것들을 정초하는 이상성(idéalité)의 맞짝이다. 이러한 이상화는 지배어들(maître mots)의 지명 및 창조에 의해 표현되며, 지배어들이 갖는 상상적 포획의 힘은 그것들이 기원적으로 발본적인 부정성 및 정치적 능력(capacité politique)의 실질적인 대리(représentation)의 거부를 표현해온 만큼 더욱 커진다(인민, 프롤레타리아트, 여성, 이방인). 다음으로 이러한 양가성은 지배자들의 편에서 여전히 다른 측면을 지닌다. 모든 민주적 정치가 노예도덕을 표현한다고 설명하는 니체를 따라가 보자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헤게모니 및 합의 제조의 메커니즘을 폭로하는 계보학이다. 마르크스가 본 것처럼 기존 질서의 지배는 그 질서가 갖는 원칙의 이데올로기적 보편화에 상당히 의존한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본 것과 달리 지배적 관념들은 피지배자들의 관념들이다. 헤게모니적 지배의 담론은 사실상의 차별로부터 권리의 평등으로&#160;그 담론을 소환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제 모든 항의들은 기존질서의 불의 앞에서 원칙의 동일성에 호소함으로써 정당화된다. 이 때문에 극한에서는 주어진 조건정치의 창립(institution)을 배제된 자들의 권리로 선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러한 양가성은 앞의 양가성과 마찬가지로 정치가 인간 해방과 시민권을 개념으로 갖는 한 사라지지 않는다. &#160; &#160; &#160; <br />
<br />
&#160;<br />
<br />
&#160;<br />
<br />
3. 정치의 타율성 : 변혁<br />
<br />
&#160;“인간은 직접적으로 이미 주어진 조건 속에서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는 언명은 정치의 타율성 개념 또는 현세(Diesseits)의 정치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마르크스는 정치의 자율성 개념과 타율성 개념의 양립불가능성을 보기보다는, 오히려 양자를 단일한 시나리오로 통합하려고 시도했다. 마르크스는, 민주주의야말로 모든 헌정의 진리라고 여겼으며, 프롤레타리아트야말로 자신의 해방이 전인류의 해방의 시금석이 되는 보편계급이라고 여겼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정치의 타율성의 발본적 관념(conception)을 해명하고 자코뱅주의의 가정들을 역전시켰다는 사실이다. 정치는 개인들과 집단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결정된 조건들(Umständen, Bedingungen) 속에서만 또는 하에서만&#160;존재한다. 이러한 조건들은 정치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정치의 타율성의 유일한 모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단점 주변에서 서로 대립하는 복수의 모델들이 있다는 것이다. 타율적인 정치라는 관념이 사라지지 않으면서, 물질적 조건들이라는 통념(notion) 자체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규율 사회, 권력의 미시물리학, 통치성 연구에 이르기까지 푸코의 주제들이 본보기가 된다. <br />
<br />
&#160;마르크스에서 출발하여 두 가지 예비조건을 설정해보자. 우선 마르크스가 사고한 정치의 진리는 정치의 재료를 형성하고 이것을 스스로 물질적 활동으로 구성하는 조건 및 대상에 대해 정치가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 찾아야 한다. 이는 정치의 주체들(인민)의 자율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며, 마르크스는 주체들의 자율성을 자신의 고유한 운동의 전제가 아닌 결과로 표현한다.2) 마르크스의 정치는 자유의 필연적 생성이라는 시각에 기입된다. 평등한 자유가 권리들을 초월적인 기원으로 돌려보내면서 권리들의 보편성을 전제한다면, 마르크스의 정치적 실천은 자유의 필연성, 인민의 자율성의 필연성을 자신의 결과로 생산하는 조건들의 내적 변혁이다. 둘째로 정치의 조건들은 역사의 토대나 경제적 구조로 특징지어진다. 마르크스는 역사의 경제적 토대를 보편화하고, 노동의 인간학을 택했다. 이러한 의미의 경제는 전형적으로 정치의 타자, 정치의 절대적 외부이다. 따라서 정치의 현실성을 사고하기 위해서는 정치와 정치의 타자를 단락(court-circuiter)시킬 필요가 있다. 정치의 현실성은 혁명적 정치로서, 경제적 모순들의 발전과 다른 것이 아니다. 정치(la politique)는 이러한 제도의 비정치적인 조건들(따라서 최종심에서 현저히&#160;정치적인), 즉 경제적 모순들로 소급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라는 모델 위에서, 새로운 사회운동들과 관련하여 경제만큼 결정적인 외적 역사적 조건들 역시 존재한다. 가족 구조, 가부장제 구조, 성적 지배관계, 상징적 자본의 구조(부르디외) 등등. <br />
<br />
&#160;마르크스의 정리(théorèmes) : 첫째, 조건들이란 현실적으로 사회적 관계들(rapports sociaux)이다. 곧 조건들은 자신의 모순들 자체를 대가로 해서 규칙적으로 재생산되는(생산, 소비, 교환, 법, 문화, 이데올로기적 실천들) 관개체적 실천들의 객관적 총화(ensemble) 속에 있다. 둘째, 사회적 관계들은 경제적 관계들이다. 그러나 경제적 관계들은 그것의 편에서는 사회적 관계들이다. 정치의 사회적 조건들에 관한 모든 분석은 그 조건들이 발휘하는 구조적 인과성과 그것들이 생산하는 사회효과(effet de société)를 동시에 분명히 드러내야 한다. 마르크스의 경우 이러한 원인과 효과의 구조는 자본의 생산 및 재생산 과정과 그 동역학(dynamique)이다. 생산 수단의 사적 소유는 이 과정의 함수로서, 마르크스의 야심은 임금노동 착취 과정이라는 동일한 기초 구조가 경제적 공동체와 동시에 국가 형태의 맹아를 구성하고, 역사 전반에 걸친 두 형태 사이의 의존 관계 및 상관 관계의 맹아를 구성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셋째, 사회적 관계들(조건들)은 역사를 갖는다. 이 역사의 의미는 경제적 과정의 동역학에 의해 설명된다. 정치적 실천은 항상 이미 이 변화의 도정에 삽입되며, 사회의 자본주의적 구조는 변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정치는 조건들의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변화 속의 변화 또는 변화의 미분3)이다. <br />
<br />
&#160;그러므로 이러한 정치는 주체 없는 것이 아니다(주체없는 것은 역사이다). 모든 정치 개념은 각각 종별적인(spécifique) 주체 개념을 함축한다. 문제는 정치의 타율성에 연계된 주체 개념의 곤란들을 보는 것이다. 헤겔의 직접적 상속자로서 마르크스의 경우, 정치적 주체라는 관념은 즉각 모순&#160;관념에 준거한다. 주체화(subjectivation)는 변화가 변화하는 지점에서 생산되는 집단적 개인화이다. 문제는 유일하고 동일한 현실이기 때문에, 이때 객관적 반경향의 형성과 주체화의 운동 중 무엇이 먼저냐고 묻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의 역량(puissance)이 그것 자체가 야기하는 저항의 규모를 먹고 자랄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경향과 반경향이 서로 싸우는 모순의 운동은 끝없는 나선이며, 이는 정치의 관점에서 이 운동이 주체화와 탈주체화(désubjectivation)의 국면들을 부단히 통과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모순적 경향들의 변증법의 기초는 권력쟁취가 아니며, 오히려 자본주의적 축적에 함축되어 있는 적대적인 사회적 양식들의 갈라짐(dissociation)이다. 이것들은 자본주의적 축적 속에서 서로에게 맞서&#160;발전한다. 한편으로 마르크스가 노동력의 실질적 포섭이라고 부른 사회화 양식이 있고, 다른 편에는 그가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연합’이라 부른 사회화 양식이 있다. 이 관계의 근본 요점은 그것이 하나의 갈라짐의 문제라는 것, 본질적으로 동일한 개인들을 변용(affecter)시키거나 자신에 반한 선택을 하도록 하는 양립 불가능한 실존 양식들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정치의 타율성과 인민의 자율화 사이의 연결고리가 재발견된다. 요컨대 마르크스가 이론화한 바의 정치는 구조적 조건들의 총화가 끼치는 효과들의 가변성을 묘사하면서 이러한 갖가지 실천 양태들을 연결하는 주체화의 한 도정이다. &#160;<br />
<br />
&#160;이제 가장 역설적이고 또 가장 계발적인 대조, 푸코의 몇몇 이론화들과 대조해보자(권력 관계들에 입각해서 제도들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권력관계는 행위들에 대한 행위의 한 양식이며 사회적 연계 속에 깊이 뿌리내린다. 정치적 과제는 권력관계들과 자유의 자동사적 성격 간의 갈등에 대한 분석, 가공, 문제제기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존재론에 대해 일종의 전도를 행하면서, 마찬가지로 조건들과 변혁이라는 단어에 중심적인 자리를 부여한다. 푸코의 이론화에서 흥미로운 것은 조건들과 변혁 간의 거리가 최소화되고, 서로 동시적인 것이 된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푸코는 정치에서 제도들, 거대 실체들, 거대 기계들(국가, 당, 계급)의 독점을 제거하고자 할 때에조차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정치의 지평으로서 역사와 사회에 관해 지속적으로 말한다. 사회는 서로 조건짓고 변혁하는 행위들의 복합체이다. 어떤 행위도 다른 행위의 실행의 새로운 조건들을 창조하지 않으면서 다른 행위를 변혁할 수 없으며, 어떤 행위도 다른 행위의 담지자의 자유를 변혁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조건지을 수는 없다. 또한 개인들은 이러한 복합체의 모든 독특성들(singularités), 이러한 독특성들 모두에 연결된 육체들이다. 역사적 갈등은 항상 이미 권력관계들에 본래적이다. &#160;<br />
<br />
&#160;푸코가 정치를 구성하는 방식은 정치의 자율성의 재구성과는 무관하다. 다소 안정된 사회적 형식들, 행위의 규범들은 구성되는&#160;반면, 권력관계는 진정으로 구성하는 것(constituante)이다. 권력관계는 결코 하나의 의지나 의지들의 대결로서 사고되지 않는다. 이는 푸코가 육체들에 대한 준거(référence)를 개인성의 궁극적 지시대상(référent)으로 기능하도록 만드는 방식에 관련된다. 권력관계와 예속화는 지배와 예속(법의 부과)의 견지에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육체들을 형성하고 어떤 행위들(action)에 배치하는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기술들(technologies)로 해석되는 방식에 관련된다. 정치적 행위들은 이제 전략들(stratégies)의 견지에서 사고되어야 한다. 이는 상대편 개인성의 반작용들을 예측가능하고 통제가능하도록 육체적 성향들을 변형(transformation)하는 것에 관한 일반적 도식이다. 이는 국지적이고 일시적인 형상 및 장기간 지속되는 사회적 구조에도 통합될 수 있으나 그 효력의 원리는 항상 미시정치적(micro-politique)이다. <br />
<br />
&#160;그런데 그는 한 가지 곤란에 이르게 된다. 결정적인 것은 저항(résistance)이라는 통념이다. 모든 권력은 저항을 전제하지만, 권력관계가 또 하나의 지배관계가 될 때 ‘자유의 자유화’가 취할 수 있는 형식은 이러한 사실로부터 명확하게 귀결되지 않는다. 여기서는 저항들의 우연적 생성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권력관계들에 관한 푸코의 분석은 역전불가능하고 절대적인 권력관계들의 비대칭성이라는 질문에 의해 어떤 한계에 부딪힌다. 무엇보다 극단적 상황들이라는 문제, 그 속에서 주체들의 개인화로서 권력의 기술들이 총괄적인(global) 하나의 적대에 자리를 양보할 뿐 아니라, 죽음의 질서 및 파괴의 질서 속에서 발휘되는 벌거벗은 힘에 자리를 양보하는 상황들의 문제가 있다. 생명만이 통치될 수 있고 훈육될 수 있지만,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다양한 형태의 절멸(extermination)의 실천들이라는 질문이다. <br />
<br />
&#160;그러나 일반적으로 지배(domination)의 뿌리 깊은 구조들이라는 질문이 또 있다(권력관계들은 지배의 상태와는 다른 것으로, 한 개인 또는 사회집단이 권력관계들의 장을 가로막고, 이를 유동성없고 고정된 것으로 만들어 운동의 모든 역전가능성을 막는데 이를 때 우리는 지배의 상태와 대면한다. 권력관계들 속에는 필연적으로 저항의 가능성이 있다. 저항의 가능성이 없다면 권력관계들도 없다. 권력관계들이 있다면 이는 도처에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지배의 경우들에 문제는 사실 저항이 어디에서 형성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푸코는 권력관계들의 비대칭성이 역전이나 전위의 즉각적 가능성에 항상 준거하는 전략적 현재라는 시간을 잡아 늘리도록 강제된다. 구조들(제약, 법, 규범의 질서)이 나타났는데, 이 구조들로부터 주체는 분리되어 있고, 이 구조들은 육체의 친밀함 속에서까지 주체들이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권력을 고정시킨다. 이 구조들에 대해 푸코는 단지 사회운동들에 대한 고전적인 호소에 의존할 뿐이다. 푸코의 유일한 독창성은 사회운동들의 범위가 사회 속에서 형성될 수 있는 지배관계들 전체의 범위와 동연장적이고, 그 운동들은 어떤 미리 설정된 조직형태도 갖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뿐이다. 마침내 갈수록 푸코의 관심을 독점하는 것은 자기의 기술들(techniques de soi)에 대한 분석인데, 이는 또 다시 곤란의 장소이다. 저항의 관념은 자기에 대한 자기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는가 하는 질문으로 돌아가고 이는 무한퇴행에 연루될 수 있기 때문이다.4) 이로부터 푸코는 더 이상 권력을 분석하지 않고, 개인의 자기와 그것의 생산 또는 창조의 양식(자기의 미학)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 스토아적 영감의 운동은 지배의 양태가 우리에게 의존하는 것에 의해 여전히 결정되는지를 아는 것에 가깝다. <br />
<br />
&#160;이러한 운동은 최종분석에서 미완성이고 열려있으며, 아포리아적이다. 이 아포리아는 자기 또는 개인성의 통념들에 관련되며, 푸코는 이를 비판적으로 가공하지 않고 단지 경험적이고 동시에 절충적인 방식으로 취했다. 그러나 가장 흥미로운 것은 푸코의 아포리아와 마르크스의 아포리아를 나란히 놓는 것이다. 이 곤란들은 대립되는 것이지만 변혁이라는 중심적 관념에 본래적인 두 곤란들이다. 마르크스는 생산의 사회적 관계들을 정치적 실천의 외적 조건들로 놓는 동시에 그 속에서 정치적 실천의 혁명적 분열과정이 발전되는 요소로 간주함으로써, 세계의 변혁(Veränderung der Welt)을 조건들의 총체를 포괄하는 유효한 변혁 전체의 궁극적 지평으로 제시한다. 세계의 변혁은 세계적 정치와 세계적인 정치적 주체의 출현을 가정한다. 이러한 통념은 모순들의 역사적 발전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실천이성의 이율배반들에 대한 칸트적 비판이라는 의미에서 변증법적이다. 변혁 개념은 단지 우리를 무한퇴행 속에 연루시키고, 이는 세계가 실제로 세계화(지구화)된 것으로 드러날 때부터 완전히 가시적이 된다. 반대로 푸코는 자기라는 질문 및 그것의 구성에 관한 질문을 의식과 실체의 지반으로부터 육체성(corporéité)이라는 지반으로, 따라서 금욕(ascesis)이라는 지반으로 전위시키면서, 이러한 배리(paralogisme)를 다른 형태로 되풀이한다. 그가 자기에 대한 자기의 노동을 수동적인 것으로 만듦과 동시에 능동적인 것으로 만든 한에서 말이다. 이러한 이중구속의 상황은 마르크스의 것만큼이나 칸트적 의미에서 변증법적이다. 이로부터 (주기적으로 부인되는) 숙명주의와 사실상의 주의주의 간의 잠재적 진동이 유래하며, 이때 니체에 대한 준거는 중화제(correctif)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5) 물론 변혁이라는 관념의 발본적 정식화가 아포리아에 부딪힌다는 사실 때문에 변혁 관념 자체가 자격박탈이 되는 것은 아니며, 반대로 그러한 사실은 영속적 발명의 원동력이다. 이러한 관념이 진정한 불가능성에 직면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장면을 지나가야 한다. <br />
<br />
&#160;<br />
<br />
&#160;<br />
<br />
4. 타율성의 타율성 : 시빌리테의 문제<br />
<br />
&#160;푸코가 정치를 후면에서 공격하는 문제들이라고 부른 것,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들이다. 이는 폭력(과 잔혹), 동일성(과 동일성의 정치), 합리성과 보편성의 도착적 효과들(effets pervers)에 의해 발생한다. 우선 종족 정화에 관한 페티 벤슬라마의 텍스트(이방인의 이방성은 그가 다르다거나 그가 다른 곳에서 왔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는 그가 너무 가깝고 친숙하고 자기와 분리할 수 없도록 섞여 있는 어떤 자라는 것이다. 동일성과 관련된 병으로 인한 모든 파괴는 정확히 이러한 조건에서 유래하며, 고유한 것의 재영유는 모든 정화의 슬로건이다. 이러한 증오는 적에게 승리를 거두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신의 육체의 표상에 섞여 있는 이방의 육체와 육체의 이방성을 근절하려는 절단과 절멸의 실천이다. 그만큼 동일자와 타자는 밀접히 섞여 있다)와 들뢰즈와 가타리의 텍스트(남성은 다수적이고 생성들은 소수적이며 모든 생성은 소수자-되기이다. 다수성은 어떤 표준, 남성-어른-백인-인간 등을 뜻한다. 생성이나 과정으로서 소수와 집합이나 상태로서의 소수성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생성 속에서 우리는 탈영토화되며, 흑인 조차 흑인이 되어야 하며, 여성들조차 여성이 되어야 한다. 파시스트가 되지 않으려면 흑인-되기 외에 다른 선택은 없다)에서 출발해보자. 첫째로 폭력의 문제와 동일성의 문제의 융합에 의해 구성되는 수수께끼의 항들을 정확히 해야 하는데, 이는 정치에서 타율성의 타율성으로 돌아가게 한다. 둘째, 동일성들의 폭력 자체를 대상으로 하는 정치를 특징짓기 위해 시빌리테라는 개념을 시험할 것이다. <br />
<br />
&#160;폭력을 그 극단적인 형태들, 즉 초자연주의적이고 초객관적이며 초주체적인 형태들, 지향성의 발작들 사이에서 영속적으로 진동하는 잔혹(cruauté)의 형태에서 고려해보자. 오질비는 최근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경계가 말소되는 것처럼 보이는 폭력의 종별적으로 현대적인 새로운&#160;형상들에 대한 질문을 제기했다. 그는 일회용 인간의 생산, 인간 자재 착취, 잉여 인구들을 죽도록 방치하는 절멸(전염병들, 집단학살들, 자연재해 등)의 예를 든다. 이러한 비주체성(a-subjectivité)의 환상적 압력과 함께 우리는 푸코가 이론화한 모든 권력관계의 정반대 편에 와 있다. 또한 우리는 정치에 대한 권리의 요구가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어버린 상황에 있다. 희생자들이 자신들을 해방시키면서 인류를 해방시킬 수 있는 정치적 주체로 직접&#160;스스로를 사고하고 제시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구조적 폭력은 체계의 재생산과 양립불가능한 저항들을 파괴하는, 사회적 관계들에 본래적인 억압이다. 그러나 비기능적이지만 세계경제의 계획 속에 기입되어 있는 수백만의 총체적 제거와 함께, 우리는 구조적 폭력의 한계를 넘어섰고, 구조의 재생산 전체를 초과하는 객관적 잔혹의 일상성 안으로 진입했다. <br />
<br />
&#160;폭력의 초객관적 형태들, "주소없는 폭력들"(오질비)의 일반화, 폭력의 초주체적 형태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거기서 파시즘의 일상적 형태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장소, 모든 문화의 한복판에서 가능한, 증오의 이상화(idéalisation de la haine)의 증식 속에 있다. 이는 초주체적 폭력이라 불리는데, 왜냐하면 이와 같은 행위들은 의지와 목적을 갖고 행해지지만, 극한에서 그것들이 실행하는 의지란 주체가 그 도구에 불과한 하나의 사물(chose)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즉 자기 속에 있는(있다고 그가 믿는) 동일성, 타자 전체에 대해 총체적으로 배타적이고 ‘우리’와 ‘자기’ 속의 이타성의 그 모든 흔적을 제거함으로써 자기의 고유한 실현을 오만하게 명령하는 이러한 동일성&#160;말이다. 이는 혼합이나 탈고유화(dépropriation)의 위험보다는 자신의 고유한 죽음을 선호하는 경향을 갖는다. <br />
<br />
&#160;이러한 각각의 극단적인 형상들에서 폭력의 비전환성(non-convertibilité)이라는 환원불가능한 사실의 표지를 볼 필요가 있다. 어떤 폭력은 억압하거나 추방할 수 없고, 역사를 만드는 수단으로 정치적으로 전환할&#160;수도 없다는 것이다. 폭력은 따라서 동시에 정치와 역사의 재료이고 경향적으로 그 전개의 영속적인 하나의 조건이 되지만, 이는 역사성의 장 내에서 정치의 이행 및 정치의 범위 내에서 역사적 조건들의 이행의 한계를 표시한다. 이 때문에 정치의 타율성을 넘어, 해방의 정치만큼이나 변혁으로서의 정치의 구성을 다시 의문시하는 타율성의 타율성을 보아야 한다.6) 이때 극단성이나 한계들은 지정불가능하며 고정되지 않는다. 폭력의 초객관성은 지배 관계들의 자연화 속에 적어도 잠재적으로 기입되어 있고, 폭력의 초주체성은 ‘죽음 이상의 것’을 요구할 정도로 충분히 잔인하고 불가해한 정신적 권위의 제국으로 개인들을 복종시키는 지평에 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한계들의 역사란 동일성 자체가 고정되거나 변형되는 방식으로부터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여기서 다만 세 가지 정도의 테제를 제안해보자. <br />
<br />
&#160;첫째, 모든 동일성은 근본적으로 관개인적이다. 그것은 순수히 개인적이지도 집단적이지도 않다. 우리가 자기라고 부르는 것은 절대적으로 독특한 것으로 경험될 수 있으나, 그것은 실재적이고 상징적인 사회적 관계들의 체계에 의해 구성된다. 역으로, 집단적 동일성, 소속의 관계나 우리의 구성은 개인적인 상상적인 것들 가운데 현실 속에서 인가되는 관계의 구성일 뿐이다. 상상적인 것은 개인들이 숨쉬는 공기만큼이나 그들의 삶에 필수불가결하다. 둘째, 동일성보다는 동일화들(identifications)과 동일화의 과정들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다. 어떤 동일성도 주어지거나 단번에 획득될 수 없고(고정될 수는 있지만), 항상 불균등하고 미완성인 하나의 과정, 다소간 강력한 상징적 보증을 불러내는 위험한 구성들로부터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일화는 타자들로부터 오며 항상 아직 타자들에 의존한다. 조건들의 조건은 자기와 타자들의 역할, 연결과 단절의 상징화가능성이 의존하는 제도들의 실존에 의해 구성된다. 셋째, 모든 동일성은 모호하다. 이 모호성은 우선 주체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어떤 개인도 특유하게 하나의 유일한 동일성, 유일한 소속을 갖는 것은 아니다. 모든 개인은 불균등하게 함축적이고 불균등하게 갈등적인 복수의 동일성들을 결합한다. 그러나 일의적일 수 없는 동일성 그 자체의 관점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즉 하나의 동일성은 그것이 무엇이든 동시에 복수의 기능을 수행하며 항상 과잉결정된다. 그것은 항상 복수의 상징적 준거들&#160;사이에서 이행한다.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스스로에 대해 착각하고 다른 것으로 오인될 위험에 노출된 채, 항상 빗나가 있다(à coté). <br />
<br />
&#160;이러한 테제들은 적어도 폭력과 동일성들 간의 결합이라는 질문을 제기하게 해준다. 동일성의 견지에서 숙고할 때, 두 극단적인 상황들은 똑같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즉 그 상황이 정상적인 실존과 교통이 파괴되는 자율성의 영점 상태에 상응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이러한 상황들 중 하나는 개인성을 집괴적(massive)이고 배타적인, 하나의 유일한 일의적인 동일성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 포스트모던한 어떤 유토피아뿐 아니라 시장의 유연성 요구에 순응하여 - 동일성으로 하여금 모든 역할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부유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즉 절대적으로 한 사람이 되거나 아무 것도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제도들의 역할은 동일화들과 소속들의 다면성(multiplicité), 복잡성, 갈등성을 제거하지는 않으면서, 감축하는 것(réduire)이다. 제도들과 대항제도들 없는 사회란 없다. 그러나 제도들이 정치는 아니며, 제도들은 정치의 수단들 또는 결과들을 구성한다. 정치가 총체적 동일화와 부동하는(fluctuante) 동일화의 불가능한 한계들 사이에서 동일화들의 갈등을 규제하는 한에서 그러한 정치는 시빌리테라고 불린다. 시빌리테는 모든 폭력을 제거하는 정치는 아니지만, 정치(해방, 변혁)을 위한 공간을 제공하고&#160;폭력 그 자체의 역사화를 허용하는 방식으로 동일화의 극단성들 사이를 벌려 놓는다/배제한다(écarter). <br />
<br />
&#160;시빌리테에 관한 몇 가지 문제들. 첫 번째 거대한 문제는 시빌리테로서의 모든 정치가 필연적으로 ‘위로부터’, 주인의 행동 및 권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지, 아니면 그것이 또한 ‘아래로부터’ 개인들과 집단들의 고유한 노력과 힘들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지 아는 것이다. 기존의 정치철학은 다중(multitude)이 본래 폭력적이기 때문에 정의 및 사회질서 확립에 있어 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시빌리테의 관념을 다중의 자율성이라는 관념, 즉 민주적 형태들과 화해시키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헤겔이 법철학에서 제안한 테마를 검토해볼 수 있다. 헤겔은 역사 속에서 폭력이 법치국가, 즉 개인들의 자유화를 목표로 구성되는 국가에 의해 예방적으로 처리된다면 전환가능하다는 변증법적 확신(“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을 가지고 있다. 헤겔의 관념은 동일성들과 일차적 소속들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집단적인 정치적 동일성이나 국가적 소속의 특수한 표현 및 매개로 재구성하기 위해 잠재적으로 파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일차적 동일성들의 차별적인 취급, 그것들의 인정의 위계화, 그리고 하나의 탈자연화를 가정한다. 다시 말해 국가 또는 상급의 공동체에 의해 미리 통제된, 따라서 그 결과가 보장되는 탈동일화&#160;및 동일화의 동시적인 이중의 운동이 있다. 이러한 운동은 내포적&#160;보편화의 효과를 생산하는데, 가족 공동체의 자연적 속박에서 개인성을 분리시킨다. 요컨대 개인들은 구속(adhérence)에서 가입(adhésion)으로 이행한다. 우리는 헤겔을 따라 탈동일화-동일화(영유-탈영유)의 운동이야말로 시빌리테 개념의 핵심이라 여길 수도 있다. <br />
<br />
&#160;그러나 우리가 헤겔주의자라고 선언할 수 없는 이유는 헤겔의 삼중적 모순 때문이다. 첫째, 헤겔은 자유화의 대가인 일차적 동일성들의 해체가 그 자체로 극단적으로 폭력적인&#160;과정이며, 하나의 구속으로 기능할 소속의 탈통합(désincorporation) 또는 절단이라는 것을 모르거나 모르는 척 한다. 둘째, 헤겔은 보편주의적&#160;공동체(국가)가 공화적이고 세속적일지라도 또한 하나의 공동체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모르거나 모르는 척 한다. 그것은 근대에 하나의 민족적 또는 의사민족적공동체이고 그 주체들은 또한&#160;공통의 소속을 상상하며, 상상적인 것 속에서 공유된 자신의 정치적 동일성의 실체, 즉 의제적 종족체(ethnicité fictive)을 구성한다. 둘째로 문제가 되는 것은 탈동일화의 동일화이다. 이는 야만적인 것을 경계 밖으로, 타자의 방향으로 퇴출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매개를 구성하는데, 이는 경계 내에서의 평화와 문명의 향유와 상관적이다. 세계화가 새로운 단계를 넘어설 때 그것은 통합의 갈등의 확대재생산을 준비한다. 세계화된 공간 속에는 국가와 인륜(Sittlichkeit)의 등가물 같은 것은 없다. 셋째, 이는 헤겔이 부인했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인데, 다만 그 모순의 발전을 오판한 것이다. 헤겔은 국가가 오직 자신의 타자인 경제적 과정들(시민사회)에 본래적인 부정성을 통합함으로써만 자기 고유의 보편성을 구성한다는 점을 알았다. 그러나 그러한 경제적 과정들이 윤리적 보편과 정치적 제도들에 봉사하는 주변적 기능이 되기는커녕, 추상 노동의 역량 외의 모든 능력을 분해할 수 있다는 것을 헤겔이 이해했을까? 한 쪽에서 그는 사적 소유의 자율화 운동이 빈곤의 양극화를 필연적으로 생산한다고 분명히 설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시빌리테의 조건들 자체에 대해 파괴적인 계급들의 양극화를 주변적(marginal) 현상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헤겔이 주변에 있다고 보는 것이 현실에서는 중심에 있다고 설명하는 것은 마르크스의 몫이다. &#160; <br />
<br />
&#160;이제 우리는 어떤 조건들 속에서, 어떤 한계들 속에서 국가가 시빌리테의 구성에서 역할을 할 수 있는가라고 질문을 던져야 한다. 20세기의 역사에서, 다중들은 국가가 자신들의 존엄을 인정하고 행정이나 공적 공간에 시빌리테의 규범들을 도입할 것을 강제하기 위해 연대했다. 다중은 스스로를 문명화하기 위해 국가와 국가의 제도들을 활용하는 한에서 이를 행했다. 이는 단순히 노예도덕이 아니며, 오히려 그 같은 주도권은 다중의 자율성이 충분치 않다면 결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시빌리테의 시각에서 ‘아래’(le bas)란, 다시 말해 다중이란 무엇인가? 들뢰즈의 시각에서 다중은 소수자들이거나 또는 발본적으로 탈동일화를 모든 동일화에 대해, 규범적인(표준적인) 집단적 인정에 대해 우선시할 소수자로 되기의 과정들이다. 여기서 들뢰즈가 취한 예들(흑인, 여성, 유대인)이 유지가능한 것인지, 그 무슨 예를 취한들&#160;그것이 유지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은 논하지 말자. 다만 우리는 똑같은 변증화(dialectisation)가 대칭적으로 다수자라는 통념에는 적용되지 않아야만 하냐고 물을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신들의 성찰 전체를 반파시즘의 시각 속에서, 시빌리테의 정치라는 시각 속에 위치시킨다. 중요한 것은 대중들의 파시스트-되기가 불가능해지기 위해서는 개인성의 변환(transmutation)이 어떤 단계에 뿌리내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다수자적 다중들의 반파시즘과 소수자적 다중들의 반파시즘 사이에 일종의 실천이성의 이율배반이 지배한다고 시사할 수는 없는가? 각각의 관점은 상대방에 대한 논박을 통해 성장한다. 욕망의 미시정치 편에서 보면, 국가를 혁명적으로 전화시키고자 하는 대중운동들의 조직은 하나의 헤게모니 기획에, 전체주의적(totalitaire)이지는 않더라도 총체적인(totale) 이데올로기의 구성에, ‘증오의 이상화’로 귀착할 위험을 항상 지닌 표상에 매여 있다. 사회적 시민권의 거시정치의 편에서 보자면, 집단들의 모든 형성 및 변형의 탈영토화를 겨냥하는 욕망의 기계적 배치들(agencements machiniques de désir)은 사회적 연관을 자연화시키는 흐름들과 발본적 탈개인화의 흐름들, 교통·소비·통제의 거대기계의 이면에 불과한 이 흐름들과 본의 아니게, 그러나 우연히는 아니게 공명할 위험을 항상 갖는다. 탈통합은 양날의 무기이다. ‘아래로부터’ 시빌리테라는 정치적 가설은 따라서 저항들의 다수자-되기의 전략과 소수자-되기의 전략 사이에서 선택할 수 없다. 만일 이론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면, 그것은 정세(conjoncture)의 문제이거나 정치적 기술(art)의 문제이다. 아마 그것은 또한 단적으로 예술(art)의 문제일 것인데, 시빌리테의 수단들은 언표들, 기호들, 역할들 이외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br />
<br />
&#160;결론적으로, 아포리아는 불가능성(impasse)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재정식화하자면, 어떠한 정치의 개념도 완전하지 않다. 따라서 각각의 것들은 다른 것들을 전제한다. 변혁 없이는 해방도 시빌리테도 없으며, 해방 없이는 시빌리테도 변혁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복잡한 전제들로부터 하나의 체계, 하나의 불변의 질서를 만들고자 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는 또 하나의 정치철학을, 즉 정치(la politique)의 문제들을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의 표상으로 전화시키는 도식만을 획득할 뿐이다. 위의 개념들이 정치와 관련되는 한에서 그것들은 개별적인 길 위에서만 절합될 수 있다(s'articuler). 이러한 길들은 진리처럼 필연적으로 독특하며 따라서 모델이 없다.&#160;&#160;<br />
<br />
&#160;<br />
<br />
<br />
<br />

1)&#160;“인민이라는 것이 인종이나 주민이 아닌 한에서 정치는 존재하고, 빈민들이 경제적으로 낙후된 주민의 일부가 아닌 한에서 정치는 존재하며, 프롤레타리아가 산업 노동자 집단이 아닌 등등에 한해서만 정치는 존재한다. 인민이 셈해지지 않은 것을 셈하는 특정한 형상이나 몫 없는 자들의 몫의 특정한 형상을 사회의 부분들에 대한 모든 셈에 보충으로서 기입하는 주체일 때 정치는 존재한다. 이러한 몫이 존재하느냐 아니냐가 바로 정치의 쟁점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정치적 계쟁(litige)의 대상이다. [...] ‘부자들’과 ‘빈자들’ 사이의 싸움은 이러한 말들이 나눠질 수 있는 가능성을 위한 싸움이며, 그들이 공동체를 다른 식으로 셈하는 범주들을 설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위한 싸움이다.” 자크 랑시에르, ｢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양창렬 옮김, 2008, 도서출판 길, pp. 246~247. <br />
<br />
<br />

2)&#160;이것이 해방의 정치와의 차이점이다. 발리바르는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의 대표자로서 루소를 꼽고, 정치의 타율성의 대표자로 마르크스를 꼽는다. 양자는 전통과의 단절 및 인민의 통일성에 대한 질문에 있어서 유비될 수 있다. 그러나 인민의 봉기와 정치적 주체의 자율성에 관한 루소주의적 관념이 일종의 관념론의 쇄신이라면, 마르크스의 계급 정치는 정치의 타율성으로서 경제를 제시함으로써 유물론의 쇄신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에티엔 발리바르, ｢스피노자, 루소, 마르크스 : 정치적인 것의 자율성에서 정치의 타율성으로｣, 󰡔스피노자와 정치󰡕,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2005, pp. 230~235. <br />
<br />
<br />

3)&#160;발리바르는 󰡔마르크스의 철학󰡕 4장에서 마르크스의 경제주의와 진화주의에 대해 비판한다. 이는 역사적으로는 제2인터내셔널 이데올로기와 소련의 현실 사회주의로 실현되었는데, 이러한 종말목적론적이고 결정론적인 역사철학에 대해 발리바르는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진보가 아닌 과정(procès)에 대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과정은 경제적 개념도 도덕적 개념도 아니다. 모순적 경향의 변증법은 단지 경향의 역전이나 반경향의 확립에 의해서 해결되거나 감축될 수 있는 것으로서, 헤겔과 반대로 모순의 화해불가능성을 주장하는 논리적이고 정치적 개념이다. “마르크스가 아주 잘 활용하고 있는 수학적 은유를 사용하여 사태를 달리 표현할 수 있다. 즉 역사의 진행 속에서 그가 관심을 갖는 것은 곡선의 일반적 형태로서 ‘적분’(intégrale)이라기보다는 ‘가속화’의 효과로서 미분, 따라서 각 계기마다 작용하고 전진의 방향을 결정하는 힘들의 관계이다.” 에티엔 발리바르,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 윤소영 옮김, 문화과학사, 1995, p. 138. &#160;<br />
<br />
<br />

4)&#160;푸코는 권력이 있는 곳에 늘 저항이 있다고, 특정한 행동에는 대항행동의 가능성이 항존한다고 말하지만, 그는 예속이 아닌 저항을 택하도록 하는 것, 선택의 선택의 문제 또는 자유의 자유화의 문제를 해명하지 않는다. 자유의 실천이 가능해지고 저항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자유화의 과정이 필요하지만, 이 점에서 푸코는 저항의 생성을 위한 저항, 저항을 가능하게 만드는 저항이라는 무한퇴행에 들어서게 된다. 이 문제를 도외시한 채, 그는 다만 사회운동이나 자기의 배려라는 실존의 미학에 의존할 뿐이며, 이는 결국 정치적 비관주의로 흐를 수 있다. <br />
<br />
<br />

5)&#160;푸코에서 권력은 모든 관계 속에서 생산되는 것이고, 권력은 지배자를 통해 작용하는 이상으로 피지배자를 통해서도 작용한다. 계급, 국가, 법 등은 단지 권력을 통합한 것에 불과하며 힘들의 관계의 전략과 관계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억압적 권력 개념에 대한 푸코의 비판은 권력에 대한 니체적 영감에 관련된다. 힘이 힘과 더불어 갖는 관계는 하나의 힘이 다른 힘들에게 영향을 주고 또 그 힘이 다른 힘들에 의해 영향을 받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힘들이 언제나 다른 힘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어떤 외부를 가리키게 된다. 여기서는 끊임없는 힘의 생성이 존재하며, 외부의 사유는 주사위 던지기, 독특성들의 방출이 된다. 들뢰즈는 이때 힘의 이러한 영향을 주는 힘과 영향을 받는 힘 모두와 혼동되지 않는 제3의 권력을 저항이라고 부른다. 질 들뢰즈, ｢미셸 푸코의 주요 개념들에 대하여｣,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박정태 옮김, 이학사, 2007, pp. 446~456. 그러나 이러한 니체에 대한 의존은 푸코적인 변혁의 정치가 마주치게 되는 주의주의와 숙명주의 사이의 진동을 막지 못한다는 것이 발리바르의 의견이다. &#160; <br />
<br />
<br />

6)&#160;폭력의 감축을 통해 정치의 공간 자체를 개방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시빌리테의 정치는 반폭력의 정치의 문제설정과 관련된다. “아마도 이는 정치의 가능성을 부단히 삭제하는 주체적-객관적 폭력의 각각의 형태를 모든 곳에서 퇴치한다는 목표를 동시에&#160;확정하지 않고서는 어떤 정치적 실천도 더 이상 사고될 수 없음을 의미할 뿐일 것이다. 따라서 정치는 더 이상 단지 폭력의 지양(비폭력으로의 지양)으로도 그 규정적 조건들의 전화(대항폭력의 적용을 요구할 수 있는 것)로도 사고될 수 없다. 정치는 더 이상 다른 어떤 것을 위한 수단, 도구도 아니고, 더 이상 그 자체로 목적도 아니다. 오히려 정치는 그것이 그 자체 속에 담지하는 환원불가능한 이타성의 요소와의 대결이 불확실한 쟁점이다. 내가 여기서 어쨌든 가설적으로 ‘반폭력’이라고 불렀던 것은 이러한 또 다른 무한한 순환성이다.” 에티엔 발리바르, ｢반폭력과 ‘인권의 정치’｣,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 윤소영 옮김, 1995, p. 201. &#160;<br />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98/14/cover150/899170607x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70607X</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책의 감옥</category><title>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中</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3876400</link><pubDate>Sun, 04 Jul 2010 04:0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3876400</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1993650&TPaperId=3876400"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589/22/coveroff/8971993650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160;
&#160;
&#160;
&#160;
&#160;
&#160;
&#160;
&#160;
한참 책을 정리하다가 예전에 조금 읽다가 어디에 뒀는지 영 모르던 책을 찾았다. 그러니까 6년 전, 강박증자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히스테리자가 되자고, 또는 되도않는 언타이틀의 '책임져' 드립을 날리던 때가 잠시 생각난다. 인문학이, 철학이 너무나 답답하게 느껴지던 시절, 지금은 얼마나 달라진건지,&#160;책을 선물해주신 이웃 분께서는 건강히 잘 계신지 또 궁금하다.&#160;&lt;책을 펴내며&gt;의 8~10쪽을 옮겨본다.&#160;
(...)&#160;
그리고 서울 사당역, 눈길이 가는 곳마다 어지럽게 나붙은 광고들 속에서 '희망드림프로젝트' 같은 광고가 눈에 띈다. "서울형 복지"라는 너스레를 떨며 등장한 신형 복지정책이다. 이 코미디 같은 광고는 '희망 없는 빈곤'이 근본 문제임을 역설하며 희망과 의욕을 줄 대안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희망을 가지기 위해 자기성찰을 통한 자존감 회복이 중요하다며 '희망의 인문학'을 진행한다는 내용의 이 희망드림프로젝트에 관한 소문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자립의지가 있고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이들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도록 하겠다는 이 복지정책은 어쩐지 윤리적인 악몽처럼 느껴진다. 빈곤은 어쨌거나 사회적 현실이다. 빈곤을 그냥 불편이나 불행이라 부르지 않고 빈곤이라 이름 붙이는 것은 그것이 자기 삶 밖에서 들이닥친 현실임을 알린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희망 없는 빈곤'이란 말 속에는 전연 어울리지 않는, 어울려서도 안 되는 차원이 맞붙는다. 희망이 나의 내밀한 삶의 세계에서 비롯된다면 빈곤은 경제적인 생존을 규제하는 바깥 세계의 원리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희망 없는 빈곤'이란 말은 빈곤을 나의 책임과 자율의 세계로 떠넘기며, 빈곤을 낳은 원인을 용케 나에게 돌린다.&#160;
내가 못난 탓에 형편없이 살게 되었다는 생각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발상이 유별나게 다가오는 것은 이제 그런 생각이 어느 한 사람의 변덕스런 자기연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아예 우리의 삶을 규제하고 조직하는 원리로 격상되었기 때문이다. 희망드림프로젝트가 말하는 복지정책은 희망을 품고 자신을 보살필 줄 아는 개인을 내세운다. 그러나 이는 복지정책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주도적인 창의적 학생을 내세우는 교육정책이나 자기의 인적자산 혹은 경력을 적극적으로 관리하라는 고용정책이나 모두 다같이 자신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개인을 겨냥한다. 게다가 자존하고 자립하고 자활하라는 윤리적 다그침 속에는 네 삶의 밖의 세계에 어떤 허튼 소리도 하지 말라는 위협적인 목소리가 깔려 있다. 네 스스로 힘껏 살아보라는 말 속에는 그리고 네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속삭임 속에는, 사실은 절망과 분노는 내색조차 하지 말라는 협박이 숨어있는 셈이다. 만약 그런 소리를 늘어놓는다면 우리는 봇물처럼 쏟아지는 자신에 관한 진단과 힐난, 처방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어쨌거나 지금 악인보다 더 불편하고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제 앞가림을 못하는 사람일 것이다. 칭얼대고 투덜대며 곧잘 분을 터뜨리는 사람보다 우리가 더 성가시게 여기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160;
물론 그런 눈길에는 무엇이 더 정의로운 세계인가를 살피고 판단할 수 있는 자리가 처음부터 빠져 있다. 거기에는 폐소공포증을 불러일으키리만치 오직 자신하고만 대면하고 있는 나의 세계가 존재한다. 내가 타인을 대하는 것은 오직 그가 자신을 존중하는 개인일 때 뿐이다. 그래서 나와 다름없이 자기를 돌보고 책임지는 개인들로서 서로가 서로를 대면하는 세계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라는 생각에서 헤어나기 어렵다. 이런 세계에서 내가 겪는 고통을 발설하는 방식은, 흔히 듣듯이 상처를 받았다는 식의 푸념이다. 거기에는 항의를 제기하는 목소리가 들어설 자리가 별로 없다. 친밀함으로 묶인 관계가 아닌데도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적 현실을 개인들끼리 자신의 꿈과 의지를 실현코자 분투하는 세상처럼 그린다. 가난이나 차별을 비관하여 죽은 이에게서 우리는 가난과 차별을 보기보다는 그의 심약하고 무력한 태도를 먼저 떠올리곤 한다.&#160;
한편 이런 세상에서 나 혹은 타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크게 두 가지 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마치 열병에 들뜬 사람처럼 지나치게 발랄하거나 자신감에 넘쳐 살아가는 이들이 한편에 있다. 다른 한편에 누가 있는지는 굳이 가리킬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아무런 의욕도 없는, 곧잘 자살 충동에 빠지는, 남들이 이루어놓은 성취를 가로채기 일쑤인 쓰레기 같은 삶이 있다. 노동자들의 투쟁이나 빈민들의 항의를 빈정대는 목소리 안에서도 이런 생각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인생을 "날로 먹으려는" 게으름뱅이나 "루저"들이라고 힐난하는 목소리에서 우리가 식별하는 것은 그런 저속한 욕설을 퍼붓는 이들을 덮누르는 자신에 관한 불안일지 모르기 때문이다.&#160;&#160;
이런 생각의 얼개 안에서 타인에 대해 내 삶과 운명을 같이 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는 자각으로 이어지기란 어려운 일이다. 또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타인들을 뚜렷한 모습으로 그려낼 수 있는 힘도 잃어버린다. 투쟁하는 인간의 모습을 대신하는 것은 무력하게 자신의 고통을 증언하는, 마치 자신은 자신의 불행에 관해 무고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데 진력하는 듯한 가난하고 헐벗은 이의 모습이다. 우리는 그것을 거의 매일 이른바 '휴먼다큐' 프로그램을 통해 쳐다본다. 그것을 보며 우리가 되돌려주는 것은 연민에 가득 찬 흐느낌이지 분노와 연대의 감정은 아니다. 그리고 사정은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진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일까. 이 책은 이런 물음을 더 깊이 파헤쳐보기 위해 씌어졌다. &#160;]]></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589/22/cover150/8971993650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1993650</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책의 감옥</category><title>말과사물(인간과그분신)</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3714082</link><pubDate>Wed, 12 May 2010 01:54: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3714082</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0415267374&TPaperId=3714082"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img/noimg_off_b.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40067&TPaperId=3714082"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img/noimg_off_b.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0260482&TPaperId=3714082"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20/90/coveroff/8980260482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160;
&#160;
&#160;<br />
<br />

알라딘에서 &#160;검색하면 한글로 번역된 푸코의&#160;책 중 가장 오래된 것이 이광래의 &lt;말과 사물&gt;이다. 수업 때문에 한참 전에 절판된 이 책을 보는데 정말&#160;뭐랄까. 평소에 아무리 발 번역이라도 한글 번역본이 있는 게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아무리 해도 낯설은 외국말의 한계, 시간절약 등등),&#160;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이 번역본은 정말.. &#160;과연 어디에서 존재 가치를 찾아야 할지 잘 모를 지경이다. 일단 오타가 너무 많다. 심지어 약력에도 철학박사가 천학박사로 표기되는 해프닝이..&#160;첫장을 펴면 보르헤스Borges가 보르주라고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시작, 감성학이 미학으로, 경험의 보편 타당한valable 조건이&#160;유용한 조건으로 번역되면서 칸트가 공리주의자로 둔갑하는 등등..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아래는 원본과 영역본을 대조해서&#160;고쳐본 9장의 요약. 그러나 여기에도 역시 오역이 많을 것 같다;; 워낙 방대하고 어려운 책이기도 하지만,&#160;푸코 전공자나 기타 유능한 분들이 모여서 언젠가 번역에 한번 나서주시면&#160;어떨까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160;&#160;&#160;
&#160;
&#160;
『말과 사물』 9장 인간과 그 분신<br />
<br />
<br />
<br />
<br />
<br />

1. 언어로의 회귀<br />
<br />
<br />
&#160;문학의 출현, 주해로의 회귀, 형식화에 대한 관심souci, 문헌학의 구성 등, 언어가 다양하고 풍부한 모습으로 새로이 출현함에 따라 고전주의적 사유의 질서는 소멸된다. 연속된 표상/재현들을 분석하여 그것의 운동을 포착하고, 분산시켜 영속적인 표에 재배치하는 그물망의 체계, 말mot과 담론discours, 특성과 분류, 등가성과 교환 등으로 구성된 전체계상의 구분은 완전히 소멸되었다.&#160;무너져 가는 최후의 요새는 이 그물망 가운데 최초의 것, 즉 담론이다. 담론은 표상이 하나의 표 위에 전개되도록 해준다. 따라서 담론이 표상 내에서 표상을 질서짓는 최초의 수단으로서 작용하기를 멈출 때, 고전주의적 사유 역시 멈춘다. <br />
<br />
<br />
&#160;고전주의와 근대성/현대성의 문턱seuil은 말mot이 표상과 교차하여 자연발생적인 사물에 대한 그물망(인식)을 제공해주길 멈추었을 때 결정적으로 그어졌다. 언어langage는 일단 표상과 분리되면서부터 오늘날까지 줄곧 분산된 형태로 존재해왔다(문헌학자, 형식화의 추구, 해석의 추구, 기록행위 자체 등). 이러한 산란 상태로 인해, 언어는 노동이나 생명의 운동과 비교할 때 유별난 운명을 갖는다.&#160;박물학의 표가 분산되었을 때 표 안의 생물은 생명의 수수께끼 주위에 다시 모였으며, 부의 분석이 소멸되었을 때 모든 경제 과정은 생산을 중심으로 재편성되었다. 반면 일반문법 - 담론 - 의 통일성이 깨어졌을 때, 언어는 분산된 형태로 나타나 통일성을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철학적 반성은 대상이나 개념적 모형, 근본적 기반 등에 대해 생명 내지 노동의 영역에서 지칠 줄 모르고 탐구해왔지만, 상대적으로 언어에 대해서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철학적 반성의 주요 관심은, 철학의 과업에 대립하는 모든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있었다. 예컨대, 말은 자신을 소외시키는 묵시적 내용으로부터 해방되든가, 유연해지거나 유체화되어야 한다. 언어는 지성entendement의 공간화로부터 해방되어야만, 생명의 운동과 고유한 지속durée propre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1)언어는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비로소 사유의 영역에로 돌아왔다. 문헌학자인 니체가 철학적 과업과 언어에 대한 철학적 반성을 최초로 결합시킨 것은 20세기에 이르러서이다. <br />
<br />
<br />
&#160;언어는 니체가 개척한 철학적-문헌학적 공간 속에서 다양하게 분출된다.&#160;모든 담론의 보편적 형식화, 세계의 전체적 주석에 대한 주제, 기호의 일반 이론, 더 나아가 모든 담론을 하나의 말로, 모든 책을 한 페이지로, 전 세계를 한 권의 책으로 변형시켜 재흡수한다고 하는 주제 등. 그러나 담론의 세분화된 존재를 불가능에 가까운 통일성 내에 가두려는 노력은 말라르메가 죽기 전까지 헌신했던 과업으로서 오늘날까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과업이다. 말라르메의 계획은 기본적으로 니체가 제기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160;니체가 문제로 삼은 것은, 선과 악 자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가 자신에 대해서 Agathos(좋은, 고결한, 용기 있는, 유능한)라고, 타인에 대해서 Deilos(위험한, 나쁜, 폭력적인, 영악한)라고 지칭할 때, 니체가 문제삼은 것은 &lt;말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가?qui parlait&gt;를 인식하는 것이다. 누가 말하는가? 라는 니체의 질문에 말라르메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말하고 있는 것은 그 고독에 있어 그 섬세한 떨림에 있어, 그 무에 있어 말의 의미가 아니라 말의 수수께끼같은 위태로운précaire 존재 자체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니체가 결국 말하고 질문하는 주체, 즉 Ecce homo로서 자기 자신에 토대를 두어야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누가 말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계속한 데 비하여, 말라르메는 담론이 자신의 고유한 언어로부터 스스로를 지움으로써 담론 자신에 의해 구성된 위대한 책Livre의 순수한 의식cérémonie에서 집행자로서만 모습을 드러내길 희구한다2). 이에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제기된다. 언어란 무엇인가? 기호란 무엇인가? 언어와 존재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는가? 아무 것도 말하지 않지만 침묵하지도 않는 문학이라고 불리는 언어는 무엇인가? <br />
<br />
<br />
&#160;오늘날 제기되는 이 모든 질문들은 니체의 질문과 말라르메의 답변 사이를 결코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질문은 19세기 초 담론의 법칙이 표상으로부터 유리되고 언어의 존재 자체가 파편화됨으로써fragmenté 가능해진 질문이며, 니체와 말라르메에 의해 사유가 급격하게 언어라는 유일하고 난해한difficile 존재에로 되돌려졌을 때 불가피하게 된 질문이다. 언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이야말로 니체가 인간과 신을 동시에 죽이고 회귀le Retour와 더불어 신의 다양한 새로운 빛을 약속했을 때 그가 모색하던 것이 아닐까?&#160;언어가 문헌학적 객관성으로 이행함과 동시에 일어났던 언어의 파편화는 고전주의적 질서가 파괴되면서 초래된 가장 최근의 명백한 결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경우 언어의 상실된 통일성을 복구하는 것은 19세기에 진행된 어떤 사유의 결말을 짓는 것인가 아니면 19세기의 언어와 양립할 수 없는 형식을 모색하는 것인가? 언어의 산란 상태dispersion는 담론의 소멸이라고 해도 좋을 고고학적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 나는 이러한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잘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그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는지는 분명히 안다. 이러한 대의를 나는 칸트나 헤겔보다도 퀴비에, 보프, 리카도로부터 더 분명하게 배웠다.<br />
<br />
<br />
<br />
<br />
<br />
2. 왕의 자리<br />
<br />
<br />
&#160;우선 우리는 하나의 담론이 끝나는 곳과 아마도 노동이 다시 시작되는 곳이 있다고 말해야 한다. 말mot의 지위를 정당화하기란 어려운데, 이는 마치 극에서 절박한 장면을 해결하는 등장인물un coup de théâtre artificiel/deus ex machina을 설정하는 것처럼 고전주의 시대의 표상의 거대한 상호작용에서는 나타난 적이 없는 역할을 돌연히 등장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상호작용의 법칙을 &lt;시녀들&gt;에서 찾아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그림 속에는 표상이 매 계기마다 표상되고 있기 때문이다(화가, 파레트, 캔버스의 표면, 벽에 걸린 그림과 그림을 보는 감상자들, 거울). 그림 속의 모든 선들, 특히 반영 중앙부에 나오는 모든 선들은 표상되고 있으나 그림 속에 부재한 어떤 것을 향하고 있다. 그것은 표상된 화가가 자신의 화폭에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대상이지만, 또한 동시에 주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화가가 자신을 표상할 때 화가의 눈앞에 있는 대상이 바로 그 자신이기 때문이며, 그림 속에 묘사된 시선이 화가 자신의 실제의 위치인 동시에 왕이 점하고 있는 허구의 지점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이며, 화가와 왕이 제한없이 교대로 위치하는 애매한 장소의 점유자가 바로 자신의 시선으로써 그림을 하나의 대상, 즉 그 본질적 부재manque의 순수한 표상으로 바꾸는 감상자이기 때문이다. <br />
<br />
<br />
&#160;고전주의 시대 사유에 있어, 표상이 그 자신에 대해 존재함과 동시에 표상 속에서 자신을 표상하는 인물은 자신을 어떤 이미지 내지 반영reflet로서 알아본다reconnaissant. &lt;하나의 표/그림tableau&gt;에서 교차하는 모든 선들을 한데 묶는 인물인 그는 결코 그 표 내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 18세기 말 이전에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은 기껏해야 생명력, 노동 생산력, 언어의 역사적 두께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은 지식savoir이라는 조물주가 겨우 200년 전에야 창조했던 극히 최근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160;그러나 인간은 너무나 빨리 성숙하였다. 물론 일반문법(기억, 상상력), 박물학(종, 속), 부의 분석(필요, 욕구) 모두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 존재를 파악하는 방식이라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인간 자체에 대한 인식론적 의식이 없었다. 고전주의 시대 에피스테메는 어느 면에서는 인간에 고유하고 종별적인spécifique 영역을 따로 다루지 않는 선들을 따라 분절되었다s'articule. <br />
<br />
<br />
&#160;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에 있어서는 &lt;자연nature&gt;의 기능과 &lt;인간본성nature humaine&gt;의 기능이 서로 대립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자연은 실재의 무질서한 병치를 통해 질서화된 존재의 연속체 속에서 차이différence를 나타나게 하는 것이고, 인간 본성은 이미지의 진열을 통해 무질서한 표상의 연쇄 속에 동일성l'identifique을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립관계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 대립을 통해 인간본성과 자연과의 적극적인positif 관계가 성립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사실상 인간본성과 자연은 동일한 요소(동일자, 연속성, 지각되지 않는 차이, 단절없는 연속)와 함께 활동하며, 끊임없는 틀trame에 대해 분리가능한 동일성과 가시적 차이들을 배열하도록 하는 일반적 분석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인간본성과 자연 가운데 어느 한쪽이라도 없으면 이 작업은 성공할 수 없다. 표상의 연쇄는 이중화 능력(상상과 기억souvenir 속에서, 비교하는 다양한 주의 속에서)에 의해 무질서한 지면 밑에서 존재들의 단절없는 연속을 재발견한다. 이로써 인간은 세계의 표상을 표상할 수 있는 힘을 지닌 담론의 지배력souveraineté 하에서 세계를 포괄할 수 있게 된다. 말하는 행위, 아니 오히려 (고전주의 시대 언어 경험에서는 가능한 한 본질적인 것에 접촉하려 하기 때문에) 명명nommer 행위 속에서 인간본성은 사유의 선형적 연속을 부분적으로 다른 존재들의 연속적인 표table로 변형시킨다. 인간본성은 담론을 통해 자체의 표상을 이중화하는, 즉 이 담론이야말로 인간본성과 자연을 연결하는 것이다. 반대로 존재의 연쇄는 자연의 작용jeu에 의해 인간본성과 연결된다. 그리하여 거대하고 끝없는 연속면은 구별되는 특성들과 얼마간 일반적인 특징들과 동일화의 표시들, 결국에는 말mot 속에서 분명하게 각인된다. 존재의 연쇄는 담론이 되며, 그럼으로써 존재의 연쇄는 인간본성이라든가 표상의 계열série과 관련되는 것이다.&#160;<br />
<br />
<br />
&#160;이로부터 거대한 이론적 결과들이 수반된다. 고전주의 시대의 사유에서 인간이 자연 내에서 점유하고 있는 위치는 여타의 존재들처럼 자연을 매개로 생득권droit de naissance으로서 부여된 것이 아니고, 지식savoir의 메커니즘과 그 기능에 의해서였다. 따라서 자신의 고유한 권위를 지닌 일차적 실재로서, 난해한 대상이자 가능한 모든 인식의 지고한 주체인 인간의 모습은 자연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경제학, 문헌학, 생물학의 법칙에 따라 살고 말하고 일하는 개인에 관한 근대적 테마, 오늘날의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여 이 테마가 인문과학의 등장과 관련된 이 테마는 고전주의 시대의 사유에서는 배제되었다. 표상과 존재가 만나는 장소, 자연과 인간본성이 교차하는 장소에서 고전주의적 사유가 나타내고 있던 것은 바로 담론의 힘이다. 즉 표상하고 있는 한에서의 언어langage이다. 여기서 언어란 사물들이 말의 투명성 속에서 분명히 드러날 수 있도록 명명하고, 재단하며découpe, 조합하고, 합성 또는 분해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언어는 지각의 연속을 하나의 표로 변형시키며, 존재의 연속체를 특성들caractères로 재단한다. 담론이 존재하는 바로 그곳에서 표상들은 진열되고 병치되는 반면, 사물들은 특성에 따라 분류되고 분절화된다. 고전주의 시대의 언어의 심오한 소명은 항상 어떤 표/그림tableau을 그리는 것이었다.&#160;그 표/그림은 항상 투명해지기 위해서만 존재했다. 16세기에 그 그림은 저 은밀한 일관성consistance에 의해 해독되어야 할 하나의 말로 농축되었고, 세계의 모든 사물과 관련되었었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이러한 일관성은 상실되었지만, 그 그림은 아직 오늘날 우리가 문제삼고 있는 다양한 실존을 획득하지는 못했다. 요컨대 고전주의 시대의 담론이란, 존재가 정신의 시선regard에 표상되고, 표상이 존재를 존재의 진리 속에서 드러내기 위해, 표상과 존재가 반드시 통과해야 할 반투명한 필연성nécessité에 불과했다. 고전주의 시대의 경험에 있어서 사물과 사물의 질서에 대한 인식 가능성은 말의 지상권souveraineté을 거쳐야만 한다.&#160;이 시기의 말들은 르네상스 시대처럼 해독되어야 할 표시도 아니었고, 실증주의 시기에서처럼 충실하고 제어가능한 도구도 아니었다. 그보다 말들은 존재가 현시되고se manifestent 표상이 질서화되기 위한 기초로서 무색의 격자réseau incolore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로부터 고전주의 시대의 언어에 대한 반성은 비록 그것이 부의 분석이나 박물학과 동등한 권리를 갖고 일반적 배치disposition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을 뿐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부의 분석이나 박물학에 대해 길잡이 역할rôle recteur을 수행했던 것이다. <br />
<br />
<br />
&#160;그러나 본질적인 결과는 표상과 사물의 공동 담론discours commun이자 자연과 인간 본성이 교차하는 장소인 고전주의적 언어가 &lt;인문과학&gt;이 될 만한 것을 거의 절대적으로 배제했다는 것이다. 서구 문화 내에서 고전주의 시대의 언어가 남아 있는 한, 인간의 실존이 결코 그 자체로는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언어 속에는 표상과 존재가 함께 묶이기 때문이다. 17세기에 &lt;나는 생각한다&gt;와 &lt;나는 존재한다&gt;를 연결해주었던 담론은 가시적인 형태로 고전주의 시대의 언어의 본질을 간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담론 속에서 결합되었던 것은 바로 표상과 존재였기 때문이다. &lt;나는 생각한다&gt;에서 &lt;나는 존재한다&gt;로의 이행passage은 명증성évidence의 빛을 근본으로 하여 하나의 담론 속에서 완성되었다. 이 담론의 영역과 기능은 바로 스스로 표상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을 나란히 분절화하는 데에 있었다. 이러한 이행에 대한 반론이 성립되고 정당한 권리를 지니려면, 그 반론은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담론 - 표상과 존재의 결합을 자신의 존재 이유로 갖지 않는 담론 - 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 표상을 우회contourne할 수 있는 문제틀problématique만이 그 같은 반론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전주의적 담론이 존재하는 한 코기토에 함축된 어떠한 문제 제기<br />
<br />
<br />
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160;&#160;<br />
<br />
<br />
<br />
<br />
<br />
3. 유한성의 분석<br />
<br />
<br />
&#160;박물학이 생물학이 되고 부의 분석이 경제학이 되었을 때, 무엇보다 언어에 대한 반성이 문헌학이 되었을 때, 그리고 존재와 표상의 공통 장소였던 고전주의적 담론이 소멸되었을 때, 인간은 그러한 고고학적 변동의 심층적 운동 속에서 인식의 객체인 동시에 주체라는 애매한ambiguë 위치에 등장한다.&#160;인간은 종속된 군주이자 관찰되는 감상자로서 &lt;시녀들&gt;에서 왕에게 할당된 위치에 등장하는 것이다. 그 빈 공간 속에서 모든 등장인물들(모델, 화가, 왕, 감상자)은 이렇게 요구하는 듯하다. 표상의 모든 공간이 어떤 육체의 시선regard de chaire에 관련되어야만 한다고 말이다. 퀴비에와 그 동시대인들은 생명vie이 생물의 가능 조건을 제공하기를 요구했고, 리카도는 노동이 교환, 이윤, 생산의 가능 조건을 제공하기를 요구했다. 최초의 문헌학자들 역시 언어의 역사적 심층에서 담론과 문법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이는 표상이 생물, 필요, 말 등을 위한 기원의 장소 내지 진리의 원초적 거점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했음을 뜻한다.&#160;따라서 표상은 생물, 필요, 말과의 관계 속에서 파생된 하나의 결과, 즉 그것들을 파악하고 재구성하는 의식 내에서 그것들의 다소 흐릿한 보증인répondant/counterpart에 불과하게 된다. 이제 인간이 사물에 대해 스스로 만들어낸 표상은 더 이상 사물의 질서화된 표를 하나의 지배적 공간 내에서 전개할 필요가 없게 된다. 표상은 인간이라는 경험적 개체에 있어서는 사물 자체와 사물의 내적 법칙에 속하는 질서의 현상phénomène 혹은 외관apparence에 불과하다. 이제는 존재들이 표상 속에서 현시하는 것은 그것의 동일성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해 정립된 외적 관계에 불과하다. 나름대로 고유한 존재를 소유하고 스스로 표상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간이 생물, 교환대상, 말에 의해 비워진 공간에 모습을 나타내자, 생명, 교환대상, 말들은 지금껏 자신들의 위치였던 표상을 떠나 사물의 심층으로 물러나 생명, 생산, 언어의 법칙에 따라 좌우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것들의 와중에서 인간은 그 법칙들에 의해 형성된 원환 속에 갇혀 그것에 의해 지시되고 요구를 받게 된다. 우선 인간은 노동, 생명, 언어의 지배를 받으며, 인간의 구체적 존재는 그것들 속에서 규정된다. 즉 인간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생물이요, 생산의 도구요, 자신에 선행하는 말들의 운반매체véhicule라는 존재 형태로 발견되는 것이다. 인간이 소유한 지식이란 그에 대해 외적이며 이 모든 내용들은 인간에 선행하여 인간을 포위하고 있으며, 인간을 자연의 한 대상에 불과한 것 또는 역사 속에서 지워지게 될 얼굴에 불과한 것으로 여긴다. 인간의 유한성은 매우 강압적인 방식으로 지식의 실증성에 의해 밝혀졌다. 우리는 뇌의 해부, 생산 경비의 메커니즘, 인도-유럽어의 활용체계를 알고 있듯이 인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br />
<br />
<br />
&#160;그러나 유한성에 대한 최초의 발견은 실제로는 불안정하다. 유한성은 결코 스스로에 의해 고정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사유체계에 따른다면, 유한성이란 그것이 부정하는 무한성l'infini을 전제하는 것이라고 상정될 수 없을까? 종의 진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생산과 노동의 형태는 여전히 수정되고 있다. 또 인간이 역사적 언어가 지니는 과거의 불투명성을 충분히 해소할 만한 기호체계를 발견하지 못하리라는 법도 없다. 실증성 속에서 이 유한성은 실제로 무제한성l'indéfini이라는 역설적인 형식 속에서 접근되고 있다. 이 유한성은 한계limite의 엄격성을 지적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비록 경계borne는 없지만 그렇다고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닌 진전cheminement의 단조로움을 가리키는 것이다.&#160;그런데 인간의 경험에는 육체corps가 주어졌는데, 그 육체는 다름아닌 인간 자신의 육체로서, 그것은 애매한 공간의 한 단편fragment이지만, 자신의 고유하고 환원불가능한 공간성을 사물의 공간에 대해 분절되는 것s'articule이다. 이 육체라는 동일한 경험에 욕망désir이 주어짐으로써 모든 사물의 가치 및 상대적 가치가 결정되는가 하면, 거기에 어떤 언어가 주어짐으로써 모든 담론이 가능해진다. 말하자면 이는 인간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배우도록 해주는 이러한 실증적 형식들 각각은 그 고유한 유한성을 배경으로 해서만 인간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유한성은 결코 가장 완벽하게 정화된 실증성의 본질이 아니라, 실증성의 출현을 가능하게 하는 기초에 불과하다. 모든 경험적 실증성과 인간실존의 구체적 한계로 지적될 수 있는 모든 것의 기초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유한성을 발견한다. 그 유한성은 육체의 공간성, 욕망의 간극béance, 언어의 시간 등으로 표시된다.&#160;그러나 그것은 앞에서의 유한성과 근원적으로 다른 것으로서, 이 경우에 한계는 외부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규정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여기서의 유한성은 인간 자체의 고유한 사실에 의존하며, 모든 구체적 한계의 실증성을 개방시키는 근원적인 유한성으로서 나타난다. <br />
<br />
<br />
&#160;그러므로 경험성empiricité의 중심부에서는 유한성에 대한 분석으로의 필연적인 상승이나 하강이 지시된다. 인간은 유한성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가 무한하지 않음을 지적하는 모든 형식들을 그의 실증성 속에서 정초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분석이 보여준 인간의 존재 양태의 첫 번째 특징, 인간의 존재 양태가 완전히 전개될 때 공간은 반복répétition의 양태-실증적인 것le positif과 근본적인 것le fondamental 사이의 동일성과 차이의 양태-일 것이다. 경험의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에 이르기까지 유한성은 스스로 대답한다se réponde. 즉 이 유한성은 &lt;동일자Même&gt;의 형상figure 내에서 실증성과 그것의 기초와의 동일성과 차이에 불과하다. 어떻게 근대적 반성이 고전주의적 지식에 의해 질서화된 표의 형식에서 그 정점인 표상의 진열을 지나 어떤 &lt;동일자&gt;에 대한 사유 - 여기서는 차이가 동일성과 같은 것이다 - 으로 향하게 되었는가는 명백하다. 이 유한성의 분석 전체 - 이것은 근대적 사유의 운명과 밀접히 관련된다 - 가 전개될 장소는 바로 근본적인 것 안에서 실증적인 것의 반복에 의해 열린 이 거대하고도 좁은 공간의 내부이다. 우리는 초월론적인 것이 경험적인 것을 반복하고, Cogito가 사유되지 않는 것impensé을 반복하며, 기원origine으로의 회귀가 후퇴recul를 반복하는 현상을 볼 수 있는 장소도 바로 그곳이다. 고전주의적 철학으로 환원될 수 없는 &lt;동일자&gt;에 대한 사유가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는 장소도 바로 출발점인 그곳이다. <br />
<br />
<br />
&#160;유한성의 관념이 명백히 드러나기 위해 과연 19세기까지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도 가능하다. 그러니까 17~8세기의 사유에 있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동물적 생존을 영위토록 하고, 노동하도록 했으며, 불투명한 말들로 사유하게 한 것은 역시 인간의 유한성이었다. 인간의 한계, 즉 무한에로의 부적합성inadéquation à l'infini은 경험적 내용의 존재와 이 내용의 직접적 인식의 불가능성을 동시에 설정했다. 그러므로 무한성에 대한 부정적 관계 - 창조로도, 타락으로도, 육체와 영혼의 결합으로도, 무한한 존재 내의 규정détermination으로도, 총체성에 대한 특수한 관점으로도, 표상과 인상impression의 결합으로도 개념화할 수 있는 - 는 인간의 경험과 그로부터 획득하는 지식에 선행하는 위치를 점하게 된다. 유한성(무한에 대한 부정적 관계)은 회귀라든가 순환도 없이 단 한번의 운동으로 육체, 필요, 말의 실재를 위한 기초와 그것들을 절대적 인식 내에 지배할 수 없는 불가능성의 기초를 제공했던 것이다. 19세기 초에 형성된 경험은 유한성의 발견을 무한성의 사유 내부에 위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지식savoir fini에 의해 유한한 실존의 구체적 형식으로서 소여되는 경험들의 핵심에 위치시킨다. 고전주의 시대의 사유에 있어서는 유한성(무한성의 기초 위에서 실증적으로 구성된 어떤 규정)은 소극적négative 형식들(육체나 필요나 말이나 이 셋에 대해 얻을 수 있는 제한된 지식)에 설명을 제공하는 반면에, 근대적 사유에 있어서는 생명, 생산, 노동(이것들은 자체에 고유한 실존과 역사성 및 법칙을 갖고 있다)의 실증성이 그 셋의 소극적 상호관계로 인한 인식의 제한적 성격에 하나의 기초를 제공하고 있다. 역으로 인식의 한계는 생명, 노동, 언어가 무엇인지에 대한 지식의 가능성을, 항상 제한된 경험 속에서이기는 하지만, 실증적으로positivement 제공한다. 이러한 경험적 내용들이 표상의 영역 내에 자리잡고 있는 한, 무한성l'infini의 형이상학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수적이기도 하다. 무한성의 이념iée과 유한성 내에서 무한성의 규정이라는 관념이 경험적 내용이 인간의 유한한 형식임과 동시에 표상 내에서 그 위치와 진리를 갖도록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적 내용들이 표상으로부터 유리되고 자신의 존재 원리를 스스로의 내면에서 갖게 되었을 때, 무한성의 형이상학은 무용해졌다. 이때부터 유한성은 그 스스로에게만(내용의 실증성으로부터 인식의 한계limitation로, 인식의 제한된 실증성으로부터 내용에 대한 제한된borné 지식에로) 끊임없이 참조한다renvoyer à ell-même/refer back to itself. 이로써 서구의 사유의 장champ 전체는 전도된다. 이전에는 표상 및 무한성으로 구성된 &lt;형이상학&gt;과 생물, 인간의 욕망, 언어 상의 말들에 대한 &lt;분석analyse&gt;과의 사이에 상호관계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바로 그 장소에서 우리는 유한성과 인간 실존에 대한 &lt;분석론analytique&gt;과 그것에 대립(비록 상호연관적 대립이지만)하면서 생명, 노동, 언어의 형이상학을 구성하려는 하나의 영속적 유혹이 형성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러한 유혹은 즉시 반박되는 것, 즉 내부로부터 잠식되어 가는 유혹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이때의 형이상학은 인간의 유한성의 규모로 축소된 형이상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160;따라서 근대적 사유는 자신에게 고유한 형이상학의 유혹에 이의를 제기하며, 근대적 사유가 유한성에 대한 분석으로서 가치를 지닌 한에서 생명, 노동, 언어에 대한 반성은 형이상학의 종언을 표현함을 보여주려 한다. 즉 생명의 철학은 형이상학을 환상의 장막이라고, 노동의 철학은 형이상학을 소외된 사유와 이데올로기라고, 언어의 철학은 형이상학을 문화상의 에피소드라고 각각 비난한다. <br />
<br />
<br />
&#160;그러나 형이상학의 종언은 서구 사유에서 발생했던 훨씬 더 복잡한 사건의 부정적 측면에 불과하다. 이 대사건이란 다름아닌 인간의 출현이다.&#160;형이상학의 영역을 그토록 축소시킨 것은 결코 인간의 실증성의 부족misère/lack이 아니다. 단순히 외관에서만 보면, 근대성의 출발점은 인간이 자신의 유기적 조직organisation 내에 존재하기 시작했을 때이고, 인간이 노동의 중심에 존재하기 시작했을 때이며, 인간의 사유가 언어의 주름pli 속에 자리잡기 시작할 때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면에서 보면 유한성이 끊임없이 자기에로의 참조 속에서 사유되었을 때, 이미 우리의 문화는 근대성의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는 문턱을 넘어섰던 것이다. 물론 지식의 다양한 분과들의 차원에서, 유한성은 항상 구체적 존재로서 인간에 의거해, 인간의 실존에 할당될 수 있는 경험적 형식에 의거해 지적되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지식의 다양한 분과들의 일반적이고 역사적인 선험a priori를 발굴하려는 고고학적 차원에서는, 근대적 인간 - 육체적이며 노동하며 말하는 존재로서 지시될 수 있는 - 은 유한성의 형태figure로서만 가능할 뿐이다. 근대 문화는 그 자체에 의거해서, 유한한 것에 관해 사유하기 때문에, 인간에 관해 사유할 수 있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와 고전주의 시대의 합리주의가 인간에게 세계 질서 내에서의 특권적 지위를 부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양자는 모두 인간에 대해서는 사유할 수 없었다. <br />
<br />
<br />
&#160;<br />
<br />
<br />
4. 경험적인 것과 초월론적인 것<br />
<br />
<br />
&#160;유한성의 분석론에서 볼 때 인간은 낯선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체un étrange doublet empirico-transcendantal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일체의 인식connaissance을 가능하게 하는 것에 관한 인식을 그 자신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제 분석의 장소가 표상이 아니라 유한 속에 있는 인간이므로 문제되는 것은 경험적 내용에서 출발하여 인식의 조건을 밝히는 일이다.&#160;근대적 사유의 일반적 움직임에서는 이 경험 내용이 내성introspection 또는 다른 어떤 분석 형태를 통해 발견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의 근대성의 경계선은 인간 연구에 객관적 방법을 적용하려는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l'homme이라고 불리는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체를 구성함으로써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 종류의 분석이 탄생한다. 하나는 육체corps의 공간 내에서 조직되는 것으로서, 일종의 초월적 감성학esthétique transcendantale으로서 기능하고 있는 분석이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인식은 해부학적-생리학적 조건을 갖고 있다든가, 인식의 형태들은 육체의 독특한 기능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든가 하는 것들이 발견된다. 요컨대 인간의 인식에는 &#160;하나의 &lt;본성nature&gt;이 존재하는데, 이 본성은 인식의 형태를 결정할 뿐 아니라 동시에 그 인식의 경험적 내용 가운데에서 명백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분석은 얼마간 오래되고 극복되기 힘든 인간의 가상illusion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일종의 초월적 변증학dialectique transcendantale과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분석이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알려진 사실은 다음과 같다. 즉 인식은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조건을 갖고 있으며, 인식은 인간들 간에 형성된 관계 및 때와 장소에 따라 취하는 특수 형태와 무관하지 않다. 요컨대 인간의 인식에는 &lt;역사histoire&gt;가 있는데 이 역사는 경험적 지식을 통해 주어질 수 있으며 그 경험적 지식의 형태를 결정할 수 있다.&#160;<br />
<br />
<br />
&#160;위의 두 종류의 분석은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더구나 양자는 모두 하나의 분석론analytique 혹은 &lt;주체의 이론&gt;3)으로부터 면제되며, 오직 자기 자신에 의거할 수 있기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초월론적 반성으로서 기능하는 것은 내용 그 자체contenus eux-même이기 때문이다.&#160;실제에 있어서 인식의 본성 내지 역사에 대한 탐구는 일종의 비판을 전제하는데, 이 비판 과정에서는 비판의 고유한 영역을 경험적 지식의 내용에까지 끌어내릴 것이 요구된다. 따라서 이 비판은 순수 반성활동이 아니라 다소 모호한obscurs 일련의 분할이 낳은 결과이다. 즉 이 분석은 기초적이고 불완전하고 불균형한 인식과, 적어도 안정되고 확정된 형태로 형성된 인식을 구별한다(이 분석이 인식의 자연적 조건에 대한 연구를 가능하게 한다). 또한 이 분석은 가상과 진리, 이데올로기적 망상chimére과 과학적 이론을 구분한다(이 분석이 인식의 역사적 조건에 대한 연구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이 분석보다 더 모호하면서도 더 근본적인 분석, 즉 진리 그 자체에 대한 분석이 있다. 실제로 객체objet의 질서에 속하는 진리 - 육체와 기초적 지각을 통해 확고하게 형성된 진리요, 환상이 분쇄되고 역사가 소외되지 않은 상태로 출현하는 진리 - 가 존재하는가 하면, 반면에 담론의 질서에 속하는 진리 - 인식의 본성과 인식의 역사로 하여금 참된 언어에 입각할 수 있도록 해주는 진리 - 도 존재함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진실된 담론의 양태는 여전히 모호한 채로 남아있다. 따라서 다음의 둘 중 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즉 한편으로는, 이 참된 언어는 경험적 진리 속에서 자신의 토대와 모델을 발견하려 하는데, 경험적 진리는 자신의 발생génese을 자연과 역사 속에서 추적하고 있다. 여기서 실증주의적positiviste 형태의 분석이 이루어진다(객체의 진리는 그것의 형성을 기술하는 담론의 진리를 규정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참된 담론은 자기가 규정한 자연과 역사를 지니는 진리를 기대한다. 그리하여 종말론적eschatologique 형태의 담론이 있게 된다(철학적 담론의 진리는 형성 중에 있는 진리를 구성한다).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양자택일이 아니라, 초월론적인 것의 차원에서 경험적인 것의 가치를 끌어내고자 하는 모든 분석에 내재하는 동요이다. 꽁트와 마르크스는 종말론(인간의 담론에서 발생한 객체에 입각한 진리로서의)과 실증주의(객체의 진리에 의거해서 규정된 담론의 진리로서의)가 고고학적으로 분리불가능indissociable함을 확인했다. 즉 경험적인 동시에 비판적이고자 하는 담론은 실증주의적이며 종말론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은 환원되고 약속된 진리로서 나타난다. 또한 비판철학 이전의 소박함이 분할되지 않은 채로sans partage 지배한다.&#160;<br />
<br />
<br />
&#160;이러한 까닭에 이 소박한 담론으로부터 출발한 근대적 사유는 환원의 질서도 아니요, 약속의 질서도 아닌 담론의 장소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 담론은 경험적인 것과 초월론적인 것을 분리하려고 하면서도 양자를 항상 지향하고 있다. 또한 이 담론은 인간을 하나의 주체로서, 경험적으로 획득되었지만 가능한 한 근원에 가까이 접근한 인식의 장소로서, 그러한 내용들에 직접 현시되는 순수형식으로서 분석할 수 있도록 해주는 담론이다. 요컨대 이 담론은 의사-감성학과 의사-변증학에 대해 주체의 이론 안에서 기초를 제공하는 동시에, 육체적 경험과 문화적 경험 모두가 뿌리박고 있는 제3의 매개항 안에서 양자를 분절화하는 분석론의 역할을 하는 담론이다. 근대적 사유에서는 그같이 복잡하고, 그처럼 과잉결정되었으며surdéterminé, 그처럼 필수적인 역할이 체험된 것le vécu/actual experience에 대한 분석4)에 의해 수행되었다. 사실상 체험된 것이란 경험expérience에 대해 모든 경험적 내용이 주어지는 공간인 동시에, 경험 내용 일반을 가능하게 해주며 경험 내용의 일차적 뿌리enracinement를 지시해주는 근원적 형식forme originaire이기도 하다. 체험된 것은 또한 육체의 공간과 문화의 시간의 사이, 자연의 규정과 역사의 무게 사이를 소통하도록 하는 것이다.&#160;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육체와 자연이 (육체를 통해) 환원불가능한 공간성의 경험 속에 자리잡아야 하며, 무엇보다 역사의 운반자인 문화가 자신의 침전된 의미signification의 직접성 속에서 경험되어야 할 것이다. 근대적 반성에서 어떻게 체험된 것에 대한 분석은 실증주의와 종말론에 대한 근본적 반론으로서 확립되었는가, 즉 어떻게 그것은 초월론적인 것과 관련된 망각된 차원을 복구하려고 노력했는가, 어떻게 그것은 진리란 오직 경험적인 것에로만 환원된다는 소박한 담론을 추방했는가를 이해하기란 매우 쉬운 일이다. 그러나 체험된 것에 대한 분석은 혼합된 성격nature mixte을 가진 담론이다.&#160;이 분석은 애매한 지층을 향하고 있는데, 그 지층은 구체적인 지층이기도 하지만, 소박함의 토대에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사물의 실증이 제거된 지층이다. 또한 이 분석은 육체에 의해 윤곽지어지는 근원적 경험에서 출발하여 자연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가능한 객관성을 분절화하려 한다. 또 경험 내에서 은폐됨과 동시에 드러나는 의미론적 두께épaisseur semantique에서 출발하여 한 문화의 가능한 역사를 분절화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이 분석은 인간에 있어 경험적인 것이 선험적인 것의 가치를 갖도록 하는 시도가 이루어지면서 발생한 긴급한 요구를 주의깊게 완수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양자가 정반대의 외관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증주의적 내지 종말론적 형태의 사유(마르크스주의는 그 첫 번째 서열이다)와 현상학에 의해 고무된 반성을 연결시키는 그물이 얼마나 조밀하게 짜여 있는가는 분명하다. 최근에 양자가 &lt;접근rapprochement&gt;하게 된 것은 완만한 타협의 질서를 통한 것이 아니었다5). 즉 고고학적 배치의 차원에 있어 양자는 인간학적 공준postulat anthropologique이 성립한 순간, 즉 인간이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체로서 출현했던 순간부터 서로를 필요로 하고 상호 간에 필수적인 것이었다.&#160;&#160; &#160;<br />
<br />
<br />
&#160;그러므로 실증주의와 종말론의 진정한 논쟁점은 체험된 것으로의 회귀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만일 그 같은 논쟁이 벌어진다면, 이는 이상하게 보이는 다음의 질문으로부터 출발할 것이다. 인간은 참으로 실존하는가? 우리는 인간에 관해 최근의 알려진 내용에 가려져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세계나 세계의 질서나 단순한 존재로서 인간은 실재했지만 인간 그 자체는 실존하지 않았던 시기 - 이는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 를 더 이상 기억해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니체의 사유가 인간은 이제 &lt;약속과 위협Promesse-Menace/promise-threat&gt;이라는 절박한 사건의 형식6)으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초인surhomme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고 주장할 때, 왜 그 사유가 우리를 그토록 혼란시킬 수 있는 힘을 가졌었고 아직도 여전히 갖고 있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회귀retour의 철학에 있어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은 오래전부터 사라져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과 인간에 대한 우리의 근대적 사유, 우리의 휴머니즘은 모두 인간의 비존재라는 위협적인 굉음을 들으며 조용히 잠들어있다는 사실이었다.&#160;우리는 우리에게 속하며 인식을 통해 우리에게 세계의 진리를 열어주는 유한성에 묶여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묶여 있는 곳은 호랑이의 등이 아닐까? <br />
<br />
<br />
<br />
<br />
<br />
5. 코기토와 사유되지 않은 것l'impensé<br />
<br />
<br />
&#160;실로 인간이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체의 위치에 있다면, 즉 인간이 역설적 형상이라면, 이때 인간은 하나의 코기토라는 직접적이며 지고한 투명성 속에 있을 수 없다. 또한 인간은 자기의식에로 정당하게 인도되지도 인도할 수도 없는 어떤 객관적 불활성l'inertie objective내에 거주할 수도 없다. 인간은 항상 개방되어 결코 결정적 한계가 주어지지 않으며, 끊임없이 답사되는 차원을 지닌 존재 양태이다. 경험적-초월론적 이중체로서 인간은 또한 오인méconnaissance의 장소이기도 하다. 근대적 형식의 초월론적 반성은 자연과학에서가 아니라, 칸트의 경우처럼 인간을 항상 자기 인식에로 소환하는 &lt;알려지지 않은 것non-connu&gt;의 실존 가운데서 자신의 중요성을 발견한다.&#160;이제는 이전처럼 자연에 대한 경험이 어떻게 필연적 판단을 발생시키는가 하는 것이 문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떻게 인간은 사유되지 않은 것을 사유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된다. 어떻게 인간은 생명, 노동, 언어의 주체일 수 있는가?&#160;여기서 칸트의 질문에 대한 4중의 전위가 이루어졌다. 이제는 진리가 아니라 존재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 인식의 가능성이 아니라 원초적 오인의 가능성이, 과학에 대한 철학이론들의 기초되지 않은non fondé/unaccountable 성격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를 알아볼 수 없는 그 설명될 수 없는 경험의 전 영역에 대한 명석한 철학적 의식에로의 회복이 문제되었던 것이다. <br />
<br />
<br />
&#160;초월론적인 질문에 대한 이러한 전위에서 출발함으로써 오늘날의 사유는 코기토라는 주제를 부활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사유되지 않은 것의 존재 불가능성을 발견했던 것은 역시 오류, 착각, 꿈과 광기, 근거 없는 생각의 모든 경험을 토대로 했던 것이 아닌가? 근대의 코기토는 우리의 초월론적 반성이 칸트적 분석과 구별되는 그만큼, 데카르트의 코기토와도 구별된다. 말하자면 데카르트는 사유를 우리가 오류 내지 착각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일반적인 형식으로 드러냄으로써 모든 사유를 무해하게 만드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반면에 근대적 코기토에 있어서, 우리의 관심은 자기에 대해 현전하는 사유pensée présente à soi와 사유 내에서 사유되지 않은 것non-pensée에 뿌리를 둔 것과를 분리 내지 연결하는 거리distance에 가장 커다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근대적 코기토는 사유의 내부에서, 주위에서, 하부에서 사유되지 않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사유에 낯선 것도 아닌 모든 것에 대한 사유의 분절화를 가장 명료한 형식 하에 가로지르고 이중화하며 재활성화해야 한다. 따라서 근대적 코기토란 모든 사유가 어떻게 여기 밖의 다른 장소hors d'ici, 즉 그 자체에 매우 근접해 있는 어떤 장소에 머무를 수 있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새롭게 던지는 의문이라고 할 수 있다.&#160;<br />
<br />
<br />
&#160;근대적 코기토에 고유한 이 이중의 운동은 왜 &lt;나는 생각한다je pense&gt;가 &lt;나는 존재한다je suis&gt;라는 명증évidence으로 인도될 수 없는가를 설명해준다. 가연 나는 내가 말하는 이 언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과연 나는 내 손으로 수행한 이 노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과연 나는 내가 나의 내면에서 깊이 느끼고 있는 이 생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다.&#160;분명한 것은 코기토가 존재의 긍정affirmation으로 인도되기보다는 존재에 관련된 일련의 의문들interrogations로 인도된다는 사실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사유되지 않은 것과 뿌리깊은 근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으로부터 데카르트나 칸트의 분석과는 멀리 떨어진 반성형식이 정립된다. <br />
<br />
<br />
&#160;여기서 두 가지 결론이 도출된다. 하나는 소극적인 것으로 순수하게 역사적인 질서ordre와 관련된 것이다. 현상학은 코기토라는 데카르트적 테마와 칸트가 흄의 비판으로부터 이끌어낸 초월론적 동기와의 종합을 이룬 것으로 간주된다.&#160;이에 따르면, 후설은 서구적 이성ratio을 순수철학에 대한 급진화이자 순수철학에 고유한 역사의 가능성의 토대인 어떤 반성으로 재정향함으로써, 서구적 이성의 가장 심원한 소명을 부활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후설이 이러한 종합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초월론적 분석이 그 적용점을 전환하고(자연과학의 가능성으로부터 인간이 그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코기토가 그 기능을 전환했기 때문에(여기서 코기토는 스스로를 긍정하는 사유로부터 필증적apodictique 실존에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유가 어떻게 스스로 벗어나는가s'echapper를 보여줌으로써 존재에 대한 다양하고 끊임없는 의문으로 인도된다)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현상학은 오래된 서구의 합리적 목표의 회복이라기보다는 18~9세기의 전환기에 근대적 에피스테메에서 발생한 거대한 단절rupture에 대한 민감하면서도 매우 공식화된 인정이다. 이러한 까닭에 현상학은 그것이 反심리주의의 방식으로, 아니 오히려 선험적이고 초월론적인 동기에 관한 문제를 재생시켰다는 점에서는 반심리주의에 대립하여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경험적 분석과의 은밀한 유사성을 약속하면서도 동시에 위협하는 근친성voisinage을 배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또한 현상학이 비록 코기토에로 환원함으로써 시작되었지만 항상 질문들, 특히 존재론적 질문에로 인도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날 현상학적 기획은 체험된 것에 대한 기술 - 경험일 수 밖에 없는 - 과 &lt;나는 생각한다&gt;의 우선성을 제거하는met hors circuit 사유되지 않은 것의 존재론 속에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용해하고 있다.&#160;<br />
<br />
<br />
&#160;두 번째 결론은 적극적인 것이다. 그것은 인간과 사유되지 않은 것과의 관계에, 엄밀히 말하면 양자가 서구문화에 쌍둥이처럼 출현한 데에 관련된다. 그런데 실제로 무의식적인 것l'inconscient 내지 사유되지 않은 것의 온갖 형태는 인간에 대한 실증적 지식의 보상récompense이 아니었다. 고고학적 차원에 있어 인간과 사유되지 않은 것은 동시대적이다. 이는 사유 속에 완전히 포함되어 있으면서도 그것을 사로잡고 있는 하나의 사유되지 않은 것이다. 사유되지 않은 것은 인간의 내면에 머무르지 않으며, 인간에 대해 타자l'Autre이다. 이것은 인간에 대해 외적이면서도 동시에 인간에게 불가분indispensable한 것이다. 어떤 경우든 사유되지 않은 것은 19세기 이래 줄곧 인간의 침묵의 동반자였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집요한 분신 이상이 아니어서 자율적인 방식으로 반성의 대상이 되지는 못했다. 그것은 보충적인 형태, 타자나 그림자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그것은 헤겔의 현상학의 경우에는 대자Für sich에 대립되는 즉자An sich, 쇼펜하우어의 무의식적인 것die Unbewußte, 마르크스의 소외된 인간, 후설에 있어서는 암묵적인 것l'implicite, 현실화되지 않은 것l'inactuel, 침전된 것sédimenté, 상술/수행되지 않은 것non-effectué/Nichtausgefürte였다. 모든 근대적 사유는 사유되지 않은 것을 사유하는 법칙에 의해 관통된다traversé/imbued. 말하자면 대자의 형식으로 즉자의 내용을 반성한다든지, 인간과 그의 고유한 본질을 화해시켜 소외를 종결시킨다든가, 경험에 직접적이며 무력한désarmée 명증을 제공하는 지평horizon을 명확히 한다든가, 무의식의 베일을 거둔다든가[사르트르], 무의식적인 것의 침묵 속에 몰입하거나 무의식의 끊임없는 웅얼거림에 귀기울이는[프로이트] 등등.&#160;<br />
<br />
<br />
&#160;근대의 경험에 있어 인간을 지식의 대상으로 정립함으로써 이 새로운 형상이 에피스테메 영역에 등장하게 된다는 사실은 내부로부터 사유를 내부에서 사유에 붙어다니는 하나의 명법impératif을 함축한다. 근대의 종교적 도덕을 별도로 하면, 서양은 오직 두 가지 윤리 형식을 가질 뿐이다. 고대의 윤리형식(스토이즘 또는 에피큐리아니즘)은 세계의 질서에 의해 분절화되었으며, 그 질서의 법칙을 발견함으로써 지혜의 원리라든가 정치체cité의 원리를 연역해낼 수 있었다. 18세기의 정치적 사유 조차도 여전히 이 형식에 속한다. 반면에 근대적 윤리 형식은 어떠한 도덕도 정식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떠한 명법이라도 사유 내에, 그리고 사유되지 않은 것에 대한 파악을 위한 사유의 운동 내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근대적 사유가 순수 사변이기 때문이 아니다. 사유는 이제 더 이상 이론적인 것이 아니다. 사유는 해방하는 것이나 노예화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사유는 본래 하나의 행동action, 하나의 위험한 행위acte périlleux인 것이다. 사드, 니체, 아르토, 바타이유는 그것을 이해하였다. 그러나 헤겔, 마르크스, 프로이트도 그것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정치적 선택 없는 철학이란 없으며, 모든 사유는 진보적이거나 반동적이라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그것을 몰랐을 수 있는가? 그들이 어리석은 점은 모든 사유가 한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표현한다exprime고 믿었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그들의 비자발적인 심오함은 그들이 사유의 근대적 존재 양태를 지적했다는 것이다. 피상적으로 볼 때, 인간에 대한 인식은 그 가장 모호한 형식에서조차 윤리학, 또는 정치학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자연과학과 구별된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말한다면, 근대적 사유의 특성은 인간에 대해 타자인 것이 인간에게 동일자로 되어야만 하는 영역을 향해 전진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160;<br />
<br />
<br />
<br />
<br />
<br />
6. 기원의 후퇴와 회귀<br />
<br />
<br />
&#160;인간의 존재 양태와 인간에 관한 반성을 특징짓는 최후의 특성은 기원과의 관계이다. 이 관계는 고전주의의 사유가 이상적인 발생에 입각해 확립하려 했던 관계와 다르다. 18세기에 있어서 기원에로의 회귀는 표상에 대한 순수한 복제redoublement에 가능한 한 접근해 보려는 시도였다. 사람들은 자연의 질서를 하나의 표로서 생각했다. 이러한 표의 존재들은 연속적으로 짜여있는 하나의 질서 속에 서로 잇닿아 있었다. 또한 언어의 기원은 사물의 표상과 소리나 몸짓의 표상 사이의 투명성으로 생각되었다. 마지막으로 인식의 기원은 이러한 표상의 순수한 연속suite pure이라는 측면에서 모색되었다.&#160;그러므로 상기가 적용할 수 있고, 상상력이 어떤 표상을 새롭게 표상할 수 있었다. <br />
<br />
<br />
&#160;근대적 사유에 있어서 그 같은 기원은 더 이상 설정될 수 없다. 우리는 노동, 생명, 언어가 어떻게 그것에 고유한 역사성을 획득하고 그 역사성에 깊이 잠겨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비록 이 세 영역의 전 역사는 내부로부터 그 기원을 향해 있었으나, 결코 자신의 기원을 참되게 언표할 수는 없었다. 기원이란 마치 원뿔의 잠재적 꼭지점sommet virtuel과도 같은데, 모든 차이, 분산, 불연속은 기원이라는 하나의 동일성의 점에로 모여, 하나의 감지 불가능한 &lt;동일자&gt;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lt;동일자&gt;는 여전히 내부로부터 파열되어 이내 타자가 될 힘을 지닌다.<br />
<br />
<br />
&#160;인간이 형성된 것은 19세기 초 이래 이러한 역사성과의 관계 속에서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인간은 사실 이미 만들어진 역사성과 연결될 때만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물들의 시간을 통해 윤곽지어지는 그 기원과 결코 동시적이지 않다. 인간은 자신을 살아있는 존재로 규정하고자 노력할 때, 자신보다 훨씬 이전부터 시작된 생명을 배경으로해서만 자신의 고유한 시작propre commencement을 정의할 수 있다.&#160;인간은 자신을 노동하는 존재로 재파악하고자 할 때, 이미 사회에 의해 제도화되고 지배된 인간의 시공간 밖에서는 그러한 존재의 가장 기초적 형식조차 규명할 수 없다. 인간이 구성된 언어에 우선하는 말하는 주체로 자신의 본질을 규정하려고 할 때, 그가 발견하는 것은 이미 밝혀진 언어의 가능성뿐이다. 그는 결코 모든 언어를 가능하게 했던 최초의 단어, 하나의 더듬거림을 발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신에게 기원으로서 구실하는 것에 대한 인간의 반성은 항상 이미 시작된 것을 토대로 해서 가능할 뿐이다. 따라서 인간에 있어 기원이란 것은 결코 시작commencement이 아니다. 인간에게 있어 기원이란 인간 일반, 모든 인간이 이미 시작된 노동, 생명, 언어에 따라 분절화되는 방식 이상의 것이다. 이 기원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아주 오래된 생명, 노동, 언어로 구성되어 있는 어떤 주름pli에 진입해야만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근원적인 것l'originaire의 차원은 아마도 인간에게 가장 근접해 있는 것이다.&#160;이 표면surface에는 노동, 생명, 언어에 의해 일종의 침전물로서 형성되고 저장된 복잡한 매개물들이 나름의 역사를 지닌 채 거주하고 있다. 최초의 대상이 조작되고, 가장 단순한 필요가 표현되고, 가장 중립적인 단어가 발생하는 순간부터, 인간이 그것을 확실히 인식하지도 못한 채 재생하는 것은 인간을 거의 무한에 가깝게 지배하는 시간의 매개물들이다. 이러한 사실은 인식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잘 인식되고 있지 않다. 말하고 실존하고 일하는 바로 그러한 존재로부터 노동, 생명, 언어의 진리와 기원을 은폐하는 거대한 그림자의 영역이 사방에서 이러한 인식을 뒤덮고 있다. <br />
<br />
<br />
&#160;근대적 사유가 &lt;정신현상학&gt; 이래로 끊임없이 기술했던 기원적인 것은 고전주의 시대에 재구성하고자 했던 이상적 발생과 전혀 다르다. 인간에 있어 기원적인 것이란 동일성의 정점sommet에로 회귀하거나 지향하지 않으며, 타자의 분산이 아직 시작되지 않은 동일자의 시점을 지시하지도 않는다. 기원적인 것은 처음부터 인간을 인간 이외의 어떤 것에 연결시켜 주었던 그 무엇이다. 그것은 인간보다 오래되어 인간이 지배할 수 없는 내용과 형식을 인간의 경험에 편입시키는 그 무엇이다.&#160;역설적이지만, 인간에 있어 기원적인 것은 인간의 탄생 시간이나 인간의 경험 중 가장 오래된ancien 핵심을 알려주지 않는다. 기원적인 것은 인간 자신과 동일한 시간에 속하지 않는 그 무엇에 인간을 연결시키며, 인간과 동시대적이 아닌 모든 것을 인간으로부터 해방시킨다. 인간의 경험도 사물에 의해 전적으로 성립되고 제한되었기에, 아무도 인간에게 하나의 기원을 제시해 줄 수 없다. 이러한 불가능성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한편에서 이러한 불가능성은 사물의 기원은 항상 더 뒤로 물러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 사물의 탄생은 시간 속에서 그 불빛을 찾을 수 있으나, 인간은 기원이 없는 존재, 조국patrie이나 생일이 없는 존재요, 탄생의 장소를 갖지 않으므로 그의 탄생에 전혀 접근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원적인 것에서 직접 도출되는 사실은 인간이란 자신을 자신의 실존과 동시대적이게 만드는 기원으로부터 분리된 존재라는 사실이다. 경험적 질서에서 사물들은 항상 인간에 대해 후퇴reculées pour lui하고 있으므로, 그것들의 원점은 파악될 수 없으며, 그럼에도 인간은 사물의 후퇴와 관련하여 기본적으로 자신이 후퇴 속에 있음을 깨닫는다.&#160;<br />
<br />
<br />
&#160;그리하여 사유가 해야 할 하나의 임무가 주어진다. 이 임무는 사물의 기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제 기원은 사유가 여전히 사유해야 할 어떤 것인 동시에 항상 사유에 대해 새로운 어떤 것이며, 결코 성취될 수는 없으나 항상 더욱 가까이에 접근한 절박함 속에 약속되는 어떤 것으로 된다. 기원은 항상 다시 돌아오고 있는 것이며 사유가 향해가는 반복이며 항상 이미 시작된 회귀이다.&#160;<br />
<br />
<br />
&#160;18세기에 기술된 이상적 발생을 망상이라고 비난하는 것이 가능해진 바로 그 순간에, 근대적 사유는 이미 기원에 관한 문제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문제틀은 우리의 시간 경험의 기초로서 쓰였다. 근대적 사유는 다음 두 가지의 실증주의적 시도들을 용인했다. 한편에서 실증주의는 시간의 단위unité가 회복됨과 동시에 인간의 기원도 존재의 연속적 계열 내에서 하나의 날짜, 주름에 불과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시간적 연대기chronologie를 사물의 연대기에 삽입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다른 한편 실증주의는 개별적 또는 문화적 시간에 따라 인간이 사물에 대한 경험이라든지, 과학 등을 연대순에 따라 일렬로 늘어놓으려는 정반대의 시도도 용인했다. 이러한 두 가지 시도 모두에 있어, 사물의 기원과 인간의 기원은 상호 종속적이다. 그러나 두 가지의 서로 환원될 수 없는 시도가 있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기원에 대한 근대적 사유를 특징짓는 근본적 불균형asymétrie을 지적해주기에 충분하다. 근대적 사유는 기원적인 것의 영역을 회복하려는 과업이 주어지는 순간, 기원의 후퇴를 발견한다. 근대적 사유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즉 근대적 사유는 점차 완성되고 심화되길 멈추지 않는 후퇴의 방향으로 전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근대적 사유전체가 운명적으로 회귀에 깊이 몰두하고 재출발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이다. 그리하여 헤겔, 마르크스, 슈펭글러에 이르기까지 사유의 테마는 다음과 같이 전개되었다. 그들에게 있어 사유란 사유의 완결을 지향하는 운동과정에서 자체 내에 몰락을 겪는 것이요, 자신의 충만한 빛을 밝히는 것이요, 자신의 원환을 완결짓는 것이요, 자신의 긴 여정 속에서 만난 낯선 형상들 속에서 자신을 인지하는 것이요, 자기가 태어난 바로 그 바다로 다시금 사라지는 것을 인정하는 식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행복하지는 않지만 완전한 이러한 회귀의 반대편에는 횔덜린, 니체, 하이데거의 경험이 있다. 여기서는 회귀가 기원의 극단적인 후퇴 - 신이 사라지고, 사막이 확장되며, 기술techne이 그의 의지의 지배domination를 확립한 - 내에서만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의 완결이나 몰락이 아니라, 오히려 기원이 후퇴한만큼 기원을 해방시켜주는 끊임없는 찢어짐déchirure이다. 그러므로 가장 극단인 것extrême이 가장 가까운 것이다.7)&#160;<br />
<br />
<br />
&#160;결과적으로 사유는 자기와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멀리 있는 기원에 관해 사유하는 자신의 무한한 임무를 수행하는 와중에서, 인간이란 자신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 것과 동시대적이지 않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인간은 인간을 분산시키고 그를 그의 고유한 기원으로부터 멀리 끌어내는 어떤 힘puissance 속에, 아마도 영원히 빼앗겨 버린 절박함 속에서 그에게 기원을 약속하는 그러한 힘의 영향 하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 힘은 인간에게 낯설지 않으며 이미 친숙해 있는 것이다.&#160;그런가하면 시간 - 인간 그 자신인 시간 - 은 인간이 출발했던 여명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미래에 도래할 약속된 또 다른 여명으로부터 인간을 떼어놓는다. 이러한 근본적인 시간 - 시간이 경험에 주어질 수 있는 기초로서 - 이 표상의 철학에서의 시간과 어떻게 다른가는 분명하다. 표상의 철학에서 시간은 표상 위에 일종의 선형적 연속의 형식을 부과함으로써 표상을 분산시켰다. 이와 반대로 근대적 경험에 있어서는 기원의 후퇴가 모든 경험보다도 더 근본적이다. 왜냐하면 경험이 자기의 실증성을 빛내고 현시하는 곳은 바로 기원 내에서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유한성이라는 처음의 테마와 만난다. 그러나 이 유한성은 애초에는 인간에게 지워진 사물의 무게 - 인간은 생명, 역사, 언어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 - 로서 표현되었지만, 이제는 보다 근원적인 차원에서 나타난다. 이 차원은 인간 존재와 시간 사이의 불가분의insurmontable 관계이다.&#160;&#160;<br />
<br />
<br />
<br />
<br />
<br />
7. 담론과 인간의 존재<br />
<br />
<br />
&#160;위의 네 가지 이론적 선분(유한성에 대한 분석, 경험적-초월론적 반복에 대한 분석, 사유되지 않은 것에 관한 분석, 기원에 대한 분석)이 고전주의 시대 언어를 구성하던 네 개의 종속된 영역과 어떤 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 관계는 일견 유사성과 대칭성의 관계이다. &lt;동사&gt;-&lt;유한성&gt;, &lt;분절화&gt;-&lt;경험적-초월론적 이중화&gt;, &lt;지시&gt;-&lt;사유되지 않은 것&gt;, &lt;파생dérivation&gt;-&lt;기원&gt; 등의 상응. <br />
<br />
<br />
&#160;그러나 19세기의 네 가지 이론적 선분들과 고전주의 시대의 언어 이론의 네 영역과의 상응성에 미혹되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일반문법의 공간을 윤곽지었던 네 가지 이론적 선분들은 보존되지 않았다. 그것들은 18세기 말 표상의 이론이 붕괴됨과 동시에 분열되었고, 그 기능과 차원, 타당성의 전 영역을 변화시켰다.&#160;고전주의 시대에 있어 일반문법의 기능은 하나의 언어가 어떻게 표상의 연쇄 속에 도입될수 있는가, 어떻게 담론의 단순한 선 위에 나타나 동시성의 형태들을 전제로 하는 언어로 될 수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었다. 반대로 19세기 이래 발전한 인간 존재의 양태 분석은 표상의 이론 내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분석의 임무는 사물 일반이 어떻게 표상에 주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데 있다. 이처럼 인간과 사물의 공존 속에서 표상이 개방한 거대한 공간을 통해 현시되는 것은 인간의 근본적 유한성, 인간의 기원으로부터 그를 떼어놓는 동시에 그것을 약속하는 분산, 시간의 통제할 수 없는 거리이다. 인간에 관한 분석론은 담론에 대한 분석이 아니다.&#160;표상의 이론이 일차적이냐 파생적이냐에 따라 체계의 균형은 송두리째 수정된다. 표상의 우월성이 사라져버린다면 담론의 이론도 해체될 것이다.&#160;이 형태는 두 가지이다. 우선 경험적인 차원. 네 개의 구성적 선분들은 여전히 발견되나 그것들이 수행하는 기능은 완전히 전도된다. 동사의 특권적 지위 의 이론 -&gt; 내적 문법구조에 대한 분석, 분절화의 이론 -&gt; 굴절의 이론, 어근radical의 이론 -&gt; 표상적 어근racine représentative의 이론, 파생 -&gt; 언어의 근친관계. 다음으로 기초의 차원. 이 기초의 차원에서도 네 개의 선분은 여전히 잔존하나 새로운 분석이 사물과의 과계를 표현하는 방식은 이전과 다르다. 이 분석은 네 개의 선분을 이전처럼 언어 내부의 위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가두고 있는 표상의 영역으로부터 해방시켜 저 외부성extériorité의 영역으로 보내는 것이다. <br />
<br />
<br />
&#160;담론에 대한 고전주의적 분석은 그것이 표상의 이론의 연속선상에서 벗어난 바로 그 순간부터 두 가지 분석으로 분리된다. 한편으로 그것은 문법적 형태의 경험적 인식으로 전개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유한성의 분석론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고전주의 시대의 담론의 존재(표상이라는 의심되지 않는 명증에 근거한)와 근대적 사유에 등장한 바의 인간의 존재 사이에 내재하는 양립불가능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인간 존재양태에 관한 분석론은 오직 표상적 담론에 관한 분석이 해체되고, 옮겨지고, 전도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성립 가능했던 것이다.&#160;우리는 고전주의 시대의 담론의 이론으로 순진하게 회귀하는 것이 될지 모를 모든 일을 회피하는 데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언어의 존재와 인간의 존재를 동시에 사유할 수 있는 권리는 영원히 박탈당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존재와 언어의 존재에는 소멸될 수 없는 간극béance이 형성될지도 모른다. 아마 우리 시대가 당면한 가장 중요한 철학적 선택의 뿌리는 바로 여기에 있는 듯 싶다. 출구가 어느 쪽에 있는지 확실하게 말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서구 문화에 있어 어떤 시대이건, 인간의 존재와 언어의 존재가 공존할 수 있고, 서로에 대해 분절화될 수 있었던 적은 결코 없었다는 사실이다. 양자가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은 우리의 사유의 근본적 특징 중 하나였다.&#160;<br />
<br />
<br />
&#160;그러나 담론에 대한 분석이 유한성에 대한 분석으로 전환됨에 따라 다른 결과가 초래된다. 기호 및 말에 관한 고전주의적 이론이 문제삼은 것은 유사성에 의해 연속된 표상들이 어떻게 안정된 차이와 제한된 동일성으로 구성된 영속적인 표를 형성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반면 유한성의 분석론은 인간은 결정된 존재라는 전제 하에 이러한 결정성의 기초란 근원적인 한계 속의 인간 자체라는 점을 규명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다. 또한 이 분석론은 경험의 내용이란 이미 그것에 고유한 조건이라는 사실과 사유는 경험 내용을 회피하는 사유되지 않은 것에 처음부터 항상 붙어다니면서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을 밝히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그것은 인간과는 동시대적이 아닌 기원이 어떻게 하나의 절박한 것으로서 떨어짐과 동시에 주어지는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요컨대 그것은 어떻게 타자, 가장 멀리 있는 것이 동시에 가장 가까운 것이자 동일자인가를 보여주는 것에 진력한다.&#160;이로써 우리는 차이Différence의 질서에 관한 반성(이러한 반성은 연속체의 존재론을 전제하며, 형이상학을 전제한 완전성 속에서 전개되는 단절없는 충만한 존재를 요구한다)으로부터 그것의 모순 속에서 극복되어야 할, 일종의 변증법과 존재론의 한 형태를 함축하는 동일자Même에 관한 사유로 이행해왔다. 근대적 사유는 더 이상 완결되지 않을 차이의 완성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성취될 동일자를 드러내려는 사유이다. 이와 같은 작업에는 분신의 동시적 출현과 자신과 분신을 연결하는 조사 &lt;와et&gt; 속에 자리잡은 간극이 전제된다. 즉 후퇴&lt;와&gt; 회귀, 사유&lt;와&gt; 사유되지 않은 것, 경험적인 것&lt;과&gt; 초월론적인 것, 실증의 영역에 속하는 것&lt;과&gt; 그 영역의 기초를 이루는 질서에 속하는 것의 동시적 출현과 간극이 전제되는 것이다. 고전주의 시대의 사유는 사물들을 하나의 표 속에서 공간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표상의 순수한 계기가 지니는 고유성에 연결시켰다. 시간이 공간을 기초한 것이다. 반면 근대적 사유가 사물의 역사와 인간에 고유한 역사성을 기초로 밝혀낸 것은 &lt;동일자&gt;의 내부에서 빈 공간을 만드는 거리distance creusant이다. 이 간극의 양 끝에서 동일자는 분산되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한다. 근대적 사유로 하여금 여전히 시간을 사유할 수 있게 해준 것은 바로 이 심오한 공간성이다. <br />
<br />
<br />
<br />
<br />
<br />
8. 인간학의 잠<br />
<br />
<br />
&#160;인간에 대한 분석론으로서 인간학anthropologique은 우리가 아직 그것으로부터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근대적 사유의 한 구성적 역할을 수행해왔다. 인간학은 표상이 자기에게 고유하고도 유일한 운동을 통해 종합과 분석의 작용을 결정할 능력을 상실했던 순간에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160;&lt;나는 생각한다&gt;가 지배하지 않는 다른 곳에서 경험적 종합이 수행되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경험적 종합은 &lt;나는 생각한다&gt;의 지상권이 그 한계, 곧 인간의 유한성에 도달했던 바로 그 순간에 요구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칸트가 그의 전통적 3부작의 세 가지 질문에 하나의 궁극적인 질문을 덧붙였던 &lt;논리학Logik&gt;에서 이미 정형화되었다. 말하자면 그의 세 가지 비판적 질문(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은 네 번째 질문, 즉 인간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 관련될 뿐 아니라 그것 때문에 제기되었음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br />
<br />
<br />
&#160;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이러한 질문은 19세기 초 이래 사유를 관통하고 있다. 비록 칸트의 경우 경험적인 것과 초월론적인 것 사이의 구분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은 끊임없이 양자 간의 혼동을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의해 근대철학을 특징짓는 혼합된 차원의 반성이 구성되었다. 이러한 주름 속에서 초월론적 기능은 자신의 강압적인 그물로 움직임 없는 회색인 경험성의 공간을 뒤덮는다. 반대로 경험적 내용들은 생기를 얻어 스스로를 다시 세우고 초월론적인 것을 멀리 내쫓는 담론에 즉각적으로 포섭된다. 이때 &#160;이러한 주름 안에서 철학은 다시 한번 깊은 잠에 빠져있다. 이번에는 독단론의 잠이 아니라 인간학의 잠이다. <br />
<br />
<br />
&#160;사유를 그와 같은 깊은 잠에서 깨어나게 하기 위해서는, 인간학적 사변형을 그 기초부터 파괴하는 것 말고 다른 수단은 없다.&#160;왜냐하면 사유는 이 잠이 너무도 깊은 까닭에 이 잠을 오히려 깨어있음으로 체험하며, 그럼으로써 사유는 오직 자기의 내부에서 하나의 기초를 발견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독단론의 악순환circularité을 근본적인 철학적 사유만이 지닐 수 있는 명민함 내지 깊은 고뇌와 혼동한다. 아마도 우리는 니체의 경험을 인간학의 뿌리를 &#160;뽑는 시도 가운데 첫 번째 것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니체는 문헌학적 비판의 방식 내지 일종의 생물학주의biologisme를 통해서 인간과 신이 서로에게 속해있는 지점, 즉 신의 죽음이 인간의 소멸과 동의어가 되며, 초인에의 약속이 무엇보다 인간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지점을 다시 발견했다. 여기서 니체는 현대의 철학이 사유하기를 재개하기 시작한 문턱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160;뿐만 아니라 그는 이후에도 현대철학의 진로를 계속 지배할 것임에 틀림없다. 만일 회귀의 발견이 진실로 철학의 종언이라면, 인간의 종언은 철학의 출발점에로의 회귀일 것이다. 오늘날의 우리는 단지 인간이 사라진 빈 공간 속에서만 사유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빈 공간은 어떤 결핍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채워져야 할 공백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유의 재개를 가능하게 하는 공간의 개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br />
<br />
<br />
&#160;인간학은 아마도 칸트로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철학적 사유의 노정을 지배하고 통제한 근본적인 배치를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 배치는 우리의 눈 앞에서 해체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아직도 인간 및 인간의 지배와 해방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이들, 여전히 인간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모든 이들 모두에게 우리는 어떤 철학적 웃음rire philosophique, 말하자면 어떤 부분에서는 침묵하는 그런 웃음으로 반대할 수 있을 따름이다. &#160; &#160; &#160; &#160; &#160; &#160; &#160; &#160; &#160; &#160; &#160; &#160; &#160; &#160; &#160; &#160; &#160; &#160; &#160; &#160; &#160; &#160; &#160; <br />
<br />
<br />


<br />
<br />
1)&#160;푸코가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아니나, 베르그손을 염두해두는 표현으로 보인다. 베르그손, 「형이상학 입문」,『사유와 운동』, p. 203. "형이상학이 참으로 형이상학이려면, 그것은 개념을 떨어버려야만 한다. 또한 적어도 경직되고 이미 만들어져 있는 개념에서 자유로워져서, 우리가 습관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들을 만들어내야만 한다. 내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개념들이란 유연하고 움직이고 있으며 거의 유동적이다시피한, 요컨대 직관의 그 떠다니는 형태를 표본으로 삼을 준비가 언제나 되어 있는 표상이다." 또한 p. 229 "그렇게 하여 정신은 유동적인 개념에 이르게 된다. 이 개념은 실재의 모든 굴곡을 따라가면서 사물의 내적 생명의 운동 자체를 획득할 수 있다."<br />
<br />
<br />

2)&#160;말라르메가 말하는 책le Livre은 바로 시에 대한 개념 자체, 단 한권 밖에 없는 책, 우주의 모든 것을 종합하는 책이다. 세계 전체는 그 책에 도달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그 책은 오직 그 내부의 질서만 존재할 뿐 바깥은 없는 책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특정한 시인에 의해 쓰여진 것이 아니라, 우주에 대해서, 우주에 의해 작성되는 책으로서, 말라르메의 시인소멸론과 관련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나는 완전히 죽었으며, 내 정신이 모험을 할 수 있는 곳이라면 가장 불결한 지역도 영원입니다. (...) 이제 나는 비인칭이며, 이미 형이 알고 있던 스테판이 아니라, - 과거의 나였던 것을 통하여 정신적인 우주가 스스로를 보고 스스로를 전개해나간다는 하나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1867년 5월 14일 앙리 카잘리스에게 보낸 편지) 스테판 말라르메, 『시집』, 황현산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05, p. 33에서 재인용. <br />
<br />
<br />

3)&#160;칸트 순수이성비판의 체계는 초월적 요소론은 초월적 감성학(실증주의)과 초월적 논리학으로 분류된다. 초월적 논리학은 다시 초월적 변증학(종말론)과 초월적 분석학으로 나뉜다. 재래의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초월적 변증학을 제외한 초월적 분석학 부분이 보통 칸트의 초월철학이라고 간주된다. &#160; &#160;<br />
<br />
<br />

4)&#160;특히 메를로 뽕띠의 현상학에서 Le vécu(lived experience, Erebnis)는 데카르트(사유/연장)나 칸트(감성/지성) 식의 이원론에 비해 양가적이고 애매한 성격을 갖는다. 이 체험된 것에서 형식과 내용, 경험적인 것과 초월론적인 것, 기초짓는 것과 기초지어지는 것 등이 혼합되어(zweideutig, ineinander) 나타난다. &#160;<br />
<br />
<br />

5)&#160;푸코가 여기서 생각하는 사례가 어떤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아마도 현상학적 마르크스주의(사르트르나 메를로 뽕띠 또는 이후 Enzo paci, Tran duc tao 등으로 대표되는)의 등장을 염두해 두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br />
<br />
<br />

6)&#160;이 대목 역시 정확한 인용이 없으나, 다만 종래의 인간이 약속과 위협의 형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약속할 수 있는 동물을 기르는 것”, 기억하고 책임질 수 있는 동물로서의 인간 주체를 만들기 위한 고통과 처벌의 기제를 말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이에 반해 니체의 초인은 죄와 양심의 가책을 극복하는 순진무구한 존재, 적극적 망각의 존재로 나타난다. 니체, 『도덕의 계보』의 제2논문 참조. &#160;<br />
<br />
<br />

7)&#160;가장 먼 것Ferne이 가장 가까운 것Nähe이다. 이는 서양철학을 존재 망각의 역사로 파악하는 하이데거가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표현 중 하나이다. 이때 가까움이나 멂은 물리적 차원에서 측정되는 성격의 거리Abstand가 아니다. 가령 현존재Dasein는 존재적으로는 가장 먼 것이지만, 존재론적으로는 가장 가까운 것이다. Michael Inwood, A Heidegger Dictionary, Blackwell, 2000, p. 138. 또한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근본적 존재방식으로서의 가까움이 거리두기Entfernung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 1998, p. 148. &#160; <br />
<br />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20/90/cover150/8980260482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0260482</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책의 감옥</category><title>하나는 스스로를 둘로 나눈다</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3656852</link><pubDate>Mon, 26 Apr 2010 03:26: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3656852</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0822339412&TPaperId=3656852"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62/89/coveroff/0822339412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053339&TPaperId=3656852"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624/27/coveroff/8992053339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160;
&#160;
&#160;
&#160;
&#160;
&#160;
&#160;
생각보다 오역이 많군;&#160;&#160;어떻게 보면 취향 차이라고 볼 수 있는 것들도 있지만.. 레닌보다도, 바디우를 포함하여&#160;당대 프랑스 공산주의자들의 마오에 대한 열광이 흥미롭고 그 배경이 궁금하다.&#160;물론 이 글만 가지고 하는 얘기는 아니고,&#160;그러니까 바디우의 친한 친구?인&#160;지젝을 읽을 때도 궁금한 점이지만, 바디우의 이런 입장(실재, 사건 등의 존재론)이 오늘날 정치철학에&#160;또는 대중정치에&#160;어떤 식의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정치를 윤리로 환원하기. 그러고보니 아래 글에 정작 레닌 얘기는 별로 없고;; 전체 요지는 오늘날 도처에 만연한 침울한 강박증에 맞서 (니체처럼) 가치전환해라, 행위해라, 새로운 것을 만들어라&#160;정도가 되겠다. &#160;&#160;
&#160;
&lt;레닌 재장전&gt;, 알랭 바디우, 하나는 스스로를 둘로 나눈다.&#160;&#160;
(영어본 p. 7~10)<br />
<br />
<br />
&#160;오늘날 레닌의 정치적 저작들은 거의 민주주의 대 전체주의 독재라는 고전적인canonical(국역27 ; 규범적인) 대립구도 속에서 재검토되고 있다. 이러한 논쟁은 진작 있었는데, 레닌을 비판했던 카우츠키 등 사민주의자들이 기댄 범주가 민주주의였다. 당시 반동분자들과 착취자들의 선거권을 박탈하려던 러시아 볼셰비키에 반대하여, 대의제와 의회 주도의 정치 체제를 당연히 여긴 카우츠키는 투표권을 전적으로 강조했다. 레닌은 이러한 측면에서 카우츠키의 이론적 편향deviation(국역28배신)을 보았다. 문제는 카우츠키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일반의 문제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일반의 문제에 개입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원칙을 어기기 위해 러시아에 국한된 전술적 결정 운운하는 것, 원칙의 문제로 정의되는 정치 개념을 개량주의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부차적 모순에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 언제나 편향의 본질이다. 결국 이론은 문제의 국면을 사유 속에 통합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문제의 국면은 전술적이거나 지엽적이고 특수한 결정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승리의 원칙에 의해 규정된다. 레닌은 승리, 혁명적 정치에서 실재the real(국역29 ; 가장 실질적인 것)를 이론의 내적 조건으로 변화시킨다. <br />
<br />
<br />
&#160;1917년에서 70년대 말에 이르는 이 세기는 이데올로기적이거나 상상적인 것의 세기, 유토피아의 세기가 아니다. 이 세기의 주체적 규정은 레닌주의이다. 그것은 지금 여기서 직접적으로immediately(국역30즉각적으로) 실천 가능한 것에 대한, 실재에 대한 열정이다. 이 세기는 선언과 미래의 세기가 아니라 행위the act(국역30;행동)와 실행의 세기, 절대적 현재의 세기이다. 20세기는 승리의 시대, 혁명의 시대이다. 레닌에게 승리의 도구는 최종적이고 총체적인 전쟁을 준비하는 이론적, 실천적 명료성이다. 이 세기는 그래서 전쟁의 세기인데, 이는 둘 또는 적대적 분열이라는 문제 주의를 배회한다. 이 세기는 자신의 법이 둘, 즉 적대라고 선언한다. 둘은 세 항목에 따라 몰락되어야 한다. 1) 중심적 적대, 두 개의 주체성이 존재하며 이 주체성들은 생사를 건 투쟁 속에서 전지구적 차원에서 조직된다. 이 세기는 그런 적대의 무대이다. 2) 적대를 사유하는 두 방식 사이에도 폭력적 적대가 존재한다. 이것이 공산주의와 파시즘 사이의 대립이 지닌 본질이다. 공산주의자에게 최종 심급에 놓여 있는 대립은 계급들 간의 대립이다. 급진적 파시스트에게 이것은 국가nation와 인종 간의 대립이다. 이 두 번째 부분은 어쩌면 첫 번째보다 더 본질적이다. 3) 이 세기는 전쟁을 통한 생산의 세기로 규정적 통일성definite unity(국역31 ; 명확한 통일성)을 촉발시킨다. 적대는 한쪽 진영의 다른쪽 진영에 대한 승리를 통해 극복된다. 이 점에서 둘의 세기는 하나the One를 향한 근본적radical(국역32 ; 강렬한) 욕망에 의해 활성화된다. 적대의 분절과 하나의 폭력을 명명하는 것은 실재의 표지로서 승리이다. <br />
<br />
<br />
&#160;이는 변증법적 도식이 아니다. 종합이 아니라, 모든 것들은 두 가지 항 가운데 한쪽의 절멸을 가리킨다. 이 세기는 둘과 하나가 비-변증법적으로 병렬해 있는 형상이다. 승리를 얻기 위한 원동력은 적대 자체인가 하나를 향한 욕망인가? 레닌주의의 주요한 철학적 질문 가운데 하나가 이것이며,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원들이 가장 깊게 천착했던 것도 이 질문이다. 이른바 철학계의 거대한 계급투쟁. 이 결투는 변증법의 본질이 적대의 발생에 있으며, 정확한 공식은 ‘하나는 스스로를 둘로 나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좌파)과, 다른 한편으로 변증법의 본질이 모순적인 항(개념)notion들의 종합이며 그렇기 때문에 올바른 공식은 ‘둘은 하나로 통합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우파) 사이의 대립이다.1)이 대립은 그러나 본질적 진리를 감춘다. 왜냐하면 이는 혁명적 주체성, 그 구성적 욕망을 식별하는 것identification(국역32;확인)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둘은 하나로 통합된다는 입장이 우파적이라면, 이 견해가 중국혁명가들에게 미숙해보였기 때문이다. 이 입장을 따르면 욕망을 산출하는 하나는 사유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종합을 빌미로 고대적인ancient(국역33고전적인) 하나, 즉 일자를 요청하도록 하게 된다. 변증법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복고주의적이다. 오늘날 혁명적인 활동가activist(33행동가)가 된다는 것은 의무적으로 분열division을 욕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새로움의 문제는 즉시 상황의 특이성 속에서 창조적 분열creative division(국역33분열을 창조)의 문제가 된다. <br />
<br />
<br />
&#160;1966~7년 사이 중국의 문화혁명은 하나를 지지하는 자들과 변증법적 도식의 다른 편을 옹호하는 자들이 대립했다. 진보의 깃발 아래 대중의 정치는 진정한 공산주의를 향해 가야한다는 마오 같은 이들과 경제 관리가 중요하며 대중 동원은 해로운 점이 많다고 생각하는 류사오치와 덩샤오핑 같은 이들의 대립. 이 대립은 정치적 풍랑 속에서 군대의 개입, 폭력적인 관료적 대립 등을 거쳐 76년 마오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 덩 샤오핑이 권좌로 돌아가는 테르미도르 반동이 뒤따랐다. 어쨌거나 문화혁명이 일련의 정치적 흐름 전체에 폐막을 고한다는 점인데, 핵심 대상은 당이고 주된 정치 개념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개념이다. 오늘날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에 다시금 예속되길 갈망하는 이들 사이에는 이런 전례없는 사건을 야만적이고 잔인한 권력투쟁이라고 부르는 것이 유행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에게 우스꽝스럽게도 당연한 말을 하고 있다고 답할 수 있다. 문화혁명의 투사들은 근본적으로 “유일한 문제는 권력의 문제”라고 말했던 레닌을 끊임없이 인용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언제부터 우리 정치철학자들은 위기에 몰린 정치 지도자가 다시 권력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공포스러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는가? 권력투쟁의 의미와 중요성은 무엇이 시급한지를 통해서 판단되어야 한다(마오; 혁명은 형식적인 디너파티가 아니다). 모든 문제점에 대해, 특히 (도시와 농촌, 지적노동과 육체노동intellectual and manual labor[국역36지식인과 수공업 노동자], 당과 대중 등의 관계처럼)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두 계급 간의 투쟁에는 두 개의 길과 두 개의 노선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사실이다. <br />
<br />
<br />
&#160;그렇다면 때로 극단적으로 치달았던 폭력은 어떠한가? 정치가 만일 부와 부자들, 권력과 권력가들, 과학과 과학자들(국역36; 학문과 학자들), 자본과 그 하수인들에게 사회를 종속시키고자 하는 영원한 질서를 근본적으로 전복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우리는 이런 정치가 자애로우며 점진적이고progressive(국역 ; 진보적이고) 평화적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무에 붙들려있다는be held for nothing, 모든 사유가 무에 매여있다는 생각을 우리가 견딜 수 없어할 때마다, 여기에는 엄청나게 가혹한 사유의 폭력이 존재한다. 총체적 해방이라는 주제는 현재 속에, 절대적 현재의 열광 속에서 실행에 옮겨지면 언제나 선과 악 너머에 위치하게 된다. 행위의 와중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선은 기존 질서가 자신의 지속persistence(국역37;영속성)을 명명하는 데서 나온 귀중한 명칭인 일자the one뿐이기 때문이다. 극단적 폭력은 극단적 열광이 지닌 상대적 상관물이고, 정말로 성패가 달린 문제는, 니체 식으로 말해 모든 가치들의 가치전환이다. 실재를 향한 레닌주의적 열정은 사유를 향한 열정이며, 어떤 도덕도 알지 못한다. 니체가 알고 있던 것처럼 도덕은 단지 하나의 계보학적 지위status(국역; 상태)를 지닐 뿐이다. 설사 지식인 박해에 관한 것이라도, 실재로의 정치적 접근을 명령하는 것은 지식의 특권이 아니라는 사실이 실재를 향한 열정을 가능케 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프랑스혁명에서 라부아지에를 사형하면서 했던 말, ‘공화국은 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 자체를 넘어서, 공리적이며 축약된 형태 ‘공화국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국역 수정)의 명목 아래에서 이를 읽는 법을 알아야 한다. 정치적인 것은, 실재와 관련해서 자신의 원칙을 세우며, 자신을 제외한 어떤 다른 필요도 가지지 않는다. <br />
<br />
<br />
&#160;확실히 실재를 향한 열정은 항상 가상semblance의 증식을 동반한다. 혁명가에게 세계는 기만과 타락으로 가득 찬 구세계이다. 실재의 정화작업이란 실재를 에워싸고 모호하게 만드는 현실reality로부터 실재를 추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기는 심오함에 반항하고 근본적인 것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전개하며, 니체를 따라 ‘배후 세계worlds behind’(국역; 세계들의 이면)라는 것을 제거해버리라고, 실재는 외양appearance과 동일하다고 말하라고 제안한다. 이 세기를 활성화하는 것은 이상이 아닌 실재이므로 사유는 외양을 외양으로 파악하거나 실재를 외양의 순수한 사건으로 파악해야 한다. 순수한 표면으로서 실재를 재발견하기 위한 투쟁에서 가상의 파괴는, 현실의 가상이 실재와 밀착되어 있기 때문에 순수한 파괴와 동일시된다. 이 정화과정에서 마지막 지점에서 현실의 완전한 부재인 실재는 무nothingness가 된다. 이 세기의 수많은 시도들이 취한 - 정치적이고 예술적이고 과학적인(국역;학문적인) - 이 방식은 니힐리즘적 테러리즘이라고 불리게 된다. 이 방식의 주체적 동인은 실재를 향한 열정이므로, 무가 아니라 창조에 동조하며 이 안에서 능동적 니힐리즘을 인식하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모든 이성적 활동은 현실의 중력에 의해 한정되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은 악을 피하는 것, 실재와의 모든 접촉을 피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테러리즘적 요소 - 실재를 정화하려는 욕망 -를 억눌러 온 이래 니힐리즘은 그 효과를 상실하고 반동적 니힐리즘이 되어 간다. 이 세기가 그려온 또 다른 방식, 테러의 매력에 굴하지 않고 실재를 향한 열정을 유지하고자 하는 방식을 공제의 방식the subtractive way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공제의 방식은 실재의 지점을 현실의 파괴가 아니라 최소 차이minimal difference로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아주 작은 차이,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소멸 항vanishing term을 간파하기 위해 외견상의 통일성으로부터 이 항을 뽑아냄으로써 현실을 정화하는 것이지 현실의 표면 속에서 그것을 절멸시키는 것이 아니다. 모든 the affect가 위치한 곳은 바로 이 거의의 안, 내재적인 예외 안이다. <br />
<br />
<br />
&#160;이 두 노선과 함께, 이제 핵심 문제는 새로움에 대한 것이다. 이 세기는 스스로를 도래 또는 시작의 형상으로 제시했으며, 특히 새로운 인간으로 제시해왔다. 대부분의 이들, 특히 하이데거를 포함한 파시즘적 사유 영역에서, 새로운 인간은 일정 부분 망각되었고 타락해버린 고대인을 복권하는 것이다. 새로움이란 여기서 본래적인 것의 재생산, 비본래적인 것의 파괴를 통한 기원의 복구이다. 다른 그룹의 사상가, 마르크스주의 공산주의 영역에서 새로운 인간은 역사적 적대를 파괴하는데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존재해본 적 없는 어떤 것, 진정한 창조이다. 그것은 계급 너머, 국가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다. 새로운 인간은 복권되거나 산출된다. 첫 번째 경우에서 새로운 인간에 대한 정의는 인종이나 국가, 핏줄, 토양 같은 신화적인 전체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새로운 인간은 특성들(게르만족, 아리안어, 전사 등)의 집합이다. 두 번째 경우에서 새로운 인간은 모든 범주화와 특성화에 저항한다. 특히 가족, 사적 소유, 민족-국가에 저항한다. 마르크스 역시 프롤레타리아트의 보편적 특이성은 범주화에 저항하며, 어떤 특성들도 지니지 않고, 가장 중요한 점으로 개별적 민족성을 지니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새로운 인간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이고 보편적인 개념화는 모든 범주화를 거부한다. 여기서 뿌리와 전통, 기원들을 찾는데 있어 원시적이면서도 이기적인 중핵인 가족에 대한 적대심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가족들이여, 나는 너희들을 증오한다.”(앙드레 지드) 이 세기의 끄트머리에서 가족이라는 개념이 공감대를 갖고 금기에 가까운 지위를 다시 획득하는 것은 놀랍다(독일 녹색당, 동성애자들 등). 이 세기의 진짜 현재 속에서 새로운 인간은 국가주의적 독재 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사적 소유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사람이다. 오늘날 근대화는 착하고 나약한 아버지, 어머니, 아들이 되는 것에 있는 것처럼 여겨지며, 능률적인 경영자가 되는 것, 최대한의 이윤을 얻어내고 책임감 있는 시민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슬로건은 “돈을 벌어라, 가족을 보호하라, 투표에서 승리하라”이다. 이 세기는 다음의 세 가지 테마들 주위로 이끌리고 있다. 불가능한 주체적 혁신과 안락함, 그리고 반복. 다른 말로 강박증obsession(국역42 ; 강박관념)이다. 이 세기는 안전에 대한 강박증 속에서 끝나고 있으며, 보다 더 비참한 다음의 준칙 아래서 종결되고 있다. 즉 당신이 숨쉬는 이곳은 사실상 그렇게 나쁘지 않다. 더 최악인 것들이 존재해왔으며, 또한 존재한다. 우리는 이제 너무나 널리 확산되어 버린 침울한 강박증에 맞서 이를 수행해야 한다. <br />
<br />

&#160;

&#160;
<br />
<br />

1)&#160;모순의 문제를 다룰 때 마오주의는 엥겔스나 스탈린의 시도에 비해 이점을 갖는다. 즉 마오는 동일성 전반에 대한 모순의 최우선성을 옹호한다(모순론). 종합이 가능한 것은 一分爲二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의 종합이란 단지 마오쩌둥이 비적대적 모순, 대립의 상대적인 교착 상태라고 부른 것에 지나지 않는다. <br />
<br />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624/27/cover150/8992053339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053339</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책의 감옥</category><title>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 </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3643368</link><pubDate>Sun, 18 Apr 2010 23:4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3643368</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7671879&TPaperId=3643368"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267/56/coveroff/8987671879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1844675777&TPaperId=3643368"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57/49/coveroff/1844675777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160;&#160;&#160;정치에 대한 열 가지 테제&#160;
&#160;
&#160;
&#160;
&#160;
&#160;
&#160;
1. 정치는 권력 행사가 아니다. 정치는 그 자체로, 즉 고유한 주체 때문에 현실화되며, 고유한 합리성에서 유래하는 특정한 행위 양식으로서 정의해야 한다. 정치적 주체를 사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정치적 관계이지, 그 역이 아니다. <br />
<br />
<br />
- 정치는 권력 행사나 권력을 소유하기 위한 투쟁, 정당성의 토대에 대한 탐구가 아니다. 정치는 고유한 주체, 정치를 고유하게 정의하는 특정한 관계 속에, 참여/몫을 가짐avoir part에 있다. 순수 정치 혹은 정치철학의 회귀(아렌트, 레오 스트라우스)는 공공선,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의 분리를 주장하지만 이는 정치를 통치적 과두정으로 이끌 뿐이며 국가적인 것으로 단순히 환원시켜버린다. 정치를 특정한 체험세계로 생각한다면 정치의 고유함은 사라지며, 정치에 고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주체들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의 주체가 정의되는 모순적인 두 항들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다. <br />
<br />
<br />
<br />
<br />
<br />
2. 정치의 고유함은 대립되는 것들에 참여하는 것으로 정의되는 주체의 실존이다. 정치는 역설적인 행위 유형이다. <br />
<br />
<br />
- 정치는 평등한 자들에 대한 지배이며, 시민은 지배한다는 사실과 지배받는다는 사실에 참여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정식의 역설. 삶과 좋은 삶의 대립을 이어받는 행위의 두 양식(포이에시스-프락시스)이라는 고전적 대립으로는 이 역설을 극복할 수 없다. 아렌트에게 프락시스는 archein(시작하다 = 지배하다 = 자유롭다 = 도시국가에 살다)의 힘에 있어서 평등한 자들의 질서이다. 그러나 archein, 즉 앞장서서 걷는 자가 있으면 다른 자들은 반드시 뒤에서 걷기 마련이다. 아르케의 논리는 한정된 열등에 대해 행사되는 한정된 우월을 전제하는데, 정치의 주체 그리고 정치가 있기 위해서는 이러한 논리와 단절해야 한다. <br />
<br />
<br />
<br />
<br />
<br />
3. 정치는 아르케 논리와의 특정한 단절이다. 그것은 사실 힘을 행사하는 자와 그것을 감수하는 자 사이의 ‘정상적인’ 위치 분배와 단절하는 것을 전제할 뿐만 아니라, 이 위치들에 ‘고유하게’ 만드는 자질들에 대한 관념과 단절하는 것이다. <br />
<br />
<br />
- 플라톤은 통치할 자격들과 통치받을 자격들을 체계적으로 조사했다(법률 3권). 그가 고려하는 일곱가지 자격들 중 네 가지는 본성의 차이, 출생의 차이에 바탕을 둔 전통적인 권위의 자격들(부모, 연장자, 주인, 귀족)이다. 다섯 번 째 자격은 우월한 본성의 권력, 더 약한 자들에 대한 더 강한 자들의 권력이며, 여섯 번 째 자격은 알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아는 자들의 권력이다. 즉 본성상의 우위와 앎의 지배가 있다. 하지만 일곱 번 째 자격이 있는데 이는 신의 선택에 속하는 것으로, 누구에게 아르케의 행사가 돌아갈지 지정해주는 제비뽑기의 사용이다. 민주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제비뽑기, 즉 통치할 자격의 부재다. 민주주의는 자격의 부재가 아르케를 행사할 자격을 부여하는 특정한 상황이다. 민주주의는 시작 없는 시작이며, 지배하지 않는 자의 지배이다. <br />
<br />
<br />
<br />
<br />
<br />
4. 민주주의는 하나의 정치 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아르케 논리와의 단절, 곧 아르케의 자질로 지배를 예견하는 것과 단절하는 것이며, 특정한 주체를 정의하는 관계 형태로서 정치 체제 자체이다. <br />
<br />
<br />
- 민주주의의 공리를 구성하는 인민의 자유의 실질적 내용은 지배의 공리계(지배할 능력과 지배받을 능력의 상관관계)와 단절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어느 특수한 정체를 뜻하는 정치 체제가 아니라, 정치를 설립하는 것institution, 정치의 주체와 그것의 관계 형태를 설립하는 것이다. 데모스의 통치는 통치할 자격을 갖지 않았음을 유일한 공통의 특성으로 갖는 자들의 통치이다. 데모스는 셈 바깥에 있는 자, 말하지 않아야 하는데 말하는 자, 몫이 없는 것에 몫을 갖는 자이다.<br />
<br />
<br />
<br />
<br />
<br />
5. 민주주의의 주체인, 따라서 정치의 모체가 되는 주체인 인민은 공동체 성원들의 모임도 노동하는 주민 계급도 아니다. 인민이란 주민의 부분들에 대한 모든 셈과 비교하여 보충이 되는 부분으로서 셈해지지 않은 것들에 대한 셈을 공동체 전체와 동일시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br />
<br />
<br />
- 인민(데모스)은 인종과 다르고, 주민의 한 부분이나 부분들의 합계와 다르다. 인민은 정당한 지배 논리들을 중단시킴으로써 주민을 그 자체로부터 탈구시키는 보충이다. 인민이란 출생의 원칙을 이어가기 위해 부의 원칙을 부여하는 논리를 가로막은 고안물artifice이다(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인민은 셈해지지 않은 것을 셈하기 혹은 몫 없는 자들의 몫, 최종심급에서 말하는 자들의 평등을 기입하는 보충적인 존재이다. 민주주의는 공동체를 사회체의 부분들의 합에서 분리하는 텅 빈 보충적 부분을 공동체 전체와 동일시한다. 이 근본적 분리는 정치를 사회의 부분들에 대한 모든 셈과 비교하여 잉여로서 스스로를 기입하는 보충적 주체들의 행위로 정초한다. 정치 문제의 모든 핵심은 공백과 잉여를 해석하는 것에 달려 있다. 클로드 르포르의 민주주의론에 대한 두 가지&#160;해석(공백은 아나키, 공백은 왕의 인간적이고 신적인 이중 신체를 해체함으로써 나오는 산물). 그러나 인민의 이중적 신체는 주권자의 신체를 희생시켜 나온 것이 아니라 정치를 구성하는 것으로 원래 주어져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더불어 정치를 정초하는 아르케의 분할은 어떤 정초적 희생이 아니라 모든 희생적 신체의 중화이다.<br />
<br />
<br />
<br />
<br />
<br />
6. 만일 정치가 사회적 부분들과 몫들의 분배와 함께 사라져가는 차이에 대한 설계도라면, 그로부터 정치의 실존은 조금도 필연적이지 않으며, 지배 형식들의 역사 속에서 언제나 잠정적인 우연적 사건으로서 도래한다는 것이 따라 나온다. 또한 마찬가지로 정치적 계쟁은 정치의 실존 자체를 그 본질적인 대상으로 한다는 사실이 따라 나온다. <br />
<br />
<br />
- 인민이 셈해지지 않은 것을 셈하는 특정한 형상이나 몫 없는 자들의 특정한 형상을 사회의 부분들에 대한 모든 셈에 보충으로 기입하는 주체일 때 정치는 존재한다. 이러한 몫이 존재하느냐 아니냐가 바로 정치의 쟁점이며 정치적 계쟁의 대상이다. 부자들과 빈자들의 싸움은 단어들이 나눠질 수 있는 가능성을 위한 싸움이며, 공동체를 다른 식으로 셈하는 범주들을 설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위한 싸움이다. 공동체의 부분들을 셈하는 두 가지 방식. 첫 번째 것(치안)은 사회체를 구성하는 출생, 직무, 자리, 이해의 차이들로 정의되는 실제 부분들을 셈하며 모든 보충을 제외한다. 두 번째 것(정치)은 몫이 없는 자들의 몫을 더 셈한다.<br />
<br />
<br />
<br />
<br />
<br />
7. 정치는 특정하게 치안과 대립한다. 치안은 공백과 보충의 부재를 원리로 하는 하나의 감각적인 나눔이다. <br />
<br />
<br />
- 치안은 사회적인 것의 상징적 구성이다. 치안의 본질은 억압이 아니며 생명체에 대한 통제(예컨대 푸코)도 아니고, 감각적인 것의 나눔이다. 이는 지각 방식들을 규정함으로써 참여/몫을 가짐의 형식들을 규정한다. 치안의 본질은 공백과 보충의 부재로 특징지어진다. 없는 것에 대한 배제야말로 치안 원리이다. 정치의 본질은 공동체 전체와 동일시되는 몫 없는 자들의 몫을 보충하면서 이 타협을 교란시키는 것이다. 치안은 정치의 논리를 부정하지만, 정치의 본질은 가시적인 것과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개입이며 치안으로부터 정치를 분리하는 것이다. <br />
<br />
<br />
<br />
<br />
<br />
8. 정치의 중대한 작업은 그것의 고유한 공간을 짜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의 주체들의 세계 그리고 정치가 작동하는 세계를 보이게 만드는 데 있다. 정치의 본질은 두 세계가 하나의 유일한 세계 안에 현존하는 불일치를 현시하는 것이다. <br />
<br />
<br />
- 공적 공간에 치안이 개입하는 것은 시위자들을 호명(알튀세르)하는 것이 아니라 해산시키는 것으로 이뤄진다. 치안은 도로를 그저 통행 공간일 뿐이라고 말한다. 정치는 이 통행 공간을 한 주체의 현시/시위 공간으로 변형하는 것으로 이뤄진다. 정치는 공간의 모양을 바꾸는 것, 거기서 할 것이 있고 볼 것이 있으며 명명할 것이 있는 것으로 바꾸는 것으로 이뤄진다. 정치는 공동체의 모든 nomos를 정초하는 나눔nemein 위에 설립되는 계쟁이다. 정치란 보이지 않았던 것을 보게 만드는 것, 소음으로만 들릴 뿐이었던 것을 말로서 듣게 만드는 것, 쾌나 고통의 표현으로 나타난 것을 공통의 선과 악에 대한 느낌으로 나타나게 만드는 데 있다. 정치의 본질은 불일치, 감각적인 것과 그 자체 사이의 틈을 현시하는 것이다. 정치적 현시는 보일 이유가 없던 것을 보게 만드는 것, 한 세계를 다른 세계 안에 놓는 것이다. 정치적 불일치의 고유함은 대화 상대자들나 토론의 대상 또는 무대가 미리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있기에 정치는 의사소통 행위 모델(예컨대 하버마스)과 동일시될 수 없다. 정치적 논증이란 분리된 세계들을 한데 모아놓는 역설적인 세계의 구성이다. 정치적 주체는 계쟁이라는 특수한 주체화 장치를 작동시키는 자이다. 정치적 현시는 늘 일시적이고 그 주체들은 늘 불안정하다. 정치적 차이는 언제나 소멸의 가장자리에 있다. <br />
<br />
<br />
<br />
<br />
<br />
9. 정치철학의 고유함이라는 것이 고유한 존재 방식 속에서 정치행위를 정초하는 것인 한, 정치철학의 고유함은 정치를 구성하는 계쟁을 삭제하는 것이다. 정치 세계를 묘사하는 가운데 철학은 이 계쟁 삭제를 실행한다. 또한 그것의 실효성은 이 세계에 대한 철학적이지 않은 반철학적 묘사들 속에서까지 이어진다. <br />
<br />
<br />
- 정치철학이라는 용어로 아르케 법의 비호 아래 정치를 재위치시키려는 철학의 노력이 은폐된다. 플라톤은 아르케-정치를 도시국가의 에토스와 노모스 사이의 단일성의 법칙으로 세우고 정치와 치안을 동일시한다. 그는 또한 정치 형태들에 대한 사회학적 혹은 정치학적 분석과 철학적 선험주의 사이의 대립형태들을 발명한다. 정치적인 것에 대한 사회-론(토크빌), 정치적 삶의 순수성에 대한 주장, 공화주의적 재정초의 선험주의(아마도 아렌트). 이러한 정치와 정치철학의 회귀는 정치를 망각하는 것으로 향한다. &#160;<br />
<br />
<br />
<br />
<br />
<br />
10. 정치의 종언과 정치의 회귀는 사회적인 것의 상태와 국가 장치의 상태 사이의 단순한 관계 속에서 정치를 제거하는 상호 보완적인 두 방식들이다. 합의는 이러한 제거를 가리키는 통속적인 이름이다. <br />
<br />
<br />
- 정치의 본질은 사회가 사회 자체에 대해 갖는 차이를 현시하는 불일치하는 주체화 양식들에 있다. 합의는 정치를 치안으로 환원한다. 정치의 회귀와 정치의 종언은 같은 효과를 내는 대칭적인 두 해석들이다. 순수 정치로의 회귀는 사회적인 것이 정치의 계쟁 대상 자체라는 사실을 감추며 정치를 국가적 실천과 동일시한다. 정치의 종언에 대한 사회론적 테제(헤겔-후쿠야마 또는 하이데거-상황주의자 식의 비의적 판본) 역시 사회적인 것의 상태를 제시함으로써 정치의 존재 이유를 없앤다. 이 테제는 자본주의가 정치의 소권 소멸을 이끈다는 것으로 요약되는데 이 역시 정치를 국가적 실천과 동일시한다. 정치의 회귀를 주장하는 철학자와 정치의 종언을 주장하는 사회학자들 사이의 논쟁은 정치를 취소하는 합의의 실천을 해석하기 위해 정치철학이라는 전제를 취해야만 하는 질서 위에서 벌어지는 것이다.&#160;&#160;<br />
<br />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57/49/cover150/1844675777_1.jpg</url><link>http://foreign.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1844675777</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책의 감옥</category><title>플라톤과 허무주의 극복 외(박홍규)</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3624070</link><pubDate>Mon, 12 Apr 2010 12:3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3624070</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6000229983&TPaperId=3624070"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47/40/coveroff/8937422115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22115&TPaperId=3624070"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94/2/coveroff/8937422115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160;철학, 형상, 인식, 상기, 무한정자 등등에 대한 해설.&#160;&#160;&#160;
박홍규 교수는 그러니까 선생님들의 선생님인 셈인데.. 요새는&#160;
이런 강의가 없다는 게 아쉽다.
&#160;
<br />

박홍규 형이상학 강의 2권 <br />
<br />

철학이란 무엇인가? 1988. 12. 11<br />
<br />

능력은 희랍어로 dynamis야. dynamis라는 것은 무엇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인데, 가능성에는 될 수 있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고, 두 가지가 있어. 가능성은 항상 존재에 대한 가능성이야. 그것은 동시에 그렇게 안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지. 그게 항상 따라다니는데, 그러한 부정의 가능성을 우리는 존재의 가능성에 대해서 우연성이라고 해, 우연성. (79)<br />
<br />

<br />

기독교에서 신은 전지전능이라고 하거든? 왜 그러냐 하면, 희랍의 신은 어떤 재료나 질료matter가 있어야 가공한다는 점에서 제약이 있는데, 기독교에서의 신은 허무에서 만들어내기 때문에 전지전능하지 않느냐는 거야. 그런데, 희랍 철학에서는 존재와 무 사이에는 가능성이라는 말을 쓰지 않아. 가능성에는 연속성이 들어가야 돼. 개연성probability에는 연속성이 들어가. 한순간에 탁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야. 그러나 존재와 무 사이에는 한 순간에 탁 창조돼. 가능성은 죽 연속적으로 이뤄져. 그러다가 어디서 빗나갈 수도 있고, 이렇게 갈 수도 있고 저렇게 갈 수도 있어 (...) 지식은 요컨대 일정한 능력인데, 능력은 연속적으로 그 힘이 발휘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실현돼.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것은 의미가 없어. (81)<br />
<br />

<br />

우리의 인식 주관, 영혼에는 기본적이고 선험적a priori인 성격으로서 능력이 들어 있어. 능력이 들어 있으니까 영혼은 항상 선험적으로 과오에 빠질 수 있어. 따라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지능은 허위에 빠질 수도 있고 빠지지 않을 수도 있어. 그래서 허위에 빠지지 않도록 끌고 나가야 돼. 능력을 발휘하도록 옆에서 도와줘야 돼. 능력은 그대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이 있어야 발휘되니까. 그것이 대화야. 소크라테스가 산파 역할을 해서 이끌어줘. 도와주는 거야. 그럼 누가 인식을 하느냐? 소크라테스가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화자 자기 자신이 스스로 인식을 해. (...) 기계는 인과법칙으로 가지만, 능력은 자기운동autokinēsis의 그 자기auto에서 나왔기 때문에 기계가 될 수 없어. 타고난 본성에서 나온거야. 기계는 외부에서 힘이 주어진 것이야. (82~3)<br />
<br />

<br />

물질에는 인식이 없다. 왜냐하면 물질의 운동은 자기 동일성identity을 가질 때에는 인과율의 법칙을 따라가니까. 요컨대 선택이 없어, 선택. 그래서 하나야. 힘이 외부에서 주어져. 영혼은 자기 내재적인 것이고. 물질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겠지만, 요컨대 신체sōma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자신kath'hautēn, 즉 우리의 영혼이 가지고 있는 지적 능력을 방해하고 제한하더라는거야. (85)<br />
<br />

<br />

후기 자연철학은 항상 끊어져 있어. 그런데 초기 자연철학은 끊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물활론이라든지, 헤라클레이토스가 그 대표적인 것인데, 만물은 흐른다는 거야. 끊어져 있지 않아, 이게. 만물은 흐른다는 것은 정적인 공간이 나와 있지 않다는 거야. 지능 발달은 처음에는 정적인 공간이 나오지 않는 동적인 우주에서 정적인 우주로 간다는 거야. (89)<br />
<br />

<br />

그러니까 자신kath'hautēn이라는 것은 인식의 주체자가,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에서, 우리의 상상력이든지 우리의 인식 속에 들어 있는 것이든지 뭐든지 간에,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났다는 얘기야. 완전히 독립했다. 그래야 그것이 자기 인식의 주체자가 될 수 있는 것이지, 타자에 따라 다닌다면 인식의 주체자가 될 수 없어. 그것에 종속되니까. (92)<br />
<br />

<br />

그러니까 사물 그 자체를 그것으로서 인식하는 능력은 이런 순수사고에서만 가능하다는 말이야. 가령 행동에서 관심이 들어간다는 것을 우리가 부정하는 것이 아니야. 그런데 그것에만 국한시키려는 사람이 있어. 그런 사람에 대해서 뭐라고 답변해야 하냐면, 관심이 들어간다는 그 사실을 사실로서 자기 동일성을 주면서 인식할 수 있는 그 능력은 무엇이냐를 물어야 돼. (...) 요컨대 인간이 물리적 세계에 있을 적에는 관심도 나오고, 상호 주관성도 나오고, 모조리 다 나와. 상대성도 나오고 의미 부여도 나오고 (93)<br />
<br />

<br />

요는 비물리적 세계에서 이뤄져야만 학문적입 합의가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학문적인 합의가 아니라 단순히 사상에서의 합의야. 그런건 의견doxa이라 그래. 사회사상과 사회학은 달라. 사회사상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견해이고, 내가 거기에 따라가느냐 아니냐, 그것뿐이야, 검증이 필요없어. (95)<br />
<br />

<br />

신체, 물리적 세계에서 벗어난 영역에서 주어진 형상eidos을 갖고, 인식 내용을 갖고 반성해야 돼. 그래야 내포implication를 가지고, 그것이 들어 있는 사물의 자기 동일성이 확정돼. (...) 감각적인 대상은 우리의 감각적인 오관에 대상Gegenstand으로서 나와야 돼. 그런 것만 인식이 되지, 그렇지 않으면 인식이 되지 않아. 운동 자체니 뭐 그런 것은 다 되질 않아. 그러나 물리적 세계를 벗어난 세계에선 모든 것에 자기 동일성이 주어진다면 - 이것이 대단히 중요해 - , 그것이 어떤 성질이든지 간에 인식의 대상이 된다, 그 말이야. (100)<br />
<br />

<br />

요컨대 동일성에 입각한 정의를 내리면 뭐든지 인식 대상이 돼. 그러한 인식 대상은 어느 차원에서 이루어지느냐 하면 이 물리적 세계에서 이뤄진 것은 아니라는 말이야. 동일성을 부여하는 우리의 영혼 속에서... (103)<br />
<br />

<br />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으뜸 되게 탁월하게 사물을 취급하는거니까, 가능한 한 하나라도 남겨놓지 않고 취급해야 탁월하지, 그렇지 않으면 탁월하다고 말 못하지. 그러니까 탁월함의 극한치는 그때그때 주어진 지식 내용의 전부를 총체적으로 연관지어서 그것이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을 따져야 돼. 한 사물이 주어질 때 그것만 취급하면 안 돼. 모든 사물과의 총체적인 연관 하에서 취급해야 탁월해. 알아들었지? 철학의 의미는 그거야. (110)<br />
<br />

<br />

철학이란 것은 탁월한 지식인데, 탁월하다는 것은 정도차가 있어. 그런데 어떤 것이 탁월한 지식이냐 하면 요컨대 그것이 연속적으로 우리의 실증 과학에 탁월하게 일치하는 것이어야만 돼. 그래야 탁월한 형이상학이 돼. 탁월하게 검증될 수 있는 것, 탁월하게 실증 과학과 합치해야만 탁월한 철학이 되지, 검증될 수 없는 것은 플라톤에 의하면 억견doxa이야. 허구적fictive인 것이야. (116)<br />
<br />

<br />

이 세상에 완전한 철학은 없고, 어느 철학이든지 간에 문제가 있어. 베르그송 같은 철학은 생물과 무생물을 설명하는 데에는 참 좋은데, 그렇게 하면 공간의 자립성이 없어져. 실제 실증 과학하고 실질적으로 이론상 차이가 없어. 무생물만이 형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베르그송 이론이 옳아. 왜냐하면 그것은 정지해 있으니까, 운동하지 않으니까. 만약에 완전한 철학이 있다면 하나의 철학만 있을 것 아냐? 그러니까 우리가 정의definition할 때부터 어떻게 정의할 것이냐, 이것 자체가 문제거든. 그래서 그것을 가정hypothesis이라고 하는 거야. 완전한 정의가 나오면 사람들이 이 우주를 다 알게? 곤란하지? 그러니까, 플라톤 존재론의 기본적 성격은 전체pan를 찾으려는 것인데, 전체라는 것이 다 극한적인 일부분에서만 성립하더라는 거야. (117)<br />
<br />

<br />

<br />

<br />

&lt;플라톤과 허무주의 극복&gt; 1989. 12<br />
<br />

테아이테토스 편에서 하는 얘기가 인식은 인식한다고 해서 외부 대상에 대해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는 거야. 그러면서도 그 내용이 우리에게 들어와서 그대로 있다가 다시 외부로 그 대상을 찾아가서 일치해. 그동안 하나도 안 변해. 변해 버리면 인식이라고 하지 않아. 변해버리면 재인이 되지 않으니까. (139~140)<br />
<br />

<br />

감각하는 그 인식 기능의 속의, 속의, 속에는 순수pure하게 어떤 것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 주체성이 있는데 그때 파악되는 것이 형상eidos이야, 사유물noēton이야. 거기서는 사물의 순수한 자기 동일성identity이 나와. 감각 세계 속에서는 그것이 운동과 더불어 나타나. 운동은 생성과 소멸을 가지고 와. (...) 형상이 존재적인 존재자라는 것은 무슨 얘기냐? 그것은 단순히 거기서 사물의 본질이 명료clear하게 드러났다는 얘기가 아니라, 형상은 그 자체로서 모든 생성과 소멸로부터 벗어났다는 얘기야. (142)<br />
<br />

<br />

요컨대 형상 학설은 허무주의가 극복되지 않는 한, 우리의 인식 능력이 사실을 사실대로 그리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거야. 그러니까 허무주의의 완전한 극복이 선행되어야만 우리의 인식이 사실을 사실대로 기술한다describe는 것이 의미가 있는데, 그것이 어디서 이루어지느냐 하면 바로 형상에서 이루어지더라는 얘기야, 간단히 얘기하면. 알아들었나? 형상에 대한 기술, 인식은 언제든지 재인이 가능해. 플라톤의 입장에서는 건강한 한, 항상 재인이 가능해. (143)<br />
<br />

<br />

모순은 언제 성립하느냐 하면 존재와 무가 부딪치는 그 한계선에서 성립해. 무엇인가를 구별하려면, 가령 이것은 존재고, 이것은 무라는 그 한계가 꼭 드러나야 해. 애매하면 무엇인지 몰라. 그런데 한계를 넘어서려고 한다면 어떻게 하느냐? 한계를 잘라야하는데, 그 자르는 곳에는 연속성이 있더라, 연속성이 한계를 자르더라, 다시 말해 모순을 극복하는 것은 연속성이더라는 말이야. (...) 무한정자apeiron는 모순으로 빠지는 것을 방해하는 방파제야. 무한정자, 연속성이라는 것은 동시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야. 항상 과정process으로서만 주어져. 한번에 주어지지 않아. 그러니까 연속성에는 항상 과정이 들어가. 과정이나 연속성이나 철학적으로 보면 똑같은 것의 양면이야. 그런데 과정은 그 자체 연속성의 원인으로서 한정되어definite 있지 않기 때문에 한정적인 것의 보충을 받아야 되는데, 그렇게 보충해주는 것이 형상과 제작자dēmiourgos야. 다시 말하면 무한정자 속에서 드러나는 한에 있어서만 존재가 드러나고 그럼으로써 모순은 극복된다는 말이야. 이것이 플라톤의 입장이야. 그러니까 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무한정자는 존재를 분열시키는 원인이 되지만, 동적인 측면에서 보면 모순을 극복하는 방파제야. 제삼자야. 밖에 있어. (...) 그러니까 존재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타나는 한에 있어서만 파악이 된다는 말이야. 아무리 이론적으로 따져도 그것을 벗어날 수가 없어. 그러면 우리 학문이라는 것은 뭐냐. 간단히 말해 그것은 연속성의 법칙에 따라가는 것이야. (148)<br />
<br />

<br />

우리의 지능이라는 것은 발달하면 할수록 분화되거든. 그래서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고, 무엇이든 이렇게 딱딱 구분해서 정의를 내려. 그렇게 구분하고 정의 내리기 시작한 사람이 누구냐면 플라톤이야. 희랍에서는 기독교와 같은 종교가 없어. (151)<br />
<br />

<br />

종교는 종교고, 학문은 학문이고 서로 달라. 존재가 무와 직접적인 관계에 있을 때는 신앙의 문제이고, 그것을 연속성의 관계로 나타내려고 할 때는 학문의 문제야. 연속성은 무엇이냐 하면 무한정자, 다시 말해 존재와 무에 대해 제삼자, 존재와 무 어느 것도 아닌 것이야. (...) 존재와 무의 관계 속에는 두 번이라든지, 세 번이라든지, 그런 것은 없어. 되풀이되는 것은 연속성에서만 있어. 부활을 교리로 따져보면 그것은 학문이 아니야. 그러니까 신학이나 교리라고 하는 것은 학문과 기독교의 한계선에서 성립해. (152~3)<br />
<br />

<br />

고르기아스 같은 허무주의는 왜 나오는가를 좀 생각해봐. 파르메니데스와 같은 존재론에서 나와. 이것이냐 저것이냐entweder-oder에서. 이 세상에 나타난 허무주의 중에서 고르기아스의 허무주의처럼 극한적인 허무주의는 없어 (...) 왜 그런 생사의 문제가 하나의 시대적인, 커다란 철학의 동인motivation이 되었느냐 하는거야. 왜 그럴까? 반드시 전쟁 중에는 허무주의가 나오게 마련이야. (...)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사고는 전쟁 때 나와. (154~5)<br />
<br />

<br />

플라톤은 허무주의가 무한정자의 영향이라고 해. 그러나 그것은 정적인 차원에서 보니까 그렇지, 동적인 차원에서 보면 그래도 무한정자가 허무로 돌아가는 것을 막아주는 방파제라는 거야.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허무로 돌아가지 않아. 실재는 객관적이고. (157)<br />
<br />

<br />

중요한 것은 인식 기능은 하나의 활동인데, 수동성passivity이 빠져. 수동성이 빠지지 않으면 영향을 받고, 그때그때 변질해버려. 그러면 인식의 주체자가 될 수 없어. 변하지 않아야지. 그래야 순수한 활동이라고 해. 불사적athanaton이야. 그것을 자발성이라고 하지. 그것은 내용이 하나도 없어. (...) 그것에 의해서 파악이 되는 것이 형상eidos인데, 거기서는 생성과 소멸이 빠져나가. 빠져나가니까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잖아. 형상은 없어지지 않잖아. 항상 그대로 있어. 항상 존재existence해. 그러니까 형상은 허무주의의 극복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지 않는 한, 의미가 없다는 얘기야. 플라톤은 본성 속에physei 형상이 있다는 거야. 자체적인 것으로kath'hauto으로, 참된 존재ontōs on로. (158)&#160;<br />
&#160;
<br />

<br />

&lt;플라톤과 전쟁&gt; 1990. 6. 17<br />
<br />

종교문제를 플라톤은 어떻게 풀었느냐? 그게 파이돈 편이거든. 죽음의 문제가 나올 수 밖에 없어. (...) 그러면 플라톤의 죽음의 문제는 무엇이냐? 어떤 해결책이냐? 윤회설이야. (...) 그러면 이 세상과 저 세상의 관계는 어떤 것이냐? 일자의 타자와의 관계야. 영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야. 있는 데서 없어졌다는 것은 플라톤 철학에서는 성립되지 않아. 기독교에서는 있는 데서 없어진다는 모순을 보장하기 위해서, 없는 것이 생긴다는 역기능에 의해서 그것을 보충하지만, 플라톤에서는 그러지 않는단 말이야. 죽는다, 없어진다는 것은 플라톤에서 성립이 되지 않아. 영혼이 없어진다는 것은 성립이 안 돼. 이 세상은 항상 타자의 세계야. 다만 분리되어서 영혼이 타자의 세계로 간다. 그것뿐이야. 일자에서 타자로 넘어간다, 타자에서 일자로 넘어온다, 생겨나는 것은 그것뿐이야. 영혼은 그전부터 있었고, 저쪽에 있는 생은 이쪽에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거야. 여기서 철학자처럼 세상 일에 관여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 오는 모든 신체적인 요소에서 쾌락이나 감각 같은 것에 매달리지 않고 깨끗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기서 영혼 자체가 완전히 분리될 수 있고, 자체적인 것kath'hauto이 되어서 저쪽에 있는 존재자의 세계의 진상을 자체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 존재와 무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이란 것이 무엇이냐? 아무리 잘한 사람이나 못한 사람이나 죽으면 모두 허무로 돌아간다는 것은 똑같은 것이며, 부정은 모든 것에 대해서 똑같아. 다 없어지고 죽어버리면 그만이야. 죽음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 똑같아. 플라톤은 다 같지 않아. 여기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져. (187~9)<br />
<br />

<br />

객관적인 것이 무너질 때는 어떻게 되느냐, 윤리적 허무주의가 나와. nomos는 우리 인간의 능력, 힘을 조절해 주는 기능을 해. 그것이 없어지면 조절받지 않은 힘이 나와. 최후에 가서는 힘 자체가 나와. 그래서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주장these이 나와. 힘이 나와. 또 인식론적 허무주의가 나와. (192) <br />
<br />

<br />

상기설뿐만 아니라, 테아이테토스 편에서는 자기는 대화에서 상대방에게 산파술만 행한다는 거야. 그게 무슨 얘기냐? 평화 시대에는 객관적인 규칙 이있어서 정보를 전달하면 돼. 그러나 여기서는 내 주관적인 견해거든. 그러니까 진리의 인식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의 바탕에서는 성립할 수 없고, 신체 - 사회에 들어가려면 신체, 일종의 연장성이 필요해 -에서 벗어난 영혼 속으로 들어가야 된다는 거야. (194) <br />
<br />

<br />
<br />

<br />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94/2/cover150/8937422115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22115</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책의 감옥</category><title>파이돈 상기 논증</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3621932</link><pubDate>Sun, 11 Apr 2010 19:37: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3621932</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019953893X&TPaperId=3621932"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497/44/coveroff/019953893x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0192839535&TPaperId=3621932"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22/9/coveroff/0192839535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0606202&TPaperId=3621932"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41/15/coveroff/8930606202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올해도 어김없이 환절기 감기가 ㅠ 어서 육신을 벗고 혼을 순수하게 하는 활동을..&#160;
&#160;
파이돈&#160;&#160;
recollection argument(72e~77d)<br />
<br />
<br />
<br />
<br />
<br />

&#160;
&#160;
&#160;
&#160;
&#160;
&#160;
&#160;
1. 상기 논증의 도입(72e~73a)<br />
<br />
<br />
&#160;케베스는 소크라테스가 자주 말해왔던 배움(learning/Lernen/instruction)이란 상기함(recollection/Wiedererinnerung/ressouvenir)이라는 주장을 환기시킨다.&#160;이에 따르면 우리가 지금 상기하게 되는 것들을 이전에 어느 때인가 우리가 배웠던 것이다. 그런데 이는 만일 우리의 혼이 지금의 인간적인 모습으로 태어나기 이전에 어딘가에 있지 않았다면 불가능하다. 이런 면에서 혼은 죽지 않는 어떤 것이다. 케베스가 설명하길 사람들이 질문을 받을 때, 만약 누군가가 훌륭하게 질문을 할 경우, 모든 것을 진실 그대로 스스로 말한다. 그러나 이는, 이 사람들에게 앎(knowledge/Erkenntnis/science)과 바른 추론 능력(correct&#160;account/richtige&#160;Einsicht/jugement droit)이 이들 안에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상기의 과정은, 누군가가 그들을 도형이나 그런 유의 다른 어떤 것으로 인도할 때 명확하게 증명된다.1)<br />
<br />
<br />
<br />
<br />
<br />
2. 소크라테스의 상기 논증 개시(73c1~74a8)<br />
<br />
<br />
&#160;케베스의 설명을 듣고 난 뒤에도, 시미아스는 배움이 왜 상기인지 의아스러워한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논증을 시작한다. <br />
<br />
<br />
2-1. 상기의 일반적 조건 제시(73c1~74a7)<br />
<br />
<br />
명제 : 만일 y에 의해 x를 상기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네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br />
<br />
<br />
1) 우리는 x를 사전에 알고 있어야만 한다(73c1~c3). 2) 우리는 감각적 지각(sense-perception/wahrnehmen/sensation)을 통해 y를 알아볼(recognize/erkennt/connaître) 뿐만 아니라 또한 x에 대해 생각하게(think of/vorstellt/a l'idée de) 된다(73c6~c8).2)3) x는 y와 같은 앎의 대상이 아니라 다른 앎의 대상이다(73c8~c9). 4) x가 y를 닮았을 때, 우리는 x에 대해 y가 부족하지 않은지 생각하게 되는 것이 필연적이다(74a5~a7). <br />
<br />
<br />
2-2. 상기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예시(73d~73e) : 1) 리라를 보고 리라의 임자인 소년의 모습(form/Bild/image)을 떠올리는 경우 2) 누군가가 시미아스를 보고 케베스를 상기하는 경우 &#160;3) 그린 말들이나 그린 리라를 본 이가 어떤 사람을 상기하는 경우 4) 그린 시미아스를 본 이가 케베스를 상기할 경우 5) 그린 시미아스를 본 이가 시미아스 자신을 상기하게 될 경우<br />
<br />
<br />
&#160;<br />
<br />
<br />
☞ 요컨대, 상기란 감각적 지각을 통해 알게 되는 개별자를 혼이 이전에 인식하고 기억하는 보편자인 형상에 비추어 평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2-1에서 4)의 조건, 즉 닮음에 의해 상기를 할 때, 상기함의 실마리가 된 것이 그 유사성에 있어서 어떤 점에서 부족한지 아닌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은 과연 필연적인가? 가령 사람들이 그림을 부족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은 그것이 단순히 이미지인 탓으로 그림의 원본이 되는 것이 갖는 특성들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어떤 초상화를 보고서 그것이 어떤 인물보다 부족하다고 늘 말하는가? 그것은 매번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판단이 아니라 실제로는 당연시되고 무시되는 사실이 아닌가? <br />
<br />
<br />
&#160;그런데 2-2의 사례들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상기되는 것이 같은 앎의 대상이 아니라 다른 앎의 대상이라고 하는 문장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것이다. 가령 리라에 대한 앎과 사람에 대한 앎이 다르다는 것은 리라의 개념과 사람의 개념이 다르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때 쉽게 이해된다. 그러나 시미아스와 케베스의 경우는 동일한 방식으로 간주될 수 없다. 케베스나 시미아스나 수적으로 구분되는 것이지 인간이라는 종적 개념에 의해서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리라를 보고 그 주인을 상기하는 경우 양자는 원본과 복사본을 따질 필요가 없이 동등한 존재의 질서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을 보고 그림에 그려진 원래의 대상을 상기하는 경우는 양자가 원본과 복사본의 관계인 경우이다. 따라서 위에서 제시된 사례들 중 형상과 감각적 개별자의 구분에 가장 적합한 것은 시미아스와 그림 시미아스의 경우일 것이다. 위 논변의 요점은 우리가 그림 시미아스를 시미아스와 연관시키는 것은, 시미아스에 대한 선지식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위에서 제시한 모든 경우에 있어서, 상기함은 닮은 것들로 또는 닮지 않은 것들로 해서도 성립하는 것이지만(74a2~a3), 닮은 것으로부터의 상기와 닮지 않은 것으로부터의 상기는 대칭적이지 않다. 그림을 보고 시미아스를 떠올리는 사람은 그림이 시미아스를 닮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그러나 리라를 보고 그 주인을 떠올리는 사람이 리라와 그 주인이 닮지 않아서 상기하는 것이 아니다(Gallop, 118). <br />
<br />
<br />
&#160;<br />
<br />
<br />
3. 같음 자체의 도입과 본격적인 상기 논증 <br />
<br />
<br />

&#160;3-1. 우리는 같음 자체가 무엇인지 안다(74a9~d3).<br />
<br />
<br />
&#160;&#160;소크라테스에 따르면, (1) 우리는 같은 무엇인가, 같음 자체(the equal itself/das Gleiche selbst/l'Égal en soi-même)가 있다고 본다(74a9~b1). (2) 우리는 이것이 무엇인지도(what it is/was es ist/que c'est quelque chose) 알고 있다(74b2~3). (3) 우리는 주위에 있는 같은 사물들, 예컨대 나무토막이나 돌들 같은 사물을 보고서 이것들과는 다른 같음 자체를 생각하게 된다(74b4~b6). (4) 같은 나무토막들이나 돌들은 똑같은 것들이면서도, 때로 어떤 이에게는 같아 보이지만, 어떤 이에게는 같아 보이지 않는다. 같은 것들 자체(the equal themselves/die gleichen Dinge selbst/L'Égal en soi)는 때로는 같지 않은 것들로 보이는 것이 아니며 또는 같음(equality/Gleichheit/lÉgalité)이 같지 않음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같음 자체와 같은 것들은 다르다(74b7~c6). (5) 이들 같은 것들은 같음 자체와는 다른 것들인데도, 어쨌든 이것들로 해서 같음 자체를 생각할 수 있게 되고 같음 자체에 대한 앎을 얻는다(74c6~c10). 같음 자체는 같은 것들을 닮은 것이건 아니건 간에 상관없다. (6) 어떤 것을 보고서, 이 봄으로 인해 다른 것에 생각이 미치게 되는 한, 그것이 닮은 것이건 닮지 않은 것이건 간에, 이게 상기함이라는 것은 필연적이다(74c13~d3). <br />
<br />
<br />
<br />
<br />
<br />
☞ 소크라테스는 같음 자체라는 것이 있다고 하면서, 우리가 같음 자체에 대한 어떤 인식을 지닌 상태에서 그것을 준거로 대상들의 같음을 판단한다고 본다. 이때 같은 사물들과 같음, 같음 자체가 구별된다. 같음 자체는 기준이고 같은 것들은 이 기준을 통해 평가된다. 그런데 같음은 두 개 이상의 대상들에 대해서 쓰는 술어, 관계 개념이다. 그렇다면 같음 자체는 무엇과 같은 것인가? 역설적으로 같음 자체는 결국 감각적 사례들 어떤 것과도 같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같음의 형상은 비관계적인 속성(non-relational attribute)으로 간주되기 때문에(Gallop, 128), ‘같음 자체는 항상 같다’는 문장은 자기-지시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3)같지 않음 자체(Inequality itself), 부정의 자체, 나쁨 자체라는 형상이 존재할 수 있는가, 라는 점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이러한 형상이 범형(paradigm)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거부된다(Gallop, 125). <br />
<br />
<br />
&#160;『파이돈』에서 처음으로 형상 이론이 도입되는 위 대목과 이후의 논변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같음 자체를 단순히 같음의 ‘개념’이라기보다는 개별적인 같음과는 구별되는 객관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같음의 개념은 인식 능력의 일부라기보다는 인식 능력과 별개로 어디엔가, 예컨대 저승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것 같다. 그래야만 혼이 생시 이전에 이 앎을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같음은 우리의 개념적 사유의 결과가 아니며 오히려 같음 덕분에 우리가 개념적인 사유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형상들은 개별자들과 전혀 다른 질서에 속하는 초월적인 것이고, 좋음 자체와 같은 형상은 추상으로부터 나온 단순한 논리적 보편자가 아니라 개별자들에게 모범이 되는 객관적 실재이다(Bluck, 175). <br />
<br />
<br />
&#160;명제 (3), (4)로부터 (5)가 추론되는데, 이에 따르면 상기는 일종의 매개적 인식이다. 그러나 (6)의 주장처럼 x를 보고 y를 떠올리는 것이 상기가 되기 위해서는, y가 x를 봄과 동시에 상상된 어떤 것이나 인식 능력에 의해 고안된 허구가 아니라는 조건이 추가되어야 한다(Gallop, 126). y에 대한 생각이 상기이기 위해서는 y가 기억 속에 있다가 망각된 것이어야 하며(그러나 이것은 증명되어야 하는 사실이다), 비록 소크라테스는 양자가 닮거나 닮지 않거나 상관없다고 하지만, y와 상기의 실마리가 된 x 사이에 단순히 자의적인 연상 작용을 넘어선 긴밀한 관계(예컨대 닮음)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4)&#160; &#160; <br />
<br />
<br />
<br />
<br />
<br />
&#160;3-2. 우리는 형상에 대해서 개별자들이 갖는 부족함을 안다(74d4~75a4). <br />
<br />
<br />
&#160;&#160;(7) 같은 것들(나무, 돌)은 같음과 같은 그런 것이 되기에는 못 미치는 것이다(74d4~d8). (8) 주위의 같은 사물을 보면서 이들이 같음 자체에 미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이것이 닮기는 했으나 훨씬 모자란다고 그가 대비하여 말하고 있는 그 대상을 먼저 알고 있었을 것임이 필연적이다(74d5~e5). (9) 우리는 실제로 주변의 같은 것들을 보면서 같음 자체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74e6~e8). (10) 우리는 같은 것들이 같음과 같은 것이 되려고 하지만 훨씬 모자란다고 생각을 하기 이전에 같음(the equal/das Gleiche/l'Égal)을 먼저 알고 있는 것이 필연적이다(74e9~75a4). <br />
<br />
<br />
<br />
<br />
<br />
☞ 우선 (7)에서 같음 자체에 비해 같은 것들이 못 미친다는 표현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이는 a) 어느 사람에게는 같게 보이나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음을 의미할 수도 있고, b) 어느 때에는 같아 보이나 다른 때에는 그렇지 않을 수 있으며 c) 어떤 것과는 같으나 다른 것과는 같지 않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어떠한 경우로 보더라도 우리가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같음은 완전한 형상으로서 같음 자체에는 못 미친다는 뜻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내리는 판단의 배후에 형상이 있음을 환기시킨다. 즉 같음, 정의, 아름다움 등의 개념을 감각적 지각 자체에는 찾을 수 없지만, 우리는 일상적으로 어떤 사태에 대해 서술할 때 그러한 형상에 대한 관념을 갖고 있으며, 이를 잣대로 사용한다. 상기 논변의 주안점은 사물에 대한 경험적 인식을 위해서는 그에 앞서 반드시 일정한 보편적 앎을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기의 주체가 과연 누구인가 하는 점은 나중에 다시 문제로 등장하는데, 적어도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확실히 상기는 철학자뿐만 아니라 일상인 모두가 공통적으로 겪는 과정으로 여겨진다. <br />
<br />
<br />
&#160;(8)은 이후의 논증을 위한 중요한 전제로 도입되는데, 과연 이것이 필연적인 것인지가 문제가 된다. 우선 감각적 지각의 사물들이 갖는 속성이나 관계의 성격이 지닌 불완전성이 인지되기 위해서는 꼭 같음 자체라는 형상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실제 판단이 언제나 완전함의 형상을 구비한 후에 이루어지는가? 반드시 비감각적인 형상을 가정하지 않고서도, 서로 다른 여러 시점이나 관찰자에 따라 달라지는 경험들을 비교함으로써 특정한 같음이 불완전하다고 판단하는 것(Gallop, 127)은 불가능할까? 또한 같음 자체에 대한 앎이 판단에 있어서 필요함을 인정한다고 해도, 어떤 사물의 같음이 불완전하다는 판단 ‘이전부터’ 같음 자체에 대한 앎이 있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즉 어떤 방식으로든 그 판단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 같음 자체에 대한 앎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조건만으로도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br />
<br />
<br />
<br />
<br />
<br />
3-3. 만약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즉 우리의 감각을 하기 이전에 형상을 이미 알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개별자들을 형상들과 비교할 수 없었을 것이다(75a4~75c6).<br />
<br />
<br />
&#160;&#160;(11) 우리가 같음 자체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거나 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사물을 보거나 느끼거나 다른 감각적 지각으로 인해서이다(75a5~a10). (12) 모든 감각 대상이 같음 자체에&#160;이르고자 하지만 그것보다 모자라다고 생각하게 &#160;되는 것은 감각함(sense-perception/Wahrnehmung/sensation)으로 인해서이다(75a10~b3). (13)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감각적 지각을 통해 접한 같은 것들을 같음 자체와 관련지을(refer/beziehen/rapporter) 수 있으려면, 감각적 지각을 할 수 있기 이전에 같음 자체에 대한 앎을 갖고 있어야만 한다(75b4~b9). (14) 우리는 태어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as soon as we were born/gleich von unserer Geburt/dès notre naissance), 즉 태어난 뒤에 감각적 지각을 하게 된다(75b10~b12). (15) 그러므로 우리가 같음에 대한 앎을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갖고 있었음이 필연적이다(75c1~c6). <br />
<br />
<br />
<br />
<br />
<br />
☞ 실제로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어떠한 두 사물도 같음은 아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같음의 기준이나 개념,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감각적 지각은 같음 자체를 생각하도록 하는 실마리를 마련해준다.5)이때 (13)은 상기 논증의 핵심이라 할 수 있을텐데, “감각적 지각 이전”의 시점을 언제로 잡느냐가 논쟁거리이다. 감각 이전의 시점은 혼이 감각 지각 활동을 하기 이전일 수도 있고, 더 이전에 혼이 육체와 결합하기 이전일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 같음의 개념은 선험적인 것이 될 것이고, 후자의 경우 초월적인 것이 될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태어난 후와 감각활동 이전의 짧은 순간에 같음의 개념을 얻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가능성은 없을까? 만약 이렇게 본다면, 같음의 형상은 생시 이전에 존재함으로서 상기되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인식의 선험적 형식으로서 범주 개념 같은 것이 될 것이다. &#160; <br />
<br />
<br />
<br />
<br />
<br />
3-4.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형상들에 대한 앎을 망각하며 상기에 의해 형상에 대한 앎을 재획득한다(75c7~76d6). <br />
<br />
<br />
&#160;(16) 만일 우리가 같음 자체에 대한 앎을 망각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도 그것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75c7~e1). 즉 만약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이 앎을 갖게 되어 이를 가진 채로 태어났다면, 같음이나 더 큼과 더 작음뿐만 아니라 아름다움 자체, 좋음 자체 등 &#160;‘~인 것’이라는 표시를 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만약 그 앎들을 갖게 되고서는 그때마다 잊는 일이 없다면, 우리는 언제나 알고 있는 상태로 태어나 일생을 통해 늘 알고 있을 것이 필연적이다. 알고 있다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한 앎을 갖게 되고서는 이를 잃지 않고 지니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앎의 잃어버림은 망각이다. (17) 만일 우리가 같음에 대한 앎을 망각했다면, 같음을 인식하기 위해 상기가 필요하다(75e2~e8). 이는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갖게 되었다가 태어나면서 잃어버렸지만, 나중에 이것들과 관련하여 감각적 지각들을 이용함으로써 언젠가 우리가 갖고 있던 그 앎들을 도로 갖게 된다면, 우리가 배우는 것이라 일컫는 것은 자신의 것인 앎을 되찾아 갖는 것(regaining/Wiederaufnehmen/ressaisir), 즉 상기이다. (18) 따라서 우리 인간 모두가 같음 자체에 대한 앎을 지니고 태어나 일생을 통해 알고 있거나, 또는 우리가 상기에 의해서 그 앎을 획득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76a1~a8). (19) 모든 사람이 같음 자체에 대한 앎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76b1~c2). 알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다(give an account/Rechenschaft geben/rendre compte). 그러나 모두가 같음 자체 등등을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20) 이때 우리의 혼이 형상에 대한 앎을 획득하는 시점은 인간으로 태어나고 난 뒤는 아니다(76c6~c7). 혼들은 인간의 모습으로 있기에 앞서, 몸들과 떨어져 그 이전에 있었으며 지혜(wisdom/Einsicht/pensée)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21) 소크라테스는 그 앎을 가지고 태어난 것은 아니므로, 그 앎을 갖게 되는 순간에 잃어버린다고 한다(76d1~d4). (22) 결론 : 우리는 같음 자체를 상기한다(76c3~c4).<br />
<br />
<br />
<br />
<br />
<br />
☞ (16)에서 같음의 형상과 더불어 언급되는 더 큼(the larger)과 더 작음(the smaller)이라는 형상(75c10)은 문제적이다. ‘더’라는 비교급은 크기의 형상 규정을 느슨하게 만드는데(Hackforth, 71), 더군다나 우리는 같음 자체와 같은 것들을 비교할 때와 같은 방식으로 ‘정확히 큰 것’과 큰 것들을 비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더불어 (16)의 주장에서, 같음 개념에 대한 인식은 무의식 상태에서 잠재되어 있는 경우와 어떤 계기로 인해 그것을 사용하는 경우로 더 분석될 수 있을 것 같다6).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알고 있다는 것은 어떤 앎을 잃지 않고 지니고 있는 것이지만, 이는 알고 있다는 것의 규정이라기보다는 다만 망각하지 않음이라는 소극적 규정으로 보인다. 상기되는 앎과 망각된 앎이라는 양자택일 밖에 없다면, 무지(ignorance)의 상태를 제대로 규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Burger, 79). 즉 같음 자체에 대한 앎을 완전히 망각해서 상기해야만 경우와 그것이 사용되지는 않더라도 잠재적으로 그 앎을 지니고 있는 경우를 구분할 수 있다. 만약 망각이 아니라 추론으로 극복되어야 할 무지라면, 생시 이전의 앎에 대한 상기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물론 소크라테스라면 우리가 형상에 대한 앎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모를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할 것이다. <br />
<br />
<br />
&#160;이어지는 대목에서 소크라테스는 앎을 망각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지니고 있을 것이고(16), 앎을 망각했다면 상기가 필요하다(17)고 주장하면서 배중률(Law of Excluded Middle)을 적용한다(Gallop, 132). 그런데 시미아스는 태어남과 동시에(at the very moment of birth/bei der Geburt/à l'heure de la naissance) 형상에 대한 앎을 갖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기한다(76c14~c15). 소크라테스는 과연 태어날 때가 아니라면 언제 형상에 대한 앎을 ‘잃어버리게’ 되느냐고 반문하면서, 이 가능성을 물리친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눈이 보이지 않는 아이를 일컬어 그가 태어날 때 시각을 잃어버렸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애초에 시각을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잃는다는 표현은 무의미하며, 마찬가지로 나중에 그가 시각을 갖게 되더라도, 시각을 다시 얻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소크라테스가 잃어버린다는 표현을 쓴 것은 우리가 그 앎을 잃어버리기 전에 미리 알고 있으며, 혼이 생시 이전에 존재한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미아스가 묻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가정이다(Gallop, 134). &#160;<br />
<br />
<br />
&#160;위 대목에서 또한 문제가 될 만한 것은 (19)의 ‘모든 사람이 같음 자체에 대한 앎을 갖고 있지는 않다’라는 입장이 (2)에서 ‘우리는 같음 자체를 알고 있다’는 언명과 상충되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이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우리’와 ‘모든 사람’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같음이라는 개념을 일상적으로 쓸 줄 안다는 말인지 아니면 같음의 철학적 정의를 제시할 수 있다는 말인지를 따져봐야 한다. 우선 적절한 설명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정의를 내릴 수 있고, 근거를 대고 합리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소박한 앎이 아닌 철학적 앎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위의 비일관성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세 가지 정도로 제시될 수 있다. 먼저 (2)에서 모두가 알고 있는 같음을 수학적인 것으로 보고, (19)에서 모두가 알지는 못하는 형상을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해서 양자의 비일관성을 해소하는 방법이 있다(Hackforth, 76). 그러나 위의 언급 속에서 과연 소크라테스가 수학적인 형상과 도덕적인 형상을 명시적으로 구별하고 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다음으로 (2)에서 ‘우리’를 철학자로 보고, (19)에서의 ‘우리’를 일반 그리스인들로 보면 위 명제들을 조화시킬 수 있겠지만(Gallop, 120) 이 제안 역시 문제가 있다. (2)의 논의는 상기 논증의 범위를 처음부터 철학자의 영혼에만 해당되는 것으로 제한시키게 되지만, 이어지는 표현에 따르면 상기는 형상에 대해 적절한 설명을 할 수 없는 사람에게도 역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76c4). 이렇게 되면 애초에 전제로 도입하는 명제가 이미 도출하려는 결론을 선취하는 모양이 되고 마는 것 같다. 아마 이러한 상충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2)에서의 모두가 아는 형상을 직관적인 형상 인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19)에서 모두가 알지는 못하는 형상을 추론적이고 논증적인 형상을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지 않을까? 바로 그 대목에서 시미아스는 내일이 되어 소크라테스가 죽고 나면 적절한 설명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라며 걱정하고 있다(76b). &#160; <br />
<br />
<br />
4. 논증의 요약 및 결론(76d6~77d5) <br />
<br />
<br />
&#160;4-1. 논증의 요약과 형상과 혼의 관계 :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 이와 같은 모든 존재(Being/Wesen/réalité)가 있고, 즉 형상이 이미 있으며, 마찬가지로 우리의 혼 또한 있으며 그것도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있었을 것이 필연적이다. 형상들도 있고 혼 또한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있는 것이, 그리고 형상들이 있지 않으면 우리의 혼들 또한 있지 않다는 것이 필연적이다(76d5~e8). 형상과 혼 사이에는 놀랍도록 똑같은 필연성이 있고, 결국 논의는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혼과 존재도 마찬가지로 있는 것으로 귀착한다. 아름다움과 좋음 등의 것들은 모두 최대한의 의미에서(in the fullest possible way/in dem allerhöchsten Sinne/a la plus haute réalité possible) 있다(77a1~a5). <br />
<br />
<br />
<br />
<br />
<br />
☞ 소크라테스는 형상들의 존재와 혼의 태어나기 전에 있었음이 똑같이 필연적이라고 한다. 아마도 그는 형상들의 존재를 인식하기 위해서, 상기 논변은 혼의 불멸성을 전제해야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즉 만약 혼이 불멸하는 것이 아니라면, 피안의 초감각적인 형상을 정립하는 것은 그것이 결코 알려질 수 없기 까닭에 불합리한 것이며, 또 만약 형상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혼이 태어나기 이전에 혼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Bluck, 64). 그러나 혼과 형상의 관계가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혼이 어떠한 방식으로 생명의 근원으로서 육신을 살아있게 하는 기능과 형상을 인식하는 기능을 동시에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160; <br />
<br />
<br />
<br />
<br />
<br />
&#160;4-2. circular argument와 recollection argument의 결합 : 시미아스와 케베스는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우리의 혼이 있었다는 점에서는 납득하겠지만, 죽은 뒤에도 혼이 여전히 있을 것인지는 아직 증명된 것이 아니라고 답한다(77a8~b2). 즉 혼이 사후에도 있을 것이라는 점이 추가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77c1~c5). 이에 소크라테스는 윤회 논증과 상기 논증을 합친다면 이미 혼의 불멸성은 증명되었다고 대답한다. 즉 만약에 혼이 태어나기 전에도 있기도 하지만, 그것이 삶 속으로 들어와 태어나는 것이 죽음과 죽어있는 상태 외의 다른 어떤 것에서도 태어나는 것이 아님이 필연적이라면, 혼은 어쨌든 다시 태어나야만 하기 때문에 죽은 뒤에도 혼이 있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77d1~d4). &#160;<br />
<br />
<br />
&#160;&#160; <br />
<br />
<br />
☞ 앞에서 언급된 것에 따르면, 순환 논변이 육화되지 않은 혼의 존재 여부만을 다룬다면, 상기 논변은 혼이 갖고 있는 힘과 지혜(70b3~4)를 다룬다는 점에서 구별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 시미아스와 케베스의 요구는 단지 사후에도 혼이 존재할 수 있는지 증명해달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다시 풀어 말하면, 모든 산 것은 죽은 것으로부터 왔음을 주장하는 순환 논변이 “태어남 이전의 시간은 죽음 이후의 시간(the time before birth is&#160;the time after death)”임을 보장하기 때문에(Hackforth, 80), 태어나기 이전에 혼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상기 논변과 순환 논변이 결합되면 혼의 사후 존재도 증명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Hackforth의 말은 다소 궤변처럼 들린다. 순환 논변은 죽음-&gt;삶-&gt;죽음의 순환을 보여주고, 상기 논변은 생시 이전에 형상을 인식하는 혼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양자의 결합에서 혼의 사후 불멸이 증명되려면 우선 두 논변의 가설이 옳아야 한다. 특히 상기 논변에서 문제되는 혼은 혼 일체가 아니라 어떤 형상에 대한 앎을 간직하는 개별적인 혼이기 때문에, 특정한 혼이 육신에서 떨어진 뒤에도 계속해서 어떤 앎을 간직한 채로 살아남으리라는 주장이 증명되지 않으면 안 된다(Gallop, 136). &#160;<br />
<br />
<br />
참고문헌<br />
<br />
<br />
플라톤,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박종현 역주, 서광사, 2003. &#160; Plato, Phaedo, translated with notes by David Gallop, Oxford : Clarendon Press, 1988. &#160; <br />
<br />
<br />
Plato, Plato's Phaedo, a translation with introduction, notes and appendices by R. S. Bluck, London : Routledge, 2001. <br />
<br />
<br />
Plato, Plato's Phaedo, translation with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by R. Hackforth, London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2. <br />
<br />
<br />
Platon, Phaidon(Werke in acht Bänden : Bd. 3.), hrsg. von Gunther Eigler, Darmstadt : Wissenschaftliche Buchgesellschaft, 1990. <br />
<br />
<br />
Platon, Phédon(Oeuvres complètes : Tome Ⅳ-première partie.), texte établi et traduit par Paul Vicaire, Paris : Société d'édition "Les Belles Lettres", 1983. &#160;<br />
<br />
<br />
Ronna Burger, The Phaedo : a Platonic labyrinth, New Haven : Yale Univ. Press, 1984. <br />
<br />
<br />
<br />
<br />



<br />
<br />

1)&#160;이는 특히 Meno에서의 상기에 관한 논의(81c~86c)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Phaedo에서 상기는 Meno에서처럼 기하학적 명제의 증명을 다루지 않으며, 감성적 인식의 획득을 논의한다는 차이를 가진다(Gallop, 115). 우리의 배움이란 상기라는 주장은 일견 매우 이상하게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배움이란 사실에 대한 경험적 인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 개념과 관련된 것이다(Gallop, 113). <br />
<br />
<br />

2)&#160;이 대목에서 감각적 지각을 통해서 알아본다recognize는 표현은 통상적인 의미에서 어떤 것을 안다는 의미로 쓰였다. 반면 안다는 것know은 엄밀한 의미에서 형상들에 대한 앎을 가리킬 때로 구별된다. <br />
<br />
<br />

3)&#160;플라톤이 형상을 가리킬 때 쓰는 어법은 당시 희랍어에서 질(quality)과 실체(substance)가 명확하게 분화하지 않은 탓으로, 우리가 흔히 속성으로 간주하는 것들은 어떤 의미에서 사물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같음이라는 말은 오늘날 논리적 관계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간주되지만, 플라톤의 형상은 그 자체로 실재성을 지니는 것이다. 형상이 갖는 보편자로서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같음 자체라는 형상은 일종의 추상화(abstraction)을 통해 얻어진 것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플라톤의 요점은 형상이 먼저 존재하고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판단을 한다는 것이다. Bluck(63~4) 참조. &#160; <br />
<br />
<br />

4)&#160;그러나 상기가, 특히 메논에서 그랬던 것처럼, 추론과 논증을 통한 인식에 관한 이론인지, 직관적인 형상 인식에 대한 이론인지는 상기 논변 전체를 두고 평가해보아야 할 점으로 남는다. 다만 소크라테스가 상기 논변 내내 반복하는 ‘같음’이라는 형상에 대한 언급은 인식의 기초적인 모델로 수학을 암묵적으로 또 명시적으로 참조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br />
<br />
<br />

5)&#160;형상에 대한 앎이 감각적 지각으로부터 온다는 말도 따져볼 만하다. 그는 여러 차례 감각이 주는 부정확성에 대해 비판하지만, 이러한 감각적 지각이 없다면, 상기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감각에 의거한 탐구는 나중에 형상에 대한 추구에서 방해물이 될 뿐인 것으로 로고스에 의거한 탐구와 구별된다(99d4~e6). 한편 칸트의 다음과 같은 말은 감각적 지각과 선험적 인식의 관계에서 플라톤의 상기설을 연상시킨다. &#160;“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함께 시작된다는 것은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시간상으로는 우리에게 어떠한 인식도 경험에 선행하는 것은 없고, 경험과 함께 모든 인식은 시작된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인식이 경험과 함께 시작된다 할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인식 모두가 바로 경험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I. Kant, 『순수이성비판』,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6, pp. 214~5(B1). <br />
<br />
<br />

6)&#160;다른 맥락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앎의 소유와 사용을 구분하는 경우처럼 말이다. Aristoteles, 『니코마코스 윤리학』, 강상진 외 옮김, 이제이북스, 2006, p. 241(1146b31 이하).<br />
<br />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41/15/cover150/8930606202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0606202</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책의 감옥</category><title>하버마스의 피아제</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3608072</link><pubDate>Wed, 07 Apr 2010 01:2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3608072</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0807015075&TPaperId=3608072"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05/42/coveroff/0807015075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0081312&TPaperId=3608072"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62/90/coveroff/8930081312_2.jpg" width="75" border="0"></a>&nbsp;<br/><br/>사람들과 함께 읽는 하버마스.. 생각보다 재미가 없다. 그래도 사회철학의 필수교양이라 하니&#160;일단 읽는 수 밖에.&#160;피아제는 예전에 박홍규 교수(다작의 박홍규 말고)가&#160;종종 언급하고 그랬던 기억이 난다. 피아제가 이른바 유아론적 철학으로 일컬어지는 현상학에 대한 해독제가 될 수 있다면,&#160; 합리성의 진전에 따라 분화되는 세계상과 체계와 별도로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보장하는 생활세계 사이에 양자를 변전시키는 수단으로서 의사소통적 합리성 개념이 들어서게 되는 것 같다. 아마도&#160;현상학의 입장에서는&#160;&#160;생활세계 개념이 그렇게 단순하게 처리되지는 않을 것 같지만..&#160;&#160;
&#160;
하버마스, 의사소통행위이론 서론 <br />
<br />
<br />
2. 신화적 세계이해와 근대적 세계이해의 몇 가지 특징 <br />
<br />
<br />
4) 세계상의 탈중심화(피아제). 생활세계 개념의 잠정적 도입(127~138)<br />
<br />
<br />
&#160;[앞서 다룬] 영국에서 진행된 합리성 논쟁의 결론은 이것이다. 근대적 세계이해의 바탕에 보편적 합리성 구조가 놓여있기는 하지만, 서구의 근대사회는 인지적-도구적 측면에 고착되어 왜곡된, 특수할 뿐인 합리성 이해를 촉진한다. 세계상의 구조는 내적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 지식증가에로 소급될 수 있는 체계적 변화과정을 겪어 왔을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학습과정은 경험적 메커니즘을 통해 설명될 수 있으며, 동시에 일종의 문제해결로서 파악될 수 있다. 이때 학습과정은 내적 타당성 조건과 관련하여 체계적으로 평가 가능하다. 보편주의적 입장은 세계상의 합리화가 학습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최소한 기본 의도에서는 진화론적 가정을 불가피하게 한다. 가령 매킨타이어는 윈치에게 인지적 발달을 불연속적 형태도약으로 변형하여 해석해야 할 것이라고 이의를 제기한다. 다른 한편 보편주의적 입장도 증명부담을 져야 하는데, 근대사회의 학자는 종교적-형이상학적 세계상에서 근대적 세계이해로의 이행을 가능케 했던 학습과정을 재구성해야 한다. <br />
<br />
<br />
&#160;2장에서 베버의 종교사회학에 의지한 종교적 세계상의 발전은 학습과정으로 파악될 것이다. 이때 학습 개념은 피아제가 의식구조의 개체발생에 관련시켜 발전시킨 개념이다. 피아제는 인지발달의 단계들을 구별하는데, 각 단계는 새로운 내용을 통해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기술될 수 있는 학습능력의 수준을 통해 규정된다(구조학습과 내용학습의 구분). 새로운 세계상의 출현도 마찬가지이다. 신화적, 종교적-형이상학적, 근대적 사고방식 사이의 휴지부는 기본 개념체계의 변화가 일어난 시기이다.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며 극복된 해석들은 내용적 측면과 무관하게 범주적으로 평가절하된다. 설득력을 잃은 것은 이러저러한 개별근거가 아니라 근거들의 종류이다. 이러한 평가절하의 진전은 새로운 학습수준의 이행과 관련된다. 좁은 의미의 인지적 발달은 어린아이가 외적 실재와 대결하면서 획득하는 사고 및 행위의 구조와 관련되나, 피아제는 인지적 발달을 외적 세계와 내적 세계의 형성과 관련짓는다. 성장하는 어린이는 외부세계와 내부세계에 대한 개념을 객체들 및 자신과의 실천적 교섭을 통해 형성한다(객체의 세계와 내적 세계의 경계설정). 도구적 행위를 통한 외적 자연과의 접촉은 지적 규범체계의 구성적 획득을 매개하며, 타인과의 상호 작용은 도덕적 규범체계를 습득하도록 한다. 학습메커니즘, 적응과 순응은 이 두 가지 행위양식을 통하여 특별한 방식으로 작용한다. 이렇게 하여 넓은 의미에서 인지발달 개념은, 외적 세계의 구성으로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객관세계와 사회세계를 주관세계와 동시에 경계짓는 기준체계의 구성으로 이해된다. 인지적 발달은 자기중심적 경향의 세계이해가 탈중심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br />
<br />
<br />
&#160;위 세 가지 세계 개념의 형식적 기준체계가 분화되는 정도에 맞추어 세계에 대한 성찰적 개념이 형성되고, 공동의 해석 노력을 매개로 세계에 접근하는 태도가 습득된다. 모든 상호이해 행위는 상호주관적으로 인정된 상황 규정을 목표로 하는 협동적 해석과정의 일부로 파악할 수 있다. 생활세계 개념은 상호이해 과정에 대한 상관개념으로 도입된다. 의사소통적으로 행위하는 주체들은 언제나 생활세계의 지평에서 서로를 이해한다. 생활세계는 윤곽이 불확실하고, 항상 문제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배후확신들로 구성되며, 상황규정의 원천 역할을 한다. 생활세계는 이전 세대들이 이미 행한 해석성과를 축적하고 있다. 이는 현재 상호 이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일치에 대응하는 보수적 평형추 역할을 한다. 생활세계 속에 축적된 해석성과들과 비판적 검토작업이 차지하는 비중의 관계는 세계상의 탈중심화와 함께 변화한다. 문화적 비축지식을 제공하는 세계상이 탈중심화될수록 비판에 대해 내성을 갖도록 해석된 생활세계를 통해 상호이해의 필요가 미리부터 충족되는 정도는 점점 약해진다. 즉 생활세계의 합리화는 규범적으로 구성된 동의 대 의사소통적으로 성취된 상호이해의 차원에서 특징지을 수 있다. 어떤 타당성 주장이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하는지가 문화적 전통에 의해 미리 결정될수록, 당사자들 자신이 잠재적 근거들을 명시적으로 만들고 검사할 가능성이 적어진다. 한 사회집단의 생활세계가 신화적 세계상에 의해 해석될수록, 개별 구성원들에게 해석의 부담은 경감되고 비판가능한 동의를 스스로 창출할 기회도 줄어든다. <br />
<br />
<br />
&#160;따라서 1) 문화적 전승은 객관세계, 사회세계, 주관세계에 대한 형식적 개념을 제공해야 한다. 분화된 타당성 주장들(명제적 진리, 규범적 정당성, 주관적 진실성)을 허용하고 그에 상응하는 기본태도들(객관화하는 태도, 규범준수적 태도, 표출적 태도)의 분화를 자극해야 한다. 2) 문화적 전승은 자신에 대한 성찰적 태도, 즉 전통에 의해 마련된 해석들을 근본적으로 의문에 부치고 비판적 수정을 가하는 것(제2차의 인지적 활동)이 허용되어야 한다. 3) 문화적 전승의 인지적 구성요소, 가치평가적 구성요소가 전문화된 논증들과 피드백을 이루어 해당 학습과정들이 사회적으로 제도화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과학, 도덕과 법, 예술 등 문화의 하부체계가 생겨난다. 4) 문화적 전승은 성공지향적 행위가 상호이해의 명령으로부터 해방되고 이해지향적 행위로부터 부분적으로 분리될 수 있는 방식으로 생활세계를 해석해야 한다. 이를 통해 목적합리적 행위의 사회적 제도화, 예컨대 화폐와 권력을 통해 조절되는 하부체계가 형성된다. 막스 베버는 3), 4)에서 언급된 체계형성을 근대의 문화적, 사회적 합리화의 핵심을 나타내는 가치영역들의 분화로 파악한다.<br />
<br />
<br />
&#160;이렇게 피아제의 탈중심화 개념, 세계상의 구조, 생활세계, 합리적 삶 사이의 내적 연관을 해명하여 다시 의사소통적 합리성 개념에 이르게 된다. 이 개념은 탈중심화된 세계이해를 비판가능한 타당성 주장의 토의적 해결과 관련짓는다. 벨머에 따르면 토의적 합리성은 절차적 합리성이자 메타 차원에서 작용하는 합리성의 형식적 기준이다. 만약 자기중심주의의 개념을 넓게 이해하고 모든 단계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볼 경우, 탈중심화된 세계이해의 수준에서도 어떤 오류가 가능하다. 객관세계의 분화가 사회세계와 주관세계를 합리적 동기에 따른 상호이해의 영역으로부터 완전히 축출함을 의미한다는 환상 말이다. 이렇게 물화하는 사고의 환상에 짝을 이루는 근대의 착각이 유토피아주의이다. 이는 탈중심화된 세계 개념과 절차적 합리성으로부터 동시에 완전히 합리적으로 된 생활형식이란 이상이 획득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 생활형식의 총체성을 개별적 합리성 측면에서 평가하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이상적 한계치에 근접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을 필요로 하는 계기들 사이의 균형이 필요하다. 절차적 합리성 개념으로부터 어떤 좋은 삶의 이념을 도출하도록 오도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실체화된 이성적 세계상을 포기한다면, 자본주의적으로 근대화된 사회의 생활형식에 이중적인 왜곡(전통의 실체를 평가절하하고 인지적-도구적인 것에 제한된 일면화된 합리성에 복속시킨 것)을 비판하는 일만 남는다. 이러한 비판에는 의사소통 합리성 개념이 기초가 될 수 있다. 세계이해의 탈중심화와 생활세계의 합리화가 해방된 사회를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것이 입증된다면 말이다. 고도로 발달된 의사소통적 기반구조를 가진 생활세계를 추정하면서 이를 성공한 생활형식의 역사적 표현과 혼동하는 것이 유토피아주의이다.&#160;&#160;<br />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62/90/cover150/8930081312_2.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0081312</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책의 감옥</category><title>정치, 동일시, 주체화</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3584140</link><pubDate>Wed, 31 Mar 2010 01:0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3584140</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1844675777&TPaperId=3584140"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57/49/coveroff/1844675777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7671879&TPaperId=3584140"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267/56/coveroff/8987671879_2.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0816628459&TPaperId=3584140"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img/noimg_off_b.jpg" width="75" border="0"></a>&nbsp;<br/><br/>&#160;
자크 랑시에르, &lt;정치, 동일시, 주체화&gt;, &lt;&lt;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gt;&gt;,&#160;pp. 133~147.&#160;
Jacuqes Ranciere, &lt;Politique, identification, subjectivation&gt;, Aux bords du politique,&#160;La&#160;fabrique&#160;édition, 1998, pp. 83~92<br />
<br />
&#160;
<br />
&#160;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은 무엇인가? 정치적인 것은 이질발생적인 두 과정의 마주침이다. 첫째는 통치의 과정으로, 이는 사람들을 공동체로 결집하여 그들의 동의를 조직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며, 자리들과 직무fonction(국역 - 기능)를 위계적으로 배분하는 것에 바탕을 둔다. 이는 치안police이라 이름붙일 수 있는 것이다. 둘째는 평등의 과정으로, 이는 아무나n'importe qui와 아무나 사이의 평등이라는 전제와 그 전제를 입증하려는 고민을 따르는 실천들의 놀이로 이루어진다. 이 놀이는 해방emancipation이라고 불린다. <br />
<br />
<br />
&#160;(방)해tort를 다루기. 조제프 자코토에 의하면, 모든 치안이 평등을 부인하며, 치안 과정과 평등 과정은 공약불가능하다. 이는 개인들의 지적 해방만이 유일하게 가능하고, 정치 무대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치안이 평등을 부인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치안은 평등을 (방)해한다faire tort고 말한다. 정치적인 것이란 평등의 입증이 그 위에서 (방)해를 다루는 형태를 취해야 하는 무대이다.1)<br />
<br />
<br />
&#160;이렇게 해서 세 항이 있다. 치안, 해방, 정치적인 것. 우리는 해방 과정에 정치la politique라는 이름을 부여할 수 있다. 정치적인 것은 (방)해를 다루는 가운데 정치와 치안이 마주치는 현장이다. 정치는 한 공동체의 원리나 법칙, 고유함propre의 현실화가 아니다. 정치는 아르케를 갖지 않는다. 정치는 아나키적이다. 민주주의라는 단어 자체가 그것을 지칭하는데, 플라톤이 지적하듯이 민주주의는 아르케도 척도도 없다. 데모스의 행위, kratein의 독특함은 원초적 무질서나 오산mécompte을 증언한다. 데모스는 공동체의 이름이자 그것의 분할의 이름이며, (방)해를 다루는 것에 대한 이름이다. 인민의 정치는 자리와 직무에 대한 치안적 분배를 (방)해한다. 인민은 언제나 그 자체보다 더 많거나 더 적기 때문이다. 이는 치안 질서를 혼란에 빠뜨리는 하나-더un-en-plus의 힘이다. <br />
<br />
<br />
&#160;현재의 난국은 정치를 한 공동체의 고유함의 현시와 동일시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공동체의 고유함의 현실화로서 스스로를 드러내고 통치 규칙을 사회의 자연스러운 법으로 전환하는 것은 바로 치안 원리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그러한 동일시에 바탕을 두지 않으며, 치안과 다르다. 역사적으로 노동자들의 자기-해방의 모습을 띠었던 해방의 관념은 또한 이기주의에 맞선 투쟁이었는데, 이는 도덕 문제가 아니라 논리 문제이다. 해방의 정치는 고유하지 않은 고유함un propre impropre의 정치이다. 해방의 논리는 타자론hétérologie이다. <br />
<br />
<br />
&#160;해방 과정은 아무 말하는 존재와 아무 말하는 다른 존재 사이의 평등을 입증하는 것이다. 예컨대 노동자, 여성, 흑인 등등. (방)해의 희생자와 희생자의 권리를 내세우는 범주의 이름은 언제나 익명anonymedml 이름이자 아무나의 이름이다. 정치적으로 유일한 보편이란 평등 뿐인데, 이는 인간성이나 이성의 본질에 각인된 가치가 아니다. 평등은 각각의 사례 속에서 전제되고 입증되며, 증명해야 하는 하나의 보편이다. 진리의 자리는 토대나 이상의 자리가 아니고, 하나의 topos논거/장소, 논증 절차에서 주체화가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진리의 언어는 언제나 방언적이다. 보편성은 그것들의 결과를 증명하는 논증 과정, 노동자도 하나의 시민이며 흑인도 인간이라는 등등 사실에서 연유하는 것을 말하는 논증 과정에 있다. 사회적 항의protestation 일반의 논리적 도식은 이러하다. 우리는 시민, 인간 등과 같은 범주에 속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예컨대 19세기 프랑스 노동자들은 이렇게 질문한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헌법이 법 앞에 평등하다고 선언하는 프랑스인들의 집합에 속하는가 아닌가? 또는 최초의 프랑스 여성운동가들의 경우 : 프랑스 여자도 프랑스인인가? 일견 부조리해보이는 이러한 문장은 사회적 불평등의 책략을 폭로하는 논리적 균열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이러한 균열을 하나의 관계로 절합하고(국역 누락) 논리적 비-장소non-lieu를 논쟁적 증명의 장소로 변형시킨다. <br />
<br />
<br />
&#160;주체화 과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soi가 아니라, 자기 사이의 관계인 하나un를 형성하는 것이다. 1832년 오귀스트 블랑키의 소송에서 검사장은 그에게 직업을 묻고 블랑키는 ‘프롤레타리아’라고 대답한다. 검사장은 그것은 직업이 아니라고 반박하지만, 블랑키는 "프롤레타리아는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우리 인민 대다수의 직업"이라고 응수한다. 치안의 관점에서는 검사장이 옳았겠으나 정치의 관점에서 보면 블랑키가 옳았다. 프롤레타리아는 사회학적으로 지정할 수 있는 한 사회 집단의 이름이 아니라 셈-바깥hors-compte, 내쫓긴 자outcast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라틴어 proletarii는 번식하는 자들, 이름없이 살고 이름을 남기지도 않으며 도시국가의 상징적 구성 속에서 하나의 부분으로 셈해지지 않는 그저 살고 번식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는 아무나의 이름, 내쫓긴 자들의 이름으로서, 노동자들에게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프롤레타리아는 계급 질서에 속하지 않는 자들, 따라서 이 질서의 잠재적 소멸인 자들로 이해해야 한다. 주체화 과정은 이처럼 탈정체화/탈동일화désidentification 혹은 탈계급화 과정이다.2)<br />
<br />
<br />
&#160;주체는 사이에 있는 것un in-between, 둘-사이에 있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는 그들이 사이에 - 여러 이름, 지위, 정체성들 사이에, 인간성과 비인간성, 시민성과 그것의 부인 사이에, 도구로서의 인간의 지위와 말하고 사유하는 인간의 지위 사이에 - 있는 한에서 함께 있기도 한 사람들에게 고유한 이름이다. 정치적 주체화는 사이에 있는 한에서 함께 있기도 한 사람들이 평등을 현실태로 만드는 것, 혹은 (방)해를 다루는 것이다. 정치란 하나의 불가능한 동일시에 바탕을 둔다. 예컨대 ‘우리는 모두 독일의 유대인들이다’라는 1968년의 슬로건. 정치적 주체화의 논리는 또한 타자론, 타자성altérité에 대한 세 가지 규정에 따른 타자autre의 논리이기도 하다. 첫째, 정치적 주체화의 논리는 하나의 정체성에 대한 단순한 긍정이 아니라, 치안 논리에 따라서 고착된, 타자가 부과하는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정치는 고유하지 않은 이름들, 잘못된 명칭들misnomers의 문제다. 둘째, 정치적 주체화의 논리는 하나의 증명인 바, 이 증명은 그것의 전달 대상인 하나의 타자를 전제한다. 이는 비록 하버마스 식의 대화 혹은 합의 추구의 장소가 아닐지라도, 하나의 공통 장소를 구성하는 것이다. 합의는 없으며, 손해 없는 소통이란 없고, (방)해의 해결도 없다. 셋째, 주체화의 논리는 언제나 불가능한 동일시를 내포한다. <br />
<br />
<br />
&#160;서사와 문화는 모두 논쟁의 줄거리를 하나의 목소리가 되게 하며, 이 목소리를 한 신체의 현시가 되게 한다. 서사와 문화라는 개념들은 주체화를 하나의 동일시가 되게 한다. 그러나 정치적 주체화의 삶은 목소리와 신체의 거리, 두 정체성들 사이의 틈새로 만들어진다. 평등의 과정은 차이의 과정이며, 이 차이는 다른 정체성의 현시나 두 정체성 심급들 사이의 갈등이 아니다. 차이가 현시되는 장소는 한 집단의 고유함이나 문화가 아니라, 논증의 topos이다. 토포스가 전시되는 장소는 틈새이며, 정치적 주체의 장소는 틈새 혹은 균열이다. 이름들, 정체성들 혹은 문화들 사이에 있음으로서 함께 있음. <br />
<br />
<br />
&#160;이는 확실히 불편한 입장인데, 이는 메타-정치적 담론의 발전에 자리를 내준다. 메타-정치3)는 치안의 관점에서 정치를 해석하는 것이다. 메타-정치적 해석의 패러다임은 &lt;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gt;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인데, 그것은 인간과 시민의 차이를 속임수의 징표로 본다. 시민이라는 천상의 정체성 뒤에 인간, 소유자라는 지상의 정체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해방의 정치는 인간에 대한 동화와 시민에 대한 동화를 인정하지 않는다. 해방의 정치의 주장에 따르면, 권리 선언의 보편성은 선언이 가능케 하는 논증들의 보편성이다. 인간으로도 시민으로도 셈해지지 않는 그들 혹은 그녀들의 권리들을 포함하는, 권리에 대한 무수한 증명들의 연출을 통해 가능하다. 우리는 보편주의냐 정체성주의냐의 선택지에 갇혀 있지 않다. 선택지는 오히려 주체화와 동일시 사이에 있다. &#160; &#160; &#160; &#160;<br />
<br />
<br />



<br />
<br />

1)&#160;랑시에르는 치안과 정치를 대립시킨다. 치안은 몫의 배분을 다루는 것으로서 지배가 수반되는 과정이고, 국가의 행정 전반이 해당된다. 반면 정치는 매우 드물게 일어나는 봉기적 순간이다. 랑시에르는 정치적 주체화를 탈동일화로 보면서 치안이나 AIE(알튀세르)를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어떤 동일성/정체성 또는 동일시/정체화가 없는 정치가 과연 가능한지, 또한 사회권을 비롯한 권리들의 문제는 치안에 속하는 문제가 아닌지 질문해볼 수 있을 것 같다. <br />
<br />
<br />

2)&#160;“Politics is a matter of subjects or, rather, modes of subjectification [...] Descartes's ego sum, ego exisito is the prototype of such indissoluble subjects of a series of operations implying the production of a new field of experience. Any political subjectification holds to this formula. It is a nos sumus, nos existimus, [...] Any subjectification is a disidentification, removal from the naturalness of a place, the opening up of a subject space where anyone can be counted is made between having a part and having no part.” Rancière, J., Disagreement : Politics and Philosophy, translated by Julie Rose, Mineapolis : University of MinnesotaPress, 1999, pp. 36~37.<br />
<br />
<br />

3)&#160;랑시에르는 &lt;&lt;불화&gt;&gt; 4장 from archipolitics to metapolitics에서 정치를 archipolitics, parapolitics, metapolitics로 구분한다. metapolitics는 맑스로 대표되는 정치 전통인데, 경제가 정치의 진실이라는 도식으로 요약된다. 이때 맑스의 인권 비판은 가령 형식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를 대립시키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맑스적 정치의 핵심은 정치의 거짓을 드러내고, 정치의 진실은 경제에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의 결과로 엥겔스는 󰡔반뒤링론󰡕에서 정치란 단지 사물의 관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1) 프롤레타리아가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생산수단을 국가재산으로 전화시킨다. 2) 인간에 대한 지배 대신 “사물에 대한 관리 및 생산과정에 대한 지도”가 등장하고, 계급 국가는 소멸한다. 3) 자본주의적 생산의 무정부성은 “의식적·계획적 조직”으로 대체된다. “하나의 거대한 계획”에 입각해서 사회적 생산력이 전국에 적절하게 배치된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반듀링론󰡕, 새길, 1987, 300-303쪽과 316쪽.) <br />
<br />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img/noimg_150_b.jpg</url><link>http://foreign.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0816628459</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책의 감옥</category><title>마음의 사회학</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3540432</link><pubDate>Fri, 19 Mar 2010 01:2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3540432</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09716&TPaperId=3540432"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598/28/coveroff/8954609716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사회학이라는 학제 내에서도 이런 식의 논의가&#160;가능할 수 있구나, 하고 다소 놀랐다. 저자는 석사 때 문학사회학 쪽을 공부했다고 하는데, 매우 많은 사상가들이 인용되지만 특히 벤야민의 비중이 크다. 재미있게 읽은 편이었는데,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한 큐에 묶으려는 의욕적인 시도가 다소 무리한 것이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는 대목들도 종종 보였다. 특히&#160;저자 자신도 때때로 의식하고 있는 듯이&#160;보임에도 불구하고&#160;종종 그렇게 드러나는 진정성/속물성, 도덕/윤리라는 간단명료한 이분법에 만족해서는 안 되겠다. "진정성의 윤리를 넘어서서 사회적이고 공적인 관심과 책임과 실천의 역량을 가진 주체"는 어떻게 생산될 수 있는가?<br />

&#160;
&#160;
&#160;
마음의 사회학(김홍중) 1부<br />
<br />

1장 진정성의 기원과 구조<br />
<br />

“진정성眞正性authenticity은 본래 좋은 삶과 올바른 삶을 규정하는 가치의 체계이자 도덕적 이상으로서, 자신의 참된 자아를 실현하는 것을 가장 큰 삶의 미덕으로 삼는 태도를 가리킨다. (...) 진정성의 윤리는 루소와 헤르더 이후의 낭만주의에서 시작되어 키르케고르, 하이데거, 사르트르 등의 실존주의적 감성 속에 구현되어 있는 도덕적 기획으로서, 외부로부터 부과되는 사회적 역할과 자신의 고유한 욕망 사이에 형성된 간극을 적극적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근대적 주체의 자기 통치 기획의 한 양태이다(19).”<br />
<br />

<br />

"이런 과정에서 한국사회는 소위 ‘포스트-진정성 체제’로 진입한 듯이 보인다. 진정성이 와해된 자리에 새롭게 들어서는 삶의 태도는, 도구화된 성찰성을 자원으로 성공과 치부를 반성 없이 추구하고 ‘부자 되세요’를 덕담하면서 재테크와 부동산투기와 자기계발에 몰두하는 신자유주의적 ‘스노비즘’과 ‘동물성’이다"(20).<br />
<br />

<br />

Lionel Trilling의 Sincerity and Authencity의 논의. 신실성과 진정성의 차이. 신실성은 전근대의 도덕적 가치로서 자신에게 거짓되지 않은 동시에 타인에게도 진실되기를 바라는 태도. 따라서 신실성을 추구하는 자는 내면과 외면 사이의 상위나 모순을 느끼지 못하며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적 의무와 자신의 욕망 사이의 단절이나 간극을 느끼지 못함. 이에 반해 진정성은 개인주의적 가치를 내면화한 근대적 인간이 공동체에서 부과하는 역할 모델과 자신의 진정한 욕망 사이의 괴리를 발견하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이상, 즉 불행한 의식을 갖고 있는 주체성. 신실성과 진실성이 상이한 도덕적 이상으로 대립되는 역사적 전환을 보여주는 텍스트가 디드로의 라모의 조카. 또는 양자의 대립은 헤겔에서 고귀한 의식과 비천한 의식(불행한 의식)의 대립에 상응. 인간 정신의 자기 실현에 있어 국가나 부 같은 외적 권능과의 관계의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는 개체의 의식은 외부의 사회적 힘과 조화를 유지하며 이를 자신과 동일시하는데 이것이 자신의 외부를 부정하지 않는 고귀한 의식. 이 조화로운 관계가 파괴되면 정신의 본성인 자유를 추구하면서 외적이고 사회적인 힘과 대립하는 의식이 생성되며 이것이 비천한 의식. 이 의식은 권력과 스스로를 동일시할 때 가능한 긍정적 태도인 고결성, 정직성, 우아함과 달리 권력에 대한 경멸과 반항의식으로부터 나오는 비열하고 음흉하고 저열한 태도를 보여준다. 비천한 의식은 순진하지 않으며, 외저 강제력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것과 대결하기 위해 이성의 간지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의식이다. 고귀한 정신에서 비천한 정신으로의 전환은 타락이 아니라 진보. 비천한 정신은 세계와 불화하고 세계와 자신 사이의 간극을 절감하며 자신의 자유를 구속하는 세계의 실정성을 부정하는 한결 고양된 정신. 공동체의 규범과 자유로운 자아의 이상의 충돌 속에서 상처받은 영혼들의 절박한 자기 실현의 세계가 소외된 영혼의 세계이자 근대적 교양의 영역인 부르주아 시민사회. 신실성이 불가능한 시대에 개인은 교양 또는 문화의 영역을 통과하면서 상실된 자기 정체성을 새로이 찾아야 함. 그것이 소설의 이념이자, 모더니티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정신적 가치인 진정성의 이상. 문예사적으로 디드로, 헤겔, 루소, 제인 오스틴, 사르트르, 조지프 콘래드, 프로이트를 관통하는 이념(25~8). <br />
<br />

<br />

1960년대 미국에서 진정성의 윤리의 부흥. 청년 세대의 등장, 소외에 대한 감수성, 다양한 정체성들의 인정투쟁의 가열. 실존주의의 유행 등. 1980년 대 한국의 386 세대. 도덕적 헤게모니를 바탕으로 이들 386세대를 정치적, 문화적, 도덕적 주체로 생산한 진정성의 레짐은 민주화 시대를 관통하는 규범적 우세종normative dominant(29~30).<br />
<br />

<br />

진정성의 구조 : 찰스 테일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진정성은 인간이 도덕관념을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존재라고 생각했던 18세기의 사유에 뿌리내리고 있음. 샤프츠베리나 허치슨의 ‘내면의 목소리’, 루소의 존재감sentiment de l'existence, 헤르더의 자기 척도 등 내적 판단의 원리에 의해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영위하는 존재. 자신의 자아를 다듬고, 개선시키는 자신과의 내밀한 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자율적 주체로 정립하고자 하는 욕망, 자기 소유의 원칙에 입각하여 행동. 진정성의 주체는 무엇보다 내향적인 성찰의 주체이며 이 진정성의 주체가 어떤 삶이 옳은 것인가라고 묻는 참된 자아와의 사이에 건설하는 대화의 공간이 내면. 이 내면은 자폐적, 유아론적 공간이 아니며, 진정성의 주체는 공동체가 부과하는 도덕률을 성찰하고 사적 성찰에서 공공성으로 전향. 윤리적 성찰을 통해 구성되기 시작하는 진정성의 주체는 공저 의미 지평에의 앙가주망을 실행 혹은 기도함으로써 집합적으로 의미있는 행위의 실천 주체(학생, 노동열사, 시민군)로 성립되며, 이 행위가 다시 공동체 도덕적 지평에 하나의 모형으로 정립되어 다른 주체화의 대상들에게 일정한 도덕적 압력을 행사(32~5). <br />
<br />

<br />

한계 : 1 진정성의 폭력 - 진정성의 개념은 예술품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데 사용되었던 진품성의 개념에서 연원하며 여기에서 유일성의 신화가 발생. 내성적이고 사적인 ‘윤리’의 계기와 사회와의 관계에 기초한 공적인 ‘도덕’의 계기 사이의 간극이 존재하는데, 전자에서 후자로 나아간다는 진정성의 구조적 행위 패턴은 실상 매우 드물게 발생하는 것. 윤리적 진정성은 진정성에 이르는 모든 절차적 고뇌, 방황, 번민, 주저, 우유부단의 제스처 전체를 신성화하며, 윤리적 진정성의 순수한 형태는 행위나 실천이 아니라 행위나 실천의 극단적인 지연(망설임, 주저, 실천적 무능)에 깃든다. 90년대의 진정성은 내면의 공간, 자의식의 공간, 사소설적 공간으로 확충되어 감(36~8). 2 요절 - 열사. 죽음을 통해 진압되지 않는 정치적 생명, 즉 bios의 불멸성의 화신들, 비록 육신은 소멸되었으나 그 죽음이 망각됮 않고 공동체에 의해 의례적으로 기억됨. 또한 예술의 영역(유재하, 김현식, 김광석, 기형도, 김소진 등)에서 진정성의 신화. 진정성은 일종의 청춘의 형이상학으로서, 물질적 재생산, 사소한 욕망의 추구, 목숨의 비루하지만 절박한 호소 등 삶의 일상성은 저급한 것으로 타기됨. 진정성의 추구와 긴밀하게 결합된 정의의 이상은 속되고 개인적인 행복의 추구를 죄악시. 비극의 주인공이 너무나 진지하여 먹고 마시는 육신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표상되듯이, 진정성의 주체 역시 고매한 정신과 도덕적 이상과 불굴의 투지의 소유자일 뿐 욕망의 덩어리인 육체의 자발성에는 맹목적이며, 진정성에는 비극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유머가 결여되어 있기에 진정성을 추구하는 자는 항상적인 급진성(죄와 고독 혹은 파멸 등)을 동반하게 되어 세속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괴물일 수 밖에 없다. 이제 이러한 진정성의 주체 이후 요절자의 이미지를 대신하는 것은 97년 체제의 생존자의 이미지(경제적 생존, 입신출세주의 또는 노골적인 속물주의, 생물학적 생존 등 부유, 성공, 장수)이다. 생존주의라는 새로운 마음의 레짐 속에서 주체는 한편으로 나르시시즘, 자폐, 탈정치화 등을 통해 사적 세계를 성채화하는 모나드로 전락하거나, 다른 한편으로 성찰성의 도구화, 탈내면화, 사회적 과시, 대중추수주의 등을 통하여 타인의 취향, 가치, 의견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속물로 전락함(38~42) <br />
<br />

<br />

이제 진정성은 오직 기억과 무용담 속에서 공허하게 빛나거나 표현주의적 라이프스타일로서 상업적으로 생산되어 상품으로 소비되어, 진정성의 소멸은 상업적 보편화와 결합된다. <br />
<br />

“그러나 진정성의 물적 토대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시대에 진정성을 규범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스노비즘의 징후일 수 있다 (...) 진정할 수도 없고, 진정하지 않을 수도 없는 시대, 그것이 바로 포스트-진정성 시대의 아포리아이다. 우리는 이 아포리아를 당분간 매우 침착하고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대면해야 한다. (...) 진정성의 해체가 결정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이제 진정성을 역사적으로 ‘지양’해야 한다. 진정성의 윤리를 넘어서서 사회적이고 공적인 관심과 책임과 실천의 역량을 가진 주체를 생산할 수 있는 어떤 새로운 ‘장치’들의 형성과 발명이 이 시대의 새로운 과제로 부각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45)” <br />
<br />

<br />
<br />

2장 삶의 동물/속물화와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br />
<br />

“진정성은 늘 자기 배반적인 것이다. ‘진정한 것’이 어떻게 쉽게, 한 차례에, 특정 행위 속에, 결정적으로 주어질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항상적 모색이어야 하며, 부단한 변신이어야 하며, 따라서 결국에는 진정성의 실현에 실패함이어야 한다. 진정으로 진정한 것은 진정성을 향한 향방 속에 있는 것이지 그것이 실현되어 실체로서 주어진 사물이나 사태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성의 윤리 속에는 무언가 병적으로 진지하고 순결하고 폭력적인 정언명령이 숨어 있다. 따라서 진정성이 삶에 의해서 그 순도를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진정성은 자신의 최고의 순간에 이르렀을 때 그 운동을 멈춰야 하는 것이다.”(54~5)<br />
<br />

<br />

한국 근대사 최초의 진정성의 속물은 김수영, 또한 고급 속물로서 미시마 유키오(56)<br />
<br />

<br />

코제브의 논의 : 1938~9년의 헤겔에 대한 콘퍼런스에서 코제브는 역사와 인간의 종언을 행위의 종언(유혈적 전쟁과 혁명의 종언, 세계와 자기의 이해로서 사변적 철학의 사라짐)으로 설명. 소련과 중국은 덜 발전된 미국, 가난한 미국이며 이후 이들이 선택할 삶의 양식도 미국의 그것, 동물로 회귀한 삶. 또는 성찰적 내면이 결여된 타인지향적인 삶(리스먼, &lt;고독한 군중&gt;) 탈역사적 동물은 고통이나 불행의 변증법적 힘, 그러한 반대항을 경유해야만 행복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모른다. 아감벤의 용어로 la nuda vita일 이들의 궁극적 목표는 구원이나 불멸이 아닌 단순한 생존. 예컨대 미국에서 시작된 몸만들기physical fitness(스스로의 몸을 조형하고, 성형하고, 개조)로 대표되는 동물적 삶의 궁극적 텔로스는 젊음 혹은 생명을 가능한 한 연장하는 것. 그런데 코제브는 56년에 일본을 방문하고 미국과는 또다른 포스트 히스토리의 삶의 유형(속물)을 목격. 자연적이거나 동물적인 소여를 부정하는 규율을 만들어내는 일본인들 특유의 속물주의(노가쿠, 다도, 꽃꽂이 등)는 철저히 형식화된 가치에 기초하여, 역사적 의미에서 인간적 내용을 완벽히 박탈당한 가치에 기초하여 현재를 살아감. 속물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타인지향적 삶의 구조에 종속되어 자신의 모든 것을 전시, 과시, 유희의 대상으로 삼음. 변증법적 운동의 공간으로서 역사 속에서 인간은 그가 자신의 존재 조건으로서 억압하고 있는 동물성을 초월하거나 통제, 부정하는 한에서 인간일 수 있다. <br />
<br />

<br />

원조 몸짱으로서 미시마 유키오 : 세계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난공불락의 국경선으로서의 육체. 인간은 육신의 모나드. 타자와의 근원적 단절. (64)<br />
<br />

<br />

부정성 없는 동물/속물들은 원한 감정도 없지만 또한 주인도 아닌데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의 외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 용도파기된 부정성(바타이유). 문학과 예술에서 엔터테인먼트로의 이행(가라타니). 최후의 인간들(니체)은 가련한 안락 외에 삶에서 아무런 야망도 소망도 없는데 이것이 귀여운 삶(68~9) <br />
<br />

<br />

귀여움은 권력자가 갖는 감정, 살아남게 하는faire survivre 생명권력의 모성적 차원은 기르고 감싸고 귀여움의 대상으로 삼는 것. 80년대의 억압적 권력은 자신의 대상을 전투적이고 진지하고 진정한 존재로 구성하나 민주화 이후 일상공간을 관통하는 미세한 생명권력들은 어리고 칭얼대는 존재론적 유아들로 구성. 탈숭고, 탈내향, 탈사회, 탈정치, 탈정신적 문화변동의 핵심. 타협주의와 생존주의. ex 황지우의 ‘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 (69~72)<br />
<br />

<br />

<br />

3장 스노비즘과 윤리<br />
<br />

자기계발서들의 홍수와 ‘스놉이 되어라’라는 지상명령. 세속적 성공 또는 공격적 생존에 적합한 스놉의 주체성 형성. 스놉은 더 이상 위선적이며 부도덕한 자가 아니라, 건설적이고 도전적이며 생산적인 주체의 프로젝트. 이중의 지배체제로서 스노보크라시(1. 스노비즘으로 무장한 도구적 성찰성의 주체들이 한국사회의 지배층으로 부상 2. 자아의 통치, 자기 배려의 테크닉과 관련)(81)<br />
<br />

<br />

스노비즘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하나의 대안적 가능성인 윤리적 삶. 그러나 윤리적 삶을 절대 준거로 하여 스노비즘을 비판하려는 경솔한 충동은 경계되어야 하는데, 이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스노비즘, 역-스노비즘을 만들 수 있음(83) <br />
<br />

<br />

고전적 스놉은 근대의 산물. 위계적 신분질서가 파괴되고 자유경쟁과 평등의 원리로 재구성되는 시민사회에서 인정투쟁을 왜곡된 방식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존재. 이들은 야심가이며 전술가이지만, 인정투쟁의 최종 목표로서 자기의식의 완성 내지 자립을 망각하는 허약한 실존이며 인간적 약자. (83~4)<br />
<br />

<br />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과 스노비즘의 정신역동. 주체 -&gt; 매개자 -&gt; 대상(세르반테스, 스탕달, 플로베르, 프루스트, 도스토예프스키). 주인공의 죽음에서야 비로소 욕망의 삼각형을 이탈하며 회심conversion. 회심없는 아이히만과 악의 평범성/속물성(아렌트). 순전한 무사유와 도구적 성찰성의 전횡. 추와의 변증법적 관계를 상실한 허구적 아름다움으로서 키치(아도르노). “전적인 키치의 제국에서는 대답은 처음부터 주어져 있다. 그래서 그것은 모든 질문을 배제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전적인 키치의 본래적인 적은 질문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쿤데라, &lt;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gt;) <br />
<br />

<br />

스놉은 도덕적이나 비윤리적인 존재의 전형. 푸코에서 모럴과 윤리의 구별(&lt;성의 역사&gt; 2권). 모럴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공동체의 규칙, 명령들이며, 윤리는 모럴에 대한 자신 고유의 판단과 성찰 및 부정과 의문을 수반. 윤리의 목적은 자유이며 망설임, 주저, 행위의 중단 같은 수동성을 동반. 디오게네스, 사도 바울 등 좋은 삶의 형식은 현 상태 내부에 균열을 내는 것. 스노보크라시의 시대는 모럴 부재가 아니라 모랄 과잉의 시대이며 부재하는 것은 윤리(96~100). <br />
<br />

<br />

4장 근대문학 종언론의 비판<br />
<br />

“우리는 어떤 점에서, 문학의 죽음이 단지 문학-제도의 소멸이나 약화가 아니라 성찰적이고 참여적인 주체를 구성하는 장치로서의 진정성이 소멸되는 사회변동의 한 징후인지를 보여주고자 한다.”(108)<br />
<br />

<br />

가라타니의 주요 테제 : 가라타니의 종언론은 시나 희곡이 아닌 소설의 소멸에 기초. 그가 특히 염두해두는 것은 사르트르. 사르트르는 &lt;문학이란 무엇인가&gt;의 3장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에서 “문학은 본질적으로 영구혁명 중에 있는 사회의 주관성”이라는 테제를 제출. 사르트르를 계승하는 가라타니의 종언론이 죽음을 선고하는 문학은 제도라기보다는 사회적 변혁을 빚어내는 정신, 운동, 앙가주망을 의미함. 이전의 문학에서는 1. 근대문학(리얼리즘 소설)은 객관적 재현장치인 원근법, 언문일치, 묵독 등을 통해 세계와 내면 공간을 성찰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내면적 주체를 형성 2. 근대문학은 지적 능력과 감성적 능력을 매개하는 상상력을 활용하여 타자들과의 공감 능력을 훈련시켜 상상의 공동체로서 네이션의 형성에 기여. 가라타니가 말하는 문학의 죽음은 문학이 윤리적 주체형성의 기제와 상상된 공동체로서 nation의 형성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것. 비록 문학은 죽었으나 문학 외부에서 새로운 사회를 향한 운동과 실천은 지속 가능. 엔터테인먼트로 전락한 근대문학 = 소설에게 희망을 품지 않고 떠나야 함(ex 김종철, 아룬다티 로이) (108~110) <br />
<br />

<br />

근대문학의 부정성 : 헤겔은 사상과 반성이 예술을 능가하고 주관적 내면성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낭만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예술의 종언을 선포. 보들레르에서 덧없고 일시적이고 우연한 것으로 나타나는 모더니티. 보들레르에 따르면 전일적인 상품 세계 속에서 시는 일종의 절대 상품, 자신 이외에 어떤 가치도 갖지 않는 유미주의 선언해야 함. 무용성-자율성. “넓은 의미의 모더니즘 문학과 예술은 이런 의미에서 예술의 죽음을 이미 자신의 탄생 조건으로 하여 발생한다. (...) 근대문예의 가장 중요한 테마는 자신의 몰락Untergang이다. 죽음은 근대문예의 끝을 규정하는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그 시작을 표시하는 구조적 필수요인인 것이다. 가라타니 종언론은 이처럼 ‘몰락으로서의 근대문학’이라는 관점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맹점을 노정한다.”(118). 블랑쇼에 따르면 근대문학은 이미 그 자체로 자신의 소멸에 대한 응시이며 자신의 불가능성에 대한 성찰임. &lt;문학과 죽음에의 권리&gt;에서 블랑쇼는 혁명이 개체의 삶을 죽이고 전체의 자유 속에서 그 죽음을 다시 살리듯이 언어는 사물을 죽이고 언어라는 상징 속에서 보존한다고 주장(헤겔 정신현상학에서 감각적 확실성 참조). “종언은 근대문학을 종결짓는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근대문학을 가능하게 하는 발생론적 구조이다. 가라타니의 착오는 종언의 구조적 성격을 엄폐하고 이를 단순한 사건적 차원으로 오인한 데에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가라타니의 종언론은 일종의 과잉진술이다. (...) 가라타니는 블랑쇼적인 문학의 존재를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사르트르적 문학의 불가능성 앞에서 근대문학 전체를 포기하는 몸짓을 취할 수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문학을 포기하고 문학 외부에서 정치적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가라타니의 희망은, 문학과 정치가 감각적인 것의 차원에서 동일한 기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으로서, 정치적 변혁의 가능성을 피상적인 수준에 축소시키는 결과를 초래”(122)<br />
<br />

문학이라는 장치(푸코의 정의. 권력과 지식의 교차점에서 단순한 생명을 주체로 전환시키는 주체화의 기제). 가라타니에 따르면 근대문학이라는 장치는 반성적 주체와 nation의 구성원을 형성하는 힘을 가진다. 1. 기하학적 원근법, 묵독, 언문일치, 고백 등은 공동체와 분리된 고독한 내면의 주체, 반성하는 주체를 형성 2. 근대적 nation은 실제로 경험되고 접촉되는 인간 그룹이 아니라 특정한 기술적 수단과 커뮤니케이션의 메커니즘(신문, 소설)을 통해 상상되는 공동체(베네딕트 앤더슨). 가라타니는 근대인식론의 세 가지 능력인 지성, 감성, 상상력을 당대의 현실적 제도인 국가, 시민사회, nation과 등치시킴(&lt;세계공화국으로&gt;). 사회적 통합과 연대의 원리는 공감, 연민, 동정 등을 통해 가능하며, 미적인 것은 사회적인 것에 핵심에 자리잡게 됨. 그러나 사실 근대문학이 창출했던 집합의 형식이 반드시 nation일 필요는 없으며 공감의 공동체는 언제나 nation과 민족주의를 범람할 수 있음(123~8).<br />
<br />

<br />

근대문학의 주체는 자신과의 관계에 있어서 내면을 매개로 한 성찰 능력을 갖고 있으며, 타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공감력(상상력)을 매개로 공동체 구성능력을 지니고 있는 존재. 근대문학의 주체는 성찰과 참여, 내관과 실천, 이성과 정념, 고독과 연대와 같이 서로 대립되는 가치를 역동적으로 결합시키는 인간유형, 진정성을 추구하는 주체(129) 진정성의 주체는 사회적 관계, 공동체의 정치적 프로그램, 진정한 삶을 가능하게 해 줄 삶의 공공적 형태를 위한 운동에 관심. insurrection, revolt. “가라타니의 근대문학 종언론은 이런 점에서 보면 ‘진정성’이라는 시대정신의 종언을 소설의 종언으로 축소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과소진술이다. 죽은 것은 문학이 아니라 문학을 가능하게 하는 윤리적 장치(진정성이라는 마음의 레짐)인 동시에 그 장치가 형성하는 특수한 인간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가라타니의 논의는 문학의 운명에 대한 논의에서 사회의 운명에 대한 논의로 연계되었어야 했다.”(131) <br />
<br />

<br />

<br />

<br />

“... 리스본 대지진은 칸트나 루소의 사유에도 그 흔적을 남긴다. 가령,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암묵적으로 거대재난 앞에서 생존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사회구성이라는 방편으로서의 사회구성이라는 발상을 전제하고 있다. 리스본 대지진에 대해서 볼테르와 서한으로 논쟁을 벌이기도 했던 루소는 &lt;언어기원에 관한 시론&gt;(1781)에서 이렇게 쓴다. “인간 사회는 대부분 자연 재난의 작품이다. 대홍수, 해일, 화산 분출, 대지진, 번개로 인한 산불 등은 어떤 한 지역의 야만인들을 두렵게 하여 흩어지게 만들었는데, 훗날 그것들은 다시 공동의 손실을 공동의 힘으로 복원하려는 야만인들을 결집시켰다.”(언어기원에 관한 시론, 주경복/고봉만 옮김, 책세상, 2002, 77쪽) 재난은 사회를 파괴하지만, 근원적인 수준에서는 흩어진 개체들을 하나의 사회로 결집시키는 역설적 힘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 근저에는 루소가 인간에게 부여하는 동정심pitié의 권능이 존재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고통받는 타인의 위치에 자신을 놓을 수 있는 상상력’에 다름 아닌 연민의 능력을 갖고 있다. 환언하면 재난의 상황 속에서 인간은 불운으로 그 재난의 희생자가 된 타자들을 연민한다. 연민의 한계가 사회의 경계이다(인간불평등기원론, 주경복/고봉만 옮김, 책세상, 2003, 80~84쪽). 그리하여 루소는 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최초의 말은 ‘나를 사랑해줘요’가 아니라 ‘나를 도와줘요’였다”(언어기원에 관한 시론, 주경복/고봉만 옮김, 책세상, 2002, 88쪽). 도처에서 ‘나를 도와줘요’라는 언어가 터져나오는 상황, 역설적으로 바로 그런 급박한 재난의 상황이 우리를 하나의 사회에 속한 공동의 운명체임을 체험하게 되는 순간이다. 이런 점에서 루소는 베네딕트 앤더슨을 선취하고 있다. 근대적 의미의 사회는 단순히 인간의 물리적 집합체가 아니라 (재난 속에서) 연민의 대상으로 구축되는 상상된 공동체인 것이다. 431쪽 <br />
<br />

<br />

<br />

<br />

<br />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598/28/cover150/8954609716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609716</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책의 감옥</category><title>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中</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3524171</link><pubDate>Mon, 15 Mar 2010 20:4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3524171</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1565842782&TPaperId=3524171"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06/57/coveroff/1565842782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816750&TPaperId=3524171"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301/61/coveroff/8990816750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160; <br />
&#160;
그러나 진짜 마르크스에 이르기 위해 아직 다른 철학자들이 필요했다. 「아미엥에서의 주장」에서 이미 밝힌 대로 우선 내가 그 당시 국가박사 논문에서 다루려고 계획했던 17~18세기 정치철학자들이다. 홉스에서 루소까지 나는 동일한 심오한 착상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갈등적 세계라는 착상으로 그런 세계에는 국가라는 유일한 절대적 권력만이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홉스)을 종식시킴으로써 재산과 개인의 안전을 문제없이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계급투쟁과 국가의 구실에 대한 생각은 이미 예견된 것으로, 우리는 마르크스가 이런 생각을 자기가 발견한 것이 아니라 선임자들, 특히 조금도 ‘진보주의자들’이 아니었던 왕정복고 하의 프랑스 역사가들과 영국 경제학자들, 특히 리카도에게서 차용한 것이라고 말했음을 알고 있다. 내가 인용한 학자 말고도 마르크스는 더 멀리 ‘로마 법학자’들과 ‘게르만 연구가들’의 그 유명한 논쟁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계급투쟁이 수면을 방해하고 있는 그 유명한 라친저 추기경은 잠을 자는 대신 교양을 좀 쌓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진보된’ 자연 상태에서도 동일한 사회적 갈등 상태를 본 루소는 또 다른 해결책을 제시했다. 즉 ‘결코 사멸되지 않는’ 보편적 의지를 표현하는 ‘계약’에 의한 직접 민주주의 안에서 국가 형태의 종식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것은 어느 날엔가 공산주의가 꿈꾸게 / 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루소에게 있어서 또한 나를 사로잡은 것은 「인간불평등기원론」, 그리고 가난한 자들의 정신을 굴복시키기 위해 부유한 자들의 사악한 상상력 속에서 나온 술책과 간교에 불과한 불평등계약론이었다. 여전히 이데올로기 이론이기는 하지만 그 이데올로기의 사회적 원인과 기능, 다시 말하자면 계급투쟁에서 하는 헤게모니적 기능에 관련된 것이었다. 나는 루소를 마키아벨리 이후 최초의 헤게모니 이론가로 생각한다. 그리고 또한 코르시카와 폴란드에 대한 개혁 계획에서 루소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자와는 정반대로, 상황과 전통의 복합적인 모든 여건들을 참착할 줄 알고 시간의 리듬을 존중할 줄 아는 현실주의자로 나타난다. 에밀의 교육이론, 즉 개인의 자연스런 발전 단계를 절대 앞지르지 말고 존중해야 하며 어린아이의 성장에서 시간의 작용을 존중해야한다는(시간을 벌기 위해 시간을 잃을 줄 알아야 한다는) 그 놀라운 교육이론에 대해서도 루소는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결국 나는 『고백록』에서 티끌만큼도 자기만족이 없는 일종의 ‘자아분석’의 유일한 예를 보았다. 그 책에서 루소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자기 삶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들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 문학사에서 처음으로 성性에 대해, 그리고 나중에 데리다가 거세의 상징으로 훌륭하게 설명한 성적 ‘대체supplément’의 그 놀라운 이론에 대해 글을 쓰고 숙고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결국 내가 루소를 좋아한 것은 계몽주의자들의 합리주의적이며 종말론적인 이데올로기에 철저히 반대한다는 점이다. 그러한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철학자들’은 루소를 무척 증오했으며(적어도 이 영원히 박해받는 자, 루소는 그렇게 믿었다), 민중의 화합은 지적 개혁으로 개혁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모든 이데올로기가 현실에 대해 갖는 엄청난 착각이다! 그런데 이것에 반대한 루소의 태도를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엄격한 명철성 속에서 다시 보게 된다. 그리고 또 내가 좋아한 것은 부와 권력의 모든 유혹 앞에서 루소가 보여준 철저한 독립성, 그리고 독학 교육에 대한 열광이었다.&#160;&#160;
루이 알튀세르,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권은미 옮김, 2008, 289~90쪽 <br />
<br />

&#160;&#160; <br />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301/61/cover150/8990816750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0816750</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책의 감옥</category><title>소설의 기술</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3487273</link><pubDate>Mon, 08 Mar 2010 00:1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3487273</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0060093749&TPaperId=3487273"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95/30/coveroff/0060093749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81960&TPaperId=3487273"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241/50/coveroff/8937481960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 />
밀란 쿤데라, 소설의 기술<br />
<br />

소설이란 무엇인가? 소설은 “작가가 실험적 자아(인물)을 통해 실존의 중요한 주제를 끝까지 탐사하는 위대한 산문 형식”(194)이며 “덧없이 달아나는 몇몇 정의들을 붙잡으려는 길고 긴 추적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207). 쿤데라는 ‘세르반테스의 절하된 유산’이라는 제목의 1부에서 후설의 유럽의 인문 정신의 위기에 관한 유명한 강연(&lt;유럽 학문의 위기와 초월론적 현상학&gt;에 수록)을 언급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후설의 요점은 그리스 철학에서 연원한 ‘유럽의’ 인문정신의 위기는 갈릴레이와 데카르트가 세계를 기술적이고 수학적인 대상으로 축소하고 생활세계(Lebenswelt, 삶의 세계로 번역됨)를 제거해버린 유럽 과학에서 비롯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근대의 창시자는 데카르트만이 아니라 세르반테스(13)이기도 하며, 철학과 과학이 망각한 구체적인 삶과 인간의 존재를 찾아내려는 유럽의 위대한 예술은 세르반테스와 더불어 탄생했다. 세르반테스는 세계를 애매성으로 이해하고, 유일한 절대 진리가 아니라 모순되는 상대적 진실의 더미와 맞서야 한다는 것, 불확실함의 지혜를 지니라고 요구한다. “인간은 선악이 분명히 구분되는 세계를 원한다. 이는 이해하기에 앞서 심판하고자 하는 타고난,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이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17) 쿤데라가 주장하는 소설의 지혜는 애매성과 불확실성의 지혜이다. 아이러니는 화나게 만드는데, 이는 아이러니가 빈정거리거나 대들어서가 아니라 세계를 애매하게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확실성을 앗아가기 때문이다(199). 동시에 그는 헤르만 브로흐의 말, “오직 소설이 발견할 수 있는 것만을 발견하라. 그것만이 소설의 유일한 존재 이유다”를 긍정하면서, “앎이야말로 소설의 유일한 모럴”(15)이라고 본다. 탈은폐로서 진리가 소설의 모럴이기도 하다면, 쿤데라가 인용하는 다음의 얀 스카첼의 말은 비단 시 뿐만 아니라 소설의 정의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즉 “시인은 시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저 뒤쪽 어디에 있는 것 오래 오래전부터 그것은 거기 있었고 시인은 다만 그걸 찾아내는 것일 뿐”(143) 후설과 하이데거를 자주 언급하면서 쿤데라가 밝히듯, 소설의 존재 이유는 생활세계를 영원한 빛 아래 간직하고 세계-내-존재인 우리를 ‘존재의 망각’으로부터 지키는 것이며, 그렇기에 오늘날 소설의 존재는 더욱 더 요구되는 것이 된다. 아름다움은 “더 이상 아무런 희망도 없는 인간에게 가능한 마지막 승리다. 예술에서 아름다움이란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이 갑자기 뿜어내는 빛이다. 시간은 위대한 소설들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이 빛을 결코 흐리게 만들지 못한다. 인간의 실존이란 인간에 의해 끊임없이 망각되는 것이어서 소설가들이 발견해 낸 것은 그것이 아무리 오래된 것이라 하더라도 끊임없이 우리를 놀라게”(198) 하는 것이다. 쿤데라가 소설에 대해 서술하는 부분들은 다분히 현상학의 영향이 많이 느껴지는 대목들이 많지만, 2부의 대담에서 그는 현상학적이라는 수식어를 직접 사용하는 것은 거부한다. 그는 예술을 철학이나 이론적 경향의 한 갈래로 보는 사람들을 무서워한다고 밝히면서, 소설은 이미 프로이트 이전에 무의식을, 마르크스 이전에 계급투쟁을, 현상학자들 이전에 현상학을 실천(예컨대 프루스트)했다는 것이다.(52) 쿤데라는 시나 철학은 소설을 포용할 수 없지만 소설은 시나 철학을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으며, 다른 장르들을 수용하는 경향이 소설의 특징이라고 본다(98).<br />
<br />

그런데 소설에서 자아를 포착하는 것은 그 실존의 본질적 문제를 포착한다는 것이다. 또는 그가 작업의 가설로 삼은 정의에 따르면, “시인이란 그가 들어갈 수 없는 세상에 어머니에 의해 이끌려 들어와 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게 된 젊은이다.”(51) 물론 쿤데라가 보는 소설은 물론 근대 유럽과 마찬가지로 사라질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만일 소설이 사라진다고 해도 그것은 소설의 힘이 다해서가 아니라 소설이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닌 세계에 처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는 그가 &lt;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gt;에서 말했던 것처럼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덫이 되어버린 세계 속에서 인간의 삶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 현상의 상대성과 애매성에 기초한 세계의 모델인 소설은 전체주의적 세계와는 양립할 수 없다. 이는 정치, 도덕적 구분임과 동시에 존재론적인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체주의적 진리는 상대성과 의혹과 질문을 제거하고, 따라서 소설의 정신과 부합하지 않는다(27). <br />
<br />

잠시 유럽 소설의 역사를 보면 최초의 소설들은 무한해 보이는 세계를 편력하는 여행담들이었다(&lt;운명론자 자크&gt;, &lt;돈키호테&gt;). 그런데 디드로 이후 반세기가 지난 후 발자크에게는 시작도 끝도 없는 지평선이 경찰, 법률, 재정, 범죄, 군대, 국가와 같은 사회 제도의 배후로 사라지고, 역사라는 기차에 실려간다. 훨씬 오래 후 엠마 보바리에게 지평선은 울타리처럼 좁아졌고, 일상의 권태 속에서 꿈과 몽상만이 중요하게 된다. “잃어버린 외부 세계의 무한함은 영혼의 무한함으로 대치된다. 유럽의 가장 멋진 환상 중 하나인, 대체할 수 없는 개인의 독자성이라는 환상이 피어나게 되는 것이다.”(19) 그러나 이 무한한 영혼에 대한 꿈은 전능한 사회의 초인간적 힘이 인간을 장악하면서 그 신통력을 잃는다. 이제 개인은 겨우 성 앞에 선 K, 측량 기사에 지위에 지나지 않게 된다. 에마 보바리처럼 꿈 조차 꿀 수 없다. 인간이 자신의 영혼이라는 괴물하고만 싸워야 했던 평화로운 시대는 조이스와 프루스트의 시대를 마지막으로 끝났으며, 카프카, 하세크, 무질, 브로흐의 소설에서 괴물은 바깥에서, 역사에서 온다. 이 역사는 비인격적이고, 다스릴 수도, 예측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쿤데라가 역사를 다루는 네 가지 방식(57~9)은 그의 소설적 입장과 관련해서 새겨볼 만하다. 그는 첫째로 모든 역사적 정황을 최대한 경제적으로, 소품처럼 취급하며, 둘째로 역사에서 단지 인물들의 실존적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 셋째 원칙은 역사적 연대기는 사회의 역사를 기록하지 인간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네 번째 원칙은 역사적 정황은 소설 속 인물에게 새로운 실존적 상황을 만들어 줄 뿐 아니라, 역사 그 자체가 실존적 상황으로 이해되고 분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lt;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gt;에서 두브체크가 소련군에 투옥되었다가 돌아온 에피소드는 실존의 매우 일반적인 범주로서 ‘나약함’을 보여준다(이 책의 처음 제목은 ‘비체험의 위성’이었다고 한다. 190쪽. 비체험이란 인간 조건의 한 특질로서, 사람은 단 한번 태어날 뿐이기 때문이다). 가령 &lt;웃음과 망각의 책&gt;에서도 프라하의 봄은 단순히 정치적, 역사적, 사회적 차원에서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통제하지 못하는 나약함이라는 실존적 상황으로 묘사된다. 인간이 세계의 주인이고 소유자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문득 그가 지닌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자연의 주인도 아니며, 역사의 주인도 아니고, 자신의 주인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됨으로써 파괴된다. “신도 사라져버렸고 인가도 더 이상 주인이 아니라면 도대체 주인은 누굽니까? 지구는 주인 없이 공허 속을 전진하고 있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죠.”(64) 소설 바깥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확인의 영역에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하는 말에 대해 확신한다. 그러나 소설의 영역에서는 확인하지 않는다. 그것은 “놀이와 가설의 영역”(116)이며 소설적 성찰은 본질적으로 의문적이고 가설적이기 때문이다. 소설가들은 단지 “실존의 탐구자”(68)일 뿐이며, 카프카의 표현을 빌자면, 소설가는 “자신의 생애라는 집을 헐어 그 벽돌로 소설이라는 다른 집을 짓는 사람”(196)이다. 따라서 소설가의 일대기를 쓰는 전기 작가는 소설가가 세운 것을 허물고 허문 것을 다시 세우는 셈으로, 소설의 가치도 의미도 밝혀주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만다. <br />
<br />

관련하여 2부 소설의 기술에 대한 대담과 4부 예술의 구성에 대한 대담에서 쿤데라가 자신의 소설적 기법을 언급하는 부분 역시 흥미로운데, 그는 한정된 지면에 현대세계에서 인간 실존의 복잡성을 포착하기 위해서는 그 특유의 다성적 대위법 뿐만 아니라 생략의 기법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생략은 “사물의 본질로 곧장 갈 것을 요구”하는데 이는 작곡자 레오 야나체크의 요구이기도 했다. 즉 “기법의 자동성과 장황함을 제거해 소설을 압축”(109)하는 것이다. 또한 소설에서 시간적 길이의 템포의 변화는 정서적 분위기의 변화까지도 내포하는 것으로서, 쿤데라는 그 자신이 스물다섯살까지만 해도 문학보다 음악에 더 끌렸음을 고백한다(133). 특히 가벼운 형식과 무거운 주제의 결합(&lt;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gt;에서 ‘키치’)은 잘 알려진 것처럼 그가 선호하는 방식이다. 요컨대 쿤데라 소설의 두 가지 원형적 방식은 “첫째, 7이라는 숫자에 바탕을 둔 건축술을 통해 이질적인 요소들을 결합하는 다성적 구성, 둘째, 희극적, 동질적, 극적이면서 그럴 듯하지 않음과 맞닿아 있는 구성”(140)의 방식. 이 밖에 쿤데라가 제시하는 소설에 관한 여러 개념어들도 6부에서 제시된다. 가령 유명한 서정적 바람둥이(모든 여자들에게서 자신의 이상을 찾는)와 서사적 바람둥이(여자들에게서 여성적 세계의 무한한 다양성을 추구하는)의 구분과 헤겔의 &lt;미학&gt;에서 다루어진 고전적인 분류(서정적인 것은 자신을 고백하는 주체의 표현이고 서사적인 것은 세계의 객관성을 파악하려는 정열로부터 오는 것)와의 상응 등등. <br />
<br />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의 “거대한 미학적 혁명”이자 “예술적 기적”인 카프카에 대해서는 주로 5부에서 다루어진다. 그의 경이로움은 인간의 행위를 결정하는 내적 동기가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동기가 더 이상 아무 무게도 지니지 않을만큼 외부적 결정이 압도적인 것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인간에게 남은 가능성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묻는 것에 있다(43). 카프카의 세계는 관료화된 세계인데, 이때 관료성은 여러 사회 현상들 중 하나가 아니라 “세계의 본질로서 관료성”(73)이다. 그렇다면 대체 ‘카프카적인 것’은 무엇인가?(147~151) 우선 첫째로 카프카에게 제도는 그 자체의 법칙만을 따르는 메커니즘, 그 법칙이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도 알 수 없고, 인간적 이해 관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며 이해되지도 않는 것이다. 둘째로, 카프카적 세계 속에서 서류는 마치 플라톤의 이데아와도 흡사한데, 진정한 실체인 그것에 비해 인간이라는 육신을 지닌 존재는 단지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측량 기사 K나 프라하의 엔지니어는 서류 속 신상카드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거나, 또는 이보다 더 하찮은 존재이다. 권력은 자동적으로 자신의 종교를 만들어내며, 권력이 신처럼 행동하는 모든 곳에서 그 자신을 향한 종교적 감정을 촉발한다는 것 등, 카프카 본인이 종교적 알레고리를 쓰지 않았더라도 카프카적인 것이 종교적인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셋째로, 죄의식을 감당하지 못하고 평온을 찾기 위해 스스로 처벌받고자 하는 라스콜리니코프의 경우(죄가 벌을 만든다)와는 달리, 카프카에서는 벌 받는 자가 자신이 벌을 받는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 부조리함은 감당할 수 없는 것이기에 벌을 받는 사람은 평온을 찾기 위해 자기가 당하는 고통을 합리화하려 한다. 즉 벌이 죄를 만든다. 넷째로 카프카적인 것에서 코믹한 것은 불가분한데, 카프카적인 것은 우리를 농담의 내장 안으로, 코믹한 것의 무서움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비극은 인간의 위대함이라는 멋진 환상을 줌으로써 우위안을 제공한다면, 희극은 이보다 가혹하게,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폭로한다(216).”(이중 셋째, 넷째 특징은 지젝이 자신의 이데올로기론에서 활용하는 카프카적인 것에 상응한다) <br />
<br />

쿤데라가 보는 카프카적인 것은 사회적인 것이나 정치적인 것이 아니며, 카프카적 세계에는 자본주의도 사유재산도 계급투쟁도 없다. 그것은 전체주의도 아니며(그러나 비일관적이게도 쿤데라는 또한 전체주의 국가와 관료제를 동일시한다), 당도, 이데올로기도 없다. 다만 카프카적인 것은 “인간과 세계의 원초적 가능성, 역사적으로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을 영원히 따라다닐 수 있는 가능성의 표현”(153)인 것이다. 관료제는 자발성, 창의성, 자유가 없고 단지 명령과 규율만이 있는 복종의 세계이다. 이는 그 거대한 활동의 목적이 보이지 않는 추상의 세계이다. 그러나 카프카적인 것은 단순히 커다란 사회 규모에서 생산되는 관료제와 소외, 비인격화로서만 요약될 수는 없다. 카프카 소설은 공동체와 인간적 교류에 대한 열렬한 욕구가 아니다. 오히려 쿤데라가 보기에, 측량 기사 K는 공동체가 아니라 제도에 의해 받아들여지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외로움을 부정해야 하는데, 바로 이것이 지옥이다. 그는 단 한순간도 혼자가 아니다. “외로움이 아니라 ‘박탈당한 외로움’이라는 저주, 바로 이것이 카프카의 강박관념인 것이다!”(159) 측량기사 K가 절망적으로 찾는 것은 인간적 유대감이 아니라 획일성인데, 이것 없이 그는 현실과의 관련을 갖지 못한다. 이전에 사람들이 다양함, 획일성으로부터 벗어남에서 이상과 승리를 찾았다면, 미래에는 획일성으로부터 상실이라는 것이 절대적 불행, 인간적인 것 바깥으로의 추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215). <br />
<br />

그런데 어떻게 카프카는 이 우울한 非時적 소재를 매혹적 소설로 바꾸어 놓았는가? 이에 대한 답은 카프카가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관청은 멍청한 기구가 아니에요. 그것은 멍청함이 아니라 오히려 환상적인 것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랍니다.”(163) 이것이 바로 카프카의 가장 큰 비밀 중 하나인데, 그는 관료주의적 현상을 통해 인간과 인간 조건뿐만 아니라 관청의 유령적 성격에 내포된 시적 잠재성까지 보았던 것이다. 카프카는 그 생전에 보지 못했던 관료제의 진실을 파헤쳐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예견이 아니라 언젠가 역사가 나름대로 발견하게 될, 이미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일 뿐이다. “시인은 시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저 뒤쪽 어디에 있는 것 오래 오래전부터 그것은 거기 있었고 시인은 다만 그걸 찾아내는 것일 뿐.” 그러나 이때 시인이 저 뒤쪽 어디에 숨겨진 시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려진 어떤 진실(저절로 주어지고 앞에 있는 아마 쿤데라는 여기서도 하이데거를 본받아 Vorhandensein을 염두하는 듯)에 봉사하기 위해 ‘참여’한다면 그것은 시의 고유한 임무를 저버리는 것이다. 바로 그가 소설, 또는 소설이라는 시가 정치 등 여타의 분야에 대해 지니는 근본적인 ‘자율성’ 때문이다. 전체주의와 공산주의 등 일체의 정치 이데올로기와 강박적으로 선을 그으려는 그는 또한 &lt;웃음과 망각의 책&gt;에서 나타난 “권력에 대항하여 벌이는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대항하는 기억의 투쟁과 같다”라는 말이 소설의 메시지로 간주되는 것에 반대하면서, “망각은 절대적 불의이면서 동시에 절대적 위안”(185)이라고 한다. 미소뮈즈misomuse(187)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에 치욕을 느끼고 그것을 증오하는 사람을 의미하는데, 종종 사변적이고 지적인 미소뮈즈들은 예술을 미학의 바깥에 종속시킴으로써 즉 참여 예술로 활용함으로써 예술에 복수한다. 쿤데라는 바로이 미소뮈즈에 반대한다. 열렬한 반공주의자인 그에게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은 “네 개의 단어, 네 개의 허위”(카스토리아디스)에 지나지 않는다. <br />
<br />

7부 예루살렘 강연은 그의 입장을 짧은 분량에서 잘 마무리하고 있는 글로서, 리처드 로티가 &lt;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gt;에서 제사로 삼고 있는 글이기도 하다. 쿤데라는 자신이 소설가임을 강조하며, 작가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가 인용하는 플로베르에 따르면 소설가란 자신의 작품 뒤로 사라지기를 바라는 사람인데, 이는 오늘날 공인으로서 역할을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설가는 누군가의 대변인이 아니며,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의 생각을 대변하는 사람조차 아니다(222). 쿤데라는 유대의 속담, “인간은 생각하고 신은 웃는다”라는 경탄할 만한 속담을 듣고 라블레가 어느날 신의 웃음소리를 듣고 유럽 최초의 소설을 착상한 것이라고 상상하기를 즐긴다고 고백한다. 신은 왜 생각하는 인간을 보며 웃는가? 인간이 생각해봐야 진리는 그들로부터 멀어져 버리기 때문이다(223). 결국 인간은 결코 자기가 생각하는 것과 같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라블레가 고안한 신조어 중 애석하게 잊혀진 것은 바로 아젤라스트agélaste라는 단어인데, 희랍어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웃지 않는 사람, 유머 없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런데 소설가와 아젤라스트 사이에 평화는 불가능하다. 신의 웃음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아젤라스트들은 진리는 명확한 것이며 모든 이가 같은 것을 생각해야 하고,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사람이 한 개인이 되는 것은 진리의 명증성과 타인들과의 일치된 동의를 상실함으로써이다. “소설이란 개인들의 상상적인 낙원이다.”(224) 라블레의 박학은 데카르트의 박학과 의미가 다르며, 소설의 지혜는 철학의 지혜와 다르다. “소설은 이론적 정신이 아니라 유머의 정신에서 탄생”(225)한다. 최근 러시아의 전체주의가 계몽주의 시대 무신론적 합리주의와 이성의 전능함에 대한 믿음의 소산이라는 견해가 있지만, 쿤데라는 “18세기가 비단 루소와 볼테르와 돌바흐의 시대만은 아니었다는 것, 동시에(라기보다는 특히) 필딩, 스턴, 괴테, 라클로의 시대이기도 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특히 로렌스 스턴의 &lt;트리스트럼 샌디&gt;는 오직 형식 하나만으로 “시 정신은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멈추는 곳에 있다는 것, 원인과 결과 사이의 다리가 무너지는 곳, 생각이 감미롭고 한가로운 자유를 배회하는 곳에 있다는 것을 증명”(227)한다. 한 세기의 정신은 소설에 대한 고려를 빠뜨리고 사상과 이론 개념에 의해서만 판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9세기는 기차를 발명해 냈고 헤겔은 보편적 정신 자체를 포착해냈다고 확신했는데, 플로베르는 멍청함을 발견했다. 이것이야말로 쿤데라가 보기에 과학적 이성에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한 세기의 위대한 발견이다. 멍청함이란 무지가 아니라 통상적인 생각의 공허함을 의미하는데, 그는 이것이 마르크스나 프로이트의 생각보다 중요하다고 본다. 그 까닭은 계급투쟁이 없는 미래, 정신분석이 없는 미래는 상상할 수 있어도, 모든 독창적이고 개인적인 생각을 뭉게버리고, 근대 유럽 문화를 질식시키게 될 통상적 생각, 컴퓨터와 매스 미디어에 의해 전파되는 통상적인 생각 없는 미래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229). “아젤라스트들, 통상적인 생각의 공허함, 키치, 이 셋은 신의 웃음의 메아리에서 탄생했고 어느 누구도 진리의 소유자가 아니면서도 모두가 이해될 수 있는 매력적인 상상의 공간을 만들 줄 알았던 예술에 대한, 몸 하나에 머리가 셋 달린 하나의 적”(230)이다. 쿤데라가 유토피아로 간주하는 개인이 존중받는 세계(소설이라는 상상적 세계와 유럽이라는 현실 세계)는 허약하고 소멸할 수 있다. 다만 유럽 문화가 위협받는 것으로 보이더라도 유럽 정신의 진수는 소설의 역사, 소설의 지혜 속에 보관되어 있으며, 이 가장 소중한 지혜는 개인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 <br />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241/50/cover150/8937481960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37481960</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책의 감옥</category><title>사는 법을 배우다</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3455891</link><pubDate>Mon, 01 Mar 2010 02:05: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3455891</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965458&TPaperId=3455891"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71/11/coveroff/8991965458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 />
고등학생 내지 대학 초년생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철학 입문서.&#160;
철학에 흥미를 갖는 독자들이 한번&#160;쯤&#160;가볍게 읽어보기 좋은 책인 것&#160;같다.&#160;&#160;
교육부 장관을 역임한 철학교수인 뤽 페리 스스로 소개하듯 그의 '우파 공화주의자'로서의&#160;&#160;
입장이 책 곳곳에&#160;스며들어있기 때문에&#160;주의해서 읽어야 할 부분들도 꽤 많이 있다.&#160;&#160;
하나만&#160;예를 들자면&#160;자칭 '휴머니즘'의 전도사로서 68 혁명 전후의 현대 프랑스 철학을&#160;
도매금으로 묶어 반인본주의로 치부하면서 비판 아닌 비판을 하는 부분 등등.&#160;
참조 : 68년 5월을 상기할 것인가, 땅에 묻을 것인가(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6142) 
아래는 얼마간 떠밀려서 하게 된;; 대략적인 책의&#160;요약(스압).
&#160;
뤽 페리, 사는 법을 배우다&#160;
<br />
<br />

왜 사는 법을 배워야 하는가? 왜 철학이 사는 법을 배우는 일과 동일시되는가? 뤽 페리는 이 탁월한 철학입문서에서 철학의 가장 중심적인 문제를 무엇보다 인간의 유한성, 반드시 사멸한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유한성 + 자신이 유한한 존재라는 의식은 모든 철학적 질문의 핵심이다. 종교가 구원의 문제를 담당한다고 할 때, 철학이 무엇인지 알려고 할 때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그가 제안하는 것은 종교와 철학을 비교하는 것이다. 종교가 약속하는 구원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그것을 의심하는 자들에게는 그러나 종교는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철학의 역할이 생겨난다. 종교가 신뢰confiance(믿음fides)와 겸허의 미덕을 중요시하고, 자유로운 사고를 비난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반면, 철학은 타자나 신의 도움없이도 오로지 자기 힘으로, 자신의 이성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주장한다. 믿음과 정반대의 길을 가는 철학자들을 종교는 악마diable(dia-bolos떼어놓는 자)의 포로가 되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철학의 입장에서 신앙은 위안을 주지만, 그 대신 우리가 얻는 평안보다 잃는 명철함이 더 많다. <br />
<br />

가령 에피쿠로스는 철학을 ‘영혼의 의학’이라고 정의하면서 그 최종목표가 죽음이 두려워 할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리는 데 있다고 보았다. 또한 에픽테토스 같은 사람도 철학의 궁극적 문제가 결국 단 하나의 주제, 죽음의 공포로 귀결된다고 보았다. 몽테뉴 역시, 철학하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대체로, 그리스 철학자들은 과거와 미래가 인간의 삶을 억압하는 가장 대표적인 두 가지 악이라고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에 따르면, 지금 여기 있는 존재만이 유일하고 실재적인 존재이며, 과거는 이미 흘러갔으니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존재하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 불가역성에서 비롯한 공포와 불안이 있는 한, 인간은 결코 자유롭게 사고하거나 행동할 수 없고, 따라서 인간은 무엇보다 스스로 자신을 구원해야만 하는 것이다. <br />
<br />

뤽 페리는 철학의 세 가지 근본적 차원을 세계에 대한 이해(이론), 정의에 대한 욕구(윤리), 구원에 대한 추구(지혜)에서 찾는다. 그리고 이 테오리아, 윤리, 구원이라는 범주를 통해서 스토아철학, 기독교, 근대철학, 탈근대(니체), 해체주의 철학 등을 개관한다.<br />
<br />

먼저 스토아학파를 살펴보자. 기원전 4세기 무렵 제논이 창시한 이 학파는 클레안테스, 크리시포스 등으로 계승되고, 이는 후대에 키케로 등에 의해 간접 전승되며, 로마시대에 다시 유행하게 된다(세네카, 에픽테토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1) 스토아 학파의 테오리아는 무엇보다 우주의 질서를 관조하는 것이다. theoria는 to theion 혹은 ta theia orao, 즉 신성theion을 본다orao, 신적인 사물들theia을 본다는 의미이다. 철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세계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이라고 할 때, 스토아 전통에서의 세계의 핵심은 조화와 질서, kosmos였다. 우주의 구조는 각각의 요소나 기관이 전체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며, 신적일 뿐만 아니라 이성적인 것logos이다. 여기서 신적이라는 것은, 인격신이 모든 경이로움을 ‘창조’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은 그 경이로움을 창조하거나 발견하는 존재가 아닌 단순히 그것을 발견하고 관조하는 존재일 뿐이라는 뜻이다. 경이로움으로 현현하는 신성은 인간의 손이 미치지 않는 비인간적인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스토아 학파와 달리 세계가 카오스와 혼돈이라고 보았으나, 키케로는 다음과 같이 쓴다. “에피쿠로스가 마음껏 비웃게 내버려두자. (...) 그러나 이 세계보다 더 완벽한 것은 없다. 세계는 의식과 지성과 이성이 있는 살아있는 존재다”(&lt;신의 본성에 관하여&gt;, 1권) 이처럼 스토아 학파는 자연이 조화로운 것이기 때문에 인간 역시 자연을 전범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각자의 것을 각자에게 - 이러한 공정성의 이론은 로마 법체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었고, 삶의 궁극적인 목적 중 하나는 우주의 질서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의 신성은 내재성 속의 초월성이다. 2) 스토아 학파의 윤리학은 코스모스를 모범으로 삼는 정의로 요약된다. 이에 따르면 공정성은 무엇보다 정확성의 문제가 된다. 자연은 가장 아름다운 통치자이며, 자연은 무엇보다 인간의 의지와 관련된 선과 악, 공정과 불공정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는 오늘날 생태학의 생각과도 유사한 셈이다(한스 요나스). 도덕적 과제는 존재 혹은 자연과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고대인들이 탁월성이라고 이해한 어떤 분야의 미덕은 자연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성향의 실현, 잠재태에서 행동으로 옮겨가는 것을 뜻한다. 3) 스토아 학파의 구원론은 지혜에 대한 사랑에서 지혜의 실천으로 가는 것, 죽음은 과정이고 인간은 영원한 우주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성립한다. 아렌트(&lt;문화의 위기&gt;)에 따르면 철학이 등장하기 이전의 고대인들에게 죽음이라는 불가피한 운명에 도전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하나는 번식이라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덧없는 시간과 망각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서사의 주인공이 될 만한 영웅적이고 영광스런 업적을 글로 남기는 것이었다(투키디데스, 헤로도토스). 그러나 양자 모두 한계를 갖으며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려는 세 번째 방법이 등장한다. 바로 사고와 행동을 정확하게 실천하여, 비록 불멸은 아닐지언정 어떤 인간적 형태의 영원에 도달하는 현자가 되는 것이다. 현자에게는 죽음은 단지 종말이 아니라 신성이 깃든 우주 안에서 어떤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넘어가는 변화나 과정에 불과하다. 에픽테토스의 말처럼 철학은 “신처럼 살고 신처럼 죽는 것을 배우는 것”(Les stoiciens, 900)이며 “죽은 뒤에 너는 지금의 네가 아니겠지만, 세계가 필요로 하는 또 다른 어떤 것이 되어 있을 것이”(Les stoiciens, 1030)다. 이는 각자의 우리 자신의 신적인 부분, 즉 지성을 통해 신적인 우주에 연결될 수 있고 각자의 daimon을 잘 돌봄으로써 불사에 관여하게 된다는 플라톤의 생각(티마이오스 90b-c)과 역시 좋은 삶을 관조하는 삶으로 본 아리스토텔레스의 불멸에 관한 생각을 일정 부분 해체하면서 동시에 스피노자적 전통으로 연결될 수 있는 생각이다. 구원의 추구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는 지혜의 몇 가지 훈련이 필요하다. 인간을 억압하는 두 가지 악, 과거에 대한 집착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억제하고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통스러웠던 과거 모든 일을 생각하지 마라. 다만, 현재의 순간마다 너 자신에게 물어라. 내가 정녕 견딜 수 없고 참을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그럴 때, 진정으로 네가 직면할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임을 잊지 마라”(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8권) 지나간 과거나 오지 않은 미래가 아닌 현재에 충실하라고 권고하면서 희망이야말로 가장 큰 불행이라고 비판한다는 점에서 스토아 학파의 생각은 티벳 불교의 교리와 유사한 점이 있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계획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가? 오히려 세네카가 말하듯이 “살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삶은 흘러가 버린다.”(또한 과거와 미래에 집착하는 태도는 니체의 말에 따르면 짐 나르는 짐승의 그것이며, Amor Fati와 반대되는 것이다) 좋은 삶은 희망도 공포도 없는 삶, 있는 그대로의 현실과 화해하는 것이다. 이때 삶의 목표는 단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고 우리에게 허락된 아름다움과 기쁨을 만끽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소유욕을 버리고 초탈한 자세를 갖는 것 역시 불교 정신과 맞닿아 있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전미래적 구원의 사고, 즉 운명적 재앙이 닥쳐온다 해도 이미 준비된 상태에 있을 것이라는 고도의 정신 상태가 요구된다. 현재를 살면서 과거와 미래에서 비롯하는 원망과 후회, 고뇌를 초탈하기 위해서는, 유한자인 우리는 항상 최후의 순간이 닥칠 수 있다는 전체적이고 충만한 의식을 가지고 매 순간을 만끽해야 한다. 전 생애가 하나의 순간처럼 되게 하려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 지향하는 이상이다. 두려움과 고뇌를 극복함으로써 얻게 된 평정에 도달하면, 현자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순간의 영원과 완벽한 행복 속에서 신처럼 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오늘날 한갓 정적주의나 운명론으로 들리는 이러한 태도는 바로 조화로운 세계라는 스토아 학파 특유의 세계관과 우주론에서 발원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br />
<br />

이후 그리스 철학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가 다루어진다. 기독교의 1) 테오리아가 갖는 첫 번째 특징은 스토아 철학이 신적인 것으로 여겼던 우주의 조화로운 구조, 즉 로고스가 예수라는 개인과 동일시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 또는 개인에 대한 특별한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이후 인권에 대한 철학을 예비한다. 스토아철학자들이 사용한 logos는 성경에서는 말씀으로 번역되며, 신성theoin이 한 명의 인간으로 축소되며, 신성을 관조하는 통찰orao 역시 변하게 된다. 두 번째 특징은 신앙이 이성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것이다. 구원의 관건은 주도적인 사고가 아니라, 타자에 대한 신뢰의 문제가 된다. 즉 믿는 자만이 그 단순한 마음을 통해서 신을 볼 수 있다. 가령 아우구스티누스가 철학자들을 빗대어 지식인들, 고매한 자들은 추론에 몰두한 나머지 오만하게 굴다가 신성을 보지 못한다(“자신의 지식을 대단하게 여겨 한껏 오만으로 부푼 그들은 ‘나는 온유하고, 마음이 가난하니, 너희 영혼이 내게 와 쉬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세 번째 특징은 철학자의 이해가 아니라 단순한 사람들의 겸허함을 중시하는 것이다. 이 겸허함은 이중적인데, 한편으로는 예수와 더불어 하찮은 인간의 지위로 축소된 신적인 로고스의 객관적 겸허함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을 위해 이성을 포기한 인간 사고의 주관적 겸허함이다. 바울이 그리는 신은 전지전능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는 허약하고 불쌍한 신이다. 겸허하게 자신을 낮추고, 또 자신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자신을 낮추라고 가르침으로써 기독교의 신은 허약하고 왜소한 모든 이들을 대변하는 신이 되었던 것이다. 네 번째 특징은 이성보다 겸허와 신앙을, 스스로 하는 사고보다는 타자에 의한 사고를 우선하면서 철학은 소멸하지는 않았을지언정 결국 종교의 시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나오는 다섯 번째 특징은 철학이 이제 더 이상 구원의 교리가 아니라 단지 종교의 시녀에 불과하기 때문에, 스콜라, 즉 하나의 학문일 뿐 지혜나 삶의 수련이 아닌 것으로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제 철학은 개념적, 비판적, 논리적 담론, 논증적인 훈련에 가까운 것이 되고 말았으며, 이는 신앙과 계시에 바탕을 둔 구원의 교리를 이성의 영역으로부터 분리한 기독교의 영향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2) 기독교 윤리학의 첫 번째 특징은 자유의지가 도덕의 기초가 되고 모든 인간의 존엄성이 평등하다는 개념이 처음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리스 우주론에서 자연에는 근본적인 위계질서가 있으며, 각 존재가 속한 범주는 우수한 것부터 저열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준이 있다. 그리스의 도덕적 어휘 중 미덕의 개념은 타고난 재능, 천성과 관련된 것이었으며 그리스 세계는 귀족주의적 세계였다. 반면 기독교인에게 중요한 것은 타고난 재능이나 능력이 아니라, 그 자질을 어떻게 사용하냐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도덕의 문제에서 자유의지가 도입된다. 이 기독교의 주장은 매우 강력해서 비종교적인 근대 도덕, 근대 민주주의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1789년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교의 유산이다. 두 번째 특징은 도덕적인 면에서 정신이 규범보다 중요하고, 법을 문자 그대로 준수하는 것보다 내면의 심판이 더 결정적이라는 생각이다. 도덕이 근본적으로 인간 내면의 문제가 되면서 외적 규범과 갈등을 빚을 동기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세 번째 특징은 인간에 대한 근대적 개념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신도들은 신으로부터 자유의지를 부여받은 피조물로서 같은 처지에 있는 형제라고 불리웠다. 모든 인간의 동등한 존엄성에 대한 사고, 모든 인간은 하나라는 신념이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잡고, 야만barbar, 즉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방인과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던 그리스적 개념은 사라지게 된다. 더 나아가 기독교는 각 개인에게 불멸을 약속한다. 3) 기독교적 지혜의 첫 번째 특징은 예수가 신성의 화신이 되면서 신의 섭리도 그 의미가 변했다는 것이다. 기독교와 더불어 인간은 신의 섭리가 스토아철학에서처럼 비인간적이고 비개별적인 운명이 아니라,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듯한 인격신의 너그러운 관심에 들어있다고 믿게 된다. 이제 우주적 질서에 우리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한 신성의 명령에 따름으로써 우리가 얻는 구원 역시 개인적 현실이 된다. 기독교가 약속한 구원은 인간을 둘러싼 초월적 우주의 한 부분으로 얻게 되는 무의식적이고 우주적 영원이 아니라 개별적이고 의식적인 불멸을 의미하게 된다. 두 번째 특징은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 즉 신 안에서 사랑하기만 한다면 인간은 영혼과 육신의 부활을 할 수 있다는 복음이다. 세 번째 특징은 사랑이 기독교의 기적이자 힘의 원천이라는 것, 사랑에서 고통을 찾아낸 불교나 그리스 철학에서 사랑이 문제였다면, 기독교에서는 사랑이 해답이라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집착으로서의 사랑을 비판하면서도 집착의 대상이 신적인 것 또는 신 자체라면 그 사랑을 부정하지 않았고, 신 안에서 피조물이 그 자신의 유한성을 벗어나 영원으로 갈 수 있다고 보았다. “네 마음에 드는 영혼이 있다면, 주님 안에서 그들을 사랑하라. 영혼은 원래 흘러가고 움직이는 것이나, 주님 안에서는 흔들리지 않고 확고하게 서리라. (...) 주님께 힘껏 매달려라, 그러면 공고함을 얻으리니.”(고백록, 4권 10장)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전체, 현재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인간의 부활은 기독교 구원론의 요체이다. 부활은 이성의 힘을 벗어나 인간의 머리로 헤아릴 수 없는 계시가 내포한 신비의 부분이다. 기독교는 추상적이고 무의식적인 구원이 아닌 구체적이고 의식적인 구원을 약속하고 인간이 유한성을 극복하고 불멸에 도달하는 승리의 복음을 전해준 셈이다. <br />
<br />

이제 기독교 이후 휴머니즘과 근대철학이 등장한다. 고대 우주론의 붕괴와 종교적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는 두 가지 위기와 함께 태어난 근대세계는 뉴턴, 갈릴레오 등의 과학 혁명을 배경으로 한다. 과학적 발견을 통해 이전까지의 세계상이 붕괴된 후 근대인들은 우주나 신의 도움없이 홀로 남아 새로운 지표를 찾아 나서야만 했다. 1) 세계는 코스모스가 아니라 혼란스럽게 끊임없이 충돌하는 카오스이기에, 지식은 테오리아의 형태를 더 이상 취할 수 없었고, 질서나 조화, 선, 미 등의 가치는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근대과학의 과제는 이제 세계의 아름다움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혼란스런 우주에 의미를 부여할 새로운 규칙을 능동적으로 세워야만 했다. 사고는 이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자연 현상을 인과적으로 연결하고 설명하려는 작업, 종합의 방법(칸트), 실험적 방법(클로드 베르나르, &lt;실험의학입문&gt;)을 의미한다. 근대적 사고는 인간을 코스모스와 신성의 자리에 올려놓는다. 이론과 도덕률, 구원의 교리 모두 인간 개념을 바탕으로 새롭게 정립되어야 했다. 17~8세기 철학자들이 동물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인간과 동물의 구별에 힘을 쏟은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이 지점에서 루소가 중요하다. 루소 시대에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기준은 두 가지 고전적 기준이 있었는데, 하나는 지성(아리스토텔레스의 ‘이성적 동물’), 다른 하나는 감수성, 애착심(데카르트), 사회성 등이었다. 루소는 데카르트처럼 동물을 정교한 기계를 닮은 것으로 보았지만, 기계에 없는 지능과 감수성, 의사소통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보았다. 루소가 독자적으로 파악한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자유 또는 완성가능성이라는 개념이다. 동물은 자유나 스스로 완성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항상 같은 원인에 똑같이 반응하며 살아간다. 반면 인간은 자유를 가지고 있으며, 자연적 본능의 프로그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능력, 무한히 변하는 역사를 능동적으로 만들어가는 능력이 있기에 스스로 자신을 규정할 수 있는 존재이다. 동물은 자연의 명령에 꼼짝없이 복종하지만, 인간은 자연의 명령이 통하지 않는 미확정의 여지가 있다. 인간의 반자연적 성격, 비동물적인 인간의 의지는 다른 한편으로 인간만이 실로 악마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의미한다(고문). 이처럼 자유를 인간과 동물의 차이로 정의함으로써 세 가지 결과가 따라나온다. 첫째로 동물과 달리 인간에게는 이중의 역사성이 있다는 것, 한편으로 우리가 교육이라고 부르는 개인의 역사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 문화와 정치로 대변되는 인간 사회의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면 그 존재에 선행하고 그 존재를 결정하는 인간 본성이나 본질, 인간성의 정의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의 모토, “존재는 본질에 선행한다”는 말은 루소의 핵심이 그대로 들어 있다. 세 번째 결과는 인간은 자유롭기에 어떤 자연적이고 역사적인 결정론적 규정에도 얽매임없이 도덕적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칸트가 언젠가 루소를 도덕 세계의 뉴턴이라고 부를 때, 이는 루소가 자유에 대한 사고를 통해 뉴턴이 물리학에서 했던 역할을 근대 윤리학에서 했다는 의미이다(또한 뉴턴의 세계에서 원심력과 구심력이 서로 대항하듯이 루소의 세계에서는 이기주의와 이타주의가 끊임없이 길항한다). 루소의 영향을 받은 칸트와 프랑스 공화주의자들은 윤리적 미덕이 사심없고 공공의 선과 이익, 보편성을 지향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사고를 제기한다. 자연을 모방하거나 전범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싸우고, 본성적인 이기심과 씨름해야 하기 때문에, 도덕에는 명령적 형태가 요구되며, 칸트는 이를 정언명령으로 나타냈다. 가령 1755년 리스본 대지진 당시,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자연이 주는 재앙의 의미에 대해 사유하게 되었다. 더 이상 고대인들이 생각한 것처럼 자연은 선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제2의 자연, 공동의 가치를 구현하는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로 구성된 자연인 목적의 왕국(칸트)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적 차원에서 자유에 대한 새로운 생각은 고대의 귀족주의적 세계에 대립한 세 가지 특징, 형식적 평등과 개인주의, 노동에 대한 가치 부여를 가져왔다. 미덕을 자연이 아니라 자유에 바탕을 둔 것으로 본다면, 민주주의가 성립될 수 있으며, 개인주의는 이러한 추론의 결과이다. 또한 일하지 않는 인간은 단지 가난한pauvre 인간일 뿐만 아니라 자신을 실현할 수 없는 불쌍한pauvre 인간이기도 하다. 귀족주의적 우주에서 노동이 노예나 하는 비천한 활동이었다면, 근대세계에서 노동은 인간이 자신을 실현하는 본질적 동력이자 스스로 교육하는 수단이었다(헤겔, 마르크스). <br />
<br />

데카르트의 코기토 역시 인식론에서 또한 근대철학의 기원에 있음은 간과될 수 없는 사실이다. 고, 중세 세계와 단절하면서 인식론, 윤리학, 구원의 교리 모두를 새롭게 정립하기 위해서 요청되었던 것은 ‘주체’였는데 이것이 대한 새로운 원칙을 제기한 것이 바로 데카르트였다. 고대 세계가 붕괴하면서 나타난 상실감과 의혹의 정조는 데카르트의 저작에서 새로운 철학을 구상함에 일조했다. 데카르트가 모든 사물을 의심하는 허구의 상황을 연출한 것은 진실에 대한 새로운 정의에 도달하려는 노력이었다. 이제 주관성은, 이전처럼 사실과의 일치가 아니라 진실의 가장 확실한 기준이 되었다. 또한 데카르트의 사고, 과거 전통의 선입견과 믿음을 거부하고 모든 것을 백지 상태에서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은 혁명에 대한 근대적 개념을 창출했다. 토크빌이 말했듯이, 1789년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 자코뱅은 “데카르트 학교를 졸업하고 거리로 뛰쳐나온 셈”인 것이다. 혁명가들은 구체제의 모든 유산과 결별하면서, 데카르트가 철학에서 이룬 것을 역사적, 정치적 현실에서 구체화한 사람들이었다. 인간이 궁극적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에서처럼 믿음이나 신앙이 아니라 자의식이 된다. 근본적 회의, 비판정신과 사고의 자유는 근대철학의 시초를 이룬다. <br />
<br />

요컨대 근대적 사고의 핵심은 비종교적 도덕은 평화로운 공동의 삶을 위해 남을 존중할 것을 요구하며 부과하는 가치의 총체이다. 그러나 가장 고결한 도덕적 이상이 구현된다고 해도, 죽음을 비롯한 실존적 문제에는 해답을 주지 못한다. 이 세계에 조화로운 질서도 없고 신도 죽었다면, 어디서 구원을 얻어야 할까? 근대인이 구원을 추구한 것은 대략 두 가지 방향이었는데, 하나는 지상의 구원을 찾는 종교, 과학주의, 애국주의, 공산주의 등이었다(뤽 페리의 반공주의). 다른 하나는 추후 현대 철학에서 설명된다.<br />
<br />

이제 탈근대주의, 니체의 경우를 살펴보자. 앞서 본 데카르트와 계몽철학자들은 비판정신이라는 최강의 힘을 손에 넣었는데, 이제 그것은 이성이나 인간중심적 이상의 원칙에도 적용되는 것이 된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그리고 니체는 의혹의 철학자로서, 고전적 휴머니즘의 환상을 파괴했다. 특히 니체의 눈에는 무신론자이며 물질주의자임을 자처하는 계몽철학자나 공화주의자 모두 어떤 신자로 보였다. 삶보다 우월한 어떤 가치가 있고, 사실을 판단할 때 그 이상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믿음이 종교적 신앙심과 다름없다고 본 것이다. 신이 아니라 인권, 과학, 이성, 민주주의가 신의 위치를 대신하게 되었기에, 계몽주의 휴머니즘은 여전히 종교의 본질적 구조에 갇혀 있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근본적으로 이상은 신학적 구조를 포함하는데, 언제나 현실세계보다 월등한 피안의 세계가 있고, 사람 자체보다 우월한 외적인 가치, 즉 초월적 가치를 설정하는 것이 그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이름으로 현실을 부정하는 자세를 니체는 허무주의라고 불렀다. 이상의 허구를 이용하여 인간을 삶 밖으로, 현실 밖으로 내쫓는 것이 허무주의이며, 니체 철학의 중심 주장은 초월이란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현실 안에 있으며, 모든 판단은 삶의 일부분을 이루는 생명력의 발현이라는 것이다. 니체의 관심사는 칸트나 공화주의자들처럼 모든 인간이 평등한 세계나 목적의 왕국을 건설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민주주의를 인간을 하찮은 존재로 축소시키고 가치를 폄하하는 쇠락한 형태라고 비판한다. 1) 니체의 테오리아는 아테오리아a-theoria였다. 그는 현실의 기초나 존재의 본질이 우주적이거나 신적인 것이라고 보지 않았고, 인식이라는 것이 관조나 종합의 문제가 아니었다. 니체에게 봄은 해체, 계보학을 의미한다. 니체가 보기에 진정한 철학은 사람들이 성스럽고 범접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가치와 사고의 겉모습 아래 감춰진 세속적 기원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니체는 존재에 대한 어떤 판단도 단지 그 판단을 내리는 자의 생명력을 드러내는 징후라고 파악했다(“사실이란 없다. 오로지 해석이 있을 뿐”). 계보학이 독려하는 해체 활동은 모든 가치의 이면에 심연이 있을 뿐이며, 세계의 실체를 포착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니체는 스토아 학파들이 상상한 세계와는 정반대의 세계를 생각했다. 세계는 무한한 에너지의 장, 무한하고 혼란스럽고 복합적인 힘과 충동의 구조로 간주했다. 그는 그리스인의 코스모스를 단지 인간을 위로하고 안심하게 만들기 위해 인위적으로 고안된 거짓 세계라고 보았다. 근대의 과학적 합리주의 역시 혼돈 속에 있는 힘을 재통합하고 종합하려는 시도로서 고대 우주론의 환상을 따라가는 또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물론 세계가 완전히 혼돈 그 자체인 것만은 아니며, 니체는 힘들의 유형을 구분한다. 반동적인 힘과 능동적인 힘. 전자는 고전 철학과 과학의 동기였던 진리에의 의지와 민주주의이며 후자는 예술과 귀족주의적인 자연적 우주이다. 반동적인 힘은 다른 힘을 억압하고 그와의 대립을 통해 구현되고 긍정보다는 부정, 찬성보다는 반대에 속하는 힘이다(소크라테스의 문답법). 육체와 감성을 무시해 온 진리 추구에의 의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유효한 것이 되기를 희망하는 내재적으로 민주주의적인 과학 역시 반동적인 것이다(반동-진리의지-민주주의-지각세계). 반면에 능동적인 힘은 특히 예술에서 표출된다(예술-귀족주의-감각적이고 육체적 세계 숭배-능동적 힘). 여기서 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최근의 니체 해석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니체가 단지 삶을 더 자유롭고 쾌활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동적 힘을 버리고 능동적 힘만 수용하고, 이성을 버리고 감성과 육체를 해방하라고 주장한 것처럼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일부 좌파 니체주의자(뤽 페리는 특히 들뢰즈를 염두해두는 듯)들은 단순하게 모든 생명력 중 능동적 힘을 살리고 반동적 힘을 제거하는 것이 니체의 궁극적 메시지라고 해석했다. 모든 규범이 금지하는 것이라면, 금지를 금지(68혁명의 구호 중 하나)하고, 부르주아 도덕을 해체하고, 육체와 감성을 해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68혁명 등의 아버지로 지목되기 힘들다. 니체는 패거리 본능을 비판했고,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 등 모든 형태의 혁명적 이데올로기에 반대했으며, 성적인 절제를 필수적이라고 여겼으며, 과도한 낭만주의와 열정의 방만을 비판했다. 오히려 니체는 무정부주의나 육체의 해방, 성 혁명이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힘들을 강화하고 거기에 통제된 위계질서를 부여하는 것, 그가 ‘위대한 양식’이라고 부른 것을 주장했다. 반동적 힘까지도 포함한 종합적 힘에 조화와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삶이 왜소해지거나 허약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니체는 생각했던 것이다. 2) 그렇다면 비도덕주의자로서 니체에게 어떤 도덕이 가능한가? 사실 니체의 반박애주의적 열정은 광기에 가깝기도 하다. 니체의 도덕은 곧 좋은 삶이란 가장 조화롭고 강렬하고 우아한 삶, 이성을 존중하고 무의미한 소모를 하지 않는 수학 공식처럼 엄격한 삶이었다. 힘의 의지 역시 주의깊게 해석되어야 한다. 이는 권력이나 높은 지위를 탐내는 욕망이 아니라, 허약하지 않은 생생하고 강렬한 삶을 원하고 내면적 분열을 피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러한 의지는 춤추는 사람처럼 가볍게 천진하게 살 수 없게 하는 두려움, 후회, 원한 등이 해소된 전범적인 삶, 위대한 양식 안에서 실현된다. 과도한 열정의 낭만주의(바그너, 쇼펜하우어, 슈만, 브람스)를 비판하는 니체가 말하는 위대한 양식은 한편으로 고전주의적 사고의 특징을 갖고 있다. 3) 니체에게 구원의 교리는 우선 영원회귀 개념에서 드러난다. 그는 가치있는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을 판단하는 현세적 기준을 제공하며, 우상도 신도 없는 구원의 교리를 추구하고자 한다. 영원회귀는 가치있는 순간과 그렇지 못한 순간을 선별하는 원칙이다. 내가 이것을 수없이, 영원히 반복되더라도 하고 싶었던 것이 확실한가를 자신에게 물어보라는 것이다. 치졸한 순간, 갈등과 죄의식, 나약함, 거짓, 자기기만의 순간이 영원히 반복되기를 누가 바라겠는가? 즉 니체는 진정으로 기쁘고 사랑과 명철함, 평정을 경험했던 순간들을 선별하여 후회도 원망도 없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와 유사하게, 영원회귀의 교리는 좋은 삶이란 과거나 미래에 얽매이지 않는 온전히 홀가분한 상황에서 현재와 영원 사이에 어떤 차이도 없다는 완성된 느낌으로 매 순간을 충만하게 살아가는 삶이라고 가르친다. 니체에게 구원의 교리로 중요한 것은 또 아모르파티amor fati, 운명애이다. 오직 있는 그대로의 것만을 원하는 것. 니체에게 구원의 교리는 조금 덜 희망하고, 조금 덜 후회하고, 조금 더 사랑하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현재를 긍정하고 가장 삶을 사랑한 신, 포도주와 축제와 환희의 신, 디오니소스처럼. 그런데 이 운명애와 영원회귀의 윤리가 상충되는 것은 아닌가? 우선 이에 대해 운명애는 영원회귀의 매우 선별적인 요구가 적용된 후에야 가치있는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니체 철학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다. 뤽 페리는 니체의 아모르파티에 대해 비판한다. 현실이 사랑스러울 때 사랑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과연 현실이 몹시 고통스러울 때도 운명애가 가능한가? 아도르노가 말한 것처럼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를 쓰는 것이 가능한가? 인류가 저지른 죄악을 포함한 있는 그대로의 세계에 대한 사랑은 또 하나의 새로운 이상이 되어 허무주의의 또 다른 모습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br />
<br />

니체의 해체 이후의 현대철학은 더 이상 니체 이전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우선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가 열어놓은 해체의 길을 따라가는 첫 번째 가능성이 있다(알튀세르, 라캉, 푸코, 들뢰즈, 데리다). 그런데 이는 니체가 그러했듯이, 현실에 대한 냉소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 뤽 페리는 니체 이후의 해체주의라는 이름으로 포괄한 철학이 니체와 동일한 모순에 빠졌다고 본다. 이 지점에서 하이데거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그가 보기에 세계화와 자본주의의 근본 문제는 부익부빈익빈의 심화가 아니라, 인간을 역사로부터 소외시키고 의미와 목적성을 박탈한다는 점에 있다. 현대를 특징짓는 것은 기술의 지배이며, 17세기 과학의 비약적 발전 이후 민주주의 삶의 곳곳에 퍼져나갔다. 과학적으로 세계를 파악하고 더 나아가 지배하겠다는 인간의 열망으로 나타난다. 계몽주의 시대 과학적 시도만 해도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와 해방적 관심이 우세했으나, 현대에 와서 이 과학은 기술로 이행하는데, 다시 말해 목적없는 과정으로서 기술이 득세하고 수단이 우위를 차지하게 되며, 도구적 합리성이 지배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계보학적 자세와 기술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생각했는데, 니체는 그가 보기에 기술의 철학자로서 서양 형이상학의 정점에 위치하는데, 니체가 바로 세계 의미의 상실, 힘에의 의지를 우선하고 이상의 소멸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현재의 위기 속에서 기술 세계의 도전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오직 권위주의 체제뿐이라고 확신하고 나치에 복무하기도 한다. 니체 이후의 현재 철학은 공허한 박식과 전문화된 관심으로 축소된 철학이 되거나 휴머니즘을 사유하기 위한 철학이 되거나 하는 갈림길에 서 있다. 물질주의(유물론)의 사고(스토아, 니체, 스피노자 등)에서 보기에 희망은 좌절, 무지, 무력을 의미하고, 조금 덜 희망하고, 조금 더 사랑하라는 가르침, Carpe Diem에서 구원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뤽 페리는 인간이 자연과 역사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된 존재라는 물질주의적 사고를 비판하며 루소와 칸트의 노선, 자유와 완성 가능성의 힘을 긍정하고 지지하려 한다. 그가 보기에 물질주의는 심오한 철학적 주제들을 다루지만 자신을 대상으로 삼지 않고, 초월과 자유, 이상 등을 논한다. 1) 뤽 페리는 현대 휴머니즘의 근본 과제는 계보학과 물질주의적 해체에 빠지지 않고 다시금 초월성을 새로이 사고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는 인간에 대해 초월적인 고대적 초월성 개념과 중세의 초월적 개념이 아니라, 칸트와 후설을 거쳐서 내려오는 내재성 속의 초월을 논의한다. 이는 니체 이후의 비형이상학적인 초월성인데, 후설의 지평 개념은 이를 잘 설명해준다. 이는 최종적 총체, 지고의 존재를 보증하는 기본적 근거에 우리가 도달할 수 없음을 뜻하며, 후설이 예를 든 것처럼 어떻게 바라보아도 세 면 이상 볼 수 없는 육면체와 같은 것이다. 우리는 단지 지평에서 지평으로 이동하며, 이는 인간은 유한하며 의식은 언제나 무엇에 대한 의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가치는 형이상학적이거나 신학적 권위에 위해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그 수용은 나의 의식 내면에서 일어나는 과정이다. 현대 휴머니즘은 나의 주관성에 자리잡은 있는 그대로의 초월성을 조명하는 현상학을 시도한다. 니체 이후 현대 휴머니즘의 테오리아는 자기성찰과 자기비판에 집중된 인식이론이다. 2) 현대 휴머니즘의 윤리는 신성의 인간화 경향과 인간의 신격화 경향의 교차로 특징지어진다. 사람들은 더 이상 조국이나 혁명 같은 이상에 목숨을 걸지 않으며 단지 다른 인간을 위한다. 3) 구원의 문제. 우선 현대의 휴머니즘에서는 자기중심의 편협한 정신을 벗어나 타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판단함으로써 보편성에 도달하는 확장된 사고가 요구된다(네이폴 예시). 또한 이 확장된 사고는 세계문학이 도달한 보편성의 경지처럼 인간성 자체와 결합하는 특수성과 보편성 사이를 매개하는 고유성 또는 개성을 통해서 사랑의 지혜를 불러온다. 사랑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타인의 고유성을 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장사지내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 스토아 철학이 제안하는 집착을 버리는 방법, 기독교의 종교적 답변, 그리고 다른 어떤 것이 있을 것이다. 사랑의 지혜는 각자가 스스로 찾아야 하고, 불교나 기독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각자 나름대로 사는 법을 배워야 하며, 매일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는 언젠가 헤어질 날이 찾아올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지금 여기서 함께 해야 할 일들을 기쁜 마음으로 찾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런 지혜는 형이상학과 종교의 환상에서 벗어난 현대의 휴머니즘에서 가능하다. <br />
<br />

<br />
<br />

<br />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71/11/cover150/8991965458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965458</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책의 감옥</category><title>사랑이라니 선영아</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3431316</link><pubDate>Sat, 20 Feb 2010 12:58: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3431316</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883336&TPaperId=3431316"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237/41/coveroff/8972883336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간만에 읽어본 소설. 밑줄긋기&#160;
&#160;

&#160;
&#160;
&#160;
&#160;
&#160;
&#160;
&#160;
(...)그러므로 사랑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사랑가'를 부르며 바지 지퍼를 내리거나 브래지어 호크를 푸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내는 일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 있게 드러낼 수 있어야만 상대방이 수많은 양반 자제 중에서 자신을 알아볼 게 아닌가? 그러므로 다시한번, "사랑해"라고 말한다는 건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냈다는 뜻이다. 사랑의 대상보다 자신을 먼저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기형도는 '그집 앞'이라는 시를 이렇게 끝냈다. "이 세상에 같은 사람은 없네/ 그토록 좁은 곳에서 나 내 사랑 잃었네" '비가 2'에서는 이렇게 끝을 냈다. "세상은 온통 크레졸 냄새로 자리잡는다.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왜 기형도는 이 세상 누구와도 닮지 않은 위대한 혼자에 대한 얘기로 시를 끝맺었을까? 사랑이 끝나면 자신에 대한 사랑만이 남게 되기 때문이다. 애당초 "사랑해"라고 말하기 위해 거울을 보며 연습할 때 봤던 그 얼굴을 향한 사랑만이. 1982년 8월 28일, 기형도는 일기장에 "언제나 나는 진실로 연애다운 사랑을 할 것인가" 라고 썼지만, 그런점에서 그는 늘 연애중이었다.<br />
<br />
꽃에는 입술이 없지만 자신을 바라보라고 말한다. 사랑에는 혀가 없지만 네가 누구인지 먼저 알아내라고 종용한다. 사랑을 통해 우리는 저마다 위대한 개인으로 자란다. 거울에 비친 그 위대한 개인을 사랑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향해 단호한 어조로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지구에서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느냐는 미 우주항공국의 업무지만, 우리가 얼마나 깊이 사랑할 수 있느냐는 스스로 대답할 문제다. 그건 우리가 얼마나 자신에 대해 깊이 알고 있느냐, 혹은 우리가 얼마나 자신을 깊이 사랑하느냐에 달린 문제다. 사랑은 우리의 평생교육기관이다. 주민등록번호를 통해 성인 인증을 거쳐야만 입학할 수 있는 성인들의 학교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낼 때까지 우리는 계속 낙제할 수 밖에 없다. 죽는 순간까지도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할테니, 결국 우리가 그 학교에서 졸업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br />
<br />
그러므로 다시 한번, "사랑해"라고 말한다는 건 자신을 먼저 사랑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만 '진실로 연애다운 사랑'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뜻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추구하는 것....자신의 자아를 저 밑바닥까지 찾아 헤매는 것이다."라고 말한 사람은 울리히 벡과 엘리자베트 벡-게른샤임 부부다. (...) 90~2쪽<br />
<br />
...어떤 사람을 향해 "사랑해"라고 말한다면 그건 이미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해봤다는 것이다. 사랑을 고백하는 일은 아무도 없는 나이트 클럽 무대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단 한 사람만을 위한 춤을 추는 일과 흡사하다. 이때 자신이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한눈에 드러날 수 밖에 없는데, 애정이 없다면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다. "사랑해", 그 대담한 말을 통해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나는 네가 누구인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먼저 누구인지 보여주겠다. 이번에는 네가 너를 보여줄 차례다. 그래서 "사랑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둘 중하나다. 기꺼이 자신을 드러내거나 못 들은 걸로 치거나. 못 들은 걸로 치겠다, 그건 '나한테 네가 누구인지 설명하지 마라, 우리 사이는 사회적인 관계다'라는 뜻이다... 87~8.<br />
<br />
&#160;<br />
<br />
기억이 아름다울까, 사랑이 아름다울까? 물론 기억이다. 기억이 더 오래가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필요하지만, 기억은 혼자라도 상관없다. 사랑이 지나가고 나면 우리가 덧정을 쏟을 곳은 기억뿐이다. 사람도 없는 막차버스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집에까지 가는 동안 뭐가 그리 즐거웠는지 한없이 웃었던 기억, 아파트 근처 으슥한 벤치에 어깨를 붙이고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문득 말을 멈추고 어색한 마음에 둘이서 처음 입맞췄던 기억, 자존심 때문에 공연히 투정을 부리다가 되려 그런 자신의 모습이 싫어 그만 혼자서 울어버린 기억, 사랑이 끝난 뒤 지도에 나오는 길과 지도에 나오지 않는 길과, 차가 다니는 길과 차가 다니지 않는 길과, 가로수가 드리워진 길과 어두운 하늘만 보이던 길을 하염없이 걸어다니던 기억, 모든 게 끝나면 유통기한이 지난 식료품처럼 사랑했던 마음은 반품시켜야만 하지만, 사랑했던 기억만은 영수증처럼 우리에게 남는다. 한때 우리는 뭔가를 소유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물. 질투가 없는 사람은 사랑하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억이 없는 사람은 사랑했다는 증거를 제시할 수가 없다. <br />
<br />
지난 초가을 두 번째 만나던 날, 진우는 선영에게 자신을 좋아했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함께 저녁으로 홍합솥밥을 먹고 국무총리 공관을 지나 삼청동 골짜기 쪽으로 걸어 올라가노라니 진우는 13년 전의 어느 가을 저녁으로 돌아간 듯했다. 삶의 순간 순간이 어떤 무늬와 결로 이뤄졌는지 똑똑하게 보여주는 저녁바람이 선영의 귀밑머리로 나부꼈고 그 순간 진우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이 진정으로 살아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당장 죽어도 좋다는 느낌이 들 때다. 그때 삶은 죽음을 뛰어넘는다. 삶이 죽음이라는 엄청난 장애물을 뛰어넘는 데 지렛대로 사용하는 게 바로 사랑이다. 139~141쪽<br />
<br />
&#160;<br />
<br />
"아까 자다가 니 전화 받고 밖으로 나오려는데, 비가 오더라. 비가 오네. 혼잣말하면서 차를 몰고 나오다 보니까 문득 이제 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나무의 뿌리들도 이제 빗물을 모아야 하겠지. 다시 자라려면, 그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까 갑자기 지난 겨울이 떠오르는 거야. 선영아, 지난 겨울에 눈 많이 내렸잖아. 그지?&#160;골목길에 쌓이기도 하고, 그냥 녹아서 질퍽거리기도 하고. 그러다가 지금은 다 녹아버렸지.&#160;그런 생각이 들더라. 눈이 녹으면 그 하얀빛은 과연 어디로 가는 걸까? 선영아, 너는&#160;아니? 눈이 녹으면 그 하얀빛은 과연 어디로 가는지?" <br />
<br />
선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광수가 돌아보니 선영은 잠들어 있었다. 광수는 잠시 선영을 흔들어보다가 손을 뻗어 라디오를 켰다. 여윈 몸을 떠올리게 하는 피아노 반주에 맞춰 그만큼이나 마른 목소리로 한 여자가 이별 노래를 불렀다. 빗줄기 사이로 줄지어 멈춰선 검은 윤곽의 자동차들 위로 신호등의 붉은 불빛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우산을 쓴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그 어두운 풍경을 내다보며 광수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눈이 녹으면 그 하얀빛은 과연 어디로 가는 걸까? 164~5쪽&#160;<br />
<br />
<br />
<br />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237/41/cover150/8972883336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2883336</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책의 감옥</category><title>Anne Sauvanargues 강연</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3365051</link><pubDate>Sun, 24 Jan 2010 18:4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3365051</guid><description><![CDATA[<br />

국내에도 번역된 &lt;들뢰즈와 예술&gt;의 저자이며 고등사범학교에서 예술철학을 가르치는 얀 소바냐르그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4일동안 강의했는데 둘째 날과 넷째 날 밖에 가지 못했다. 예술과 철학이라는 제목 하에 이루어진 강연은 주로 들뢰즈의 미학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고,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것이 많지만 몇 가지 기억나는 것들을 기록삼아 옮겨본다. 여기 적는 건 강연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불어였다면 거의 못 알아들었겠지만, 비록 느린 영어로 이루어졌어도 놓친 부분이 꽤 많았고, 그래서 밑의 내용은 꽤 오류를 포함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넷째 날 부분은 강연 관련 원고가 있으니 한번 번역을 해봐도 좋겠건만 당장은 힘들 것 같다. <br />
<br />

둘째날 강연의 제목은 비평과 진단, 힘의 감응이었다. 초반에는 데카르트에서 칸트로 이어지는 주체의 이론을 개괄했고, 시몽동에 의한 주체 개념 비판을 다루었다. 강연에 따르면 들뢰즈에게 있어서 시몽동의 개체화 개념은 큰 중요성을 갖는다. 예컨대 선-개체적 독특성이나 비인칭적 개체화 같은 개념. 이후에 &lt;주름&gt;의 번역자이자 소바냐르그 밑에서 들뢰즈를 전공한다는 이찬웅 씨가 잠시 강연을 했다. 일의성(둔스 스코투스)이니 중립적 본질(아비첸나) 같은 중세철학에서 유래한 개념들을 들뢰즈가 어떻게 중요하게 쓰는지, 시몽동의 변조modulation 개념이 들뢰즈에서 매우 중요하다.. 뭐 이런 이야기를 했고, 다시 소바냐르그의 강연으로 돌아오면, 개체화라는 것은 주체를 구성하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시몽동, 조프루아 생튈레르, 스피노자 등이 개체화 이론을 위해 동원된다. 다소 낯설은 이름의 생튈레르는 뀌비에라는 사람과 논쟁했던 동물학자로서 후자가 동물들은 결국 서로 소통될 수 없는 네 가지 정적인 종으로 환원된다는 요지의 주장을 펼친 반면 전자는 오직 하나의 종이 있을 뿐이며 이것이 모든 동물들의 다양한 변이를 가져오는 하나의 도면이 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시몽동의 개체화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전통 형이상학의 이분법 도식인 질료-형상 설을 비판한다. 시몽동은 오히려 재료-힘 이라는 새로운 비유기적 조직화 원리를 끌어들이는데, 그에 따르면 개체화 이전에 형이상학적으로 주어진 개체화의 원리란 존재하지 않으며 개체와 개체화의 원리는 개체화의 과정을 통해서만 동시적으로 구성된다. 가령 거푸집이 일방적으로 진흙을 주조하는 것이 아니라 질료 자체가 나름의 독특한 힘, 비균질적 에너지를 가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질료는 무규정적인 것이 아니라 어떤 능동적인 속성을 지닌 것이 되고, 형상은 질료적 생명성의 metastable준안정적 상태로 변화할 수 있게 된다(준안정적 상태란 예컨대 과냉각 액체, 0도 이하에서도 계속 액체로 남아있는 물이 약간의 충격만으로 바로 얼어버리는 그런 상태이다. 선개체적 존재는 긴장상태에 있는 이질적인 힘들의 집합에 있고 이 힘들이 위상변화함으로써 다른 상태로 이행한다는 것). 이 질료에 내재한 잠재적 힘들과 이 힘의 지속적인 변이 과정에 대한 표현은 예술의 소관이다. 예술은 언제나 생성 중에 있는 이 잠재적인 힘들의 포획이고 삶에 대한 실험과 실천이다 등등. <br />
<br />

넷째 날은 예술과 내재성이라는 제목의 강연이 있었다. 소제목으로는 유사성과 반대되는 생성, 생성과 열린 체계, 리좀, 동물 되기와 감응affect의 목록, 힘의 포착으로서 생성, 이미지의 개체화, 운동-이미지와 세 변이태, 운동-이미지에서 시간-이미지로의 이행 등이 거론되었다. 들뢰즈의 이미지 존재론은 본래 무엇보다 베르그손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하는데, 어쨌든 들뢰즈는 이를 영화의 존재론에 끌어들이기 때문에 무엇이 베르그손 고유의 것이고 아닌지 헷갈리는 점이 있다(비단 이건 베르그손 독해만의 경우만은 아니지만). 아무튼 들뢰즈의 영화론에 관해서 간략하게만 몇 자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주지하다시피 들뢰즈는 영화에 관한 두 권의 책, &lt;시네마 1권; 운동-이미지&gt;와 &lt;시네마 2권; 시간-이미지&gt;을 썼다. 그는 이미지(물질과 관념의 중간에 위치하는 어떤 것)를 운동과 등치시키고, 이미지들의 총체인 세계에는 중심도 없고 어떤 정박된 주체도 없다고 주장한다. 오직 이미지들만이 존재한다. 이미지는 복수적이고 미분적인 힘관계들의 배치agencement이며 유동하고 임시적인 개체화의 장의 탈중심화된 우주를 구성한다. 운동-이미지들의 무한한 집합은 다양한 변이를 가능하게 하는 어떤 내재성의 평면이다. 이미지들은 모두 작용과 반작용의 관계를 갖는데, 여기에 특이한 이미지인 신체가 개입한다. 이때 작용과 반작용 사이에 어떤 간격이 들어서게 되고, 이 간격은 특정한 면에서만 작용을 받아들이고 반작용을 실행한다. 간격을 통해 선별과 조직화, 변이가 가능해지고, 그래서 이 간격은 ‘비결정성의 중심’이라 불린다. 운동-이미지에서 세 변이가 일어나는데 비결정성의 중심은 이미지들의 총체에서 관심을 끄는 것을 취하는데 이때 중심과 결부된 운동-이미지가 바로 지각-이미지이고, 지각-이미지가 작용하거나 반작용하는 것이 행위-이미지이며, 지각과 행위 사이를 점하는 것이 바로 감응-이미지이다. 이제까지 서술된 내용이 현실적인 층위에서 다루어진 이미지론이고 시간의 도입과 더불어 잠재적인 것의 층위에서 다루는 이미지론이 나오게 된다. 영화의 탁월성은 영화가 정박이나 지평의 중심없는 탈중심화된 이미지의 세계, 순수 운동의 세계를 보여준다는 데에 있다. 영화의 역량은 현실적 이미지, 운동-이미지뿐만 아니라 시간-이미지도 준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이때 시간-이미지는 운동-이미지의 감각-운동 도식을 파괴하는 순수 시지각적 ․ 음향적 이미지, 기억-이미지, 꿈-이미지, 결정체-이미지 등으로 분류된다. 시간-이미지를 통해 잠재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의 상호공존과 식별불가능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영화는 기존의 사유의 이미지를 깨뜨리고 새로운 지각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은 현상학적인 1인칭 주체의 관점을 비판하고 비인칭적, 선개체적인 잠재적 힘들의 차원을 개방할 것이다. <br />
<br />

일단 예전에 들뢰즈를 드문드문 읽어보았을 때의 독서들은 주로 칸트나 니체, 베르그손, 스피노자에 관한 그의 책들과 &lt;차이와 반복&gt;이나 &lt;의미의 논리&gt; 같은 책들을, 그나마 제대로 이해도 못한 상태에서 읽었을 뿐이었다. 더군다나 주로 강연 대상이었던 &lt;감각의 논리&gt;나 &lt;천개의 고원&gt;, &lt;시네마&gt; 등은 아예 읽어보질 못해서 이해가 어려웠다;; 들뢰즈에 과문해서 잘 모르겠지만, 그냥 강연에서 주워들은 생각들을 바탕으로 말해보면 확실히 들뢰즈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과 인간 아닌 것(물질, 동물, 괴물 등등) 사이의 경계를 흐트러뜨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개체는 언제나 강도적인 종합, 힘의 합성의 산물이며 인간은 ‘국가 속의 국가’, 능동적 주체나 실체가 아니라 스피노자가 말하는 양태, 언제나 여러 우연적인 마주침의 과정에서 구성되는 결과물이 되는 것이다. 인간 개체의, 또는 인간 의식의 자율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선개체적 차원에 주목하기. 그래서 이 존재론은 어떤 강도적 존재론이지만, 전통 형이상학에서 말하는 단순한 일자는 아니고 뭔가 ‘이상한’ 일자로부터 다수적인 존재의 동등성을 보여주는 것이고, 인간은 언제나 미리 주어진 선개체적 개체화의 장 안에서 어떤 관개체적 존재이고 어떤 무엇에서 다른 무엇으로 이행하고 변화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물론 이 힘은 물리적, 화학적 차원의 힘이 아니다. 그 힘, 역량은 니체가 말한 Macht, 스피노자가 말한 puissance일 것인데, 이는 언제나 들뢰즈에게서는 무엇보다도 일종의 유희, 그러니까 예술적인 과정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그의 잘 알려진 캐치프레이즈인 일의성, 다수성, 차이, 복수성, 내재성, 독특성, 생성, 창조, 기쁨! 철학의 조건들이 과학, 정치, 예술 등이 있다고 할 때, 들뢰즈에게는 가장 탁월한 조건이 바로 예술일 것이며 그의 철학을 이끄는 가장 주요한 충동도 니체적인 예술 충동(“이 모든 것은 오직 미학적으로만 정당화된다”)일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의 철학, 그러니까 시종일관 하나의 미학일 어떤 철학을 어떤 사람들이 시도하는 것처럼 정치철학적으로 논의하려 할 때, 그게 누군가가 보기에는 커다란 가능성일 수도 있고 또 반대로 커다란 한계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정치에서는 창조와 차이만큼이나 습관과 안정, 균형과 지속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을까. <br />
<br />

<br />
]]></description></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책의 감옥</category><title>세계화되는 현실에서의 정의, 새로운 틀구성</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3211179</link><pubDate>Tue, 17 Nov 2009 00:4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3211179</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1859844928&TPaperId=3211179"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36/5/coveroff/1859844928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7671909&TPaperId=3211179"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318/54/coveroff/8987671909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160;
<br />

&#160;
&#160;
&#160;
&#160;
&#160;
낸시 프레이저<br />
세계화되는 현실에서의 정의, 새로운 틀구성. <br />

케인즈주의-베스트팔렌적 틀 아래에서, 정의에 관한 논의는 근대 영토국가 안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브레튼우즈 체제가 국가 차원에서 케인즈주의의 경제적 진두지휘를 촉진하고, 베스트팔렌 조약의 정치적 허상, 즉 국내와 국제를 철저히 나누는 영역 구분의 허상에 의존하고 있었다. 당시에 논증의 초점은 한 사회 내에서 사회적 관계들을 정의롭게 구성한다는 것의 의미를 묻는 것이었다. 이때의 논의가 정의의 ‘무엇’이 문제가 되지 논쟁자들이 ‘누구’인지에 관한 문제를 논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은 명백하다. 민족국가의 시민이 바로 이 ‘누구’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틀은 변화하고 있다. 초국적 법인이나 국제 통화 투기자들, 대규모 제도적 투자자들의 행위에서 볼 수 있듯이 영토국가 내의 결정도 국가 밖 사람들의 삶에 자주 영향을 끼친다. 또한 오늘날 재분배 요구들은 점점 더 국민경제를 가정하기를 그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정을 목표로 싸우는 운동들 역시 영토국가 너머를 내다보고 있다. 오늘날 정의에 관한 논의들은 중첩된 모습을 보인다. 예전처럼 지금도 실질 내용과 관련된 일차적 층위의 물음들이 다루어지지만 오늘날 정의에 관한 논의들은 더 나아가 이차적 층위의 물음들, 메타적 수준의 물음까지를 제기한다. 정의의 실질 내용뿐 아니라 정의의 적절한 틀까지도 함께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정의 이론은 인정의 문화적 차원과 분배의 경제적 차원, 이 두 차원에 더해서 대의/표현representation의 정치적 차원까지 함께 놓아야 한다고 본다. ‘무엇’과 ‘누구’에 더해서, ‘어떻게’라는 세 번째 유형의 물음이 필요하다. 사회적 정의 이론은 이제 탈베스트팔렌적 민주적 정의 이론이 되어야 한다. <br />
<br />

정의의 가장 일반적인 의미는 참여의 동등성이다. 이때 부정의를 극복하는 것은 어떤 사람들을 다른 사람과 대등하게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는 제도화된 장애를 제거하는 것이다. 제도화된 장애는 경제적 차원(분배적 부정의), 문화적 차원(지위의 불평등이나 불인정)으로 나뉘어지는데, 양자는 서로 인과적으로 영향을 줄 수는 있어도 어떤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 분배와 인정이라는 두 측면을 포괄하는 이차원적 모델이 요구되며, 이것이 최소한 내가 과거에 옹호해왔던 정의관이다. 그러나 이는 케인즈주의-베스트팔렌적 틀이 당연시되는 경우에 한해서 유효할 뿐인데, 틀의 문제가 쟁점으로 거론되면 세 번째 차원의 정의가 곧장 가시화된다. 정의의 세 번째 차원이 바로 정치적 차원이다. 이 ‘정치적인 것’은 분배와 인정에 관한 싸움들이 상연되는 무대를 제공한다. 우선 이 정치적 차원은 사회적 소속의 기준들을 만들고 그리하여 누구를 구성원으로 볼 것인지를 결정함으로써 다른 차원들의 범위를 지정해준다. 마찬가지로 정치적 차원은 결정 규칙들을 설립함으로써, 경제적 차원과 문화적 차원 안에서 논쟁들을 무대에 올리고 결정핮는 데 필요한 절차를 마련한다. 이처럼 소속 구성원과 절차라는 이슈가 중심에 놓이는 정의의 정치적 차원에서 주로 다뤄지는 것이 대의/표현representation의 문제이다. 정치적인 것의 한 측면이 경계선 설정과 관계된 수준에서, 문제는 사회 소속 여부의 문제이며, 쟁점은 포함이냐 배제이냐 이다. 정치적인 것의 다른 측면인 결정 규칙과 관련된 수준에서, 대의/표현의 문제는 쟁론의 공적 과정을 조직하는 절차와 관계된다. 정치적인 것이 개념적으로 구분되는 정의의 차원이며, 따라서 경제적인 것이나 문화적인 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은 정치적인 것이 개념적으로 구분되는 특정 종류의 부정의를 야기할 수 있다는 뜻이다. <br />
<br />

정치적 차원에서 부정의는 바로 대의부재/표현차단misrepresentation이다. 먼저 최소한 두 수준의 대의부재/표현차단이 구분될 수 있는데, 우선 결정규칙들이 이미 포함된 사람들 중 어떤 이들에게는 동등한 성원으로서 완전히 참여할 기회를 주지 않을 때, 이를 보통의 정치적 대의부재/표현차단이라고 부른다. 가령 대안적 선거 시스템들의 정치학적 논쟁들(소선거구제, 대선거구제 등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두 번째 수준의 대의부재/표현차단은 덜 가시적인데, 이는 경계선 설정과 관련된다. 이는 잘못된 틀 구성misframing이라 불리는 것이다. 잘못된 틀구성은 일차적 층위의 정의 요구를 말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아예 거부당하는 특수한 종류의 메타적 부정의이다. 이런 종류의 잘못된 틀 구성은 아렌트가 ‘권리를 가질 권리’라고 칭했던 것이 상실된 상태와 흡사하며, 일종의 정치적 죽음과도 같다. 이런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인간 아닌 자들이 되고 만다. 최근 세계화로 인해 가시화되기 시작한 문제가 바로 잘못된 틀구성 형태를 띠는 대의부재/표현차단이다. 예전에 전후 복지국가의 전성기에는 정의에 관한 사유를 주도하던 원칙적 관심사가 분배였다. 이후 신사회운동들과 다문화주의의 출현에 따라 무게중심은 인정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이 두 경우 근대의 영토국가는 당연시되었기 때문에, 정의의 정치적 차원은 주변적인 문제로 치부되었다. 오늘날 세계화는 틀의 문제를 정치적 의제로 올려놓았다. 강력한 약탈국가, 외국인 투자자나 채권자 등 초국적 사적 권력, 국제 통화투기자, 초국적 법인 등등의 경우를 보자. <br />
<br />

재분배와 인정에 대한 모든 요구 안에는 항상 대의/표현이 이미 들어 있다. 정치적 차원은 정의 개념의 문법상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대의/표현 없이는 재분배도 인정도 없다. 이것은 토의 민주주의 이론에서 충분히 강조되지 않은 사실이다. 적절한 대의/표현의 정치라면 정치적 부정의의 세 번째 차원, 틀을 정하는 과정까지도 민주화하려고 애써야 한다. 누가 정의의 주체로 간주되는지, 무엇이 적절한 테두리인가 하는 이슈에 초점을 맞추는 이 틀구성framing 정치는 정치적 공간의 권위 있는 분할선을 만들고, 수정하려는 노력을 포함한다. 틀 구성 정치는 두 가지 다른 형태를 취할 수 있는데, 하나는 수긍적affirmative 틀구성 정치이다. 이 접근법은 틀 설정의 베스트팔렌적 문법은 받아들이되, 현존하는 틀의 경계선만을 문제삼는다. 그들은 국가영토적 원칙을 수용한다. 두 번째 판본의 틀 구성 정치는 전환적transformative 접근법이다. 여기에서는 국가영토성의 원칙이 더 이상 정의의 ‘누구’를 결정하는 모든 경우에 예외없이 적절한 토대를 제공할 수는 없다고 본다. 금융시장, 해외 공장, 투자체제, 세계경제의 통치 구조, 전 지구적 미디어의 정보 네트워크, 생명 정치 등과 같은 문제들과 관련해 부정의를 범하는 권력들은 장소의 공간이 아닌 흐름의 공간에 속한다. <br />
<br />

이렇게 볼 때 전환적인 틀구성 정치는 세계화되는 현실 안에서 틀 설정의 심층적 문법을 바꾸려 한다. 이 접근법은 하나 또는 여럿의 탈베스트발렌적 원칙을 보완하려고 한다. 틀 설정의 탈베스트팔렌적 양태는 어떤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아직까지는 ‘모든 당사자 원칙’이 가장 유망한 후보이다. 어떤 사회 구조나 제도에 영향을 받는 모든 이들이 그 구조나 제도에 관련한 문제에서 정의주체로서의 도덕적 입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의 공통된 구조적 혹은 제도적 얼개 안에서 함께 엮여있기 때문에 정의의 동료 주체가 된다. 오늘날 세계화 행동주의자들은 정치 공간의 국가영토적 분할법을 공략하기 위해서 모든 당사자 원칙에 직접 호소하고 있다. <br />
<br />

그렇다면 전환적 틀 구성 정치는 여러 차원과 수준에서 동시에 진행된다. 사회운동들은 한 수준에서 부당분배, 불인정, 보통의 정치적 대의부재/표현차단이라는 일차적 층위의 부정의를 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두 번째 수준에서는 정의의 ‘누구’를 재구성함으로써 잘못된 틀 구성의 부정의를 제거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국가영토 원칙이 부정의를 면책하는 데 기여한다면 이 운동들은 그 원칙 대신 모든 당사자 원칙에 호소한다. 전환적 정치의 요구들은 훨씬 더 나아가는데, 이 운동들은 탈베스트팔렌적 틀 설정 과정에서의 발언권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정의의 얼개가 그려지고 수정되는 과정을 민주화하려고 한다. 정의의 ‘누구’를 구성하는 과정에 참여할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동시에 ‘어떻게’를 전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는 새로운 민주적 경연장을 창출할 것을 요구한다. 예컨대 세계사회포럼. 이런 식으로 그들은 탈베스트팔렌적 민주적 정의의 새 제도들이 성립될 수 있음을 선보이고 있다. 세 번째 층위의 정치적 부정의를 우리는 메타정치적 대의부재/표현차단이라고 부른다. 이 투쟁은 ‘누구’라는 문제에 관한 논쟁을 민주적으로 발의하고 결정할 수 있는 제도가 결여되어 있음을 드러내면서 ‘어떻게’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세계화되는 오늘날 정의를 위해 싸우는 투쟁이라면, 메타정치적인 민주주의를 향한 투쟁들과 손잡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다. 이 수준에서도 다시, 대의/표현 없이는 재분배도 인정도 없다. 오늘날 독백적인 사회정의론은 설득력을 잃고 있다. ‘누구’에 관한 결정은 점점 더 정치적인 문제로 간주된다. 이제부터 결정의 민주적 과정은 정의의 ‘무엇’뿐만 아니라 ‘누구’와 ‘어떻게’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이 모든 수준, 보통의 정치적 수준은 물론이고 메타정치적 수준에서도 대화적일 때 탈베스트팔렌적 민주적 정의 이론이 될 수 있다. 이런 설명이야 말로 우리가 세계화되는 현실에서 틀의 문제를 정의의 핵심 문제로 볼 수 있게 해준다. <br />
<br />

<br />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318/54/cover150/8987671909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7671909</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책의 감옥</category><title>무한판단</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3193496</link><pubDate>Sat, 07 Nov 2009 02:3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3193496</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706223&TPaperId=3193496"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305/0/coveroff/8991706223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160;
<br />

&#160;
&#160;
&#160;
&#160;
헤겔사전 126쪽,&#160;&#160;
무한판단 das undendliche Urteil<br />
<br />
<br />

헤겔이 무한판단을 논하는 것은 대체로 &lt;&lt;예나 체계 2&gt;&gt;가 최초이다. 거기서 무한판단은 부정판단을 한층 더 철저화한 부정의 판단, 술어가 속하는 좀더 고차적인 영역을 부정하는 판단이다[아카데미 판 GW 7권. 88쪽]. 예를 들면 “감정은 빨간색을 갖지 않는다”는 무한판단에서는 술어(빨간색)가 속해 있는 좀더 고차적인 영역(색 일반)이 부정되고 있는 것이다.(이 예에서 알 수 있듯이 헤겔은 무한판단의 문법적 형식 “어떤 것은 비-A이다”에 얽매여 있지 않다.) 이와 같은 무한판단에는 주어와 술어를 분리하는 부정적 측면뿐만 아니라 주어와 술어를 자립적으로 존재하게 만드는 긍정적 측면도 있다. &lt;&lt;논리의 학&gt;&gt;에서는 이러한 긍정적 측면이 ‘긍정적 무한판단’으로서 명시된다. 주어에 관계하는 “개별은 개별적이다”, 술어에 관계하는 "보편은 보편적이다"가 긍정적 무한판단이다. 이에 반해 앞에서 말한 무한판단은 “부정적 무한판단”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이것은 “부정적 무한(das Negativ-Unendliche)”[주어캄프 전집 6권. 324쪽] 결국 악무한이며 “판단이라는 형식이 지양된 판단”[같은 곳]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또한 부정판단 - 무한판단의 관계는 민사소송-범죄[&lt;&lt;논리의 학&gt;&gt; 6권. 3258쪽; &lt;&lt;법철학&gt;&gt; 95절], 질병-죽음[&lt;&lt;엔치클로페디(제3판) 논리학&gt;&gt; 173절 보론], 사용-양도[&lt;&lt;법철학&gt;&gt; 53절] 등의 논리적인 분석에서 사용되고 있다. <br />
<br />

그런데 헤겔의 변증법 논리에 따르면 절대적 구별은 절대적 동일성이다. 그러므로 무한판단에서 주어와 술어가 절대적으로 구별될 때 주어와 술어는 또한 절대적 동일의 관계에 서게 된다. &lt;&lt;정신현상학&gt;&gt;에서는 그와 같은 무한판단으로서 “자기는 사물이다”[3권 260, 577쪽], “사물은 자아다”[3권, 577쪽]가 등장한다. 헤겔은 이런 종류의 무한판단을 사변명제, 절대적 판단, 근원분할이라고 부르지만, 이런 종류의 무한판단은 진무한을 표현하고 있으며, 헤겔 철학의 근본사상의 표현에 불가결한 것이다. <br />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305/0/cover150/8991706223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1706223</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책의 감옥</category><title>상호수동성</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3193455</link><pubDate>Sat, 07 Nov 2009 01:5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3193455</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0393329550&TPaperId=3193455"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57/49/coveroff/0393329550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01065940&TPaperId=3193455"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91/96/coveroff/8901065940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4185393&TPaperId=3193455"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36/54/coveroff/8974185393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상호수동성은 환상의 돌림병 3장에도 등장. 본래는 로베르트 팔러의 개념이라고 함.&#160;<br />
<br />
&#160;<br />
<br />
&#160;<br />
<br />
&#160;<br />
<br />
&#160;<br />
<br />
&#160;<br />
<br />
&#160;<br />
<br />
&#160;<br />
<br />
&#160;<br />
<br />
지젝, How to read Lacan, 40~45쪽&#160;<br />
<br />
"이 이상한 기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널리 알려진 상호 작용(interactivity)이란 개념에 상호 수동(interpassivity)이라는 기이한 짝패를 보충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전자 미디어의 출현으로 텍스트나 예술 작품에 대한 수동적인 소비가 불가능해졌다는 것은 오늘날 하나의 상식이다. 나는 단순히 스크린을 응시할 수만은 없다. 나는 점차 스크린과 상호 작용하며 (프로그램을 선택하는 것에서부터 가상 공동체의 논쟁에 참여하는 것이나 소위 '쌍방향 서사'의 플롯을 결정하는 데 직접 참여하는 것까지) 대화적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뉴미디어의 민주주의적 잠재성을 찬미하는 사람들이 초점을 두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사이버 공간이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타자가 연출한 스펙터클을 따르기만 하는 수동적 관람자의 역할에서 벗어나 스펙터클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뿐 아니라 스펙터클의 규칙을 수립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br />
<br />
&#160;<br />
<br />
이 상호 작용의 또다른 측면이 상호 수동성이다. 대상에 상호 작용하는 것의 이면은 (단지 수동적으로 쇼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대상 자체가 나 대신 수동성을 갖는 것, 내게서 수동성을 빼앗는 것, 그래서 대상 자체가 나 대신 쇼를 즐기고 자발적인 향략의 의무에서 해방시켜주는 상황이다. 꼬박꼬박 드라마를 녹화하는 녹화 비디오 애호가들(나도 그들 중 한 명이다)이라면, 그렇게 녹화 비디오를 갖게 됨으로써 오히려 옛날의 단순한 TV 시청 때보다 실제적으로는 드라마를 덜 보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TV를 시청할 시간이 거의 없기 때문에, 소중한 저녁 시간을 TV 시청에 날려버리는 대신 간편하게 녹화를 해 두고 나중에 보려고 한다(물론 그걸 볼 시간도 없다). 실제로는 필름을 안 보지만 내가 좋아하는 필름이 내 비디오 수집함에 있다는 사실은 내게 커다란 만족감을 주며 가끔씩 소박한 긴장 완화와 달콤한 무위의 예술에 몰입할 수 있게 해준다. 마치 녹화 비디오가 나를 대신해서 나를 위해 필름을 보고 있다는 듯이. 여기서 녹화 비디오는 상징적 등록의 매체로서 대타자의 역할을 한다. 오늘날 포르노그래피 역시 점차 이렇게 상호 수동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X등급 영화는 더이상 그(혹은 그녀)의 은말한 자위행위를 돕는 수단이 아니다. 단지 '행위가 이뤄지는' 스크린을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다른 사람들이 내 대신 즐기는 걸 관찰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다.<br />
<br />
&#160;<br />
<br />
상호 수동성의 또 다른 예로, 우리는 TV에서 썰렁한 농담에 아무도 웃지 않자 농담을 한 사람이 "진짜 웃겨. 진짜 웃겨!"라며 소란스럽게 웃어대는 대략 난감한 장면을 볼 수 있다. 그 사람은 관계의 예상된 반응을 스스로 연출하는 것이다. 이 상황은 관객의 웃음소리를 녹화해서 틀어주는 경우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나 대신 웃는 행위자(우리, 지루하고 썰렁해진 관객은 이 사람을 통해 웃는다)는 보이지 않는 인공의 공중(公衆)이라는 익명의 대타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웃기고 있는 화자 자신이다. 그의 강박적인 웃음은 다리를 휘청거릴 때나 뭔가 바보 같은 짓을 했을 때 흔히 내뱉어야겠다고 느끼는 "저런!" 같은 감탄사와 비슷하다. 이 사례가 함축하고 있는 미스터리는 내 실수를 목격한 사람이 나 대신 "저런!"이라고 말할 수도 있으며 그래도 된다는 점이다. "저런!"의 기능은 바보 같은 실수를 상징적으로 등록하는 것이다. 즉 가상의 대타자가 실수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폐쇄적인 집단의 구성원 전체가 알고 있는 어떤 껄끄러운 일(또한 그들은 다른 사람들도 그걸 알고 있다는 걸 안다)을 그들 중 한 사람이 부주의하게 말해버릴 때 모두 깜짝 놀라게 되는 전형적이면서도 미묘한 상황을 상기해보자. 왜? 아무도 어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아닌데 왜 그들 모두는 놀라게 되는가? 왜냐하면 그들은 더 이상 알지 못하는 척하지(것처럼 행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이제 대타자가 그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에 안데르센의 &lt;벌거벗은 임금님&gt;의 교훈이 있다. 어느 누구도 외양의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가끔씩 누군가가 부주의하게 외양을 파괴할 때 외양 뒤의 사물 역시 산산조각 나는 것이다.<br />
<br />
&#160;<br />
<br />
이런 상호 수동성은 헤겔의 '이성의 간지' 개념과 정반대다. 이성의 간지에서 나는 타인을 통해 활동한다. 타자가 나 대신 행동하는 동안 나는 수동적으로 뒤에서 편안히 앉아 있을 수 있다. 내가 해머로 쇳덩이를 내려치는 대신 기계가 그 일을 한다. 내가 물레방아를 돌리는 대신 물이 그 일을 한다. 내가 다루는 대상과 나 사이에 다른 자연 대상을 끼워 넣음으로써 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유사한 일이 인간관계의 차원에서 발생한다.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을 직접 공격하는 대신 그를 다른 사람과 싸우게 함으로써 나는 편안하게 둘이 서로 치고 박고 싸우다 박살 나는 걸 지켜볼 수 있다(이것이 헤겔의 절대 관념이 역사를 관통하여 지배하는 방법이다. 절대 관념은 인간의 열정들끼리 서로 투쟁해서 절대 관념을 대신하는 일을 하게 하는 동안 열정들 간의 투쟁 바깥에 남아 있다. 고대 로마가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바뀐 역사적 필연성은 카이사르의 열정과 야망을 수단으로 실현된다). 반대로 상호 수동성의 경우 나는 타자를 통해 수동적이 된다. 나는 내 경험의 수동적 측면(즐김)을 타인에게 양보하는데, 그동안 나는 계속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녹화 비디오가 내 대신 수동적으로 즐기는 동안 나는 저녁에도 계속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나 대신 곡비가 애도를 표하는 동안 나는 죽은 자의 유산을 처리하는 일을 할 수 있다).<br />
<br />
&#160;<br />
<br />
이것은 우리를 가짜 행위(false activity)란 개념으로 데려다 준다. 사람들은 뭔가를 바꾸기 위해 행동할 뿐만 아니라 어떤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 아무것도 바꾸지 않기 위해 행동할 수도 있다. 거기에 강박신경증자의 전형적인 전략이 있다. 그는 실재적인 것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죽기 살기로 행동한다. 이를테면, 어떤 폭발 직전의 긴장 상태에 있는 집단에서 강박적으로 행해지는 대화는 항상 어색한 침묵 상태를 예방하기 위해서 이루어진다. 그 침묵 상태가 참석자들에게 잠재된 긴장을 대면하도록 압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 치료 중 강박신경증자는 분석가에게 끊임없이 사건 사고, 꿈, 자기 인식의 말들을 쏟아낸다. 하지만 그의 끊임없는 발화 행위는 만약 잠시라도 말을 멈춘다면 분석가가 진실로 문제되는 것을 물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지속되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들은 분석가를 꼼짝 못하게 하려고 말을 한다.<br />
<br />
&#160;<br />
<br />
오늘날 진보 정치의 많은 부분에서 직면하는 위험은 수동성에 있는 게 아니라 유사 능동성, 즉 활동과 참여의 몰입에 있다. 국민들은 항상 개입하여 '뭔가를 하고자' 해쓰고, 학계는 끊임없이 의미없는 논쟁에 참여한다. 진정 어려운 것은 한발 물러서서 활동을 그만두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때론 비판적인 참여를 침묵보다 선호한다. 그들은 우리를 대화에 참여시켜 우리의 불길한 수동성이 파괴되었음을 확신시킨다. 실제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게 하기 위해 항상 활동 중에 있는 이런 상호 수동적 상황에 맞선&#160;비판의 첫걸음은&#160;수동성 속으로 물러나는 것, 참여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첫걸음은 진실한 활동, 즉 좌표계 전체를 실질적으로 바꿀 그런 행위의 토대를 밝혀 준다."<br />
&#160;<br />
<br />
&#160;<br />
<br />
<h1 class="firstHeading" id="firstHeading">Interpassivität</h1>
<br />
<br />
<br />
&#160;<br />
<br />
<h3 id="siteSub">aus Wikipedia, der freien Enzyklopädie</h3>
<br />
<br />
<br />
Wechseln zu: Navigation, Suche<!-- start content --> <br />
Interpassivität bezeichnet eine von Robert Pfaller und anderen ausgearbeitete Theorie aus dem Bereich der Kulturwissenschaft und der Psychoanalyse. Interpassivität ist die Praxis, eigene Handlungen und Empfindungen an äußere Objekte, d.h. Menschen oder Dinge zu delegieren. Die Theorie der Interpassivität bezieht sich hauptsächlich auf den Bereich der Lustempfindungen, weshalb Interpassivität auch als „delegiertes Genießen“ definiert werden kann.<br />
<br />
<br />

    
        
            <br />
            <br />
            <br />
            <h2>Inhaltsverzeichnis</h2>
            [Verbergen] <br />
            <br />
            <br />
                <br />
                1 Delegiertes Genießen <br />
                <br />
                
                2 Interpassivität als kulturelles Phänomen <br />
                <br />
                
                3 Das Subjekt, dem Glauben unterstellt wird <br />
                <br />
                
                4 Beispiele <br />
                <br />
                
                5 Siehe auch <br />
                <br />
                
                6 Literatur <br />
                <br />
                
                7 Weblinks 
            
            
        
    

<br />
<br />
<br />
<br />
<br />
<h2>Delegiertes Genießen [Bearbeiten]</h2>
<br />
<br />
Psychologisch ist Interpassivität eine subtile Form der Flucht vor dem eigenen Genießen. Anstatt selbst zu genießen, lässt der Interpassive Andere für sich genießen. Obwohl er diese Auslagerung als Luststeigerung empfindet, flüchtet er vor seiner Lust. Pfaller grenzt die Interpassivität jedoch von der Askese ab, wenn er betont, dass Interpassivität nicht eine Verneinung des Genießens bedeutet, sondern nur seine Verschiebung auf Andere und damit eine andere Form des Genießens. Das Genießen des Anderen (der auch Lacans großer Anderer sein kann) ist gerade das, wodurch man selbst – nur eben passiv – genießt.<br />
<br />
Hinter dem Wunsch nach Interpassivität steht die Angst, die die Konfrontation mit dem eigenen Genießen, der Jouissance im Sinne Jacques Lacans, verursacht. Das Subjekt wehrt die Verunsicherung ab, die mit intensiven Gefühlsregungen einhergeht, und begnügt sich mit der passiven, delegierten Form des Empfindens, die es vor echter Anteilnahme schützt. Die traumatische Präsenz realer Gefühle wird abgewehrt und durch die distanzierende Vermittlung durch den Anderen ersetzt. Als neurotische Stabilisierung der eigenen Identität und als Ersatzhandlung hat die Interpassivität Züge der Zwangshandlung und der Perversion im Sinne der Psychoanalyse.<br />
<br />
<br />
<br />
<h2>Interpassivität als kulturelles Phänomen [Bearbeiten]</h2>
<br />
<br />
Interpassivität besitzt jedoch auch eine überindividuelle, soziale, kulturelle Dimension. So analysieren die Autoren in dem von Pfaller herausgegebenen Band Interpassivität. Studien über delegiertes Genießen (2000) zahlreiche sozial verbreitete Verhaltensmuster als Formen der Interpassivität, die insofern keine pathologische Abweichung von der Normalität darstellt, sondern als „normales“ Verhalten akzeptiert ist. Auch stellt die Gesellschaft selbst zahlreiche Angebote für interpassives Delegieren bereit, etwa in Form bestimmter Konsumartikel, massenmedialer Inszenierungen und Rituale (siehe Beispiele unten). Interpassivität ist ein reziproker Prozess, der eine Wechselwirkung zwischen Individuum und Gesellschaft beschreibt.<br />
<br />
<br />
<br />
<h2>Das Subjekt, dem Glauben unterstellt wird [Bearbeiten]</h2>
<br />
<br />
Pfaller betont noch einen weiteren, ideologischen Aspekt der Interpassivität: Man glaubt als rationaler, vernünftiger Mensch nicht an den Erfolg der interpassiven Delegation, sondern geht stets von der Existenz eines fiktiven Publikums aus. Dieses Publikum, das die Funktion eines „naiven Beobachters“ der eigenen Interpassivität einnimmt, braucht realiter nicht zu existieren. Es ist, mit Lacan gesprochen, ein „Subjekt, dem Glauben unterstellt wird“. Es „glaubt“ an die Inszenierung des Interpassiven, wodurch diese erst funktionieren kann und sinnvoll wird. Diese Funktion wird dadurch ermöglicht, dass der naive Beobachter, anders etwa als das Freudsche Über-Ich, nicht die geheimen Regungen der interpassiven Person, sondern nur die täuschende Oberfläche seiner Inszenierung sieht. Pfaller unterstreicht seine These durch das Beispiel der Darstellung einer toten Person auf einer Theaterbühne. Wenn diese Person niesen muss, erfolgt üblicherweise allgemeines Gelächter. Aber warum? Sowohl die übrigen Darsteller als auch das Publikum wissen, dass die Person in Wirklichkeit nicht tot ist. Die Freude lässt sich, so Pfaller, dadurch erklären, dass durch den Fauxpas bewusst werde, dass durch die Theaterinszenierung nicht so sehr die realen Zuschauer getäuscht wurden, sondern vor allem der fiktive naive Beobachter. Dieser (dem Bereich der Magie und des Aberglaubens angehörende) Glaube ermöglicht den ästhetischen Genuss der Fiktion überhaupt erst. Gelacht wird also nicht über die eigene Ent-Täuschung, sondern über die des naiven Beobachters.<br />
<br />
<br />
<br />
<h2>Beispiele [Bearbeiten]</h2>
<br />
<br />
&#160;<br />
<br />
<br />
    <br />
    Jacques Lacan sieht den Chor in der griechischen Tragödie als stellvertretende Instanz, welche die Emotionen des Zuschauers artikuliert und ihm diese abnimmt. (Vgl. Lacan, Seminar XII: Die Ethik der Psychoanalyse, S. 303 ff.) <br />
    <br />
    
    Ein geläufiges Beispiel aus der Alltagskultur ist das Dosengelächter („canned laughter“) in Sitcoms, das an unserer Stelle lacht und uns so die „Mühe“ des eigenen Lachens erspart. Wir fühlen uns so befreit, als wäre das Lachen unser eigenes gewesen. (Vgl. Žižek, Liebe Dein Symptom wie Dich selbst, S. 50.) <br />
    <br />
    
    Slavoj Žižek illustriert Interpassivität an Lacans Figur des „Subjekts, dem Glauben unterstellt wird“. Er erläutert dies an einem Beispiel aus der stalinistischen Diktatur: Als der hochrangige sowjetische Politiker Lawrenti Beria 1954 starb und bald darauf als Verräter und Spion geächtet wurde, gab es in der Großen Sowjetischen Enzyklopädie einen lobpreisenden Artikel über ihn. Der Verlag der Enzyklopädie schrieb deshalb alle Empfänger an und forderte sie auf, die Seiten über Beria auszuschneiden und an den Verlag zurückzuschicken. Im Austausch für die fehlenden Seiten bekamen sie einen Artikel über die Beringstraße zugeschickt. Wenn aber alle von der Fälschung wussten, da sie ja an ihr beteiligt waren, wozu oder für wen wurde sie dann noch verschleiert? „Die einzige Antwort lautet selbstverständlich: für das nichtexistente Subjekt, dem Glauben unterstellt wird“, antwortet Žižek. Dieses fiktive Subjekt, das nach Žižek grundlegender Bestandteil jeder ideologischen Identifikation ist, glaubt sozusagen an unserer Stelle. – Vgl. Žižek, Die Substitution zwischen Interaktivität und Interpassivität, in: Pfaller (Hg.), Interpassivität, S. 15. <br />
    <br />
    
    Pornografie: Man sieht Anderen zu, wie sie zusammen sexuelle Lust erleben, und genießt diese fremde Lust. <br />
    <br />
    
    Manchmal werden Videorecorder programmiert, um Filme aufzunehmen, die wir selbst nie ansehen werden, sondern lediglich archivieren. Das Gerät schaut den Film gewissermaßen für uns an. <br />
    <br />
    
    Der Kopierer „liest“ beim Kopieren die wissenschaftlichen Artikel, die wir danach abheften und nie zu Gesicht kriegen werden. <br />
    <br />
    
    Der Bibliomane interessiert sich nicht für das Lesen selbst, sondern nur für das Sammeln der Bücher, die er gerade durch ihre Konservierung im Regal nicht mehr lesen muss. <br />
    <br />
    
    Kuratoren nehmen uns die Kunstbetrachtung ab. <br />
    <br />
    
    Die Klageweiber ersetzen das eigene Trauern. <br />
    <br />
    
    Tibetanische Gebetsmühlen ersetzen das eigene Beten. <br />
    <br />
    
    Die sogenannten Claims in der Werbung und auf Produktverpackungen artikulieren das Genießen des Konsumenten, wie etwa bei Coca Cola: „Ooh! Ooh! What taste!“ <br />
    <br />
    
    Die Laufschriften der Künstlerin Jenny Holzer, eine davon mit dem sinnigen Titel „Protect me from what I want“, verlocken ebenfalls zur Interpassivität: Durch das Wiederholen der Texte gewinnen sie in einer des Lesens müde gewordenen Öffentlichkeit eine solche Präsenz, dass sie selbst gar nicht mehr gelesen werden müssen; sie lesen sich praktisch selbst. <br />
    <br />
    
    Der von Walter Thiele erfundene „Lachsack“, der an unserer Stelle lacht. <br />
    <br />
    
    In der Nostalgie genießt man das Genießen einer früheren Zeit, z.B. den Sex der siebziger Jahre in Filmen wie Larry Flynt – Die nackte Wahrheit oder Boogie Nights. – „Früher war sogar die Zukunft besser.“ (Karl Valentin) <br />
    <br />
    
    Der Sport-Zuschauer erfreut sich an Leistungen anderer, und in der Kochsendung kochen andere zum Vergnügen des Zuschauers[1]. 

<br />
<br />
&#160;<br />
<br />
<h2>Siehe auch [Bearbeiten]</h2>
<br />
<br />
&#160;<br />
<br />
<br />
    <br />
    Interaktivität, Homo ludens, Slavoj Žižek 

<br />
<br />
&#160;<br />
<br />
<h2>Literatur [Bearbeiten]</h2>
<br />
<br />
&#160;<br />
<br />
<br />
    <br />
    Robert Pfaller (Hg.): Interpassivität. Studien über delegiertes Genießen, Berlin/New York: Springer 2000, ISBN 321183303-X (mit Beiträgen von Slavoj Žižek, Mladen Dolar, August Ruhs u.a.) <br />
    <br />
    
    Robert Pfaller: Die Illusionen der anderen. Über das Lustprinzip in der Kultur. Frankfurt a.M.: Suhrkamp 2002. ISBN 3518122797 <br />
    <br />
    
    Slavoj Žižek, Liebe Dein Symptom wie Dich selbst! Jacques Lacans Psychoanalyse und die Medien, Berlin: Merve 1991 <br />
    <br />
    
    Jacques Lacan, Seminar XII: Die Ethik der Psychoanalyse, Berlin/Weinheim: Quadriga 1996 

<br />
<br />
&#160;<br />
<br />
<h2>Weblinks [Bearbeiten]</h2>
<br />
<br />
&#160;<br />
<br />
<br />
    <br />
    „Der Pornograph vollzieht eine Ersatzhandlung, die scheinbar der Sexualität dient, ihn aber in Wahrheit in dem unbewußt gewünschten Abstand zu ihr hält.“ – Interview mit Robert Pfaller, 18.9.1998 <br />
    <br />
    
    Slavoj Zizek: The Interpassive Subject (Artikel) <br />
    <br />
    
    Claus Pias: Genießen unterstellen. Eine Theorie der „Interpassivität“, in: FAZ, September 2000. 

<br />
<!-- <BR>NewPP limit report<BR>Preprocessor node count: 27/1000000<BR>Post-expand include size: 0/2048000 bytes<BR>Template argument size: 0/2048000 bytes<BR>Expensive parser function count: 0/500<BR>--><!-- Saved in stable version parser cache with key dewiki:stable-pcache:idhash:1209760-0!1!0!!de!2 and timestamp 20091104153941 --><br />
Von „http://de.wikipedia.org/wiki/Interpassivit%C3%A4t“<br />
<!-- 투표하기/포토리뷰/밑줄긋기/마이리스트 --><!-- 투표 기간 --><br clear="all" />
<!-- 창작블로그 위젯 --><!-- 네이버 오픈 캐스트 위젯 --><!-- 다음 블로거 뉴스 위젯 --><!-- 테마 가이드 코멘트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36/54/cover150/8974185393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4185393</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책의 감옥</category><title>아도르노의 선구자 루소</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3124744</link><pubDate>Mon, 28 Sep 2009 00:12: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3124744</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2811664&TPaperId=3124744"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9/10/coveroff/8982811664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160;
&#160;
&#160;
&#160;
&#160;
&#160;
&#160;
&#160;
"자신의 두 가지 &lt;&lt;담론&gt;&gt;(1750년과 1754년)에서 루소는 "문화의 야누스적 성격"(minima moralia 37), 즉 "자유의 잠재력과 억압의 현실을 항상 동시에 발전시켰던 진보의 이중성"(mm 84)을 최초로 인식했다. 루소는 "상호 무관한 기능들로 인해 인간이 분화되는 사회적으로 필연적인 현상"(mm 96)을 최초로 탄핵했으며, 그 대립물로서 잃어버린, "왜곡되지 않은 자연의 형상" (mm 59)을 환기시켰다. 이 모든 것으로써 나중에 아도르노가 (이러한 표현들은 그의 &lt;&lt;한줌의 도덕&gt;&gt;에서 차용한 것이다) 독재적 이성의 "현혹적 연관관계(Verblendungszusammenhang)"라고 부르게 될 그 어떤 것의 정곡을 찌른 것이다. 아도르노는 루소를 자신의 현대성 이론을 지지하는 증인으로 소환했을 법도 한데, &lt;&lt;계몽의 변증법&gt;&gt;에서나 &lt;&lt;한줌의 도덕&gt;&gt;에서 그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나의 세대에 있어 루소의 두 가지 &lt;&lt;담론&gt;&gt;에 필적할 만한 영향을 불러일으켰던 그 두 저작에서 말이다." (94쪽)&#160;
거의 눈에 띄지 않게 진행되었던 사물화를 통한 '세계의 탈주술화'를 최초로 인식한 사람은 루소엿다. (...)&#160; 루소는 세상의 재앙의 의미에 대해 묻지 않고, 당대 사회에 있는 그 원인, 그것의 역사적 기원, 새로운 사회에서 재앙을 제거할 방도에 대해 물었던 것이다. 첫번째 &lt;&lt;담론&gt;&gt;에서 행한 자기 시대에 대한 진단에서 그는 현대세계에서 나타난 사물화를 자연과 문명의 완전한 분리로부터 설명한다. 즉, 과학과 예술이 계몽주의의 현재적 정점으로 진보함에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사회적 삶의 풍속과 도덕은 더 나빠졌다는 사실로부터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두번째 &lt;&lt;담론&gt;&gt;에서는 인류사의 가설적인 시원으로 설정된 자연상태(Etat de nature)를 회고하면서 인간의 본성(Natur)에 두었던 혐의는 풀고, 사회 전체에 죄를 돌린다. 사회는 자기가 만들어낸 제도들 -&#160; 소유, 지배, 분업, 전통 - 등을 통해 현대에 사는 인간을 그의 진정한 본성에서 소외시켰으며, 그리하여 인간은 - 또다시 역설적으로 - 자기 자신의 창조물, 즉 자기 역사의 결과물을 마치 낯선 작품을 대하듯이 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실로 획기적인 루소의 질문이 생겨나는데, 수많은 변형들을 하나로 집약해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현대적 세계에 사는 인간은 시민(homme civil)으로서의 분열된 실존에 직면하여 어떻게 자연인간(homme naturel)의 잃어버린 전체성을 되찾음과 아울러 자신의 행복의 기회를 다시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루소는 세 가지 상이한 해결책을 모색했다. &lt;&lt;에밀&gt;&gt;(1762)에서는 사회에서 벗어난 개인들과 관련하여 자연적 교육의 프로젝트를 통해서, &lt;&lt;사회계약론&gt;&gt;에서는 일반의지에 헌신하는 주체와 관련하여 평등이 실현된 국가 헌법의 기획을 통해서, 그리고 &lt;&lt;누벨 엘로이즈&gt;&gt;에서는 다감한 소규모 집단과 관련하여 또다시 최초의 부부를 중심으로 생겨나는 사랑의 공동체를 통해서 해결책을 모색했던 것이다. &#160;(100~101)&#160;
&#160;
&nbsp;
&#160;]]></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19/10/cover150/8982811664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2811664</link></image></item><item><author>바라</author><category>책의 감옥</category><title>마르크스는 어떻게 증상을 발명했나?</title><link>http://blog.aladin.co.kr/vara/3124329</link><pubDate>Sun, 27 Sep 2009 21:00: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blog.aladin.co.kr/vara/3124329</guid><description><![CDATA[<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0860919714&TPaperId=3124329"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107/33/coveroff/0860919714_1.jpg" width="75" border="0"></a>&nbs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4185385&TPaperId=3124329" target="_blank"><img src="http://image.aladin.co.kr/product/35/1/coveroff/8974185385_1.jpg" width="75" border="0"></a>&nbsp;<br/><br/><br />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발제(pp. 33~53, 국역 : 69~102쪽)<br />
<br />

&#160;
&#160;
&#160;
<br />

&#160;
<br />

<br />

&#160;
&#160;
&#160;
믿음의 객관성<br />
<br />

이러한 관점에서 상품 물신주의commodity fetishism에 대한 마르크스의 기본 공식은 재독해의 가치가 있다. 인간 노동의 산물이 상품의 형태를 갖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관계는 사물들 사이의 관계를 취하게 된다. 하지만 이 문제는 60~70년대에 알튀세르의 반-인간주의에 의해 폐기되었다. 알튀세르주의자들은 마르크스의 상품 물신 이론이 인격들(person)과 사물들 간의 순진하고 이데올로기적이고 인식론적 토대가 없는 대립에 기초해있다고 그것을 비난했다. 그러나 라캉적 독법은 마르크스의 이 공시에 새로운 비틀림을 줄 수 있다. <br />
<br />

이미 보았듯이 봉건제에서의 인간 관계는 이데올로기적 믿음belief의 미신의 그물망을 통해 매개되고 신비화된 주인과 노예의 관계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는 주체들이 중세의 종교적 미신으로부터 벗어났다고 믿으면서 합리적 공리주의자로 행동한다. 마르크스 분석의 요점은 주체 대신에 사물(상품) 자체가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곧 주체들은 더 이상 믿지 않으며, 사물 자체가 그들을 위해 믿는다. 믿음은 내적이고 지식은 외적인 것이라는 통상적인 테제에 맞선 라캉의 명제는, 믿음이야말로 근본적으로 외적인 것이며, 사람들의 실생활에 구현된다는 것이다(티벳의 기도하는 물레prayer wheel의 예). <br />
<br />

정신분석psychoanalysis은 심리학psychology이 아니라는 라캉의 기본 명제는 바로, 가장 내밀한intimate 감정들도 그 진정성이 손상되지 않은 채로 타인에게 전이되고transferred 위임될delegated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고전비극에서 코러스가 맡은 역할을 생각해보자. 이들은 관객들 대신 공포와 연민을 느껴준다. 보다 정확히는 관객들은 코러스를 매개로 연극이 요구하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또한 원시 사회에서 ‘곡하는 사람’의 예, 텔레비전 쇼에서 쓰이는 미리 녹음되어 있는 웃음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사운드 트랙에 포함된 이 웃음소리는 단순히 우리가 언제 웃을지를 알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텔레비전에서 구현된 큰 타자the Other가 웃어야 하는 우리의 의무를 덜어주기 위해 필요하다. 바로 이러한 소타자(타인)the other의 중개 덕에 우리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믿음의 이러한 객관적인 지위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유명한 농담에 나오는 스스로를 옥수수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br />
<br />

<br />

<br />

법은 법이다<br />
<br />

여기에서 우리가 사회적 영역과 관련하여 끌어낼 수 있는 교훈은, 믿음은 단순히 정신 상태나 내밀한 상태가 아니라 항상 우리의 실제 사회 활동 속에 물질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믿음은 사회 현실을 규제하는 환상을 지탱한다. 카프카의 경우, 그는 비합리적인 세계 속에서 어떤 과장되고 환상적이며 주관적으로 왜곡된 방식을 통해 현대의 관료주의와 그 속에서 개인의 운명을 표현한다고 평가된다. 이 평가는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는데, 이는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관료제 자체의 리비도 기능을 규제하는 환상을 표현articulate(국역; 분절)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과장 자체라는 사실이다. 이른바 카프카의 우주는 사회적 현실에 대한 환상-이미지가 아니라, 사회적 현실 자체의 한복판에서 작동하고 있는 환상을 무대화(mise en scène)하는 것이다. 우리는 관료주의가 전능하지 않음을 알지만, 관료기계 앞에 우리의 실제 행동은 그것이 전능하다는 믿음에 의해 통제되어 있다. <br />
<br />

통상적인 이데올로기 비판과 달리 정신분석적analytical 접근은 무엇보다 사회현실 자체 안에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적 환상을 겨냥한다. 우리가 사회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최종층위에서 결국 윤리적인 구성물이다. 그것은 ‘마치 ~라는 듯이’as if에 의해 지탱된다. 믿음이 상실되는 순간 사회적 장의 구성물은 와해된다. 이는 알튀세르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개념을 발전시키기 위한 주요 참조점이었던 파스칼에 의해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습관이야말로 가장 근거있고 가장 믿을만한 증거를 제공한다.”). 파스칼은 ‘정신을 무의식적으로 이끄는 자동운동’이라는 무의식에 대한 라캉적 정의를 제공하고 있다. 법이 지니고 있는 이와 같은 구조적으로 무의미한 특성으로부터, 법은 정당하고 훌륭하거나 이롭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것이 법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지켜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러한 동어반복은 법이 지닌 권위의 악순환을 보여주는데, 법의 권위에 대한 최종적인 토대foundation는 그것의 언표과정process of enunciation에 있다. <br />
<br />

따라서 유일하게 진정한 복종은 바로 ‘외면적인’ 복종이다. 확신에서 비롯된 복종은 이미 우리의 주체성을 통해 매개된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복종이 아니다. 이러한 전도는 외면적인 사회적 권위와의 관계를 넘어서 믿음의 내적 권위에 대한 복종에도 적용된다.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를 믿는다면 이는 끔찍한 모독이며, 반대로 오직 믿음의 행위 자체만이 그의 선함과 지혜로움을 통찰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믿어야 할 충분히 좋은 충분히 좋은 이유를 발견했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이미 믿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을 입증해줄 이유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br />
<br />

따라서 법에 대한 외면적인 복종은 외적 압력, 비이데올로기적인 야만적 권력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이 이해불가능하고 이해되지 않는 한에서, 그리고 외상적이고 비합리적인 특징을 보유하고 있는 한에서 복종하는 것이다. 이 외상적이고 통합되지 않은non-integrated 특징은 법의 전체적 권위를 숨기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법의 실정적인positive 조건 그 자체이다. 이것은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초자아superego 개념의 근본적 특징이다. 초자아는 외상적으로, 무의미하게senseless 경험되는, 다시 말해서 주체의 상징적 우주 속에 통합될 수 없는 명령이다. 하지만 법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관습은 그것이 받아들여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공평성 전체whole of equity이다'라는 그 외상적인 사실(라클라우, 무페가 발전시킨 개념인 바 법이 우연성contigent에 기반한다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억압되어야만 한다. 법의 의미, 정의나 진리의 토대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이고 상상적인 경험을 통해서 말이다. <br />
<br />

그런데 카프카의 『심판』의 끝부분에 K와 신부가 나누는 대화의 끝부분에서도 이와 같은 공식화fornulation가 발견된다(“모든 것을 진실로서 인정해야 하는 건 아니오. 그저 필연적인 것이라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오”). 따라서 억압되는 것은 법의 모호한obscure 기원이 아니라, 법은 진실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필연적인 것으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법 속에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게 하는 필연적이고 구조적인 환영은 전이transference의 메커니즘을 나타낸다. 전이는 법의 외상적이고 비일관적이며inconsistent 어리석은 사태 이면에 진리와 의미가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즉 전이는 믿음의 악순환을 가리킨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이유는 이미 믿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가령 파스칼의 내기wager(신에 존재에 대한 내기의 합리성)에 대한 단상을 생각해보자. 파스칼의 대답은 이러하다. “이성적인 논증은 접어두고, 그저 이데올로기적인 의식ritual에 네 자신을 맡기고, 무의미한 제스처를 반복해서 무뎌져라. 그리고 마치 네 자신이 이미 믿고 있다는 듯이 행위하라act. 그러면 믿음이 저절로 생길 것이다.” 이데올로기적 전향conversion을 얻기 위한 그러한 절차는 카톨릭에만 국한되지 않고 보편적으로 적용되는데, 가령 ‘내기’라는 주제는 마르크스주의에도 적용된다(부르주아 지성인은 부르주아적 편견에 샤로잡혀 있고 노동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믿을 수 없다. 그는 우선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해야 하고, 자신의 쁘띠 부르주아적인 편견과 정념을 진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는 자신들이 마치 노동계급의 사명을 믿는다는 듯이 행동했고 당에 열성적이 되었다. 그들은 믿음에 충만한 사람이 되었다). <br />
<br />

이러한 파스칼의 ‘관습’custom을 평범한 행동주의적 지혜(믿음의 내용은 행동에 의해 조건지워진다)와 구별시켜주는 것은 믿음 전의 믿음이 갖는 역설적인 위상이다. 관습을 따르면서 주체는 그것을 알지 못한 채로 믿는 것이다. 즉 파스칼의 관습에 대한 독해에서 행동주의자들이 놓치고 있는 점은 외재적인 관습이야말로 주체의 무의식을 지탱하는 물질적 토대라는 중요한 사실이다. 마렉 카니에우스카Marek kaniewska의 영화 &lt;다른 나라Another country&gt;의 공로는 ‘그것을 모른 채로 믿는 것’의 불안정한 지위를 공산주의적 전향과 관련해서 지적했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두 캠브리지 대학생을 주인공으로 하는데, 이 둘은 각각 쥬드라는 공산주의자와 가이라는 부유한 동성애자이다. 쥬드는 가이의 매력에 반응이 없는 유일한 학생이었고, 정확히 그 이유로 인해 쥬드는 가이의 전이적 동일시transferential identification의 대상이 된다. 영화의 대단원을 보자. 숨막히는 향락에 대한 두 가지 반응은 쥬드의 포기renunciation, 즉 그의 공개적인 공산주의 선언과 가이의 극도의 쾌락주의이다. 가이의 쾌락주의는 파국을 맞게 되고 가이는 자신이 지탱할 수 없는 상황을 해소하는 열쇠가 쥬드와의 전이적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는 두 가지 세부묘사에 의해 드러나는데, 첫 번째 상황은 가이가 쥬드야말로 이성애주의와 동성애에 대한 비하 등 부르주아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요컨대 가이는 자신의 비일관성, 자신의 결여lack를 전이시킬 주체를 잡은 것이다. 두 번째 상황에서 그는 쥬드에게 전이의 메커니즘을 폭로한다. 즉 가이는 쥬드가 마르크스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인 게 아니라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에 마르크스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즉 쥬드는 마르크스가 역사의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지식의 담지자bearer라고 미리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마르크스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특징 때문에 가이는 쥬드에 대한 전이로부터 쉽게 헤어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태는 정반대이다. 이러한 두 가지 특징은 그저 어떻게 “속지 않는 자가 길을 잃는les non-dupes errent”(라캉)지를 확인시켜 줄 뿐이다. ‘알고 있는자’인 가이는 전이에 빠져있다. 쥬드에 대한 비난은 오직 쥬드와 그의 관계가 전이적인 관계(전이가 작동하기 때문에 분석가analyst에게서 나약함과 실수를 발견하면서 즐거움을 찾는 분석주체analysand의 경우처럼)라는 배경 하에서만 의미를 돌려받는다. 가이가 전향하기 직전 극도의 긴장 속에 있음은 쥬드에 대한 그의 응수에서 잘 드러난다(“나 같은 놈에게 완전한 경솔함만큼 좋은 위장이 또 있을 것 같아?”). 이는 인간적인 차원에서만 특별히 드러나는 기만deception에 대한 라캉의 정의이다. 인간은 진실 그 자체를 이용해서 타자를 속인다. 모두가 가면 뒤에서 진실한 얼굴을 찾는 세계에서 그들이 길을 잃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실 그 자체의 가면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가면과 진실을 일치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이 일치는 동료들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커녕 상황을 견딜 수 없이 만들고 말 것이다. 성공적인 의사소통의 필수조건sine qua non은 외관과 그 감추어진 이면 사이의 최소한의 거리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열려진 유일한 문은 초월적인transcendent ‘다른 나라’가 존재하리라는 믿음과 공모 속으로 도피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면과 실제 얼굴 사이에 근본적인 간극gap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br />
<br />

<br />

알튀세르의 비판가, 카프카<br />
<br />

따라서 상징적 기계(자동운동)의 외면성은 단순한 외면성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내적 인 신념이 미리 무대화되고 결정되는 장소이다. 우리는 종교적인 의례ritual의 기계에 복종하면서 이미 그것을 알지 못한 채로 믿는다. 우리 믿음은 이미 외면적인 의례 속에 물질화되어 있는 것이다. 파스칼의 신학에서 가장 전복적인 핵심은 바로 이러한 내밀한 신념과 외부적인 기계 사이의 단락short-circuit이다. 물론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에 관한 이론에서 파스칼적인 기계의 가장 현대적이고 정교한 판본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 이론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와 이데올로기적 호명interpellation 사이의 연관을 사유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는 약점을 갖는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어떻게 자신을 내면화internalize할 수 있으며 어떻게 어떤 대의cause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믿음의 효과를 산출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국가장치들의 외부적인 기계는 그것이 오직 주체의 무의식적인 경제 속에서 외상적이고 몰상식한 명령으로 체험되는 한에서만 그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그저 이데올로기의 상징적 기계를 의미meaning와 진리의 이데올로기적 체험으로 내면화시키는 이데올로기적 호명 과정에 대해서만 말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파스칼로부터 이러한 내면화는 구조적 필연성에 의해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배울 수 있다. 거기엔 항상 무의미성과 외상적인 비합리성의 오점과 잔여가 붙어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잔여물은 주체의 이데올로기적 명령에 대한 복종을 방해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법에 무조건적 권위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이 무의미한 외상의 통합되지 않는 잉여이며, 이는 이데올로기에 고유한, 이데올로기적 향락[단어를 분절해서 보면 의미의 즐김이라는 뜻도 가진다]joui-sense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 의미 속의 쾌락enjoyment-in-sense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잉여이다. <br />
<br />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향락에 대해 카프카는 기계와 그것의 내면화 사이의 간극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줌으로써 일종의 알튀세르 비판을 미완성으로avant la lettere 전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카프카의 비이성적인 관료제는 바로 기괴하고 몰상식하고 맹목적인 장치들, 바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인 것이다. 어떠한 동일화, 어떠한 인정 - 어떠한 주체화- 도 발생하기 이전에 주체가 대면하게 되는 국가 장치 말이다. 카프카적 주체는 신비스런 관료적 존재자entity(법, 城)에 의해 호명된다. 이는 특이하게도 동일화/주체화 없는 호명이다. 카프카적 주체는 동일화할 만한 어떤 특징을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는 주체로서, 그는 큰 타자the Other의 부름이 지닌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호명에 관한 알튀세르의 이론에서는 간과된 차원이다. 동일화, 즉 상징적인 인정recognition/오인에 사로잡히기 이전에 주체(＄)는 타자의 중심에 있는 욕망의 역설적인 대상-원인 a, 타자 속에 감추어져 있다고 가정된 이 비밀을 통해 타자의 덫에 걸려드는 것이 아닌가? 바로 이것이 라캉의 환상 공식(＄◇a)이다. <br />
<br />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현실 자체를 구조화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꿈과 현실의 대립 사이에서 환상은 현실 쪽에 위치한다는 라캉의 기본적인 테제로부터 출발하자면, 환상은 이른바 ‘현실’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토대이다.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에 대한 세미나에서 라캉은 이를 ‘불타는 아이’에 대한 유명한 꿈을 해석하면서 발전시킨다. 이 꿈에 대한 통상적인 해석은 꿈의 기능 중 하나가 꿈꾸는 사람이 잠을 연장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는 테제에 있다. 현실로부터 외부 자극(알람, 노크소리, 연기냄새 등)에 노출되면 잠자는 이는 잠을 연장하기 위해 즉석에서 그 자극적인 요소를 포함한 꿈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캉의 독법은 정반대이다. 주체는 현실 속으로 깨어나지 않도록 잠을 연장시킬 만한 꿈을 구성해낸다. 그러나 그가 꿈속에서 조우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의 욕망의 현실, 라캉적 의미에서 실재Real이다. 위의 경우, 아버지의 근본적인 죄의식을 함축하는 “제가 불타는 것이 보이지 않나요?”라는 비난이, 외적 현실 자체보다 끔찍한 실재에 해당한다. 그는 꿈 속에서 예고되는 그의 욕망의 실재 속으로 깨어나지 않도록, 자신의 무지를 유지할 수 있도록 잠에서 깨어나, 이른바 현실 속으로 도피한 것이다. 현실은 우리가 욕망의 실재를 은폐할 수 있도록 해주는 환상-구성물이다. <br />
<br />

이는 이데올로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그것은 현실 자체의 토대로서 기능하는 환상-구성물이다.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사회관계들을 구성하는 환영illusion은 어떤 감당할 수 없는, 실재적인, 불가능한 중핵(라클라우, 무페에 의해 적대antagonism이라고 개념화된 것, 상징화될 수 없는 외상적인 사회 분열)을 은폐한다. 이데올로기의 기능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처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자체를 어떤 외상적이고 실재적인 중핵으로부터의 도피처로 제공하는 것이다. <br />
<br />

이 논리를 설명하기 위해 다시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6장)을 참조해보자. 라캉은 장자의 그 유명한 꿈(호접지몽)을 언급한다. 장자는 스스로 나비가 되는 꿈을 꾸고 난 뒤, 내가 장자가 되는 꿈을 꾼 나비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는데, 라캉은 이 질문은 두 가지 이유에서 정당하다고 논평한다. 첫째로, 그것은 장자가 바보가 아니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라캉은 바보를 자기 자신을 자신과 무매개적으로 동일시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기 때문이다. 바보는 자기 자신과 변증법적으로 매개된 거리를 취할 수 없는 사람이다. 예컨대 자기 자신이 왕이라고 믿는 왕, 자기가 왕인 것이 자신도 속해 있는 상호주관적 관계의 네트워크에 의해 왕권이 상징적으로 위임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직접적인 속성 때문에 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라캉적 의미에서 바보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니다. 만약 이것이 다라면 주체는 그의 내용 전체가 타인들의 상호주관적인 관계들의 상징적 네트워크에 의해 마련된 하나의 공백, 빈 자리로 환원되어버릴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만약 이것이 전부라면 라캉의 결론은 주체의 근본적 소외일 것이다. 그러나 라캉의 후기 작업의 기본 테제는, 소외를 야기하는 상징적 네트워크인 큰 타자the big Other 바깥에서 어떤 내용들을 얻을 수 있는, 즉 일종의 실정적인 일관성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주체에게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다른 가능성은 환상에 의해 제공된다: 즉 주체를 환상의 대상과 등치시키기.(국역본에서는 누락됨) 스스로 장자가 되는 꿈을 꾸는 나비라고 생각할 때 장자는 어떤 점에서는 옳다. 그는 상징적 현실에서 장자였지만, 욕망의 실재 속에서 그는 나비였다. 나비가 되는 것은 상징적 네트워크 바깥에서 그의 실정적 존재를 일관되게 유지시켜준다. 테리 길리엄의 영화 &lt;브라질&gt;에서 우리는 그 반향을 발견할 수 있다. 언뜻 보기에 여기에서 만나는 것은 단순한 대칭적 전도일 수 있으나, 라캉이 지적한 것처럼 이러한 대칭적 관계는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장자는 깨어나서 자신이 나비가 된 꿈을 꾼 장자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꿈 속에서 그가 나비일 때는 깨어났을 때, 즉 그가 스스로 장자라고 생각했을 때는 스스로에게 물을 수가 없다. 알퐁스 알리아스에서 감변무도회의 예.<br />
<br />

<br />

<br />

현실의 토대로서의 환상<br />
<br />

이러한 문제는 우리는 오직 꿈 속에서만 잠을 깨우는 실재에, 즉 우리의 욕망의 실재에 다가갈 수 있다는 라캉의 테제로부터 접근해야 한다. 라캉이 이른바 현실이라는 것의 최종적 토대는 환상이라고 말할 때, 이는 절대로 삶이나 현실이 한낱 꿈이거나 환영illusion이라는 의미로 이해될 수 없다. 가령 일반화된 환영의 예로 SF소설에서 모두가 로봇인 세계와 에셔의 두 손이 서로를 그리는 유명한 드로잉을 떠올려보자. 라캉의 테제는 이와 달리 환영적인 반영이라는 보편적인 유희로 환원시킬 수 없는 끝까지 존속하는 잔여물, 견고한 중핵이 항상 남아 있다는 것이다. 소박한 리얼리즘과는 달리, 라캉은 우리는 오로지 꿈을 통해서만 이 견고한 중핵인 실재에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현실 자체 속에서 행위 양태를 결정하는 환상-틀fantasy-framework로의 접근은 오직 꿈 속에서만 가능하다. 가령 이데올로기를 진짜 현실을 가리는 꿈과 같은 구성물로 간주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데올로기적 스펙터클을 제거하고 이데올로기적 꿈을 깨뜨리려는 시도는 허사이다. 이데올로기적 꿈의 위력을 깨뜨리는 유일한 방편은 꿈 속에서 자신을 알리는 욕망의 실재와 대면하는 것이다. <br />
<br />

반유태주의 경우. 이른바 반유태주의적 편견을 벗어나서 유태인들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유태인의 이데올로기적 형상에 어떻게 우리의 무의식적 욕망이 투자되었는지를 대면해야 한다. 객관적으로 유태인이 다른 사람들을 재정적으로 착취한다든지 소녀들을 유혹한다든지 하는 사실을 확증한다고 해도, 이것들은 반유태주의의 실제적인 뿌리와는 관련이 없다. 가령 라캉이 든 예로 병리적으로pathologically 질투심이 많은 남편에 대한 라캉의 명제를 생각해보자. 남편이 자신의 질투심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한 사실이 정말이더라도, 그의 질투가 병리적이고 편집증적paranoid 구성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따라서 반유태주의에 대한 제대로 된 대답은 ‘유태인은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게 아니라 ‘유태인에 대한 반유태적인 관념은 유태인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는 것이다. 유태인의 이데올로기적 형상은 우리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체계의 비일관성을 봉합stitch up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 이전의 일상생활의 수준을 고려하는 것으로는 이데올로기적 편견을 불식시킬 수 없다. 예컨대 1930년대 후반 독일의 전형적인 개인을 예로 들어보자. 반유태주의적 선전물의 홍수에서 살고 있는 그는 집에 돌아오면 선량한 이웃인 [유대인] 스턴씨를 만나 친하게 지낸다. 과연 이러한 일상의 경험은 이데올로기적 구성물로 환원될 수 없는 저항을 제시해 주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그것과 현실 사이에 아무런 대립도 느끼지 못할 때,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가 현실 자체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 양태들을 결정하는데 성공할 때에만 비로소 우리를 사로잡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예를 든 독일인의 경우, 만약 그가 훌륭한 반유태주의자라면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형상과 일상적인 경험의 간극, 어긋남discrepancy 자체를 반유태주의를 위한 논증으로 돌릴 것이다. 즉 오히려 자신의 본성을 숨기는 이중성이야말로 유태인의 근본적인 습성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더욱 무섭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처음 보기에 모순되는 듯한 사실도 이데올로기 자체를 위한 논증으로 기능할 때 비로소 이데올로기가 정말로 성공을 거두는 것이다. <br />
<br />

<br />

<br />

잉여가치와 잉여향락<br />
<br />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와의 차이이다. 주류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이데올로기적 응시는 사회적 관계의 총체totality를 보지 못하는 부분적partial 응시이다. 이와 달리 라캉의 관점에서 이데올로기는 오히려 그것[이데올로기] 자신의 불가능성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설정된 총체totality을 지시한다. 이는 물신주의에 대한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개념을 구별해주는 차이와 동일한데, 마르크스주의에서 물신은 사회적 관계들의 실정적 네트워크를 은폐하는 반면, 프로이트에서 물신은 상징적 네트워크가 그 주변으로 분절되는articulated 결여(거세)를 감춘다. <br />
<br />

실재를 ‘항상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으로 간주하는 이상, 또 하나의 중요한 차이를 연역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탁월한 이데올로기적 절차는 거짓된 영원화와/나 보편화이다. 이때 이데올로기 비판은 이러한 거짓 보편성을 폭로하고 일반적인 인간 이면에서 부르주아적 개인을, 보편적인 인간 권리 이면에서 자본주의적 착취를 가능하게 하는 형태 등을 탐색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라캉의 입장에서 우리는 가장 ‘교활한’ 이데올로기적 절차를 영원화의 정반대 쪽, 즉 성급한 역사화에서 발견해야 한다. 정신분석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상투적 비판, 정신분석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 핵가족 삼각형의 중요한 역할을 고수하는 것은 가부장적 가족이라는 역사적 형태를 보편적 인간 조건으로 변형시킨다는 비판을 생각해보자. 하지만 오히려 가족 삼각형을 역사화하려는 시도는 가부장적 가족을 통해 예고되는 견고한 중핵을, 법의 실재를, 거세의 바위를 회피하려는 시도가 아닌가? 성급한 역사화는 우리로 하여금 다양한 역사화/상징화를 관통하여 동일한 것으로 돌아오는 실재적인 중핵을 보지 못하도록 한다. 이는 20세기 문명의 도착적perverse 이면을 가장 날카롭게 보여주는 현상인 강제수용소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현상을 구체적인 이미지와 결부시키고 구체적인 사회질서의 산물로 축소시키려는 시도들은 모든 사회체계 속에서 항상 동일한 외상적 중핵으로 돌아오는 우리 문명의 실재를 외면하려는 시도들인 것이다. <br />
<br />

결국 마르크스주의는 상징화를 비켜가는 실재의 잔여물, 잉여대상을 설명하지 못했다. 이는 잉여향락이라는 라캉의 개념이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라는 개념을 따른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놀라운 사실이다. 잉여가치 개념이 잉여향락의 구현물인 라캉의 대상 a(objet petit a)의 논리를 예견한다는 증거는 자본론 3권에서 마르크스가 사용한 공식을 통해 제공된다. “자본의 한계는 자본 자신, 다시 말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다.” 이 공식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읽힐 수 있다. 우선 통상의 역사적-진화론적 독법은 그것을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너무 조일 정도로 자라나면 이따금씩 허물을 벗는 뱀의 은유를 대략적으로 따른다. 생산력이 발달해 생산관계의 틀이라는 사회적 외투보다 더 커지는 시기가 온다.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처음엔 생산력의 급속한 성장을 가능케 하는 것이지만 어떤 시점에서 그것의 발전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산력이 자신의 틀보다 더 성장하여 새로운 사회관계의 형태를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마르크스 자신은 이러한 단순한 진화론적 발상과는 거리가 멀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가 생산과정이 자본에 포섭되는 형식적 과정과 실질적 과정을 다루는 단락을 읽어보는 것으로 족한데, 형식적formal 포섭은 실질적real 포섭을 앞선다. 자본은 먼저 자신이 설립한 생산과정을 그대로 포섭하고 그 이후에야 생산과정과 생산력이 조화를 이루도록 생산력을 구현하면서 단계적으로 변화시킨다. 이렇게 보면 위에서 언급한 단순한 발상과는 대조적으로 생산관계의 형식이 생산력의 발달, 즉 내용의 발달을 추동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생산력의 더 나은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는 시점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경우,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일치하는 때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바로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가 이전의 다른 생산양식과 다르다. 이전의 생산양식의 경우, 우리는 사회적 생산과 재생산이 고요하게 운동하는 조화로운 시기에 관해 말할 수 있으나, 자본주의의 경우 이러한 모순, 힘/관계의 불협화음이 그 개념 자체(사회적 생산양식과 개인적, 사적 소유양식 사이의 모순)에 포함되어 있다. 요점은 자본주의를 영원히 발전하도록 추동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내재적 한계, 내적인 모순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정상적인 상태는 그 자신의 존재 조건들을, 자신의 한계를 영원히 혁명화하는 것이다. <br />
<br />

잉여향락을 규정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역설이다. 이는 단순히 어떤 정상적이고 근본적인 향락에 붙은 잉여분이 아니다. 왜냐하면 향락 그 자체는 오직 잉여 속에서만 나타나며, 구조적으로 항상 '과잉'excess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이 잉여분을 빼버리면 향락 자체를 잃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잉여가치와 욕망의 대상-원인인 잉여향락 사이의 상동관계이다. 근본적인 무능력의 외적 형태로서 - 무매개적 이행, 한계와 과잉, 결여와 잉여의 일치(국역본에서 누락) -의 과도한 힘을 통해서 자신을 해소하고 재생산하는 근본적 장애물의 위상학은 바로 라캉이 말한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결여를 구현하는 잔여물인 대상 a의 위상학인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마르크스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정치경제학 비판』서문에서 통속적 진화론적 변증법의 관점으로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관해 기술하면서 마치 자신이 그것을 모른다는 듯이 말한다. 이러한 진술이야말로 어떻게 마르크스가 잉여 향락의 역설에 대처하지 못했는지를 감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닌가? 역사의 아이러니한 복수는 오늘날 이러한 진화론적 변증법에 부합하는 듯이 보이는 사회, 현실 사회주의로 나타난다. <br />
<br />

<br />
<br />

1) 물신주의 : 일반적으로 인간의 생산물이 독립적인 실존을 갖는 것으로 되고, 알게 모르게 그 창조자로 돌아가는 것을 억압하게 되는 과정. 종교는 마르크스가 비판했던 물신주의의 첫 번째 형태이다. 그는 기본적으로 신과 같은 종교적 존재자를 인간에 의해 창조되었으나, 그들의 눈에 독립적인 형태를 갖게 된 것으로 결론짓는다. 신들은 다른 세계의 힘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 나타난다. 인간의 자기소외 또는 물신주의의 가장 중요한 세속적인 근원은 상품 생산에 의해 나타난다. 상품들, 인간에 의해 창조된 상품들은 그들의 눈에 독립적이고, 연결되지 않았으며, 때로는 억압적인 형태를 갖는다. 노동과 노동의 산물 간의 관계는 전도된다. James Russell, Marx-Engels dictionary, Conn. : Greenwood Press, 1980, p. 38.&#160;<br />
&#160;
<br />

2)전이übertragung는 정신분석에서 무의식적인 욕망이 어떤 형태의 대상관계 - 특히 분석적 관계 -의 틀에서, 어떤 대상에 대해 현실화되는 과정을 가리킨다. 거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확연히 체험되는 유아기적 원형의 반복이다. 분석가들이 별다른 수식어 없이 전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대개 치료 과정에서의 전이를 말한다. 전통적으로 전이는 정신분석 치료의 문제가 드러나는 장소로 여겨지고 있다. 그것의 정착, 그것의 양태, 그것의 해석, 그것의 해결이 정신분석 치료의 특징을 구성하는 것이다. 장 라플랑슈. 장 베르트랑 퐁탈리스, 『정신분석 사전』, 임진수 옮김, 열린책들, 2005, p. 397. 프로이트는 처음에 전이를 억압된 기억의 회상을 방해하는 저항, 파괴되어야 하는 치료에의 장애물로 간주했으나 점차 견해를 바꾸고 긍정적인 요소를 파악했다. 라캉은 전이의 상상적 측면과 상징적 측면을 구분하고, 상징적 측면(반복)은 주체의 역사의 기표를 드러냄으로써 치료의 진전을 돕는 반면 상상적 측면(사랑과 증오)은 저항으로 작용한다고 본다. 또한 라캉은 전이를 안다고 가정된 주체 개념으로 이해한다. 분석주체가 분석가에게 투사하는 이러한 전이는 분석과정 전체의 버팀목이 된다. 딜런 에반스, 『라캉 정신분석 사전』, 김종주 옮김, 인간사랑, 1998, pp. 339~345.<br />
&#160;
3) 불타는 아이에 대한 꿈 ; 한 아버지가 아이가 죽은 후, 커다란 촛불들로 둘러싸여 아이의 시신이 놓인 방 옆에서 잠시 잠을 잔다. 이때 아버지는 아이가 침대 옆에서 자신의 팔을 잡고 비난조로 속삭이는 꿈을 꾼다. “아빠, 제가 불타는 것이 보이지 않나요?” 꿈에서 깨어보니 시신이 안치된 방 안에서 그곳을 지키던 노인은 잠이 들어 엎드려 있고 넘어진 촛불 옆에 아이의 수의와 한쪽 팔이 타고 있었다.&#160;&#160;
&#160;
4) 자본주의에서의 노동과정은 자본의 자기가치증식과정의 도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노동의 자본에의 형식적 포섭이다. 이전의 다양한 생산과정은 자본주의적 생산으로 전환되고, 상품소유자(노동력 소유자)의 생계는 화폐소유자(자본가)와의 계약에 의존한다. 자본가는 노동의 질과 강도의 정상적 기준을 지키도록 신경을 쓰며, 노동이 산출하는 잉여가치를 증가시키기 위해 노동시간을 가능한 한 연장하려 한다. 자본은 이미 수립된 가용한 노동과정을 인수(포섭)한다. 이 점에서 자본가의 관리 하에서의 임노동은 주인의 지배 하에서의 노예노동 및 장인의 규제 하에서의 도공의 노동과 단지 형식적으로만 차이를 지닌다. 형식적 포섭에서의 생산력이 점차 그 양적 측면에서 발전하고, 노동시간 연장을 통해 유지되던 잉여가치의 생산이 노동일투쟁에 의해 한계에 도달해서 등장하는, 특유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대규모 산업)에서는 다양한 생산행위자의 상황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노동방식과 노동과정 전체의 현실적 성격을 혁신한다. 이것이 실질적 포섭이다.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이 노동의 자본에의 형식적 포섭의 물질적 표현이며,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은 실질적 포섭의 물질적 표현으로 간주될 수 있다. 절대적 잉여가치는 상대적 잉여가치에 선행한다. 이 두 형태의 잉여가치에 상응하는 것은 자본에 노동이 포섭되는 두 가지 구분되는 형태의 자본주의적 생산이다. 두 가지 포섭형태에 대한 구분은 칼 맑스, 『경제학노트』, 김호균 역, 이론과 실천, 1988, pp. 88~106에서 직접적 생산결과에 관한 제과정 참조. http://waam.net/bbs/zboard.php?id=philosophy_sem&amp;no=48<br />
<br />
&#160;
5) "나는 안다. 하지만... " 이것은 바로 부인disavowal의 공식이다. 프로이트는 외상적 지각의 현실성을 깨닫는 데 대한 주체의 거부를 구성하는 방어의 특정 양식을 나타내기 위해 Verleugnung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그는 이 용어를 여성의 성기를 봄으로써 외상적 지각이 되는 거세 콤플렉스와 연결한다. 그리고 이 경험과 절편음란증은 여성의 거세에 관한 아이의 공포에 기인한다. 어머니의 팔루스가 결여되어 있음을 알게 된 절편음란광은 이러한 결여를 부인하고 팔루스의 상징적인 대체물로서 물신적 대상을 찾아낸다. 라캉은 이 작용을 억압 및 폐제와 구별하면서 부인을 성도착증 전체의 근본적인 작용으로 만든다. 딜런 에반스, 『라캉 정신분석 사전』, 김종주 옮김, 인간사랑, 1998, pp. 157~158.<br />
<br />
<br />
&#160;
<br />

<br />

<br />
<br />

<br />
<br />

<br />
<br />

<br />

<br />
]]></description><image><url>http://image.aladin.co.kr/product/35/1/cover150/8974185385_1.jpg</url><link>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74185385</link></image></item></channel></rss>
